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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 반려견과 유기견
    여름입니다. 고대하던 비도 내렸고, 이제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유행가 가사처럼 ‘세상 모든 것이 다 변해가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예전에는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현상들이 해가 갈수록 새롭게 생겨납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유기동물(遺棄動物)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해마다 휴가철이면 강아지만 해도 수만 마리가 버려진다고 합니다. 가족처럼 돌봄을 받는데서 반려견(伴侶犬)이라 불리던 강아지들이 순식간에 천덕꾸러기 흉물 취급 받는 유기견(遺棄犬) 신세로 전락한다는 것입니다. 한 해 평균으로 치면 약 10만 마리나 된다고 합니다. 반려동물에는 개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반려동물들이 버려지고 있는 걸까요? 유기된 그 동물들은 또 어떻게 되는 걸까요? 마하트마 간디의 말입니다. “한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그 나라의 동물이 받는 대우로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떤가요? 고양이가 사람을 보고 도망가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지 않아서 속단할 순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고아 수출 1위 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는데 이제는 유기견 수출까지 적어도 OECD 국가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는 분명한 통계 앞에서는(장윤재, 『포스트휴먼신학』, 125) 부끄러움을 면할 길이 없어 보입니다. 유기견 문제야 드러나기라도 했다 칩시다. 수많은 실험실과 연구기관에서 별다른 관리나 제재 없이 시행되고 있는 각종 동물 실험과, 육류의 대량생산을 위해 끔찍한 환경 속에서 사육되는 소나 돼지 그리고 가금류(家禽類)의 실태는 어떻습니까? 수년 전 구제역 파동으로 수백 만 마리 동물이 살처분(殺處分) 당할 때에는 어떤 반응이 있었습니까? 또 어떤 대책이 마련되었던가요? 원래부터 그랬던 우리가 아니었습니다. 반려동물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도 우리는 동물을 학대하거나 버리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과일조차 다 따지 않고 새들을 위해 까치밥을 남겨놓는 그런 민족이었습니다. 특별히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동물은 한 식구(食口)처럼 대했습니다. 한자로 ‘집 가(家)’ 자체가 한 집에서 거하는 동물을 상징하는데서 유래했을 정도입니다. 지금은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만 1,200만이라고 합니다. 인구의 1/4 이상이 동물과 함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휴가철만 되면 이 난리가 벌어지는 걸까요? 지금도 어느 곳에서 생매장당하고 살처분되고 있을 동물들에 대해서는 어쩌면 그렇게 다들 무관심할까요?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동물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한 모든 인간은 나치다”라는 충격적인 얘기를 했다는데, 우리들 또한 겨우 포식(飽食)이나 성장(成長)이라는 미명 하에 동물을 잔혹하게 학대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공교롭게도 1,200만이라는 숫자는 개신교인과 천주교인을 합친 대한민국 기독교인의 숫자와 같습니다. 세상이 냉담하고 무관심하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세의 성자라 추앙 받는 프란체스코는 태양과 바람과 불을 형님으로, 달과 물과 대지를 누님으로 부르는 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20세기 들어와서도 『생태주의자 예수(Der Oklogische Jesus)』를 쓴 프란츠 알트(Franz Alt) 같은 사람들은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명체는 모두 친척뻘이다. 인간이건 동물이건 식물이건 아버지는 한 분인데 곧 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왜 그럴 수밖에 없습니까?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창 9:9-10) 하신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피조물 또한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을 바란다”고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롬 8:21-22). 이번 여름부터라도 반려견과 유기견만이라도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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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7-10
  • [교회학교를 살린다] “여름행사 그 후, 다시 시작이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교회학교에서 초등학생 고학년 어린이들로 팀을 짜서 함께 해외 비전트립을 다녀온 적이 있다. 지금도 초등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해외 비전트립이 거의 없는데, 당시에는 더더욱 희귀한 프로그램이었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우선 명칭부터 거창하게 ‘단기선교’라는 이름보다는 ‘비전트립’이라 부르고, 어린이들이 할 수 있는 수준에서 현지 문화체험, 대학 탐방 및 고아원 방문과 공연 등의 활동으로 준비하였다. 시작단계에서부터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현지에 가서 활동하는 비전트립 본 프로그램도 물론 중요하지만 가기 전의 준비과정과 갔다 온 후의 후속과정에도 충분한 내실을 기하여 더욱 의미있는 훈련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가기 전부터 열심히 모여서 함께 준비했던 시간들이 현지에서 빛을 발하여 즐거운 체험과 의미 있는 배움들이 풍성했었다. 그리고 다녀온 후 후속 모임을 가졌고, 그 후 일 년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방문했던 고아원을 위한 후원금 기부 및 소식을 나누는 일을 계속 하였다. 