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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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후반 한경희 목사는 서간도(西間島)의 전도목사로 임명되어 온 가족이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로 이사하여 삼원포, 해룡(海龍), 동풍(東豊), 서풍(西豊), 휘남현(輝南縣)의 5개현을 담당하였다. 개척 전도자 한경희 목사는 고결한 인품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고, 나중에는 방기전(方基典, 1861-1920)이 1912년 10월 설립한 은양학교(恩養學校)의 2대 교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는 교회 개척과 전도 외에도 교육사업에 관여하였고,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1920년 중국거주 한인들에 대한 일제의 개입이 노골화 되자 한경희 목사는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중국국적 취득활동을 벌이게 되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한경희 목사를 감시하던 일제가 그를 구속수감하기에 이르렀다. 즉 한경희 목사는 1929년 3월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3년 2월 간 신의주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이때 ‘아리랑’이란 소설로 유명한 김산도 신의주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1932년 1월 29일 출옥한 이후 창성읍(昌城邑) 교회와 평로동(坪路洞) 교회에서 임시목사로 시무하였다. 한경희 목사는 길림성 동북쪽에 위치한 호림(虎林), 요하(饒河), 수원현(綏遠縣) 등에서 사역자를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접하고 이곳으로 자원하여 갔다. 친구들은 그곳은 공산당과 비적들이 많아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나라를 잃고 해외에 망명하여 슬퍼하는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여 새 생명을 주고 위로하며 독립정신을 키워주는 만주선교가 나의 사명이다”라고 여기고 1933년 북만주로 파견되었다. 이곳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던 그는 1935년 1월 1일, 교인 4명과 함께 북만주 호림현 지방교회 순방길을 떠났는데, 교회에서 설교하고 김창근 등 제직 네 사람과 함께 설차(雪車)라고 불리는 눈썰매를 타고 오소리강(烏蘇里江) 소목하(小木河)으로 향하던 중 40여 명의 공산당원들에게 잡혔다. 중국인 공비는 돈 1천원을 요구했으나, 조선인 공산당원은 목사인 것을 확인하고는 한경희 목사에게 일본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2시간 동안 구타하고 그와 동행한 교인을 총살하고 시체를 얼어붙은 강 속에 던졌다. 이대 유일한 생존자인 이낙섭 집사는 한경희 목사는 “오, 주여 이 작은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세 번 외치고 죽음을 맞았다고 증언했다. 「신학지남」에는 한경희 목사에 대한 조사가 실려 있다.

“불 수레를 타고 하늘에 오르는 선배 엘리아를 쳐다보며 홀로 땅에 남겨서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 이스라엘의 기사여!’하고 슬퍼하는 엘리샤의 심정이 다시금 새롭습니다. 이제 한경희 목사님을 보내는 북만의 교도들은 한숨으로 한울을 쳐다보며 ‘오 북만의 병거, 북만의 기사여!’하고 가슴을 치며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목사님은 일찍이 남만에 건너가셔서 그 난마(亂麻)와 같은 사회에서 기다(幾多)의 위험과 곤고를 겪으시며 오로지 구령사업에 힘쓰시는 중 남만노회장의 중직에 있은지도 여러 차례셨습니다. 전도의 사명을 받들고 살벌(殺伐)의 세계, 성풍이 아직도 코를 찌르는 북만의 광야를 찾아오시니 목능, 밀산, 호림, 요하 등에 산재한 수천의 양 무리는 목사님을 통해서 배부름을 얻었으며 목사님을 따라 쉴 자리를 찾았었습니다. 그리하여 핍박받는 교도를 찾아 돌아다니시는 중 1935년 1월 1일 비적에게 잡혀 마침내 순교의 피를 뿌리셨습니다. 열에 가까운 유족을 무엇으로 위로하오리까? 그러나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터’ 이오매 목릉하에 뿌리신 목사님의 붉은 피 방울마다 꽃펴 이 땅을 꾸미리이다.”

한경희 목사의 순교는 조선 전역의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후에 손양원 목사는 설교하면서 한경희 목사를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그가 신사참배 거부로 1941년 11월 4일 피체되어 광주 지방법원에서 재판 받을 때, 판결문에도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중략) 참 신앙은 고난이라 시련을 겪은 다음에 비로소 얻는 것인 고로 우리들은 이 고난을 이기고 신앙을 점점 공고히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런 때를 당하여 현하(現下) 교회는 사랑과 지혜와 용맹을 가지고 일하는 교역자를 요구한다. 우리 조선 기독교 교역자는 모두들 순교자 한경희 목사와 같이 순교 정신으로 선교에 종사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한경희 목사는 공산주의자에 의해 죽임을 당한 ‘만주의 사도바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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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만주의 사도바울 한경희 목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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