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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비비불불 용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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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면서 우리의 언행심사가 바뀐다.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야할까? 비비불불 하지말고 용감사 해야 된다. 이 말은 박한기장군의 부대에서 처음 보았다. 원래는 비비불불 하지말고 용감미인대칭하라는 부대의 구호였다.
비교하지 말라.
인간사의 모든 불행은 남들과 비교하는데서 불행이 시작된다. 사탄은 보암직, 먹음직, 탐스러운 것으로 비교하면서 열등감, 수치감, 패배감을 준다. 우월감이나 교만한 마음도 똑같다.
주께서는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신다. 사랑은 조건반응이 아니고 무조건적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남을 부러워하지 말고 나를 부끄러워 하지마라. 나를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면서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빠지기 쉽다. 이 세상에 부러워할만한 온전한 존재는 없다. 100점짜리 인생이 없듯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제조, 제작, 제품을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스페셜한 VIP이고, 사랑받는 존귀한 존재이다. 누구도 비교선상에 두지 말고 주님 앞에서 내 길을 걸어가라. 다른 사람 어찌든지 나 주의 군사 되리라!
비판하지 말라.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마라. 비판, 심판은 하나님만 하신다.
오늘 한국교회의 큰 병은 너무 쉽게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판단이 앞서면 상대를 깔보고 무시하게 된다. 남들을 판단하는 것을 멈출 때 사랑이 시작된다. 남을 가르치거나 고치려고 덤비지 마라. 누구든지 문제가 있지만, 문제가 있으니까 기도하고, 힘드니까 교회 다니고, 그러면서 변화되고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판단하는 난도질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불평하지 말라.
매사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남을 탓하고, 핑계를 대고, 이유를 찾는 사람은 답이 없다. 밖에서 답을 찾지 말고 문제 안에서 답을 찾으라.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을 탓하지 말고, 문제의 현장에서 내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동서남북 앞뒤좌우가 꽉 막혀도 기도하면 하늘 문이 열리고 위로부터 역사가 시작된다. 사람 앞에서 불평을 하면 감정이 전이되고 증폭되면서 문제가 더 심각해질 뿐이니 불평은 입에 담지도 마라.
불만하지 말라.
다윗은 내게 부족함이 없고 내 잔이 넘친다고 하였다. 이런 시를 적었을 때가, 10년을 떠돌아다니고 노숙하고 동굴에 기어들어가고 사선을 넘나들며 제일 힘들었을 때이다. 제일 고달플 때에 주님이 나의 목자요, 요새요, 산성이시며 피난처로 삼았기 때문에 가능한 고백이었다. 사도 바울도 그러했다. 바울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내 은혜가 족하다고 고백하였다.
한날의 괴로움도 족한 줄로 알라. 포기의 축복이 있고, 내가 주인 삼은 것을 내려놓을 때 자유가 온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용서하라.
시기하고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먼저 용서하는 자가 어른이다.
가슴 속에 응어리를 남겨두지 마라. 누군가를 미워하면 마음에 쓴 뿌리가 생기고, 스트레스가 되고, 불면의 원인이 되고, 병이 된다. 요셉은 하나님의 큰 구원계획을 기대하면서 자기를 괴롭힌 형들 때문에 분노하지 않고 마음으로 용서하였기에 병들지 않고 용모가 아름답고 준수하여 예수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 되었다. 분노의 잔을 채우지 말라.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다.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신 것처럼 나도 긍휼사역을 하는 것이 사함 받은 사람의 모습이다.
감사하라.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을 하고 있다. 최고의 감정은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가 최고의 항암제이고 해독제이며 방부제다. 내 마음에 감사가 없다면 확실히 병든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쓴 게 약이 되니까, 신 게 몸에 좋으니까. 배은망덕 하는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마라. 하나님 한 분만이 내 힘이 되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영적인 건강의 바로미터가 바로 감사와 기쁨이 있느냐 이다.
절대 감사! 평생 감사! 다만 감사!
사랑하라.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다. 말없이 사랑하는 것을 배워라. 티내지 말고 생색내지 말고 자기 의를 내세우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사랑하라. 엄마가 자식을 사랑할 때가 그러하다. 사랑하는 만큼 희생한다. 사랑이 묘약이다.
비비불불 용감사, 이 모든 것이 내 의지와 능력으로 되지 않고 오직 성령 충만할 때 가능하다. 주님 앞에 울고 기도할 때, 회개하면 회복이 되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성령의 열매가 나타난다. 그러니 성령을 훼방하지 말고,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라. 그리하여 언행심사에 변화가 와서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난 뒤에 살인자, 도피자였던 모세가 지면의 누구보다도 더 온유한 자가 되었듯이 우리도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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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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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부산 지방에서의 초기 교회와 수세자, 직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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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과 경남지방에 기독교가 전파되고 교회가 설립된 것은 1890년대 초였다. 1891-1892년 어간에 부산진교회와 초량교회가 설립되고, 1896년에는 영선정교회(지금의 제일영도교회)가 1905년에는 자갈치교회(현 항서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4 교회를 사초(四初)교회라고 불렀다. 동래부에 속한 동래읍교회(지금의 수안교회), 기장읍교회도 1905년에 설립되었다. 이어 부산진교회로부터 분립된 두 교회, 곧 대연교회(1907)와 초읍교회(1909)가 설립된다. 1910년에는 감만동 상애원 내에 상애원교회가, 1911년에는 하단교회가, 1919년에는 수영교회가, 1932년에는 부산진교회로 분립된 부전교회가 설립된다.
