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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마음을 지키라 (잠언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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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켜야 된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마음이 병 들면 다 무너지고, 모든 관계도 마음에서 부터 시작된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고, 힘줄이 있고, 성경말씀에서처럼 마음의 밭이 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마음을 잘 가꾸고 잘 지킬 것인가, 6가지로 살펴보려 한다.
1. 초심: 시작할 때 마음은 대체적으로 순수하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첫 사랑을 회복해야 된다. 동안을 가지려면 동심을 회복하면 된다. 마태복음 28:16 실패한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서 첫사랑을 회복하였다.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기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된다. 처음처럼 초지일관하며 한결 같을 때에 변질되지 않고 괴물이 되지 않는다.
2. 진심: 아굴의 기도는 헛된 마음과 거짓된 마음을 버리고 필요한 것을 구하라고 한다. 사람은 진심이 통하면 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진정성이 느껴지면 된다. 진심이면 된다. 에서는 장자권을 만홀히 여기고 진지함이 없이 가볍게 여겼다가 망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사위들은 심판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다가 망했다. 매사에 진지하라.
3. 중심: SFC강령에는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이 있다. 쓰리센터링이다. 사람이 중심을 잡아야 요동치 않는다. 인간관계의 중심은 하나님 중심이다. 성경 중심으로 성경적인 세계관을 갖추어야 된다. 교회가 소망이다.
4. 열심: 사역을 잘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열정의 소유자들이다. 엘리야는 열심이 특심이었다. 성령은 불이다. 열정은 해도 해도 지치지 않는 힘이다. 사역에는 이열치열, 마태효과가 있다. 열심의 반대, 게으른 것이 죄악이다.
5. 전심: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도둑질을 하는데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한다고 그것이 좋은 일인가? 그렇지 않다.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열심 속에는 인간적인 욕심과 야망이 묻어날 수가 있다. 단순한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을 가져야 된다.
역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 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쉐마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다윗은 시편 78:72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한 100% 전심을 원하신다. 최고의 기도는 이심전심이다.
6. 일심: 건강한 교회는 고린도전서 1:10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해야 된다. 마음이 콩밭에 가있으면 안 된다. 부부는 일심동체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의 심장, 성령님의 탄식을 공감하는 것이 믿음이다. 다음세대가 다른 세대가 되지 않도록 성경말씀을 잘 가르치고 전해야 된다. 한마음으로 힘써 마귀와 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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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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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과정 지향 결과 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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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수많은 회의와 기도 후에 선택한 최고의 결정이 5년이 지난 후 최악의 손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고, 별로 심사숙고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급작스럽게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5년이 지난 후 최고의 유익을 주는 경우가 있다. 경험과 지혜로 어느 정도의 결과를 예측할 수는 있으나 꼭 그것이 그렇게 예측한대로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을 진행에 있어서 발생하는 네 가지 경우의 수는 다음과 같다. 1)과정도 결과도 나쁘다. 2)과정은 좋은데 결과는 나쁘다. 3)과정은 나쁜데 결과는 좋다. 4)과정도 결과도 좋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4번이기를 바라지만 매사가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과정의 수를 선택할 수만 있다면, 결과는 조금 부족해도 과정이 온전한 것과 결과와 과정이 온전한 것을 선택하고 싶다. 결과는 좋은데 과정이 좋지 못하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수취와 능욕과 함께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죄를 짓고, 불법을 행하고, 선함이 사라지면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결코 자신과 타인에게 자랑스러울 수 없다. 그래서 동일한 결과를 얻는다면 과정의 아름다움을 선택하고 싶다. 어떻게 하겠는가? 최선을 다해 과정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실력의 부족과 하늘의 도움이 없어 모두가 원하는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최고의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을.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한다.
부산성시화운동본부가 전심전력하고 모든 성도들이 기도하고 협력한 결과 98해운대성령대집회를 은혜 가운데 잘 감당했다. 결과에 대해서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말들이 더 많다. 좋은 이야기와 격려 그리고 힘이 되는 말을 많이 듣는다. 실제적으로 그 이후에 한국교회의 대중소형 집회들이 선하고 아름다운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집회의 과정과 결과를 통해 성령의 파도 즉 부흥, 회집 인원 수 보다는 회집 교회수의 참여도 증진, 다음세대를 향한 비전의 공유, 미래교회의 리더십 발굴과 협력이 일어나기를 소원했다.
