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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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안준배 목사가 ‘한국문학 속의 우상과 구원’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기독교와 관계된 소설들을 평론한 것이다. 제도권에서 보면 삐딱한 시각으로 쓴 소설들이다. 발표 당시 교회와 교인들로부터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작품들이었다. 그들은 본질과 근원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들의 주장은 본질과 근원 그리고 원형 속에만 구원이 있고 제도화 정형화 화석화된 종교의 틀 안에는 우상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순교에 대한 논쟁이 치열했다. 순교 문제로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다가 교단이 나뉘는 일까지 생겼다. 이러한 사태가 소설가 김은국에게는 일부 제도권 교회들이 순교를 우상처럼 여기고 있다고 보여진 것이다. 김은국은 ‘순교자’라는 소설에서 순교적 영웅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신 목사와 같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고 거기에는 구원도 없다는 예언자적 선포를 했다.

이범선의 ‘피해자’ 역시 제도권으로 전락한 기독교와 교회를 희화화했다. 주인공 최요한은 독실한 장로의 아들로 자란다. 아버지 최 장로는 보육원을 운영하면서 고아들을 아들과 똑같이 사랑한다. 그런데 최요한이 자라 고아인 양명숙을 좋아하게 되자, 최 장로는 양명숙이 고아이기에 안 된다며 결혼을 반대한다. 이 사실을 안 양명숙은 상처를 받고 요정의 마담이 된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최요한을 다시 만난 양명숙은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최요한은 영원을 위해 그렇게 할 수 없다며 거절한다. 그러자 양명숙은 극단적 선택을 한다.

그때 모두 양명숙을 정죄한다. 최요한은 양명숙을 변호하며 이렇게 절규한다. “그녀를 죽인 사람들은 바로 당신들입니다. 그녀는 피해자입니다. 아니, 나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피해자입니다.” 결국 율법과 형식으로 찌들어 있는 제도권의 교회가 양명숙을 죽였다는 것을 고발한 것이다.

안 목사는 당시 소설을 통해 기독교 신앙과 교회가 우상이 되어서도 안 되고 우상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시를 통해 끊임없이 본질과 원형, 근원을 찾아가는 운동을 하는 것이다. 원래 시(詩)라는 글자를 한문으로 보면 말씀 언(言) 자에 관청 시(寺) 자가 합해져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시의 원래 뜻은 상제의 말씀을 모시는 신전, 곧 기독교적 표현으로 하면 성전이라는 말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시인은 신탁을 받아 왕에게 하늘의 뜻을 전달했다. 그러므로 시가 아무리 서정성과 심미성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 예언자적 메시지가 없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안준배 목사는 먼저 윤동주 시인의 저항성을 넘어 평화의 이상 세계를 갈망하는 예언적 요소를 소개했다. 그리고 김현승의 시를 논했고 김현승에 이어 필자의 시를 평론했다. 필자도 시의 예언성을 알기 때문에 심미적이고 서정적인 시를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 시에 예언성을 담으려고 노력한다.

이 책에 나온 모든 작품은 끊임없이 본향과 본질을 향해 돌아가는 아드 폰테스(ad fontes) 운동을 한 것이다. 그 본향과 본질을 붙잡는 곳에 진정한 구원이 있고, 그렇지 않고 제도권 안에 머물거나 그것만을 붙잡고 고집하는 사람들은 우상 속에 머무를 수도 있게 된다는 사실을 예언자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와 목회자는 항상 끊임없이 아드 폰테스, 신앙의 본질, 근원을 찾아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 자신이 우상이 되지 않고 오늘의 교회가 우상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본질을 붙잡지 않으면 우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다시, 본질로 돌아가자. 우리 안의 우상을 허물 때 한국교회 연합과 세움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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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칼럼] 본질이 아니면 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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