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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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했던 프랑크 윌리암스, 곧 우리암(禹利岩, Frank Earl Cranston Williams, 1883-1962) 선교사는 우리나라의 독립과 교육에 헌신했던 선교사였다. 1883년 8월 4일 미국 콜로라도 주 뉴윈저(New Windsor)에서 출생한 그는 1906년 덴버대학에서 화학과 농업을 전공하고 졸업하였고, 그해 7월 2일에는 학생자원운동(SVM)을 통해 알게 된 엘리스, 곧 우애리시(禹愛理施, Alice Lavinia Barton, 1884-1980)와 결혼했다. 5월에 선교사로 인준을 받은 그는 8월 14일 부인과 함께 미국을 출발하여 9월 29일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리고 공주선교부로 배속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1940년 11월 23일까지 34년간 공주(公州)지부에서 활동했다.

그는 전임자인 로버트 샤프(Robert A. Sharp, 1872-1906)가 공주에서 시작한 명선(明宣)학당 책임자로 임명되었는데, 명선학당은 샤프가 1905년 설립한 학교였다. 샤프의 부인 사애리시(史愛利施, Mrs. Alice H. Sharp)는 두 명의 여학생으로 명선여학당(후일 영명여학교)를 설립했는데 어린 한국 아이를 수양딸로 삼아 영명학교에 입학시켜 공부하게 했고, 1916년에는 그를 이화학당에 추천하여 보통과 3학년 편입하게 했다. 1919년에는 이화학당 고등과에 진학했는데, 그가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순국했던 유관순(柳寬順, 1902-1920) 열사였다. 그런데 로버트 사프가 순회전도 중 발지티푸스에 감염되어 1906년 3월 5일 34세의 나이로 급서하게 되자 후임인 우리암이 이 학교를 맡게 된 것이다. 우리암 선교사는 1909년 이 학교를 영명(永明)학교로 개칭하고 교육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이 학교가 충청남도 최초의 근대학교가 되었다. 우리암은 1907년 미감리회 한국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고, 감리교 공주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이 1902년 설립된 이 교회는 수원 이남에서 가장 오래된 감리교회로서 지금은 공주제일교회로 불리고 있다. 부산의 기독 의료인 양덕호 박사가 이 교회 출신이고 그의 선친이 양재순 장로(공주 양의사 1호로 공제의원 원장)였고, 그의 조부가 양두현 장로였는데, 1928년 논 18,282평과 밭 2,681평을 봉헌하여 교회 발전에 큰 양향을 끼친 가문이다.

우리암 선교사는 공주 천안 아산 홍성 연기 음성 등지의 교회를 관리하는 감리사로 활동하는 등 공주를 거점으로 충청남도 지방 교회를 순회하고 감독했다. 학교 교육 책임자로서 활동하는 한편, 농업 전문가로서 농촌 개발사업도 추진하였다. 농업 강좌를 실시하였고, 농한기에는 공주 천안 청주 경성 인천 서울 원주 안동 대구 부산 진주 그리고 개성 해주 등 전국을 순회하면서 사경회와 함께 농촌 강습회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특히 1919년 전후 시기, 민족운동 혹은 애국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였고,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는 1940년 11월 교장으로 있던 영명학교에서 추방되었고, 영명학교는 1942년 33회 졸업식을 끝으로 폐교되었다. 1940년 전운(戰雲)이 감돌게 되자 선교사들의 철수기 시작되었는데, 우리암도 이때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안전지대에서 휴식하지 않고 아내와 막내 아들 로버트(Robert Leroy)와 함께 다시 인도로 갔다.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이곳에서 힌두어를 공부하면서 인도 뉴델리 근처 가지아바드(Ghaziabad)에 있던 인그라함(Ingraham)농업학교를 이어받아 농업기술을 가르치며 자조정신을 고취하는 등 교육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이곳에서 버마 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광복군에서 파견한 인면전구공작대(印綿戰區工作隊)대원 9명이 1943년 9월부터 12월까지 3개월 간 영어를 배웠다고 한다. 인(印)은 인도를 면(綿)은 버마를 가리킨다. 우리암은 광복군에게 영어를 가르친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게 되자 맥아더 사령부는 우리암을 1945년 9월 24일자로 미군정 농업고문으로 초청하였다. 그래서 그해 11월 10일 다시 내한하게 된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으나 미군정청은 농업기술자인 그를 필요로 했고, 다시 한국선교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때까지 농업고문으로 농촌경제를 일으키는 일에 기여하였다. 부인 엘리스는 다시 개교한 공주 영명학교에서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고, 이화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면서 한국인 성악가 이인선과 함께 오페라 ‘춘희’(La Traviata)를 공연하였다.

그런데 1950년 전쟁이 발발했다. 우리암 선교사는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미국으로 돌아갔고, 1951년 9월 일본 나가사끼의 진제이 학원(鎭西學院)에 교육선교사로 파송되어 1954년까지 일하고 은퇴하였고 미국으로 영구 귀국하였다. 정리하면 우리암 선교사는 한국에서 34년, 인도에서 5년, 해방 후 한국에서 다시 5년, 일본에서 3년, 곧 47년간의 선교여정을 마감한 것이다. 그후 켈리포니아 샌디 에고에서 지내던 중 1962년 6월 78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LA인근의 글렌데일(Glendale)의 포레스트 론(Forest Lawn)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부인은 1980년 2월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남편 곁에 안장되었다.

우리암 선교사는 한국에서 사역하는 동안 5남매를 낳았는데, 셋째로 출생한 딸 올리브(Olive Gertrude, 1909-1917)와 넷째로 출생한 아들 얼(Earl Barton, 1911-1913)이 여덟살과 두 살 때 사망했고 아들 셋만 성장했는데, 장남이 광복(George Zur, 1907-1994), 차남이 흥복(William Howard, 1908-?), 그리고 막내가 규복(Robert Leroy, 1929-2017)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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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우리암 (Frank Williams)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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