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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총, 헌법재판소 결정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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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대표적인 연합단체인 한국교회총연합회가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에 대해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교총은 “정부는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대통령선거를 차질 없이 수행하며, 여당과 야당은 국민적 갈등을 선동하지 말고 국회로 돌아가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통해 대의 민주주의 정치를 복원하라”고 정치권에 당부했다. 또 교회에 대해서도 “한국교회 모든 교인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자유롭게 하되, 십자가 복음에 합당하게 말하고 행동하기 바란다”고 전했다.
끝으로 한교총은 “곧바로 진행될 대통령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하나님과 국민을 두려워하며, 국민을 통합하고 상대를 존중하며,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후보에게 투표하여 국가 발전에 기여하기 바란다”고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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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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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사장 누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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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사장 김진오) 차기 사장 선임이 임박했다. CBS 재단이사회(이사장 윤순종 목사)는 이달 22일 신임 사장후보를 선출한다. 현재 CBS 사장 후보는 총 9명이 등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차기 사장직에 도전한 인물들은 전원 CBS 직원 출신이다. 고길화(전 CBS 강원 대표), 김갑수(전 광주CBS 본부장), 김규완(전 부산CBS 본부장), 김재덕(전 CBS 보도국장), 나이영(전 강원영동방송본부장), 박성석(전 충북CBS 본부장), 박종률(전 기획조정실장), 성기명(전 CBS 보도국장), 이완복(전 CBSi 대표) 등이다.
CBS 사장 선출은 2단계로 진행된다. 사장추천위원회에서 2-3명의 후보를 선출하고, 이후 재단이사회가 투표를 통해 최종적으로 사장을 선출하는 방식이다. 사장추천위원회는 현 이사 4명(육순종 이사장, 정은석, 이정원, 김학중 이사)과 직원2명(직원 투표로 간부직원 1명, 평직원 1명), 외부인사 1명(기독교대한복음교회 윤창섭 총회장) 총 7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장 선출을 하는 CBS 재단이사회는 각 교단의 추천을 받은 19명의 이사와 2명의 감사로 구성되어 있다. 사장추천위원회와 재단 이사회 모두 22일 당일 선출을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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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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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이승만의 반공주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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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셰비키 혁명(1917. 10)으로 소련이 공산화되자 공산주의 사상은 동유럽으로 확산되고 동쪽으로는 몽골까지 확장되었다. 지식인들은 실험되지 않는 허황된 유토피아 사상을 환호했다. 중국이나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하던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도 공산당과 연계하여 독립자금 지원이라는 사탕발린 독약을 받아먹게 된다. 이동휘와 박진순이 중심이 되어 1918년 5월 31일 창당한 ‘한인사회당’은 동아시아 최초의 공산당이라고 할 수 있는데(중국 공산당은 1921년에, 일본공산당은 1922년에 창당된다), 볼셰비키의 지원을 받아 항일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이승만이 쓴 공산주의에 대한 논설은 당시 한인 사회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중요한 사실은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대륙 세력인 중국이나 러시아를 택하지 않고 해양 세력인 미국을 택하여 독립운동을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공산주의에 대한 이념적 연계(ideological chain)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두 편의 논설을 남겼는데, 「태평양 잡지」 1924년 7월호에 쓴 “사회공산주의에 대하여”와 「태평양잡지」 1925년 7월호에 쓴 “공산주의”가 그것이다. 그는 전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일변(一邊)으로는 우리 사람들이 이런 새 주의(主義)를 들을 적에 우리의 오늘 경우가 다른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다만 남이 좋아하니 우리도 좋아하자고 덮어 놓고 따라 나가다가 영향을 받을까 염려함이라. 물론 우리 내외지(內外地)에 모든 인도자들이 응당 앞을 보아 지혜롭게 인도할 줄 믿는 바이지만, 그중에 몇 사람이라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일시(一時) 풍조에 파동(波動)되면 그 손해가 장차 전체에 미칠까 하는 근심이 없지 아니함이라.”
도처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흥기할 때에 쓴 이글은 “공산주의의 폐해를 이론적으로 명쾌하게 논증한 세계 최초의 논설”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반공정신은 팽창주의를 지향하던 러시아에 대한 경계라고 하는 측면을 부인할 수 없지만, 따지고 보면 이승만의 반공사상은 그의 정신세계를 관통하는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의 반(反) 유물론적 이념체계가 자유민주의를 지향하고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반공사상의 기초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자유주의적 반공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 체계로 인식하게 한 것이다.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그의 모스코바 방문 이후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33년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연맹 회의 참석차 유럽을 여행하고, 7월 19일과 20일에는 모스코바를 방문했는데, 이때 공산주의 치하의 국민 생활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 또 제2차 대전 이후 소련의 팽창주의 정책을 보면서, 그리고 1949년 중국의 공산화 이후 한국이 공산화될 위험이 있다고 보아 크게 우려하였다.
