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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 양손잡이와 두 날개 민주주의
    피히(Pihi bird)라는 전설 속의 새가 있습니다. 이 새에게는 날개가 한쪽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참을 날아도 그저 같은 자리만 맴돌 수밖에 없는 비련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여기 반전이 있습니다. 수컷 피히는 오른쪽 날개만을, 암컷 피히는 왼쪽 날개만을 갖고 있는데 이 둘이 만나서 한 몸을 이루면, 다른 새들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고 실제로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어디로든 훨훨 날아갈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찌 새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치겠습니까? 인간도 혼자 살 수 없고, 함께 할 때 더 빨리 더 멀리 갈 수 있는 법입니다. 성경 또한 사람이 연합할 때 아름다울 뿐 아니라(시 133:1) 더욱 견고하고 강하다고(전 4:12)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탠포드(Stanford) 대학과 EUI(European University Institutes) 교수를 역임한 대표적인 민주주의 이론가 필립 슈미터(Phillippe Schmitter)는 2012년 “양손잡이 민주화(Ambidextrous democratization)”라는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한국의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양손잡이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17)에서 이 이론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민주주의의 보편적 원리, 규범, 가치에 대립되거나 그에 저항하는 조건들과 싸우면서 행위하는 진보적 민주파들을 ‘왼손잡이 민주파’라고 한다면, 한 나라의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배태된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면서 민주주의를 이해하거나 때로는 빠른 변화와 개혁에 저항하는 보수적 민주파들은 ‘오른손잡이 민주파’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변호와 발전은 이 둘이 공존하면서 양자가 변증법적으로 지양(止揚)해 나갈 때 가능할 텐데, 양손잡이 민주화란 바로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110p.) 탄핵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치러진 이른바 장미대선이라 불린 초유의 대통령 보궐선거가 끝났습니다. 누가 뭐랬건 결과가 어찌 되었건 한국 민주주의가 또 한 단계 성숙하고 발전했다고 봅니다. 다시 최장집 교수의 말을 빌자면, 우리 사회는 정치의 구체제(ancien régime)는 붕괴되었으나 권위주의적인 에토스를 많이 유지하고 있는 구사회(ancien société)는 여전히 크게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진보정권 10년, 보수정권 10년 운운하며 한 때는 금기시되었던 단어들을 아무런 거리낌이나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체가 벌써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진일보라 평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더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이번 선거를 계기로 대한민국 그리스도인의 신앙 또한 한 단계 더 성숙하고 발전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누가 되었건 이제 새롭게 선출된 대통령 또한 임기가 끝나면 사라지고 말 인생일 뿐입니다. 반면에 영원히 우리를 다스리고 통치하실 이는 주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또한 주님은 그를 믿는 백성들에게 결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주셨으며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은혜를 받자”라고 외치는 일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히 12:28) 이러한 믿음의 확신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통치자의 교체에 결코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또한 누가 집권자가 되었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우주 만물과 인간 역사와 우리의 양심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면서, 이제는 서로 간에 필요한 날개가 되어 훌쩍 도약하고 훨훨 비상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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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15
  • [교회학교를 살린다] “가정예배, 자녀가 교사다.”
