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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칼럼] 버려진 폐광을 금광으로 만들 수 있다
    얼마 전, 양기대 광명시장의 초청으로 광명동굴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나는 동굴을 보고 양기대시장의 그 기발한 발상과 창조적 아이디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광명동굴은 일제시대 때부터 금을 캐던 탄광이었는데 나중에 폐광이 되어서 새우젓이나 보관하는 장소였다. 완전히 쓸모없이 버려진 상태였다. 그런데 양기대 광명시장이 취임하면서 버려진 폐광을 사서 관광명소로 개발해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물론 처음에 일을 추진하려고 할 때 주변의 모든 사람이 다 반대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기대시장의 창의적 역발상으로 마침내 황금동굴이 탄생되었다. 가서 보니까, 동굴 속에 예술의 전당을 만들어 놓고 아쿠아월드, 동굴 폭포, 식물원, 황금궁전, 황금방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동굴 안에 와인 셀라와 레스토랑도 있다. 명품 와인과 한우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다. 폐광이 되어 버려진 동굴 속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신세계를 창조해 낸 것이다. 광명동굴을 보려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연말까지 하면 방문객이 150만 명이 될 것이고 내년에는 200만 명 이상이 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그야말로 현 정부가 강조하는 창조경제의 모범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명시는 유서가 깊은 유적지나 오락시설이 없다. 그래서 관광객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양시장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추진력이 만들어낸 광명동굴 때문에 지속적인 관광 수입원을 창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의 창의적 발상이 이토록 위대한 결과를 낳는 것이다. 도전을 받은 나는 우리 교회 전도우수자들과 함께 광명동굴로 가서 창조적 사고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창의성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희망의 세계를 향한 상상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것이 누구도 생각지 못한 위대한 창의적인 결과로 나타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인간관계나 전도를 할 때도 희망의 언어와 창의적인 상상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게다가 동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대접하며 전도작정까지 하고 왔다. 그 결과 전혀 예상치 못한 선교헌금 작정까지 자발적으로 동참한 것이다. 나 역시 황금동굴에서 창의적 발상을 목회적으로 적용을 한 셈이고 사회적 선순환을 시킨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발상의 전환이 이렇게 중요하다. 그런데 발상의 전환을 하려면 통념의 틀을 깨뜨려야 한다. 기존의 지식과 관습적 형태로부터 벗어나서 창의적인 사고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창조경제의 시작이고 4차 산업혁신의 신항로이다. 우리나라도 통념을 깨는 창조적 상상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 중국 대학가 앞에는 창업을 생각하도록 하는 벤처기업 부스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대학가가 대부분 유흥가다. 게다가 중국에서는 젊은이들이 아이디어만 확실하면 창업을 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투자를 해주고 밀어주니까 젊은이들의 벤처사업이 팍팍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혀 창의적인 4차 산업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머리 좋으면 안전한 직장에만 들어가려고 한다. 그러니 어떻게 미래 산업을 이끌어갈 창의적인 영재 발굴이 가능하겠는가? 지금이야말로 4차 산업 혁명을 위한 창의성과 모험심이 필요한 때인데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너무 통념의 틀에 갇혀 있다.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고 과거의 동굴에 갇혀 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버려진 폐광들이 많다. 그것이 어떤 조직이든, 장소이든, 산업 분야이든, 그 버려진 동굴을 새로운 부를 창조하는 황금동굴로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오직 통념의 틀을 깨는 발상의 전환과 창조적 상상력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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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27
  • [성서연구] 누가 핸들을 잡고 있습니까 (욥기 23장 10절)