열매와 바람의 여세를 몰아 성령대집회 시작의 이유였던, 다음세대의 부흥과 비전을 위한 2025 청소년 월드캠프에 가일 층 박차를 가하였다. 진행되는 과정이 아름다웠다. 이달 초까지 6000여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등록을 했다. 다음세대 사역자들이 모이고 함께 협력했다. 98해운대성령대집회를 통해 모인 재정이 월드캠프의 예산으로 제법 지원되었다. 청소년들의 숙소가 될 호텔과 리조트와 기숙사와 연수원도 확보가 되었다. 프로그램과 행사 장소인 벡스코와 40여명이 넘는 강사진도 순조롭게 준비가 되었다. 그런데 정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변수가 발생했다. 국회를 통해 지원을 요청한 국고 예산후원이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의 발생으로 말미암아 국회에서 심의조차 하지 못한 채 사라졌고, 과정의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다. 예산과 관련된 국회의원과 관련 인사들과 공무원들을 정말 많이 만나 조언을 듣고, 협력을 구하였고, 소속 소위도 통과했기에, 어느 정도 아니 거의 국고 예산지원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는데 한 순간에 모든 수고의 과정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월드캠프 준비위원회는 절망, 포기하지 않고 다시 과정의 최선을 통해 가장 아름다운 결과를 향해 달음질하고 있다. 부족한 예산을 한 달 안에 준비해야 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또는 “결과는 모르겠고 과정에 최선을 다했으면 만족 한다.”는 명제는 우리가 원하는 문장이 아니다. “아직도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는 일사각오의 사명의식으로 우리 앞에 놓인 난관을 돌파해야 한다. 그래서 과정지향 결과지상의 열매를 거두고 싶다. 다짐하고 결단한다. 가장 아름다운 최선의 과정과 가장 완벽한 최고의 결과를 거두기 위해 고지를 향해 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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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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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부산에서의 첫 성탄절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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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첫 성탄절 혹은 크리스마스를 기념한 때는 언제였을까? 부산에 선교사가 도래한 이후 성탄절을 기념했겠지만 처음부터 한국인들이 성탄절을 알거나 이를 기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산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행사를 거행한 것은 『해은일록 海隱日錄』을 남긴 민건호(閔建鎬)에 의하면, 1884년 12월 25일(음력 11월 9일)이었다고 한다. 부산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아 ‘야소 생일’이라고도 불린 이날 휴일을 보냈다고 한다. 이것이 부산에서 성탄에 대한 첫 기록이다. 1891년 9월에는 북장로교의 베어드가, 10월에는 호주선교사 제2진 5명이 내부하게 되는데 이들이 부산에 온 이후 성탄절을 지키고 성탄절 날에는 선교사들이 모여 성탄 파티를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한국인과 같이 성탄행사를 거행한 것은 아니었다.
기록상으로 한국인들이 함게 모여 크리스마스를 기념한 첫 기록은 부산진교회가 성탄절을 지킨 1900년 12월 25일이었다. 이날 성탄 예배에는 성인 60명, 아동 57명 등 117명이 참석했는데, 예배 공간이 협소하여 남자들은 여성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예배당 바깥에 앉아 예배드렸다고 한다. 이 때의 회집은 1900년 중 가장 많이 모인 예배였다고 한다.
1900년 11월 일 주일에는 남자15명, 여자 48명 등 63명이 회집했고, 12월 16일에는 50명, 12월 23일에는 64명이 참석했으나 12월 25일에는 117며잉 모였으니 평소의 두배가 회집한 것이다. 이때의 성탄 예배는 왕길지 목사 부임 이후 첫 번째 맞는 성탄절이었다. 이날 예배에 대해서 왕길지 목사는 자신의 일기에서 자세한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 부산진교회 성탄 예배와 축하 성도들의 잔치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일기를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오늘은 무척 즐거운 날이었다. 아침에는 많은 선물에 특히 우리 아이들이 감격해 했다. 선교관은 (한국과 영국의) 국기와 중국식 등불, 초록 잎들로 장식되었다. 아침 일찍 날씨가 어떤지 보려고 나갔더니, 놀랍게도 우리의 한국식 교회 건물 위에 태극기 두 개가 나부끼고 있었고, 선교관 앞뜰에는 막대에 달린 초롱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예배 시간은 열시 반이었다. 이날 아침에 모인 성도들을 다 수용할 만큼 예배당 크기가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날씨가 매우 따뜻하여 거의 여름 날씨 같아 감사했다. 그래서 문을 열고 사람들을 마루에도 앉힐 수 있었다. 여자아이들과 젊은 여성들은 교회 안에 앉고, 바깥쪽에는 남자 아이들이 앉았다. 몇몇 아이들과 젊은 여성들은 빨강, 파랑, 초록, 자홍색 비단옷으로 매우 아름답게 장식된 옷을 입었고, 심지어 청년들 중 몇 명은 긴 자홍색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왔다. 연로한 어른들 다수는, 크게 가난한 경우를 제외하면, 다 흰 비단옷을 입고 왔다. 모두가 가장 멋진 정장과 드레스를 입고 예배에 참석했다. 그 모습은 장관이기도 했지만, 또한 우리 교인들이 성탄절을 ‘그리스도의 탄신일’이라고 부르며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예배는 짧고 멋지고 긴장감이 있었다. 아이들 덕분에 회중의 찬송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는데, 어른들은 비록 모르는 성탄 찬송이었지만 그래도 여러 곡을 함께 불렀고, 남녀 아이들이 다 즐거워했다. 예배 후, 주일학교에 개근한 아이들에 대한 시상이 있었다. 큰 아이들은 최근에 번역된 한글 신약전서를 받았다. 우리 돈 원가로는 1실링에 불과한 책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지금 너무 가난해서 그들에게는 이 성경이 호주에서 열 배나 비싼 책과 맞먹는 가치가 있다. 어린 아이들은 석판과 색종이로 감싼 석필을 받고 매우 기뻐했다. 