제2차 대전 이후(1944-45) 소련이 동독을 비롯하여 동유럽의 약소국가들, 곧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폴란드 등을 점령하고 공산주의를 이식하여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었고, 1948년 2월에는 마지막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쿠데타로 공산당 독재국가를 수립함으로써 공산화를 마무리 지었다. 이보다 앞서 1947년 9월에는 국제공산당(Cominform)이 결성되면서 동유럽의 공산화는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들었다. 인접한 중국에서는 1949년 마우쩌둥(毛澤東, 1893-1976)이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국민당 정부를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게 되자 국제정세에 민감했던 이승만은 공산주의 체제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지를 갖게 된다. 그래서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해방 이후 건국투쟁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은 정략적 고려에서 박헌영(朴憲永, 1900-1956)의 조선공산당에 대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준 바 있다. 1945년 10월 21일 행한 중앙방송 연설에서, 그리고 11월 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이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공산당에 대한 포용적 입장을 피력한 바 있지만, “절불굴(折不屈)하고 배일항전(排日抗戰)하던 공산당원들,” 혹은 “경제방면으로 근로대중에게 복리를 줄 목적으로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인사들과는 협조할 용의가 있다”는 식의 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사는 정략적인 의도였다. 그는 한번도 공산주의를 용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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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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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부활을 이상하게 보는 현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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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한 작품을 ‘아름답다’고 할 때, 작품 속에 그러한 속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플라톤의 미의 대이론’입니다. 작품 속에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미의 객관적인 속성이 있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작품 자체에 객관적으로 좋고, 아름답고, 훌륭한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감상자는 작품을 ‘아름답게’ 보게 됩니다.
그러나 철학자 칸트는 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상자가 작품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유는 감상자 내면에 ‘아름다운’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칸트의 이론에서는 작품 자체에 아름다운 속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에게 아름다운 속성이 있기 때문에 작품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아름다움은 작품의 객관적 속성이 아닌, 보는 감상자 내면에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주관적 감정에 따라 작품을 아름답게 보게 됩니다.
아름다움은 작품의 객관적 속성일까요? 관객의 주관적 감정일까요? 절대표현주의는 두 가지 모두를 이야기합니다. 이에 따르면 작품에도 객관적인 속성이 있고, 보는 감상자에게도 주관적인 감정이 있습니다. 두 가지가 서로 상호작용하여 작품을 ‘아름답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슐라이어마허는 작품, 즉 본문을 보는 두 가지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을 문자 그대로 분석하는 문법적 이해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본문을 적은 저자의 상황과 시대, 정신세계 등을 포함한 본문의 맥락과 이면의 뜻, 의미 등을 분석하는 심리·정서적 이해입니다. 문법적 이해는 본문에 나타나 있는 것을 분석하는 객관적 이해력이고, 심리·정서적 이해는 본문 이면의 의미를 분석하는 주관적 이해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의 바른 이해는 본문을 문법적으로만 이해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저자의 상태와 환경에 따라 심리·정서적으로만 이해해서도 안됩니다. 문법과 심리·정서 즉, 객관과 주관을 함께 사용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상호 소통하여 이해할 때, 본문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살아나시고, 부활하신 것, 기적을 베푸신 것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신학자 불트만은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지 신화인지 구별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대의 세계관과 현대 21세기 세계관이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사실이냐 아니냐를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문법적 해석을 이해하고 사실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실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에 대한 문법적 이해와 더불어 부활에 대한 심리·정서적 이해가 함께 상호작용하여, 객관과 주관이 상호작용하여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025년 4월, 부활절을 맞아 우리는 부활의 사건을 어떻게 사실 그대로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의미를 이해하고 나 자신의 주관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다음세대에게 복음의 전승, 언약의 전승이 일어날 것입니다.
