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2-1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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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칼럼 기사

  • [은혜의말씀]절대적 안정감
    세상은 늘 소란스럽고 하늘 아래 새것이 없다. 그래서 남을 탓하거나, 밖에서 답을 찾거나, 돌려막기를 해서는 노답이다. 변화무쌍하고 돌발변수가 많고 모든 것이 급변하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강하고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다.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다. 도무지 요동치지 않는 안정감이 있는 사람이다. 교통사고가 날 때는 전방주시 태만, 안전거리 미확보, 휴대폰을 본다거나 무엇인가 엉뚱한 데에 혼이 빠져 있을 때 사고가 난다. 애정결핍, 정서불안, 주의산만 할 때는 외로운 늑대가 되고 사회 부적응 환자가 되고 고독사에 이르고 만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어 청년처럼 덤볐다가는 다치기가 쉽다. 인생은 천천히 평온하게, 서서평해야 된다. 안정감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가? 아기로 태어날 때부터 울지도 않는 천하장사 같은 사람은 없다. 어린아이들은 철이 없고 미숙하나 산전수전 겪어가면서 산수를 배운다. 예수님처럼 키와 지혜가 자라나매 하나님과 사람에게 점점 사랑스러워져 가시더라. 건강한 사람은 편식하지 않고 균형 잡힌 건강한 식습관을 가지고 있다. 식탐이 없으니 과식하지 않고, 일 욕심이 없으니 과로하지 않고, 성공 욕심을 부리며 과속하지 않는다. 서두르면 사고가 나고, 성급하면 후회하게 되고, 조급하면 실수하기 쉽다. 밸런스, 균형이 건강이고 지혜이고 아름다움이다. 얼굴의 이목구비가 반듯한 사람이 잘생긴 사람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 자기를 돌아보면서 이웃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나무도 보고 숲도 보라.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중용의 미덕이 있고, 과유불급이라는 말도 있다. 아굴의 기도에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는 구절이 있다. 매 맞고 굶주리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한 사도바울은 가난한 데나 부한 데나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한다. 회복탄력성이 남다른 요셉은 허리가 잘 돌아갔다. 적응능력이 뛰어났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지만, 머슴살이를 할 때나 감옥살이를 할 때나 총리로서 대국을 다스릴 때도 한결같이 하나님과 동행하여 형통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은 이후에 대권을 이어받았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라 하신 말씀대로 행하였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매 이 땅에 오셨다. “지금은 엘리야 때처럼 주 말씀이 선포되고 지금은 모세의 때와 같이 언약이 성취되고 지금은 다윗의 때와 같이 예배가 회복되네”라는 찬양의 가사가 있다. 그 시대에, 그 지역에서, 바로 그 사람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평안을 주신다.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을 때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잔잔하게 하시고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신다.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기이한 복을 주시니 그를 찬송할지로다. 무슨 말을 들어도 상처받지 않고 무슨 일을 당해도 시험 들지 않는 절대 안정감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다. 성경의 구원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택하시고 오랜 시간 다듬고 만들어 가신다. 그 와중에 별일을 다 겪지만 늘 피할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가면 절대로 안 망하고 반드시 일어나게 된다. 그러니 요동하지 않는 절대 안정감을 누릴 수밖에 없다.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속 실력, 내공은 주님이 다듬으시는 중에 쌓인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께 나의 인생을 맡기며 순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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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0
  • [성서연구]그들 중에 있습니까?