    지난 10월 13일 밤 10시 11분쯤 경부고속도로 언양 IC 근처에서 큰 교통사고가 있었습니다. 관광버스에서 발생한 화재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이들은 울산의 모 기업에 함께 입사하여 근무하고 퇴직한 이들로서 부부간에 해외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고 합니다. 사고 원인에 대한 조사가 한창입니다. 운전기사는 자동차 타이어의 펑크가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반면에 경찰은 기사의 운전 실수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로서는 운전기사가 공사 중인 좁은 고속도로에서 무리하게 추월을 시도하다가 가드 레일과 충돌하여 일어난 사고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조사 과정에서 운전기사의 과거 무면허운전과 음주운전 경력이 드러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조사로 원인이 밝혀져도 이미 희생된 분들은 어찌합니까? 충격으로 정신을 잃거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상태에서 갑자기 불길에 휩싸였으니, 얼마나 참혹했을까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밤에 운전을 하다가 교통 신호에 걸려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사거리 반대 방향에도 차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 안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헤드라이트 불빛만이 이쪽으로 쏘아올 뿐입니다. 그 자동차 기사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많은 사람인지, 청년인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신호가 바뀌면 상대방 차가 무섭게 달려옵니다. 분명히 사람이 운전하고 있는 것이건만, 운전석의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어두운 선팅으로 대낮에도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마치 시커먼 괴물이라도 덮쳐오는 듯합니다. 이런 느낌은 맞은편에서 제 자동차를 보는 이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자동차 안의 보이지 않는 운전자, 그가 누구일까요? 그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자동차는 곱게 가기도 하고, 무서운 괴물처럼 달리기도 할 것입니다. 안이 어두워 보이지는 않으나, 자동차가 달리는 모양새를 보면 운전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도 자동차와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의 핸들을 잡고 있는 운전자는 누구일까요? 혹시 그는 우리 인생이 가야 할 길도 제대로 모르는 엉터리 기사는 아닌가요? 난폭 기사는 아닌가요? 음주운전자는 아닌가요?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은 아닐까요? 그에게 핸들을 맡겨도 될까요? 그가 무작정, 길도 아닌 곳으로 달리면 우리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인생이란 자동자를 가장 안전하게 운행해 주실 운전자는 누구일까요? 인생의 핸들을 누구에게 맡기면 안심일까요? 본문인 욥기 23장 10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아멘. 당시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까지 잃었습니다. 게다가 자신은 건강까지도 잃었고, 아내는 위로가 되기는커녕 남편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막말까지 퍼붓는 터였습니다.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이미 도로를 이탈하여 벼랑에 걸린 것과 같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욥 자신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인생이 가야할 길을 알고 계시고, 나중에는 정금 같이 만드실 것을 믿었습니다. 인생의 핸들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우리의 가야할 길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분, 우리 인생 최고의 운전기사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난폭운전도, 음주운전도, 무면허운전도 모르는 분입니다. 그 분은 우리 인생의 가야 할 길을 아시고 가장 안전하게 우리를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 인생의 핸들을 그 분께 내어드리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가장 안전하게 천국에까지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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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27
  • [함께 생각해 봅시다] 행복은 소유가 아니다
    행복을 소유라는 사람이 많으나 소유욕은 끝이 없고 만족을 몰라 먼저 지혜자 솔로몬이 한 말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언 15:16) 지금 지구상에 200여개의 나라가 있으며 그중 인구가 5,000만명 이상이면서 일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가 넘는 나라는 일곱나라이다. 미국,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 이렇게 7개국인데 인구가 많으면서도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들이다. OECD(경제개발협력기구)는 세계의 부자클럽으로 불린다. 34개 회원국이 있으며 우리 한국도 이미 가입돼 있다. 객관적인 조건으로 본다면 한국 국민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며 행복하게 살고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 한국은 OECD 국가 중 삶의 만족도는 27위로 OECD 국가의 평균치에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2015년 기준 행복지수는 조사대상 143개국 중 118위로 최하위권이다. 자살율이 3위이고 OECD 국가 중에서는 1위이다. 국민소득 3만불에 육박하고 있는 나라에서 그 국민이 행복하게 살고있지 못하다는 증거 아닌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 우리 국민은 풍요 속에서도 행복하지 못할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젠 정말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할 때가 되었다. 