부활은 기독교에만 있는, 예수의 복음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부활을 사실로만 이해하는 것은 한 단면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사실을 모른채 의미만 파악하는 것도 바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객관적 사실과 함께 그 사실 너머의 의미를 알고,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을 다음세대에게 전하는 부활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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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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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곤 목사] 부활은 죽음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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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만이 아니라 아들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부활하신 영광까지를 의미한다. 이 부활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이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긴 것이며, 생명으로 생명을 낳은 복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한국 교회는 일 년에 한 번 부활절에만 부활을 기념한다. 개혁주의는 지키지도 않는 사순절은 잘 지키면서 성령강림주일은 잘 지키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한국 교회가 교리와 교의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로 시작되었다.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복음은 죽음을 인지하고 십자가를 믿는 것에서 싹이 튼다. 작금의 한국 교회가 부활을 더 깊이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혹 피 묻은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기 때문 아닐까? 부활은 좋으나 십자가는 싫고, 생명은 좋으나 피 흘리기는 싫어한다.
죽어야 영생을 얻고, 죽어야 부활 할 수 있는데, 죽기를 싫어한다. 목숨을 내 놓아야 영원히 살 수 있는데, 영원을 포기하고 지금 사는 것을 선택한다. 과거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순교의 자리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부활을 믿고 영생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교자의 후예들은 이제 순교를 거부한다. 순교자의 후예로만 살고 싶어 하고 순교자가 되고 싶어 하진 않는다. 그러다보니 한국 교회에는 더 이상 부활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고, 부활의 은혜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이 죽어 가는데, 대부분의 교회는 자기 교회 일에만 바쁘다. 나라가 망해 가는데, 교회는 생존하려고만 한다. 공산주의가 교회를 공격하는데,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와 장로, 신자들이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이다. 주체사상이 신앙을 흔들어 놓는데, 교회는 우리 교인만 아니면 된다고 한다.
시대의 흐름과 역사의 진행을 보면 하나님은 반드시 대한민국을 사용하시어 세계 복음화의 선두에 세우실 것이다. 하지만 그 때와 그 시는 알지 못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면 나라는 이미 망했다고 생각이 들 정도다. 종북 세력은 득세하고, 오랜 세월 그들이 탄탄하게 쌓아 놓은 옹벽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서 옹벽을 부수고자 많은 국민들이 나라의 법치를 세우고 죽은 나라를 살리려고 거리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많은 교회, 교회의 지도자들인 목사, 장로, 신자들이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한다.
다음 세대에 신앙의 자유와 아름다운 믿음의 전통과 교회를 남겨주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나라를 물려줘야 하는데, 혼자만 살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외친다. 누군가는 죽어 씨앗이 되어야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부활이 있을 텐데, 아무도 씨앗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런 시대의 현실을 보면 너무 안타깝다. 그래서 올해 부활절이 다가오는데 마음이 많이 아프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너지지 않는데, 내가 속한 대한민국은 침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이 있는 것은, 부활의 시작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대한민국을 사용하여 온 세상을 복음으로 다시 덮으실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은 광복이후 가장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가는 중이다. 우리 아버지 세대가 목숨 바쳐 지켜 냈던 자유대한민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거짓말해야 법정에서 이기고, 법의 권위와 정의는 이미 죽었고, 행정부는 마비되었고, 입법부는 차라리 해체하는 것이 대한민국에 더 유익할 것이라 생각하는 국민이 대부분이다. 대한민국이 죽어가고 있다. 자유는 사라지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유형의 독재자가 나라를 삼키려고 한다. 자유대한민국의 뿌리인 선거관리위원회는 불신을 넘어 해체해야 한다는 국민의 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판사들(헌법재판소 대법원 고등법원 지방법원)의 판결이 정의롭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별로 없다.
더 이상 소망이 보이지 않고 나라가 죽음 앞에 절망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이 나라를 다시금 부활시키어 새롭게 휘두르시는 주님의 검으로 사용하실 것이다. 나라의 상황은 최악으로 가지만 부활은 죽음에서 시작되기에 다시금 조국 대한민국의 부활을 소망하는 부활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보다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끝까지 믿고 따라가는 한국 교회가 되어 순교자의 후손이 아니라 순교자로 하나님 나라에 이름을 새기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한국교회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넘어 부활의 능력과 영광, 새생명의 감격이 넘치는 부활절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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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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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 특강] 교회법과 장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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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은 장례에 대해 무어라고 말할까? 대부분 한국장로교회 헌법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시나 찬송을 부르고 합당한 성경을 낭독하며 설교를 하고, 특별히 비참한 일을 당한 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며 저희의 슬픔이 변하여 영원한 유익이 되게 하며, 위로를 받도록 해야 한다. 또 유족들을 위로하는 데 힘쓰고 신앙이 없이 생활하다가 별세한 자에 대한 소망은 언급하지 않아야 한다.”
