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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칼럼] 상처치유, 가정에서 해야 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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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하고 싶고 잊어버리고 싶지만 반드시 직면해서 깨뜨려야 할 악순환이 있다. 나는 아버지가 싫다.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싫다. 그 사람이 나의 인생에 끼친 너무나도 많은 굴레들. 정죄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정죄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모습이 이렇게 일그러진 것이 나의 어린 시절 때문이라는 사실은 내게 너무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설 수 있는 열쇠는 현재가 아니며 미래도 아닌 가장 생각도 하기 싫은 외로운 과거에 있다. 놓아주지 않은 풀려고도 하지 않는 단단한 과거의 운명의 줄, 아버지는 내게 너무 큰 고통이다. 새 어머니는 주말만 되면 나와 동생을 목욕을 시켜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칠일마다 돌아오는 그 날이 너무나도 괴로운 날이었다. 비록 우리의 몸은 깨끗하였지만 우리의 마음은 증오들로 더욱 더러워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만큼 우리는 어머니에게 화풀이 대상이었다. 우리의 때를 밀어 주는 그 손길에서 느끼는 것은 미움과 그것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이었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도살장의 소와 같은 기분이었다고 생각이 들고 소름이 끼친다. 그러면서 우리는 고등학생이 되기까지 매일매일 정말 이유도 없이 두들겨 맞았다. 7살 때부터 그 작은 몸뚱이는 구타를 당하며 커 나갔던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내일이 오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던가? 초등학생 때 얼마나 죽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던가? 그 당시 미래가 나에게 준 것은 단지 고통과 두려움뿐이었다. 그 때 나와 내 동생은 누구에겐가 구원의 손길을 뻗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도. 우리는 철저하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희생자였다. 지금껏 나는 이러한 미래의 두려움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한 청년의 가슴 먹먹한 고백을 들으며 맹인 가수이면서 작사가인 켄 미드머(Ken Medema)가 부른 노래 ‘이곳이 아니라면’(If This Is Not a Place)을 떠올렸다.
여기에서 눈물을 이해 받지 못한다면/ 나는 어디에 가서 울어야 하나/ 내 마음에 날개를 달아 줄 수 없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에 가서 날아야 하나/ 착하고 덕스런 모습으로/ 당신의/ 기억에 남기 위해 다른 곳은 필요치 않아/ 언제나 남보다 뛰어나기 위해 또 다른 곳은 필요치 않아/ 거짓말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어.//(중략)
내 의문에 답해 줄 수 없는 곳이라면/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이라면/ 어디에 가서 말해야 하나/ 여기에서 눈물을 이해 받지 못한다면/ 나는 어디에 가서 울어야 하나.
그래서 가정은 치유의 센터라 한다. 위로와 격려, 용서와 용납, 친밀감과 존중감이 그 핵심이다. 그런데 도리어 가정으로부터 상처를 받는다. 어느새 가정은 형무소가 되고 만다. 의학적 통계에 의하면 인간의 많은 질병이 용서하지 않는 마음 상태에서 생긴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 메닝거는 인간의 모든 질병의 70%는 스트레스에서 오고 모든 스트레스의 90%는 정신적 질병, 곧 미움과 증오 그리고 용서의 결핍에서 온다고 했다. 미움과 증오와 용서의 결핍이 결국 암, 고혈압, 심장병, 뇌졸중, 치매, 우울증 등의 원인이 된다.
가정은 과연 치유의 센터로서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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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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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W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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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질문이 없다면 이미 생명력이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해 본다. ‘왜?’ 라는 질문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왜?’ 라는 질문은 그 사람의 삶의 자리가 힘들고 이해할 수 없는 카오스 현상이지만 그것은 그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할 것이다.
은퇴 후 나는 매 주일 농어촌 산골 교회 초청을 받고 말씀 사역을 한다. 대형교회를 담임할 때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주일마다 경험하면서 눈물행전을 쓰고 있다. 그 때마다 후배 목회자들의 공통된 질문을 받게 되는 것이 있다. 하나 같이 목회현장에서 경험되는 사역 가운데 아무리 풀려고 해도 풀리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어내는 것이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마치 내가 해결사라도 되는 듯 질문을 할 때 내가 그들에게 들려주는 대답은 한결 같은 한 마디였다.