가장 먼저 생각해 봐야하는 것은 행복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무엇을 행복이라고 하는가. 남들이 누리는 행복이 아닌 자기의 행복에 대해 정체성이 정리돼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행복은 곧 소유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소유가 없어지면 불행해질 것 아닌가. 소유는 절대적인 조건이 되지 못한다. 그 뿐 아니라 그 누구도 행복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소유에는 쉽게 이르지 못한다. ‘재물은 소금물과 같다’는 로마의 격언이 그것을 말해준다. 인간의 소유욕은 끝이 없으며 결코 만족을 모른다. 그 때문에 소유가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평생 노력해도 행복해질 수 있는 확률이 거의 없다. 이유는 행복은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나 삼성의 이건희 회장을 보라. 그는 14조원의 큰 재산을 소유하고 있지만 지금 병원에 누워있지 않은가. 그 어마어마한 소유도 이건희 회장의 행복과는 무관하다. 마지막으로 모세가 행복에 관해 말한 것을 보기 바란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신 33:29) 그랬다. 구원받은 백성은 행복한 사람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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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27
  • [시사칼럼] 춘천 어느 책방 이야기
    새가족부 집사님께서 과일 접시 한복판에 녹차꽃 한 송이를 두셨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꽃인데 정말 예뻤습니다. 게다가 흰색 꽃잎 하나마다 저마다의 풍미가 있다지요? 쓴맛의 고(苦)와 단맛의 감(甘), 신맛의 산(酸), 짠맛의 함(?), 떫은맛의 삽(澁), 그러고 보니 이 꽃잎 한 송이에 우리네 인생의 진면목까지 다 담겨 있는 셈입니다. 녹차꽃에 홀려서인지 녹차를 한 잔 끓였습니다. 녹차 향기가 가을 향기와 뒤섞여 묘한 운치를 자아냅니다. 가을입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그랬는데, 가을꽃 녹차 내음 속에 좋은 책 한 권을 읽는 것에 비견할만한 인생의 낙이 또 없지 싶습니다. 올봄방학 때 속초로 가족 여행을 떠났었습니다. 여행을 떠난 저에게는 괴벽(怪癖)이 하나 있습니다. 책방을 찾는 일입니다. 사실 21세기 여행지에서 책방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만나고 시간을 보내고 가난한 고학생들에게는 착한 도서관이기도 했던 서점들이 하나 둘씩 문을 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춘천에서 서점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체인점도 아니고 백화점 서적 코너도 아니니 그냥 동네서점이라고 불러야 할 텐데 그게 미안할 정도로 근사한 책방을 길가에서 그냥 찾았습니다! 안에 들어가서 진열된 책들을 보고는 더 놀랐습니다. 대형 서점이나 신간 안내 책자에서도 보지 못했던,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니 참 좋은 책들이 즐비한 게 아닙니까? NHK에서 취재하고 모타니 고스케(藻谷浩介)가 쓴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서울: 동아시아, 2015) 등이 그 때 구입했던 책들입니다. 차로 몇 시간 거린데도 묘한 예감(?) 탓인지 계산하면서 회원 가입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서점이 신문에 났습니다. 10월 8일자 C일보는 주말 섹션에 <손님 줄어드는데도 매장 키운 속초의 60년 된 책방, 3대째 내려오는 D 서점>이라는 제목의 취재 기사를 실었습니다. 1956년 할아버지가 처음 시작한 서점을 맡기로 한 막내 손자 김영건 씨는 망설이던 끝에 “해 보자, 대신 서점다운 서점을 만들어보자!” 결심했다고 합니다. “서점 기능에 충실한 서점을 만들고 싶었어요. 오래된 서점이 관광지 역할을 하면서도 책은 못 파는 경우가 많잖아요. 손님들이 우리 서점 와서 모르는 책을 발견하는 재미를 느끼면 그게 바로 매출로 이어질 거란 생각에 공간도 개방적으로 꾸몄죠.” 장소를 이전하고 주차장과 실내 공간을 늘렸습니다. 동네책방수난기가 난무하는 시대를 그렇게 역주행했습니다. 그런데 무심결에 방문했던 손님들이 책을 읽다가 사 가기 시작합니다. 베스트셀러 목록을 참고하는 사람들이 생겼는가 하면, 매달 독서 모임이 열리고, 급기야는 입소문을 타고 관광객이 들리는 여행 코스가 되었답니다. 가끔 이렇게 기분 좋은 승리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소설가 이효석이 낙엽을 태우면서 느꼈던 묘한 쾌감이 이런 것이었을까요? 소소한 일상 가운데 깨달은 인생의 진리 같은 것 말입니다. “서점은 서점다워야 한다.” 서점뿐이겠습니까?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 ‘목사가 목사다워야 한다.’ 가을은 서점에게만큼 교회에도 중요한 계절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서점만큼이나 개신교도 쇠락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교회는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까? 춘천 책방은 시류 앞에 기죽지 않고 다른 것 쳐다보지도 않고 오직 서점으로서의 기본과 본질에 충실했기 때문에 부흥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교회도 기죽지 않고 다른 것 쳐다보지 않고 오직 교회로서의 기본과 본질에 충실할 수 있다면, 부흥의 역사를 새롭게 써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녹차 향기 가득한 이 가을에 나머지 책방들도 함께 그리고 교회도 근본으로 돌아가(ad fontes)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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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3