첫째, 장례에서 먼저 생각할 점은 찬송을 부르며 성경을 읽고 설교를 통해 슬픔을 당한 이들이 위로와 은혜를 받게 하는 일이다. 성도에게 죽음이 복된 것이고 또 고인이 장수하여 치르는 호상이라 할지라도 장례식은 유족에게 애도와 위로의 시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둘째, 신앙이 없이 생활하다가 별세한 자에 대한 소망은 언급하지 않아야 한다. 고인의 지난 삶이나 죽음에 관해 판단하는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된다. 자살했으니 지옥에 갔다고 섣불리 말해서도 안 되지만 거꾸로 성도는 자살해도 천국 갈 수 있다는 말도 쉽게 해서는 안 된다.
셋째, 고인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세상의 관습이나 미신이 들어오는 것을 피해야 한다.
한국 장로교회의 예배지침의 원형인 <웨스트민스터예배지침>(16456)이 이에 대해 잘 지적했다: “누가 이 세상을 떠나면 시신은 장례식 날 집에서 매장지까지 규율에 따라 옮겨가고 즉시 묻을 것이다. 시체 앞에 무릎을 꿇거나 그 옆에 서서 시신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은 미신적이며, 찬송이나 기도, 성경을 봉독하는 것도 불필요하게 남용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떠난 사람의 친구나 친척들과 함께 말씀을 상고하고 위로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 목사가 참석하였으면, 그런 경우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자주 찾아 그들의 상처를 씻고 그들이 맡겨진 의무를 잘 이행하도록 인도한다.”
이런 규정은 모두 미신적인 관습을 염두에 두고 제정되었다. 과거 교회에서 시신 앞에서 죽은 자의 영혼 안식을 위하는 기도를 하고 소위 거룩한 물과 함께 축성된 땅에 매장하는 일이 있았다. 장례식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것보다는 죽은 자를 칭송함으로 사람의 영광이 나타나고 이로 인해 죽음의 엄숙함이 살아 있는 자들에게 선포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통해 이 모든 미신이 개혁되었다.
고인을 위해 기도하거나 고인의 무덤이나 관 앞에 촛불을 켜거나 향을 피우거나 배례하는 행동은 경계해야 할 세상 관습이다. 입관 시에 고인의 부장품을 넣지 않는 것이 좋으며 고인이 사용하는 찬송가나 성경 등 유품은 잘 보관하고 고인을 추모함이 좋다. 화장의 경우 화장을 한 후 분골은 납골당이나 기타 적당한 장소에 안치하면 되나 이 경우는 가급적이면 가족 중심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다.
넷째, 장례식 때 기도와 설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교회 역사에서 많은 토의가 있었다.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이 문제를 가지고 6일 동안 토의했다.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기도는 원칙적으로 출생 이후 지금까지 고인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드리는 감사의 기도와 유족을 위로하는 간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설교는 주일설교에 부담이 가지 않는 범위에서 준비하도록 했고, 특별히 부자와 가난한 신자를 구별해서 부자를 위해 설교를 남용하지 말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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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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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여김의 축복 (야고보서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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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힘든 것은 여러 가지 시험이 동시다발적으로, 복합적이고 다중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속되는 시험이 더욱 어렵다. 인생이 힘든 것은 정신을 차릴 틈이 없을 만큼 문제가 혼란하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결과가 나와도 감정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불편한 일이다.
야고보 사도가 대단한 것은 예수님의 친동생이면서도 자기를 소개할 때 예수님의 종이라고 스스로를 일컬을 만큼 겸손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의외로 기도를 강조하는 말씀들이다. 그가 얼마나 기도에 힘썼는지 별명이 낙타 무릎이었다.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된다(약 1:6).
두 마음을 버리고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된다(약 1:8).
욕심을 버리고 기도해야 응답받는다(약1:15).
그러므로 의심, 두심, 욕심은 버리고 힘써 기도하면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니님께서 지혜를 주신다. 기도가 행함이고, 기도가 사역이며 기도가 역사를 일으킨다. 간절히 부르짖음으로 마음이 새로워지고, 신의 한수를 둘 수 있게 된다.
약1:2에서 말하는 ‘형제들’은 예수 안 믿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좋은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이 시험에 든다는 것이다. 또 시험이 들 되, 여러 가지로, 컬러풀하게, 시리즈로 시험이 든다는 것이다. 사람이 계속해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우울해지고 대인기피증, 공황장애가 온다. 그러나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한다. “온전히”는 대충대충, 얼렁뚱땅, 건성건성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올인 하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시험이 드는 것은 결국 우리의 인격을 연단해서 온전한 사람을 만들고자 함이다. “연단”이란 단어 뜻이 천 번 맞은 것이 연이고, 만 번 맞은 것이 단이다. 수없는 담금질을 겪어야 정금 같은 믿음이 나온다.