그 과정을 통해서 함께 했던 교사와 학생들 모두 비전트립의 추억을 공유하고 지속적으로 선교지에 대한 관심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 후로부터 또 6-7년이 지나 그때 참여했던 아이들이 잘 성장하여 교회 안에서 오후 예배시간에 성인식에 참여하는 것을 지켜보는 귀한 경험을 갖게 되었다. 낯선 해외에서 동고동락했던 아이들이어서인지 참으로 감회가 새로웠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했던 신앙적 경험과 교회에서의 다양한 참여로 다져진 성장과정이 한 사람의 신앙인에게 오롯이 스며들어 있음을 목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여름성경학교나 수련회 등을 인생의 임팩트 있는 한 점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의 잊지 못할 강렬한 체험이 평생을 살아가는 소중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아동기의 성경학교를 통해서 교회에 소속감을 느끼게 되고, 청소년기에 여름행사를 통해서 회심을 경험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여름행사는 그 어떤 시간보다도 중요한 교육의 장이며 변화의 순간이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신앙교육은 점이 아닌 선일 경우가 더 많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경우는 진한 점과 점의 연결과 연장인 선으로 이루어진다. 만약 하나님을 만나는 강렬한 경험이 일상적인 신앙교육으로 계속해서 연결되지 못한다면 그 체험은 오래지 않아 힘을 잃고 말 것이다. 그 일상의 기나긴 마라톤의 과정을 지지하고 지켜봐주는 교사와 부모, 교회 전체의 사랑과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제 각 교회마다 여름행사가 시작되었다. 어린아이로부터 시작해서 청소년들 청년들까지 잊지 못할 시간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소중한 것은 여름행사 그 후이다. 귀한 경험들이 다음세대의 삶에 지속적으로 녹아들어갈 수 있도록 행사 그 후를 준비해보자. 행사기간 내내 배우고 익혔던 것들을 되새길 수 있도록 활동했던 사진과 자료들, 찬양들, 영상들을 우리 부서와 교회 전체에 도배해보자. 여름행사를 위해 관심 가져주신 분들에게 행사 이후의 부서와 다음세대들을 위해서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요청을 해보자. 국내 성지순례를 할 수 있는 지도를 제작하거나 가정예배를 돕는 말씀묵상 가이드를 만드는 등 휴가기간을 가족들과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신앙적인 팁들을 만들어 전해보자. 그리고 새 학기에 새롭게 시작될 훈련프로그램, 전도활동, 토요활동들을 준비해보자. 그렇게 교회학교가 어떻게 다음세대에게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인지 좀 더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계획을 부서 전체가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여름행사 그 후는 다시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음세대를 살리고자 하는 우리의 강렬한 열망도 무더위를 뚫고 계속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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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7-10
  • [은혜의 말씀]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시26편5~6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불타면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70년이란 긴 시간을 슬픔 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들은 70년 뒤 해방을 맞이하였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스라엘을 향해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의 찬양을 부르며 돌아오게 됩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포로생활 가운데에서도 울며 믿음의 씨앗을 뿌리고 언약의 말씀의 씨앗을 뿌린 자들은 마침내 기쁨의 풍성한 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로 돌아온 그들은 이제 무너진 성읍과 척박한 땅에서 눈물을 머금고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농부들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씨를 뿌리며 물을 주고 뜨거운 태양 아래 비지땀을 흘리며 쉴 틈 없이 바삐 움직여야만 하지만 열배 백배 풍성한 열매가 맺힐 것을 기대하기에 수고롭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힘을 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수확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씨라는 것이 보기에는 시커멓고 보잘 것 없지만 땅속에 심겨줬을 때 반드시 싹이 트고 발아해서 잎이 나오고 꽃이 피고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척박하고 암담한 시간을 보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한계를 뛰어 넘고 바쁠 때 진도가 팍팍 나가고 힘들 때 힘줄이 불끈 생기고 스트레스가 양념이고 피곤이 능력이고 가난이 교사고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제일 문제는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어둡고 힘들고 우울할수록 일어나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려야 합니다. 희망과 믿음의 씨를 뿌리고 말씀과 전도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태신자라는 말은 아기를 품어 낳듯 수고함으로써 정성과 관심을 다해 내가 전도해야 할 대상을 지칭합니다. 그를 위해 긍휼한 마음으로 눈물로 기도하며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며 그의 믿음을 위해 시시때때로 교제하며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본을 보이며 도와주어야 합니다. 