부산지방 첫 수세자는 1894년 4월 22일 북장로교 선교부의 윌리엄 베어드로부터 세례를 받은 심상현 김기주 이도념이었다. 이들 3 사람은 호주 선교사들의 고용인이었고, 부산진교회 첫 세례교인이 된다. 그로부터 약 두 달이 지난 7월 15일에는 서두엽과 곽수은이 역시 베어드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이들이 초량교회 첫 세례신자가 된다. 서두엽과 곽수은은 베어드 선교사의 고용인이었다. 그로부터 1년 6개월가량 지난 후인 1895년 11월 3일에는 부산지방에서 3번째 세례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날 남자 10명, 여자 11명, 유아 1명 등 22명이 세례를 받았다. 집례 목사는 호주 선교사였던 앤드류 아담슨이었다. 부산지방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세례받은 세례식은 호주 선교사 왕길지가 내한 한 이후 첫 세례식이었던 1901년 2월 3일의 일이었다. 이날 성인 41명, 어린아이 27명, 곧 68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날 7명의 가정과 6명의 가족 등 두 가정 전원이 세례를 받았는데 이런 일은 한국교회에서 흔치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부산지방에서 첫 장로, 첫 목사는 누구였을까? 부산지방 첫 한국인 장로는 1904년 5월 27일 장립을 받은 심취명(沈就明, 1875-1958)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 29세였다. 부산지방 첫 수세자였던 심상현의 동생으로 부산진교회 첫 신자였고, 부산지방 첫 수세자 가족으로 두 번 째 수세자(1895. 11. 3)가 되었다. 또 그는 부산지방 첫 기독교식으로 1896년 6월 10일 오후 3시 부산진의 호주선교사관에서 아담슨(Rev. Andrew Adamson)의 주례로 김봉숙(金鳳叔)결혼 예식을 드렸던 인물이었다. 그는 부산진교회 첫 장로이자 한강 이남의 최초의 장로였다. 또 1912년에는 부산경남 지방 최초의 한국인 목사가 된다. 심취명은 1875년 12월 5일 심인택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본명은 심상호(沈相鎬)였으나 기독교 신자가 되면서 취명으로 개명했다. 전통적인 양반가문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유가적(儒家的)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가 초기 부산지방 기독교계와 한국교회의 목회자가 된 것은 그의 형 심상현(沈相炫)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로서 부산진교회는 부산지방 최초로 당회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때는 한국장로교회가 독로회도 구성하기 전이었다. 이 당시 장로로는 장연군 송천의 서경조, 용강의 방기창, 증산찬천의 송인서, 평양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장천의 한석진 등 이북지방에 10여명의 장로들이 있을 때였다. 장로로 봉사하던 그는 왕길지 선교사의 추천을 받고 목회자가 되기 위해 평양신학교에 수학하고 1910년 6월 제3회로 졸업하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김익두, 김종섭, 박정찬, 채정민, 한득룡 등이 그의 동기생들이었다.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울산병영교회 시무장로로 봉사하다가 1912년 7월 2일 밀양읍교회에서 개최된 제3회 경상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음으로서 그는 부산, 경남지방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그를 이은 두 번째 목사가 1915년 7월 안수를 받은 정덕생(鄭德生) 목사였고, 세 번째 목사는 1919년 1월 안수를 받은 박성애(朴晟愛) 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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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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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칼럼] 엘리멘트 시티를 이룰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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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영화 ‘엘리멘탈’을 아는가. 어린아이뿐 아니라 장년에게도 인기를 얻으며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불과 물, 공기, 흙 등 4원소가 사는 엘리멘트 시티에서 불인 ‘앰버’와 물인 ‘웨이드’가 만나 특별한 사랑을 이뤄가는 과정을 담았다. 생각해 보라. 물과 불이 어떻게 사랑을 이룰 수 있겠는가. 물과 불은 상극이다. 불은 물을 끓게 하고 또 아무리 타오르는 불도 물을 부으면 사그라들게 돼 있다. 물과 불은 절대로 하나가 되려야 될 수가 없다. 절대로 사랑할 수 없다.
그런데 영화에서 앰버는 우연히 웨이드를 만난다. 그들은 결코 만나서도 안 되고 하나가 될 수도 없는 존재다. 하지만 웨이드는 앰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꿈을 응원한다. 그러면서 상극인 두 존재가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리고 둘은 “우리가 하나 될 수 없는 이유는 백만 가지지만 나는 널 사랑해”라고 말하며 서로의 손을 붙잡는다.