    저는 매일 <말씀산책>이란 제목으로 5분 남짓한 영상을 찍습니다. 영락교회 홈페이지에도 있고, 유투브에도 있습니다. 제가 짧은 영상을 찍게 된 것은 코로나19로 교회 문이 닫혀 성도들이 대면 예배에 참석할 수 없게 되어 느끼는 영적 공허함을 메우는 차원에서 2020년 3월 1일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119대작전>, <한친구운동> <오이코스 말씀묵상> 등 제목을 바꿔가면서 계속했습니다. 작년부터는 <말씀산책>이란 이름으로 하루에 성경 한 장씩 진행합니다. 한 장에서 한 구절을 택하여 묵상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차례로 하지 않고, 왔다 갔다 하면서 찍고 있는데, 현재는 에스겔서를 읽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시편 중 제4권의 말씀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시편 99편에 왔을 때였습니다. 6절 말씀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의 제사장들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 있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중에는 사무엘이 있도다 그들이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 전에도 이 말씀을 많이 읽었습니다만, 별 감동이 없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제사장 중에 있고, 사무엘이 하나님을 부르는 자 중에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이 말씀이 제 가슴을 강하게 때렸습니다. 이 말씀이 날카로운 질문으로 다가왔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목사들 중에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요? 저는 목사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의 목사입니다. 서울노회 소속 목사입니다. 영락교회 담임목사입니다. 서울노회 회의록에 제 이름이 있습니다. 영락교회 주보와 요람 등에도 제 이름이 있습니다. 교회 홈페이지에도 있습니다. 인터넷을 열람하면 거기도 제 이름이 있습니다. 사람들도 저를 목사라 부릅니다. 저는 목사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가 하나님의 목사들, 즉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목사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목사들 중에 있는지에 대해 자신 있게 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1982년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그 해 말부터 교육전도사 사역을 시작했고, 전임전도사, 부목사, 담임목사로 오늘까지 살고 있으니, 사십 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긴 세월이었습니다. 머지않아 사역에서 은퇴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목사가 사역한 것을 성역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살아온 세월을 성역이라 부른다면, 저는 사양할 것 같습니다. 아니 사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성역이라 하려면 하나님을 위한 일을 했어야 하는데, 저는 그동안 저를 위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십 년을 돌아볼 때, 하나님을 위해 일한 시간보다 저를 위해 산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때도 성공한 목사가 되기 위한 것이라면, 그건 저를 위한 시간에 불과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기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목사가 되도록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 뒷바라지 하셨습니다.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영락교회는 신학대학원 3년 동안 장학금과 책값과 기숙사비와 용돈까지 주셨습니다. 많은 성도가 저를 도와 주셨습니다. 기숙사에서 춥지 않도록 포근한 담요를 사 주신 분도 계십니다. 목회 현장에서는 부족한 저를 많은 성도들이 돕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실 것 같아 두렵습니다. <난 네가 이런 목사가 되길 바란 게 아니다. 넌 내가 기대한 사역을 하지도 않았고, 네 됨됨이도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 넌 내가 사랑하는 목사들 명단에 포함될 수 없다>고 하실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목사들 중에 없다>는 결론에 이를 것입니다. 참 두렵고 민망합니다.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들 중에> 계십니까? <그들 중에> 있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다시 출발해야하겠습니다. 우리 생애가 끝날 때, 우리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이들 중에 있길 원합니다. 그들 중에 있기 위해 남은 삶을 더 깊은 믿음으로 바르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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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30
  • [서임중칼럼]엄마의 젖꼭지
    서른다섯에 늦게 신학을 시작해 시골교회를 담임하게 된 어느 날,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문안했다. 평소에는 당일로 다녀오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그날은 왠지 어머니와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늦가을의 으스스한 한기 속에 잠이 오지 않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괜스레 어머니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야야, 노인 냄새 난다.” 뒤돌아 눕는 어머니를 다시 돌려 눕히면서 “엄마, 젖 먹고 싶다.”고 장난스럽게 말하자, “아이고 망측해라, 니가 어린애가?” 하며 웃으셨다. 나는 어머니의 저고리 섶을 살며시 헤치고, 앙상한 몸에 말라붙은 젖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젖을 떼고 37년 만에 만져보는 엄마의 젖이었다. “아이구 야야, 애미 젖 안 나온다. 왜 이러노?” 하며 만류하시는 어머니.... 그러나 나는 “엄마… 젖 먹자”라고 말하며 젖꼭지를 입에 넣는 순간, 눈물이 쏟아지며 헉 하고 울음이 터졌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 없이 내 머리를 아기 머리 쓰다듬듯 어루만지셨다. 