그 후 선교사 부인들이 교인들 각 사람에게 땅콩, 일본 사탕, 일본 과자 두 개, 오렌지 한 개가 든 종이 봉지 모양의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출석한 사람 모두가 그런 선물 봉지를 하나씩 받았고, 몇몇 사람에게 오후에 몸이 약하거나 아파서 오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선물봉지를 들려 보냈다. 분배된 종이 봉지는 전부 160개였다. 모임 시작 때 계수한 인원은 여자 아이가 30명, 남자 아이가 27명, 여자가 48명, 남자가 12명이었는데, 그런 차이가 난 것은 어머니나 큰누나가 데리고 온 어린 아이들이 계수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녁이 되자 선교관 앞과 교회 앞마당에 등불을 밝혔다. 남자 아이들이 마당에 모여 교사들과 장년들 몇 사람의 지도에 따라 등불 아래서 여러 가지 게임을 즐겼다. 그 등불이 교인들에게 기독교인의 명절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오늘은 우리가 매우 잘 어울렸던 날, 교인들 각자가 행복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행복을 보여준 날이다. 과연 저 옛날 베들레헴 들판에서 선포되었던 천사들의 노래가 여기서도 성취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상규, 『왕길지의 한국선교』, 2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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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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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내가 사는 날에(열왕기하 20: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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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은 단답형이 아니고 복합방정식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보면 다사다난, 희로애락, 돌발 변수, 우환질고, 흥망성쇠가 교차한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일이 있다. 한판승이 아니라 9회 말 투아웃 쓰리볼 부터 시작이 되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최고의 왕들은 다윗, 히스기야, 여호사밧, 요시야이다. 하나같이 공과가 있고 빛과 어두움이 있다. 그 중에서도 히스기야 왕은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많은 일들을 겪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승을 거두었고, 죽을병이 걸렸을 때는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었다. 그러나 해외로부터 축하사절단이 왔을 때는 가진 것을 다 보여주며 자랑했고, 결국 자식 농사는 실패했다. 그야말로 산전수전, 우주전, 공중전 다 겪은 셈이다. 히스기야 왕의 일생을 보면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다 나쁜 것도 아니다. 축복 같은 저주가 있고 저주 같은 축복이 있다. 야고보서 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 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히스기야 왕은 다윗 이후 300년 만에 나타난 경건한 왕이었다. 종교개혁을 단행했고 산당을 제거하였고 주상을 깨트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부수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 왕을 이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산당을 다시 세우고 우상 숭배를 위해 제단을 쌓았다. 여호와의 성전 앞에 해와 달을 섬기는 단을 세웠다.
모세 이후 여호수아, 엘리야 이후 엘리사, 다윗 이후 솔로몬, 바울과 디모데처럼, 신앙생활은 다음 주자로의 계승이 중요하다. 그러나 신앙생활도 자수성가가 있고 각자도생이 있다. 아버지가 훌륭하다고 자식이 자동으로 잘 되는 것은 아니다. 히스기야와 그 아들 므낫세를 보면 그러하다. 자식 걱정을 너무 하는 것도 소용없고 부질없는 것이다. 주께 맡겨야 된다.
하나님께서 무서운 적을 다 물리쳐 주시고, 죽을병에서 건져서 살려주시니, 히스기야가 그만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물창고를 보여주고 자랑을 하였다. 인생은 호사다마다. 큰 축복 뒤에 큰 시험이 오게 된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가 와서 히스기야에 왕에게 경고하였다. 자랑한 모든 것이 바벨론의 침략에 다 빼앗기게 되어 하나도 남지 않고, 자손 중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그때에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 진데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라고 대답하였다. 자기에게 주어진 연한을 인정하니 할 수 있는 고백이다.
우리의 사는 날, 유통기한은 짧다. 메뚜기도 한 철, 누구도 영원히 살 수 없다. 우리의 연한이 무한하지 않음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에 자랑하지 말고 은혜에 보답하라. 우리는 항상 오늘 하루를 천년같이, 그리고 내일이 없는 듯이 살아가야 한다.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고, 다가올 미래를 미리 걱정하며 불안해 할 것이 없다. 돌발변수가 가득한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잠시 교만했다면 얼른 회개, 바로 회개하라. 그리고 회개로 비워낸 그 자리를 성령의 은혜로 가득 채우라. 히스기야처럼 잠시 우쭐해도 얼른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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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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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Do you Beli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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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나 배는 나침반이 있어 좌표를 정하고 나아가듯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침반이 되어 삶의 좌표를 정하고 나아간다. 그럼에도 망망대해를 항해하다 보면 기상예보와는 다른 갑작스러운 풍랑을 만나고 그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는 경험하는 자의 몫이다.