“목회 현장은 언제나 ‘왜?’ 라는 질문이 있는 곳이야. 그러나 답도 있어요.”
목회 35년을 마무리하고 난 후에도 나는 ‘왜?’ 라는 질문을 하루에도 수 없이 한다. 아무리 엎드려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내 앞에 전개 되는 상황에서 저절로 ‘왜?’ 라는 질문을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신다. 아니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전도서 3:11절을 통하여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섭리신앙이며 믿음이다.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이듯, 사울 왕이 다윗을 그렇게 죽이려고 혈안이 되듯, 히브리 민족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면서 걸핏하면 원망하고 불평하듯, 고라가 작당하여 모세를 향해 반기를 들듯,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의 왕좌가 탐이나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여 세력을 규합한 후 반역 하듯, 설상가상으로 그런 상황에 시므이가 따라오면서 다윗을 향하여 입에 담을 수 없는 악담과 저주를 쏟아 붓듯, 들릴라가 자기를 사랑하는 삼손에게 거짓사랑으로 다가와 나실인의 상징인 머리를 잘라 버리고 블레셋 군에게 넘기듯, 가룟 유다가 자기의 잇속을 챙기려 예수님에게 다가와 거짓 사랑으로 입맞춤하면서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넘기듯, 바울 사도와의 관계에서 가장 가까이에서 동역했던 구리장색 알렉산더와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바울이 병들고 약하고 옥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별 볼일 없는 존재로 느껴질 때 바울을 다양하게 괴롭히고 창질의 썩음 같은 말로 바울을 대적했던 것처럼, 겉옷까지 벗어 주님 앞에 깔아주며 호산나를 외치던 백성들이 몇 날이 지나지 않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듯, 은퇴를 하고 난 후 나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상황은 마치 이와 같은 성경의 역사를 그림판을 찍듯 흡사하기에 ‘왜?’ 라는 질문이 내 안에서 수 없이 읊조리게 된다.
그런데 ‘왜?’ 라는 이 물음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질문이다. 주님이 이미 이런 질문을 하셔야 할 상황을 다 겪으셨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는데도 목사인 내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된다고 “왜 이렇습니까?” 라고 항변하는 것이 욥의 죄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무릎이 꺾어지고 입이 다물어지고 주님처럼 여전히 침묵으로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는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 대부분 한숨을 푹 쉬면서 입을 다물고 천정만 바라본다. 이해는 되는 것 같은데 현실은 그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침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때 내가 조용히 들려주는 말이 있다.
“그것이 목회야. 주님도, 바울도 그렇게 목회하셨지. 답은 오직 하나 믿음이야.”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에서는 수 없는 ‘왜?’ 라는 질문의 상황을 맞게 된다.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이해되지 않는 현실을 맞을 때는 어떤 말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이해가 안 된다고 ‘왜?’ 라는 질문을 반복하게 되면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을 경험한다. 어쩌면 그래서 침묵이 금보다 낫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주신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다. 백 천 번 생각해도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왜?’ 라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한 마디도 ‘왜?’ 라고 하지 않았다. 말씀대로 행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도 그랬고 다윗도 그랬다.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하나님 앞에서 ‘왜?’ 라는 질문은 어리석은 것이다. 목회 현장은 수모와 아픔만 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엘리야에게 사르밧 여인이, 엘리사에게 수넴 여인이, 예수님에게 마리아와 마르다가, 바울에게 누가와 디모데와 뵈뵈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수많은 동역자들이 있었듯 목회현장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품에 안겨 어깨를 들먹거리는 후배 목사를 안고 나도 모르게 국제시장의 윤덕수 할아버지의 통한의 독백이 내 안에서 내 말로 읊조려진다.
“아버지, 이만하면 됐지예?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그런데 너무 힘들었어예.”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는 왜? 라는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 수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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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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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사랑이란 이름의 수학(요한일서 1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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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한 가지는 무엇일까요? 입장에 따라 그 대답은 다양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게 묻는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는 것도 부부 사이의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예쁜 옷을 철따라 입히고 공부를 시키는 것도 다 사랑입니다. 그 아이가 자라 가정을 이루고 또 자녀를 낳아 부모가 그에게 했듯이 똑같이 돌보며 키우는 것이 다 사랑입니다. 그리고 나중엔 자신에게 그토록 사랑을 베푸신 부모님이 병들고 늙어갈 때 그 곁에서 안타까워하는 자녀의 눈물, 역시 사랑입니다.