어머니도 울고 계심을 느낀 나는 한참을 울었다. “이 젖꼭지를 통해 우리 5남매가 살았구나.” 그날 이후 내 목회의 기본 철학은 ‘모심목회(母心牧會)’가 되었다. 강산이 네 번 바뀐 오늘까지도 그날의 감정은 잊히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농어촌의 작은 교회에서부터 도시의 대형교회, 개척교회에 이르기까지 다니며 ‘엄마 젖꼭지 목회철학’으로 말씀 사경회를 인도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젖꼭지다. 성도는 목사를 통해 신령한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그래서 목사는 성도에게 풍성한 젖을 먹이기 위해 온갖 영적 양식을 준비해야 한다. 그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일마다 성도는 하나님의 젖꼭지인 목사를 통해 하늘의 양식을 공급받는다. 영적으로 배가 부르면 그 목회 현장은 푸른 초장이 된다. 엄마의 마음이 아기의 환경이 되듯, 담임목사의 마음은 교회의 환경이 된다.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교회든,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교회든 그 중심에는 목사의 마음이 있다. 그래서 다시 ‘엄마의 젖꼭지’를 묵상하게 된다. 아기를 키우다 보면 엄마는 젖꼭지를 깨물릴 때가 있다. 첫째, 젖이 잘 나오지 않을 때 아기는 젖꼭지를 문다. 둘째, 이가 날 무렵 잇몸이 근질거릴 때도 젖꼭지를 문다. 엄마의 반응도 두 가지다. 하나는 순간적으로 아기의 엉덩이를 때리며 “왜 깨무노” 하고 화를 내는 것. 그러면 아기는 울음을 터뜨린다. 다른 하나는 젖이 안 나와 아기가 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미안한 마음으로 아기와 눈을 맞추며 엉덩이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다. 그러면 아기는 스르르 잠이 든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젖꼭지를 깨물리지 않으려면 젖이 풍성해야 한다. 그래서 엄마는 젖이 잘 돌도록 음식을 챙겨 먹는다. 또 하나, 이가 날 무렵의 아기는 배가 고플 때는 젖을 깨물지 않는다. 그러나 배가 어느 정도 부르고 엄마가 자신을 보지 않고 다른 데 시선을 두면, 관심을 받고 싶어 젖꼭지를 문다. 그래서 이 시기의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는 엄마가 눈을 맞추고 관심을 주면 젖꼭지를 깨물지 않는다. 목회 현장도 이와 같다. 목사의 마음이 편안하고 생활이 안정된 교회는 은혜와 감사가 넘친다. 반대로 목사의 마음이 불안하고 지친 교회는 영적 기갈과 갈등이 반복된다. 젖이 나오지 않아 젖꼭지를 깨무는 교인, 관심을 받고 싶어 젖꼭지를 깨무는 교인…오늘의 교회 현실이다. “좋은 엄마는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 지치면 쉬고, 힘들면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엄마다.”라는 말처럼 교회도 완벽한 목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젖을 풍성히 준비하고, 젖꼭지를 물리는 순간마다 아기와 눈을 맞추듯 성도의 상황을 살피고 공감하는 목사를 원한다. 목사도 사람이기에 지칠 때는 쉼이 필요하다. 그럴 때 교회의 도움을 겸손히 요청할 수 있어야 하고, 교회는 그 마음을 헤아릴 때 푸른 초장이 된다. 요즘 AI로 설교를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젊은이들은 ‘라떼’라며 웃을지 모르지만, 나는 묻고 싶다. 거기서 영양가 있는 젖이 생성될 수 있을까? 설교는 글쓰기의 문제가 아니다. 말씀 선포의 본질을 고민해야 한다. AI는 생명이 없다. 감정이 없다. 사랑이 없다. 영적 경험이 없다. 문장을 나열하는 능력은 AI가 더 뛰어날 수 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떨리는 마음, 성도를 향한 사랑, 골방에서 기도하며 씨름하는 시간, 삶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은 AI가 대신할 수 없다. 자료 정리, 배경 분석, 예화 적용, 표현 다듬기 등은 AI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설교 전체를 AI에 의존한다면 생명력 있는 메시지는 나올 수 없다. 말씀은 살아 있어야 하고, 설교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지고한 수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의 삶과 기도, 그리고 경험된 영적 체험이 담겨 있어야 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젖꼭지다. 풍성한 젖을 위해 자기 자신과의 영적 씨름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교인은 젖꼭지를 깨물어서는 안 된다. 목사는 교인들에게 깨물리지 않는 젖꼭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설교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설교자는 언어라는 붓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그림처럼 그려 성도들에게 보여주는 거룩한 화가이다. 성도는 그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되고, 깨닫고 회개하며 결단하게 된다. 설교의 교과서는 성경이다. 다양한 색채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듯,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다양한 내용과 예화, 경험은 참고 도서일 뿐이다. AI도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한 설교의 도구일 뿐이다. 주체와 객체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다시 엄마의 젖꼭지를 묵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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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30
  • [시사칼럼]‘교회폐쇄법’ 논란에 즈음하여