교회에 정착하기 까지 끊임없이 돌아보고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수고하며 애를 쓰는 가운데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잘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 학교 어린이의 경우 교회에 몇 번 오고 다니지 않게 되더라고 그런 아이들이 세월이 흘러 인생 길목에서 어느 날 불현 듯 생각이 나고 알 수 없는 이끌림과 전도로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되기도 합니다. 연어가 고향으로 돌아가듯이 그런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당장 열매가 맺히지 않더라고 때가 되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다시 불러 모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믿음이 없어 함께 교회 나가지 않으면 그보다 슬픈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고 삶으로 감동을 주고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들은 때가 되매 기쁨의 단을 거두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온 가족이 함께 손을 잡고 예배드리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릴 때 불원간에 기쁨으로 곡식 단을 거두는 추수 때, 결실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자녀들을 위해, 건강을 위해 심어야 합니다. 복음을 심어야 합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필경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수고를 다 아시고 위로해 주시사 마침내 기쁨의 곡식 단을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받지 못했다면 하늘나라에서 몇 배로 더 갚아주실 것입니다. 집안이 달라지고 문화가 달라지고 족보가 달라지고 역사가 달라지는 그런 쓰임 받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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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7-10
  • [성경인물탐구] 예수님의 제자 세리마태(3)
    가버나움은 당시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다메섹, 두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통로였습니다. 빌립의 영토인 데가볼리에서 헤롯 안티파스의 영토로 들어서는 첫 성이므로 관세를 받는 세관이 있었습니다. 로마 사람은 유대인의 모든 과수, 우물, 토지 및 가축에 세금을 부과하였습니다. 이러한 세금징수는 강압적이고 외국인에 의한 과세였기에 강한 반발을 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까지 세관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였습니다. 마 9: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눅 5:27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당시 세리는 로마 정부의 세금 징수 사무를 청부 맡은 유대인들로서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세리는 일반 민중의 미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산중에는 사나운 사자가 있고 거리에는 잔인한 세리가 있다.' 라는 유대의 격언을 보아서도 이런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유대인들에게 매국노 취급을 받았습니다. 눅 3:12-13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세리는 당시 죄인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앞잡이 역할을 하였으며, 동족에게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들였기 때문에 착취자요, 반역자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유대 사회에서 재판관이나 재판의 증인이 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배에도 함께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엄격한 유대인들은 세리나 죄인과는 음식도 같이 먹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당시 세리는 유대인들에게 철저히 죄인 취급을 당하였고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따라서 세리 마태도 유대인들에게 학대와 멸시를 당하였던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그 기준을 외모에 두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기준,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겉모양이 아니라 속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세리와 창기를 죄인의 대명사로 취급한 것은 그들이 사람을 외모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예수님까지 배척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을 외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겉모양이 아니라 속사람을 보십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의 신분이라든지 사회적 지위 따위가 아니라 주께서 그들을 보시는 관점입니다. 약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성도는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고, 달음질해야 할 분명한 목적지가 있으므로 세상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러한 특권이 주어졌다하여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세리와 창기들을 무시하고 배척하였습니다. 롬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되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몸을 귀하게 여기고 아끼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자들은 결코 악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는 배척과 학대가 아니라 허물을 덮어 주고 사랑해야 합니다.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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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7-10
