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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 반드시 알아야 할 한 가지 (신명기 8장 1-6절)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에 광야에서 사십 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사십 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게 된 이유는 민수기 13-14장에 기록된 것처럼 가나안을 정탐한 후에 그들이 보인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십 년은 불신앙에 대한 형벌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십 년을 단순한 형벌의 기간으로만 보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한 것을 배우는 연단의 기회가 되게 하셨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에게 소중한 교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광야에서 무엇을 배웠을까요? 그들이 배워야 했던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3절) 하나님께서는 그 한 가지를 가르치는 데 사십 년을 사용하셨습니다. 단 한 가지를 배우는 데 왜 그토록 긴 세월이 필요했을까요? 영어 단어나 수학 공식처럼 금방 배울 수는 없었을까요? 그렇습니다. 단순한 지식은 금방 배울 수 있지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우는 데는 실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어리석어 영적 진리를 배우는 데 너무도 더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특별한 방식을 사용하셨는데, 환경이 좋은 곳이 아닌, 광야라는 매우 힘든 환경을 사용하셨습니다. 3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때로 그들을 낮추셨고, 때로는 주리게 하셨습니다. 영적 진리들은 온실 같은 환경이 아닌, 힘든 곳에서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수많은 반복학습을 실시하셨습니다. 많은 반복학습을 통해서 조금씩, 그리고 더 풍성하고 확실하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 이스라엘은 어떤 반복학습을 했습니까? 우선 애굽에서 나오는 과정이 그러했습니다. 노예로 살던 그들이 바로왕의 세력을 극복하고 출애굽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열 가지 재앙이 임했을 때, 그 불가능한 일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아! 하나님은 하실 수 있구나! 그래, 역시 하나님뿐이야.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라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후 홍해도 위대한 학습 현장이었습니다. 앞은 망망한 바다요, 뒤는 추격해 오는 애굽 군대요, 좌우는 까마득한 사막이었습니다. 생존 가능성은 전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다 가운데로 길을 내셨을 때, 그들은 역시 하나님뿐임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수르 광야에서 사흘을 헤매도 마실 물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마라의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셨고, 엘림의 오아시스에서 쉬게 하셨습니다. 그 후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을 때도 하나님뿐임을 배웠습니다. 모든 음식은 바다와 땅에서, 즉 아래서 얻는 줄 알았는데, 하늘에서 내리는 음식 만나를 먹게 되었을 때 역시 하나님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전쟁 경험이 전혀 없던 이스라엘이 광야의 강적 아말렉과 맞서 싸우게 되었을 때도 하나님의 능력을 실감했을 것입니다. 이런 반복 경험들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 희망이 없음을 알게 되었고, 자신들이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뿐이요,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 사는 것뿐임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힘드십니까? 하나님께서 낮추시고, 주리게 하시는 것처럼 힘들게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귀중한 것을 가르치시려는 시간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의지하던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자요,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사는 길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마음 깊은 곳에 <내겐 하나님뿐이야!>라는 확신이 생긴다면,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중요한 것을 배운 우등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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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29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사드 갈등, 이해 안 된다