    최근 일부 국회의원들이 민법일부개정안을 발의하자 기독교계가 크게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그 내용을 조금 들여다보자면, 현행 민법 제38조의 “법인이 목적 이외의 사업을 하거나, 설립허가의 조건에 위반하거나, 기타 공익을 해하는 행위를 한 때에는 주무관청은 그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는 기존의 조항에 “법인이 대한민국헌법 제20조 제2항에서 정한 정교분리의 원칙 또는 공직선거법 등 관계 법령을 위반하여 선거, 정당 또는 후보자와 관련하여 조직적·체계적으로 정치 활동에 조직적·반복적으로 개입하여 공익을 현저히 해한 때”라는 조항을 덧붙였습니다. 또한 제38조의 2 조항을 신설해서 “➀ 주무관청은 법인이 제38조 1항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다고 의심할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해당 법인에 대하여 업무 및 재산 상황에 대한 보고를 명하거나 필요한 자료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 ➁ 주무관청은 제1항에 따른 확인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 소속 공무원으로 하여금 법인의 사무소, 사업장 또는 그밖의 장소에 출입하여 장부, 서류, 그밖의 물건을 검사하게 하거나 관계인에게 질문하게 할 수 있다”고 규정합니다. 이에 대한 교계의 일반적인 반응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교회언론회는 1월 26일 논평을 통해 “해당 법안을 일명 ‘교회폐쇄법’으로 간주하고 반대한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같은 날 ‘악법대응본부’도 “위험한 발상이 담긴 이 법안은 가히 ‘종교법인 강제해산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며 비판의 수위를 높였습니다. 유튜브의 언어는 더욱 직설적입니다. “결국 교회폐쇄법이 발의되었습니다”(czchurch). “사탄의 칼끝 교회폐쇄법안”(bzCmk70). “민주당이 교회폐쇄법을 만들었다”(54KQwc). 법학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비슷한 논평도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물론 조심스럽게 반론을 제기하는 입장들도 있습니다. “교회는 해산시킬 수도, 해산되지도 않는다”(cupnew, 1. 28). “교회 SNS 떠도는 ‘교회해산법’ 발의, 진실은?”(logosian, 1. 26). 하지만 앞선 입장들과 비교하면 소수설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일선의 목회자들 입을 통해서도 ‘교회폐쇄법’이나 ‘교회해산법’이라는 말들이 더 널리 회자되지 않겠습니까? 벌써부터 교회로 성도들의 다음과 같은 문의들이 빗발친다고 합니다. ‘교회폐쇄법이 만들어졌다는데 사실인가요?’ ‘강제적인 교회해산법이 추진된다는데 목사님들 가만히 계시면 되겠습니까?’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또한 표현의 자유를 강력하게 보장하고 있습니다. 일반 법안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찬반의 입장을 피력하는 것 또한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표현의 자유의 일환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선전이나 선동까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일단 사실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발의된 법안의 이름은 ‘교회폐쇄법’이나 ‘교회해산법’이 아니라 ‘민법부분개정법률안’입니다. 그 내용이 교회를 탄압하고 강제로 해산시킬 수 있는 독소조항을 품고 있으니 교회폐쇄법이나 교회해산법과 다름없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이유만으로 존재하지 않는 법안을 존재한다고 우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또한 해당 법안의 발의자 중에 민주당 소속 의원도 들어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표발의자는 무소속 국회의원이며 기타 다른 정당 소속 의원도 포함되어 있으니, ‘민주당이 교회폐쇄법을 만들었다’는 말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 법안이 통과된다면 어떤 위험성이 있을지에 관한 논의는 당연히 가능하고 또 충분하고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폐쇄법’ 혹은 ‘교회해산법’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자제해야 합니다. 정확히 ‘민법개정안 반대’라고 해야 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허구가 아니라 진리에서 기인함을(요 8:32) 안다면 더욱 사실에 입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오랫동안 말도 안되는 선전·선동으로 시달림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 때문에 식인집단이라는 공격을 받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습니까? 어린아이를 잡아먹는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 때문에 특히 한국교회 초창기에 얼마나 끔찍한 핍박을 감내해야 했습니까? 서로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호칭 때문에 근친상간집단으로 몰려서 숱한 수모와 핍박을 견뎌야 하지 않았던가요? 무엇보다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종교는 아편’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져서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고하게 목숨까지 잃었습니까? 이처럼 교회는 그릇된 선전과 선동의 피해를 누구보다 많이 입으며 생존해 왔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웬만한 거짓말은 이제 기사거리도 되지 않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교회를 향한 근거 없는 억측과 악의에 찬 선전과 선동이 존재합니다. 그래도 교회만은 진리의 수호자로 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교회만은 사실의 보루(堡壘)로 세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면 먼저 교회가 허구가 아니라 사실을, 가짜뉴스가 아니라 진실만을 말하고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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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30
  • [교회건축칼럼]교회건축의 상징성
    교회의 외관은 교회의 대외적 이미지를 알리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과거 중세 교회와 성당은 높은 첨탑과 과대한 형태, 벽돌재료, 스테인그래스의 장미창등이 교회당을 알리는 주요 모티브였다. 이런 양식은 교회의 상징성을 힘의 압도적 스케일로 교회를 표현해 왔다. 현재에도 아직 이런 양태의 교회 외관이 종종 눈에 띄고 있으며 도시내에 차별화된 장소성을 제공하고 있다. 과도한 스케일의 건축형태는 유지관리비와 운영에 많은 비용이 지출되곤 한다. 교회다움의 건축표현이 크기와 높이 특정한 재료로 표현되는 것은 결국 획일화의 주된 요인이 되곤한다. 과거 교회가 전국이 거의 비슷한 형태로 인식되어 지는 것은 이런 상징성 때문이다. 그러나 미학적측면에서 교회라는 상징적 언어가 리얼리티에서 멀어지면 멀어질 수록 성스러움의 표현은 보다 더 사실적이면서도 인상적인것이 된다. 반드시 교회 다움의 외적 양식은 교회가 추구해야할 더 많은 가치를 후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눈에 보이는 상징체계는 기호적 표현에서 체험적 상징으로의 전환이될 때에만 획일화를 극복할 수 있다. 