  • [교회법률상식] 합동 교단 사면위원회 설치 운영 언어도단(2)
    2. 총회 행정의 흠결 필자의 사견으로는 총화가 “사면위원회”라는 희한한 위원회조직을 결의한 사안으로서 총회의 행정과 총회 재판국이 연관되어 있으므로 양자를 겸하여 평가한다면 총회의 행정에 대하여는 F학점, 총회 재판국의 재판은 0점을 주고 싶다. 그 연유는 총회 회의와 결의 등과 관련하여 헌법대로 회의한다기보다는 주먹구구식으로 회의나 결의하는 것을 예사로운 일로 여기면서 처리하는가하면, 총회 재판은 단 한 건도 교단 헌법대로 재판하지 않으면서 총회 역시 그런 재판의 판결을 거의 다 보고받기 때문이다. 실제 현상의 실례를 한 가지만 들어 보면 총회 재판국은 하회 서기가 교부한 서류만을 재판 자료로 하여 재판국원들만 모여서 심리한 후 ① 취소하든지 ② 변경하든지 ③ 하회로 갱심하게 하는 것, 3가지 중 하나로 판결문이 작성되어야 한다(권징 조례 제99조 4항 참조). 그런데 법률심인 총회 재판국은 원심 재판에서도 볼 수 없는 노회장, 노회 서기, 하회 재판국장, 재판국 서기, 원고, 피고는 물론, 원고, 피고 측의 장로들까지 수십 명을 소환하여 심문을 하고 서명까지 받는 요란을 피운 후에는 헌법이 정한바 위의 3가지 중 하나로 판결문을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총회 총대 5년 정지, 당회장권 정지, 설교를 제외한 목사 직무 정지, 노회장 및 서기 직무 정지 등의 엉터리 판결문을 작성한다. 이는 당회나 노회 재판에서도 절대로 판결할 수 없는 판결문인데 하물며 총회 재판국에서 이런 판결문을 작성하여 총회에 보고하면 총회 역시 그 재판국의 판결 보고를 그대로 받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그 나물에 그 밥이라.” 하였던가? 1) 총회 개혁은 곧 준법 총회가 헌법대로 회의하고 헌법대로 결의하면 총회 재판국에서도 불법 재판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것이다. 총회가 불법을 결의하니 총회 재판국도 불법 재판을 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지면상 총회가 절대 시행하면 안 될 2가지 불법 결의에 대하여 언급한다. ① 상설 재판 결의의 부조리 총회가 권징 조례 제134조 2항에 “총회는 재판 사건을 직할 심리하거나 재판국에 위탁할 수 있고 재판국은 위탁 받은 사건만 심리 판결한다.”는 헌법 규정을 무시하고 총회 파회 후에 접수된 상소건과 소원건을 차기 총회 개회 전에도 총회의 위탁 절차도 없이 재판할 수 있도록 총회가 결의하여 총회 재판국의 불법 재판을 하도록 부추겼을 뿐만 아니라, 권징 조례 제142조에 “총회 재판국의 비용은 총회가 지불한다.”는 규정을 어기고 상소인과 소원인에게 400만원씩의 재판 비용을 받아 재판하라고 결의해 주었으니 재판국이 급행료 400만원을 낸 사람은 위헌적 불법으로 재판을 신속히 해주는가하면 돈이 없는 사람은 차기 총회가 위탁하여 준 후에 합헌적인 재판을 하게하는 빌미와 부조리를 재판국에 제공해 준 총회가 되고 만 것이다. ② 상설 기소위원회의 설치 교회의 각 치리회는 상설 기소위원회를 절대로 설치할 수 없다. 오직 범죄자가 발현되었는데도 고소하는 자가 없는 경우에 한하여 부득불 치리회가 원고로 기소할 수 있을 뿐이다(권징 조례 제7조 참고). 세상 법은 기소하는 검찰 제도가 있으나 교회의 치리회에서 상설 기소위원회를 설치하는 결의는 위헌적 불법으로 총회나 노회나 당회에 혼란을 야기 시킬 뿐이다. 범죄자도 없는데 앞으로 범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기소하기 위하여 상설 기소위원회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2) 사면과 해벌 교인의 사면과 해벌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피력한다면 “사면”은 요19:30에 “다 이루었다” 하신 예수님의 가상 제6언으로서 엡1:4의 말씀대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사람은 모두 동시에 영원히 “사면”되었기 때문에 다시는 어느 누구도 사용할 수 없는 용어이다. 그리고 “해벌”은 마18:18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중에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씀이 곧 “해벌”이다(예배모범 제17장). 결코 사면과 해벌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3) 판결과 시벌과 해벌 판결은 원심 치리회가 직할 재판하거나 재판국을 설치하여 위탁할 경우(권징 조례 제117조) 재판회나 재판국이 권징 조례에 의하여 재판하여 판결하는 것을 의미하고, 시벌은 예배모범 제16장(시벌)에 규정한 대로 재판회에서 판결한 판결을 예배 시간에 “교회 앞에서 직접 본인에게 언도하거나 혹 본 치리회의 결의대로 교회에 공포만”하는 예배모범의 의식을 의미하며, 해벌은 예배모범 제17장(해벌)에 규정한 대로 책벌자 중에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책벌한 치리회가 해벌을 결의한 대로 예배 시간에 “회복하는 선언을 공포”하는 예배모범의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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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7-10
  • [서임중 칼럼] 인간관계(人間關係)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을 때 이미 아담과 하와를 통해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는 말씀은 더불어 살아감의 이치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를 ‘인간관계’라 한다. 즉 사회 집단이나 조직의 구성원이 빚어내는 개인적 정서적인 관계를 말한다. 그렇다면 가장 아름답고 지고한 인간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 질문에 따른 보편적인 대답을 한다면 소위 ‘코드가 맞는 관계’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정사(正邪)를 떠나 코드가 맞으면 상호 분쟁이나 다툼, 갈등이 없는 관계를 소위 최상의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선의 행태든 악의 행태든 코드만 맞으면 자기들의 관계는 나름 지고한 관계라 할 수 있으므로 ‘조폭은 조폭대로’, ‘성직자는 성직자대로’라는 관계개념이 정의되는 것이다. 그래서 코드관계란 나의 행복이 너의 행복이라는 공식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지역이기주의, 또는 집단이기주의가 되기 쉽다. 이기주의는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의 권리, 또는 이익을 생각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생활태도를 가리킨다. 