    사드 한국 배치를 반대하는 것은 우린 당하기만 하자는 말과 같아 나라가 튼튼히 서는데는 경제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경제가 첫째는 아니다. 안보가 첫째이다. 경제는 무너지면 다시 일으키면 되지만 안보가 무너지면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나라까지 없어진다. 그러기에 안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사드(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는 문자 그대로 국가 안보를 위한 방어조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사드 배치가 결정되자 온 나라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혼란스럽다. 버스 한대보다 작은 레이더와 요격미사일을 배치하고 인력 100여 명이 오는데 일각에서는 무슨 괴물이나 출현하듯이 법석거리고 있다. 사드가 건강상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사드참외’ 등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 한반도의 상황을 보면 사드배치는 불가피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사드 한두 대로서 북한의 엄청난 수의 미사일을 어느 정도 막아낼수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북한의 위협이 날로 증대되는 상황 속에서 사드 배치는 불가피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모두 익히 알다시피 평화유지는 강력한 국방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필요에 의하여 사드를 배치하려 하는데 그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는커녕 국론이 분열되고 온 나라가 시끄러운 가운데 시일만 두달 넘게 지나고 있다. 사드는 전쟁을 위한 공격무기가 아니라 나라의 안보를 위한 방어무기이다.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한반도의 상황을 바라볼 때에 미국이 한국에 사드를 배치하는 것은 환영해야할 일이다. 북한이 국제사회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5차례 핵실험을 통해 살상무기를 개발하고 미사일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방어에 나서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볼 때에 사드 배치는 온 국민이 환영해야하고 여야가 합심하여 지원해야 마땅한데 여기에 반대세력이 있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 생각해보라. 사드는 북한으로부터 날아오는 미사일을 요격하는 무기인데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것은 우리는 당하고만 있자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일각에서는 사드 배치는 한국방어가 목적이 아니라 주한미군 방어용이라는 말을 한다. 말이 되는 소리인가. 날아오는 미사일을 요격하면 주한미군의 피해만 막아주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이같은 말은 종북반미인사들이 퍼뜨리는 하나의 유언비어이고 괴담이다. 우리는 비용을 부담하면서 한국에 사드를 배치해주는 혈맹 미국에 고맙게 생각해야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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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29
  • [목회자칼럼] 안보 무임승차 심리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주님의 뜻에 무지한 사람은 육신에 머무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육신에 머무르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욕심에 이끌려 살아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지배받고 있습니다. 육신에 머무르는 자는 육체의 소욕의 결과대로 살아갑니다. 즉 성적 범죄로 음행과 호색을 하며, 종교적 죄악으로 우상 숭배와 술수며 대인 관계의 죄악으로 시기와 분 냄, 투기와 원수 맺는 것을 일삼게 됩니다. 주님의 뜻에 무지한 자는 세상에 속한 것들에 가치를 두면서 살아갑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따르는 자는 욕심에 미혹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세상과 벗을 삼고 욕망에 이끌려 살아갑니다(참조 약 4:4). 하만이 자신을 위하여 속이고 거짓말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하다가 도리어 자신이 올무에 걸려 죽은 것같이 세상을 사랑하면 죄를 범하게 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또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사 47:8)하며 교만합니다. 그리고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빌 3:19)라는 말씀과 같이 땅의 일만 생각합니다. 주의 뜻에 무지한 사람은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육신의 일만을 도모하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그들은 인간의 부패한 본성에 의해 생각과 행위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더럽고 추악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지속적으로 육신에 머무르며 세상에 속한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자연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리석은 악행도 서슴없이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모든 인간들에게는 각기 나름대로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소원에 따라 사람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즉 거룩한 소원을 가진 사람은 거룩하게 되고 좋지 못한 소원을 가진 사람은 그 소원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소원이 크면 큰 사람이 되고 소원이 작으면 작은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도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그의 공생애기간 동안 늘 함께하였습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있었으므로 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병자를 치료하시는 모습을 보았으며, 거센 풍랑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의 능력도 보았습니다. 또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과 수많은 기적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세속적인 정치적으로 높게 되는 소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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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08