  • [성서연구] 마음에서 나오나니(마태복음 15장 15-20절)
    지난 10월 9일은 570돌 한글날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세종 28년, 음력 9월 10일에 훈민정음이 공표되었는데,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446년 10월 9일이 됩니다. 일본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상황에서 민족정신을 수호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1926년에 제정되었습니다. 현재 한글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한글이 처음부터 <한글>이라고 불린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훈민정음, 訓民正音>이라 불렸는데, 그 뜻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입니다. 그 후 <언문, 諺文>이라고도 했는데, <언,諺>이란 ‘우리말’ 또는 ‘정음’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종 시대에는 <언문청, 諺文廳>이 설치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그 후 <언서, 諺書>라고 불리기도 하고, 여성들이 많이 사용한다 해서 <암클>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08년 주시경(周時經)을 중심으로 <국어연구학회>가 만들어졌으나,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바로 <배달말글몯음>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1913년 4월에 다시 그 이름을 <한글모>로 고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때부터 <한글>이란 이름이 사용된 것으로 보이고,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27년 한글사에서 펴낸 ≪한글≫이라는 동인잡지에서부터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소중한 한글을 잘 사용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종께서 선포한 것은 글자였는데, 그것을 <정음>, 즉 ‘바른 소리’라고 부른 것입니다. 글과 소리는 엄연히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글을 소리라고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글로 모든 소리를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까지......한글로 표현 못하는 소리가 없습니다. 결국 한글은 소리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였고, 소리를 표현하는 정도에 있어서 세계 최고의 글입니다. 이상에서 보듯, 글과 소리는 구별될 수 없습니다. 글이 먼저 있고, 소리가 생긴 것이 아니라, 소리가 먼저 있고 그 후에 이를 표현하는 도구로 글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른 글이 되려면 먼저 바른 소리, 즉 바른 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 아프게도 요즘 우리 국민들은 바른 말을 할 줄 모릅니다. 좋은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비속어, 저속어가 판을 칩니다. TV나 SNS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 사용하면 금방 퍼집니다. 말이 저속하니, 글도 저속해집니다. 글이 말을 기록하는 도구라면, 우선 말부터 아름다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을 <복음,福音>이라 부르지요. 복된 소리입니다. 그리고 복된 소리를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우리는 그 복음을 듣고, 한글로 기록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최고의 글인 한글을 가진 백성답게, 그리고 그리스도인답게 <복된 말, 좋은 소리>를 내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복된 말은 어디서 나옵니까?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악한 것들이 가득하면, 그 악한 것이 입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18-19절). 결국 아름다운 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마음이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사회에 온갖 악한 말이 난무한다는 것은 그 만큼 국민들의 마음에 나쁜 것이 가득하다는 증거라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채워 주시길 기원합니다. 그것들이 복된 말이 되어 나오고, 그것들이 멋진 한글로 기록되어 널리 퍼지면 좋겠습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을 예수님과 그 말씀으로 채움으로 복음을 입으로 말하게 되길 원합니다. 오 주님, 우리의 마음과 말과 글을 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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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3
  • [목회자칼럼] 건강한 교회 공동체 세우기(1)
