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0(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중독칼럼] 포켓몬go, 현실증강 게임을 통해 본 중독 문화
    [상황 5] 미국의 한 침례교회에 비그리스도인들이 마구 들어와 스마트폰을 들고 서서 포켓몬을 잡겠다고 난리가 났다. USA Today에 따르면 웨스트보로 침례 교회는 ‘www.godhatesfags.com(하나님은 동성애자를 싫어하는)'이라는 URL을 소유, ‘안티 LGBT' 활동과 인종 차별을 나타내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작은 교회다. 그래서 이 교회를 점령하는 포켓몬 유저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몸살을 겪고 있다. 한국에서는 속초에서 다양한 사건사고가 일어났고 미국 엄마들은 아이들이 집안에 틀어박혀 게임에 몰두하는 것보다 집 밖을 나가 움직이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환경을 접한다고 쌍수를 들고, 이 게임을 환영하고 있다. 본인은 ‘P폐나목’이라는 저서를 통해 미래의 게임 산업에 대해 최소 2년 전부터 현실 증강 게임에 대하여 반복해서 예언한 바 있다. 축구나 야구처럼 제대로된 직업으로써의 프로게이머가 활성화되고, 현실 증강 프로그램처럼, 일과 공부를 하는 것과 게임을 하는 것이 접목되어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예언이 적중되었지만,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온라인 중독문화에 대한 영적 싸움의 자세 조차도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적 싸움은 고사하고 신앙 전수와 영적 훈련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소홀한 현 시점과 미래를 볼 때 안타깝다. [조언5] 첫째는 전신 갑주를 취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은 싸우겠다는 의지를 뜻하는 것이다. 링에 오르면 상대 마귀는 달려들어 우리를 삼키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은 중독문화에 대해 오픈된 자세로만 서 있다는 것이다. 다운되었을 때 그 때 ‘도대체 이게 뭐지?’ 무엇이 중헌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녀들은 마치 스몸비(스마트폰 좀비 신종어)가 되어 ‘무엇이 중헌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엡 6:10-14 둘째는 세월을 아껴라. 때가 악하니라. 세월을 아껴라:원문을 살펴보면, ‘아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사고라조메노이'는 ‘도로 사다'라는 의미로 구속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갈 3:13). 또한 ‘세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론'은 ‘중요한 시기' 또는 ‘금방 지나가 버리는 특별한 기회'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기회를 사라'는 의미로(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주어진 환경 속에서 기회를 찾아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놓치지 말라는 권면이다(갈 6:9). 중독문화에 빠져 있는 청(소)년 뿐만 아니라 기성세대와 교회도 어쩌면 어떤 중독에 빠져 기회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령의 충만 기회, 바른 기독교 세계관을 잡을 기회 말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8-24
  • [소강석 칼럼] 통일 목회와 기도
    지금 한국교회는 전방위적 공격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타개하고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국교회의 연합과 통일을 위한 역할이다. 통일은 우리 민족의 희망이자 우리 시대에 가장 큰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통일을 하는데 몇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하나는 합의 통일이다. 북한 정권이 개혁, 개방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북한 내부의 급격한 돌발 상황과 내부분열에 의한 통일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로서는 둘 다 거의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리는 복음적 평화통일을 원하고 희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지도자와 국민들이 평화통일에 대한 뜨거운 열망과 강력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 이 역할을 한국교회가 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개교회에서 통일설교와 기도를 통해서 교인들로 하여금 통일을 희망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서 통일의 열망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 정부와 정부는 서로 갈등하고, 군사적으로는 충돌하고 대치할 수는 있지만 교회는 물밑에서 북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소통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의 정신을 따라서 무조건적인 나눔과 지원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독일교회가 그랬지 않는가? 독일교회가 국민들의 가슴에 통일을 희망하고 열망하도록 불쏘시개 역할을 했지 않는가? 물론 지금 남북의 상황과는 조금 다르지만, 서독 정부는 독일교회를 통해서 동독교회를 조건 없이 섬기고 지원하도록 했지 않는가?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우리 정부도 평화통일을 위해서 한국교회를 선용했으면 한다. 더 나아가서 한국교회가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 독일 교회의 경우 크리스천 목사와 보네베르거 목사를 위시해서 통일기도운동을 주도했던 것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처음에는 30명이 시작해서 30만이 되고 50만이 모이는 평화통일 기도회로 발전하여 결국에는 통일의 꽃길을 열지 않았는가?