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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적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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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5일은 세계환경의 날이었습니다. 과학기술문명의 발달로 각종 편리와 쾌락을 누리던 인류는 20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습니다. 그 결과 1972년 6월 5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113개국의 대표가 유엔의 주도 하에 ‘인간환경회의’를 개최해서 ‘인간환경선언문’을 제정하고 6월 5일을 ‘환경의 날’로 지정했습니다. 1992년 6월 3일부터 브라질의 리우에서는 185개국 대표가 모여 ‘리우환경회의’가 열려서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의제로 기후변화협약을 채택했습니다. 각국의 탄소가스 배출량을 측정해서 기준선을 정하고 환경부담금을 책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은 1990년 2억 9,700만 톤에서 2005년 5억 9,100만 톤으로 15년 만에 두 배가 늘어 세계에서 탄소가스 증가 속도가 가장 빠릅니다.
1949년 미국 캘리포니아 클리어 호수에서 모기를 죽이려고 DDT라는 약품 0.014ppm(일억 분의 일)을 뿌렸습니다. 5년이 지나자 모기가 또 생겼고, 조금 더 많은 양의 DDT를 뿌렸습니다. 그 결과 주변의 병아리들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이제는 극지방 펭귄의 알에서까지 DDT가 검출됩니다. DDT는 대표적인 발암물질입니다. 1960년대 일본에서는 비료공장 폐수가 방류되면서 수은이 조금씩 배출되어 바다의 플랑크톤이 수은을 흡착하고, 그 플랑크톤을 조개가 먹고 물고기가 먹고, 그 조개와 물고기를 사람들이 자꾸 먹어서 체내에 수은이 쌓여 ‘미나마타병’이라는 공해병이 등장했습니다. 한국에서도 ‘환경재앙’이라고 불러도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의 환경적 사고가 빈발하고 있습니다. 2011년 구제역과 조류독감 때문에 1,000만 마리의 가축이 생매장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또 동일한 질병으로 구제당국에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이 모두가 인간 탐욕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이며, 지구 생명의 저항입니다.
환경협약들이 속속 등장하고 ‘환경’이 21세기 중요한 화두로 등장했지만 인류의 노력에는 필연적인 한계성이 있습니다. 개발과 성장을 위한 이기심과 욕망 때문입니다. 길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골로새서 1장 20절).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교회를 사용해서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환경신학이니 생태신학이니 하는 움직임들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또한 녹색교회로 지정될 정도로 생태계 환경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교회들이 늘어가고 있음도 대단히 고무적인 현상입니다. 친환경농법을 개발해서 농민들에게도 보급해 마을 자체를 외부에서 견학까지 오는 생태마을로 변화시키고 교회는 유아세례자가 증가하는 놀라운 현상을 체험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아예 환경부를 만들어 정례적으로 강변을 청소하는 생태지킴이를 자처하는 교회도 있고, 옥상에 태양열 발전기를 설치하고 몽고에 나무를 심어주는 사역을 기획하고 ‘은총의 숲 기금’을 모으고 있는 교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창조세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이 공원을 훼손되지 않게 지키는 것이 교회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서울 혜현교회) 그렇습니다. 환경은 교회 본연의 사명입니다. 마음만 있다면 어떤 교회든 할 수 있는 사명입니다. 음식물쓰레기 줄이기 운동, 일회용 컵 사용하지 않기, 조명교체나 발전기설치로 에너지효율 높이기 등 각 교회가 결단만 한다면 곧장 실천할 수 있는 환경적 사역들이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주일에 자동차 타고 오지 않기나 여름에는 가운이나 양복이나 넥타이를 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는 운동 등을 실천함으로써 탄소금식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갈 수도 있습니다. 환경은 인류애와 공동선의 뿌리입니다. 하지만 오직 그리스도의 정신만이 구현할 수 있는 가치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핀 꽃 한 송이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우리에게 맡기신 청지기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때만 만물을 회복하는 십자가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21세기의 교회에 이보다 더 긴급한 사명이 없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환경적 교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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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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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학교를 살린다] “교회학교 여름행사, 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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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5월 말에서 6월 초가 되면 교회학교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체제로 접어든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여름행사 준비 체제로 돌입하는 것이다. 5월 중순에는 전국의 강사들이 모여서 올해의 여름성경학교의 주제와 공과내용을 익히는 전국 여름지도자세미나가 있고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각 노회별로 6월 초부터 교역자와 교사들을 대상으로 여름강습회가 시작된다. 필자는 학부 때부터 20여 년간 소속 교단의 여름행사 원고를 집필하고 노회강습회에서 강의해왔다. 