    교회학교를 살리는 신앙교육의 기본은 가정이다. 기독교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가 신앙적 활동을 할 때 신앙이 전승된다. 기독교가정의 가장 효과적인 신앙 활동인 가정예배 속에서 부모는 제일 좋은 신앙의 교사가 되어 자녀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동시에 부모세대역시 자녀세대를 통해서 더욱 하나님을 알아가고 자녀세대의 신앙의 모습을 통해 많이 배우게 된다. 이제 5개월째 교회 안에서 가정예배 캠페인을 하다 보니 다양한 사례들이 들려온다. 부모가 피곤해서 한 주 쉬었으면 할 때면 어김없이 어린 자녀가 먼저 성경책을 가져오고 인형까지 데리고 와서 함께 예배드리자고 하여 반성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대학생 자녀와의 예배를 통해 평소에 못했던 진지한 대화를 나누어서 참 좋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결혼해서 타지에 사는 자녀들이 방문하여 삼대가 가정예배 드린 사진을 올린 가정도 있고, 고3딸과 함께 매주 예배드리는데 인증샷 찍는 시간이 예배시간보다 더 걸린다며 웃으시는 집사님의 모습도 생각이 난다. 30대가 된 미혼의 청년이 어린 시절 드렸던 가정예배를 추억하며 다시 가정에서 그때보다 훨씬 나이 드신 부모님과 함께 다시 귀엽고 사랑받는 자녀로 돌아가서 예배드린 사진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엄마가 아픕니다. 낫게 해주세요.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이라고 생애 처음으로 대표기도 한 네 살 꼬마의 기도도 감동이었다. 사춘기 자녀가 있는 우리 가정도 매번 아이들이 짧게 끝내자며 대충 때울 것 같이 예배를 시작하지만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손을 잡고 부모를 위해 의젓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면 정말 하나님이 이 아이들을 통해서 일하고 계시고, 좋은 예배자로 세워 가시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몇 주 전에는 예배 후 미션으로 세족식을 하였는데 제법 진지한 모습으로 자신의 발보다 훨씬 더 작아진 부모의 발을 열심히 닦아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가정예배 속에서 자녀세대들의 성숙한 모습을 볼 때 부모세대는 자녀세대가 마냥 어린아이가 아닌 신앙의 동반자이며 부모세대의 교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천진난만하게 찬양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유치부, 아동부 자녀들의 모습 속에서 순수한 신앙을 발견하고, 세상의 가치관에 혼란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청소년, 청년기의 자녀들을 바라보노라면 그들의 예배하는 모습 자체가 많은 가르침을 준다. 교회에서는 자녀세대와 부모세대가 분리되어 예배하다보니 서로의 예배하는 모습을 볼 기회가 별로 없지만 가정에서는 다르다. 어린 자녀일수록 더 민감하게 하나님을 느끼고 반응한다. 성경의 기적이야기에 순수하게 감동한다. 청소년, 청년 자녀라고 예배를 마냥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해하려고 나름 애를 쓰고 있다. 부모세대는 이러한 자녀들을 통해서 진정 하나님의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위해 계획하시고 일하시는 것을 바라보고 기대하고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부모로서 좀 더 좋은 어른, 좋은 신앙인이 되고 싶은 거룩한 자극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는 부모의 교사이다. 교회학교를 살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예배자로 살아가야 한다. 교회에서 주일에 한번 행해지는 세대 간 분리된 예배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가정에서 세대통합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서로가 그리스도안에서 한 지체 한 공동체임을 발견하는 행복한 경험이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행복한 경험이 우리 가족의 매일 매일의 예배자의 삶을 지탱하는 큰 힘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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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15
  • [교회법률상식] 총회 재판국은 헌법의 규정한바 법률심으로 재판해야
    장로회 합동 제98회 총회가 “총회 재판국(3심재판)운영 관련”의 건으로 “전남제일노회장 김효석 씨가 헌의한 총회 재판국 헌법 권징 조례 제9장 제94조 2항 규정에 의하여 증거조를 폐하고 법률심 시행의 건은 헌법대로 하기로 가결하다(제98회 총회 결의 및 요람 p.82).”라고 결의하였다. 그런데 제98회 총회의 결의 이후 제99-101회 총회 재판국은 헌법대로 재판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고 제98회 총회 결의 전과 다름없이 불법 재판을 하고 있다는 소식뿐이다. 1. 중차대한 불법 재판의 유형 ① 권징 조례 제94조 2항에 “상고심(세상 법원은 대법원, 교회는 총회 재판국을 말함)에는 증거조를 폐한다.”고 하였으니 대법원에서 상고인이나 피상고인이나 어떤 증인도 소환하지 않고 하회 법원에서 재판한 서류만을 가지고 재판한다. 그런데 신성한 총회 재판국은 헌법과 총회 결의를 짓밟고 원고, 피고, 하회의 재판국장, 재판국 서기, 노회장까지 소환하여 야단법석을 떤다. ② 권징 조례 제134조 2항에 “총회는 재판 사건을 직할 심리하거나 재판국에 위탁할 수 있고 재판국은 위탁 받은 사건만 심리 판결한다.”고 하였으니 총회 재판국은 상설 재판국으로서 총회가 위탁한 사건만 심리 판결할 수 있는 것이 현행 헌법인데 총회를 파회한 후에도 사사로이 제출하는 사건까지 총회 결의를 빙자하여 상위법인 헌법과 상충하는 상설 재판을 하고 있다. ③ 권징 조례 제142조에 “재판국 비용은 총회가 지불한다.”