  • [성경인물탐구] 세속적 영광에 열망하는 야고보 (5)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주님의 뜻에 무지한 사람은 육신에 머무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육신에 머무르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욕심에 이끌려 살아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지배받고 있습니다. 육신에 머무르는 자는 육체의 소욕의 결과대로 살아갑니다. 즉 성적 범죄로 음행과 호색을 하며, 종교적 죄악으로 우상 숭배와 술수며 대인 관계의 죄악으로 시기와 분 냄, 투기와 원수 맺는 것을 일삼게 됩니다. 주님의 뜻에 무지한 자는 세상에 속한 것들에 가치를 두면서 살아갑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따르는 자는 욕심에 미혹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세상과 벗을 삼고 욕망에 이끌려 살아갑니다(참조 약 4:4). 하만이 자신을 위하여 속이고 거짓말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하다가 도리어 자신이 올무에 걸려 죽은 것같이 세상을 사랑하면 죄를 범하게 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또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사 47:8)하며 교만합니다. 그리고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빌 3:19)라는 말씀과 같이 땅의 일만 생각합니다. 주의 뜻에 무지한 사람은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육신의 일만을 도모하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그들은 인간의 부패한 본성에 의해 생각과 행위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더럽고 추악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지속적으로 육신에 머무르며 세상에 속한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자연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리석은 악행도 서슴없이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모든 인간들에게는 각기 나름대로의 소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소원에 따라 사람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즉 거룩한 소원을 가진 사람은 거룩하게 되고 좋지 못한 소원을 가진 사람은 그 소원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소원이 크면 큰 사람이 되고 소원이 작으면 작은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도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그의 공생애기간 동안 늘 함께하였습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있었으므로 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병자를 치료하시는 모습을 보았으며, 거센 풍랑도 잔잔케 하시는 주님의 능력도 보았습니다. 또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과 수많은 기적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세속적인 정치적으로 높게 되는 소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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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08
  • [교회법률상식] 헌법개정위원회의 개정안 검토할 가치도 없어 (2)
    헌법 개정에 대한 연구 흔적 전혀 보이지 않아개정초안대로 개정된다면 더 잘못된 몹쓸 헌법으로 전락 2. 잘못된 개정 초안 전면적인 검토보다는 지면상 잘못된 초안 내용 중에 몇 곳만 간략하게 지적해 본다. (1) 정치 제3장 제2조 3항과 동 제3조 (2)항 ③ 등의 “시무연한은 만 70세(만 71세 생일 전날)”이라는 개정안에 대하여 헌법개정위원회는 괄호 밖의 “만 70세”와 괄호 안의 “만 71세 생일 전날”을 같은 수인 만 70세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즉 “만 70세”에 대하여 괄호 안에 “만 71세 생일 전날”이라고 설명을 붙인 것으로 보이는데 “만 70세”와 “만 71세 생일 전날”은 다 같이 만 70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만 70세”는 글자 그대로 만 70세이고, 괄호 안에 설명해 놓은 “만 71세 생일 전날”은 만 70세가 아닌 만 71세로서 괄호 밖의 숫자와 설명을 붙인 괄호 안의 숫자는 1년의 시차가 있다. “만 70세”는 71번째 생일 전날 하루뿐임을 의미하고, “만 71세 생일 전날”은 72번째 생일 전날로서 만 71세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헌법개정위원회의 개정안은 “시무 연한은 만 70세(만 71세 생일 전날)”이라고 했으니 언어도단이 아닌가? 