마침내 불과 물이 만날 때 무지개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불의 세계 언어인 ‘디쇽’을 외친다. “영원한 불꽃은 없으니 빛날 때 만끽하라”.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앰버와 웨이드는 사랑을 이루며 새로운 꿈을 향해 떠난다. 엘리멘트 시티는 서로 다른 4원소를 의인화해 다르다는 이유로 다투고 싸우고 분쟁하는 우리 세대를 향해 경종을 울린다.
나도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어떻게 이런 상상력을 발휘해 영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 어떻게 불과 물이 만나 무지갯빛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감탄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런 생각을 해 봤다. “한국교회도 엘리멘트 시티를 이룰 수는 없을까” 하고 말이다.
원래 나 또한 교회 성장 지상주의에 빠져 있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 눈이 뜨였다. 어느 한 교회가 대형화된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영국과 미국 교회를 보라. 대형교회가 많았지만 반기독교 악법을 막지 못하지 않았나. 그건 서로 하나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물과 불처럼 상극을 이뤘기 때문이다. 서로 크기를 자랑하는 순간 반기독교 악법이 통과된 것이다.
여기에 눈을 뜬 나는 줄기차게 한국교회 연합을 강조하고 있다.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기적과 같은 부흥을 이루며 위상을 떨치던 한국교회가 언제부터 정체되고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는가. 교계가 다투고 분열하면서부터 쇠퇴기를 걷게 된 것이다. 마치 불과 물은 결코 하나 될 수 없다며 반대를 위한 반대, 분열을 위한 분열만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더 늦기 전에 더 멀어지기 전에 지금이라도 한국교회는 반드시 하나가 돼야 한다. 유독 한국교회를 향해서만 밀려오는 반기독교 사상과 문화, 정서의 쓰나미를 막기 위해서라도 연합해야 한다. 이유를 불문하고 엘리멘트 시티를 이뤄야 한다. 아무리 선각자가 외쳐도 시대가 선각자의 말을 수용할 수 있는 토대가 이뤄지지 않으면 큰 역사를 이룰 수 없다. 그렇듯이 아무리 연합을 외쳐도 한국교회가 각성하지 못하면 공허한 메아리가 돼 사라질 뿐이다.
지난 주일(13일)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광복 78주년 기념 및 한기총·한교총 통합 결의 기념예배’를 드렸다. 나는 그곳에서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유는 100만 가지가 넘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가 돼야 한다”고 외쳤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린 ‘한국교회총연합 광복 78주년 한국교회 기념예배’에서도 “일제강점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나라를 해방하기 위해 다른 종교 지도자와도 손을 잡았는데 한국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우리끼리 어찌 하나 될 수 없는가”라고 외쳤다.
물론 연합만이 능사는 아니다. 연합한 이후 한국교회가 새로운 각성과 부흥·영성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우리 중 불 같은 사람도 있고 물 같은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될 때 무지갯빛 세계를 이룰 수 있다. 우리 모두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랑을 하자. 영화 속 대사인 ‘디쇽’처럼 빛날 때 하나를 이뤄야 한다. 이를 통해 무지갯빛 찬란한 엘리멘트 시티를 이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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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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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편하게 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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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제가 속한 교단의 갈등이 깊어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교회들이 화합하고 평안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기 위하여, 사회가 존경할만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 교회의 정치적 합의와 결정이 성경의 정신에 따를 수 있게 되도록 늘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이들의 이해타산에 따라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갈등을 막기 위해 몇몇 교회가 나름대로 합리적이라 여겨지는 의견을 제안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어떤 분이 반박문을 내셨는데, 거기 <지금까지 편하게 목회한 이들이 갑자기 나섰다>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의견은 지금까지 편하게 살고, 편하게 목회한 사람들이 갑자기 나서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의견의 옮고 그름을 말씀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이 글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나서서>란 부분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나선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는 드렸고, 성실히 회원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니 갑자기 나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편하게 목회한 이들>이란 말은 반박할 수 없고, 반박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맞기 때문입니다. 함께 의견을 제시한 분들은 규모가 있는 교회의 목사님들이었습니다. 신학생이 된 이후 신학대학원을 무사히 마쳤고, 부수적인 학업을 이어갈 기회도 있었고, 늦지 않게 결혼하여 가정도 꾸렸습니다. 교육전도사 시절 이후 지금까지 목회지가 없어서 쉰 적도 없고, 목회 과정에서 파국을 경험한 적도 없었습니다. 평탄하게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안정된 교회에서 목회하기 때문에 헐벗고 굶주린 적도 없었습니다. 성도들의 감당하기 어려운 사랑을 받으면서 배부르게 지난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분의 <편하게 목회한 이들>이란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놀고먹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분주하게 살았습니다. 집에 돌아와 앉기가 무섭게 책상에 앉아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교회를 떠나 있지 않은 모든 날에 새벽기도회를 직접 인도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휴가를 가 본 적도 없고, 가족과 해외여행을 위해 비행기를 탄 적도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런저런 일을 위해 온 주머니를 털어 건축헌금을 비롯한 다양한 특별헌금을 했습니다. 지금도 새벽 서너 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매 주일에 다섯 번 설교하고, 평일에도 많이 설교합니다. 어려운 교회들이 요청하는 집회도 시간만 되면 거절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쉴 틈이 없이 분주하게 충성한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변명해도 저는 편하게 사는 사람일 뿐입니다.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힌 적도 없고, 욕을 먹은 적도 없습니다. 굶은 적도 없고, 당장 예배당 임대료를 내지 못해 길거리로 나앉은 적도 없습니다. 어려운 선교지에서 최선을 다하시는 선교사님이나 농어촌의 힘든 사역지를 온몸으로 지켜내는 분들에 비하면 호사를 누립니다.