나에게도 바람과 풍랑이 밀려와 내 삶이 곤두박질할 것 같은 힘든 시간이 흐르는 때가 있었다.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말씀 사역을 하는 가운데 나의 삶을 헤집고 나의 사역을 송두리째 흐트러트리려는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절박한 마음은 걸레처럼 짓이겨진 상황에서도 말씀이 나침반이 되어 하루하루를 이겨내는 어느 날이었다. 우연하게도 영화 한 편을 관람했다. <Do You Believe?> 120분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는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얼굴을 감싸고 숨을 몰아쉬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일어섰다. 나의 오늘을 대변이라도 하듯 한 내용은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나침반이 되었다.
살아가노라면 항상 ‘Why?’라는 질문을 한다. 너나없이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연속이다. ‘Do You Believe?’의 내용도 그랬다. ‘매튜’목사는 우연히 길에서 복음을 전하는 한 남자가 “하나님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믿는다”라고 대답을 하는데 그 남자는 다시 한마디 던진다. “그래서 이제 무엇을 할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매튜’목사는 다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삶의 좌표를 잃은 열두 명의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가 엮어지는 삶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믿음 생활을 잘하면서 손해를 보기도 하고, 억울하고 힘든 일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픔과 모욕을 당하고, 좌절과 절망스러운 현실에서 갈등하면서 Why? 라고 질문을 하면서 살아가는 동안 점차 십자가의 능력을 깨닫게 되고, 행동하는 믿음의 삶을 실천하면서 살아간다. 이들의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물처럼 흘러 젖어 들고 작은 나무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 능력으로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면서 일반인들의 눈에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만 믿음 있는 사람이라면 이 모든 것은 우리 인생 여정에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닫게 한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요셉을 통하여, 다윗을 통하여, 바울 사도를 통하여 Why에 대한 답을 믿음 있는 사람이라면 깨닫고 실천하면서 살아 가지만 막상 내 삶의 여정에 Why? 라는 상황에 부딪히면 십자가 사랑의 은혜를 놓치기 쉽다. 결국 믿음의 눈을 열고 십자가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의 작품 전부를 보게 되면서 너나없이 우리는 모두 소중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이해하고 관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영화가 마무리되면서 OST가 흐르는 가운데 화면을 채우는 글은 눈을 뜨게 하고 귀를 열게 하고 마음을 추스르게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메시지가 전해진다.
<인간은 이 세상을 하나의 큰 그림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우리 인간은 바닥에서 노는 아이 같고 기껏해야 벽걸이 한쪽 면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그 한쪽은 때로는 지저분하고 색이나 디자인이 영 어색해 보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바닥에서 일어나 벽걸이 뒷면도 보게 될 것인데 그때는 주님의 놀라운 작품 전체가 확실히 보일 것입니다. 그 중심에 있는 십자가도 그때 확실히 볼 것입니다. 그 거대한 벽걸이 뒷면에서 독특한 실 한 줄이 눈에 뛸 것입니다. 디자인도 색도 특이한데 그 한 가닥이 각 사람의 삶입니다. 이 실이 가늘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한 가닥이라도 빠지면 작품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눈이 열릴 때 그분의 큰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Do You Believe?>
나는 온갖 희비의 삶 중심에서 나름 혜안(慧眼)과 영안(靈眼)과 심안(心眼)을 열어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리는 줄 알았는데 멈추어 돌아보면 어린아이처럼 내 삶의 좁은 방바닥 같은 영역에서 놀면서 기껏해야 내가 바라보는 벽걸이 한쪽을 보면서 살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벽걸이 너머를 볼 수 있는 눈은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데 나는 ‘Do You Believe?’에 진실로 ‘아멘' 할 수 있는가? 만감이 교차하였다.
대형 교회 당회장의 현실이 행복지수보다는 불편 지수가 높아져 가면서 한쪽 벽걸이만 보는 내 모습이 초라해지는 나 자신이 싫어지면서 벽걸이 너머를 보고 싶은 마음에 앞뒤 계산 없이 조기 은퇴를 선언하고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작품의 앞면만 아니라 뒷면까지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것을 경험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영역을 보다 가까이서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끊임없이 ‘Do You Believe?’를 물었다. 하나같이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한쪽 벽걸이를 보면서 그 작품의 전부를 다 본 듯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본다. 이런 사람들은 내 생각이 기준이 되어 상대방을 비판하고 정죄하면서 공동체를 카오스 현상으로 만들어간다. 예컨대 교회 생활에서 새벽기도, 헌금, 주초문제 등은 특징이지 본질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이 믿음의 척도에 기준이 되어 버렸고, 섬김의 본질인 직분이 자신도 모르게 계급개념으로 둔갑하여 직무수행의 더 본질적인 상대방을 존중하고 섬기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교회라는 거룩한 공동체가 아름다움이 연주되지 못하고 추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다. 추함은(醜) 술병을 들고 가면을 쓰고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 헛소리하는 것을 뜻한다. 답지 못한 행태다.
