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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칼럼] 새순이 나르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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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에덴의 꽃, 생명 / 순장들이 모인 은혜 넘치는 / 이 좋은 시간과 공간에 / 나를 택하여 주사 더 큰 사명으로 날아오 / 르게 하시니 더욱 주님 높이 섬기며 / 샤론의 꽃을 피우겠습니다.”
이건 지난주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있었던 ‘새순이 나르샤’ 시간에 어느 순장이 저에게 보낸 ‘새순이 나르샤’로 지은 6행시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느 순장은 ‘맨발의 소명자’로 6행시를 썼습니다.
“맨 처음 교회를 간 건 그저 예쁜 여학생 때문이었습니다. / 발치에 앉아 멀리 떨어져서 들은 제자 베드로의 배신 이야기에 / 의로운 분노가 타올랐습니다. ‘나라면 그렇게 배신 안 한다. 사내 대장부가 3년이나 따라 다녔으면서 배신을 하냐?’ / 소리치듯 내뱉은 마음의 소리에 / 명령이 내려오듯 제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 자녀로 삼아주시고 주님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새순이 나르샤’라는 프로그램은 코로나 이후 소그룹과 생명순(구역)을 살리기 위한 중간 그룹의 모임이었습니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100명에서 150명 단위로 교회 카페에서 교회 오빠인 담임목사와 교회 언니인 순장들과의 영적인 따뜻한 대화와 소통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코로나 상황에서는 겨우 교회를 유지하고 회복을 하였지만, 이제 코로나의 검은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 새로운 부흥과 성장을 이루어야 할 시기이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생명순(구역)이 살아야 되고 생명순이 살기 위해서는 생명순장(구역장)들과의 긴밀한 소통과 관계성이 필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제가 먼저 격려의 메시지를 하고 성도들이 저에게 묻고 싶은 것을 엽서에 적어서 주면 그걸 일일이 다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어느 한 장도 가볍게 취급하지 않고 진솔하고 성심성의껏 일일이 다 대답을 해주니까, 그곳에 모인 성도들이 감동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후문에 의하면 가까이에서 단둘이 이야기하듯 그런 분위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교구마다 직접 만든 선물을 저에게 전달을 하였습니다. 어떤 교구는 자신들이 직접 만든 케이크, 김밥, 저의 캐리커쳐와 제 시를 캘리그라피로 쓴 액자 등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어떤 교구에서는 저에게 노벨문학상을 준다고 메달을 만들어서 목에 걸어주기도 하였습니다. 또 다른 교구에서는 콩나물 꽃다발을 가지고 왔습니다. 새순이 콩나물처럼 막 자라라고 말입니다.
그런 후에 순장들과 함께 가수 이선희의 ‘그중에 그대를 만나’를 개사해서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 그렇게 대단한 기대까지 바란 적 없다 생각했는데 / 그대 하나 떠나간 우리 교회 이제 그대 아님 채울 수 없소 /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성도로 만나 / 꿈을 꾸듯 새에덴을 이루고 / 주님의 은혜로 벅찼던 우리가 예배로 만나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그 모든 건 은혜이었음을….” 그리고 제가 마무리 축복기도를 하고 일일이 한 분 한 분 다 악수를 하였습니다.
천 명이 넘는 순장들이 한꺼번에 모이면 그냥 하나의 집회로 끝났을텐데, 교회 카페에서 100명, 150명 단위로 모이니까 느낌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역시 작은 공간이 주는 분위기의 효과가 크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서로 작은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악수를 하며 아이컨택을 하니까 정말 가까이에서 단둘이 데이트(?)한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었겠죠.
이러기를 어떤 날은 하루에 몇 번씩 하니까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지만, 끝나고 잠시 누우면 진짜 순장들이 새순이 되어 날아오르는 환상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정말 콩나물 꽃다발처럼 생명순들이 쑥쑥 자라 오르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글을 쓰는 이 시간에도 변함없이 교회 오빠인 담임목사를 응원하고 추앙하고 지지해준 교회 언니인 순장들이 너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 교회는 ‘새순이 나르샤’할 뿐만 아니라 ‘생명이 나르샤’하고 ‘부흥이 나르샤’하게 될 것입니다. 코로나 이후에 새로운 부흥의 역사를 쓰고 불멸의 성장 신화를 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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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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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순리를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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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9편은 다윗의 시로서 몇 단락으로 나눠집니다. 1~6절은 자연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줍니다. 7~11절은 여호와의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보여줍니다. 언뜻 이 두 단락은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두 단락을 연결하는 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순리>입니다.