고 하였으니 총회 재판국은 총회가 지불하는 재판 비용으로만 재판을 해야 하는데 사사로이 제출하는 상소 건을 위헌적으로 접수하여 재판비용 4백만 원을 받아 재판을 해주고 심지어재판국장 명의로 해 노회장에게 지시 공문까지 하달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 ④ 제101회 총회 재판국은 k노회의 노회장 k목사가 노회에서 재판을 받은 사실이 없음에도 모 장로들이 k목사를 상대로 상소장을 제출하였는데 그 상소장을 접수하고 해 노회장을 3회나 소환하여 심리까지 하였다고 하니 재판 기록도 없는 상소장을 접수하여 재판을 진행하고 있는 총회 재판국원들이야 말로 재판관으로서의 수준미달이라 아니할 수 없다. 2. 총회 재판국의 법률심 절차 ① 하회 판결 후 10일 이내에 하회 서기에게 상소통지서 제출 여부(권징 조례 제96조). ② 상회 정기회 개회 익일 이내에 상회 서기에게 상소장 제출 여부(권징 조례 제97조 상). ③ 상회 정기회 개회 다음 날에 총회에 출석 여부(권징 조례 제97조 하). 만일 불출석에 관한 정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면 그 상소는 취하한 것으로 인정하고 하회 판결은 확정된다. ④ 만일 노회 서기가 하회 재판에 관한 일체의 서류를 상회개회 다음날까지 상회 서기에게 올려 보내지 아니하면 총회는 재판할 서류가 없으므로 재판을 진행할 수가 없어 하회를 책하고 하회의 재판 서류 일체를 올려 보낼 때까지 하회의 판결을 정지하게 한다(권징 조례 제101조). 총회 재판국은 상소인이 제출한 서류로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노회 서기가 제출한 서류로 재판하여야 하기 때문이다(권징 조례 제96조). 오직 상소인이 제출한 서류는 상소 건의 성립 여부를 확인하는 서류에 불과하다. 3. 합의 판결 재판국원들만 회집 개정하여 상소 이유 설명서에 기록한 각 조에 관하여 토론 없이 투표하여 각 조에 상소할 이유가 없고 또 하회 처리도 잘못됨이 없는 것으로 결과가 나오면 상소를 기각하고, 각조 중 1조 이상이 상소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결과가 나오면 ① 하회 판결을 취소하든지, ② 변경하든지, ③ 하회로 환송하여 갱심(更審)하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토의한 후 투표하여 종다수로 결정하고, 만일 변경이 결정될 경우에는 변경 내용을 결정하여 판결문을 작성한다(권징 조례99조 4항). 총회 재판국은 위의 3개항 즉 하회 판결 취소, 하회 판결 변경, 하회로 환송하여 갱심(更審)하게 하는 것 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판결할 수 없다. 그런데 총회 재판국의 현실은 공직 정지 1년, 총회 총대권 3년 정지, 노회장 및 서기 직무 정지, 당회장권 정지, 설교권을 제외한 목사 직무 정지, … 등의 엉터리 판결을 일삼고 있다. 4. 총회 보고 재판국은 합의 판결의 3가지 중 한 가지만 합의 판결하여 총회에 보고하면 총회는 ① 검사하여 채용하거나 ② 총회 재판국에 환부하거나 ③ 특별 재판국을 설치하여 판결 보고하게 한다(권징 조례 제14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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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15
  • [성경인물탐구] 예수님의 제자 세리마태(1)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 이란 뜻으로 본명은 레위였으나 예수를 좇은 후에 마태로 불렸습니다. 그는 직업이 세리로서 유대인들로부터 죄인으로 취급받으며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마태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세리였습니다. 예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매우 부유한 계층이었습니다. 이는 마태의 집에 예수께서 방문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풍요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불행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세리를 죄인 취급하여 함께 교제하지 않고 멸시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재물이 넉넉하여도 사람들에게 따돌림 당하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 세리가 멸시를 받았던 이유는 그들이 유다 정복국인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어 그 일부를 착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세리들은 도적이었고 매국노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리와 함께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고 마심을 인하여 예수를 비난하며 정죄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의원이 병자에게나 필요한 것과 같이 자신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가 가버나움에 있는 세관에 앉아 있을 때 예수께서는 '나를 쫓으라.'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때에 마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쫓았습니다. 마태가 앉아 있는 세관의 자리는 세상에서의 물질적 풍요를 보장해 주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하여 그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이는 베드로와 그 친구들이 고기잡이하던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은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께 부름을 받을 때 마태는 신적인 권위로 부르시는 주의 음성을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태는 예수께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진리가 있음을 깨달았기에 과감하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신 이유는 그의 영혼을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며 그를 복음 사역자로 훈련시켜 복음을 증거 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태는 이러한 주의 뜻을 이루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의 부르심에 순종으로 응답한 세리 마태는 예수를 위하여 자신의 집에 잔치를 베풀고 많은 죄인과 세리들을 초청하였습니다. 