오늘 우리가 섬기는 교회의 모습이 이렇게 되어가고 있지는 않는가에 대한 자괴감에 만감이 교차한다. 그러나 벽걸이 뒷면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뜬 사람은 뒤엉켜 있는 듯한 각양각색의 수많은 실들이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그 가운데 한 줄임을 자각하면서 섭리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간다.
‘Do You Believe?’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믿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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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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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우리가 전한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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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목사님이 강단에 섭니다. 한 주간에도 많은 설교를 합니다. 한국교회 목사님처럼 많이 설교하는 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성경을 읽다가 많은 부담을 느꼈습니다. 저도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설교를 많이 하는데, 과연 그 설교는 어떤 설교일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내가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라고 했는데,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누가 <당신이 이런 내용을 전했다고 하던데 맞나요?>라고 묻는다면, 그는 <그렇소. 내가 전한 복음이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것입니다. 그는 확신 가운데 전했습니다. 사울표 복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자신이 전한 말씀을 굳게 지키고 헛되지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입니다. <다른 분에게 가서 배우세요>라든가, <저도 제가 전하는 말씀이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답니다>라는 등의 흔들리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확신 가운데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청중들에게 강력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어떤 말씀이 선포되고 있을까요? 매우 다양한 주제의 설교가 선포됩니다. 가정생활, 경제생활, 인간관계, 욕망을 다스리는 법, 세상에서의 성취와 그 관리, 은밀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법, 성도의 올바른 정치관, 세계관, 통일에 대한 성도의 마음, 차별금지법 등에 대한 대응책 등, 다양한 주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제들이 구원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을까요?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설교들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설교일까요? 아니면 옷에 장식품을 붙이는 것과 같을까요? 죽을 사람을 살게 하려면 입은 옷도 다 벗게 하고, 수술대에 눕혀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입은 옷에 장식품만 붙여주면 그가 살까요?
이런 의미에서 설교가 좀 더 본질에 접근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부터인가 강단에서 성도들을 보면서 혹시 이 예배가 생애 마지막 예배가 될 성도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목사에게도 마지막 설교일 수 있겠지요. 마지막이라면 부수적인 주변 주제나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전해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바울이 전한 복음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것은 바울이 창작한 게 아닙니다. 15장 3절에서 그는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라고 했습니다. 받은 것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에 대해 갈라디아서 1장 11~12절에서 말씀했습니다.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구원의 진리라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성경>이었습니다. 15장 3~4절은 이렇습니다.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복음은 성경이 뒷받침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이 모두 함께 읽는 것이었기에, 그들의 반박에 대해 성경으로 변증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의 목사와 성도 모두가 구원의 복음에 집중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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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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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독 안의 게인가 새끼거북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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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7년 이맘 때(12월 7일)에 충남 앞바다에서 선박 간 충돌로 인해 한국역사 상 최악의 기름유출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쏟아진 기름 물량만 12,547킬로리터, 환산하면 1,200만 리터 넘는 양이 하필이면 청정해역 안으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거대한 기름띠가 바다를 포위했고, 넘실대는 시커먼 파도가 해안으로 돌진했으며, 해변은 모래와 미역 대신 온통 기름덩어리로 뒤엉켜버리고 말았습니다. 보거나 맡아도 괴로운 현장이었으나, 무엇보다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대재앙(연합통신)이 일어난 태안 해양생태계의 80%가 타격을 입었는데 생명력이 강하기로 소문 난 불가사리마저 폐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해외언론들이 앞다투어 보도하는 가운데 완전한 회복에 수십 년이 걸릴 거라는 예측이 난무했고, 사건 및 후속 대응 현장을 취재하던 국내언론사마저(이를테면 한겨레 등) 무조건 10년 이상은 필요하리라 보았습니다. 그만큼 상황은 긴박했고 엄중했으며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건 직후 시군 당국은 즉각 비상재해와 재난지역을 선포했고 공무원과 군인들이 투입되면서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 인파가 만리포로 향하는 도로를 가득 메우는 수준으로 늘어나 물경 1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하는 대동단결의 역사가 펼쳐졌던 것입니다. 당시 섬기던 교회에서도 청년들이 휴가까지 얻어가면서 각자 기름을 닦을 헝겊과 컵라면 등 먹을거리를 챙겨서 결연한 출정식(?)을 치른 후 서해안으로 향하는 교회 차량에 탑승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교회 어른들이 박수를 쳐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러자 해안의 풍경이 바꼈습니다. 검은 기름 띠대신 사람들이 걸친 흰 우의가 해안선을 따라 거대한 하얀 띠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기적적인 사랑의 띠 앞에서 재앙은 무력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쏟아지는 기름포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일이 바위와 해변의 기름을 손수 닦아내기 시작했지요.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와 육지가 제빛을 찾았고 괴사했던 해초류가 살아났고 떠났던 물고기들이 돌아왔습니다. 회복은 급속도로 이루어졌고, 이 놀라운 역사를 담은 22만건의 기록물은 2022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습니다.