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도 작년에 광복70주년을 맞아 시청 앞 광장에서 평화통일기도회를 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우리가 평화통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을 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남북문제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와의 정치적, 군사적 역학관계를 아무리 전략적으로 잘 관리해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통일의 문을 열어주셔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쉬지 않고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와 더불어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교회의 연합이다. 아무리 우리가 기도를 해도 한국교회가 연합하지 않고 어떻게 사회통합과 국민통합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우리도 하나 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북통일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연합부터 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먼저 하나 되어서 기도하고 정부와 사회를 향해 통일에 대한 미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평화통일에 대한 시대정신과 분위기, 흐름을 이끌어 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교회마다 통일의 희망과 열망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하나 되어서 피 흘림이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에 대한 전략, 정책과 관련해 정부와 사회를 향해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한국교회는 제사장의 가슴으로 민족분단의 아픔을 끌어안고 눈물로 기도하며, 선지자의 눈빛으로 통일조국의 미래를 열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평화통일을 위한 한 줌의 중보요, 꽃씨가 될 때 역사의 지평 위에 통일의 꽃길이 열릴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16-08-24
  • [성서연구] 일기와 자서선(로마서 14장 10-12절)
    초등학교 시절 가장 힘든 방학숙제는 일기쓰기였습니다. 개학 며칠 전쯤 불이 납니다. 불과 이삼 일 동안 밀렸던 일기를 써 치워야 하니, 엉터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나간 날의 기억이 부정확하기 때문에 그 날의 정확한 이야기를 쓰는 것도 아닌데다가 한꺼번에 여러 날치를 쓰다 보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곤 했습니다. 선생님의 꾸중을 피하기 위한 면피용일 뿐이었습니다. 그 일기는 숨기고 싶은 내용 때문이 아니라, 엉터리로 써 치운 글이었기에 남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다가 철이 조금 들어 중고등부 시절이 되자 일기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 때 역시 일기를 보여주는 것은 여전히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초등학교 시절처럼 일기가 급조된 엉터리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솔직하고 적나라한 일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춘기 시절의 온갖 감정을 여과 없이 적었기에 일기를 보여준다는 것은 벌거벗은 영혼을 보여주는 것과 같았습니다. 몰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의 마음이라 할까요? 어쨌든 그 때의 일기는 치기어린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어 부끄러웠습니다만, 그래도 위로가 되는 것은 적어도 그 내용만은 거짓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일기는 초등학교 시절의 것이건, 사춘기 때의 것이건 남에게 보이기 힘든 글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자서전은 어떻습니까? 자서전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전기>입니다. 일기와 자서전의 고통점은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기와 자서전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일기는 남에게 보여주려 하지 않는 기록인 반면, 자서전은 원하지도 않는데도 사방에서 보내온다는 것입니다. <제발 내 인생의 기록을 좀 읽어 주세요.>라고 하는 게 자서전입니다. 왜 일기나 자서전 모두 자기가 쓴 자기 삶의 기록인데도 이처럼 다를까요? 그 이유는 일기는 정직하고 솔직한 기록인 반면, 자서전은 부끄러운 이야기는 빼버린 채, 삶을 미화시킨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일기는 진실을 담고 있지만, 자서전은 거짓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진실을 담은 일기는 숨기려 하면서, 거짓으로 미화된 자서전은 남들에게 공개하고 있으니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또 사람들은 자서전이 상당 부분 과장된 것임을 알면서도 <아, 참 훌륭하게 사셨습니다.