그 이유인즉 시무 연한이 만 70세까지라고 해놓고 또 괄호 안에서는 만 71세까지라는 설명을 붙여 놓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출생하면 첫 번째 생일은 출생한 날을 의미하고 만 1세는 두 번째 생일인 첫돌 전날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출생일부터 365일째 되는 날 하루만을 만 1세라고 하기 때문이다(교회법률상식 pp.220-226 참조). 그러므로 만 70세는 71번째 생일 전날을 의미하고 헌법개정위원회가 괄호 안에 설명을 붙인 “만 71세 생일 전날”이란 72번째 생일 전날인 만 71세를 의미한다. 따라서 헌법개정위원회의 개정안은 시무 정년이 만 70세인지 만71세인지 명확성이 없어 실용성이 없고 혼란만 주는 개정안이라는 말이다. (2) 정치 제4장 제3조 7항의 “본 교단 교리에 위반된 동성애자의 세례와 주례와 또 다른 직무를 거절할 수 있고 목사의 권위로 교회에서 추방할 수 있다(이단에 속한 자도 이에 준한다)”에 대하여 이와 같은 특정 단체와 관련한 내용은 헌법 조문으로는 부적절하고 오히려 상대방에 자극을 주거나 시비 거리의 빌미를 주는 잘못된 개정안으로 각 당회의 재량에 맡길 사안일 뿐이다. (3) 정치 제4장 제4조의 “목사의 칭호”를 “목사의 구분”으로 개정초안하면서 그 이유를 “목사의 칭호는 1조에 있음. 4조는 목사의 구분을 의미함”이라고 함에 대하여 헌법개정위원회가 어떻게 교회 정치 “제1조 목사의 의의”를 “목사의 칭호”로 이해하고 “제4조 목사의 칭호”를 목사의 구분, 즉 목사의 신분적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목사는 칭호가 있을 뿐 목사의 신분상 구별은 없다. 정치 제4장 제1조의 규정과 같이 모든 목사는 구별 없이 목자요,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역자요 사신이요, 복음의 사신이요, 교회의 사자요, 전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오묘한 도를 맡은 청지기들이다. 그런데 헌법개정위원회는 목사의 의의를 목사의 칭호라고 치부하고 목사의 칭호를 목사의 신분으로 구분하는 헌법 개정안을 내 놓았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고 헌법개정위원회의 적정성에 대하여는 한마디로 수준 미달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3. 결론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헌법은 헌법을 개정할 때마다 더 잘못된 헌법으로 전락되어 왔다. 그런데도 치리회(당회, 노회, 총회)의 행정과 재판이 진행되어 온 것을 생각하면 신기하기가 그지없다. 최근의 헌법 개정 결과로 장로와 집사는 만 70가 지나면 그 직은 만료되고 세례 교인으로 돌아간다(정치 제13장 제4조). 그러면서 또 원로 장로, 은퇴 장로가 존재하는 모순이나, 임시 목사를 시무 목사로 개정한 결과로 시무(임시)목사는 “회원권을 구비하고” 위임 목사는 “그 밖의 목사에 속하여 언권 회원이 되며 총대권은 없다(정치 제10장 제3조)”는 사실을 총회는 아는가 모르는가? 제101회 총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촉박한 현실에 제101회 총회가 제100회 총회 헌법개정위원회의 개정안을 받아 개정한다면 사상 최악의 헌법 개정이 될 것 같아 보인다. 어떤 고명하신 목사님이 필자와 전화 대화를 통하여 “합동 총회 헌법개정위원회의 헌법 개정에 대하여 가갸거겨도 모르는 사람에게 소설을 쓰라고 맡기는 것과 같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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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08
  • [성공칼럼] 생각은 내 종이다
    생각에는 옳은 생각과 거짓된 생각이 있다. 옳은 생각이란 내가 현재의 삶을 받아들여 잘 살게 하면 옳은 생각이고, 현재의 삶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하여 현재의 삶을 거부하고 충돌하게 하는 생각이면 거짓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나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래서 그 약속을 믿고 다른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장소와 음식 준비 등 모든 준비를 다 했다. 그런데 하루 전날 모든 약속을 취소했다고 하자. 이럴 때 이 현재를 받아들여서 웃으면서 잘 처리하고, 내 마음도 밝음과 따뜻함을 잃지 않고 상대방과의 관계도 틈이 생기지 않으며, 다음을 기약하게 만들었다면 여기에서 생긴 모든 생각은 옳은 생각이다. 그러나 약속을 어겼다고 화를 내며 온갖 불평을 늘어놓고 현재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내 본래의 여유 있는 모습과 상대방과의 관계 등 미래의 가능성도 잃게 했다면 이 생각은 거짓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거짓된 생각과 느낌이 하는 것이 사건과 사람과 환경 등을 거부하여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평가한다. 더 나아가 자신의 이념과 사상과 신념으로 현재 일어난 삶을 무시하고 지배한다. 생각과 느낌은 사건, 사람, 물건, 자연 등의 사실도 아니며, 내가 아니다. 생각과 느낌이란 사실을 보는 나나 상대방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증 환자들은 터무니없는 자신의 생각을 사실이라고 우긴다. 반면에 우울증 환자들은 자신의 감정을 옳은 것으로 여겨서 자신의 감정에 따라 말하고 행동한다. 예를 들어, ‘나는 힘들다. 어렵다. 답답하다’라고 한다고 하자. 이것은 내가 힘들고 어렵고 답답한 것이 아니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걱정되고 힘들고 답답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진실한 생각과 느낌은 현재의 삶을 받아들여 밝은 생각과 밝은 느낌이 되어 밝은 말과 밝은 행동으로 내가 삶을 잘 살아가도록 돕는 수단이며 종이며 방향키인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본래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자신으로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일을 잘 못했다고 누군가 “너는 멍청해”라고 해서 ‘나는 멍청하다’라고 여기면 이것이 사람들의 생각이나 자신의 생각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나 주변 사람들이 나를 향해 “너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계속 말한다. 