    교육전도사로 부름을 받은 이후로 (1969.6.1.~고신대학교 신학과 1학년) 전도사(고려신학대학원 시절) 그리고 강도사, 부목사를 거쳐 담임목사로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교회>를 교역자와 목회자로서 섬기고 있다는 것은 황송하면서도 감격스럽기가 그지없는 일이다. 그 세월이 어언 48년째이다. 참으로 많은 ‘상황’을 지켜보고 경험하고 교훈을 받고 힘들어하기도 했다. 때로는 노회와 총회를 섬기면서 전국 여러 곳의 교회를 위하여 상담도 해주고 수습을 위해 무던히 노력도 해보고 전권위원이나 특별위원으로 중책을 맡아 은혜로운 해결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는가 하면 노심초사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우리 모두가 아담의 후손으로서 어머니의 태에서 부터 죄성(罪性)을 지니고 세상에 태어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인 : 기독교신자>라고 하는 참으로 자랑스러운 신분(身分)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게 아름다운 주님의 교회를 어렵게 만들고 힘들게하는 경우들이 많음을 슬퍼한다.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첫째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다. 지금은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 자신들마저 자신이 <그리스도인 : 기독교신자>라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지 못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사도행전 26:29절을 보라.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그리스도인들을 심하게 증오하고 박해하고 무시하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고 나서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 된 것을 최고의 기쁨과 자랑으로 여겼다. 무한한 자부심을 가졌다. 그리스도인이던 스데반을 증오하고 재판하던 그가 이제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으로부터 심문과 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죄수의 위치에 서 있으면서 자신을 재판하는 왕과 총독을 향하여 “나는 두 분께서도 나처럼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바울의 이 모습을 보시면서 주님은 흐뭇해하셨을 것이 분명하다. 오늘 우리에게 바울의 당당함과 자부심이 있는가? 바울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신명기 33:29, 빌립보서 3:8) 둘째로 우리는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써 세우신 것이 교회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다.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결단코 이기지 못한다. 교회는 주 예수께서 친히 세우셨으므로 땅 위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것이다. 에베소서 5:27은 교회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 된 우리가 교회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이 얼마나 크고 신비로운가를 잘 알지 못하므로 주님의 몸인 교회를 아프게 하고 손상시킬 때가 적지 않다. 필자는 하나님의 과분한 사랑과 긍휼로 말미암아 비교적 순탄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의 여정을 걸어왔다. 따라서 나의 추억과 뇌리에는 언제나 교회의 아름다움이 자리를 잡고 있다. 언제나 교회 공동체를 사랑하고 그리워한다. 데살로니가전서 2:13,17,19,20 말씀은 내가 언제나 당당하게 암송하는 말씀이다.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그러나 목회의 연륜이 쌓여가면서 노회와 총회를 섬기면서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교회들을 만나야 하는 경우들이 많아졌다. 갈등하는 교회를 찾아가서 화목을 이룰 수 있도록 정말 최선을 다하였다. 교회가 얼마나 거룩하고 소중하며 주님께서 자기 눈동자 같이 아끼고 계시므로 서로 양보하고 서로 용서하라고 진심을 다하여 권면하고 또 설득한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너무나 강하여 두꺼운 벽을 향하여 설득하고 호소하는 격이 되므로 한계를 절감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수록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와 정체성>에 대해서도 충분한 공부와 이해를 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와 교회의 정체성>에 대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처음부터 충분히 공부를 해두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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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3
  • [교회법률상식] 비상 정회는 치리회 회장의 고유한 특권 (2)
    3. 비총대를 위원장 직무대행으로 선정함에 대하여 장로교회의 관례는 회원권 우선주의가 아니라 사건처결 우선주의가 총회 100년 역사의 관례이다(교회법률상식 pp.94-95 참조). 따라서 선거관리위원회의 결의로 선거관리위원회 서기를 위원장 직무대행으로 결의한 이상 서기가 비록 제101회 총회의 총대가 아닐지라도 사건처결 우선주의의 관례대로 제101회 총회 선거관리위원회의 위원장 직무대행을 수행하는 것은 정당한 법리이다. 이는 마치 제92회 총회 시에 GMS 이사장이 총회 총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총회 앞에서 GMS 이사회의 정례 보고를 했던 관례와 같은 사안이다. 굳이 이와 같은 관례를 예로 들지 아니할지라도 현재까지 제101회 총회의 총대로 천서 되지 아니했는데도 불구하고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으로서 서기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위원을 그 위원회의 연장선상의 위원장 직무대행을 수행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법리적 상식에 속한 사안이다. 위원회 서기가 그 위원회의 직무대행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법리가 아닌가? 4. 