이런 경우를 ‘님비(NIMBY, Not In My Back Yard Syndrome)신드롬’ 또는 ‘룰루(LULU, Locally Unwanted Land Use)’, 또는 ‘핌피(PIMFY, Please In My Front Yard)’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관계가 진정 지고한 인간관계인가? 사도바울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 하신 것이 있다. 가정윤리에서 부부의 관계가 주께 하듯 해야 하고(엡5:22), 아랫사람과 윗사람의 상호 관계도 주께 하듯 해야 하며(엡6:1), 인간관계의 섬김에 있어서도 주께 하듯 해야 한다(엡6:3). 어디서 무엇을 하든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해야 하고(골3:23),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고전10:31).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지고한 인간관계의 규범이다. 이를 살펴보면 기준이 하나님이다. 왜, 왜 그럴까? 출애굽기 20장에서 하나님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인간생활의 규범윤리를 말씀하셨다. 요약하면, 인간은 의인이 없으며 모두가 죄인(롬3:10)이라는 것이다. 나는 일 년 내내 전국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 등지를 다니면서 말씀사역을 한다. 어느 곳에 이르든 마을마다 예배당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더 없는 행복이며 기쁨이다. 선교사님들이 불교와 유교사상에 잠겨 있던 이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후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의 중심에 서는 축복을 받았다. 다시 생각해도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입은 나라다. 은퇴 이후 칠순의 나이에 이르렀어도 여전히 나날이 모자라도록 말씀선포의 초청을 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이다. 이렇게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지나온 세월 그 어느 때보다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 있다. 마을마다 세워진 예배당과 세계선교의 중심에 선 복음의 나라 대한민국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기쁨보다 더 큰 고통으로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나를, 너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야만 했던 분기점의 아픔보다 어쩌면 더 아픈 그 고통의 통증을 느낀다. 거두절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구원의 은혜와 평강’이다. 그것이 좋은 교회다.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고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그런데 교회가 구원의 은혜와 평강이 아닌 분쟁과 갈등으로 얼룩지는 모습을 보고, 듣고, 경험하며 하나님의 크나큰 아픔을 느낀다. 복음의 생활이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고 영혼이 구원받는 것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복음의 삶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나의 수직적인 관계가 믿음으로 정립이 되었다면 이웃과 나의 수평적인 인간관계의 기본윤리가 살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성령의 열매다. 함축하면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경외가 근본이지만 신약에서는 모든 것이 “주 안에서”의 인간관계다. 구체적 개념으로 그것이 무엇인가?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는 날마다 이 사실을 읊조린다. 사도신경을 신앙으로 고백한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즉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사이비요 이단이다. 그런데 작금의 교회에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 고백되고 있는가? 입술로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삶은 그 반대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 그리스도인인가?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모임인 교회인가? 자의적 해석을 통해 악을 행하며 선이라 외치고, 불의를 행하면서 의라고 고함치는 기막힌 상황은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갈라디아서 5:22~23을 통해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이 정답이다. 교회를 위하여, 주의 영광을 위하여 외치는 사람들이 사랑이 아닌 것, 기쁨이 없는 것, 참지 않는 것, 가엽게 여기지 않는 것, 어질고 착하지 않은 것, 마음 중심으로 주의 뜻을 이루지 않는 것, 온화하고 부드럽지 않은 것, 정도를 넘지 않고 적절하게 자신을 제어하는 조절이 안 된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으로 살아간다.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기준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인간관계가 지고한 은혜와 평강의 삶을 엮어갈 수 있다. 그것이 복음의 삶이다. 곧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이신 그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요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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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7-10
  • [성서연구] 고향의 봄(아가서 2장 10-14절)