매년 강습회 강의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교사들의 놀라운 열정과 헌신이다. 직장 일을 마치자마자 저녁도 먹지 못하고 강의장으로 뛰어오는 교사들의 구슬땀을 볼 때에나 일 년에 며칠 없는 휴일을 반납하고 하루 종일 강습회에 매달려서 여름공과에 눈과 귀를 모으는 교사들을 볼 때면 한 명 한 명 모두 안아주고 싶은 사랑스러움을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교회학교의 사정은 날로 열악해져가고 있다. 여름행사에 시간을 내서 참여할 수 있는 교사는 적고, 특히 젊은 청년교사는 가뭄에 콩 나듯이 있는데 그나마도 헌신도가 낮아 뭔가를 부탁하기도 서로가 부담이 된다. 참여하는 학생들 역시 어른들 못지않게 공부와 삶에 찌들어서 교회에서마저 뭔가를 배우러 오기 힘들어한다. 그래서 많은 교회학교가 타협을 한다. 성경공부는 하루정도만 하고, 나머지 하루는 물놀이로 때운다. 그렇게 1박2일, 또는 그냥 2일로 성경학교가 간소화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그래도 여름성경학교가 여전히 가치 있는 행사일 수 있고 우리의 소망을 둘 만한 의미가 있는 것은 이렇게 준비하는 교사들의 수고와 희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는 부서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할 중요한 준비과정이다. 교사강습회는 교사들이 서로 만나 서로의 열정을 확인하고 여름성경학교를 위한 다짐을 새롭게 하는 성경학교의 전야제라고 볼 수 있다.
여름행사가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는 한 해 동안의 교육활동의 틀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우리 교회학교들은 여름행사 때 배우는 찬양으로 일 년을 버티고, 이 때의 환경구성이 일 년을 간다. 또한 여름성경학교에서의 추억과 경험이 후반기 교육활동에 대한 기대를 심어주게 되고 그 며칠 사이에 다져진 학생들 사이의 관계, 학생들과 교사들과의 관계, 교사들과 교역자와의 관계가 향후 몇 년간의 교회학교의 자산이 된다. 그래서 여름행사는 교회학교의 일 년 예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교육의 핵심활동이다.
그런데 이렇게 소위 교회학교의 일 년 농사를 결정한다는 이 여름행사에 정작 필요한 것은 막연한 기대보다는 세심한 준비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약 한달 반의 시간동안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할까? 먼저 기도의 준비가 필요하다. 광고보다 효과가 큰 것이 기도이다. 교사 기도회, 학부모기도회를 여는 것은 물론 교인들을 대상으로 기도해주시고 관심을 가져주실 믿음의 부모를 모집하는 것이 좋다. 그분들에게 매주 기도편지를 발송하고, 일 대 일로 아이를 위해 기도하기, 결연 부서 방문하기, 성경학교 배지 달고 다니기 등 구체적인 활동을 제시한다. 또한 교회 전체가 관심을 갖도록 플랭카드를 6월 초에 걸어서 한 달 이상 게시하면서 여름행사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교사들은 각자 역할을 맡아서 자신의 분야를 준비한다. 무엇보다도 부모님이 관심을 갖고 자녀를 보낼 수 있도록 학부모와의 관계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예산과 인력이 투입되는 최대의 행사인 여름성경학교, 여기서 최대의 효과를 보기 위해 지금부터 준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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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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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주가 쓰시겠다 하라(막11장1~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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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참된 자기를 찾아서 길 떠나는 여행이라고 합니다. 인생의 길목에서 누구를 만나서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참된 나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인생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소중한 나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난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참된 나를 발견하고 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사랑받고 쓰임 받고 있다는 확신이 없어 소속감이 흔들리고 정체성이 혼란해지며 자존감이 무너지면서 모든 것이 불안해집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나의 삶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만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주님께 쓰임 받음으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으로써의 삶을 살아 나가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일주일 전 스가랴9장9절의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의 말씀대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 새끼일지라도 주님께서 쓰시니 고분고분 순종하며 그의 역할을 다해 냅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잎과 자신들의 옷을 깔고 ‘찬양하리로다. 호산나’를 외치며 주님의 입성을 환영합니다. 비록 초라하고 겸손한 모습이지만 임무를 완수하시기 위하여 구원의 주 만왕의 왕으로써 당당히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이틀 전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초대를 받아 꺼려하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함께 그의 집으로 갑니다. 음식을 대접 받고 있을 때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찾아옵니다. 마리아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을 위해 이날 자신의 값비싼 향유를 아끼지 않고 깨뜨립니다.