•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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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유대인 군목인 밀턴 로젠이 1950년 12월 부산에 왔다는 점을 소개했는데, 그가 유대인 군목으로 전쟁에 참가했다는 점은 미군병사들 가운데 유대인 병사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가 12월 25일자로 쓴 글에 보면 12월 25일 이전에 부산으로 왔고 부산에 체류한 기간은 2주 정도라고 한다. 부산에 대한 그의 인상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야간에 이동할 경우 부랑자를 만날 수 있고, 도둑이 많다고 했다. 심지어는 천개의 눈을 가졌어도 도둑맞기 일쑤라고 했다. 또 부산은 어두운 도시라고 썼다. 전기 보다는 등유나 석유 램프를 많이 쓰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점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시 부산 인구의 급속한 증가로 전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특히 로젠은 한국은 사회적으로 도덕이나 사회규범이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가 많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점은 수긍하기 어렵다. 동성 간의 친밀한 교류를 동성애자로 오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짧은 기간 부산에서 체류했던 로젠은 부산을 떠나 원산으로 이동하게 된다. 중공군이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로젠은 이렇게 썼다. “중공군이 개입했고, 우리가 전선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솔직히 원산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이제 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곳의 군목이 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공군이 개입하게 된 것은 10월 19일이었지만 사실은 이보다 앞서 2일 마오쩌둥이 출병을 결심했고, 10월 4-5일의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출병을 결정하였고 이를 김일성에게 통보하였다. 이런 결정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이미 이전부터 전쟁에 개입을 준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미군이 38선을 돌파하였기 때문에 중국이 동북의 안전을 위해 불가피하게 참전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미군이 38선을 돌파한 것은 10월 3일이었고, 중국은 이보다 앞서 전쟁 개입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의 개입은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전세가 시시각각으로 변화되었고, 전투병력이 후방에서 안주할 수 없었기에 로젠 또한 부산을 떠나 원산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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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군목 밀턴 로젠에 대한 기록

 

여기서 잠시 6.25 전쟁의 전개과정을 소개하면, 전쟁 과정은 흔히 네 시기로 구분하는데, 6월 25일 인민군이 전면적으로 남침하여 4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경상도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 국토를 점령한 시기가 첫 번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서울을 장악한 인민군은 바로 남하하지 않고 3일 동안 서울에 체류했는데, 이 기간 동안 국군은 전력을 정비 할 수 있었고, 낙동강 전선을 강고하게 구축하여 인민군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다. 한편 유엔안전보장 이사회는 북한의 남침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미국 주도 아래 유엔군 결성을 승인하여 유엔군의 참전이 이루어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시기는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을 계시하여 성공하고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넘어 북진하여 북한 지역으로 진격하였다. 중국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 전쟁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는데,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이 북진을 강행하여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였고 10월 26일에 이르러 압록강 인근까지 진격하였다. 세 번째 시기는 북한의 요청을 받은 중국군 13병단의 압록강 도하와 전쟁에 참전하면서 전세가 역전된 시기였다.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로 유엔군과 국군은 평양, 흥남 등지에서 철수하게 되고, 서울이 중국군에게 빼앗기게 되자 이른바 ‘1.4후퇴’라는 또 하나의 시련을 겪게 된다. 이후 국군이 다시 되찾은 뒤 38도선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시기는 휴전회담이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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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부산에 온 유대인 군목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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