그래서 이번 일로 인해 다시 한 번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편하게 사는 사람으로 여겨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을 마음에 담고 더 치열하고 열심히 살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편할 수 있어도 조금 덜 편하게 사는 법을 터득하려고 생각합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리는 젊었을 때 60불로 한 달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후에 경제적으로 많은 여유가 생긴 후에도 여전히 60불로 살았다고 합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웨슬리는 편하게 사는 목사의 굴레를 벗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 모두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일에 최선을 다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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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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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우아한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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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은 『완득이』의 작가로 유명한 김려령이 2009년 쓴 소설이면서 2014년 동명으로 상영된 영화 제목이기도 합니다. 거짓말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새빨간 거짓말’이나 ‘선의의 거짓말’같이 조금은 익숙해진 말과 달리 “우아한 거짓말”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소설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 여기서 “천지”는 한 소녀의 이름입니다. 그녀는 평범한 가정의 둘째로 학교에서 소위 ‘왕따’를 당하다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도 홀로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엄마에게도 무심하기만 한 언니 만지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속내 한번 털어놓지 못하고 끝없이 ‘난 외롭지 않아, 난 슬프지 않아’ 자신에게 되뇌던 그 말을 작가는 “우아한 거짓말”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발표된 지 꽤 지난 이 작품을 다시 꺼내든 이유는 최근 서이초등학교를 비롯한 몇몇 젊은 교사들의 비극적인 사건들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요즘에는 교사도 학교를 떠난다. 죽지 않으려면 교단을 떠나야 한다는 말이 농담 같지 않은 시대다.”(방구석도서관) 하지만 죽을 만큼 힘이 들면서도 스스로를 우아한 거짓말로 위로하며 지옥처럼 고단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어찌 그들뿐이겠습니까?
작품 속에는 화연이란 소녀가 등장합니다. 이 아이는 천지의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러나 실제로 화연은 본인을 친구라 믿고 있던 천지를 조정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이 아닌 말을 하며 천지와 친구 사이를 이간질하고, 자기 외에는 친구가 존재하지 않도록 천지 주변을 정리하고, 본인이 원하는 것을 천지를 통해 얻고 아예 천지를 소유하고자 합니다. 천성이 악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천지가 죽고 난 후 화연은 자기가 따돌림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천지처럼 힘들어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화연은 어릴 적 아픈 경험(학대)으로 인한 우울증과 외로움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천지에게 그랬을까요? 그렇다면 이런 경우도 “우아한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최근 일본의 오염물질 해상투기로 나라가 무척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오염수’가 아니라 ‘오염처리수’라고 부르자는 주장을 제기합니다. 국민들을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 선동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취지라고 합니다만, 일본의 그릇된 행태에 반대하지 못한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려는 의도는 없을까요? 더군다나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와 안전이 달려있으니 결코 우아한 거짓말이라고도 할 수가 없겠습니다.