언젠가 “독 안의 게”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참게는 털이 있고 발톱이 날카로워서 아무리 깊은 독 속에 집어넣어도 다시 기어나온답니다. 그러나 예닐곱마리릉 한꺼번에 넣으면 그러지를 못한다지요. 한 마리가 위로 올라가려면 다른 게가 뒷다리를 붙잡고 늘어지기 때문에 같이 떨어지기 때문이랍니다. 반면에 새끼바다거북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고 하네요. 어미 거북은 알을 날기 위해 뭍으로 나와 깊이 50, 넓이 20센티미터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500-1,000개의 알을 낳는데, 부화한 새끼들은 사전에 훈련이라도 받은듯 서로 힘을 합해서 구덩이를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꼭대기에 있는 녀석들이 천정에 있는 모래를 파고, 가운데 녀석들은 벽을 허물고, 아래에 있는 녀석들은 떨어지는 모래를 다져서 발판 삼아 올라옵니다. 학자들이 실험해 본 결과, 알이 하나면 탈출 확률 25%, 둘일 때 60%, 알이 네 개 이상이면 100%였다고 합니다. 경험적으로 능력이 부족한 새끼들이 본능적으로 서로 협력하여 위기를 극복한 천연적인 사례입니다.
위기 속에서 자기만 살겠다고 방버둥쳐도 소용이 없거늘, 하물며 다른 이들의 발목을 붙잡으면 다같이 패망함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큰 위기라도 서로 힘을 합치면 상생의 길이 있음을 태안에 모인 사람들과 바닷가에 모인 새끼거북들이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구성원들은 큰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교회구성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가겠습니까? 온통 캄캄한 절망의 띠가 휘감을지라도 모두 함께 사랑의 띠를 두른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구덩이에 빠졌던 예레미야를 에벳멜렉이 구출했던 것처럼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되게 하신 성령의 줄을 영차영차 함께 당긴다면 어떤 함정이라도 거뜬하게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결코 독 안에 든 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손도손 올라가는 바다거북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에겐 국난극복의 디엔에이(DNA)가 있다 했습니다. 같이 협력해서 무너진 경제를 일으킵시다. 추락한 국격을 회복합시다. 꺼져가는 민주주의를 다시 살립시다. 기울어가는 교회을 떠받칩시다.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주 안에서 우리는 이 모든 일을 다 해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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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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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시대의 우울을 거절하라(야고보서 5: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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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한복판에서 신앙인도 시험이 들고 우울증이 올 수가 있다. 신앙인이 양심에 가책을 더 받기 쉽고, 거룩을 추구하지만 현실은 복잡하고, 천국을 소망하지만 골치 아프고 모순투성이인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갈등구조에 빠지고 상처받기가 쉽다. 머리 둘 곳이 없고 정신이 분열 될 듯하고 만정이 떨어지고 살아갈 여망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은혜가 되지만 세상을 보고,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시험에 들고 우울해진다. 팔랑귀가 되어 입술의 30초가 가슴에 30년이 된다. 말 한마디에 억장이 무너지고 급 우울이 올 수 있다.
세상은 변화무쌍하며 돌발변수가 많다. 현재 대한민국은 1인 가구가 40% 가까이 되며 자살률이 세계 최고이다. 사람들이 대인관계를 두려워하고 기계인 휴대폰을 가지고 SNS, 유튜브를 편안해 하다 보니 점점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인간관계가 힘들어진다. 패배감, 열등감, 낭패감, 수치감, 죄책감이 만성이 되어 대한민국은 집단 패닉 상태이다. 무기력, 무반응, 무대책, 무관심, 무계획 상태로 빠져 들어간다. 코로나 이후에 생태계에 많은 변화가 왔고 저출생, 지방소멸이 몰고 온 축소사회, 개인주의사회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 표현들이 사람들의 마음마저 의기소침하게 위축시켰다.
사춘기의 공포와 7포 시대에 빠진 청년들의 입시전쟁, 취업전쟁, 사랑과 전쟁을 통해서 사회부적응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갱년기 장애가 오고 정치, 경제 현장에서 극심한 분열과 갈등으로 인한 분노조절 장애가 왔다. 정글과 같은 사회의 무한경쟁 시대에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조차 이론과 현실 사이에 엄청난 괴리로 인한 공황장애와 정신분열이 오고 있다.