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는 괴로운 심정에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을 아끼지 않고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봤을 때는 비록 약하고 보잘 것 없는 그들이지만 그들을 통해 주님의 일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 지방에 살던 여자로 일곱 귀신 들렸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치유 받아 예수님의 평생에 따라 다니며 물질로 후원하며 돌봐드렸습니다. 여러 여자 중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온 걸로 봐서 제일 연장자인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도 곁을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갔다가 부활을 가장 먼저 목도한 여자 중 한명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고쳐서 때로는 있는 모습 그대로 사용하십니다. 주님께 붙들리어 쓰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참된 나를 발견하며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 지키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마지막 시대에 주님 손에 붙들려서 존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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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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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탐구] 예수님의 제자 세리마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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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라는 이름은 '야훼의 선물'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가와 누가는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고 마태는 마태라고 기록했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제자인 마태의 본명입니다. 마태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의 이름으로 보입니다. 마태의 가족에 대해서 성경은 상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태는 당시 약간의 교육은 받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헬라어도 구사할 줄 알았습니다. 그가 기록한 마태복음에 화폐에 대한 빈번한 언급과 통계는 그가 수치에 아주 밝은 직업에 종사했음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막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쫓으라 하시니 일어나 쫓으니라.
눅 5:27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마태는 헤롯 안디바의 영토였던 가버나움 사람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은 나사렛에서 멀리 떨어진 갈릴리 지방의 한 고을입니다.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수많은 이적을 행하며 여러 메시지를 전파하신 곳도 가버나움입니다. 가버나움은 인구가 많이 밀집한 곳으로서, 다메섹과 동방으로부터 지중해까지 연결되어 있는 큰 무역 통로를 끼고 있었습니다. 가버나움 밖 해변 길가에는 세관이 있었습니다. 세리 마태는 이곳에서 예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대개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꽤 부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였을 때 많은 세리들이 참석한 것을 보면(참조, 막 2:14-15), 세리로서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듯합니다. 그 당시에 세리들은 부자였습니다. 세리 중에서도 상당한 위치에 있었던 마태는 부자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잔치를 베푼 것입니다.
마 9: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막 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세리마태는 육적으로는 부족할 것이 없는 그였지만 영적으로 갈급함은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용기 있는 행동은 세상의 현실에 안주하고 사는 우리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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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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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률상식] 제101회 총회 재판국의 현상을 진단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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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판국원들의 자질
총회 재판국의 행패는 한마디로 피력하면 헌법 책을 가방 속에 넣고 다니기는 하지만 한 번도 읽어보지도 않고 상황에 따라 주먹구구식에 의존하는 것 같아 보인다.
1) 재판할 서류도 없이 판결한 총회 재판국
총회 재판국은 하회 서기가 올려 보낸 서류만을 근거로 법률심으로 판결하는 최종심이다. 그런데 제101회 총회 재판국이 판결문까지 작성한 김제노회의 상소 건은 김제노회가 재판한 일도 없고 서기가 서류를 올려 보내지도 않았는데 무엇을 근거로 어떻게 재판을 하였는지 재판국원들의 자질이 의심스럽다. 권징 조례 제101조에 “상소가 제기되면 하회는 그 사건에 관한 기록 전부와 일체 서류를 상회에 올려 보낼 것이니 만일 올려 보내지 아니하면 상회는 하회를 책하고 이를 올려 보낼 때까지 하회의 결정을 정지하게 한다.”라고 엄히 규정하지 아니 하였는가?
이는 하회 서기가 서류를 교부하지 아니하면 총회 재판국은 재판할 서류가 없으므로 재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서류를 올려 보낼 때까지 하회 판결을 정지하게 하는 규정인데 김제노회는 재판도 하지 않았고 서기가 올려 보낼 서류도 없으므로 총회 재판국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상소장은 각하될 수밖에 없는 사건인데 엉터리 재판을 하여 판결문까지 작성을 하였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 비유컨대 쌀이 없는데 쌀밥을 지어 내는 요술쟁이라고 하면 제격일 것 같아 보인다.