인생에서 사랑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요?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그것을 산수로 풀면 <○○○ - 사랑 = 0>이 될 것입니다. 부부 생활을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에서 사랑을 빼면 0입니다. 사랑을 뺐을 때 남는 것은 지극히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관계뿐인데, 그것은 사실은 0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인데,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관계는 아무런 영양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 이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빼면 남는 것은 0입니다. ○○○ 이 돈일지라도, 권력일지라도, 미모일지라도, 학벌일지라도, 거기서 사랑을 빼면 0만 남습니다.
또 사랑의 수학 계산중에는 <○○○ × 사랑 = 0>이란 것도 있습니다. ○○○ 이 아무리 나쁜 것이더라도 사랑만 곱해지면 0이 됩니다. ○○○ 이 경제적 손실이라도, 증오일지라도,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사랑을 곱하면 0이 됩니다. 사랑하게 되는 순간, 과거의 미움도, 원수 맺은 것도 다 사라집니다. 과거의 은원관계가 사라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과거청산 방법은 가슴 아픈 과거에 사랑을 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0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과거 청산의 방법으로 특정인들을 재판하고 감옥에 보내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방식은 한쪽에서는 청산되었다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또 다른 미움의 과거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동일한 방법으로 기회를 노려 과거를 청산하고자 할 것이고, 아픈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란 이름의 수학으로 우리를 대하셨습니다. 신약성경 요한일서 1장 9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란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과거가 추해도 그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때, 그 분은 거기에 사랑을 곱하셔서 부끄러운 과거를 0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 분께 지은 죄로 인한 많은 부채를 0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랑의 수학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수학은 잘 하면서도 사랑의 수학은 잘 하지 못합니다. 수학 영재도 사랑이란 수학에는 빵점짜리가 있습니다. 세상의 수학은 상급 학교 진학에 도움이 되고, 특정 분야를 전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수학은 인생 전체를 유지해 주고, 빛을 내는 비결입니다.
어떻습니까? 위대한 <사랑>을 가지고 인생의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어 보십시오. 그리고 덧붙여 <○○○ + 사랑 = ∞>이란 계산법도 잊지 마시구요. ○○○ 이 아무리 힘든 현실이라 하더라도 사랑만 더하면 삶의 기쁨은 무한대(∞)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이란 인생의 수학 시험에서 모두 백점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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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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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해 봅시다] 두 다리가 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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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를 앉아 받아먹는 사람보다
배달하는 사람이 훨씬 더 건강해
독자 여러분도 운동 하시죠? 운동은 꼭 해야한다. 이유는 현대인은 운동부족증에 걸리기 쉽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생계수단이 곧 신체활동이었다. 별도로 운동이 필요 없었다. 생을 영위하기 위해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 그들은 운동부족증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장수하지 못하고 모두 일찍 돌아가셨는가. 그때는 제대로 먹지 못했고, 병이 나도 약도 제대로 쓰지 못했고, 그러면서도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모두 골병이 들어 일찍 세상을 떴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대인은 어떤가. 대부분 운동부족증에 걸려있다.
우리 몸을 도우는 것은 종류가 세 가지이다. 음식을 먹어 몸을 도우는 식보가 있고, 약을 먹어 몸을 도우는 약보가 있고, 운동을 해서 몸을 도우는 행보가 있다. 우리 조상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해 식보를 못했고, 약보를 제대로 못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면서 노동은 지나칠 정도로 많이 했다. 그로인해 골병이 들어 일찍 세상을 떴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어떤가. 먹을 것이 너무 많다. 한정식 식당에 가보면 먹은 것이 많은지, 남아 나가는 것이 많은지 모를 정도이다. 약보는 약을 너무 많이 먹는다. 거기다가 건강보조식품을 얼마나 많이 먹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행보는 매우 부족하다. 건강유지를 위해서는 식보와 약보도 중요하지만 행보가 더 중요하다. 운동을 부지런히 해야만 건강이 유지된다.