위원장의 직무 유기에 대하여 거두절미하고 선거관리위원회의 위원장은 누가 무어라 해도 엄연히 선거관리 규정에 선거관리 직무를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직무를 수행하지 아니한 것은 위원장으로서 직무를 유기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총회 선거관리위원회의 직무에 관한 선거 규정을 검토해 보면 ① 제16조(등록기간)에 “1. 총회 임원 : 매년 6월 1일부터 6월 10일까지 등록한다.”고 하였고 ② 제18조(입후보자 자격심사)에 “1. 각 선거의 입후보자는 등록 기간 마감일로부터 30일 이내 자격 심사를 완료하여 후보자를 확정한다.”고 하였다. ③ 이상 2개항의 규정을 종합하면 7월 10일까지는 임원 후보가 확정되어야 한다. ④ 그리고 제19조(후보자 홍보)에는 “자격심사 완료 후 최종 후보자가 확정되면 총회 개회 15일 전으로 후보자 신상 및 이력을 총회 기관지에 1회 공고하고 홍보유인물을 제작하여 전 총대들에게 배부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은 제101회 총회를 1주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아직도 선거관리규정 제16조, 제18조, 제19조의 에 위원회의 임무로 부여한 임원 후보자 결정조차도 못하였다고 하니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직무유기를 넘어서 무책임한 위원장으로 볼 수밖에 없다. 5. 결론 이상과 같이 선거관리 규정은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 수행해야 할 직무에 대하여 “매년 6월 1일부터 6월 10일까지 등록을 마감”하고, “등록 기간 마감일로부터 30일 이내 자격 심사를 완료하여 후보자를 확정해야한다.”고 법은 규정하였다. 즉 법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총회 개회 2개월 전인 7월 10일 까지는 임원 후보자에 대하여 자격 심사를 완료하여 확정하라는 직무를 부여하였다. 그런데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은 제101회 총회를 1주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마지막 위원회의 중대한 회의를 소집한 위원장으로서 회의 진행 중에 권원 없는 비상정회를 선언하고 퇴장을 하였다고 하니 제101회 총회의 암담함을 생각할 때 위원회가 위원장 해임을 결의하고 직무 대행자를 선정한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요 당연한 법리적 순리라고 아니할 수 없다. 부언컨대 설령 특별위원회의 위원장에게도 비상정회 선언권이 있다고 가정할 지라도 비상정회를 선언해야할 상황은 “회의 질서를 유지할 수 없는 경우”뿐이다. 그런데 본건의 위원장은 2중으로 모임 일자를 정해 놓고 회의를 진행하는 중에 다른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정회하겠다고 함에 대하여 위원들이 부위원장에게 사회권을 위임하고 다녀오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무기한 비상정회를 선언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항간에 제101회 비총대는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직무대행을 수행할 수 없다고 하는 언론 보도가 있다고 하는데 현재 선거관리위원회 서기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자를 그 위원회의 연장선상에서 위원장 직무대행을 할 수 없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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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3
  • [성공칼럼] 하늘나라 음식
    성경은 ‘천국에서는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자기를 높인다는 말은 무엇인가를 했을 때 ‘내가 다 했다, 나에게 더 많은 대가를 줘야한다, 내가 더 높은 자리에 가야한다, 나를 우러러 봐야 한다.’ 등등의 자기가 한 일을 근거로 자신의 몫을 요구하고 자기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자기를 낮춘다는 말은 무엇인가를 했을 때 ‘여러분이 계셨기 때문에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해낸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계속해서 이런 일을 할 수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더 잘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등등의 자기가 한 일을 근거로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천국에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라는 말은 천국에서는 가장 최고의 힘과 지혜를 갖고 있는 존재도 사람들에게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들에 비해 더 낮은 종들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존재는 주님의 사랑에 복종하면서 가장 깊은 겸비함을 갖추고 주님사랑을 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교회나 사회에서 봉사와 선행을 해서 천국의 높은 자리에 가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를 높이는 것이므로 천국에서는 낮은 자가 된다는 말이다. 사랑과 선을 행할 때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사랑과 선을 행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질 때만 천국에서 높은 자가 된다는 말이다. 천국에서 높은 자가 된다는 말은 세상에서처럼 높은 지위와 돈과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주님의 사랑 속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주님사랑 속에 들어갈수록 상상할 수 없는 밝고 따뜻하고 환희와 기쁨과 자유가 일어나고 주님사랑에서 멀어질수록 어둡고 차갑고 사랑도 기쁨도 자유도 없는 곳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주님사랑이면 ‘천국에서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은 자가 된다.’