2) 상비부장이 하회 회장에게 공문 하달은 범죄 행위
노회장에게 공문을 하달할 수 있는 자는 총회장 명의로 총회 서기만이 오직 가능하다. 그런데 총회의 일개 상비부장인 총회 재판국장의 명의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재판국장인”이라는 직인을 찍고 재판국장 윤○○ (인) 서기 배○○ (인)으로 수신자 김제노회장으로 하달한 것은 모종의 목적 달성을 위한 협박에 불과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전국의 각 노회장은 총회장의 명의로 총회 직인과 총회 서기가 날인하고 발송한 공문 외에는 시행할 필요도 없고 받을 필요도 없다. 오직 치리회 회장이 치리회 회장에게만 공문 발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총회장이 서기도 모르게 직인 등을 날인하여 발송한 공문서도 역시 무효이다. 총회의 직인 등릐 날인과 공문 하달은 오직 서기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3) 엉터리 판결문
총회 재판국의 판결은 재판국원들만 모여서 죄증 설명서의 각 항을 토의 없이 투표하여 각 항 모두가 무죄로 결정되면 기각 처리되고 1개 항이라도 유죄로 결정되면 토의 후 투표로 합의 판결하여 권징 조례 제99조 4항의 규정대로 ① 하회 판결을 취소한다. ② 하회 판결을 ○○으로 변경한다. ③ 하회로 갱심하게 한다. 등 3가지 중의 하나로 판결해야 한다. 그런데 본 건은 “1. 목사직을 면직하고 출교하라. 2. 김제노회가 순종치 않으면 1행대로 처결하고 김제노회의 총대권을 3년간 중지토록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런 무식하고 유치한 엉터리 판결문은 어느 법전에 근거한 것인가?
4) 금품 수수 의혹의 재판 과정
돈을 받았던 받지 않았던 관계없이 재판국원이 원고나 피고 또는 원고나 피고의 중재인에게 금품의 액수까지 정해주면서 교묘한 방법으로 “말하기 좋게 단 둘이만 만나서” 수표는 안 되고 현금으로 가져다주면서 죄를 최소한으로 낮추어 달라며 부탁하라고 말한 금품 수수 의혹의 사건은 차기 총회가 철저히 조사하여 해명해야 할 특수 범죄 행위에 다름 아니다.
3. 결론
본건은 노회가 재판국을 설치하려다가 고소장을 반려하였으니 원고는 총회에 소원장을 제출해야 함이 옳고 하회가 재판하지 아니한 사건은 상소장을 제출할 수가 없다. 다만 노회에 정당한 고소장을 접수하였으나 노회가 재판할 의사를 전혀 보이지 않거나 어떠한 이유로 고소장을 반려할 경우에는 부전지를 붙여서 총회에 원심재판을 요청할 수는 있다.
그러나 본건은 하회가 재판도 하지 아니한 사건을 총회 재판국이 상소장으로 받아 재판하여 엉터리 판결문까지 작성하였으니 원고가 제출한 고소장과는 앞뒤가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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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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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길을 잃었을 때(요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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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운전하여 멀리 가다보면 종종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전에 다니던 길은 없어지고 새 길이 뚫려 있기 때문입니다. 익숙한 길이 보이지 않아 당황하게 됩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 길로 가면 더 빠르게, 더 편하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앞에 열리는 새 길을 따라 가야 합니다. 새 길이 새 인생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처소를 말씀하시면서, 그 처소에 이르는 길에 관해 가르치셨습니다. 도마는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이르는 길이시오, 인생을 안전하게 살기 위해 따라 걸어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걸으면 방황하던 사람이 새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찰스 콜슨(Charles Colson, 1931~2012)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 닉슨 대통령의 특별 법률 고문으로 권력의 정점에서 부러운 것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1974년에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권력의 정점에서 비탈로 굴러 떨어졌고, 길을 잃었습니다. 자포자기했습니다. 힘들게 올라 쟁취했던 성공이 이젠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예수님이란 새 길을 찾았습니다. 그 길로 걷게 되자, 인생이 새로워졌습니다. 지금까지와는 정반대로 남을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동료 수감자들을 위해 기도했고, 그들의 빨래를 대신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던 동료 수감자들이 하나씩 감동을 받게 되었고, 출옥 후 그는 1976년에 <교도소선교회>를 조직하여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위로하는 사역을 계속하였습니다. 그 공로로 1993년에 종교계의 노벨상이라는 템플턴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는 정점에서 길을 잃었고 추락하였지만, 그는 새 길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가 템플턴상을 수상했을 때, 사람들은 “현재 미국의 가장 건강한 사상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저술가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전도자, 그리고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가장 따뜻한 이웃인 그가 새로운 이웃이 되어 우리 곁에 돌아왔다.”고 했답니다.