현대인은 왜 운동이 부족한가. 왜냐하면 기계문명이 고도로 발달되어 생활에 필요한 것이 대부분 자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자동차,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세탁기 등이 신체활동을 대신 해준다. 이로 인해 우리 몸은 점점 허약해지고 무기력하게 된다.
1950년대 영국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버스운전 기사는 건강이 좋지 않고 일찍 죽는데 차장은 건강하고 장수한다. 왜 그런지 알고보니 운전기사는 가만히 앉아 운전만 하는데 차장은 2층을 오르내리면서 활동하기 때문이었다. 알고보면 어느 직장이든 사무직원보다 외무직원이 훨씬 건강하고 장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고(故) 황수관 박사가 했던 말이 있다. 그는 “승용차는 알고보면 영구차입니다” 그랬다. 실제로 걷지는 않고 차를 많이 타면 탈수록 몸은 망가진다. 알고보면 의사가 병원에도 있지만 두 다리가 의사이다. 실제로 두 다리가 튼튼한 사람은 확실히 건강하고 장수한다. 분명한 사실은 우유를 받아 먹는 사람보다 배달하는 사람이 훨씬 더 건강하다. 두 다리가 의사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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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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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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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날이 있으니 바로 복날입니다. 어느덧 초복을 지났습니다. 어떤 분들은 중복·말복에다가 8.15 광복과 9.28 서울 수복을 합쳐서 오복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우깁니다. 보신탕 더 잡숫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까요? 고구려 벽화에 개 잡는 모습이 나옵니다. 중국 명나라 시대 편찬한 ‘본초강목(本草綱目)’이라는 책은 개를 쓰임에 따라 사냥개(전견, 田犬), 집 지키는 개(폐견, 吠犬), 잡아먹는 개(食犬) 세 가지로 나누고, 식용개는 구(拘)라는 단어를 많이 써 사냥이나 집 지키는 견(犬)과 구별했습니다. 보신탕 대용으로 먹는 삼계탕도 역사가 만만치 않습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 이야기에 벌써 닭이 나오지 않습니까? 추어탕은 고려 말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공식적으로 등장하지만 그 이전부터 서민들의 음식으로 각광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절기상으로는 초복이었던 한 주간은 세계사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많은 주간이기도 했습니다. 1509년 7월 10일, 종교개혁가 존 칼빈(John Calvin)이 태어났습니다. 1789년 7월 14일, 구체제(Ancien regime)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prise de la Bastille) 습격 사건으로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는 7월의 이 한 주간을 가슴 아픈 사건으로 얼룩진 주간으로 기억하게 생겼습니다. 7월 14일 밤 프랑스 니스(Nice)라는 도시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일축제가 열려 해변가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트럭 한 대가 나타나 축제 현장을 그대로 돌진해서 무방비로 있던 사람들을 덮쳐, 아이들 포함한 84명이 사망하고 18명이 중태입니다(17일 현재). 7월 15일 밤 터키에서는 군부쿠데타가 일어났는데, 불과 하루 사이에 265명이 사망하고 1440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대부분이 무고한 시민들이었습니다. 음식으로 더위를 물리칠 수는 있지만, 무더위 속에서 일어난 이런 사건들은 그 무엇으로도 극복할 수가 없겠습니다. 일찍이 성(聖) 프란체스코(San Francesco d’Assisi, 1182-1226) 또한 이런 기도문을 남겼습니다.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도록 나를 도와주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여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종교의 이름으로 박해와 살육이 자행되고, 교권은 타락했으며, 교회는 날로 세속화되어 가던 시절입니다. 한 사람의 절규에 찬 기도였지만, 당시 교회와 세상에 주는 충격이 대단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참극들을 바라보면서, 어째서 이런 일들이 자꾸만 일어납니까 반문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럴 때마다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세상의 빛이다”(요 8:12)라고 하셨고,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내가 세상에 빛이라”(요 9:5)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은 너무나 혼탁합니다. 테러와 전쟁과 억압과 분노가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흑암의 권세를 물리칠 이 그 누가 있겠습니까? 그저 주님 앞에 기도할 뿐입니다.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신 주님, 이 캄캄하고 혼탁한 세상에 평화의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시옵소서.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 대신 평화의 광채를, 죽음의 음침한 기운 대신 생명의 광선을 내려주소서.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영적인 눈을 뜨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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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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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칼럼] 지중해 지역 한인 선교사 가족 수양회 인도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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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지역에서 선교한다는 것은 주로 북아프리카 지역과 스페인, 포르투갈 등지에서 모슬렘권 선교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유럽과 미국 선교사들이 이 지역 선교를 도맡아 했었다. 그러다가 30여년전 1980년대부터 우리 한국교회 선교사들이 진출하기 시작하더니 2016년 지금쯤에 이르러서는 우리 선교사들이 그 책임을 이양 받고 있다.