1~6절은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서 주시는 삶의 순리>입니다. 1절은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은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자연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2절은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고 합니다. 어제는 오늘로 이어지고, 오늘은 내일로 이어집니다. 어젯밤은 오늘 밤으로, 오늘 밤은 내일 밤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날들이 흐르면서 세월이 갑니다. 3절의 말씀처럼 거기엔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지만, 4절의 말씀처럼 듣는 귀가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이 전해 주는 소리가 온 땅에 통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자연을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는 것을 깨닫습니다.
다윗은 자연을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양을 몰고 들판을 누볐습니다. 베들레헴의 들판에서 그가 본 하늘과 땅, 낮과 밤, 자연은 다윗의 귀를 열어 주었고, 거기서 하나님의 소리 없는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은 자연에서 키워야 합니다. 요즘처럼 방에서만 크는 아이들은 심각한 인격적 결함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방 밖의 자연을 경험하도록 돕는 게 중요합니다.
7~11절은 <여호와의 율법이 가르치는 인생의 순리>를 보여줍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을 증거, 교훈, 계명, 도, 법 등 다양하게 표현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며,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진실하여 다 의롭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가 꿀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이것을 통해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연과 율법을 통하여 인생의 순리를 가르치시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이 그 순리를 따라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은 우선 자연이 가르치는 순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봄날이 오면 파종합니다. 여름날에는 가꿉니다. 그리고 가을날에 추수합니다. 이게 날은 날에게, 밤은 밤에게 전한 진리를 터득한 삶의 순리를 따르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은 가을에 파종하거나, 봄에 거두려 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욕망을 따라 무리수를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순리를 따라 평온한 삶을 삽니다.
또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이 가르치는 순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자연이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어떻게 죄인을 구원하시는지,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영생의 복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어떤 평안과 행복과 기쁨과 형통이 주어지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이 자연의 순리를 무시하고, 말씀의 가르침을 거역합니다. 그게 허물이요, 죄입니다. 다윗은 12~13절에서 그러한 허물과 죄에 빠지지 않길 기도합니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우리도 순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봄에 파종하고 여름에 가꾸고 가을에 추수하는 것이 순리이듯이, 인생의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나이에 따라 올바르게 처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하나님께 열납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순리를 따르는 삶은 마치 물처럼 흐르는 삶입니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우리도 자연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욕망은 순리를 거스르게 하고, 하나님의 원리에 도전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도는 삶을 관조하듯 삽니다. 태어나고, 살고, 죽는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거기 참 평안과 안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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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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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지구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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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2일이 무슨 날이었는지 제대로 알고 계신 분이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주일이기도 했던 이 날은 오십 세 번째 맞이하는 <지구의 날>이었습니다.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전국 소등 행사’였습니다. “저녁 8시부터 불을 끄고 지구를 밝혀주세요”라는 문구로 환경부가 주관했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알지도 못한 채 관심 있는 소수들만 조촐하게 치렀습니다. 하기야 역사상 명멸했던 수많은 운동들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지금이야 당연하게 여기는 권리 즉 인종, 계층, 재산에 관계없이 일정 연령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보통선거권 역시 초창기에는 극소수 사람들이 주도하는 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지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실망하는 대신, 이제 몇 걸음 못 왔다가 아니라 벌써 이만큼 걸어왔다 생각하고 힘을 내야 할 일입니다.
<지구의 날>을 알게 되었다면, 이번 기회에 환경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환경’이라는 개념조차 희박했던 1962년,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1907-1964)이라는 여성이 인류 역사를 바꾸는 책을 한권 출간했는데 그게 바로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었습니다. 삼백 페이지 분량이지만 묵직한 무게감을 자랑하는 이 책에 한 번 도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당시 신제품으로 개발되면서 각종 병충해를 제거하고 농사나 위생에 혁혁한 성과를 자랑하던 디디티(DDT) 같은 제품의 위험성을 고발한 작품입니다. 이 책이 발표되고 난 지 10년 만에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유엔 주관 인류환경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20년 뒤 브라질의 리우에서 국제연합환경개발회의가 열렸고, 이후 각종 환경 관련 회의와 선언과 기구와 단체들이 발족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학술지는 조금 부담스럽다면, 고전으로 평가받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은행나무, 2011)을 추천합니다. 먹을거리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는 김한민 씨가 쓴『아무튼, 비건』(위고, 2018), 제레미 리프킨이 쓴 『육식의 종말』(시공사, 2008)을 추천해 드립니다. 최근 코로나로 인해 다들 정신없는 틈을 타서, 일찍이 유래가 없을 만큼 엄청난 분량의 일회용 쓰레기가 배출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두고두고 인류 전체에 큰 부담으로 다가오리라고 봅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심해 바닥에서 탐사단의 시야에 처음으로 들어온 물체가 플라스틱 쓰레기였다는 기사를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에 귀가 솔깃하다면 『플라스틱 바다』(미지북스, 2019)를 소개해 드립니다. 어떤 책을 보시던, 신선한 충격을 받으실 테고 환경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가지시리라 확신합니다.