▲ 찰스 콜슨
그가 예수님이라는 길을 찾도록 도운 이들이 있었습니다. 헤트필더, 휴스, 퀴에, 이렇게 세 명의 상원의원이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평소에도 콜슨에게 복음 전했지만, 콜슨의 강한 자아는 복음을 거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콜슨이 투옥된 후에도 시간을 정하여 기도하였고, 자주 면회하여 위로했습니다. 특히 변호사였던 퀴에 의원은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형을 치를 수 있다는 법 조항을 발견하고 콜슨을 대신하여 형을 치르겠다고 법원에 청원을 합니다. 비록 청원은 거절되었지만, 콜슨의 마음을 녹였고, 콜슨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사랑을 생각하며 교도소에서 할 수 있는 사랑을 생각하던 끝에 동료 수감자들을 돕기 시작한 것입니다. 세 명의 의원들은 콜슨이 길을 찾도록 도운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참된 길이신 예수님께로 콜슨을 이끈 샛길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길을 잃었을 때 우리가 찾아야 할 가장 넓고 빠르고 편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길을 잃었을 때 예수님을 새 길로 삼아 새 인생을 살길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끄는 샛길 역할을 할 수 있길 원합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숲속으로 난 길을 생각하며 산책하기 좋은 아침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따라 산책하듯 걸어 천국에 이르고, 그 과정에서 멋진 인생을 살게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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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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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네가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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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질문 가운데 근원적인 세 가지가 있다. 그 질문은 그 때나 지금이 다르지 않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이 질문은 지금 우리의 존재 위치를 확인하시는 질문이다. “가인아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창4:10)” 이는 오늘 우리의 삶의 가치개념을 되돌아보게 하는 질문이다.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창16:8)” 이 물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관계개념을 되짚어보게 하시는 것이다. 이 질문들을 질서 개념의 측면에서 보면 위치질서, 역할질서, 관계질서라고 하겠다. 인간 생활은 이것이 근간이 되어 보다 나은 삶의 내용을 채워가게 된다. 그것이 행복이며 기쁨이며 축복이다.
오래 전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이 광풍처럼 전국을 휘몰아쳤다. 그 때 나는 작은 시골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 날, 새벽예배를 마치고 강단에 엎디어 울고 또 울었다. 한 사람이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질곡의 과정을 거친다.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의 대통령 당선은 소위 요즘 유행어가 된 ‘흙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도 대통령이 된다는 꿈의 실현으로써 모든 이들의 가슴에 희망의 불꽃이 되어 타올랐다. 그랬던 분이, 마지막 가진 자존심의 무너짐과 주변상황의 참담함을 더는 견뎌내지 못하고 큰 아픔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내가 개인적으로 정말 존경하고 사랑하는 장로님이 계셨다. 천만번을 돌이켜 봐도 장로님은 신앙적, 인격적, 도덕적 면면이 흠잡을 데 없는 지고한 삶을 살았던 분이다. 가히 혼신을 다해 자신을 가다듬으며 맑고 지고지순한 삶을 실천, 지향하며 사셨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자신의 뜻과는 다른 상황에 빠질 때가 있다. 그 분도 더 나은 아름다운 삶을 지향하다가 뜻하지 않게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존심이 만신장이가 되는 상황을 맞았다. 죽도록 고뇌하며 목사인 내 앞에서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 분을 품에 안고 함께 울고 또 울었다. 그처럼 맑고 깨끗한 그 인격과 신앙과 삶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밟으며 생체기를 내는 사람들로 인하여 그 분은 심히 괴로워했다. 너무도 깊은 혼돈 속에 고통 했다. 어느 날, 그 카오스현상을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스스로의 삶을 접고 말았다.
엊그제도 박근혜 전대통령이 법정에 선 모습을 보았다. 만감이 교차함은 비단 필자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잘잘못을 헤아리려는 마음은 없다. 옳고 그름을 평가할 역량이 필자에게는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세계중앙에 세워보겠다고 시작한 새누리당의 몰락과 한 국가를 이끌던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여 법정에 서 있는 모습이 전 세계로 전파를 타는 현실을 보면서, “대한민국아, 대한민국아, 너는 어디 있느냐?”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저 깊은 심중을 뚫고 아픈 탄식으로 터진다.