가나, 모로코, 모리타니아, 튜니지아, 이집트, 서부 사하라, 리비아.... 이 지역들이 지중해를 끼고 있는 북 아프리카 국가들이다. 여기에 파송 받아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우리 한인 선교사들이 우리 말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 받고 영과 육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건강한 교단의 선교사들 35가정이 초청되었다. 이 많은 식구들이 수양회 장소인 스페인까지 이동하기 위해서는 항공료가 꽤 들어가며 그리고 4박 5일을 숙박하면서 수양회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경비가 필요하다. 따라서 한인 선교사들은 〈수양회〉를 간절히 사모하면서도 재정 문제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실제로 개최되기 까지는 많은 기도와 노력과 수고가 준비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들의 간곡한 호소를 접하면서 두 가지 마음이 나를 힘들게 하였다.
사도행전 16:9을 보면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서서 바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이라는 말씀이 있다.
바울 사도는 이 요청에 즉각 응하여 선교의 발걸음을 유럽으로 향하였다. 예수님께서도 누가 도움을 요청하면 「주라, 거절하지 말라!」고 하신다.(눅 6:30, 38)
기도하다가 하나님께서 이 말씀들을 기억나게 하심으로 성령의 지시하심이라 믿고 당회와 논의한 끝에 저들의 요청을 도와주기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6월 23일(목) 출발하여 7월 1일(금) 귀국하는 일정으로 수양회를 인도하였다. 수양회 장소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근교에 있는 아주 소박한 지역 청소년 센터였다. 항공편은 대한항공 직항 편을 이용하였다. 선교사님들을 만났을 때 내가 은혜를 받았다. 모든 한인 선교사들은 얼굴들이 검게 그을리고 몸들도 날씬하였다.
그들의 사역지는 적도가 가깝기 때문에 강렬한 태양 볕을 온 몸으로 받아야 하므로 피부가 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열대 지방의 음식〉이라는 것이 우리나라 본국과 비교하면 열악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선교사들 중에는 20년 넘게 또는 30년 동안 북아프리카에서 선교 사역을 지속하고 있는 분들이 있어서 나는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선교사님들과 교제하면서 오리려 내가 은혜를 받아야지!” 이런 마음가짐으로 지냈다. 그리고 여섯 번에 걸쳐서 기도하는 심정으로 말씀을 증거 하였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더나? / 예루살렘아 정신을 차려라 / 춤 추시는 하나님 / 수건을 벗은 얼굴로! / 성곽 없는 성읍 / 내 인생의 만선」
목요일 저녁, 눅 5:1~11을 본문으로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는 저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배 가득히 채우므로 만선을 이루지만 생선으로써 〈만선〉을 이루기 전에 그들의 배에 예수님께서 올라 주심으로 그 순간 이미 〈만선〉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이미 〈만선의 인생〉임을 깨달아 감사와 만족과 행복을 날마다 누리면서 선교 현장을 섬기고 지키자고 부탁하였다.
교회에서 그리고 성도들의 사랑으로 주신 여비를 기쁜 마음으로 후배 선교사들께 용돈으로 전해 드리고 마드리드 공항에서 밤 10시 출발하는 대한항공에 몸을 실었다.
“2년 후 2018년에도 꼭 와 주십시오!” 선교사님들의 부탁 음성이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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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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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률상식] 비대위의 교인 총회 노회 탈퇴는 불법, 당연 무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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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위의 위임목사 예배당 출입 금지 행패는 예배 방해죄
■노회의 직무인 위임목사 해임위한 지교회 공동의회 절대 불가
[질의] 경평노회 영동중앙교회 사건입니다. 2016년 6월 8일 수요예배를 마치고 담임목사와 교인들이 귀가하기를 기다렸다가 일부 교인들이 담임목사 모르게 별도 간담회를 하다가 돌연 영동중앙교회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황○○ 장로 이하 “비대위”라 함)를 조직하고 김○○ 장로를 사회자로 선임하여 교인 총회를 한다고 하면서 “영동중앙교회는 경평노회를 탈퇴하기로” 결의하고 6월 10일자로 한국경제신문에 경평노회 탈퇴 공고를 한 후 총회 임원회와 경평노회에 노회 탈퇴를 통고하였습니다.
