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7(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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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행병이 한창이던 수년 전 4월의 어느 날, 박지훈 목사가 「봄을 사는 이들에게」란 노래를 발표합니다. 제목의 분위기와 사뭇 다른 가사가 깊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소개합니다. “봄을 사는 이들에게 오래 전에 이미 도착한 봄의 온기가 아직 다다르지 않은 이곳엔 사월에도 눈이 옵니다, 봄을 아는 이들에게 날카롭게 오는 눈발에 높은 하늘을 바라보기 무척 힘든 이곳엔 사월에도 눈이 옵니다, 큰 지붕 위에도 작은 지붕 위에도 멈춘 차에도 달리는 차에도 사람들의 마음에도 이곳에는 사월에도 눈이 옵니다, 그곳에는 벌써 도착한 봄이 아직도 배달되지 않은 이곳에서는 4월에도 눈이 옵니다. 나에겐 겨울이 더 어울린다 하며 그런 따뜻함이 있을 수 있냐며 봄을 잃은 사람에도 봄을 모르는 사람에도 이곳에는 사월에도 눈이 옵니다, 그곳에는 벌써 도착한 봄이 아직도 배달되지 않은 이곳에서는 사월에도 눈이 옵니다.” 모두가 봄기운을 만끽할 때 여전히 겨울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꽃향기 날리고 분분한 낙화 대신 사월에도 온통 마음속 거리마다 눈이 내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이 세상에서 그런 인생들이 어찌 한둘뿐이겠습니까마는, 특히 여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기다리며 여전히 사월의 겨울을 살고 있는 세월호의 다섯 가족을 생각해 보세요. 이와 같이 누군가를 우리는 잊을지언정 결코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사람들이 있는 법입니다. 아니, 우리도 그래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벌써 십년 전의 그 날 우리 모두는 뭐라고 외쳤습니까? ‘우리는 결코 당신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하늘의 별이 된 얘들아, 우리는 절대 너희를 잊지 않을게!’ 하지 않았던가요? 키르케고르는 『사랑의 역사』에서 ‘사랑은 죽은 자를 기억한다’며 죽은 자를 향한 사랑이야말로 아무 보답도 해줄 수 없는 대상을 향한 비이기적인 사랑이고, 동정을 유발한다든지 해서 어떤 식으로든 강요할 수도 없는 짝을 향한 가장 자유로운 사랑이며, 도대체 변화할 수가 없는 존재를 향한 가장 신실한 사랑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죽은 자를 기억하라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죽은 자를 향한 사랑은 죽은 자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을 필수불가결한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잊은 자를 어찌 사랑하겠습니까? 기억하지 못하는 자를 위해 어찌 기도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는, 지금 그들을 어떻게 얼마만큼 기억하고 있는지요? 

 

  예로부터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유명했습니다. 라틴어로 이루어진 이 문구는 로마 시대 개선식을 거행할 때 승리한 장군 옆에 둔 노예가 끊임없이 속삭였던 말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승리에 안주하거나 도취하지 말고 ‘나도 역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라고 되뇌며 겸손하란 취지에서 비롯된 일종의 잠언이었겠지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차츰 기독교의 세계에도 들어와서, 중세 시대 수도승들은 만나면 서로 나누는 인사말이 “메멘토 모리”였다고 전합니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가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성경에 드러난 헤벨 사상 곧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전 1:2)라는 의미의 중세식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키르케고르도 이 말을 간접적으로 암시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일종의 기독교적 허무주의에 대해 살짝 비틀기를 시전하면서 ‘죽음을 기억하라’ 대신 ‘죽은 자를 기억하라’를 말했습니다. 기존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대신 “메멘토 모르툼(memento mortuum)”을 주창하고 나섰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메멘토 모리”, 좋은 교훈이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숭고하고 거룩하게 살고자 했던 자기 겸손의 발로(發露)였을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메멘토 모르툼”은 이타적인 사랑에서 기인합니다. 죽은 자는 도무지 갚을 길이 없을 테니 그를 향한 사랑은 순수하게 이타적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사월에도 겨울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봄을 가져다주려면 필요한 말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입니다. 앞서 소개한 「봄을 사는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노랫말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봄이여 오라 봄을 떠나 온 이로 인해, 꽃이 피어라 꽃을 품고 온 이로 인해, 겨울에 사니 내 안 봄 더욱 만개합니다, 보내진 곳을 사는 이로부터.” 작가는 보스턴에 머물면서 어느 해 4월에 내린 눈을 보며 이 노래를 구상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에 도달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겨울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그 봄을 전하기 위해 많은 눈물과 땀을 흘리고 있는 분들도 있답니다. 봄의 왕국을 떠나서 겨울왕국과 같았던 이 땅에 처음 꽃을 품고 온 배달의 시초, 배달부 중의 배달부이신 예수님을 따라 더 많은 봄이 배달되기를 소망해봅니다”(박지훈). 봄을 사는 이들이여, 아직도 겨울을 사는 이들에게, 이제는 겨울 대신 봄을 전해주지 않겠습니까? 눈 대신 꽃을 피워주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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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봄을 사는 이들이여, 메멘토 모르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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