상대방의 기준이나 기분 따라서 좋은 말도 하고 나쁜 말도 할 것이다. 이 모든 말은 상대방의 생각이기에 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들을 자신으로 알고 있다. 생각과 느낌은 반응하는 존재이다. 생각과 느낌은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뀐다. 누군가 나를 칭찬하면 이것도 상대방의 생각일 뿐인데 나는 행복해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 후에 무시하고 비난하면 나는 금세 불행해지고 나는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생각과 느낌을 나로 알고 있으면 사람들의 말과 주변 환경에 계속 순응해야 한다. 이러면 나는 중심을 잃고 정신이 돌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생각과 느낌을 나로 알고 있으면 나는 의존적인 존재이며 주변을 조종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생각과 느낌을 구름으로 비유할 수 있다. 구름은 하늘이 아니다. 그러나 구름이 하늘을 가릴 수도 있고 햇빛을 막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생각과 느낌을 나로 알고 있으면 거짓의 나를 나로 아는 것이다. 생각과 느낌이 커지면 사상이 되고 신념이 되고 자아상이 된다. 이 자아상은 사람들의 해석과 평가로 만들어지는 것인데 사람들의 평가가 좋으면 자존감이 높은 것이고 평가가 낮으면 자존감이 낮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평가를 나로 알고 있는 한 나는 자유와 독립의 존재로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생각과 느낌은 주인인 내가 잘 살펴봐서 다스리고 잘 사용해야하는 것이다. 혹시 내가 원하지 않는 사건이나 사람을 만났을 때 현재의 삶을 받아들여서 넘어가게 하는 생각인지, 거부하고 충돌하게 하는 생각인지를 잘 살펴서 생각과 느낌의 주인으로 자신의 삶을 잘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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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08
  • [은혜의 말씀] 감사회복(살전 5:16-18)
    데살로니가는 바울이 3주 정도 머무르며 사역을 한 곳입니다. 디모데를 통해 데살로니가 교회가 든든히 잘 세워져 가고 있음을 듣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 기뻐하며 칭찬과 위로와 격려의 편지를 보내게 된 것이 데살로니가전서의 내용입니다. 너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알고 있으며 환난 가운데에도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주님과 사역자들을 본받는 자가 되어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노라고 칭찬합니다. 그런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과 사역자들에게 자랑의 면류관이요 영광과 기쁨임을 고백하며 권면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살아 갈 수 있을까요?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상관이 없는 듯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부정적으로 흘러가기가 더 쉽고 세상 속에 적응하며 살아가다 보니 나쁜 생각과 피해의식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할 때가 많습니다. 착하게 기뻐하며 감사하며 사랑하며 살아가는게 하나님의 뜻으로서 그렇게 살아가는게 맞는건 알겠는데 못난 우리의 죄성과 피해의식과 우울감이 자꾸 우리 생각의 발목을 잡습니다. 우리의 몸은 단련하면 알통이 생기고 근육이 붙고 힘줄이 생겨 웬만한 피곤과 병균쯤은 거뜬히 이겨냅니다. 생기 있고 건강한 몸이 됩니다.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함으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도 알통과 근육을 키워야 합니다. 나쁜 생각은 애초에 우리 밭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을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련된 우리의 마음은 나쁜 생각일랑 걷어치우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흘러가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억울하게 쫓겨 다니며 그를 죽일 기회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며 인도해 주심을 바라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12아들 중 가장 사랑 받는 자였지만 형들의 미움으로 애굽에 팔려 갔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지만 거기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감사를 잃지 않았기에 감옥의 일을 맡아 하게 되었고 심지어 애굽의 총리까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하던 자로 거듭난 뒤에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오랜 기간 기도해도 낫지 않던 그의 지병에도 자신이 가진 지식과 지혜가 너무 커서 교만하지 말라고 주신 지병이라며 자신의 은혜가 족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죄 많은 우리을 위해 친히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대신 갖은 모욕과 고초를 겪으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시며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뒤 사망권세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주님만이 참 신이시며 우리의 구원 주되심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이 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을까요? 