마태는 자신만이 예수를 만나 새 삶을 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멸시받는 친구들에게도 예수를 만나게 해줌으로써 구원의 은혜에 동참케 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다른 유대인들과는 달리 그들을 사랑하시므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과 교제함으로써 죄인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곳에 모인 죄인과 세리들은 예수를 믿어 회개함으로써 죄 사함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의인이라 칭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죄인과 함께 한다는 이유로 정죄함으로써 더욱 죄 가운데 빠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예수를 믿는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 칭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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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15
  • [은혜의 말씀] 스타트&스마트 (창12장1~9절)
    하나님을 모른 채 살아가던 약 4000여 년 전 하나님께서는 하란에 살고 있던 아브람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정든 고향을 떠나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75세의 아브람은 하나님을 잘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내와 조카 롯 그리고 함께 한 자들과 두렵고 낯선 땅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무법이 판을 치고 폭력이 만연한 때에 익숙하고 편안한 곳을 남겨둔 채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 길을 떠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에 대한 확신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람은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교제를 하면서 그분을 의지한 채 삶의 새로운 스타트를 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선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열국의 아버지란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구별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민족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가나안 땅을 향해 길 떠나는 아브라함처럼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갑니다. 벼랑 끝에 선 것과 같은 위기의식을 느끼며 답답한 마음 안고 보이지 않는 끝을 향해 어둠 속을 헤매이는 듯한 고통의 세월을 살아갑니다. 만 가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을 확신하며 당당히 앞을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번번이 쓰러지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또 다시 일어나 초심으로 돌아가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끝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이 과정 속에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돌아갈 진정한 본향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루하루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이 복 받은 자로써의 행복한 삶임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아브라함에게도 크나큰 시험이 닥쳐옵니다. 100세에 어렵게 얻은 귀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힘들게 주신 아들을 다시 달라고 하시니 가슴은 찢어질 듯 아프고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사라에게 아들을 약속 하셨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어 이삭 또한 책임져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결박한 이삭을 향해 칼을 드는 순간 다급해진 하나님께서는 두 번 연거푸 그의 이름을 불러 그를 제지 시킵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서 다윗 왕이 그리고 예수님이 탄생합니다. 아브라함 한 명으로 시작해 천하 모든 민족들을 향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진정 복의 근원이 됨으로써 스마트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우리가 불가능하다 생각할 그때 하나님께서는 된다고 하십니다. 그 사람에게 가장 적당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뒤돌아보지 말고 즉각 일어나야 합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과 날마다 교제하며 앞을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과의 즐거운 데이트였노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승리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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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15