이제는 환경에 대한 관심과 독서와 진지한 토론이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인 실천과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기는 합니다. 어제 했던 <전국 소등 행사>도 그런 흐름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별 것 아닌 듯 보여도 개인적인 작은 실천 하나 하나가 모여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항상 거론되는 이야기지만 많은 음료를 소비하는 추세에 맞추어 실제로 개인용 물병이나 음료용기를 모두 다 들고 다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플라스틱 방앗간>이나 <제로웨이스트카페> 같은 환경지향성 가게나 기업들을 돌아보는 일도 의미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인용 혹은 단체로 세상을 향해 작지만 큰 목소리를 내는 일도 중요합니다. 결국 기업이나 정부를 움직이는 힘은 환경 여론이기 때문입니다. 내년 이맘때면 잊지 말고 10분간 불끄기에 동참해 봅시다. 물통을 들고 다니는 환경 운동가가 되어 봅시다.
그리스도인은 더 그래야 합니다. 왜일까요? 최근 요하임 라트카우(Joachim Radkau)가 『생태의 시대』(열린책들, 2022)라는 환경역사서를 내놓았는데, 여기서 그는 환경운동의 역사가 일천하다고 보았습니다. 아닙니다. 일찍부터 환경을 소중하게 여기고 인간은 물론 동식물까지 배려하는 책이 존재했습니다. 성경입니다(출 22:30, 23:5, 19; 레 22:27, 28, 신 22:6 등). 하기야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인데 어련하겠습니까? 예수께서도 하늘의 새와 땅의 풀과 양과 소까지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마 6:26-30; 12:11; 눅 13:15). 신약성경에는 더 분명한 환경 보호 선언들이 존재합니다(롬 8:21-22; 엡 1:23; 골 1:20 등). 리용의 교부 이레니우스(Irenaeus)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엡 1:10)을 근거로 <총괄갱신(Recapitulation)>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개발과 이윤을 이유로 환경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만은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보시다시피 피조 세계를 존중하고 아끼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중대한 책무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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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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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생명을 구하는 것(막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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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보면, 생명을 살리려고 하시는 우리 주님과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안식일날 회당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 주시하고는 고발할 조건을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완악함을 다 아시면서도,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세우고는 “네 손을 내밀어라” 하시면서, 그의 손을 고쳐주십니다. 안식일에도 선을 행하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 땅에는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 하나 살자고 이웃을 죽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시고 노하셨다고 합니다. '완악하다'란 단어의 뜻은 ‘자기밖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자기만의 생각으로 굳어진 마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경건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나는 이런, 이런 계명들을 지켰다고 하면서” 자기 행위와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깔보고, 멸시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열심을 다한 사람인데 왜 이렇게 살기가 등등합니까? 복음이 없고, 율법이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적으로 몰아 죽이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다 죄인으로 만들어버리고, 자기 혼자 의인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형제의 잘못을 보거든 정죄하기보다 먼저 우십시오. 새벽에 그 영혼 생각하면서, 눈물을 쏟으십시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죄인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그래서 교회가 죄인의 무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살려내는 클리닉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자,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주시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모의할 것을 아시면서도, 불쌍한 한 영혼을 위해, 한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옳은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불쌍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말할 수 없이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심정과 자비를 가지고 손 마른 사람을 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예수님처럼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새 포도주를 담았다면, 우리의 생활양식, 우리의 의식구조도 바뀌어야 합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가?’ 여기서부터 우리의 복음적 삶의 모습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상대를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는 것,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입니다. 주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을 살리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복과 치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이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인가?’ 질문해야 합니다. 교회는 말씀으로 세상을 정죄하고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을 통해 세상을 구하고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리는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을 죽이는 일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살리는 일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회복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일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와 사랑으로 이웃을 살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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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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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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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미국에서 한 집사님께서 노래를 잘해보고자 레슨을 청하여서 가르친 적이 있다. 