신앙인도 우울증을 겪는다. 그러나 엘리야와 같이 기도하기 때문에 더 빨리 낫는다. 베드로처럼 엎어지고 자빠져도 얼른 회개하면 된다. 가롯 유다처럼 똥고집을 부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남을 부러워하지 말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해결된다. 유튜브를 보면 알고리즘 추천 영상들이 먼저 나오는데, 그것은 이전에 무엇을 검색하고 봤는지에 따라 다르다. 우리의 삶에도 다 연결된 알고리즘이 있고 말이 씨가 된다. 그러니 신앙생활에서도 원(망)불(평)교(만)하지 말고 용(서)감사하라.
사울왕은 악령에 의한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릴 때에 다윗이 연주한 수금으로 인하여 뮤직테라피(음악치료)가 되었다. 그러나 사울왕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불신하며 반역하며 신접한 여자에게 물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극심한 정신적인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다윗은 훨씬 더 악조건이 많았지만 현실을 원불교하지 않고, 시를 적고 노래하며 춤추며 맡은 양을 지극 정성으로 케어하고(텃밭테라피) 하나님 앞에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고백하며 표현했기 때문에 건강하였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보통의 사람으로,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보낸 문자 하나에 까무러치는 연약하고 우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루만지시며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며 일으켜 주셨고, 그가 간절히 기도한대로 응답하셨다.
모든 눈물과 고통, 시대가 주는 우울감을 떨쳐 버리고 일어나 멋지게 힘차게 살아가자. 마음 문을 열고 소그룹에 나아가서 함께 어울리고 말씀과 기도를 나눌 때 풍성해지고 치유와 회복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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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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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공산주의’ 라는 이름의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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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대의 사건 한 가지를 들라면 단연코 ‘공산주의의 대두와 소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로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쇠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을 통해 세계 최초로 마르크스 렌닌주의를 따르는 공산정권을 탄생 시킨 후 지난 100년 동안 공산주의는 창궐하여 한때는 세계의 3분지1을 점령하여 세상을 뒤흔들었다. 전제군주국이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탄생한 이후 렌닌은 주변 국가들과 공산 동맹을 맺고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을 창설했는데, 우즈베케스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 15개국이 소련이란 이름하에 편입된다. 1924년 렌닌이 사망한 이후 집권한 스탈린은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일인독제 체제를 강화하였고, 인근의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슬라바키아, 폴란드, 항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도 공산화된다. 이런 공산화의 물결 속에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천두슈(陳獨秀), 리다자오(李大釗) 등은 1921년 공산당을 창당하고 반공주의자였던 장제스의 국민당을 몰아내고 1949년 중공(中共)이라고 불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소련이 국제공산당조직인 코민테른을 통해 조직적으로 중국에 공신혁명을 수출한 결과였다. 러시아와 중국이 공산화되자, 베트남, 몽골, 캄보디아, 북한, 에티오피아, 쿠바 등이 잇따라 공산화된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과 중남미로 전파된 것이다. 쿠바에서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게릴라 활동 끝에 1959년 1월 미주대륙 최초로 공산정권이 수립된다. 이렇게 공산주의는 전 대륙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의 붕괴는 공산주의의 쇠퇴의 시작이 된다. 이보다 앞서 1989년 1월 헝가리 공산당은 복수정당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공산당의 권력 독점 조항을 폐기하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해 11월 9일에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는데, 이는 동유럽과 중유럽에서 공산주의의 몰락을 알리는 시작이 되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다음 날, 불가리아의 토도르 지프코프 서기장이 축출되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 시작된 체코슬라바키아의 민주화 혁명이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2월 22일에는 38년간 유지되었던 루마니아의 1인 독제정권이 민주화 세력에 의해 무너졌고, 그날 체포된 차우셰스쿠 대통령 부부는 사형선고를 받고 12월 25일 성탄절에 처형되었다. 1990년 10월 3일에는 독일의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그로부터 1년 남짓 후인 1991년 12월 26일, 74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소련연방은 붕괴되었다. 그 전날인 12월 25일 소련의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소련 지도부를 해체했다. 공산주의 종주국이 붕괴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대부분의 마르크스-렌닌주의 국가는 사라졌고, 현재는 쿠바, 베트남, 라오스, 중국, 북한 등 5개 국가만이 헌법에 명문화하고 있을 뿐이다. 북한은 2009년 헌법에서 공산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있으나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삼대 세습 일인독제체제를 지향하고 있으므로 유사(類似)마르크스렌닌주의 국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는 무엇을 남겼는가? 공(共) 산(産)의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유토피아를 이루었는가?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었는가? 그렇지 못했다는 점을 우리 시대 역사가 보여주었다. 공산주의가 남긴 것은 대량학살, 숙청, 처형, 비밀경찰, 공포정치, 가난과 굶주림뿐이었다. 폴란드 출신의 철학자 레제크 콜라콥스키는, “사회주의는 공산당 1당 독재로 자유를 박탈하고 재산은 물론 인간의 마음과 역사, 인간관계까지 국유화한 것으로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악마”라고 지적했다. 볼셰비키혁명 80주년을 앞둔 1997년 11월, 스테펀 쿠루투아 교수 등 프랑스학자 11명이 공동 저술한 <공산주의의 흑서>라는 책에서 공산주의가 남긴 것은 참혹한 살육의 역사라고 말하면서, 약 1억 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지적했다. 소련 2천만, 중국 6천5백만, 베트남 1백만, 캄보디아 2백만, 동유럽 1백만, 남미 15만, 아프리카 1백70만, 아프카니스탄 1백50만, 북한 3백만 이상, 국제공산주의기구 및 비집권 공산당에 의한 희생자 수만 명으로 산정했다.
