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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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20세기 최고의 사건은 공산주의의 생성과 몰락이라고 말한다.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는 국가권력의 폭력으로 인간성을 파괴하고 엄청난 희생자를 양산하고 쇠퇴의 길을 가고 있다. 이 녹슨 이데올로기가 유독 한국에서는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고, 성경의 표현을 빌린다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벧전5:8) 있다. 공산주의는 비극의 역사였다. 스테펀 쿠르투아 등이 공동 저술한 <공산주의 흑서 The Black Book of Communism: Crimes, Terror, Repression>에 의하면 전 세계 공산국가에서 9천4백만 명 내지 1억 명이 이 유물론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기록했다. 그러기에 폴란드 출신 철학자 레작 콜라콥스키는 공산주의는 자유를 박탈하고 재산과 인간의 마음과 역사, 인간관계까지 국유화한 것으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악어’라고 말한바 있다.

한국에서 공산주의에 의한 폭력은 일제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첫 희생자는 김이주, 박문기, 윤학영, 이창희 등 동아기독교 인물들이었다. 동아기독교는 지금의 침례교의 전신인데 이들은 한만국경지대라 할 수 있는 길림성에 파송되었는데, 1925년 9월 하순 공산당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들 기독교인들을 일본의 밀정으로 몰아 죽인 것이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동포를 죽음으로 몰고 간 첫 번째 사례였다.

1932년 10월에는 간도 침례교회의 김영국(金榮國, 1884-1932) 장로와 김영진(金榮鎭, 1887-1932) 목사 형제를 살해했다. 함경북도 종성(鍾城) 출신인 김영국 장로는 중국으로 이주하여 중국 북동지역에 마을을 건설하고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따 종성동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는 이곳에 침례교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동생 김영진 목사와 함께 교회를 이끌고 있었다. 김영진 목사 또한 함경북도 종성 출신인데, 1919년 목사안수를 받았고, 간도지방에 이어 순교자 손상열 목사가 섬기던 자성군과 임강현 일대에서 선교사로 일했다. 그러다가 그의 형 김영국 장로와 함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1932년 10월 14일 죽임을 당했다. 당시 함경도와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30여 명의 공산주의자들이 10월 14일 종성동 마을을 습격하고 마을 주민들을 종성동 침례교회에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신자와 불신자를 좌우로 갈라 앉히고 지금이라도 공산주의를 따르겠다면 살려주고 예수를 믿겠다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이때 잡혀온 김영국과 김영진 형제는 공산주의 청년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구원 받으라고 했는데, 격분한 공산당원들은 김영진 목사를 끌고나가 피부 살을 벗기며 매질을 가했다. 이에 김영국 장로는 “내가 이 교회 책임자다”라고 말하면서 악행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도 동일하게 묶여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고 표피를 벗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1932년 10월 14일에 발생한 탈피참살(脫皮慘殺) 사건이다. 이날 김영국 형제 외에 정춘보 집사 또한 신앙을 거부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으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총살되었다.

이보다 앞서 1931년 동만주 지방에서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교회당 13개 처가 방화되고 4명의 교인이 피살된 일이 있었고, 1932년 남만(南蠻)지방 장로교회에서는 25인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또 1931년 길림 부근에서 최태봉 외 일곱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1932년 9월에는 감리교 연회의 파송을 받아 만주 한인촌에서 선교하던 김영학(金永鶴) 목사가 시베리아에서 순교했다(민경배,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214). 그는 1930년 1월에 ‘반동분자’라는 죄명으로 소련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언도 받고 중노동하던 중이었다. 감리교에서는 위험을 감지하고 귀국을 종용했으나 “한 사람의 신자가 남아 있는 한 남겠다”며 현지에서 일하던 중 강물에 빠져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 무렵 연길현의 와룡동 교회는 공산당의 방화로 불탔고 교인들은 흩어졌다. 또 적암동 교회의 노진성 영수는 피살되고 교인들 역시 다 피난을 갔다고 한다. 교회는 두 번 씩이나 습격을 받아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다. 1931년 가을에는 남만 길림 남방에 있는 쌍거천에서 김광욱, 최태봉 등 일곱 사람은 공산당 가입을 거절하여 잔혹하게 살해되기도 했다. 만주 한인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미국 북장로교의 핸더슨(현대선, L. P. Henderson, 1895-1932)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의 형 현거선(H. H. Henderson)과 동생 로이스 헨더슨(Lois E. Henderson)도 한국 선교사였는데, 동생 핸더슨은 1920년 10월 30일 내한하여 만주선교부로 배속되었다. 당시 만주지역은 한인 공산주의 세력과 반 기독교적인 급진적 민족주의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또 만주지역 토호세력과 마적 떼들이 활동하고 있어 교회와 교인들이 많은 피해를 보고 있었다. 핸더슨은 1932년 9월 평양에서 개최된 장로교 총회에 참석한 후 건강이 좋지 못한 부인과 자녀를 평양에 남겨두고 혼자 만주로 돌아갔는데, 10월 15일 저녁 홍경에서 5시간 거리에 있는 마을을 들렀는데, 그때 일본군과 중국 반군 사이의 전투를 피해 마돌령으로 가던 중 10월 16일 새벽 1시경 피살되었다. 일본군은 마적의 소행이라고 하지만 분명치 않다. 혼란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현장에서 순교의 길을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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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일제 하에서의 공산주의의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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