    한 여름이지만 봄노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며칠 전 <고향의 봄> 노래를 들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로 이어지는 이 동요는 국민 동요가 된 지 오래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쓰신 분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아동문학가인 <이원수> 선생님이십니다. 이원수 선생님께서는 1911년 11월 17일에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서 생후 10개월 때 창원으로 이사했습니다. 매우 가난하여 학교에 못가고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1923년에서야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2학년에 편입했습니다. 그 무렵 <방정환> 선생님의 잡지 『어린이』를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 때 쓴 글이 1926년『어린이』4월호에 입선하였는데, 그 글이 다름 아닌 <고향의 봄>입니다. 그 후 마산상업고등학교(현 마산용마고등학교)에서 공부했고, 평생을 아동문학가로 사셨습니다. 이 노래를 듣는 동안 작가의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노래가 어린이들을 위한 동요인데, 막상 요즘 이 노래를 사랑하는 분들은 노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에겐 고향이란 개념이나 그리움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고향이 있다 해도 “*** 아파트”가 고향이라고 여기지 않을까요? 또 요즘 아이들에게“네 고향을 말해 보라.”하면 “우리 동네에는 100층짜리 빌딩이 있어요. 문화회관도 멋져요. 피자집이 새로 생겼는데, 엄청 맛있어요!”이런 식이 아닐까요? 하긴 요즘엔 인공적으로 들어선 건물과 시설이 많다보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에는 인공을 노래하는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자연을 자랑할 뿐입니다. 당시엔 자랑할 만한 인공 시설이 없던 때이고 보면 자랑할 게 없었겠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꽃피는 산골은 자랑거리가 못됩니다. 왜냐하면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꽃이 피지 않는 동네가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의 모든 고향이 다 <꽃 피는 산골>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원수 선생님이 마음으로 그리워한 고향은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그 당시 한국 사람에게 다 있는 지극히 평범한 고향이었던 셈입니다. 고향이 그리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꽃이 피기 때문도 아니요, 100층짜리 건물이 들어섰기 때문도 아닐 것입니다. 고향이 소중한 진짜 이유는 거기 정겨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부모, 형제, 친구들.....그런데 시간이 흘러 이런 이들이 다 떠나고 나면 “나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란 노래가 떠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디도 고향이 아니란 느낌에 마음이 허전해지면 그 땐 진정한 고향인 천국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 때가 주님을 만날 날이 아닌가 합니다. 요즘 누구나 입만 열면 살기가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휴가철마다 해외여행객으로 공항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현실을 보면 살기가 예전보다는 좋아진 게 틀림없습니다. 이렇듯 현실이 좋다보니 한국교회 안에 천국을 선포하는 메시지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깁니다. 아무리 현실이 행복을 준다 해도 어찌 천국 없는 복음이 가능하겠습니까?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사이의 이루어진 사랑 노래이고, 본문은 상대방을 사랑의 동산으로 초대하는 노래입니다. 그러나 이 노래를 지금 읽는 우리에게 이 노래는 주님께서 천국을 준비하시고 우리를 부르는 노래가 아닐까요? 언젠가 주님께서 <함께 가자>고 하실 때, <네 얼굴을 보게 하라>고 하실 때가 오면 우리는 기쁨으로 주님의 나라에 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보다 더 정겹고 소중한 분은 없습니다. 아직 고향이 있고, 거기 반가운 이들이 있다면, 그 고향에 더 늦기 전에 자주 가 보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계신 영원한 고향인 천국의 봄도 늘 마음으로 그리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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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7-10
  • [함께 생각해 봅시다] 기도인도자가 명심해야 할 사항
    기도 드렸다고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기도 드립니다 라고 해야 첫째, 공중기도를 인도하려는 사람이 먼저 성경구절을 한절 암송한 후 기도인도를 시작하는 이가 가끔 있다. 성경구절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대부분 다분히 교훈적인 말씀이다. ‘기도합시다’ 하기에 회중은 모두 눈을 감고 기도인도자의 인도만 기다리고 있는데 인도자가 기도인도는 하지 않고 느닷없이 성경구절을 암송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기도를 인도하는 중 성경말씀을 인용하는 건 무방하다. 예를 들면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저희들은…” 이렇게 하는 것은 좋다. 한마디로 기도인도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도 인도만 하여야 한다. 다음, 어떤 이는 기도인도를 마치려고 하면서 “지금은 예배를 시작하는 시간이오니 마칠 때까지 성령님께서…” 이렇게 기도한다. 그 시간이 어찌 예배를 시작하는 시간인가. 예배순서가 얼마나 많이 지나갔는가. 일동이 묵기도를 했죠. 찬양대가 송영을 했죠. 일동이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했죠. 인도자와 최중이 교독문을 교독했죠. 일동이 찬송을 제창했다. 이미 많은 순서가 지나갔다. 거기다가 기도인도자 자기가 기도를 인도하는 동안에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그런데 기도인도를 마칠 무렵에 “지금은 예배를 시작하는 시간이오니 마칠 때까지 성령님께서…” 이렇게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고 본다. 사리에 맞게 “남은 순서 한 가지 한 가지에 성령님이…” 이렇게 해야 옳다고 본다. 다음, 어떤 이는 기도인도를 마칠 때에 “이 모든 말씀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드 드렸습니다” 이렇게 한다. 이건 아주 잘못이다. 