한두 번 정도 한 것 같은데 뭔가 표정이 이상하다. 이유인즉 레슨 두 번을 받았으니 자신이 기대한 놀라운 변화를 있어야 했는데 그것이 충족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성악이라는 예술에 대한 무지로 인한 해프닝이기는 했으나 나로서는 씁쓸했던 기억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빠른 것을 좋아한다. 나 역시 처음 미국 갔을 때를 생각하면 그들의 여유로움이 무척 답답하고 견디기 힘들었다. 신앙생활 속에서도 급한 마음으로 인한 우리의 부족을 종종 보게 된다. 삶을 통하여 인내함으로 받은 주의 인도하심을 경험하였어도 늘 조급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재밌을지 모르겠으나 이런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서양에 알라딘의 요술램프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도깨비 방망이가 있다. 어린 시절이긴 하겠으나 이것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번쯤 상상을 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정말이라면 소원을 이루는데 참으로 좋은 도구들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서양 것 보다 우리 것이 사용하기에 훨씬 좋은 것 같다. 요술램프는 몇 가지 과정을 거치지만 도깨비 방망이는 뚝딱 두드리기만 하면 소원이 이뤄지니 말이다. 한국 사람들의 심리가 그대로 반영된 이야기다. 혹 우리가 신앙(기도)생활을 하면서 자주 겪는 일은 아닐까? 빠른 응답이 없을 때의 실망감이나 상실감으로 고민가운데 헤맬 때가 있었던 거 같다. 절박하였는데 무심하심에 분노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은 요술램프의 지니나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시다. 당연히 우리의 명령(기도)에 즉각 반응하시는 종은 더더욱 아니시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착각을 하며 살아갈 때가 많은 것 같다.
부활절이 지났다. 착각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묵상해 보자. 오래 참음과 기다림으로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의 은혜를 주신 주님을 다시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공로 없이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거저 주시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또 생각하기를 싫어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쉽지 않다면 생각하는 연습을 해서라도 날마다 생각하는, 기억하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 작금의 시대를 돌아보라. 말도 안 되게 간악한 무리들이 세상을 현옥하며 어지럽히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때에 진실한 믿음의 강력한 부활의 예배(찬양)는 우리 자신을 날마다 돌아보며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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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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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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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을 기다리는 시간, 어머니는 한숨을 몰아쉬면서 근근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아직 외국에서 들어오지 못한 아들을 기다리는 것일까? 하루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을 보고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인데… 어머니는 아쉬움 속에 잠이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 하루를 당연하게 주어진 것으로 여기고 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동을 하고, 저녁시간에는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밤에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을 맞이하는 것을 당연한 일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의 전환을 해보면, 어느 수필가의 말처럼, 내가 맞이한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토록 갈망하고 기다린 내일이 아닌가?
일본 에세이 [종이학]을 지은 이무라 가즈키요는 일본 의과대학을 나와 내과 의사로 일하다 32세로 세상을 일찍 떠났다. 사망 이유는 ‘섬유육종암’이 ‘폐암’으로 전이되었기 때문인데, 자신이 암이라는 것을 알고 죽음을 앞둔 시점에 남긴 글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자신 스스로 병마와 싸우는 용기, 그렇게 살면서도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 혼자 남을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 특히 자녀를 먼저 보내는 부모의 마음을 글로 잘 표현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 / 내 두 발로 마음대로 움직이고 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 / 소리가 들리고 말을 하고 손으로 잡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 / 아프고 보니 이 모든 것이 감사와 소중함이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믿는 성도로서, 많은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매일 아침을 먹고, 출근을 하고, 직장에서 일과를 보내고 저녁에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드는 일상이 돌아보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고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이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중환자실에 입원해 보면 감사이고, 은혜임을 알게 된다.
이번 봄에는 유난히 벚꽃이 아름답다. 연상홍이 붉고, 따뜻한 햇살을 느끼고, 바람소리를 듣고, 흙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 행복 아닐까?
CCM 가수 손경민씨가 노래한 행복이란 노래 가사가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행복이라네 / 눈물 날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 주뜻대로 사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네. 세상은 알 수 없는 하나님 선물 이것이 행복이라네”
당연함을 일상으로 알고 산 무지에서 감사함을 일상으로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자신도 모르게 불평, 불만을 품고 살아온 현실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동행이 말만 아닌 실재가 되어 질 때 우리 속에 참 은혜가 아닌가? / 항상 내 옆에 있는 아내와 남편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은혜가 아닌가? / 내게 맡겨준 자녀가 있고 그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환경이 되는 것만으로 은혜가 아닌가? / 문제 많은 이 세상이 있기에 내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은혜가 아닌가? / 문제 많은 이 땅의 교회와 성도가 있어서 성령님이 지금도 역사하시고 계심이 은혜가 아닌가?