체험적 내용들은 외부에 수공간이 도입부에 설치된다면 그 공간은 성도가 예배당으로 진입하는데 예배의 준비공간적 기능을 제공한다. 우리가 물을 보면 감성적으로 순화되어지고 마음속의 복잡한 것들이 다 사라지고 순화되어진다. 예배자가 예배드리기 전에 자기 마음을 정돈하고 정화시키는 전이공간과 같은 기능을 제공한다. 이런 유형의 공간이 체험적 공간이며 이런 유형은 강한 장소성의 상징을 부여한다. 건축에서 상징은 참여 기능을 가능케한다. 물이 가진 성경적 의미는 풍요와 재생, 순화, 정결의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수공간을 바라보면서 그런 의미로 참여하게 된다. 수공간의 풍요를 내 마음에 투영시키고 정결을 의식적으로 다짐하게 된다. 교회건축의 상징을 보여지는 체계에서 참여되어 지는 것으로 바뀔 때 그 공간은 가장 의미있는 공간이 된다. 또 하나의 상징성이라면 교회건축이 지역사회에 열려있는 것이 최고의 상징이다. 열려있는 것의 이미는 참여이며 동일화이기 때문이다. 지역사회의 열린근린센터가 되고 지역 문화공간이 될 때에 지역사회는 본질적으로 교회와 유지적 연합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것은 상징이 지향하고 있는 참여의 의미를 잘 반영하게 되는 것이며 그 교회는 가장 장소성이 강한 랜드마크가 된다. 랜드마크는 원시시대 부족이 자기 땅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구분해 놓은 경계석이다. 이 랜드마크가 자기소유를 구분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주변과의 연계와 소통을 의마하는 것이기도 하다. 교회는 어느지역에 건축되어 지던지 그 주변과 끊임없는 소통과 공유를 통해 존재를 규정해야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삼으라는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현대적인 건축의 언어로 표현해 내는 것은 쉽지 않다. 요즈음 신도시 재개발지역의 교회모습은 건축의 상징성을 어떻게 구현해 내는 것이 랜드마크적일까 하는 과제는 성도들의 발걸음을 교회로 이끌게하는 직접적 모티브이기때문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열려있는 교회공간의 체험이 역동적으로 발흥되는 공간의 내용들을 분석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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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30
  • [목회자칼럼]사람을 최고라 하고 싶습니다!
    정돈화 목사님의 글 가운데 이런 문장이 자주 회자됩니다. “목수는 나무가 최고라고 하고, 석수는 돌이 최고라 하지만, 목사는 사람이 최고라 하고 싶습니다.” 보수적 신학 전통을 가진 고신교회 정돈화 목사님의 이 고백은 처음 들을 때는 다소 의외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곱씹어 생각해 볼수록, 이 문장은 신앙과 교회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 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일의 성취, 결과, 효율, 성과…. 그러나 신앙의 자리에서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일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나고 있는가?” 아무리 옳은 말이라 해도, 아무리 정당한 주장이라 해도, 그 과정에서 사람이 무너지고 상처 입는다면 우리는 멈춰 서야 합니다. 2026년 우리 교회 청지기 세미나 강사로 오신 목사님이 이런 인상 깊은 말을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잇는 세로 나무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가로 나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로 나무는 분명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가로 나무가 빠지면 십자가는 사람을 때리는 몽둥이가 되고 맙니다.” 이 말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믿음의 고백이 아무리 분명해 보여도, 사람을 향한 사랑과 책임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깊은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믿음은 결코 수직으로만 자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 향한 믿음은 반드시 이웃을 향해 수평으로 뻗어가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 사회와 교회 안에는 사람을 너무 가볍게 대하는 모습들이 적지 않습니다. 말은 점점 거칠어지고, 평가는 점점 빠르고 단정적이 됩니다. 충분히 알기도 전에 판단하고, 이해하기보다 규정하며, 대화하기보다 낙인을 찍는 일이 너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쉽게 상처 입는 것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가수 안치환 씨는 “사람이 꽃보다 더 아름다워”라고 노래했습니다. 배우 김혜자 권사님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을 통해, 어떤 이유로도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고백들은 단순히 감성적인 문장이 아니라, 사람의 존엄을 향한 깊은 통찰로 들립니다. 성경은 왜 우리가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에 대해 더욱 분명한 근거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되,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가장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명령 역시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나타나셨지만, 제자들 중 일부는 여전히 이 사실을 의심했습니다(마 28:17). 그렇지만 주님은 실수 많고, 믿음이 부족했던 이 제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일보다 사람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나의 옳음에 앞서 사랑을 먼저 선택하고 있는가?” “내 말과 태도가 누군가를 세우고 있는가, 아니면 상처를 입히고 있는가?”