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오면 속세를 떠나서 때 묻은 마음이 정결하게 되고 세탁이 되는 것 같다. 그럴 때면 야산이 아니라 깊은 산에 은둔하며 사는 스님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어쩌면 나는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종교적 성향으로는 승려가 되었을지 모른다. 물론 나는 사람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을 벗 삼아 살고 싶은 여린 순정이 있다. 아침에 계곡에 흘러가는 물소리를 듣고 일어나고 겨울이 되어 눈 덮인 산사의 절경을 바라보면 산 그 자체가 천국처럼 느껴진다. 사람들 틈 속에서 살다보면 문득 공허할 때가 있다.
그때 산을 찾는다. 너무 많은 사람들 틈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다보면 번뇌가 쌓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불면증에 시달린다. 그러나 산에만 가면 잠이 절로 온다. 설악산 오색그린야드나 지리산 화엄사 입구에 있는 한화 콘도 같은 곳에서 청명한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하면 그 날 밤, 아무 잡념도 없이 그냥 툭 떨어져 버린다.
그런데 너무 바쁘다 보니까 산에 자주 가지 못한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산을 찾으면 모든 스트레스와 시름을 다 잊어버리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 같다. 사실 나에게 있어서 산은 세속에 오염되지 않은 에덴의 모형이고 그림자이며 원형에 대한 갈망이다. 그래서 산을 오르면 나의 내면에서는 꼭 하나님을 찾아오는 것처럼 일치가 된다. 그런데 너무 바빠서 산을 자주 찾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다가 산에 가면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산에 와서’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죄송합니다 / 너무도 오랜만에 와서 / 마음이 때 묻다 보니 / 몸도 함께 때에 묻혀 / 이리도 오랜만에 왔습니다 / 부끄럽습니다 / 쉴 새 없이 전화하고 / 사람 만나느라 / 분주하기만 했던 지난 삶들이 / 경건한 당신의 품 / 출애굽기의 세계에 와보니 / 수줍기만 한 마음 / 견딜 수 없네요 /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 처음에 느꼈던 사랑 / 그 초심을 회복하여 / 다시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산을 자주 찾지 못하고 멀어지면, 나도 때 묻어가는 것은 아닌가, 세속화 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바쁘고 일이 많을수록 산을 자주 찾으려고 한다. 한 때 미국의 40대 남자들이 번듯한 직장을 버리고 산과 사막을 찾아 떠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물질만능시대를 살아가면서 때 묻지 않은 영성과 자연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것이 아닐까.
나 또한 대부분 군중 속에서 몸과 마음을 부딪치며 야성의 질주를 하며 살고 있지만 때로는 산에 와서 스스로 고독의 숲을 거닐어본다. 때로는 중세 사막의 수도사처럼 나만의 광야에 칩거해 본다. 나는 목회하면서 소원이 있다면 한 달이라도 깊은 산 계곡에 천막을 치고 자연인으로 살고 싶다. 아무도 없이 혼자 밥 해 먹고 빨래하고 시 쓰고 책 보면서, 하늘만 바라보고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물론 자연인으로 완전히 빠져버리면 안 되고 다시 활력을 충전 받아 생활 현장으로 돌아와야 하지만 말이다. 아, 오늘도 나는 영혼의 원형인 산을 오른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원초적 에덴의 신비 속을 걷는다. 산을 오르며, 영혼을 씻으며 도시와 멀리 떨어진 산 속에서 잃어버린 길을 찾는다.
그때 산을 찾는다. 너무 많은 사람들 틈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다보면 번뇌가 쌓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불면증에 시달린다. 그러나 산에만 가면 잠이 절로 온다. 설악산 오색그린야드나 지리산 화엄사 입구에 있는 한화 콘도 같은 곳에서 청명한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하면 그 날 밤, 아무 잡념도 없이 그냥 툭 떨어져 버린다.
그런데 너무 바쁘다 보니까 산에 자주 가지 못한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산을 찾으면 모든 스트레스와 시름을 다 잊어버리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 같다. 사실 나에게 있어서 산은 세속에 오염되지 않은 에덴의 모형이고 그림자이며 원형에 대한 갈망이다. 그래서 산을 오르면 나의 내면에서는 꼭 하나님을 찾아오는 것처럼 일치가 된다. 그런데 너무 바빠서 산을 자주 찾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다가 산에 가면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산에 와서’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죄송합니다 / 너무도 오랜만에 와서 / 마음이 때 묻다 보니 / 몸도 함께 때에 묻혀 / 이리도 오랜만에 왔습니다 / 부끄럽습니다 / 쉴 새 없이 전화하고 / 사람 만나느라 / 분주하기만 했던 지난 삶들이 / 경건한 당신의 품 / 출애굽기의 세계에 와보니 / 수줍기만 한 마음 / 견딜 수 없네요 /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 처음에 느꼈던 사랑 / 그 초심을 회복하여 / 다시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산을 자주 찾지 못하고 멀어지면, 나도 때 묻어가는 것은 아닌가, 세속화 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바쁘고 일이 많을수록 산을 자주 찾으려고 한다. 한 때 미국의 40대 남자들이 번듯한 직장을 버리고 산과 사막을 찾아 떠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물질만능시대를 살아가면서 때 묻지 않은 영성과 자연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것이 아닐까.
나 또한 대부분 군중 속에서 몸과 마음을 부딪치며 야성의 질주를 하며 살고 있지만 때로는 산에 와서 스스로 고독의 숲을 거닐어본다. 때로는 중세 사막의 수도사처럼 나만의 광야에 칩거해 본다. 나는 목회하면서 소원이 있다면 한 달이라도 깊은 산 계곡에 천막을 치고 자연인으로 살고 싶다. 아무도 없이 혼자 밥 해 먹고 빨래하고 시 쓰고 책 보면서, 하늘만 바라보고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물론 자연인으로 완전히 빠져버리면 안 되고 다시 활력을 충전 받아 생활 현장으로 돌아와야 하지만 말이다. 아, 오늘도 나는 영혼의 원형인 산을 오른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원초적 에덴의 신비 속을 걷는다. 산을 오르며, 영혼을 씻으며 도시와 멀리 떨어진 산 속에서 잃어버린 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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