문제가 생기고 시험당하는 것이 반가운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야고보는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였을까? 사도바울의 옥중서신인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이다. 동안을 가지려면 동심을 가지면 된다. 부름 받고 쓰임 받고 사랑받는, 일복이 많은 것이 복이 많은 것이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기쁘게 여기라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크리스천의 역설적인 태도가 축복이 된다.
여김의 축복이 있다. 분명히 골치 아프고 복합적인 문제인데도 온전히 기쁘게 여기면 쓴물이 단물 되고, 문젯거리가 간증거리가 된다. 불안한 현실이지만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보면 주께서 역사하신다. 사건보다 해석이다. 해석의 힘이 바로 믿음이다. 팩트보다 해석능력이 중요하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 간 상황에서도 선명한 뜻을 정했던 다니엘, 형들에게 배신당하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지만 생생한 꿈을 꾸었던 요셉을 보라. 꿈꾼 대로 뜻한 대로 형통하게 되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복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모든 고통에는 뜻이 있고, 여러 가지 시험은 나를 정금같이 단련하는 과정이니 감사함으로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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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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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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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21일부터 영남권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대형 산불은 경북은 8일, 경남은 10일 만에 주불이 모두 진화됐을 정도로 큰 피해를 남겼다. 산불 영향구역은 총 48,239ha이고, 총 75명의 인명피해 중 사망자는 30명, 중상자는 9명, 경상 36명(3월 30일 현재)이 발생했다. 경북지역에서만 주택 3,369채가 전소됐고, 4,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교회의 피해도 큰 것으로 조사됐다. 경북지역에서만 영덕 석동교회(박경원 목사)와 청송 목계교회(이상춘 목사), 어천교회(한영식 목사) 등 영남권 다수의 교회들이 대형 산불로 예배당과 사택이 전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와 구호단체가 구호활동을 펼쳤지만, 더 많은 후원과 기도가 필요하다. 체육관이나 학교에서 대피한 이재민들은 급하게 몸만 빠져나왔기 때문에 생필품이 부족한 상태다. 다행히 교계도 발 빠른 대응에 나서고 있다. 한국교회봉사단(대표단장 김태영 목사)과 구세군이 구호활동을 초기부터 시작했고, 피해를 입은 각 지역 기독교연합회 중심으로 구호 및 봉사활동이 계속되고 있다. 교단들도 총회차원에서 모금운동에 나서고 있으며, 대형교회도 이번 산불 피해 고통에 동참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교회가 구호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지만, 문제는 피해 복구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과거 국가적 재난 상황에 항상 힘을 모아왔다. 서해안 원유유출 피해복구에 1만 교회로부터 120여 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방제 작업 및 자원봉사활동에 동참했었고, 집중호우 피해지역, 강릉산불 피해 복구 지원 등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항상 앞장서서 기금 마련과 봉사활동을 펼쳐왔다.
한 가지 제안 드리고 싶은 것은 금번 부활절연합예배는 대형 산불로 고통받고 있는 이재민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함께 울어주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금번 부활절 헌금은 이재민과 피해지역 복구를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함께 마음을 모았으면 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말씀처럼 의미 있는 부활절연합예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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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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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통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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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4월 4일 오전 11시 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열고 국회의 탄핵소추를 재판관 8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인용했다. 윤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후 122일, 12월 14일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접수한 지 111일 만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리사회는 양분되어 큰 혼란을 맞이하게 됐다. 한국교회도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의 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그 중심에 서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분열과 혼란을 극복하고 치유해야 하는 일은 이제 한국교회의 몫이 되었고, ‘국민 통합’을 이끄는 것이 지금 한국교회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혼란에 빠진 한국 사회를 치유하기 위해 이후의 한국교회는 철저하게 화평케 하는 자의 복된 책임을 감당해야하고 화목케 하는 직책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교회가 사회적 갈등의 진원지가 되거나 대립을 부추기고 혼란을 야기하는 일에 가담하거나 선동 당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러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금번 2025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에서는 ‘국민 대통합을 위한 성명’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 성명에는 최근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한국교회가 국민 통합의 구심점으로서 분열을 넘어 하나 됨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담게 될 전망이다. 끝 모르는 갈등과 격화되는 분열적 주장들, 그리고 망국적 거짓 선동과 편 가르기는 속히 멈춰야 하고, 이를 위해 한국교회가 앞장서 대화와 타협, 협력과 상생의 길을 선언하게 될 것이다. 특히 헌재의 탄핵 판결 이후 예상되는 혼란과 갈등의 격화를 우려하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교회가 분열과 갈등의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기독교선교 140주년을 맞이하는 2025년. 부활절 연합예배를 통해 한국교회가 다시 하나 돼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이 땅의 분열과 다툼을 멈추게 하고 이해와 화합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마련될 것을 소망한다.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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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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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특집 대담] “목사님, 애완견 데리고 교회 가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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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견 추도식 요청하는 성도, 목회자는 어떻게 할까?