매일 반복되는 묵은 날, 지루한 일상의 반복에서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새날(사43:19)을 주시는 것에 감사하며 오늘이라는 최상의 선물을 받고 지금이라는 최고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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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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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일제 하에서의 공산주의의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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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20세기 최고의 사건은 공산주의의 생성과 몰락이라고 말한다.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는 국가권력의 폭력으로 인간성을 파괴하고 엄청난 희생자를 양산하고 쇠퇴의 길을 가고 있다. 이 녹슨 이데올로기가 유독 한국에서는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고, 성경의 표현을 빌린다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벧전5:8) 있다. 공산주의는 비극의 역사였다. 스테펀 쿠르투아 등이 공동 저술한 <공산주의 흑서 The Black Book of Communism: Crimes, Terror, Repression>에 의하면 전 세계 공산국가에서 9천4백만 명 내지 1억 명이 이 유물론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기록했다. 그러기에 폴란드 출신 철학자 레작 콜라콥스키는 공산주의는 자유를 박탈하고 재산과 인간의 마음과 역사, 인간관계까지 국유화한 것으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악어’라고 말한바 있다.
한국에서 공산주의에 의한 폭력은 일제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첫 희생자는 김이주, 박문기, 윤학영, 이창희 등 동아기독교 인물들이었다. 동아기독교는 지금의 침례교의 전신인데 이들은 한만국경지대라 할 수 있는 길림성에 파송되었는데, 1925년 9월 하순 공산당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들 기독교인들을 일본의 밀정으로 몰아 죽인 것이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동포를 죽음으로 몰고 간 첫 번째 사례였다.
1932년 10월에는 간도 침례교회의 김영국(金榮國, 1884-1932) 장로와 김영진(金榮鎭, 1887-1932) 목사 형제를 살해했다. 함경북도 종성(鍾城) 출신인 김영국 장로는 중국으로 이주하여 중국 북동지역에 마을을 건설하고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따 종성동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는 이곳에 침례교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동생 김영진 목사와 함께 교회를 이끌고 있었다. 김영진 목사 또한 함경북도 종성 출신인데, 1919년 목사안수를 받았고, 간도지방에 이어 순교자 손상열 목사가 섬기던 자성군과 임강현 일대에서 선교사로 일했다. 그러다가 그의 형 김영국 장로와 함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1932년 10월 14일 죽임을 당했다. 당시 함경도와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30여 명의 공산주의자들이 10월 14일 종성동 마을을 습격하고 마을 주민들을 종성동 침례교회에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신자와 불신자를 좌우로 갈라 앉히고 지금이라도 공산주의를 따르겠다면 살려주고 예수를 믿겠다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이때 잡혀온 김영국과 김영진 형제는 공산주의 청년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구원 받으라고 했는데, 격분한 공산당원들은 김영진 목사를 끌고나가 피부 살을 벗기며 매질을 가했다. 이에 김영국 장로는 “내가 이 교회 책임자다”라고 말하면서 악행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도 동일하게 묶여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고 표피를 벗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1932년 10월 14일에 발생한 탈피참살(脫皮慘殺) 사건이다. 이날 김영국 형제 외에 정춘보 집사 또한 신앙을 거부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으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총살되었다.