>라고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낯 간지러운 이야기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숨기기도 하고, 과장하기도 하지만, 장차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일을 낱낱이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10절에서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하셨고, 11절에서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고 하셨으며, 12절에서는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장차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가 오면 숨길 수도 없고, 과장하거나 미화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 때는 일기를 숨기듯 숨길 수도 없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과장된 자서전을 내밀 수도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한 줄 한 줄 진실된 우리 모습을 고백하듯 적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 내용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내용으로 채워지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의 제2장 제목을 <혼자 읽는 자서전>이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서전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혼자 읽기 위해 쓰는 게 맞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워 혼자만 읽는 진실된 자서전을 쓰듯이 정직한 삶을 적어 나중에 하나님 앞에 내놓길 원합니다. 오늘도 한 줄씩 마음을 다한 삶의 내용을 적어가는 정직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16-08-24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양궁 스타 장혜진 선수
    장 선수, 세계인이 보는데서 기도해 그는 양궁만 아니라 신앙도 금메달! 금번 브라질 리우 올림픽에서 양궁선수 장혜진은 일약 스타가 되었다. 그는 단체전에서도 개인전에서도 금메달을 땄다. 놀랍게도 한국의 첫 2관왕이 되었다. 양궁이 얼마나 어려운가 확인해 보니 사대에서 과녁까지 거리가 70m이고 10점 과녁은 지름이 겨우 12.2㎝ 밖에 안된다. 사대에서 보면 10점 과녁이 희미한 점으로 보인다고 한다. 양궁은 매순간 방향과 세기가 바뀌는 바람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끝없는 훈련으로 터득한 감(感)으로 쏘는 경기라고 한다. 이번 경기에서도 간헐적으로 바람이 불었고 한번은 갑자기 초속 6m의 강풍이 불었다. 장혜진 선수의 마음은 요동이 없었으나 활이 흔들렸다. 화살이 그만 3점 과녁에 꽂혔다. 그래도 장 선수는 얼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되레 방긋 웃기만 했다. 장 선수의 경기 장면은 보고 또 봐도 감동적이다. 특히 장 선수에게 마음이 가는 이유는 그가 기독신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산위의교회(장병창 목사) 교인이다. 그는 선수촌에서 생활할 때에도 성경책을 늘 곁에 두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일과 중 하나라고 한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경기 전에 펼쳐보는 수첩에도 평소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적혀 있다고 한다. 그는 활시위를 당기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를 머리 속으로 되뇌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다고 한다. 장 선수의 얼굴 인상을 보면 어디 한군데 독한 구석이 없다. 온순해 보일 따름이고 얼굴엔 늘 웃음이 있다. 그토록 온화한 얼굴을 갖고도 그는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두번이나 올라섰다. 특히 온 세계가 주목한 것은 그가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기도한 것이다. 요즘 어떤 청년들은 자기가 기독신자임을 숨기는데 장 선수는 당당히 자신의 신앙을 밝혔으니 얼마나 장한가. 그런데 불교계에서는 기도세리머니를 삼가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불교 단체인 종교자유정책연구원(종자연)은 성명을 통해 올림픽은 개인의 종교를 들어내는 곳이 아니라면서 기도세레머니를 삼가라고 했다. “국가대표 지도부는 선수들이 종교행위를 못하도록 지도해야한다”하고 “언론은 기도세리머니 장면을 다루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종자연의 트집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0년 월드컵을 앞두고도 기도세리머니를 자제해 달라고 요구했었다. 말이 되는 소리인가. 개인의 신앙적인 표현은 당연한 권리이자 자유아닌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8-24
  • [시사칼럼] 누구를 위한 일갈인가?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미친 년 오줌 누듯 여덟 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가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里)로도 모인다.”(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1. 1 중에서) 한국 조계종 소속 현각 스님의 발언이 화제입니다. 예일대 학부, 하버드 대학원의 스펙을 자랑하는 독일계 가톨릭 집안 출신의 미국인 폴 뮌젠(Paul Muenzen)은 숭산을 스승으로 1992년 한국에서 출가하여 ‘현각(玄覺)’이라는 법명을 받고 승려가 됩니다. 독특한 이력을 가진 벽안의 스님은 곧 장안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TV에 출연하는가 하면 그가 쓴 『만행(萬行)-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는 일약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25년간 한국 불교의 자랑같이 보였던 현각이 얼마 전(7.29) 충격적인 일갈(一喝)을 남겼습니다. “실망한 한국 불교와 인연을 끊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가 제시한 이유는, 과도한 순응(hyper conformity) 문화로 대표되는 유교적 잔재, 여전히 만연한 인종 차별과 남녀 차별, 기복 신앙 등이었습니다. 결국 한 마디로 하자면 이렇습니다. “돈만 밝히는 한국 불교를 떠나겠다!” 박상륭의 소설 속 유리(?里)는 구도자의 성명(姓名)인 동시에 구도의 성소(聖所)였습니다. 