다시금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말씀이 묵상된다. “너는 어디 있느냐?”
사람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심연(深淵)에 담긴 배신과 분노가 커 스스로를 좌절하게 하는 아픔이 일면 종종 “왜 살아야 하는가?” 자문할 때가 있다. 그러나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는 하나님의 근원적인 질문이 묵상되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일어선다.
요즈음 나라 돌아가는 상황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걱정스러움이 있음에 누구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급변하는 상황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다. 신문은 신문대로, 방송은 방송대로 대한민국의 트랜드를 확실하게 가늠하고 있는지 자못 걱정스럽다. 소위 먹물은 먹물끼리 뒤엉키고,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증오의 욕지거리를 퍼붓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여과 없이 안방까지 전달되는 현실에서 우리의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고 자랄까? 잠이 오지 않는다.
그래도 새 정부가 시작된 작금의 상황은 희미하나마 희망의 빛이 보이기에 다시 또 마음을 추스르고 기다림의 미학을 품어 본다. 지나온 어느 정부의 시작인들 초기에 희망의 불빛이 보이지 않았던 정권이 있었던가마는...
‘나라가 왜 이 지경까지 왔을까?’ 묻다가도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교회를 생각하면서 흠칫 놀라게 된다. 나는 지금 전국의 도시와 농어촌, 그리고 산골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복음전도 사역을 하고 있다. 이런 시간 속에서도 늘 마음의 무거운 짐이 있는 것은 교회마다 사랑과 평화의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듣는 것이 갈등과 분쟁의 날선 소리요, 쟁쟁거리는 소리와 할퀴며 고함치는 요란함이다. ‘왜?’ 라고 물어보면 모두가 “누구 때문에” 라고 답한다. 그러나 정작 그 누구도 “나 때문에...”라고 대답하는 이가 없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역사의 어둠이며 혼돈이다.
누구를 탓하기 전에 ‘내가 잘못 판단했고 내가 잘못 선택했다’는 내 탓으로 돌리며 엎드려 회개하는 심령으로의 참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진정한 ‘성도’들의 회복으로부터 온 국민들의 심령 회복이 일어나길 간절히 바란다. 그것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들으시고 우리를 고치시도록 나아가자.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진행되고 있음이 분명하며 그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대내외적으로 질곡의 골짜기를 지날 때마다 우리는 너나없이 하나 되어 “아~ 대한민국”을 외치며 떨치고 나온 어제가 있었다. 한국교회 믿음의 선진들의 순교적 신앙을 오늘의 거울로 보면서 통감(通鑑)의 지혜로 내일을 희망한다. 그리고 오늘의 현실을 깊이 바라본다.
인간다운 삶은 One Another의 관계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마음이 One Another이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네가 기쁘면 나도 기쁜 것이 One Another이다. 나라가 있어야 너도 있고 나도 있음을 6월을 맞으면서 더욱 생각하게 된다.
나는,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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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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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해 봅시다] ‘덕분에’와 ‘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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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와 ‘ 때문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으나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낳게 해
우리말에 ‘덕분에’란 말과 ‘때문에’란 말이 있다. 이 말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언제나 긍정적인 태도를 반복적으로 선택하여 ‘경영의 신’으로 칭함을 받은 일본의 전설적인 기업가인 마쓰시다 고노쓰케에 관한 얘기이다. 그는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94세까지 살면서 수많은 성공신화를 이룩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승리의 비결을 한마디로 ‘덕분에’라고 고백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덕분에 어릴 때부터 힘든 일을 하면서 세상살이에 필요한 온갖 경험을 쌓았다”고 말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허약했던 덕분에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그는 “가난하여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던 덕분에 만나는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여기고 무엇이든 모르면 묻고 익혔습니다” 그랬다.
다른 사람 같으면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태어날 때부터 허약했기 때문에, 나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요 모양이 되었다고 한탄하며 주저앉을 상황에서 그는 ‘때문에’를 ‘덕분에’로 둔갑시켜 그걸 성공의 비결로 삼았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어 성경에 나오는 인물 한 분을 더 상고하고자 한다. 구약의 인물 요셉이다. 그는 범사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는 형들로 인해 애굽으로 노예의 신분으로 팔려가서 무척 많은 고생을 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도 했다. 그랬으나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그는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그때 가나안에 기근이 막심해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에 가게 되었다. 거기서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동생 요셉을 만나게 되었다. 형들은 크게 놀랐다. 두렵기까지 했다. 요셉의 말 한마디에 모두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요셉을 어떠했는가. 형들을 가까이 오게 하고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마시고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우리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이곳으로 보내셨나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십니다. 빨리 아버지를 뫼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그랬다.