우리가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기에 우리는 날마다 감사하는 삶으로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힘이 드십니까? 감사 제목을 적어 보십시오. 그럼 우리가 얼마나 가진 것이 많은 행복한 자들인지 새삼 놀라게 될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 감사하고 건강한 것 감사하고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것 감사하고 감사가 감사를 낳고 감사의 관계를 회복하고 축복의 통로로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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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08
  • [가정칼럼] 상처치유, 가정에서 해야 한다(2)
    가장 사랑하고 살아야 할 가족관계가 헝클어져 있다. 깊은 상처들에 둘러싸여 있다. 존 포웰은 말한다. “성숙한 사랑에는 상대방에 대한 지식(knowledge, 이해심)과 상대방의 특성을 그대로 용납하려는 자세(respect), 그리고 상대방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노력(responsibility) 그리고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는 용서(forgiveness)가 있어야 한다.” 헤밍웨이는 소설을 통해 가족들이 갈망하는 용서를 이렇게 풀어냈다. 집을 떠나 마드리드로 떠나 버린 아들, 스페인인 아버지는 뒤늦게 후회를 한다. 아들과 화해하고 싶었던 아버지는 광고를 낸다. 엘리베랄 신문에는 이런 광고가 실렸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 약속된 날, 호텔에 도착한 아버지는 놀란다.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나 나와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파코는 스페인에서 매우 흔한 이름 중의 하나다. 용서가 “가정의 심장에 놓여있다.”고 말한 이는 레스 패로트다. 그는 이렇게 역설한다. “모든 가족은 서로 용서할 필요가 있다.” 과연 용서란 무엇일까? 나에게 고통을 안긴 이들을 애써 외면하고 사는 것? 아니면 재산상의 손실을 입힌 이들을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 그것도 아니면 나의 명예를 더럽힌 그들을 잊어주는 것? 하지만 용서란 사건을 잊는 게 아니라 ‘어떻게 기억하느냐’의 문제라고 꼬집은 심리학자가 있다. 심리학자 딕 티비츠(Dick Tibbits) 바로 그 주인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용서의 기술>에서 이렇게 말한다. “용서는 당신을 다시 삶의 운전석에 앉게 해준다. 용서는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고 현실을 왜곡하는 관점을 줄여 ‘있는 그대로’를 보게 해준다. 용서는 틀을 다시 짜서 당신 삶의 이야기를 바꿀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용서는, 당신을 치료한다.” 그는 그저 말만 하는 이론가가 아니다. 10년 남짓 깊이 신뢰하며 다녔던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잘렸다. 상심이 컸지만 다시 새 직장을 구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생활했다. 어느 날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고혈압으로 약물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산다는 것이 전혀 가치 없다고 느꼈고, 자신이 화났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고, 인생을 향한 에너지도 흥미도 잃고 대부분의 시간을 의기소침한 상태로 지냈다. 그러다 용서를 위한 여러 단계와 절차를 밟고 난 뒤 건강과 열정을 되찾았다. 그의 저서는 이런 경험세계에 기초한다. 그가 말한 용서의 주요개념들은 이런 것이다. “용서란 현재의 평온을 회복하고 미래의 희망과 삶의 목적을 되살리기 위해 과거에 받은 분노와 상처에 새로운 틀을 씌우는 작업이다.” “용서는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당신이 넘겨준 당신 삶의 통제권에서 당신을 해방시킨다.” “용서는 자기 삶과 행복을 자신이 책임지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용서는 과거의 상황이 당신의 현재를 지배하지 않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충고한다. “타인을 완전히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보다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라.” “어떤 불쾌한 상황을 겪더라도 상대의 의도와 당신에게 끼친 영향을 구분하라.” “다른 사람에게 거는 기대치를 낮춰라.” “겸손과 공감의 기술을 터득하라.” 마틴 루터킹은 “용서는 신선한 시작, 새로운 출발에 필요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촉매제”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용서는 미움과 사랑, 절망과 희망 나아가 전쟁과 평화를 구분 짓는 생명선이나 다를 바 없다. 용서가 없다면 우리의 상처는 거침없이 커져서 우리를 실패와 분노, 비통의 쳇바퀴로 몰아넣고 만다. 그리고 끝내 우리의 삶을 파멸로 이끌고야 만다. 그래서 용서는 모든 절망을 치유하고 상처를 꿰매는 치료제와 같다.” 용서는 용광로와 같아 우리의 모든 허물을 태워 에너지로 만들어 준다. 용서는 곧 희망이요 꿈이다. 용서받은 영혼은 다시 시작할 마음을 갖는다. 가정의 가장 큰 기능은 정죄가 아니라 용서다. 하나님이 베푸신 그 용서로 서로를 용납하는 일이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아래 놓이게 된다. 그래서 용서를 가정의 심장이라 부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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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08