청소년기 절친의 죽음 앞에서 인생의 삶과 죽음의 비밀 앞에 고뇌하던, 그러나 공문의 안뜰도 바깥뜰도 아닌 곳에 서 있던 미국인 폴 뮌젠은, 또 한 사람의 유리가 되어 또 하나의 유리에 정착해서 구도의 길을 걷는 현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박상륭의 ‘유리’인 동시에 예수 사람으로서 ‘우리’의 자화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현각의 수행을 방해하고 결국 절연선언을 하게 만든-비록 바로 글을 내리고 연을 끊겠단 말은 와전된 것이라 번복했음에도-종교적 구습과 사회적 인습들은 어쩌면 한국 불교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민낯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좀처럼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혜안에 역사적 통찰력과 무엇보다도 성경의 고갱이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굴종(屈從)과 교회에 대한 자기애(自己愛)에 의지하는 성도들, 혹은 백인에 대한 까닭 모를 동경과 유색 인종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은밀하게 자리 잡은 교회들, 교단 중앙에서부터 개(個) 교회에 이르기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만연한 돈봉투의 신화들, 생존을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나라와 거룩한 주님의 뜻이 아니라 일신의 유희와 안락과 건강과 번영에 천착한 값싼 신앙들!> 현각의 일갈이 있은 후, 불교계 안팎에서는 자성과 참회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이 추구하는 진리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회개의 목소리는 힘이 있습니다. 하물며 절대적인 진리요 유일한 길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세계에서야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한국 교회를 향한 일갈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일갈이 있기는 있으되, 한국 교회 전체를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영향력 있는 일갈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일갈이 가끔 있긴 있으되, 거룩한 도전(holy challenge) 앞에서 진정성 있는 반응(realistic response)을 찾아보기가 또한 어렵습니다. “회개하라!” 세례 요한의 외침이 문득 그리운 아침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16-08-04
  • [목회자 칼럼]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를 〈인간답게 ,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인류는 오랜 세월 다양한 실험을 해 보았다. 참으로 긴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하나의 이상적인 사회제도를 만들어 내었는데 그것이 곧 〈민주주의, 民主主義〉이다 민주주의 요체 (핵심)는 ①천부 인권사상 ②시장 경제이다 시장경제의 내용은 시장(수요와 공급)의 자유 사유재산인정, 자본흐름의 자유이다. 지금은 ‘시장경제’가 민주주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시장경제는 〈소비가 미덕이다〉고 줄기차게 외친다. 생존과 생계조차 힘들던 1960~70년대에 우리는 이런 구호를 사치스럽고 꿈같은 희망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소비가 남용되고 과잉소비로 말미암는 여러 가지 폐단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소비하는 것이 취미가 되더니 그것도 이제는 싫증을 느끼면서 사람들은 너도 나도 심심하다고 한다. 이 집단적 〈무관심과 심심함〉이 “먹는 것, 요리하는 것, 음식 열풍”으로 쏟아지고 있다. 근래에 읽은 충격적인 글 일부분을 소개한다. 「어느 시간에 TV 채널을 돌려도 요리 Program을 만난다.〈건강 식단 만들기〉도 있고 산해진미 프로도 있다. 어느 여배우 집의 냉장고를 열어젖히자 프랑스에서 비행기로 공수해온 진기한 버섯과 지중해産 요리 재료가 그득했다. 배곯던 시절을 경험한 우리세대의 눈에는 ‘호기심’보다 “저러고도 벼락 안 맞겠나?” 하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요리사〉라는 좋은 우리말을 밀어내고 〈세프〉라는 서양어를 유식한 척 더 선호한다. 영국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을 때 후발국가 독일이 영국을 추격해오자 영국국민들은 〈국가적 위기〉라고 모두 소리를 높였다. 그 때가 100년 전 일이다... 그러나 이내 영국 사람들은 〈무관심과 심심하다〉라는 유행병에 빠져 들었다. 「맛없는 소박한 음식」도 감사하면서 달게 잘 먹던 영국인들이 미식열풍(美食?風)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맛집〉을 찾아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와 이태리 까지 맛을 찾아 떠나는 순례행렬이 줄을 이었다....」 오늘 우리 사회가 국력이 기울기 시작하던 100년 전의 저 영국과 닮은꼴이 돼간다. 참으로 애타는 마음이 일어난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음식 잔반으로 내버려지는 음식이 어느 정도냐 하면 북한주민 전체가 한 해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한다. 전국 곳곳이 지나친 소비와 낭비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폐기물, 쓰레기처리 문제 때문에 대 홍역을 치루고 있다. 정말 “우리가 이렇게 마구 낭비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책망 받지 않을 까?”하는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우선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절제의 은사〉를 발휘하자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충분히 〈부요해진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다. 이제는 얼마든지 적게 쓰고 절제할 수 있다. 지구가 지니고 있는 자원은 한정돼 있다. 우리는 다음세대 우리 후손들도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뱃새다 들판에서 큰 무리를 먹이신 후에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끼고 절제할 때 귀한 줄을 알게 되고 감사하고 만족하게 된다. 편리주의, 낭비주의, 사치화를 경계하고 절제의 미덕을 세워 나감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아름다움을 널리 펼쳐 보이도록 하자.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16-08-04
