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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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가정보원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수사 중인 민주노총 조직국장이 북한 공작금 수수혐의 등으로 재판받는 모 목사와 10여 차례 통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그 목사는 북한공작원 리광진과 접촉했는데, 2015년 4월 쿠알라룸프르에서 미화 1만8900달러의 공작금을 받았고, 또 다른 목사와 함께 북한 공작원과 회합, 통신하고 북한체제를 찬양하고 선전한 혐의로 체포된 인물이라고 한다. 문제는 목사들 가운데서도 공산주의 체제를 찬양하고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공작금을 수수하는 등 간첩행위를 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한 목사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015년 12월 기소되어 2017년 징역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앞의 모 목사는 북한 공작금 관련 기소가 늦어져 현재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고 한다(조선일보, 2023. 1. 25). 이런 친북 공산주의자는 한국교회에서 여러 차례 출몰한 일이 있다. 

 

  조선 공산당은 1918년 6월 25일 러시아의 하바로프스코에서 조직되었고, 1819년 4월 25일에는 해삼위(海參崴)에서 고려공산당을 조직했는데, 그 책임자가 이동휘(李東輝, 1873-1935)였는데, 그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이였고 감리교회 전도사였다. 그때는 블라디보스토크를 해삼위라고 불렀다. 1917년 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해삼위로 건너간 그는 볼셰비키에 가담한 전력이 있고, 7월 초에는 ‘독일 제국의 밀정’으로 오인되어 케렌스키 임시정부 헌병대에 체포되어 수감된 일도 있다. 1919년 8월 말 중국 상해로 갔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선임되었는데,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과 충돌했다.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이동휘는 김구에게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김구는 이를 제3국가에 의탁하는 것으로 보아 거절했다고 한다.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코바에서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열렸는데, 극동인민대표회의(極東人民代表大會)라고도 불리는 이 회의는 코민테른 국제회의였다. 이 대회는 “약소민족은 단결하라”는 표어를 내걸고, 동아시아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과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최된 회의였다.

 

  이 회의에 한국인으로는 김규식, 김단야, 나용균, 박헌영, 여운형, 이동휘, 임원근 등이 참석했는데, 김규식과 여운형(1886-1947)은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김규식은 새문안교회 교인이었고, 여운형은 승동교회 출신이었다. 특히 여운형은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서울 인사동의 승동교회 전도사로 일한 적이 있고, 1911년부터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한 일도 있다.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다시 승동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기독교신앙과 무신론 공산주의가 어떻게 병립할 수 있을까? 양자 중 어느 하나에 철wj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일성(金日成)과 김일성의 가계가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金亨稷, 1894-1926)은 서북지방에서 이름난 장로교장로인 강돈욱의 사위였고, 장인의 도움으로 숭실학교에서 수학한 기독교신자였다. 그가 자식들에게도 기독교 신앙을 가르쳤을 것이다. 강돈욱은 평양의 하리교회가 1905년 설립한 창덕학교 교장을 지냈는데, 김일성이 창덕학교에서 2년 간 수학 할 때 손자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姜盤石, 1892-1932)은 칠곡교회에 출석하며 성장한 교회의 장로의 딸이었고, 오빠 강진석은 장로교 목사였다. 김일성을 도와 공산정권을 수립하고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민주당 당수, 그리고 기독교회를 탄압했던 어용조직 ‘기독교도연맹’ 위원장을 지낸 강양욱은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의 6촌이었다. 강양욱은 후(後)평양신학교 3회로 1943년 신학교를 졸업했다. 김일성은 기독교적 환경에서 성장했고 만주에서는 감리교 손정도(孫貞道, 1882-1931) 목사의 북산교회에 출석하며 손정도 목사의 도움을 받았다. 손정도 목사와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은 막역한 사이였다. 손정도 목사가 선교사 신분으로 길림에서 일할 때 김일성은 2년 여 동안 손정도 목사의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 또 김일성이 투옥되었을 때는 손정도 목사가 뇌물을 제공하고 김일성을 출옥하게 했다고 한다. 이런 유언(流言)의 사실 여부는 규명되어야 할 과제이지만 손정도 목사의 교회에 일정 기간 적을 두었던 것은 분명하다. 북한측 기록에 의하면, 손정도 목사의 예배당은 김일성의 공산주의 교육의 전용 집회소였다고 한다. 김일성의 회고록(1992)에서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와 3년간 교류했고, 자식처럼 보살핌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무신론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기독교회와 기독교 신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멸절시킨 희대의 독재자가 되었다. 김일성은 1929년 17세 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고 한다. 기독교적 가정 배경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다. 1925년 서울 소공동의 아서원(雅敍園)이라는 중국식당에서 조선공산당이 창립되었고, 1926년 5월 길림성 영고탑(寧古塔)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문을 열면서 만주 한인사회에 공산혁명의 기운이 코로나바이러스처럼 퍼져 나갔고 곧 국내에도 공산주의 운동이 서서히 지경을 넓혀갔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인들도 가담하게 된다. 그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알지도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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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한국 기독교와 공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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