공산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스승인 포이엘바하는 “인간은 그가 먹는 것 바로 그것이다. Der Mensch ist, was er ißt.”라고 말했는데, 인간은 물질이라는 유물론적 인간관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미국 카터행정부에서 안보보좌관을 지낸 브레젠스키는, 1988년 8월 공산주의의 종말에 대한 ‘대실패’(The Great Failure: the Birth and Death of Communism in the Twentieth Century)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공산주의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비인간적인 광기’라고 썼다. 그런데 그 철 지난 광기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철부지 여대생이 “공산주의가 좋아요”라고 외치고 있고, 어설픈 지식인은 그것을 표현의 자유라고 변호하고 있다. 문화 막시즘 또한 우리 곁에 버젓이 둥지를 틀고 있다. 역사가 외면한 공산주의 유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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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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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오직 은혜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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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드러내려 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이에게서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영락교회 목사가 되면서 이런 부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이 영락교회가 6.25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영락교회는 1945년 12월 2일에 창립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베다니전도교회였으나, 영락교회로 개명했습니다. 지역이 영락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영락교회 하면 한경직 목사님이 떠오를 정도로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님은 거의 한 몸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완전히 한 몸>이라 하지 않고, <거의 한 몸>이라고 표현한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락교회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교회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였습니다. 6.25가 발발한 날은 주일인데, 그날 주보를 보면 장년 출석이 4천 명을 넘었습니다. 그 후 80년대 중반에 와서 수만 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민족 복음화에 전력을 다하셨습니다. 전국에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군목 제도를 시행하는데 큰 역할을 하셨고, 영락교회는 1,004군데의 군인 교회 중에서 건축비 전액 부담으로 300여 교회, 반액 부담으로 300여 교회를 지었습니다. 600여 교회 이상이 영락교회의 헌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교육 선교에도 힘을 쓰셔서 1938년에 자진 폐교한 숭실대학교를 1954년에 영락교회에서 재건했고, 또 보성여중고를 재건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대광초등학교, 대광중학교, 대광고등학교, 영락중학교, 영락고등학교, 영락의료과학고등학교를 세웠습니다. 현재 영락교회는 총 8개의 학교를 운영 중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긍휼과 사랑 사역에도 힘쓰셔서 신의주에서부터 시작하신 고아를 위한 보린원을 비롯하여 중증장애인 시설인 애니아의 집, 모자원 등 현재 총 15개의 복지법인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영락교회 목사로서 이 모든 것을 제대로 살필 겨를이 없습니다. 영락교회 성도들은 이것들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들이 영락교회가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님이 완전히 한 몸이 아니라, <거의 한 몸>이라고 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거의>라고 한 이유는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님 사이에 거리감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거리감은 성도들은 이상의 일들을 자랑스러워하고, 드러내고 싶어 하는데,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드러내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겸손이었습니다.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과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영락교회 성도들은 한경직 목사님을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하지만, 한경직 목사님처럼 하지는 못합니다. 여기에 영락교회가 풀어야 할 가장 어려운 숙제가 놓여 있습니다.
제가 영락교회에 부임한 후에 성도들이 주문한 것은 <한경직 목사님처럼!>이었습니다. 이것은 전혀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요구였습니다. 하나는 한경직 목사님처럼 많은 사역을 하라는 것과 동시에 한경직 목사님처럼 겸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역은 드러내는 쪽입니다. 겸손은 숨기는 쪽입니다. 두 가지는 물과 기름 같습니다. 저는 무능해서 둘 다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조용히 있는 것뿐입니다. 뭘 하겠다고 나대지 않는 것입니다. 조용히 있어야겠다는 생각은 시편 131편 1절에서 감동받았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조용히 있으면 부수적 효과가 있는데, 그것은 겸손과 비슷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려고 노력하는 게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성도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사랑으로 기도하는 것, 진실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오직 예수님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 말씀을 기억하면서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만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제게만 필요한 것일까요? 이 글을 읽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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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