  • [교회법률상식] 비대위의 교인 총회 노회 탈퇴는 불법, 당연 무효 (2)
    3. 담임목사 해임을 위한 공동의회 소집 청원에 대하여 정치 제4장 제4조 1항에 “위임목사는 지교회의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만 70세까지 시무한다.”고 규정하였다. 즉 위임목사는 만 70세까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위임을 해제(해임)할 수가 없는 것이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규정이다. 다만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해임을 할 수 있는데 그 특별한 경우에도 반드시 노회가 해임하는 것이지(정치 제16장, 제17장) 그 목사를 청빙한 지교회가 해임할 수는 없다. 만일 지교회가 정당한 이유 없이 위임목사를 해제하려 함은 하나님과 공회 앞에서 서약한 교회 헌법 정치 제15장 제11조 2의 서약을 어긴 범법행위가 된다. 즉 장로는 지교회가 장립 위임하였으니 지교회가 공동의회로(정치 제13장 제4조) 시무 해임을 할 수 있고, 당회 결의로 권고사직(정치 제13장 제6조) 등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목사는 교회가 담임목사의 해임이나 권고 사임이나 권고사직 등을 할 수 없고, 상술한바와 같이 오직 노회의 직무로서 노회만 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러므로 만일 지교회가 장로의 시무 투표를 하는 것과 같이 담임목사의 해임이나 계속 시무를 묻는 공동의회를 했다면 이는 그 공동의회의 결과는 효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용서 받을 수 없는 범죄 행위이다. 그런데 분당의 대형교회인 모 교회는 목사 스스로 7년마다 장로처럼 공동의회로 위임목사의 계속 시무를 묻는 투표를 한다고 자랑삼아 TV방송으로 공개까지 하였으니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해 교회는 전국 교회와 교단의 헌정 질서를 위하여 즉시 그 위헌적 불법 공동의회를 취소해야 한다. 전국의 많은 교회들이 분당의 그 교회를 사례로 들면서 우리 교회도 “7년마다 위임목사 계속 시무 투표를 시행하자”는 위헌적 불법 요청으로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현실을 분당의 그 대형교회 목사는 아는가 모르는가? 부언컨대 소위 비대위가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하여 “영동중앙교회 담임목사 해임 결의 및 신임 담임목사 선임을 위한 임시 공동의회 소집 요청 건”을 통보하였다고 하니 이는 담임목사에게 담임목사 자신의 해임을 위한 공동의회 소집 요청이므로 허락하지 않을 것을 예견하고 2주 동안 기다렸다가 법원에 공동의회(교인 총회) 소집 허락 청원을 하고자 하는 꼼수를 부리는 것 같아 보인다. 이에 대하여 법원은 종교 단체인 교회를 종교 단체로 보지 않고 비법인 사단으로 비하하여 교회의 공동의회 소집 청원을 허락한 예가 있다. 그러나 교회 헌법은 장로를 공동의회로 시무 해임하는 것은 교회 헌법의 정한바 당연하지만(정치 제13장 제4조) 위임목사의 시무 해임을 위한 공동의회는 교회 헌법이 정한바 없으므로 법원도 역시 정교분리의 원칙에 의하여 법이 정한 다른 일반 행정 사안이라면 혹 몰라도 “담임목사 해임을 위한 공동의회”를 허락해서는 절대 안 된다. 소위 비대위에 묻노니 비대위는 청빙하고자 하는 신임 목사를 미리 지정해 놓고 신임 목사 선임을 위한 공동의회 소집을 청원한다고 허세를 부리는가? 현재 담임목사가 버젓이 시무를 하고 있는데 어찌 잠꼬대 같은 신임 목사 선임을 위한 공동의회 운운하는가? 4. 총회 사무국의 서류 발급 거부에 대하여 총회 사무국은 스스로 비대위 측 영동중앙교회 측 운운하면서 양측에 대하여 서류 발급을 거부하지는 아니한 것으로 본다. 다만 비대위가 총회 임원회에 6월 8일 교인 총회를 하였고, 6월 9일 비상대책회의를 하였고, 6월 10일 노회 탈퇴 공고를 하였다고 통고한 것을 빙자하여 총회 임원회가 총회 사무국 담당 직원에게 지시한 것이 아니겠는가? 총회 임원회는 상술한바 교회의 비대위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 총회 서기는 비대위가 서류 발급을 요청하는 것은 거부할지언정 영동중앙교회의 담임목사가 합법적인 서류 발급을 요구할 경우 정당한 이유 없이 서류 발급을 거부하면 직무 유기가 될 뿐만 아니라 노회가 사건을 수습하는 일에 훼방 자가 됨에 다름 아니다. 5. 결론 질의자의 질의 내용으로 볼 때 비대위가 행한 일은 한 가지도 합법적인 행위는 없고, 불법만 골라서 행함으로 교회와 노회와 총회 임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 같아 보인다. 해 노회는 본 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마18:15-17에 말씀한 주님의 교훈대로 권고하여(권징 제9조, 제18조) 비대위의 해산과 그들의 범죄 행위를 회개케 함으로 신령적 유익을 도모하여(권징 제3조) 교회를 더 잘 섬기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게 할 것이요, 끝까지 회개치 아니하면 권징하여(권징 제35조: 출교도 할 수 있음) 교회를 평안케 해야 한다. 또한 본 건에 관하여 총회 임원회가 간섭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총회 임원회가 이와 같은 사건을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이나 임무를 규정한 헌법 규정이나 어떤 법규에도 명문 규정을 찾아볼 수가 없고, 제100회 총회로부터 위임받은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며, 교회와 노회가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8-04
  • [성공칼럼] 진리는 그릇이다
    진리는 길이며 생명이다. 길이 없으면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진리를 믿고 영접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 속에 사랑과 선을 행하려는 의도가 없거나 진리 혹은 길을 알기만하고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이 진리는 생명의 길인가? 죽음의 길인가? 요즘은 가짜를 보면 더 진짜 같다. 그래서 속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다. 악한 자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 어떤 사람보다 멋지고 말도 부드럽고 선해 보이고 좋은 일을 많이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는 악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사람들의 진리는 말만 진리일 뿐, 그 사람은 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는 진리대로 살아야 진리가 생명이 되고 믿음이 있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아무리 대단해도 내가 살지 않으면 그 진리는 알맹이 빠진 껍데기가 되는 것이다. 