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신앙은 제도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봉사, 말과 선택의 목적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사람을 살리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그 사람 속에는 바로 ‘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대 한가운데서, 신앙을 가진 한 사람으로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을 최고라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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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30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아우구스티누스와 국가 권력1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e, 354-430)는 라틴 기독교를 체계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세 천년의 사상적 기틀을 마련하고 종교개혁의 정신적 원류가 된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은 신학논의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 그는 은총의 교리를 확립하여 ‘은총의 박사’(Doctor gratiae)라는 칭호를 얻었고, 예정교리를 취급하여 오늘의 칼빈주의 신학의 원조로 지칭되기도 한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칼빈주의 신학은 이미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속에 드러나 있으므로 워필드(B. B. Warfield)는 그를 “칼빈 이전의 칼빈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 그는 “역사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역사의 의미를 정신사적으로 파악하는 혜안을 지니고 있었다. 20세기 저명한 교부학자인 알타너(B. Altaner)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말하면서, “위대한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창조적 정열, 오리제네스의 영적 풍부함, 치푸리아누스의 교회적 의식,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리한 논리를 플라톤의 높은 이상주의와 사변에 결합시킨 인물이다. 그리고 라틴인의 실용적 감각을 헬라인의 영적 유연성에 일치시켰다. 그는 교부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가이며, 전 교회의 가장 주요하고도 영향력 있는 신학자이다.”라고 평한 바 있다. 그래서 그는 서양 기독교 전통에서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nas, 1225-1274)와 쌍벽을 이루는 인물로 평가되어 왔고, 하르낙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도바울과 16세기 루터 사이의 가장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라고 불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양한 주제에 관한 광범위한 논설을 전개하였고, 그가 남기 저술은 엄청나게 많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망 직후인 431-439년에 『아우구스티누스 전기』를 쓴 포시디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1,030개의 저서명을 열거한 바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말년에 쓴 『「재고론』(Retract)에서는 427년까지 저술한 93개의 저서 목록을 열거했다. 이 저서들은 교부문헌의 최대 총서인 『민뉴전집』 32-47권에 수록되어 있는데, 500쪽의 책으로 환산해도 수십 권의 분량이 된다. 흔히 그의 작품은 자서전적 저술, 성경주석에 관한 것, 변증론적 저술, 교리논쟁적 저술, 경건문학류 등으로 구별되는데, 이 작품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아 인식에서 시작하여 존재, 진리, 사랑, 하나님 인식의 가능성, 인간의 본성, 영원성, 시간, 자유, 역사, 섭리, 정의, 행복, 평화 등 철학적인 분야는 물론 신앙과 이성의 관계, 악의 문제, 하나님의 은총론과 예정론, 삼위일체론 등 다양한 신학적 주제를 취급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 중 신앙과 이성의 관계, 악의 문제, 하나님의 은총론과 예정론, 삼위일체론 등은 가장 많은 관심의 주제였다. 그 외에 또 한 가지 주제가 국가권력의 범위를 다룬 글이다. 그는 위대한 사상가이자 신학자였고 역사철학자였지만 그의 주장이 다 정당하고 다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교회관과 성례관은 중세 기독교, 곧 로마가톨릭 교리 발전에 유효한 근거가 되었다는 점 때문에 그는 개신교와 로마가톨릭 양자에 의해 존경과 칭송을 받아왔다. 그의 사상에서 한 가지 잘못된 주장이 국가권력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는 이단징벌에서 국가권력이나 경찰력을 이용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종교적 강제와 박해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후에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단과 대결하면서 국가권력의 구속력과 강제력을 이용하고자 했는데, 이 이론을 꼼뻴레 인뜨라레(Compelle intrare)라고 말한다. ‘들어오라고 강요하라,’ 혹은 ‘억지로라도 들어오게 하라’라는 의미인데 ‘강제권 이론’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14장 23절에 근거한 이론이었다. 즉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에 근거하여 이 논리를 폈다. 즉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가복음 주석에서 두 동사를 사용한다. 즉 'coge intrare'(들어오라고 강제하라. 아프리카 텍스트)와 ‘compelle intrare'(들어오라고 강요하라, Vulgate)를 사용하면서 억압의 이론을 발전시켰다(게리 윌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186). 이것을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활동했던 5세기 당시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313) 이후 황제는 교회와 신앙문제에 대한 사법권을 행사했고, 공의회를 소집하고(325) 정통과 이단 시비를 가리기도 했다. 이단자들에 대한 벌금, 재산몰수, 고문, 사형 등의 형벌을 가하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핍박받았던 도나티스트들(Donatists) 조차도 이단을 반대하는 법과 강제력에 도전하지 않았다. 단지 이런 법이 자기들의 집단에 적용되는 것을 반대했을 따름이다. 교회 규율문제(권징의 문제)에 있어서만 정통신앙과 다르다는 입장이었고, 그 결과로 분리주의적인 자기들의 집단이 이단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었던 것이다.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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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6-01-30