는 말은 이 땅에서도 적용되는 말씀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음식을 만드는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음식을 잘하면 잘할수록 음식을 먹는 사람의 종이며 섬기는 자가 된다. 음식을 하는 사람이 어찌 종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도 잘하는데 말이다. 음식을 잘하면 잘할수록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은 기뻐하고 행복해하고 건강해진다. 음식 하는 사람이 이 모습을 보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음식 만드는 사람이 주님사랑에 들어가는 것이다. 설교자나 의사나 법률가나 정치가나 사업가나 부모나 부부나 상담자 등등 모두가 내용은 다르지만 사람들에게 좋은 음식을 해주는 사람들이다. 자신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하우를 찾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최고의 자유와 기쁨을 주어야 한다. 이렇게 자신을 낮추고 종이 되어서 사랑을 베푸는 이 기쁨은 그 어떤 지위나 대가보다 큰 최고의 선물이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기쁨을 알고 추구하는 것이 ‘천국에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라는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몸이나 영이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음식이 필요하다. 몸을 위한 음식은 땅과 바다에서 나지만 영의 양식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이다. 영의 건강한 음식은 자기를 낮추면서 자기 일을 할 때 밝고 진실한 태도로 상대방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음식점을 운영하는 사람이 손님을 위한 요리를 만든다 하자. 그런데 그 음식을 분노와 미움 속에서 만들거나 원가를 낮추려고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되는 재료를 넣었다면 겉으로는 돈을 벌어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거짓과 악함을 드러내는 태도를 갖고 있어서 더러운 음식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방은 낮추고 자기를 높이는 것이 되어 천국과는 반대의 삶을 사는 것이다. 사랑은 종이 되어 상대방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역할을 하든지 자기를 낮추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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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3
  • [은혜의 말씀] 온전한 사람 갈렙 (수 14장 13~15절)
    애굽에 정착한지 400여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애굽에 살면서 그들의 문화를 보고 배우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늘어나는 이스라엘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애굽의 바로는 힘든 노역을 시켰고 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을 호소하며 기도하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그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킵니다.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은 배고픔과 갈증 그리고 더위와 추위와 싸우는 고된 행진을 계속하였고 백성들은 점점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드디어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게 되었고 모세는 각 지파별로 대표 12명을 뽑아 그 땅을 정탐하러 보내게 됩니다. 12명의 눈앞에 펼쳐진 가나안 땅은 실로 젖과 꿀이 흐르는 살기 좋은 곳이지만 성읍은 심히 크고 견고하며 그 땅 주민은 강한 아낙 자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40일의 정탐을 마친 12명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은 본 것을 사실대로 보고하였고, 갔다가는 모두 죽을 것이라며 악평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달랐습니다. 그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며 그 주민은 비록 강하지만 우리가 능히 싸워서 이길 수 있으니 어서 올라가 그 땅을 취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큰 상처를 받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이란 긴 시간을 광야에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오직 광야 길에서 태어난 이들과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대로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갔고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정복해 나가던 중 헤브론을 앞두고 유다자손과 갈렙이 여호수아를 찾아왔습니다. 갈렙은 지난 가나안 정탐 보고 때를 떠올리며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나를 생존하게 해 주셔서 85세가 되었습니다. 아직 강건하여 싸움에도 나갈 수 있습니다. 