  • [성서연구]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사무엘상 16장 1-13절)
    온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대통령 선거가 끝났습니다. 이번 선거는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 상황에서 이루어졌기에 그 심각성과 중요성이 여느 때보다 컸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선거였습니다. 아마 이번 선거에 임한 많은 국민들은 뽑을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선거가 마찬가지입니다만, 이번 후보들 역시 장점을 가졌는가 하면 단점들도 가지고 있다 보니 국민들 입장에서는 최고의 후보보다는 문제가 덜한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 아픔이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다보니 많은 이들이 “사람이 이렇게 없나?”하고 탄식을 했을 것입니다. 이런 탄식은 사무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여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고 하시면서 이새의 집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다”고만 하셨을 뿐, 그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새의 집에 도착한 사무엘은 우선 이새가 데려온 일곱 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곤 맏아들인 엘리압의 준수함에 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하시면서 엘리압은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새의 일곱 아들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쯤 되면 사무엘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우리 같으면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택한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의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들었는가 의심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이새의 집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달랐습니다. 그는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질문은 사무엘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틀림없이 이새의 아들들 중에 왕이 될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 자리에 이새의 아들들이 다 있는 게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착오가 하나님께 있는 게 아니라, 아들들을 모두 데려오지 않은 이새, 즉 사람 편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으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확실하다, 이게 사무엘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무엘의 믿음은 어떻게 확인되었습니까? 사무엘의 질문에 이새는 아직 막내가 남았다고 말했고, 다윗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했습니다. 왕이 될 재목이 말씀하신 대로 이새의 아들들 중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눈앞에 있는 일곱 명 중에는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 다윗이 분명히 있었던 것처럼, 대통령 선거의 후보자들, 그리고 심지어는 당선된 대통령까지도 국민들이 볼 때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대한민국을 위해 일하도록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우리는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고 물었던 사무엘처럼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인물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다윗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 다윗이 눈에 보일 수도 있고, 아직 눈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선거에 의해 보이지 않던 다윗이 나타날 수도 있고, 선거에도 불구하고 안 보인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다윗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을 보고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을 세우시는 하나님을 보고 안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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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15
  • [서임중 칼럼] 5월과 어머니, 그리고 교회