  • [시사칼럼]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
    지난 8월 24일에 이어 9월 5일 북한은 각각 영어 약자로 SLBM, ICBM이라 불리는 핵미사일 실험을 강행했습니다. 전자의 정식 명칭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ubmarine-launched Ballistic Missile), 후자는 대륙간탄도미사일(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입니다. 쉽게 말해서, 전자는 잠수함에 탑재하여 발사하는 핵미사일을, 후자는 아시아 대륙에서 발사해서 대양을 넘어 유럽이나 미주에 떨어질 수 있는 핵미사일을 의미합니다. 현재까지 이 두 가지 무기체계를 실제로 구비하고 있는 나라는 6개국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인도). 1989년 10월 3일 독일의 통일과 동독 공산 정권의 붕괴, 1990년 8월 19일 공산당의 친위 쿠데타 실패 후 소련의 해체는 북한의 김(金)씨 정권에 엄청난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습니다. 게다가 1991년부터 이어지는 대기근으로 수백 만 명이 아사(餓死)하면서 성난 민심이 요동치자 노동당 정권은 핵무기 개발을 국가적인 아젠다(agenda)로 정하고 활로를 모색했습니다. 이미 유효 기간이 말소된 이념을 고수하고 공산 독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핵무기 개발에 올인(all-in)한 것입니다. 1990년대 우여곡절을 거친 후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1차 핵실험 도발을 감행했습니다. 이후 2009년의 2차 핵실험(4.5), 2012년의 3차 핵실험(12.12), 2016년의 4차 핵실험(12.21)이 이어졌고, 마지막 4차에서는 SLBM 발사까지 시도합니다. 그리고 금번 8월에는 드디어 SLBM이 500km 비행에 성공해서 일본방공식별구역(JADIZ)으로 80Km를 들어가 안에 떨어졌다 합니다. 1818년 영국의 여류 소설가 메리 셸리(Mary Shelley)는 『프랑켄슈타인』을 발표합니다. 우월한 존재를 창조하려 시도한 과학자가 결국 괴물을 만들어 낸다는 이야기입니다. 히브리 대학의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사피엔스』에서 이 이야기를 조금 다른 식으로 재해석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프랑켄슈타인 신화는 호모 사피엔스(즉, 인류, 편집자 주)로 하여금 종말의 날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 지금 속도로 과학기술이 발달해 간다면 인류는 결국 실패한 괴물이 아니라 온전한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어낼지도 모르며, 그 또한 현존 인류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북한이 집착하는 SLBM과 ICBM이 성공한 작품이 될지 아니면 실패한 괴물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북한의 핵실험은 그 자체가 벌써 한반도에 심대한 위험요소인 동시에, 만일 성공할 경우에는 한반도의 종말을 초래할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칼을 휘두르는 베드로를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 26:52). 실제로 휘두를 목적이든 그냥 보유하기만 하고 겁을 줄 목적이든 다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의 남편이자 유명한 낭만파 시인 셸리(P. S. Shelley)는 <지적인 아름다움의 찬가(Hymn to Intellectual Beauty)>에서 이런 시구를 남겼습니다. “무슨 눈에 띄지 않는 ‘힘’의 두려운 그림자가 비록 우리 사이에 눈에 띄지 않지만 떠돌고 있다, - 마치 꽃에서 꽃으로 살며시 옮겨가는 여름 바람처럼, 변덕스런 날개로 이 변하기 쉬운 세상을 찾아온다, (중략) 아름다운 영이여, 그대의 마력이 나를 두려움으로 바라보게 했었고, 온 인류를 사랑하게 했었노라.”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아내가 아니라 남편이 옳았습니다. 만일 그가 살아 있다면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겠습니까? <북한이여, 힘을 과시하는 괴물이 되지 말고, 성령을 받아 인류를 사랑하는 집단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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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08
  • [서임중 칼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도
    SBS 프로그램의 ‘스타킹’을 모르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그 프로그램 가운데 ‘꿈을 향한 눈물겨운 도전, 기적의 목청킹’은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젖게 했고 감동스토리를 만들어 낸 프로그램이다.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스타킹에 출연하면서 마치 진흙속에 묻혀 있다가 보석같은 모습으로 시청자들 앞에 나타난 주인공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 야식 배달부 김승일씨를 우리는 기억한다. 방송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시청자들까지 ‘패닉' 상태에 빠뜨렸던 김승일씨가 유명한 오페라 아리아 ’네순도르마‘를 불렀을 때 당시 김인혜 교수는 “도저히 앉아서 못 듣겠다.”며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들었고 폭발할 듯한 고음의 하이라이트가 끝난 뒤 스타킹 녹화장에는 일순간 정적이 흘렀던 것을 시청자들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한 마디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스타킹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보석처럼 빛난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이다. 