기도의 마무리는 반드시 현재 시제로 해야 한다. “이 모든 말씀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혹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해야 한다. “이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지금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했다는 것을 보고하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기도의 말미에서는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혹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해야 한다. 비근한 예를 든다. 보고서를 제출할 때에 보고 항목을 일일이 기재하고 말미에 가서 ‘이상과 같이 보고합니다’ 이렇게 기재하지 ‘이상과 같이 보고하였습니다’ 이렇게 기재하는 이가 있겠는가. 이같이 사리가 분명한데도 아직도 기도를 마치면서 “기도 드렸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를 보면 심히 답답하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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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7-10
  • [시사칼럼] 육점이오와 육이오
    호국보훈의 달이나 나라사랑의 달로 기념하는 유월(六月)입니다. 아이들에게 <6.25>를 써놓고 읽어보라고 했더니 <육점이오>라고 읽더랍니다. 분단과 전쟁을 겪은 세대는 당연히 <육이오>라고 읽겠지요? “점”이라는 한 글자만 다른 것 같지만 사소해 보이는 이 차이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의 출발점입니다. 기존의 ‘지역(地域) 갈등’, ‘보혁(保革) 갈등’ 못지않은 갈등계의 신흥 강자로 등장한 ‘세대(世代) 갈등’을 염두에 둔 말이 되겠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산업화 세대’, ‘민주화 세대’, ‘정보화 세대’의 구성원들이 공존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각각 공유하는 기억이 다르고,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다르며, 추구하는 방향성이 다릅니다. 차이가 잉태하여 갈등을 낳고, 갈등이 장성하여 혼란과 분열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갈등의 삯은 결국 공멸(共滅)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분단(分斷)과 정전(停戰) 체제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갈등사회’ 속에서 “교회가 평화문제를 외면한다는 것은 그 신실성을 포기하는 것이고 또한 세상과의 이해와 소통을 포기하는 것이다”라는 볼프강 후버(Wolfgang Huber)의 말을 우리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평화이루기(peace making)는 시대적 요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의 본연적인 신앙고백이 아니겠습니까?(마 6:10) 하지만 갈등과 분열을 해소하고 평화 이루기는 “긴 여정이고, 매우 위험한 여정이며, 지난(至難)한 여정”일 수밖에 없습니다.(Katongole & Rice, Recociling all things) 이 땅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싸드(THAAD) 배치를 둘러싼 갈등과, 특수목적고 폐지 문제를 둘러싼 논쟁과, 동성애와 관련된 퀴어 축제나 차별금지법 논란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회 갈등은 결국 이익 갈등이기 때문에 이해당사자들끼리는 결코 해결할 길 없는 난제입니다. 결국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의 주권을 전제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또한 쉽지만은 않습니다. 성경 역시 평화 이루기의 비전을 결코 낭만적으로 증언하지 않는다고 한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의 말이 맞습니다.(눅 12:49-51 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 존재적 방식과 경륜적 공식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으로 이 땅에 평화를 이루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Moltmann, The Trinity and the Kingdom) 평화는 화해를 기반으로 삼습니다. 화해란 후버(Huber)에 따르면 “반대되는 입장을 타협적으로 조화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갈등을 공동체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운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해야 그러한 변화가 있겠습니까? 내란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던 우간다 출신의 신학자 카통골레(Katongole)는 먼저 “탄식(歎息)”을 강조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탄식이란 상처 입은 누군가의 곁에 다가서고, 그 고통을 들어주고 함께 아파하며, 상처를 닦아주고 씻어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탄식(groan)이며(롬 8:26), 그리스도의 공감(sympathy)입니다(히 4:15). “회개 없는 은혜가 값싼 은혜인 것처럼, 탄식 없는 화해는 값싼 화해입니다.” 따라서 세월호나 스텔라데이지호, 그렌펠타워화재의 희생자 가족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보여주어야 할 것은 탄식입니다, 공감입니다! 갈등을 다루는 태도 또한 달라져야 합니다. 화해와 평화를 부르짖는 세속적인 목소리들은 때로는 갈등을 유보하거나 억압하려 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갈등을 하나님 앞에 내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의 지혜로는 이러저러한 갈등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무지의 자각이 있어야 하고, 우리 힘과 노력과 의지로는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피스메이커(peace maker)인 예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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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6-26
  • [교회학교를 살린다] “교회학교 여름행사, 부흥을 꿈꾸라.”