    5월이 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어머니다. 불러도 불러도 부르고 싶은 이름이 어머니다. 언제나 생각의 중심에 있는 이름이 어머니이지만 5월이 되면 더욱 어머니가 생각난다. 어릴 때 쌀밥 달라고 졸라대던 어린 것 품에 안고 종갓집 마당에서 쌀밥 한 그릇 얻어 들고 돌아와 명태 두 마리 구워 한 숟갈 한 숟갈 입에 떠 넣어 주시면서 그렇게 좋아하셨던 분이 어머니였다. 발에 종기가 나서 걸음을 걷지 못할 때 김치를 입에 빨아 종기에 대고 “엄마가 붙이는 모든 것은 명약이다.” 하며 입으로 후후 부시면서 다독거려 주시던 분도 어머니였다. 20리 길을 고무신 한번 못 신고 학교 다니는 것이 안쓰러워 학교 가기 싫어하는 어린 것 등에 없고 흥얼거리면서 학교까지 데려다 주셨던 분도 어머니였다. 아직은 설익은 풋풋한 사과를 먹고 배 아파 아랫목에 엎드려 울고 있을 때 “내 손이 약손이다. 엄마 손이 약손이다.” 하면서 배를 쓸어 문질러 주실 때 희한하게 아프지 않고 잠이 들게 하셨던 분도 어머니였다. 설날이 되면 이웃 부잣집 아이들은 때때옷 입고 세배 다닐 때 묵은 헌옷 입고 세배하는 것이 속상해 정월 초하룻날 들판으로 연 날리러 갔다가 돌아온 어린 것을 치마로 감싸 안고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듯 돌아서서 눈물짓던 분도 어머니였다. 목회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서 몸살로 누워 정신없이 잠들어 있던 어느 한밤중에 작은 기도소리에 눈을 떴을 때 어머니의 손이 내 머리에 얹혀 있었고 감긴 노안(老顔)에서는 눈물이 흠뻑 젖어 흐르고 있었다. 나이 들어 목사가 되었을 때 잠 못 자는 것이 안쓰럽게 보이시고, 소견 좁은 교인들에게 이리 저리 시달리는 것이 속상해 새벽까지 아들 머리맡에 앉아 기도하시면서 성경을 눈물로 적셨던 분도 어머니였다. 세상을 마무리하실 때 “교회의 어미 같은 늙은이들은 모두 목사의 어미야. 알아듣겠는가?”라고 마지막 말씀 남기시고 천국으로 가신 분도 어머니였다. 끝없이 베푸시는 어머니의 사랑, 퍼 올려도 퍼 올려도 멈추지 않는 샘물처럼 어머니 마음의 사랑은 그랬다. 철없기만 했던 어린 시절, 그저 투정부리고 어머니 속만 태웠던 날들이 생각나면 자꾸만 슬퍼지고 속상해진다. 목회를 시작하면서, 많은 성도들에게 어머니 같은 목사로 목양 해야지.... 그러면서 강산이 두 세 번 바뀌었고 이제는 목회 일선에서 은퇴를 하고 3년이 되었다. 그런데 왠지 요즈음 자꾸만 어머니가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늦은 밤, 서재에 앉아 묵상하다가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어머니를 불러보는 시간은 어린아이가 된다. 5월이면 불러보고 싶은 이름, “엄마. 엄마아...” 칠순을 바라보는 요즈음, 왜 자꾸만 눈물이 나는지 모르지만 “엄마”라고 부르다가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울어버리고 마는 어린아이가 되는 목사의 가슴에 오늘도 강물이 흐른다. 지금도 농어촌 산골 개척 교회의 초청을 받고 부흥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언제부터인가 목사의 가슴이 자꾸만 아픔으로 깊어지는 것 가운데 하나가 어머니 같은 교회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지친 영혼들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품어주는 교회, 때로는 속상할 일들이 많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어루만져 주시는 어머니 손길이 멈추어지지 않는 교회, 힘들고 외롭고 아플 때 그냥 한걸음으로 달려와 제단 앞에 엎드려 흐느껴 울 때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어루만져 주심을 경험 할 수 있는 어머니 품 같은 교회가 그리워진다. 우리는 교회 생활을 통해 감동과 기쁨과 희망의 노래만 부르지 않는다. 때로는 많은 상처를 입기도 하고 잘못된 관행을 보고 느낀다. 화가 날 때도 있고 교회를 떠나고 싶은 것을 볼 때도 느낄 때도 있다. 그만큼 오늘날 교회는 황량한 사막 같고 기댈 곳 없는 벌판처럼 느껴지는 허전함과 갈등이 깊어지는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경험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참 모습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겸손하게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초대 교회에 유명한 교부 중 한 사람인 키프리안(Cyprian)은 “교회를 당신의 어머니로 가지지 않는 한 하나님을 당신의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라고 했다. 이 말은 교회의 본질과 능력을 잘 표현한 말이다. 즉 성도들은 교회를 어머니 품으로 이해하고 교회는 성도들을 어머니처럼 품을 수 있는 양면성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다. 그렇다. 우리가 교회를 어머니라고 생각할 때 그 어머니 품에서 희로애락을 경험하면서 성숙해 가는 것이고, 교회 지도자들 또한 모든 것을 수용하고 품어 줄 수 있는 교회로 자리매김을 하도록 힘쓸 수 있는 것이다. 이 모습이 우리 어머니 된 교회의 모습이다. 모순과 상처가 없어야 하는 곳이 교회라고 생각되지만 교회 안에 있는 모순과 상처와 아픔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철없는 아이를 품어 안은 모성애를 갖게 될 것이고, 이러할 때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온갖 아픔을 안는 우리를 안아주시는 어머니의 사랑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병든 자를 어루만지시며 가난한 자를 돌보시며 죄인들의 손을 잡아 생명 주셨던 예수님의 손을 경험 할 수 있는 성숙한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오늘도 아내와 함께 전국 방방곡곡의 크고 작은 모든 교회를 나의 교구로 생각하면서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내와 번갈아 운전을 하면서 여전히 작은 교회를 향한다. 그리고 어느 교회 강단에 엎드릴지라도 강단을 적시는 눈물의 기도 한마디가 있다 “한국교회가 초대교회로 돌아가 십자가 보혈과 능력과 사랑으로 충만하여 어머니 마음 같은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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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15
  • [함께 생각해 봅시다] 무엇이 다른가?(3)