이보다 앞서 1931년 동만주 지방에서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교회당 13개 처가 방화되고 4명의 교인이 피살된 일이 있었고, 1932년 남만(南蠻)지방 장로교회에서는 25인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또 1931년 길림 부근에서 최태봉 외 일곱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1932년 9월에는 감리교 연회의 파송을 받아 만주 한인촌에서 선교하던 김영학(金永鶴) 목사가 시베리아에서 순교했다(민경배,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214). 그는 1930년 1월에 ‘반동분자’라는 죄명으로 소련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언도 받고 중노동하던 중이었다. 감리교에서는 위험을 감지하고 귀국을 종용했으나 “한 사람의 신자가 남아 있는 한 남겠다”며 현지에서 일하던 중 강물에 빠져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 무렵 연길현의 와룡동 교회는 공산당의 방화로 불탔고 교인들은 흩어졌다. 또 적암동 교회의 노진성 영수는 피살되고 교인들 역시 다 피난을 갔다고 한다. 교회는 두 번 씩이나 습격을 받아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다. 1931년 가을에는 남만 길림 남방에 있는 쌍거천에서 김광욱, 최태봉 등 일곱 사람은 공산당 가입을 거절하여 잔혹하게 살해되기도 했다. 만주 한인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미국 북장로교의 핸더슨(현대선, L. P. Henderson, 1895-1932)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의 형 현거선(H. H. Henderson)과 동생 로이스 헨더슨(Lois E. Henderson)도 한국 선교사였는데, 동생 핸더슨은 1920년 10월 30일 내한하여 만주선교부로 배속되었다. 당시 만주지역은 한인 공산주의 세력과 반 기독교적인 급진적 민족주의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또 만주지역 토호세력과 마적 떼들이 활동하고 있어 교회와 교인들이 많은 피해를 보고 있었다. 핸더슨은 1932년 9월 평양에서 개최된 장로교 총회에 참석한 후 건강이 좋지 못한 부인과 자녀를 평양에 남겨두고 혼자 만주로 돌아갔는데, 10월 15일 저녁 홍경에서 5시간 거리에 있는 마을을 들렀는데, 그때 일본군과 중국 반군 사이의 전투를 피해 마돌령으로 가던 중 10월 16일 새벽 1시경 피살되었다. 일본군은 마적의 소행이라고 하지만 분명치 않다. 혼란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현장에서 순교의 길을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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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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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신앙의 하이퍼골릭(hypergo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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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용어로 ‘하이퍼골릭(hypergolic)’이라는 용어가 있다. hyper는 치솟는다는 의미이고, golic은 연료를 의미하는 독일어에서 비롯된 말이다. 가령 두 가지 화학 물질이 있는데 이들이 각각 따로 있을 때는 아무런 화학 반응이 없다. 그러나 두 가지가 접촉하게 되면 발화하거나 폭발한다. 우주선도 그 기본 발상은 ‘하이퍼골릭’ 현상에 의한 연소 작용에서 생기는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에서 착안되었다. 불기둥을 뿜으며 하늘로 치솟는 힘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초현실주의를 hyper-realistic이라 한다. 몹시 흥분한 상황을 throw a hyper라고 하고, 자녀교육에 있어서 과잉양육을 hyper-parenting이라 한다. 진정 차원 높은 신앙의 하이퍼골릭이란 무엇일까?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과의 불편한 긴 역사의 터널을 지나 미래지향적 정치 행보를 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은 물론 국민정서도 찬반론으로 뜨겁다. 대한민국과 일본은 운명적인 이웃, 싫다고 멀리 할 수도 좋다고 가까이 할 수도 없는 나라다. 야권에서는 굴욕적이라고 피켓 시위까지 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일본과의 사이에 빗장을 걸어 잠그고 지내야 할 것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적인 상황은 그렇게 안일하게 대처하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국토의 넓이와 인구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 일본을 앞서고 있다. 굴욕외교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표현이다.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Spencer)는 그의 저서인 「개인 대 국가(The Man Versus The State)」에서 ‘Only the strong survive’ “강한자만이 살아남는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동학 난(東學亂)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죽창으로 총을 이길 수 없었기에 아픈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은 죽창(竹槍)이 아니라 반도체를 비롯한 한류문화(韓流文化)로, 역사적 원한이 아니라 미래적 역사관으로 일본에 맞서야 할 때다. 그리고 이겨야 할 당위성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얼어붙은 한일관계 12년의 긴 터널을 지나 새로운 국제질서의 리더 국가를 향한 걸음을 행보했다. 대한민국은 경제적, 군사적 강국으로 G8 가입의 문턱에 서 있다. 특히 장자가 갈파한 목계지덕(木鷄之德)으로 일본을 대해야 한다. 국제정치의 하이퍼골릭을 생각하게 한다.
