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2-06(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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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과 경남지방에 기독교가 전파되고 교회가 설립된 것은 1890년대 초였다. 1891-1892년 어간에 부산진교회와 초량교회가 설립되고, 1896년에는 영선정교회(지금의 제일영도교회)가 1905년에는 자갈치교회(현 항서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4 교회를 사초(四初)교회라고 불렀다. 동래부에 속한 동래읍교회(지금의 수안교회), 기장읍교회도 1905년에 설립되었다. 이어 부산진교회로부터 분립된 두 교회, 곧 대연교회(1907)와 초읍교회(1909)가 설립된다. 1910년에는 감만동 상애원 내에 상애원교회가, 1911년에는 하단교회가, 1919년에는 수영교회가, 1932년에는 부산진교회로 분립된 부전교회가 설립된다.

 

부산지방 첫 수세자는 1894년 4월 22일 북장로교 선교부의 윌리엄 베어드로부터 세례를 받은 심상현 김기주 이도념이었다. 이들 3 사람은 호주 선교사들의 고용인이었고, 부산진교회 첫 세례교인이 된다. 그로부터 약 두 달이 지난 7월 15일에는 서두엽과 곽수은이 역시 베어드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이들이 초량교회 첫 세례신자가 된다. 서두엽과 곽수은은 베어드 선교사의 고용인이었다. 그로부터 1년 6개월가량 지난 후인 1895년 11월 3일에는 부산지방에서 3번째 세례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날 남자 10명, 여자 11명, 유아 1명 등 22명이 세례를 받았다. 집례 목사는 호주 선교사였던 앤드류 아담슨이었다. 부산지방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세례받은 세례식은 호주 선교사 왕길지가 내한 한 이후 첫 세례식이었던 1901년 2월 3일의 일이었다. 이날 성인 41명, 어린아이 27명, 곧 68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날 7명의 가정과 6명의 가족 등 두 가정 전원이 세례를 받았는데 이런 일은 한국교회에서 흔치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부산지방에서 첫 장로, 첫 목사는 누구였을까? 부산지방 첫 한국인 장로는 1904년 5월 27일 장립을 받은 심취명(沈就明, 1875-1958)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 29세였다. 부산지방 첫 수세자였던 심상현의 동생으로 부산진교회 첫 신자였고, 부산지방 첫 수세자 가족으로 두 번 째 수세자(1895. 11. 3)가 되었다. 또 그는 부산지방 첫 기독교식으로 1896년 6월 10일 오후 3시 부산진의 호주선교사관에서 아담슨(Rev. Andrew Adamson)의 주례로 김봉숙(金鳳叔)결혼 예식을 드렸던 인물이었다. 그는 부산진교회 첫 장로이자 한강 이남의 최초의 장로였다. 또 1912년에는 부산경남 지방 최초의 한국인 목사가 된다. 심취명은 1875년 12월 5일 심인택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본명은 심상호(沈相鎬)였으나 기독교 신자가 되면서 취명으로 개명했다. 전통적인 양반가문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유가적(儒家的)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가 초기 부산지방 기독교계와 한국교회의 목회자가 된 것은 그의 형 심상현(沈相炫)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로서 부산진교회는 부산지방 최초로 당회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때는 한국장로교회가 독로회도 구성하기 전이었다. 이 당시 장로로는 장연군 송천의 서경조, 용강의 방기창, 증산찬천의 송인서, 평양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장천의 한석진 등 이북지방에 10여명의 장로들이 있을 때였다. 장로로 봉사하던 그는 왕길지 선교사의 추천을 받고 목회자가 되기 위해 평양신학교에 수학하고 1910년 6월 제3회로 졸업하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김익두, 김종섭, 박정찬, 채정민, 한득룡 등이 그의 동기생들이었다.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울산병영교회 시무장로로 봉사하다가 1912년 7월 2일 밀양읍교회에서 개최된 제3회 경상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음으로서 그는 부산, 경남지방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그를 이은 두 번째 목사가 1915년 7월 안수를 받은 정덕생(鄭德生) 목사였고, 세 번째 목사는 1919년 1월 안수를 받은 박성애(朴晟愛) 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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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부산 지방에서의 초기 교회와 수세자, 직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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