또 다른 등장인물들도 있습니다. 천지의 사정을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알려 하지 않았고 무심하게 지나쳤으며 의도적으로 회피했던 이들입니다. 천지의 언니 만지와 엄마 그리고 미라라는 아이가 그러합니다. 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진실을 외면하고 혹은 방관하며 ‘넌 최고야’ 혹은 ‘너희가 내겐 신(神)이야’와 같은 역시 일종의 우아한 거짓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식의 언사는 당사자는 물론 실체적 진실의 규명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독립운동가 논쟁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학교 다니면서 고군분투하셨던 독립군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들이 대한민국 군대의 얼굴로 세우기에는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교묘한 논리로 뒤엎으려 하는 가운데 온갖 말들이 난무합니다. 누군가 니체에게 거짓말을 하자 그는 이렇게 말하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내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지금 자네의 거짓말 때문이 아니라네. 이제부터 자네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야.” 그렇습니다. 신뢰를 파괴하고 진리의 근간을 흔들기 마련인 거짓말은 그 어떤 것이든 우아하게 또는 아름답게 포장될 수 없습니다.(매일경제, 성동찬)
천지는 자기 손으로 소중하게 짠 붉은색 털실로 감싼 다섯 개의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언니에게, 엄마에게, 화연에게, 미라에게,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남긴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였습니다. 유일하게 우아한 거짓말을 남기지 않은 사람, 마지막 메시지는 그런 자신에게 남긴 정직한 목소리였지요. “마지막 남은 두툼한 털실 뭉치는, 나에게 주었습니다. 내가 나를 용서하지 않고 가면, 내가 너무 가엾습니다. 그리고 시립도서관 2층 아무도 손대지 않는 책 사이에 끼워놓았습니다. 같이 있어 외로운 것보다 차라리 혼자 있어 외로운 것이 나았던 그런 곳입니다.” 지금 우리도 이런저런 합리화로 치장된 우아한 거짓말을 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리를 직시하고 말하는 용기를 가지고 용서하며 화해하며 차라리 투박한 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진리다’(요 14:6)라고 외치셨던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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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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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하나님의 계명, 사람의 전통(막 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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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전통’에 빠져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다고 비난합니다. 유대교에서는 떡을 뗄 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리는데, 그때는 반드시 먼저 손을 씻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그 정신은 희미해지고, 손을 씻는 형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형식을 어떻게 지키느냐에 굉장히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전통이 말씀의 본질을 대신할 위험이 있습니다. 전통이 진리로 둔갑해 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참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있는 전통주의는 없습니까? ‘우리는 옛날에는 다 이렇게 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어떤 삶을 사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지금 나의 모습이 성경이 아니라 전통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면, 어떻게 하든지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1. 내 신앙이 성경적인가 전통적인가 분명히 해야 합니다.(10-13절)
예수님께서 ‘고르반’이라는 제도를 예로 들고 계십니다. ‘고르반’이란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께 연보를 드리는 바람에 부모를 봉양할 돈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부모를 잘 모시지 못해도 양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서, 그 고르반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부모를 봉양하기 싫으니까 고르반을 핑계 삼아, 나는 하나님께 연보를 드렸기 때문에 부모를 모시지 않아도 된다고 강변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한 마음으로 고르반이라는 것을 교묘하게 포장하는 그들의 위선을 엄중하게 책망하십니다. 우리가 전통에 집착하다 보면, 성경의 본 의미를 소홀히 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전통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통을 강조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전통이 성경보다 더 강조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순간 이것이 “우리 교회 전통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는가?” 입니다.
2. 우리의 내면을 점검해야 합니다.(21-23절)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것은 언제나 내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음을 다루기보다 외적인 활동에 더 치우쳐 있습니다.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죄를 그대로 둔 채 다른 것에 몰두합니다. 그게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마음의 창고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계십니다. 무엇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겉모양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너무 의식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보다 그 일을 하고 있을 때마다 내면의 동기를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에 서야 합니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경험이 날마다 일어날 때, 사람들로부터 칭송받고자 하는 욕망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할 신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통해 여러분의 인생이 변하고, 구원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생이 바뀌는 놀라운 체험을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이 날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자유와 능력으로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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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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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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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인정하듯 너무도 복잡하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사회 전반이 다 힘들어 하는 것 같다. 크리스천들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것 같다. 무슨 대단한 역할이 아니라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라는 주의 뜻을 실천하는 그것이다. 그러나 이조차 연약한 우리가 쉬이 감당할 수 없다면 약한 나로 강하게 하시는 주께 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이 땅위에서의 본분을 다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살다 보면 알게 돼 일러주지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
살다 보면 알게 돼 알면 웃음이 나지 우리 모두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지
잠시 왔다 가는 인생 잠시 머물다 갈 세상 백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살다 보면 알게 돼 버린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살다 보면 알게 돼 알면 이미 늦어도 너나 나나 모두 다 미련하다는 것을
살다 보면 알게 돼 알면 이미 늦어도 그런대로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잠시 스쳐가는 청춘 훌쩍 가버린 세월 백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살다 보면 알게 돼 비운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
모두 꿈이었다는 것을
철들면 죽는다는 속된 말이 있다. 바꿔 말하면 죽기 전에는 철이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네 인간들은 주를 인하여 구원받아 성도가 되고 성화의 길을 걸어간다. 짧은 시간에 성화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가면 좋겠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안타깝지만 사실이고 현실인 것이 분명하다. 위의 시는 한국의 유명 대중가수가 부른 노랫말이다.
인생 후반기를 살아가면서 뒤를 돌아보니 잠언서를 비롯한 많은 성경구절들이 저 노랫말과 오버랩 되면서 너무 마음에 와 닿았다. 마지막 가사 꿈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세상적인 욕망과 욕심 그리고 그렇게 놓지 못하고 붙잡으려 몸부림쳤던 그 모든 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들이었음을 설명하는 것 같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 땅을 떠나는 많은 세상 사람들의 한결같은 모습은 미련과 회한, 부질없음과 허무함에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며 인생의 덧없음을 온 몸으로 고백하며 생을 마감한다. 그렇지만 우리네 성도들의 결국과는 많이 다르다.