언제부터인가 교회 강단의 설교에서는 재림에 대한 메시지가 들리지 않는다. 예배 찬양에도 재림을 고대하는 찬양은 부르지 않는다. 종말론 신앙이 내재되어야 오늘의 삶에서 올바른 신앙의 가치개념이 활력을 얻고 미래를 향한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데 곳곳에서 들리는 소리는 원망과 불평, 비판과 정죄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는 산 위의 동네로, 등경 위의 등불로서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국내외 시선이 그리 곱지 않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신앙과 삶의 괴리,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의 불일치에서 오는 갈등 등인데 참으로 부끄러운 말이지만 극단적 이기주의 현상이 빚어낸 결과이다. 교회가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사회는 어둠의 역사로 전락되는 것을 우리는 우리 역사에서 얼마든지 경험했다. 이 모든 것은 한 마디로 어둠의 현상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앉아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으로 오늘을 엮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어둠의 권세를 깨뜨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인류 역사에 생명의 빛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오늘 우리 신앙생활의 생명의 ‘하이퍼골릭’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래서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는 빛의 삶이란 무엇인가? 빛이란 앞을 볼 수 있고 그래서 분간도, 분별도, 구분도 가능하다. 따뜻하고, 아름답고, 질서와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 그래서 정의와 사랑이 숨 쉬며 용서와 기쁨과 평화가 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빛이라 한다. 이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세 가지 전환점이 되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 개인의 인생이 어둠에서 빛으로 전환되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어둠을 광명한 빛으로 전환시켰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역사를 어둠에서 빛으로 전환시킨 생명의 은총이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은총을 경험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이렇게 고백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에베소서5:8-9).”
그렇다. 우리는 전에는 어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빛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이제 부활신앙으로 다시 거듭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은 용서와 치유를 넘어 채찍을 드신다는 것을 깨달아 겸손히 엎드림으로 개인도 교회도 국가도 부활신앙으로 거듭나야 한다.
‘트리나 폴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동화가 있다. 내용은 두 마리의 애벌레가 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것인데 줄무늬 애벌레와 노란 애벌레가 아름다운 나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메시지는 처음 애벌레였던 그들이 어둠과 고통의 시간을 지난 후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비가 되었다는 것으로 그것은 더 이상 애벌레가 아니라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나비라는 새로운 존재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부활의 의미를 새겨주는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바로 이런 영적 불기둥이 솟는다. 마음이 뜨거워지며 희망과 용기가 생겨난다. 이것을 나는 ‘신앙의 하이퍼골릭’이라고 하고 싶다. 우리가 혼자 있으면 아무 힘도 없지만 그리스도와 접촉하게 되면 발화한다. 희망의 불꽃이 일고 용기가 발화한다. 기쁨이 샘솟고 사랑으로 충일한다. 그리고 내 삶의 장에서는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난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경험함으로 신앙의 하이퍼골릭 현상이 나를 통해서 가정과 교회와 정치와 사회문화에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것이 부활신앙인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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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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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주님과 함께하는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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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성탄절에 자주 읽는 말씀으로써 성탄절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성탄절의 핵심 구절을 4월에 생각하는 이유는 성탄과 고난, 부활의 승리가 사실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성탄의 핵심 메시지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으로 정리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이후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영적 죽음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사람은 다시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함께 함>이 성사되려면 많은 과정이 요구됩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남녀가 함께하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기쁨입니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할 시간만 기다립니다. 그래서 평생 함께하기 위해 결혼합니다. 그러나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어떤 목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하는 것이라면 둘 모두에게 극악의 고통일 것입니다. 짝사랑하는 때도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기쁨으로 달려가겠지만, 그 상대방은 괴로울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어떨까요? 임마누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짝사랑으로 성사되었습니다. 인류의 첫 죄악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에서 시작되었고, 그 후에도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하거나, 거짓 하나님들, 말하자면 우상들을 수도 없이 만들어왔습니다. 자신들의 고통이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데서 온 것임 알지 못한 채,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애타게 짝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탄생하셔서 사람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과 함께 계심은 하나님께는 고난입니다. 마치 사람이 땅에 기는 벌레처럼 되어 벌레와 함께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악의 세상에 오시는 것, 사람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체험하신 게 고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보통 사람도 경험하지 않는 십자가의 죽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인생들을 향해 <너희를 사랑한다>고 계속 고백하시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처절한 하나님의 짝사랑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찾아가는 자의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오셨습니다. 발품을 팔아 갈릴리 해변의 어부들에게 오셨고, 가버나움 세관의 레위에게 오셨습니다. 먼저 오는 분이 고난을 받습니다. 함께하기를 원하는 이가 고난을 받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가야 하고,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실패는 함께하지 못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락방 만찬이 끝난 후에 겟세마네에 갔지만,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기까지 기도하는데, 그들은 잠을 잤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 후에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하셨지만, 그들은 도망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함께 가자>고 하시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찾아가는 고난을 경험해야 하고,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함께 감당해야 합니다. 요즘 많이 부르는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가사 중에 다음 부분이 있습니다.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나아가고,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의 못 박히신 손과 발에 우리 손과 발을 포개고,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 이것이 찾아오셔서 임마누엘이 되어 주신 주님께 대한 우리의 신 임마누엘입니다.
