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우연히 바라본 아스팔트 위에 시선이 멈췄습니다. 아직 차가운 바람이 불고 생명은 꽁꽁 얼어버린 것만 같은 추운 날씨에 따뜻한 온기를 품은 보랏빛 꽃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아스팔트 위 차가운 시멘트로 뒤덮인 벽돌과 벽돌 사이 그 작은 틈 속에서 생명이 꿈틀 거리고 있었습니다. 작고 작은 틈 속에서 약하게만 보이는 꽃이 강인한 생명을 갖고 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약하게 보이는 식물이라도 강한 생명력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생명력은 어떨까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재되어 있는 거대한 생명력이 숨쉬고 있을 것입니다. 이 생명력이라는 것이 때로는 환한 빛 속에서 찬란하게 잉태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스팔트 위에서 본 보랏빛 꽃처럼 좁은 틈과 틈 사이에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세상은 빠르게 달리고 지나 그 속도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이 생명은 땅 속에서 자신의 때를 기다리며 숨을 쉬고 있습니다. 세상은 틈이 생기고 균형이 깨지면 곧 망할 것처럼 생각하지만, 오히려 생명력은 허물어진 틈 속에서 다시 피어나고 있습니다. 빈틈은 상대방의 공격을 허락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내 안에서 생명을 탄생시키는 문이 되기도 합니다. 이 말은 나의 약함이 오히려 주님을 의지해 새로운 생명을 낳는 힘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 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이름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도 아등바등하며 지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땅에서 생명을 주실 예수님을 기대하며 그 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예수님을 용납하지는 않았습니다. 틈과 흠이 있는 자만이 예수님을 용납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흠과 틈이 있는 자만이 예수님을 사모합니다. 흠과 틈이 있는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
하지만, 목회자로 섬기고 있는 나는, 성도의 흠과 틈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때로는 예수님을 나의 생명으로 여기지 못할 잘못을 범할 때도 있습니다.
청소년들을 위한 겨울 캠프를 섬기면서 흠이 많아 보이는 아이들, 틈이 많아 보이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멈추었습니다. 흠과 틈이 많은 저 아이들의 깊은 내면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청소년들 안에 있는 생명이 보이는 순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말씀을 계속해서 전했고, 기도회를 통해 아이들의 틈 속에 있는 생명이 발현되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긍휼과 은혜로 생명이 살아났습니다. 청소년 캠프뿐만 아니라 장년들을 위한 세미에서도 고통의 틈이 많고, 아픔의 흠이 있는 사람들의 생명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깊은 틈과 거친 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바로 “나”였습니다. 그리고 나의 틈과 흠을 있는 그대로 용납해주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내가 받은 용납과 사랑은 내가 하는 사랑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고 큰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무 자주, 쉽게, 그 사랑을 잊으며 다른 사람 용납하기를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까이 있는 공동체, 자녀 심지어 배우자까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제, 2023년 1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올해는 한 걸음 더 나아가며 용납하는 자로 살기를 바랍니다. 내가 100만큼의 틈을 용납 받았으니, 다른 사람의 10만큼의 틈을 용납하며 생명을 살리는 자로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2023년을 마무리 할 때는, 내 속에 ‘사랑의 흔적’ ‘용납의 흔적’이 자리잡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