주를 시인하고 믿는 자들의 꿈은 이제껏 놓지 못했던 세상의 모든 것들을 겸손히 주 앞에 내려놓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찬송하며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기에 그렇다. 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축복인가? 우리 입술에 노래가 계속되어야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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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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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고장 난 나침반은 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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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책상 정리를 하다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던 나침반을 발견했습니다. 요즘에는 핸드폰으로 길도 찾고, 방향을 알려주는 앱도 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먼 길 여행을 떠날 때, 등산을 할 때에는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필수였습니다. 예전에는 즐겨 썼는데 어느 순간부터 쓸 일이 없어진 나침반을 발견하곤 반가운 마음에 이리저리 방향을 맞춰보니 고장이 났는지 바늘 끝이 떨지 않고 멈춰 있었습니다.
나침반은 바늘 끝을 떨고 있음으로 나침반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고장이 난 나침반은 더 이상 떨림이 없습니다. 오랫동안 서랍 속에 묵혀 두어 고장이 난 나침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목회도, 내 사명도 어쩌면 나침반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되는 떨림으로 나침반이 만들어진 목적, 즉 방향을 맞추는 것에 최선을 다하듯 나 또한 끊임없는 고민과 갈등으로 목회와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너무 많은 고민과 갈등들이 목회를 더 힘들게 하는 게 아닌가라는 우려도 하지만 고장 난 나침반을 보며 나의 갈등과 고민이 바로 살아있는 증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오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의 존시는 재능 있는 화가이지만 폐렴에 걸려 삶의 의욕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빈 벽을 보며 창밖 벽에 붙어 있는 담쟁이덩굴의 잎을 세고 있습니다.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폭풍이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존시는 폭풍과 함께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자신도 죽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더 우울함 속에 갈등을 겪습니다. 마음 속 저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살 수 없다는 현실 앞에 폭풍의 밤을 보낸 후, 다음날 떨어지지 않은 잎새를 보며(물론 어느 화가의 그림이지만...) 삶의 의지를 되찾습니다.
마지막 잎새의 존시처럼 때로는 내 안에 갈등을 통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기도 합니다.
“과연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은 무엇일까?”
“어느 경계까지가 주님이 하시는 일이고, 또 어느 경계까지가 내가 하는 일일까?”
나는 오늘도 갈등 속에 떨고 있습니다.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는데, 신앙의 회복은 무엇이고, 또 참된 치유는 무엇일까?”
“목회자로서 내가 추구하는 것은 주님의 뜻과 합한 것일까?”
나는 오늘도 흔들리며 떨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도 나와 비슷한 갈등을 겪은 인물이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구약의 광야길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남들은 모두 이 방향이라고 하는데, 둘만 저 방향이라고 하니 얼마나 많은 갈등과 떨림이 있었을까요?
신약의 바울을 보니 선교여행을 떠나며 동역자들과의 갈등, 복음을 전할 때 그 지역 사람들과의 갈등들을 통해 수많은 떨림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바울은 갈등이 있었기에 자신들의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고, 떨림이 있었기에 늘 분별하는 자세로 사명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의 삶도 저와 혹은 성경의 인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매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으로 살아가려고 애쓰지만 갈등과 떨림이 늘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녀를 양육할 때 무한한 사랑으로 수용해야 할 범위와 훈계와 절제를 가르치는 경계의 갈등, 공동체가 나의 사적인 영역까지 침범할 때,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삶의 터전인 직장과 교회 사이에서의 시간 분배 갈등 등 나침반이 떨리듯 우리는 수많은 떨림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이런 갈등들이 있지는 않나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명을 감당한다고 목소리는 높이지만, 교회의 양적 부흥을 갈망하는 마음과 질적 성숙을 추구하는 두 마음의 갈등, 인정받고 유명해지고 싶은 솔직한 내면의 갈망과 오늘의 삶에 만족하며 자족할 줄 아는 갈망의 갈등, 목회자로서 목회에 전념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 이중직을 해야 하는 상황의 갈등 등 목회자로서의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고장 난 나침반은 떨지 않듯, 우리가 지금 수많은 고민과 갈등 속에 영혼이 떨고 있다면, 이는 분명 내 삶이 고장 나지 않았다는 증거요, 살아 숨 쉬며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확신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처럼 갈등 속에 떨고 있나요? 아니면 고장 난 나침반처럼 멈추어져 있나요?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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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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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기도로 출범한 구미위원부와 이대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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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10일 선거를 통해 198명의 제헌국회의원을 선출하고, 5월 31일 오전 10시 구 중앙청 회의실에서 대한민국 국회를 개원했을 때 임시의장이었던 이승만은 서울 종로 갑구에서 당선된 이윤명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로 시작되는 이 기도문은 대한민국 공문서 1호라고 할 수 있는 국회속기록 제일 앞 부부분에 기제 되어 있다. 