애완동물의 장례식, 가능한가?
애완동물 양육 인구 1500만 시대로, 애완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펫팸족’이 늘고 있다. ‘펫’(Pet)’과 ‘패밀리(Family)’를 합친 신조어인 펫팸족이 증가하면서 관련 시장이 급증하고 있다. 애완동물용 미용, 의류, 유모차는 물론 보험, 장례 서비스까지 등장했고,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펫시장 규모는 2024년 4조9천억원에서 2027년 6조55억원으로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교회에서도 예배시간 중 애완견을 돌봐주는 사역팀이 있는 교회도 있고, 반려동물관리사 자격증이 있는 교역자를 찾기도 하는 상황이다. 애완동물,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바라보아야할지 저서 <동물신학>(세움북스, 가정호, 송영목, 홍석진 저)의 저자인 가정호 목사(세대로교회)와 송영목 교수(고신대)가 대담을 진행했다.
가정호: 지난 2024년 12월 31일자로 <동물신학>이라는 책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동물신학’이라는 명칭에 대해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영목: 좋은 질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물신학’이라는 이 명칭이 정당한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목사님과 장로님께서 책 제목 때문에 불편을 느끼신 것 같았습니다. 동물을 신격화나 인간화할 의도를 배제한 채, 하나님께서 동물에 관하여 어떤 견해를 가르치시는가를 성경적으로 탐구하는 시도라면 이 용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정호: 일부 성도들이 예배당에 내가 좋아하는 동물을 같이 데리고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할 수 없을까, 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인데 교회가 허용해주면 좋겠다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흐름들이 영국, 미국 교회에서 발생하고 실제로 애완견을 데리고 와서 함께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도 이런 부분에 대한 선을 정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송영목: 심방이건 기도이건 공 예배이건 간에, 성도가 하나님에게 집중하려면 애완동물이 그런 모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미리 조치하는 게 마땅합니다. 그런데 동물친화주의자들은 동물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가 하나님께 영광과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보면서 몇 가지 근거 구절을 제시합니다(시 145:21; 사 43:20; 66:23; 계 5:13). 그런데 여기서 ‘모든 육체’(시 145:21; 사 66:23)는 영혼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이라는 구원을 묘사하는 맥락에서, 동물이 하나님께 명예를 돌린다는 묘사는 상징적 의미로 파악해야 합니다(사 43:14-21). 하나님은 성도에게 성령 충만한 실체의 예배를 요구하시므로(요 4:23-24), 하나님과 교회 간의 쌍방 언약을 갱신하는 예배를 드리는 공간에 동물을 데리고 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다만 교회 한쪽 공간에 애완동물을 보관하는 것은 괜찮겠지만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주체로서 함께 참여하는 것은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해 요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정호: 목회적으로 보면 실제로 동물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좋아하는데 옆에 있는 사람은 이 개가 언제 나를 공격할지 모른다는 공포심도 있고 또 예배 중에 개가 짖을 수도 있잖아요. 예배 시간에 강아지가 짖는다면 예배에 집중할 수 없기에 여러 가지 상황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정호: 그럼 교수님, 동물을 위한 기도는 가능한가요?
송영목: 목회자라면 목양하는 성도들의 영혼을 돌봐야 됩니다. 그런데 영혼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라면 성도의 직장을 위하여, 성도의 건강을 위하여, 재산을 위하여, 사업과 직장을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 됩니다. 농경사회에서는 회사원보다는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그러면 성도의 가축을 위하여 소, 개, 돼지 등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안전하게 건강하도록 그렇게 마땅히 기도를 해야 되겠죠. 그래서 성도가 가축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 할 때 저는 기도할 수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단 그게 목사님만 해야 될 일은 아니죠.