  • [은혜의말씀]기적을 부르는 일상감사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본문 말씀을 살펴본다. 날은 저물어 먹을 것을 얻고자 하되 거기는 아무것도 없는 빈 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네가 문제를 해결해 보라는 것이다. 안드레가 한 아이에게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왔다. 남자만 오천 명이었으니 여자와 어린이를 합치면 거의 2만 명이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50명씩 앉히라고 하셨다. 모든 것은 질서가 있다. 사랑에도 질서가 있다고 한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경천애인).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만 열두 바구니시에 거두었다. 예수님께서는 버리는 것이 없이 모으라고 하였고 열두 광주리는 완전수이다. 그만큼 주님의 은혜는 풍성하고 넘치는 것이다. 오병이어 기적은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믿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기적이 일상이 된다. 건강의 기적, 자식 농사의 기적, 날마다 말씀 안에서 기적같은 일상에 감사하고, 기적의 연속을 원하고 바라고 기도해야 한다. 다들 안 된다고 포기하는 순간에 안드레와 한 아이의 헌신은 기적의 마중물이 되었다. 작은 것에 감사할 때 큰 것이 온다. 소박한 데서 대박이 나고 평범한 데서 비범한 것이 나타난다. 한낱 어린아이의 감사라도 약육강식, 무한경쟁, 승자독식의 세상에서 힘없고 가진 것이 없지만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사용되는 사람은 잘난 사람, 예쁜 사람이 아니다. 성경을 보면 주께서는 소자, 약자, 빈자를 들어 쓰신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미천한 종, 작은 자로 여겼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하게 들어 쓰셨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적은 일에 충성하면 많은 것을 주신다. 안드레는 그저 보잘것없는 음식을 내놓는 어린아이를 앞으로 인도했고, 본인이 믿는 대로 형 베드로를 전도하는 순수함이 있었다. 먼저 믿었다고 텃세를 부리지 않고 형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게 하였다. 오병이어 기적은 민생고를 해결하였다. 주님은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도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사랑하는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다. 기적 이후에도 예수님께서는 버리는 것이 없게 하셨다. 부족함이 없고 틀림이 없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교회는 다양성 가운데 일치를 이루는 다일공동체이므로 어린아이와 어른, 약자와 강자가 공존한다. 열두 광주리가 남은 것은 하나님이 쩨쩨한 분이 아니라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는 영광의 주님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감사를 회복하라. 일용할 양식을 감사하라. 하루 삼시 세끼에 감사하라. 잠언의 말씀처럼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바울처럼 내 은혜가 족하도다, 다윗처럼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박국처럼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리로다 하는 것이 진정한 성도의 모습이다. 비록 신통치 않더라도 내게 있는 작은 것에 감사하고, 기꺼이 주님께 올려 드릴 때 기적이 일어난다. 매일 감사의 깃발을 높이 들 때 하루하루 일상의 기적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내게 있는 작은 것을 들 때 기적이 일어난다. 다윗의 물맷돌, 모세의 지팡이, 라합의 붉은 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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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30
  • [교회법특강]장로직의 시무 기간에 대해
    한국교회는 교파를 불문하고 장로직의 시무 연한을 대부분 만70세까지로 정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에서 교회법은 장로의 시무(봉사) 기간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 우선 성경은 장로의 시무가 종신인지 한시적인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장로가 종신으로 선출되었다는 인상을 성경에서 받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교회가 직분이 종신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종교개혁가 칼빈의 원리를 따라서 형성된 개신교회는 다음 이유로 한시적 봉사를 더 선호했다: 교회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독재와 교권주의를 예방하기 위해, 둘째, 교회 치리에 교인의 영향을 더욱 늘이기 위해 셋째, 교회에 잠재한 다양한 능력과 은사가 가능하면 더 많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를 보면 교회마다 장로 시무 기간이 조금씩 달랐다. 제네바교회는 임기 1년이 원칙이었다(1541년). 제네바는 시의원처럼 매년 12명 장로를 2월에 임명하고(한 해의 시작 이전) 임기는 1년으로 정했다. 재임명 될 수도 있었으나 시무가 끝날 수도 있었다. 프랑스 교회 역시(1559년) 칼빈의 노선을 따라 장로의 봉사가 종신이 아니라고 규정했다. 네덜란드 교회는 엠던 총회(1571년)와 돌트 총회(1619년)에서 장로 임기를 2년으로 정했다. 한편 유럽의 신앙 박해로 영국 런던과 인근에 거주하면서 세워진 난민교회(불어, 네덜란드어,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난민교회)에서는 장로 임기를 종신으로 규정했다(1555년). 교회에 유익하고 성경에 더 가깝고 직분에 합당하는 등 11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사도들이 장로를 임시로 세웠다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점,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임기제를 시행할 경우 양을 모르는 목자, 목자를 모르는 양이 나오는 상황을 우려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처음에는 장로 임기를 1년으로 정했으나(1560년), 1578년 교회법에서는 기본적으로 장로 시무를 종신으로 규정하면서도 윤번제를 도입했다: “장로들은 그 직무를 행하기에 적합한 하나님의 은사를 가지고서 그 직분에 한 번 부름을 받았다면, 다시는 그 직분을 떠날 수 없다. 