공식 순서에도 없는 기도를 부탁한 것은 “종교사상이 무엇이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승만의 신앙적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정사(政事)에 앞선 이승만의 기도요청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 최근 김정민 박사에 의해 공개되었다. 연세대학교에서 이승만 연구로 박사학위를 수득한 김정민 박사는 「월드뷰」 2023년 4월호에 기고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외교의 시작은 기도였다”라는 글에서 1919년 8월 2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를 전담했던 구미위원부 출범식에서도 이승만은 이대위 목사에게 기도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대위 박사께서 목사로서 기도로 구미위원부 창립식을 열어주시겠습니다.” 이 요청에 따라 이대위 목사는 회의에 앞서 1,854자에 이르는 긴 기도로 회의를 시작했다고 한다. 영문으로 기록된 이 기도문 전문이 김정민 박사에 의해 번역되어 위의 잡지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3.1운동 이후 독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국내외에서 명칭을 달리하는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는데, 1919년 9월 11일에는 국내외 7개의 임시정부들이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되었다.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고, 이후 김구, 이승만, 박은식 등이 임정의 수반을 거쳤다. 그런데 통합된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기 약 2주일 전인 1919년 8월 25일 이승만은 한성정부(漢城政府) 집정관 총재 자격으로 구미위원부(Korean Commission)를 설치했다. 민족의 대표성을 지닌 외교기관의 출범이 시급하다고 본 것이다. 위원장은 김규식이었고 위원은 송헌주와 이대위였다. 그런데 이 구미위원부가 공식 출범하게 된 8월 27일 공식적인 회의에 앞서 이승만은 이대위 목사에게 시작하는 기도를 요청한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이승만에게는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라는 확신과 기독교 이념에 기초한 건국 이상을 지닌 분임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 기도했던 이대위(李大爲, David Lee, 1878-1928) 목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김정민 박사에 의하면 이대위는 1878년 평안북도 강서에서 출생하였으니 이승만 보다 3살 아래였다.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드리고 유학차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때는 1903년이었다. 이때부터 동포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단합을 모색했고, 1905년 4월에는 민족운동 기관인 공립협회 설립을 주도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학업에 정진하여 1908년 포틀랜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6월 22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고, 그해 가을 UC 버클리대학교 역사학과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이대위는 <공립신보>, <대도>, <신한민보> 등에 글을 발표하는 한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2월에는 국민회의 설립에 관여하였고, 1910년 1월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부회장으로 국민회의의 기초를 닦았다. 그해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자 애국동맹단을 조직하여 저항하였다. 그런데 그가 신학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인 1911년 2월 32살의 나이로 상황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윤병구 전도사의 후임이었다. 이때부터 50세가 되는 1928년 6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17년 간 이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런데 1912년에는 집사목사(deacon) 안수를 받았고, 1913년 5월 14일에는 버클리대학교를 졸업했다. 이 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학사학위(Social Science)를 받았다고 한다. 1918년 4월 25일에는 산 안셀모에 있는 센프란시스코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 1918년의 일이었다. 그해 10월 10일에는 미국남감리교 태평양 연회에서 드 보세(Du Bose) 감독에게 '장로목사'(elder) 안수를 받았다. 이처럼 면학과 목회활동과 함께, <대도>와 <신한민보>의 주필로서의 문필활동, 그리고 민족 독립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그래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으로 선임되었고, 1919년 3월 미국에서 독립선언서에도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등과 같이 서명하였고, 1919년 8월에는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래서 그 출법식에 대표기도하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제헌국회 개원식에서만이 아니라 임시정부 시절에도 기도로 회무를 시작하였고, 이를 통해 이대위라는 한 인물과 조우하게 된다. 그러기에 역사연구란 사건과 인물과의 만남(encounter)이라 하지 않았던가! (202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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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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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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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무언(有口無言)이란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는 뜻이다. 너무도 과분한 은혜를 입을 때도 그렇고, 기가 막혀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할 때도 그렇고, 잘못을 저지르고 사실이 드러날 때도 그렇다. 살아가노라면 진실과 사실과 왜곡에 혼돈되어 정사(正邪)를 분별 못 하고 우(愚)를 범할 때가 있다. 요셉이 보디발 장군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고 감옥에 갔을 때의 당시 상황에 접근해 보면 어떤 사람은 노예 주제에 분수를 모르고 주인마님을 엿보다가 옥살이한다고 진실을 왜곡하여 비난하고, 어떤 사람은 요셉이 주인마님 방에서 황급히 뛰쳐나오는 것은 사실이 아니냐고 역설한다. 그런데도 요셉은 어떤 변명도 항변도 하지 않았으니 사실일 것이라고 비난을 더 한다. 그러나 그 사건의 진실은 하나님과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만 아는 것인데 보디발의 아내가 왜곡하여 보디발에게 이야기하여 요셉이 감옥에 가게 된 왜곡의 대표적 사건이다. 세상 방법의 법리적 결론은 왜곡이 진실을 이긴 것 같다. 약자로서의 요셉은 강자로서의 보디발의 아내를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회자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은 이 상황을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이며,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것이다.