우리는 온 세계 인터넷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던 영국 의 별 볼일 없던 청년 ‘폴 포츠(Paul Potts)’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 우리나라 송명희 여사도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 정신 장애를 안고 태어난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거룩하게 쓰임 받는 존귀한 사람이 되었다. 세계적인 만화가 미국의 ‘찰스 먼로 슐츠’씨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이발사였고 학창시절에는 열등생이었고, 8학년 전 과목 낙제생이었고, 지진아라 불리며 따돌림을 당했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peanuts (별 볼일 없는) 라는 만화를 통해 1950년 한 신문에 게재되기 시작하면서 세계 75개국, 2600여 신문에 50년 동안 21개 언어로 연재되었다. 별 볼일 없는 소년이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사무엘하 17장을 보면 다윗이 신임했던 다윗의 책사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함께 모반을 하고 다윗은 이를 피하여 도망할 때 다윗을 죽이려는 아히도벨은 후새를 찾아가 자문을 구하지만 계획을 들은 후새가 바른 판단을 하여 몰살 직전에 이르게 된 다윗왕 일행을 살려낸다. 그런데 이 놀라운 역사에 당시 정말 별 볼일 없는 사람의 하나였던 제사장의 여종과 바후림의 한 여주인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되는 감동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우리가 마음에 닿는 감동은 하나님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별 볼일 없는 자 일지라도 믿음 있으면 하나님이 사용하신다. 별 볼일 없는 자 일지라도 하나님은 기회를 주신다. 별 볼일 없는 자 일지라도 사욕(私慾)을 잊으면 큰일을 행할 수 있다. 즉 세상에서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위해서는 할 일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깨닫는 것이 있다. 비록 나의 형편이 남들이 볼 때 별 볼일 없는 존재일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비록 별 볼일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일을 하면 큰 역사를 이루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내가 별 볼일 있는 사람이라고 뽐내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적이 있었던가? 없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은 신기하게도 나는 못났다, 무능력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별 볼일 없다는 사람을 들어내서 사용하시는 것이다. 지식은 배워서 습득하지만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습득한다.(잠9:10) 세상 지식이 있다고 뽐내는 사람들은 자기가 배워서 습득한 지식으로 일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받은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을 한다. 결과는 비교가 안 되도록 차이가 나는 것이다. 세상의 지식이 없는 사람보다 있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지식은 있고 지혜가 없으면 그는 지식이 없고 지혜있는 사람만 못하다. 그러기에 더 훌륭한 사람은 지식위에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플러스 한 사람이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터치해 주시면 존귀한 사람이 된다. 아브라함은 데라의 아들로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지만 복의 근원이 되는 은혜를 입을 만한 존재가 아닌 정말 별 볼일 없는 자였다. 기드온도 시골집에서 보리타작을 하는 별 볼일 없는 자였고, 아모스도 뽕나무 밭에서 일하는 별 볼일 없는 자였으며, 엘리사도 소를 몰고 시골에서 밭갈이 하던 별 볼일 없는 자였고, 다윗도 이새의 말째 아들로 들판에서 양이나 치던 별 볼일 없는 자였고, 베드로도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나 잡던 별 볼일 없는 자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어루만지시고 손잡아주실 때 위대한 역사의 주인공들이 다 되었다. 필자도 초등학교 때 신발 한번 신어보지 못했고, 도시락 한번 쌀 형편이 못되었고, 결핵환자가 되어 죽기만을 기다려야 했던 청년이었고, 스무살때까지 팬티 한 번 입어보지 못했고 약혼식 때 넥타이 하나도 빌려서 메어야 했던 별 볼일 없는 존재였다. 담임목회를 마치고 은퇴를 하고 나니 정말 별볼일 없는 사람이 된 느낌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별볼일 없는 사람일지라도 복음전도의 일꾼으로 사용하신다. 살아가노라면 힘들 때가 있다. 참담하고 억울하고 아프고 외롭고 지칠 때가 있다. 그 때는 누구나 나는 별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주저앉는다. 괜찮다. 그럴 때 하나님은 조용히 다가오셔서 손을 내미시면서 말씀 하신다. “사랑하는자야 내 손을 잡아라.” 그 손을 잡을 때 일어선다. 치유가 된다. 회복이 되고 생명을 얻는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이지만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로 오셔서 손을 내 미시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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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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