일정한 수의 장로들이 각 회중에 의해 선출될 수 있으나, 그들 중 일부는 적절한 기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수 있다. 마치 율법 아래에서 성전을 봉사할 때 규례를 따랐던 레위인처럼 말이다. 회중마다 장로들의 수는 제한될 수 없으나, 사람들의 범위와 필요를 따라서 이루어져야 한다.” 바로 이 윤번 제도가 미국 장로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한국장로교회에 도입된다. 미국장로교 총회는 우여곡절 끝에 1857년 임기제나 다름없는 장로 윤번제(rotary eldership)를 도입한다. 장로직은 항존이나 시무 기간은 개체교회 재량에 맡겼다. 개체교회가 공동의회를 통해 장로의 시무 기간을 종신으로 혹은 임기를 정해 세우고, 임기제 경우에는 3년으로 규정했다. 현재 이 전통을 이은 교회는 미국정통장로교회다. 윤번제 규정은 핫지(J.A. Hodge) 목사가 쓴 “교회정치문답조례”(1882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 책은 1917년 곽안련 선교사가 한글로 번역하여 1919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참고서적으로 채용되었다: “치리장로는 임기를 정하여 선출할 수 있는가? 지교회가 무흠입교인 투표에 의하여 일정 기간 시무할 치리 장로를 선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장로직은 항존이나 직분과 직무의 이행과는 엄연히 구별이 있고 시무장로와 직무를 이행하지 않은 장로와의 구별도 있다. 얼마 동안의 임기를 가지고 선출하는가? 장로의 임기는 3년을 넘지 못한다”(541-542문답). 한국장로교회는 1960년 초반까지는 장로 윤번제를 시행했다. 그러다가 이후 대부분 만70세로 시무 연한을 정했다. 지금까지 본대로 역사에서 장로의 시무 기간은 다양하게 이해되었다. 시무 기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로의 항존 직무를 우리가 어떻게 바르게 알고 봉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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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30
  • [성서연구]길 떠나는 사람들
    2026년에 아름다운 시작이 있길 원합니다. 이스라엘은 사백삼십 년 동안 살던 애굽을 떠나 위대한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노예로 노역을 하던 라암셋(고센의 다른 이름)을 떠나 숙곳을 거쳐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쳤습니다. 20절입니다.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그들은 마라톤 출발선에 선 선수들 같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을 향해 광야로 접어들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광야가 초행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광야를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살던 고센은 기름진 나일강 유역의 삼각주 지역이므로, 광야와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노예였지만, 풍요로웠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거주지도 없고, 척박한 곳입니다. 광야를 경험한 유일한 사람은 모세였습니다만, 그가 경험한 미디안 광야는 이스라엘이 통과할 광야와 여러 상황이 전혀 달랐습니다. 미디안에서 모세는 이드로의 사위로 정착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수백만 명이 함께 먹고 자고, 이동해야 했습니다. 모세가 경험한 광야 생활과는 전혀 다른 광야 생활일 게 뻔했습니다. 미지의 세계였고, 백성들은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미래를 모릅니다. 두렵습니다. 2026년을 시작했지만, 한 치 앞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형편을 잘 아셨습니다.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시는 분이 그들을 방치하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무책임하신 분이 아닙니다. 반드시 길을 인도하시고, 도우십니다. 이스라엘을 도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깨서 우리를 더 잘 아십니다. 본문은 광야로 나가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본문에서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가셨습니다. 2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까지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미래를 위해 미리 준비하시는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리아 산에 먼저 오셔서 아브라함과 이삭을 위해 숫양을 준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도 우리보다 먼저 가셔서 준비하실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형편에 꼭 맞게 인도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광야의 낮은 뜨겁습니다. 햇볕을 가릴 구름이 필요하기에 구름 기둥으로 차일을 펴셨습니다. 광야의 밤은 캄캄하고 춥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기둥으로 따뜻하고 밝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낮에 불기둥, 밤에 구름 기둥을 보내는 일은 없습니다. 정확하게 처지에 맞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가 우리보다 더 좋아보여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사는 밥을 먹어도 될 환자에게는 밥을, 죽을 먹어야 할 환자에게는 죽을 주십니다. 죽에 감사하며 살면, 후에 더 좋은 것을 먹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맞춤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22절은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낮에도, 밤에도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낮에도, 밤에도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2026년도에 한국기독신문의 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선한 인도가 함께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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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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