‘반려동물’ 전성시대를 맞이하여, 교회의 공식 기도 제목에 병든 애완동물의 이름이 올라오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교인은 자신의 애완견 1주기 추도식을 목사가 거행해 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가정호: 네. 저도 겪었습니다. 어떤 성도님께서 애완견이 죽은지 1년이 되어 추도예배를 드리고 싶은데 인도해 줄 수 있겠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많이 우울하고 힘든지 소위 펫로스증후군(애완동물의 죽음으로 겪는 상실감과 우울증 등 정신적 어려움)의 증상이 있는지 여쭈었더니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추도식은 그렇고 집사님의 정서적 안정감을 위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가정호: 교수님, 동물도 구원받을 수 있나요?
송영목: ‘구원’을 예수님의 구속 혹은 대속을 통한 총체적 회복이라고 정의한다면, 그런 구원의 대상은 동물이 아니라 교회로 제한됩니다. 동물을 새 창조와 회복과 돌봄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닐까요? 하나님 나라는 세 요소 즉 하나님의 통치 주권, 그 통치를 받는 대상인 교회, 그리고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구성됩니다. 마지막 요소인 ‘영역’은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만유입니다(엡 1:10).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서 동물의 영역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동물도 당연히 포합됩니다. 많은 개혁주의자가 동의하는 신칼빈주의를 고려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영역 선교’(sphere mission)을 열심히 수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물은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대상은 아닙니다. 일부 신학자들은 요나서에 나타난 니느웨의 동물을 예로 들면서, 동물을 회개의 주체로 격상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가정호: 애완견을 너무 좋아하다보니 일부 성도들이 나중에 천국에 갔을 때 내가 사랑하는 애완견도 함께 천국에 있길 바라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동물도 부활하고 천국에서 만날 수 있는지요?
송영목: 악어와 같은 동물을 숭배했던 고대 이집트에서 고양이와 개 그리고 영양(gazelle)과 같은 애완동물은 미라로 처리되어 죽은 주인과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이집트의 일부 파라오들은 애완견을 위해 무덤을 세워 명예를 돌리기도 했습니다. 애완동물은 저 세상에서도 길동무처럼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물은 죽은 후에 천국에 가지 않지만, 거기서 동식물은 새롭게 창조될 것으로 보입니다. 동물 중에서 성경에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정관사를 동반한 남성 복수 주격 명사 ‘그 개들’(oi` ku,nej)은 어린양의 신부인 교회를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성 바깥에 있습니다(계 22:15). 여기서 사도 요한은 일반적이고 문자적인 ‘개들’이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독점할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가 아니라고 가르칩니까?(계 11:11; 20:6). 아닙니다. 계시록 22:15의 ‘그 개들’은 소아시아 7교회를 박해했던 율법주의적 유대주의자를 은유적으로 가리킵니다(신 23:18; 빌 3:2; 계 2:9; 3:9). 신약성경에 42회 나타나는 여성 명사 ‘부활’(avna,stasij)은 예수님과 사람에게만 적용되지만, 동식물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요 5:28-29; 11:25 등).
가정호: 최근 동물 장례문화도 급변하고 있습니다. 개나 고양이는 물론 키우던 햄스터, 파충류와 같은 소형 동물의 장례까지 등장했다고 합니다. 전국에 애완동물 장례식장까지 생기고 있는데 동물의 장례식,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영목: 장로교회의 표준문서 중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1644) “XIII. 죽은 자의 매장에 관하여”에는 ‘장례식’ 혹은 ‘장례 예배’라는 용어가 나타나지 않으며, 단지 ‘죽은 자의 매장’이라 부름으로써 교회의 예식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하물며 동물의 사체를 (소각) 처리하는 행위를 ‘장례 예배’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일본에서 애완동물이 묻힌 곳에 함께 매장되기 원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실제로 도쿄, 오사카, 홋카이도, 후쿠오카 등에서 인간과 동물의 동반 장묘가 허용되었고, 이용객은 증가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이런 요구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반려동물 부의금’에 대한 찬반 논쟁도 일고 있습니다. 다만 펫로스증후군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기독교인들이 이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잘 도와주고 위로해야 합니다.
가정호: 앞서 말씀드렸듯이 외국에서는 애완동물을 교회에 데리고 와서 함께 예배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성찬식에도 참여한다고 하는데, 동물에게 세례나 성찬이 가능합니까?
송영목: 미국 성공회의 경우, 동물친화적인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예를 들어, 동물을 교회당 안으로 데리고 와서, 개에게 빵과 포도주 대신에 비스킷(dog biscuit)을 제공하고 복을 빕니다. 미국 성공회 목회자 가운데, 세례교인이 아니지만 성찬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은 현실을 고려하여, 모든 동물에게 성찬식이 개방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초대교회의 그림에 성찬식에 참여한 사도의 발 근처에 개들이 있었던 사실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세례를 받지 않은 교인에게 성찬을 허락하는 ‘열린 성찬’은 성찬의 취지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역사로 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에 세례를 받은 성도만 주님의 잔칫상인 성찬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1:28). 하물며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없는 동물에게 성찬을 허용한다면, 주님께서 베푸시는 거룩한 식탁을 모독하는 범죄입니다.