소위 비대위는 용역 약 10명을 동원하여 영동중앙교회 위임목사와 성도들의 예배당 출입을 제지하고 비대위를 제외한 목사와 성도들이 예배당에 출입을 할 수 없게 함으로 부득불 다른 곳에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에 대하여 경평노회를 탈퇴한 자들 중 장로 8명이 영동중앙교회의 위임목사인 장광우 목사와 정영수 장로를 교회 불법 분립이라고 하면서 6월 27일자로 자기들이 탈퇴했다고 통고한 그 경평
① 교회가 비대위를 조직하여 노회 탈퇴를 위한 교인 총회를 한 일과 ② 비대위가 위임목사의 출입을 제지한 후 목사와 교인들이 다른 장소에서 예배드린 것을 교회 불법 분립이라고 고발한 일과 ③ 비대위가 변호사 김진필 씨를 대리인으로 “영동중앙교회 담임목사 해임 결의 및 신임 담임목사 선임을 위한 임시 공동의회 소집 요청 건”을 통고한 일과 ④ 비대위가 총회 임원회에 노회탈퇴를 통고한 후에 총회 사무국이 비대위와 영동중앙교회 양측에 대하여 총회 서류 발급을 거부하는 일 등이 법적으로 합당한 일인지 목사님의 법리적 답변을 바랍니다(서울, 합동, A목사).
[답] 질의자가 합동 측 교단의 목사이므로 합동 총회의 교회 헌법으로 답한다.
1. 비대위의 교인 총회로 노회를 탈퇴했다 함에 대하여
교회는 세상의 어떤 단체들처럼 비대위를 인정하지 않고 비성경적 반교회적인 사조직으로서 그 활동은 특수 범죄 행위로 본다(교회법률 상식 pp.613-647 참조). 그 이유인즉 교회의 모든 조직과 활동은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로서 성령의 역사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교회 헌법의 규정을 준수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활동임에 반하여 소위 비대위와 같은 사조직의 활동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비성경적이고 세속적인 인본주의의 처사이기 때문이다.
교회에서의 교인 총회란 교회 정치 제21장 제1조에 규정한 공동의회를 의미하는데 공동의회의 소집은 반드시 당회의 결의가 있어야 하고(동 2항), 회의의 의제를 반드시 1주일 전에 교회 앞에 광고 혹은 통지해야 하며(동 4항), 공동의회 의장은 반드시 당회장인 목사이어야(동 3항)함을 교회 헌법은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본건은 일부 교인들이 교회의 대표자인 당회장도 모르게 간담회를 한다고 하면서 대화를 하다가 돌연히 비대위를 조직하고 당회장도 아닌 권원 없는 장로를 사회자로 세워 놓고 공동의회(교인총회)를 한다고 하면서 “영동중앙교회는 경평노회를 탈퇴한다.”는 결의를 하였으니 소위 비대위의 행패야말로 합법적인 것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성경과 교회 헌법을 짓밟고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교회(엡1:22-23)를 나누는 특수 범죄 집단에 다름 아니다.
2. 비대위가 목사와 장로를 고소한 일에 대하여
소위 비대위는 용역을 동원하여 하나님께서 노회를 통하여 위임한 교회의 대표자요, 하나님의 양 무리를 먹이고 치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신 교회의 사자요, 그리스도의 사신인 목사(교회 정치 제4장 제1조)와 그 교회 성도들의 예배당 출입을 제지한 것은 성도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방해하는 집단적 특수범죄 행위이다.
