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홍석진 목사.jpg
  19세기 중반에 기하학(幾何學)을 좋아하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기하학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고, “진리를 차려놓은 과정”이었으며, “사고를 이끌어주는 놀라운 스승”과 같았습니다. 19세기 말엽에 로마법, 농민법, 인종학 등 사회과학에 심취한 경제학도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공부를 통해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익혔고, 이를 통해 “인류가 처해 있는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앞의 젊은이 이름은 앙리 파브르(Henry Fabre, 1823~1915)로 훗날 『곤충기』를 썼고, 뒤의 젊은이 이름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로 비구상적 그림을 그린 최초의 화가가 되었습니다(루트번스타인, 『생각의 탄생』, 422-24).
  만일 파브르에게 ‘너는 기하학을 잘 하니 반드시 수학자가 되어야 해’라고 강요하고, 칸딘스키에게는 ‘전공과 관계없는 미술을 택하지 말라’고 압박을 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른바 ‘곤충세계의 호머요 선지자’는 탄생하지도 않았을지 모르고, 우리는 고도로 추상화된 현대회화의 걸작을 만끽할 가능성조차 빼앗겼을지도 모릅니다. 자유의지와 창조정신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는 파브르 같은 솔로몬도 있고(잠 30:17~21) 악령을 제어하는 음률시인 다윗도 있으며(삼상 16:23) 건축기술을 전공한 성경학자 바울이 등장하는 것입니다(행 18:3). 종교개혁자 루터 또한 법학도였으며 뛰어난 음악가였고, 역시 법을 전공했던 칼빈은 로마의 키케로(Cicero, 106~43, B. C.)에 관한 인문주의 논문을 썼으면서도 탁월한 목사신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498년 전인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Wittenwerg)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veritas liberabit vos, 요 8:32)는 말씀이 가시화된 사건입니다. 중세의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교황과 로마교회의 획일화된 교조주의(敎條主義) 가르침만을 무비판적으로 굴종했다면 종교개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개신교회는 등장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1520년 마르틴 루터가 발표한 세 편의 개혁주의 문서 중 하나가 「그리스도인의 자유(The Freedom of a Christian)」인 것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 외의 어떤 절대적인 이념(理念)이나 주의(主義)도 경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지난 20세기를 한 번 돌아보십시오. 파시즘(fascism), 볼세비즘(Bolshevism), 매카시즘(McCarthyism) 등의 광풍(狂風)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선한 양심을 뒤틀리게 했으며 심지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인명을 앗아갔습니까?
  어린아이들은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어른들이 볼 때 당연한 것도 아이들에게는 궁금하고 생소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일방적으로 정답 하나를 말해주기 보다 열 마디 이상의 대답을 해주면 아이들 상상력과 창의력이 길러진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천재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가장 위대한 업적은 ‘왜?’라는 아이 같은 호기심에서 발생한다. 마음속의 어린아이를 포기하지 말라”(이지훈, 『혼창통』, 138). 세상 사람들보다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은 “이것이 그러한가(scrutantes scripturas)” 하면서 성경을 보았다 했습니다(행 17:11). 무비판적으로 맹종한 것이 아니라 조사하고 연구하면서(anacrinontes, scrutinizing) 성경을 읽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세상의 진리와 가치에 대해서는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혹시 중구난방(衆口難防)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담 스미스가 자유로운 시장경제에서 강조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은 ‘사상의 자유시장(free market of idea)’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하는데, 미켈란젤로 식으로 말하자면 이 둘은 결국 ‘같은 한 주인’에게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Jesus liberabit v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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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그리스도인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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