가정호: 교수님, 앤드류 린지는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동물이 존중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주장하는데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송영목: 먼저 앤드류 린지(A. W. Linzey, b. 1952, Ph.D., D.D., Hon.D.D.)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성공회 사제로서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윤리, 신학, 동물복지를 가르치며 ‘동물윤리를 위한 옥스퍼드센터’(2006)를 설립했고, 동물권 운동가이자 채식주의자입니다.
피터 싱어는 교회 밖에서, 그리고 앤드류 린지는 교회 안에서 동물을 옹호합니다. 피터 싱어는 동물에게 쾌고감수능력이 있다고 보면서 동물을 인간의 억압에서 해방하려 합니다. 앤드류 린지는 동물을 향한 관대함의 윤리를 넘어 ‘동물성경’과 동물 예전까지 도입하자고 주장합니다.
린지를 필두로 하여, 동물신학에서 동물복지와 동물 권리를 긍정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목소리의 전제와 의도를 잘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주장의 성경 및 신학적 근거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동물해방주의자나 동물권 옹호자는 애완동물의 부정적 특징을 언급하기를 꺼리면서 인간에 의해 고통당하는 피해자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죄로 타락하여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인간처럼, 애완동물도 사람에게 항상 친근히 행동하지 않고 폭력적일 때가 있으며, 사람이 아니라 음식에 더 충성하기도 합니다. 물론 동물처럼 인간도 폭력적이기에 동물을 보호하는 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사람과 엄연히 다른 피조물인 동물을 성경적으로 올바로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사람을 동물 수준으로 낮추거나, 동물을 사람 지위로 격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동물을 학대하지 말고 잘 돌보아야 합니다.
가정호: 이제 ‘반려’라는 용어에 대해서 나누고 싶습니다. 과거에 비해 요즘은 반려라는 말을 잘 쓰지 않다보니 동물에게 넘어간 것 같습니다.
송영목: ‘반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들(me,tocoj, fi,loj, e[teroj, koinwno,j)은 사람에만 해당하기에 동물에게 적용하기 부적절합니다.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사용되는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에 현대 생물학의 모퉁잇돌인 진화론이 똬리를 틀고 있지는 않습니까? 언론매체들도 선호하는 표현인 ‘반려동물’에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축소하고 대등하게 두려는 진화론적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동물신학은 사람이나 동물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되고, 창조주와 섭리주이신 하나님께서 중심이셔야 합니다.
가정호: 저도 개를 키우는데 딸들이 집에 오더니 “봉자야, 언니 왔어” 그러더군요. 그래서 너는 이 개의 언니가 아니고 주인이라며 가르쳐준 적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반려라는 용어는 안 쓰길 바랍니다. 좋아하는 동물, 애완동물이라고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것이 또 하나의 운동이 되길 바랍니다.
가정호: 끝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동물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교수님의 견해 부탁드립니다.
송영목: 그리스도인은 펫로스 증후군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혹자는 애완동물을 잃었을 때의 슬픔을 ‘권리를 빼앗긴 슬픔’(disenfranchised grief)이라 부릅니다. 사회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은 상실과 슬픔으로 간주되어 공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사회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슬픔이기 때문입니다. 펫로스 증후군을 경험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약 22%는 애완동물을 다시는 키우지 않겠다고 응답합니다. 혼인했지만 의도적으로 자녀 낳지 않는 딩크족(DINK: Double Income, No Kids)이 애완동물만 키우는 경우 ‘딩펫(dink+pet)족’이라 불립니다. 이런 딩펫족은 애완동물 상실 증후군을 경험할 가능성이 크기에, 증후군의 특성을 살펴서 맞춤식 처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세상 끝나도록 신실하게 반려하시는 보혜사 예수님과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보다 펫과의 교류가 더 중요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성도의 교제를 회복하여, 동물이 주는 안정감을 능가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청교도 리차드 백스터(R. Baxter)가 오래 전에 간파했듯이,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은 대부분 가족과 같은 가까운 ‘사람’을 통해 나타납니다. 물론 우울증 환자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이라는 위대한 진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비밀이 보장된 목회자의 돌봄도 받아야 하며, 약물 치료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웃의 고통에 관해서는 어떤 증후군을 느껴보았습니까? 생각해 볼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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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