또 진리는 그릇이며 옷이다. 진리는 사랑을 담는 그릇이며 나를 표현하는 옷이기도 하다.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담은 신적진리이고 악한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진리인 척 하는 진리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라는 그릇 속에 사랑을 얼마나 담느냐에 따라 좋은 그릇, 찬란한 옷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의 옷 즉 역할, 사람들이 갖고 있는 돈, 권력 등은 나름대로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담는 그릇은 반드시 상대방에게 선으로 드러나야 한다. 만약 자신이 사람들에게 악한 것으로 드러나면 나는 거짓이 되며, 추한 옷을 입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인 나는 속에는 사랑이,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는 선으로 나타나야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빠지면 진리가 아닌 것이다. 진리에는 생각, 지식, 사상, 말이 있고, 지위, 역할, 권력, 물건 등의 모든 힘들이 있을 것이다. 이 속에 사랑이 담겨있으면 진리이지만, 사랑대신에 이기심이나 악한 의도가 담겨 있으면 이것은 진리로 가장한 악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남편, 아버지, 목사, 의사, 검사 등은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부부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자면 결혼 하려는 남자가 아내가 될 사람을 사랑하고 위해주고 힘이 되고 기쁨이 되고자 하는 마음 없이 결혼을 한다고 하면 이것은 아내를 수단으로, 자신의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악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친구가 친구를 사랑하고 친구에게 힘이 되어주는 마음 없이 친구를 만난다면 이것은 악한 의도로 만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만나서 자신의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계속 이용할 것이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버리든지 위협하든지 악한 행동을 할 것이다. 예수께서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라고 말씀하셨으며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께 하리라” 그러면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인 것은 그 속에 하나님 아버지라는 신령사랑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진리는 그릇이며 포장지며 현재 있는 모든 실존이다. 이 실존 안에 존재가 있어야 진리가 되는 것이다. 사랑은 존재이며 사랑이 담겨있는 진리가 실존인 것이다. 즉 영원한 존재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영원한 실존은 하나님 아들이다. 이렇게 하여 아들 안에 아버지가 늘 함께 계시는 것이며 길이며 진리이신 하나님 아들을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믿음을 통해서 사랑의 세계에 가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소유하고 대단한 재물과 힘을 갖고 있다고 해도 자신 속에 이기적인 마음과 악한 의도를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은 진리로 가장한 거짓이기에 늘 깨어있어 자신을 경계하면서 자신 속에 사랑이 있는지, 자신의 행동이 모든 사람에게 선을 더 많이 나타내는지 살피는 진리의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8-04
  • [은혜의 말씀]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욘 3장10절~4장4절)
    요나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의 통치 시절 활동하던 선지자 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니느웨로 가서 멸망할 날이 다가왔으니 회개할 것을 선포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을 지키고 싶지 않아 다시스(스페인)행 배를 탑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로 상종도 하기 싫은 나라였습니다. 자신들 유대인들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선택과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요나는 어차피 구원 받지 못할 이방나라가 망하든가 말든가 먼 길을 가서 에너지를 소비하여 외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이성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감정적으로도 도저히 수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탄 배가 큰 폭풍으로 더 이상 항해 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폭풍의 원인으로 요나가 지목되었고 결국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커다란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게 하였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의 잘못으로 고난 받고 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서원을 갚겠노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3일 후 물고기는 요나를 뭍에 토합니다. 요나는 자신이 받는 고난과 환난을 아뢰며 자신을 구해 준 하나님께 감사하며 아직까지도 자신에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요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두 번째로 명하십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니느웨는 4일을 걸어야 다 돌아 볼 수 있는 큰 성읍입니다. 