그리고는 요셉이 형들과 입 맞추고 안고 울었다. 요셉,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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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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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부산기독교이야기 8] 부산에서의 에비슨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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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도착한 에비슨은 아내와 3아이를 데리고 곧장 서울로 가려했으나 베어드 집에서 마침 서울을 떠나 일본으로 가는 길에 부산에 들른 감리교 선교사 벙커(Bunker)를 만나게 되었다. 서울은 신임선교사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특히 폭서로 서울에 있는 선교사들도 피서지로 가는 형편인데 서울로 가기 어렵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마침 베어드 집에서 같이 있자고 하여 일단 부산에 당분간 체류하기로 했다. 사실 베어드 집에는 브라운 의사(Dr Hugh Brown) 부부도 자기들의 집이 완공될 때까지 머물고 있어 거주할 방이 없는 상태였다. 할 수 없이 베어드의 서재를 임시거처로 쓰게 되었다. 몇일 뒤에는 예고도 없이 서울에 있던 마펫(Samuel Austin Moffett)이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부산의 베어드 집으로 왔다. 베어드와 매코믹신학교 동문인 동시에 친구였던 그는 아직 그는 독신이었으므로 마펫은 침실이 없어 식당 창문 옆에 돗자리를 깔고 지내게 했다.
그런데 에비슨 부인은 부산에 도착한지 꼭 일주일이 되는 1893년 6월 23일, 4번째 아이 더글러스(Douglas, 1893-1952)를 출산했다. 그가 [1892년 7월 5일 출생한 베어드의 첫 딸 낸시 로즈(Nancy Rose)에 이어] 부산에서 출생한 두 번째 선교사 자녀였다. 부산에서 태어난 3번째 선교사 자녀는 1894년 10월 12일 출생한 베어드의 장남 존 아담스(John Adams)였다. 그런데 부산에서 출생한 더글러스는 후일 아버지처럼 토론토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1920년 내한하여 선천선교부(1920-23)를 거쳐 세브란스의전에서 가르치고 후에는 원장으로 봉직한다.
에비슨 부부가 아이를 출산한 이상 일정기간 부산에 머물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6주간 부산 베어드 집에 체류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부산지방을 둘러보았으나 언어불통으로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이 기간에 대한 기록으로는 에비슨이 영어로 쓴 회고록(Memoirs)이 있고, 또 1933년 1월호 「신동아」에 쓴 회고기가 있다. 또 윌리엄 베어드의 아들 리차드 베어드가 편집한 William M. Baird of Korea, a Profile에 보면 에비슨의 ‘초창기 한국생활’이 소개되어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런데 에비슨이 부산에 체류하는 동안 방문했던 가장 흥미로운 곳은 300년 전 임진왜란 당시 축조했던 성이었다고 한다. 잡초가 우거지고 성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고 썼는데, 아마도 좌천동 뒷산에 있었던 증산 왜성을 말하는 듯하다.
부산에 당분간 체제하게 되는 에비슨에게 베어드 부인은 언어공부를 시작하도록 충고하였고 자신의 어학 선생 고서방을 붙여 주었다. 그 고서방이 바로 고학윤(高學崙)이었다. 그가 후일 세브란스의 외과학 교수가 되는 고명우 박사의 부친인데 그는 영어를 전혀 몰랐다. 에비슨은 한국말을 전혀 몰랐다. 이런 가운데서 복잡한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으니 1890년대나 있을범한 일이었다. 이때의 일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그 6주 동안을 이용하여 나는 처음으로 조선어를 공부하게 되었다. 그 때 나에게
조선어를 가르쳐 준 첫 사람이 현재 세브란스 의전의 교수로 있는 고명우(高明宇) 씨의
부친이었다. 나의 첫 어학교사의 아들이 후에 나와 함께 한 학교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은 기이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그해 여름 곧 1893년 8월 6일 주일, 부산에서 첫 세례식이 있었다. 이 세례식은 한국인들에 대한 첫 세례가 아니라는 점에서 주목 받지 못했지만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세례식이었다. 그러나 부산지방에서 행해진 첫 세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날 베어드의 사랑채에서 진행된 예배에서 한국인들도 참석했지만 서울서 휴가 차 온 마펫은 베어드의 첫 딸 낸시 로즈(Nancy Rose)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베어드는 얼마 전에 태어난 에비슨 의사의 넷째 아들 더글러스에게 유아세례를 베풀었다. 낸시 로즈는 1892년 7월 5일 출생했는데, 첫 돐을 맞아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10개월 후인 1894년 5월 13일 뇌척수막염으로 사망했고 그도 복병산에 묻혔다. 참고로 부기하면 한국인에 대한 첫 세례식은 1894년 4월 22일 호주선교부가 얻은 3사람, 심상현, 이귀주, 이도념에 대한 세례였고, 부산에서 두 번째 세례식은 약 3개월 후인 7월 15일 베어드가 얻는 첫 개종자들에게 베푼 세례였다.