네델란드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루벤스의 작품 <simon과 pero> 명화(名畫)가 있다. 그림의 내용을 모르면 춘화도 같다고 왜곡한다. 그림의 내용으로서는 노인이 젊은 여인의 젖을 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그림의 진실은 아사(餓死)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향한 딸의 지극한 효성의 마음을 표현한 루벤스의 작품이다. 진실을 알기 전에는 사실로 평가하고 더 나아가 왜곡하여 비난하게 되지만 진실을 알고 나면 숙연해지는 것이다.
은퇴 후 9년을 지나면서 전국 600여 교회 부흥사경회를 인도했다. 크고 작은, 도시와 농어촌, 산골과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듣고 보고 느낀, 지상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분쟁이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드러나지 않은 진실과 함께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로 인한 것이 대부분이다. 은혜와 평강으로 거룩한 동행을 노래하던 교회가 한 순간에 분쟁으로 벌판이 되어가고, 헐뜯고 비방하는 아귀다툼이 되고, 결국에는 산산조각이 난 그릇처럼 되는 것을 본다. 그 분쟁의 중심에는 진실을 추구하는 의지는 찾아볼 수 없고,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로 인하여 벌판이 되어가는 것이다.
지금도 유명인들의 경찰, 검찰 조사와 관련된 보도가 항상 쏟아지고 있다. 유튜버들은 자기 입맛에 맞추어서 내용을 퍼 나르는데 객관적인 측면에서 볼 때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를 보는 것 같다. 진실은 법정에서 마무리되지만, 법리적으로 진실이라고 마무리된 사건도 몇 년, 몇십 년이 지난 후 그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억울하게 옥살이한 예도 우리는 언론을 통하여 접한다.
A 목사의 경우, 예산위원회 예산 당회 제직회 공동의회를 통과하여 집행한 특별항목의 지출을 횡령이라고 SNS를 통해 유포되어 A 목사를 바라보는 대부분 사람의 시선이 차갑고, 그 아름답던 인간관계가 뒤틀려진 상황에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기막힌 일을 당했다. 진실은 모든 회의의 기록이 있고, 사실은 그 금액이 집행되었고, 왜곡은 횡령이라는 단어로 A 목사를 죄인으로 만들고 공동체는 벌판이 되어갔다는 것이다. 결론은 모든 것이 왜곡으로 드러나고 진실이 밝혀졌지만, 그동안 A 목사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그로 인한 교회의 혼란과 그 가족들이 받아야 했던 아픔은 그 누구도 보상하지 않았다. 진실은 언젠가는 드러난다.
B 장로의 경우, 개인 사업을 하면서 예배당 건축위원장의 직무를 맡아 교회 건축을 하면서 장로님 개인 돈을 더 많이 들여 건축하였는데, 건축비 횡령으로 고발되어 구치소에 갇히었다. 법정에서 판결로 마무리된 일이지만 진실은 건축비 중 5천만 원을 어음 처리를 위해 당회장에게 허락받고 며칠 사용하였는데 이 사실을 횡령으로 소위 광고지를 예배당 안에 뿌리는 그것이 발단되어 결국 법정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것은 담임목사가 증인석에서 진실보다 교회 상황에 얽매여 5천만 원 사용을 모른다고 하여 B 장로는 피고인으로 재판정에 서야 했다. 재판 결과는 반대로 진실이 밝혀지면서 장로는 억울함이 벗겨지고 대신 목사가 위증으로 처벌받게 된 사건이었다. 진실은 장로가 건축을 위해 최선을 다한 헌신이었고, 사실은 5천만 원을 며칠 사용한 것이고, 왜곡은 그것을 뒤집어 찌라시를 만들어서 뿌리고 담임목사가 거기에 맞추어 동조함으로 교회가 풍비박산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B 장로는 탄원서를 써서 담임목사의 위증에 대한 처벌을 선처해 달라고 판사에게 간청했다. 그리고 사건이 마무리 된 후 B장로는 조용히 그 교회를 떠났다. 유구무언이다.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 접근방법을 분석해 보면 대부분 사람은 진실은 고사하고 사실 확인도 없이 왜곡에 관심을 더 두고 비난하고 정죄한다는 것이다. 그 대부분의 이유는 이해관계로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이 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그 이해관계 당사자로서는 그 상황의 여정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인간관계의 보편적이라면 극복하는 지혜를 요셉과 다윗을 통해 배워야 한다. 즉 아프지만 침묵하며 자기의 삶을 아는 것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뿐임을 확신하는 마음가짐에서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을 믿고 대처하며 인내하는 것이다. 요셉도 그랬고, 다윗도 그랬고, 사도 바울도 그랬다. 어쩌면 소나기가 쏟아질 때는 비를 피하지 말고 맞으라는 교훈이리라.
필자의 저서 가운데 <성도입니까?>가 있다. 세례받고 교적부에 등재되면 교인이 된다. 사전적으로 말하면 종교를 믿는 사람이다. 성도는 사전적으로 말하면 기독교 신자의 존칭, 천주교에서는 특히 공덕이 높은 신자라고 표기한다. 제자는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교인도 성도도 제자도 진실과 사실과 왜곡의 줄타기를 한다. 나는 어떤 줄타기를 하고 있는가? 진실은 묻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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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