요나는 하루 동안 다니며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다.”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발생합니다. 저 악독한 이방 니느웨가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심지어 왕까지 회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진심 어린 회개를 보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너무나 약이 오르고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폭발하여 막말을 하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질문하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는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니느웨가 정말 망하는지 안 망하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 있는 요나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미리 준비하여 요나의 머리에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튿날 새벽에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 먹어 시들어버립니다. 요나는 열기로 고통스러워하며 정신이 혼미해져 사는 것 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십니다. “너는 네가 수고 한 것이 하나도 없는 하루 피고 지는 이 박넝쿨도 매우 아끼는 구나. 그런데 이 니느웨 성읍에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고 가축도 매우 많이 있다. 그러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않겠는냐?” 요나는 자신이 이제껏 감정적으로 대처하며 고집을 부린 것이 잘못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 마음을 방치하거나 그냥 감정 흘러가는 대로 놔두면 안 됩니다. 내 기분과 감정이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살아갈 때 하나님 아버지의 본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자기 감정선에 빠져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세계에서 충실한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이제는 자기만의 이기적인 세계가 아니라 열방과 원수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넉살을 가지고 이 마지막 시대에 감정선을 벗어나서 쓰임 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16-08-04
  • [성경인물탐구] 예수께서 꾸짖으시는 야고보 (4)
    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매우 급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보아너게 즉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까지 있었습니다. 그들은 원래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였습니다. 갈릴리 주민들은 미개하고 상스러웠으며 매우 거칠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핵심적인 제자의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그들의 급한 성격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철저히 자아를 죽여야 하는데 그들은 여전히 혈기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성격을 통제하지 못하고 크게 분개한 야고보와 요한에게 주님은 꾸짖으셨습니다. 이들은 오랜 기간 주님과 동고동락하면서도 예수님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멸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주님의 뜻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감정과 성급함을 표출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을 오용하거나 남용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말을 주님은 꾸짖으신 것입니다. (눅 9:54-55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주의 마음을 갖지 못한 사람은 육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 행하는 것 전부가 주의 뜻에 어긋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신 예수님의 마음, 자기를 버리기까지 영혼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육을 좇아 행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주의 뜻에 무지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를 남용하게 됩니다. 그들은 아무리 힘써 달음질할지라도 주께서 원하시는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직무를 남용한 사람들은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에 불법을 행한 자라는 엄한 책망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 분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갖지 못한 자입니다. 주님의 일행을 배척한 사마리아인들에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멸할 것을 주님께 제안한 것은 야고보와 요한이 분을 이기지 못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주님의 온유하신 모습, 죄인을 사랑하시는 마음을 소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분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 오피니언
    • 칼럼
    2016-08-0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