부활은 이처럼 주님과 함께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승리입니다. 죽음 없는 부활이 없듯이,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할 때,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모든 순간에, 모든 일에 있어서 예수님과 함께하길 원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은 우리를 부활을 넘어 영생의 나라로 인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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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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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꿈엔들 잊힐 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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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 신 아버지가 /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시인 정지용이 쓴 <향수> 가운데 일부입니다. ‘충남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 시인이 태어난 생가가 있던 곳인데, 이제는 그 주소명이 ‘충남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56’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시인의 향수는 고즈넉한 이 마을에 고스란히 내려앉게 되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상경해서 다닌 휘문고보가 위치했던 서울의 궁궐 서편(원서동)에서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다녔다던 도시샤(同志社)대학이 위치한 교토에서도, 시인은 게으른 듯 지즐대는 고향마을을 차마 꿈에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살았던가 봅니다.
오랫동안 잊혔던 시인 정지용과 그의 시가 세상 속에 꽃망울 터지듯 툭하고 등장한 때는 1989년입니다. 테너 박인수 씨와 가수 이동원 씨가 60년 이상의 세월을 묻혀 있던 동명의 가곡을 새롭게 편곡해서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실로 놀라웠습니다. 가요계는 물론 문학계와 일반 세상까지 발칵 뒤집혔습니다. 클래식을 하는 동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곳은 약간의 반전이 있었습니다. 서울대학교의 교수요 한국 성악계의 얼굴과도 같았던 테너 박인수는 대중가요를 부르고 활동했다는 이유로 오페라단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그는 꿋꿋하게 가는 곳마다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이 노래를 기꺼이 불렀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클래식과 가요는 물론 국악까지 조화를 이루어, 전통과 현대를 한데 어우르며 전 세계가 극찬하는 한국 음악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출발점에 있던 박인수 씨가 지난 2월 28일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수>의 파트너였던 가수 이동원 씨는 그보다 열세 살 아래였으나 지난 2021년 11월 14일 먼저 먼 길을 떠났습니다. 암으로 투병 중이었는데, 그토록 자주 불렀던 노래의 배경과 너무나 흡사한 지리산 자락 한 마을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향수에서 이동원 씨가 담당했던 파트의 노랫말들입니다. 그는 1951년 전쟁통에 부산의 전포동, 유난히 별이 훤히 올려다 보이는 달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훗날 학교는 서울에 있는 보성고보를 다녔지만 그 역시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어릴 적 도란도란 살았던 동네가 일평생 눈에 선하지 않았을까요?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옛 마을의 호젓한 굽이길 혹은 도시의 하늘 아래 어느 골목길 또는 낯선 땅을 가로지르는 강가에서 머물렀던 하숙방 어쩌면 달도 별도 곱기만 하던 동네 그 비슷한 어디쯤의 기억을 우리는 다들 가지고 있습니다. 돈도 벌고 학교도 보내준다는 말에 속아 건너간 일본 땅 나고야(名古屋, なごや)에서 종일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녹슨 군용기를 닦고 페인트칠을 하는 중노동을 감당하며 하릴없이 눈물짓던 열네 살 양금덕 소녀에게도 고향 마을 정든 집 그리운 부모형제가 꿈엔들 잊힐 리 있었을까요? 지난 삼십 년 동안 싸우며 지금 이 순간에도 진정한 사죄를 요구하고 있는 ‘양관순’이라 불리는 올해 나이 아흔 다섯의 이 할머니를 포함해서 생존하는 몇 분 되지 않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탄식과 한숨과 절망의 시간들을 어찌 돈으로 환산해서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남화태도(사할린 남부)로 끌려가 결국 돌아오지 못한 채 죽는 날까지 ‘전남 나주군 세지면 오봉리’ 그 따뜻한 이름 속에 남겨두었던 아내와 갓난아기를 그리워하며 살았었을 김오남 씨 같은 분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정지용과 박인수와 이동원은 이제 다 떠나고 그 아련한 노래만이 남았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떠난 사람들, 지금도 향수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도 이 노래가 마음에 사무칩니다. 신령한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영원한 나그네들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간 이들이 먼저 가 기다리는 그곳,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문득 한 발 더 가까운 곳으로 느껴지는 그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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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