    교회학교 여름행사는 많은 인적, 물적 자원이 투입되는 연중 최대의 프로젝트이다. 전통적으로 교회학교는 한 해의 계획과 진행을 여름행사에 초점을 맞추어 준비하였다. 일 년 전부터 장소를 섭외하고, 교사들의 휴가일정을 조정하고, 두 달 전이면 구체적인 교단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교사교육이 시작된다.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때는 이러한 여름행사의 성장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 교회에 중추적 역할을 하는 성인들의 대부분이 여름행사를 통해 교회를 접하고, 교사로서 쓰임을 받으며 부흥의 시대를 함께했던 사람들이다. 그만큼 여름행사는 다음세대에게도 소중한 신앙 경험의 장이었고, 교사들에게는 충실한 교육의 장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많은 경우 토요일 하루 동안 진행하고, 주일까지 이어지거나 1박 2일로 하는 경우도 많다. 그나마도 한나절 수영장에서 보내고 오면 정작 신앙교육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많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물론 사회적인 이유에서 이렇게 축소된 경향이 있다. 최근 몇 년간 국가적으로 사건 사고가 많았고, 아이들은 학원이나 해외연수 등으로 학기중보다 더 바쁜 방학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벽 앞에 주저앉아 있을 순 없다. 아직도 교회학교의 최대의 행사인 여름성경학교, 수련회에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소중한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교회학교의 부흥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여름행사를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과거에서 답을 찾아보자. 다방면의 ‘부흥’을 이끌었던 르네상스는 처음 시작이 고대의 장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던가. 과거 우리 한국교회가 부흥했던 시기에 우리 교회학교가 지녔던 유산으로 돌아가 보면 그 때는 2박3일, 3박4일, 심지어 일주일동안 내내 이어졌던 잔치의 시간, 그 시간의 풍부함이 있었다. 필자는 한 결 같이 다음세대들의 부흥을 위해서는 신앙의 시간과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우리의 어린 시절에는 여름행사를 하면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교회 안팎으로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시공간적으로 충분히 교회를 누렸다. 청소년부, 청년부 때에는 농어촌 교회에 가서 봉사활동도 하고, 밤에는 뜨겁게 집회를 하며 기도의 응답이 없으면 이 산을 내려가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심으로 가득했었다. 그때의 열심과 신앙적 갈망으로 돌아가자. 이 시대는 굳건한 신앙적 토대 없이는 쉽게 휩쓸리고 물들 수 있는 세상적 가치와 문화로 가득한 때이다. 이 거대한 파도 앞에 선 우리의 다음세대들이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단기간 함께 합숙하며 배우고 익히고 공동체의 즐거움을 나누는, 짧지만 강렬한 경험으로서의 ‘인텐시브 과정’이 바로 여름행사인 것이다. 교사가 부족하여 이렇게 할 수 없다면 그 또한 과거에 답이 있다. 최근에 많은 교회들이 다음세대 교사를 임명하고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초등학교 저학년의 교사역할을 하기도 하고, 중고등학생들이 유아유치부, 아동부 교사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다음세대 교사들을 활용하는 예는 비단 작은 교회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규모가 큰 교회들도 많이 활용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음세대 리더십이 자연스럽게 길러지기 때문이다. 인생도 공부도 목적의식이 중요하다. 동기부여가 되지 않으면 방향을 잃고 헤매는 격이 된다. 올 여름은 우리의 다음세대들이 학원과 학교에서 공부를 보충하는 것보다 먼저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정하는 소중한 부흥과 변화의 시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지역 교회와 교회학교들도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준비하여서 여름행사가 우리의 다음세대들에게 중요한 터닝포인트의 장으로 귀하게 열매 맺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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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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