    기독교와 천주교, 너무도 달라 중보에 관한 견해까지 달라 (5)기독교와 천주교는 십계명이 다르다. 그들의 서적을 보라. 성경에 보면 제2계명은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계명인데 천주교의 십계명에는 우상숭배에 관한 이 계명이 없다. 3계명을 2계명으로, 4계명을 3계명으로 옮기고 이런 식으로 하여 마지막엔 열 번째 계명을 가지고 9계명과 마지막 계명으로 나눠놓고 있다. 그들이 제2계명을 삭제한 이유가 뭘까. 이 계명을 그대로 두고는 그들이 마리아 숭배를 비롯해 각종 우상숭배를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크리스찬다이제스트 표지 사진을 보니 천주교 성당 안에 불상이 놓였고 신부인지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그가 들고 있는 묵주를 보니 한쪽 끝에는 십자가가 달려있고 다른 한쪽 끝에는 불상이 대롱거리고 있지 않은가. 제2계명을 그대로 두고서야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이같이 기독교와 천주교는 십계명이 다르다. (6)기독교와 천주교는 성찬에 관한 견해가 다르다. 기독교에서는 떡과 잔(포도즙)은 예수의 살과 피의 상징이라고 보는데 천주교에서는 집례자가 떡과 잔을 나눠주는 순간 떡은 예수의 살로 변하고 잔은 예수의 피로 변한다고 믿고 있다. 그 때문에 이 주장을 화체설이라고 한다. 몇 해 전 교황 프란치스코가 내한하여 명동성당에서 성찬식을 집례하면서 떡과 잔을 나눠주기 전에 기도하기를 “이 떡과 즙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하게 하소서”이렇게 기도했다. 그 시간에 필자가 TV를 통해 직접 봤다. 이같이 기독교와 천주교는 성찬에 관한 견해도 다르다. (7) 기독교와 천주교는 중보에 관한 견해가 다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라고 믿는다.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지 않았는가. 딤전 2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이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천주교에서는 예수님만 아니라 마리아를 중보라고 하고 마리아를 예수님보다도 더 나은 중보라고 믿고 있다(1917년 ‘은총의 중보’라고 칭하기로 했다). 그들은 마리아를 성모라고 칭하고 그에게 기도한다. “마리아여 우리를 위하여 천주께 기도해 주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우리의 기도가 마리아를 통해 천부님께 전달되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이같이 중보에 관한 견해도 기독교와 천주교는 다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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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15
  • [이상규 교수의 부산기독교이야기 6] 베어드(W. M. Baird)의 눈에 비친 부산
    부산에 온 첫 북장로교 선교사는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1862-1931)였다. 1888년 매코믹신학교를 졸업하고 1890년 6월 선교사로 임명된 그는 1890년 11월 18일 애니 아담스(Annie L. Adams, 1864-1916)와 결혼했다. 결혼 한 달 후인 12월 8일 베어드 부부는 태평양을 항해하는 우편선 더 차이나(The China)호로 호놀룰루,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고베에 도착했고, 여기서 오와리 마루(Owari Maru)호로 1월 25일 고배를 출발하여 나가사키를 지나 1891년 1월 29일 부산항으로 입국했다. 겨울비가 내리는 음산한 날이었다. 이날 부산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겨울이어서 모든 것이 황량하게 보였다. 언덕 넘어에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다른 인종처럼 보였다. 소리치는 부두노동자들은 마치 우리를 조각 조각 찢어버리려고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이곳의 작은 집들은 짚단 더미처럼 보였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동일하게 지으시고’(시33:15)라는 말과 같이 외면은 차갑게 느껴졌지만 후에 안 일이지난 이면에는 인정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 때는 다정한 표정으로 우리를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베어드가 부산을 거쳐 제물포에 도착한 날은 2월 1일 주일저녁이었는데 마중 나온 마펫(S. A. Moffett)의 안내로 서울에 도착한 날은 2월 2일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매코믹 신학교 동창인 미혼 선교사 마펫 집에 체류하면서 한국생활을 시작했다. 베어드는 서울 도착 다음 날부터(2.3-7) 모인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연례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기 개설한 서울 선교부(Seoul Station)에 이어 조선의 다른 두 곳, 곧 평양과 부산지부를 개척하기로 하고 평양에는 마펫을, 부산에는 베어드를 파송하기로 결의했다. 그래서 베어드는 공식적으로 부산지부 개척자로 임명된 것이다. 그래서 베어드는 부산 선교부지 확보를 위해 언더우드와 한국인 어학 선생 이씨(Mr Yi)와 함께 부산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날이 1891년 2월 25일이었다. 이들은 부산에 2주간 체류하며 선교부지를 확보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상경하였다. 부산지부 개척이 지체되던 중 그해 9월 주한미국영사관 관리(Mr Augustine Heard)의 도움으로 9월 24일 영선현의 두 필지 땅을 매입하게 되는데, 이곳이 현재의 영주동 코모도 호텔과 그 주변이었다. 베어드는 1891년 9월 초 부산으로 이주하였고, 매입한 부지에 선교관 건축을 시작했는데, 1892년 1월 13일에는 지붕을 얹는 작업을, 2월 5일에는 선교관 지붕에 기와를 얹었고, 4월 15일에는 아직 완성되지 못한 집으로 베어드 부부가 이사했다. 선교관이 완성된 때는 그해 5월 말 혹은 6월 초였다. 이 건물이 세관건물에 이어 부산에 세워진 두 번째 서양식 건물이었다. 이 집이 부산을 거쳐 가는 모든 선교사들의 임시 거주지 역할을 했다. 