그런데 용역까지 동원하여 목사와 교인들의 예배당 출입을 방해한 자들이 예배당에 들어갈 수가 없으므로 다른 곳에서 주일예배를 드린 일에 대하여 교회 불법 분립 운운하였다. 더구나 6월 8일에 경평노회를 탈퇴하고 6월 10일에 한국경제신문에 탈퇴 공고까지 한 비대위 집단의 장로들 8명이 스스로 탈퇴했다고 한 바로 그 경평노회에 고발장을 제출하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밭갈이하는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자기들이 출입을 제지하여 예배 방해죄를 범해 놓고 예배당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다른 곳에서 예배를 드린 교회의 대표자인 목사와 그 교회의 교인들을 교회 불법 분리라고 하면서 고소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이를 두고 적반하장이라 하였던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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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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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 내어버려 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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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로마서 1장에는 ‘내어버려 두사’라는 단어가 3번 나온다. 마음과 양심 혹은 영적인 지각으로든 옳은 것인 것을 알고도 행하지 않고, 악인 것을 알고도 행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내버려 두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내어버려 두시면 멸망할 때까지 간다는 것이다. 무서운 말씀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다. 처음에 바늘을 훔칠 때는 두려워하고 떨지만 이것을 계속하면 소를 도둑질해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거짓과 악한 행동이 사형에 해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그런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에는 기독교 남편, 기독교 아버지, 기독교 검사, 기독교 의사, 기독교 사업가, 기독교 목사 등 수 없이 많다. 이 기독교 사람들은 교회에 출석하고 말씀을 듣고 교회의 직분을 받고 교회 의식을 행하고 기도하고 헌금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기독교 남편이 아내에게 지배적이며 아내를 무시하고 음행을 습관적으로 하면 이 사람은 기독교인가? 또 기독교 검사가 자기의 지위를 이용하여 악을 행한 사람의 악을 덮어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고 사회의 악을 옹호하고 약자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이 검사는 기독교인가? 또 사업가가 세금을 다 내고서는 회사를 운영할 수 없어 세금을 탈루하고 더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해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값싼 재료로 제품을 제조해 팔았다면 이 사람은 기독교인가? 이런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악한 것을 옹호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상태는 어떠했을까? 부부든 가정이든 교회든 처음에는 콩 한 쪽이라도 나눠먹는 사랑이 있었다. 서로를 위하는 말과 행동도 했을 것이다. 말 속에는 진심이 있었고 약속을 하면 무조건 믿었을 것이다. 늘 진짜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평화와 자유와 행복이 있었다. 당연히 이런 곳에 사람들이 오고 싶어 했고 몰려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교회에 분파가 생기고 욕심이 생기고 권력이 생겨났다. 사랑을 잃어버리고 나, 내 것, 내 편이 생기기 시작했다. 원래 사람의 숫자가 많으면 힘과 권력이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여기에 지배 복종의 교회 권력이 생기고 큰 건물이 생겨났다. 예배의 의식은 점점 더 형식적이고 화려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은 이 거대한 건물을 유지해야 했다. 교회는 사람의 숫자가 필요했고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의 권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점점 더 돈 많은 사람, 힘 있는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좋아했다. 이것이 교회의 타락인 것이다.
지난 7일 서울 서초구의 한 아파트에 10건의 세금 7억3천2백만 원을 체납하고 주소도 제주도로 옮겨놓은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은 돈이 없다하면서 세금은 내지 않으면서 교회에 매달 100만원씩 십일조를 꼬박 꼬박 낸 기록도 나왔다. 이 사람처럼 수십억의 상습체납자가 내는 십일조를 교회는 기뻐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십일조보다 먼저 세금을 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선을 행하는 것이 먼저이며, 선을 행하는 것이 생명이며, 선한 재물을 헌금으로 드려야 할 것이다. 일반적인 선을 행하다가 영적인 진리를 만나게 되고 그 진리를 따라 선을 행하다가 더 깊은 진리를 알게 되고 또 이 진리를 따라 사랑과 선을 행하면서 내면이 성장하는 것이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선이시고 빛이시고 진리이시기에 거짓과 악 가운데서는 계실 수 없다. 사랑과 진리와 선이 있는 곳에 거하신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남편, 아버지, 검사, 의사, 목사...이 모든 일과 삶 속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람을 볼 때 상대방이 내 목표, 내 욕망의 대상으로 보이면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상대방을 내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반드시 내가 아니라 상대방을 위하는 ‘선’으로 나타나야 한다. 부부나 가정이나 교회는 사랑과 진리와 선이 있어야 하나가 되고, 자유, 기쁨, 생명이 있는 것이다.