지난 날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가나안에 들어가 밟는 땅을 나와 나의 자손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헤브론 산지를 저에게 주십시오. 아무리 아낙 자손이 강하고 성읍이 크고 견고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그 곳을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갈렙과 유다자손은 헤브론과 싸워 이겼고 살기 좋은 땅 헤브론은 갈렙과 유다족속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 땅에는 전쟁이 종식 되었습니다. 갈렙은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기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기에 그 어떤 두려움도 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갈렙의 마음속엔 열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어 이룩하실 역사적인 일로 그의 마음은 뜨거웠습니다. 갈렙에게 85세라는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 했습니다. 갈렙의 영향력은 그의 가족에게도 미쳐 그의 조카 옷니엘은 기럇세벨을 쳐서 차지하였고 갈렙의 딸과 결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는다 하면서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다 아시고 우리의 무심코 내 뱉는 말조차 다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바라보고 기억하여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성실한 마음으로 온전히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을 누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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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3
  • [성경인물탐구] 세속적 영광에의 열망이 있는 야고보 (6)
    주님 앞에 나아온 야고보와 요한은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막 10:35)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품고 있었던 소원을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그것은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막 10:37)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다분히 세속적인 욕망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나아와서 세속적 영광의 소원을 아뢴 것은 먼저 그들이 주의 뜻을 모르는 데서 나왔습니다.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만 분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참예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주의 뜻에 무지하면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세상의 학문이 많았던 바울도 주님을 알지 못하였을 때에는 주의 뜻을 분변치 못하다가 성령의 충만을 받고 난 후에 비로소 올바른 삶을 살았습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사람은 누구나 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신앙과 관련된 것이어야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가졌던 세속적인 영광은 그들의 욕심의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부유한 생활환경에 안주하지 않고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는 사촌으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들 역시 주님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이 주의 나라가 임할 때 영광의 자리를 요구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요구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원은 욕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적이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이 세계에서는 섬김을 받는 자가 큰 자이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법칙을 야고보와 요한은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세속적 영광에의 열망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과 봉사의 정신을 귀하게 여깁니다. 우주의 질서와 조화는 섬김의 질서요 섬김의 조화입니다. 만물이 서로 섬김으로 유지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섬김의 모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야고보의 인간적인 참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보다 더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야고보는 예수님을 진정 하나님이심을 알고 나서부터는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역사를 이루어감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온전히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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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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