약 한달 후인 7월 5일 베어드의 첫 아기 낸시 로즈(Nancy Rose)가 태어났으나 2년 후인 1894년 5월 13일 뇌척수막염으로 사망하여 복병산(伏兵山)에 묻혔다. 29세의 나이로 내한한 그는 33세가 되는 1895년까지 만4년 간 부산에서 일하고 대구지부로 이동하였고, 후에는 서울지부를 거쳐 평양으로 이거하게 되는데, 부산에 대한 그의 첫 인상은 흥미로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는, 부산에는 일본인 거주자가 많아 왜색(倭色) 짙은 도시로 인식했는데, 부산항에서 처음 보는 부산과 부산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언덕은 높고 황량하게 보인다. 일군의 사람들이 언덕을 넘어 소가 다니는 길로 걸어가는 것이 보이는데, 모두 흰옷을 입고 있다. 유령같이 보이기도 하고, 밤에 입는 옷을 입고 낮에 퍼레이드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당시 부산에는 항구쪽에 일본인 5000명이 사는 식민지라는 말이 있었다. 해안을 따라 3마일 쭘 가면 옛 성으로 쌓인 부산(부산진)이 나온다. 내가 도착했을 당시 외국인의 입장이 허락되었으나 내가 도착하기 몇 달 전에는 한 중국인이 못 들어 오게 면전에서 성문을 닫아버렸다는 사실은 후에 듣게 되었다. 조선은 은둔국에서 이제 막 깨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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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17-04-28
  • [목회자 칼럼]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2017년 우리의 4월은 사연이 몹시도 많다. <한반도 전쟁위기설>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언론에서도 심심찮게 다루어지고 있다. 심지어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아베수상의 행정명령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를 상정하여 한국에 체류 중인 일본 국민들을 안전하게 귀국시키는 계획과, 한반도에서 밀려들 난민 숫자를 어느 정도 규모까지 수용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토론하고 대비한다고 하니 우리 입장에서는 참으로 씁쓸하기가 그지없다. 마치 한반도에서는 틀림없이 전쟁이 일어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이고 전쟁이 일어난다면 한반도의 한국인들이 어쩔 수 없이 겪게 될 고통과 참상이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전혀 ‘남의 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구박하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처럼 이웃 일본의 언행과 처신은 정말 가관이요 갈수록 태산이다. 그러면 또 이웃나라 중국은 어떤가? 「한국은 중국 영토의 일부였다」고 미중(美中) 정상 회담 때 중국 시진핑이 역사 강의 하듯이 말하였다고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폭로(?)하였다. 이 발언의 진위를 놓고 한국 미국 중국 사이에 미묘한 갈등까지 일어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중국이 우리나라를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해프닝(사건)이다. 북한으로부터의 <불의의 미사일 기습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우리 땅에 방어태세(샤드설치)를 갖추는 것임에도 중국은 온갖 비난을 가해오면서 우리나라와의 인적 물적 교류를 전면 중단하는 가혹한 행동을 하고 있다. 스스로를 세계 대국이라고 주장하면서 지금 대한민국을 향하여 취하고 있는 행동은 소국(小國)의 태도라 아니할 수 없다. 중국이 정말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행복을 바란다면 <북한의 핵무장>을 단호히 막아야 한다. 「핵(核)이 없는 한반도」는 축복이요 아시아와 세계평화의 ‘상징’이 될 수 있다. 북한은 어느 누구의 충고나 경고도 듣지 않지만 중국의 경고는 듣지 않을 수 없다. 여러 가지 상황과 이유 때문에 이 점은 확실하다.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일체의 원유를 공급받는다. 그것도 국제싯가에 비하면 월등히 저렴한 가격으로! 그러므로 중국이 한 달만 <원유공급>을 중단해도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중국은 북한을 향해 꾸중하는 시늉만 낼 뿐 국제적으로 북한의 핵 문제를 다루는 근 20년 동안 제대로 심각성을 갖고 책임 있게 북한을 경고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결국 북한에게 <시간만 벌도록>해 준 것이다. 그러니 지난 20여 년 동안 북한은 ‘회담’이라는 장막 뒤에 숨어서 끊임없이 <핵무기 개발>을 진행한 것이다. 그 결과로 지금은 정말 우리 대한민국으로서는 ‘생존의 문제’가 위협을 받는 상태에 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내부를 들여다보자. “북(北)이 주적(主敵)이냐 아니냐?” 문제를 놓고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주(主)字 하나를 가지고 말장난을 하는 사람이 대통령 후보라니 정말 서글프다. 155마일, 서해 백령도에서 동해 간성에 이르기까지 휴전선에는 우리 군대가 집중포진을 하고 있는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북쪽 아닌가! 동해 서해 저 바다 위의 해군과 공군기들은 어디를 향해 철통경비를 하고 있는가? 북쪽 아닌가! 그렇다면 주적은 당연히 북한이다. 다만 북한의 일반 국민들이사 당연히 우리가 품어야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인권과 자유>를 회복시켜 주어야 할 우리 동족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북한 동포들을 70년 이상 비참하게 압제하고 있는 북쪽의 공산독재권력과 그 체제는 분명히 우리의 주적이다. 참으로 답답하고 슬픈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노래할 수 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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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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