우리 부부사이에는 사랑과 선이 있는가? 우리 집에는 사랑과 선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이 있는가를 살피고 사랑과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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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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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좋은 사람 여호수아 (민 14장 6~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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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는 한마디로 좋은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출애굽하는 민족의 지도자 모세의 뒤에서 온갖 일을 도우며 40년을 그의 수종자로 지냈습니다. 위대한 모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고 모세의 뒤에서 리더로써의 자질과 능력 등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됩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습니다. 그의 뒤에서는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승리가 자신의 죽음을 건 전투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 임을 알게 됩니다.
노예로 학대당하던 애굽을 탈출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향하던 중 드디어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모세는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 12지파 대표 12명을 정탐꾼으로 파견하게 됩니다.
10명의 정탐꾼은 견고한 성과 강한 거인족을 보고 아주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보고를 하였지만 나머지 2명의 정탐꾼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고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의 약속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처럼 믿음이 좋은 자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볼 때 문제를 보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봐야 합니다.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탐한 날 40일 하루를 1년으로 40년을 광야에서 헤매게 됩니다. 20세 이상의 성인들은 40년 광야생활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고 가나안 땅에는 성인 중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들어가게 됩니다.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모세의 죽음으로 두려워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백성들을 여호수아는 이끌어야만 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정복과 함께 백성들을 이끌고 가야만 하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고 모세가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면 모든 일이 형통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요단강을 가르고 마른 땅같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건너갑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최선을 다해 가나안 부족과 싸웠습니다.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와 함께 하셨고 그는 약속의 땅을 차근차근 정복해 나갔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정복한 땅을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자신이 속한 에브라임 지파라고 예외일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태양을 중천에 머물게 할 정도로 순수하고 견고하였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의 많은 왕들을 정복한 영웅입니다.
여호수아는 110세로 죽기 전 백성들에게 당부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기고 그의 율법을 힘써 지키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오직 그와 그의 집은 하나님만 섬기겠노라고 합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께서도 바로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이처럼 여호수아는 그의 전 삶을 통하여 온전히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께 좋은 자였습니다. 모세의 죽음 이후 방황하며 두려워하는 백성들을 담대히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정복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무나 좋은 자입니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준 여호수아는 좋은 자로 기억될 것입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두려워 말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온전히 하나님을 따라 행함으로 약속의 땅을 차지한 여호수아처럼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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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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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칼럼] 게임은 죄고 하면 안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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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위와 같이 질문한다면 목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게임도 죄인가요? 볼링이라는 게임을 좋아하는 목사들도 많은데요.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의 성경을 보면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2절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데살로니가 전서의 전체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1장부터 3장 13절까지는 모범적인 교회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 이후 4장 12절까지는 모범적인 삶의 행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4장 13절부터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과 재인식을 강조하고 있다.
이 성경의 전체적 주제는 교회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성전이요, 가정이 교회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 가기 위해 어떤 교회가 건강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며 앞으로 어디세 꿈과 소망을 두고 살아야하는 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결국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동일한 하나님의 메시지로 주어진다. 우리에게 꿈과 희망, 미래를 주기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이다.
이러한 내용 가운데 우리에게 아래와 같은 말씀을 주셨다.
15.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 18.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 21.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즉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기 위해 악의 모양이라도 버려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예를 들어 문제를 하나 제기 해 보자.
디모데전서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외 딤후 3:2, 히 13:5)
돈을 사랑하는 것은 악의 뿌리이다. 근원이라는 것이다. 즉 돈은 게임보다 더 나쁜 것이라 할 수 있다. 버려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다 알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라.
베드로전서 3: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그외 로마서 12:9 시편 37:27 욥기 28:28 잠언 4:27)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기 위함인가? 교회, 가정, 우리 자신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해 취해야할 더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더 나아가 진짜 바라보아야 할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가정 가운데 우리 삶의 돈과 여가는 필요하다. 게임, 스마트폰 등 취미생활 즐기며 살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다. 중독과 여가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이 내 자녀들을 온라인 중독문화로부터 건져내는 것이다.(P폐나목 저서 중에서... 나침반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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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