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는 인물 중에 우리의 주목을 끄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중의 한 사람이 여성 독립운동가 박보렴(朴寶奩, 1897-1984) 여사이다. 부산시 동구 범일동에서 박기만과 양주련의 4남매 중 막내로 1897년 11월 8일 출생했는데 박성애 목사의 막내 동생이었다. 박성애(朴晟愛) 목사는 심취명, 정덕생에 이어 부산경남지방 3번째 한국인 목사로 커를 선교사와 같이 호주 장로교 선교부 진주 지부를 개척한 인물이자 진주교회와 항서교회, 제일영도교회, 진주 반성교회 등에서 시무했다. 범일동에 살던 박보렴 여사는 8살 때인 1905년 10월 오빠를 따라 진주로 이주하여 기독교교육을 받았다. 오빠의 도움으로 진주 광림학교(후에 시원여학교)에서 수학했다. 광림학교는 진주 지방 첫 근대학교였는데, 같이 공부했던 동료인 천연희의 회고(<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 이야기>)에 의하면, 박보렴은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항상 1등을 했고 천연희 자신은 늘 2등을 했다고 한다. 독립운동에 관여하고 후일 의사가 되는 한규상(韓圭相)도 광림학교 동료였고 한규상의 부인 박덕실(朴德實)은 박보렴의 광림학교 후배로서 이들은 광림학교가 배출한 유명 인사들이다.
광림학교를 졸업한 박보렴은 박덕실과 더불어 광림학교 교사로 일했다. 이 기간 박덕실과 함께 대한애국부인회와 대한적십자회 진주 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했는데, 박보렴은 올케인 김순복(박성애 목사의 부인)의 뒤를 이어 제2대 진주지부장을 역임했다. 그런데 서울의 대한애국부인회 한양본부의 활동이 발각되어 진주에 있던 박보렴 여사는 올케인 김순복 여사, 그리고 박덕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체포당시 문서에는 박보교(朴寶喬)로 잘못 기재 되어 있는데, 이는 법원 서기가 렴(奩)을 교(喬)로 잘못 읽은 오기로 보인다. 검거 서류의 오기 때문에 대한애국부인회와 대한적십자회 검거자 명단에서도 다른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어 박보렴 여사는 독립운동에 관여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지 못하고 있다. 박보렴은 신앙생활에도 모범을 보여 조숙모인 김덕례(둘째 오빠인 박자룡의 부인)과 함께 진주교회 첫 권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런데, 진주교회에서 목회하던 오빠 박성애 목사가 1920년 창원의 창원교회로 이동하게 되자 박보렴도 창원으로 이주하였다. 1921년 6월 27일에는 마산여자야학교에서 ‘마산여자청년회’가 창립될 때 강복순, 김복래, 김필선, 박필련 등과 같이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사회활동 혹은 청년활동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창원에서 지내던 중 신학 공부에 뜻을 두고 일본 고베여자신학교로 유학하였고, 졸업 후 1928년부터 1933년까지 오사까 한인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했다. 그 후 서울 성북동에서 목장을 경영하던 조카(박성애 목사의 아들) 박은조(朴殷祚)와 함께 생활하며 감리교 석교교회(현 서대문구 천연동)를 비롯하여 몇몇 교회에서 시무하였다. 해방 후에는 임영신(任永信) 여사와 더불어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고 부당수가 되어 정계에서 활약했다. 대한여자애국당은 1945년 8월 17일 창당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정당이었는데, 5.16 이후 해체되었다. 이처럼 일제하에서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해방 후에는 사회 운동에 참여했던 박보렴 여사는 6.25 전쟁 당시 남편과 함께 북한군에 납북되었다. 남편 김기우(金基禹, 1911-?)은 당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장이었다.
박보렴의 혼인 시기는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남편 김기우는 아동문학가 마해송(馬海松)의 누님의 아들이었다. 경기도 개풍군 남면 수우리에서 출생한 김기우는 독학으로 조선약제사 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위생시험소에 근무하던 중 1941년 금강제약 전용순(全用淳) 사장의 후원으로 일본 동경제국대학 약학과에서 유학하고 서울의 경성약전, 곧 서울약대의 교수(1949-1950) 겸 학장서리로 근무하던 중 자택인 종로구 관훈동 84번지 11호에서 납치되었다.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가 김우종(金宇鐘)이다. 그는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공대 화공과에 입학하여 1958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12회)한 후 1959년 도미하여 Carnegie Mellon에서 화공학 박사 및 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스토니브룩 대학교(Stony Brook University)에서 35년간 응용수학과 교수로, 그리고 대학원 과정 책임자로 근무했다. 2004년 뇌암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부인 장유경은 연세대학교 상대학장을 지낸 장희창 교수의 딸인데, 이화여중 1학년 때인 1963년 미국 줄리아드에 유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스토니부룩 학교(Stony Brook School)에서 교사로 일했다. 장희창 교수도 6.25 때 납북되었다. 그런데 북한으로 끌려간 김기우는 북한에서 조소앙(趙素昻), 엄항섭(嚴恒燮) 등과 더불어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는데,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북에서 사망했고 북한에서 사망한 남측 저명인사 묘역인 평양 용성구역 용궁1동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곳에는 62인의 저명인사가 묻혀 있다고 한다. 박보렴 여사는 독립운동가로 그리고 여성 지도자로 일생을 헌신했으나 그의 후손들은 그 시대의 과제를 위해 헌신했음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