8월말까지 부산에 체류하던 에비슨 가족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 재물포를 거쳐 서울로 갔다. 우연하게도 그 배 안에서 고종 황제의 명으로 미국 시카고에서 열리는 세계박람회에 참석한 한국 사절단과 함께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알렌 의사를 만났다. 그래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서울로 행했고, 그때로부터 42년간 한국을 위해 봉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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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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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빅 피플(big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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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Svetlana Alexievich)가 최근 ‘2017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하기 위해서 방한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고 벨라루스에서 활동하는 그녀는 일명 ‘목소리 소설(Novels of Voices)’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장본인입니다. 여기서 “목소리”란 작가가 직접 인터뷰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의미합니다. 보통 작품 한 편을 집필하는데 200-500명을 인터뷰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탄생하는 소설이기 때문에 ‘소설 합창(chorus)’이라는 재미있는 별명이 붙어있기도 합니다.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닙니다. 몇 번씩이나 같은 사람을 찾아갈 때도 있고, 그렇게 해서 모인 자료를 정리하고 편집하는데 5-10년이 걸릴 때도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한국에는 노벨상 수상 직후에 『세컨드 핸드 타임』(김하은 옮김, 이야기가 있는 집)이라는 책이 번역·출간되었습니다. 부제(副題)가 “호모 소비에티쿠스(homo sovieticus)의 최후”입니다. 그렇습니다. 소련 공산주의의 쇠퇴와 몰락이 배경입니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 내부적으로는 ‘안티’가 월등히 많다고 합니다. “일부는 위대한 소련을 깎아내리고 그 더럽고 비참한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 보여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며 목소리를 높이고, 더러는 이건 문학이 아니라 기획취재라며 힐난한다.”(김하은, 659 p.) 하지만 이 책은 평단이나 작가의 말이 아니라, 실제로 역사의 현장을 살아낸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퇴직 노동자, 건축가, 작가, 의사, 평범한 여대생 등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가 그냥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게 나의 임무다.”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호모 소비에티쿠스’란 말은 ‘사회주의적 인간’이란 뜻입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옛사람 아담을 새로운 유형의 인간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또한 실제로 개조하려는 실험에 막대한 시간과 물질과 장비와 인력을 쏟았지만 결국은 역으로 자신들이 신봉했던 이념의 몰락이라는 결과를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국가는 역사 속에서 서민들을 이용하고 죽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 책에 나와 있는 작은 사람들은 역사의 영웅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스몰 피플(small people)’이란 말 대신 ‘빅 피플(big people)’이란 말을 쓰고 싶다.”(작가와의 인터뷰 중에서 인용) 그렇습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는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언급한 ‘빅 브라더’도 아니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1Q84』에서 풍자적으로 묘사한 ‘리틀 피플’도 아니요, 평범해 보이는 진정한 영웅들 곧 ‘빅 피플’이라는 알렉시예비치의 견해는 거대한 변화를 겪고 있는 작금의 우리에게 공감되는 바가 큽니다.
그런데 소개한 책 후반부에는 뜻밖에 이런 내용이 등장합니다. “난 독방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사면이 벽인 이곳에서 누가 날 도와주겠어요? 그런 곳에 있으면 더 이상 시간은 무의미해지고 뭔가 추상적인 개념이 되어버려요. 난 아주 큰 공허함을 느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도 모르게 내 속에서 소리가 터져나갔어요. ‘주님, 만약 계시다면 도와주세요! 날 버리지 마세요! 난 기적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어요. 주님은 주님을 구하는 자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으세요.”(625 p.)
단순한 개인들의 합만으로는 될 수 없고, 오직 주님 안에서만 그리될 수 있다는 고백처럼 들립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 그렇습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지극히 작은 자들이야말로 동시에 지극히 큰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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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