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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하나님 나라 (로마서 14장 17절)
    오늘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천국 시민권자입니다. 성도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성도의 삶의 목표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백성들은 이 땅에서 가난해도 애통해도 슬퍼도 아파도 거의 상관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 잠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나라는 끊임없이 이기적인 무한 경쟁이며 모순과 갈등과 문제투성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많은 부분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가난해도 애통해도 슬프고 핍박을 당해도 그 중심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이 땅에 살아가면서 그렇게 가난하고, 어렵게, 서럽게, 의롭게, 왕따를 당하면서도 가슴에 깊은 고요가 있었던 것은 천국이 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관심과 선택과 집중입니다.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세상나라의 풍조를 바라보면 결국은 헛된 일을 따라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달라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천국을 바라보고 걸어가는 사람들이지 지옥에 갈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은 썩을 것들을 구하고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그런 것들 중심으로 살아가지만 우리는 관심사항과 중심이 달라야 됩니다. 먹고 마시는 선에서 멈추면 안 되고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깊은 고요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 뭐라 하든지 흔들리지 않는 세상 풍파에 요동치지 않는 부평초처럼 흔들리지 않고 주님 주신 평강을 가지고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세상이 뒤집어져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외부적인 것 때문에 흔들리지 말고 남들이 뭐라 한다고, 세상이 뭐라 한다고 떨지도 쫄지도 말고 우린 주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천국을 향해서 한걸음 한걸음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야베스의 기도처럼 외부적인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그 평화 근심 없는 축복 뒷골 안 땡기는 복 그것이 있어야 합니다. 땀 흘림이 없이는 성공이 없고 눈물의 기도가 없이는 응답이 없고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세상의 나라를 왕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내 왕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중심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가지 말고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삶 하늘이 두 쪽이 나든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의 반열에 서서, 의의 길을 걸어가고 반듯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붙잡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를 병들고 가난하고 약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적이 와서 빼앗고 죽이고 멸망시키지만 우리 예수님은 생명을 주시고 풍성케 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며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이 철철 넘치고 희락, 구원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기쁨을 샘솟듯, 은사를 불 일듯, 청춘을 독수리 날개 치는 것 같이 시온의 대로를 활보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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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9
  • [중독칼럼] 분노조절 장애와 로직에러(1)
    요즘 사회적 문제 중 하나는 분노조절 장애 문제가 늘어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운전자들의 보복 운전과 폭력성을 들 수 있다. 왜, 예전에 없던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본인의 입장을 피력하려고 한다. 하나님 편에서 모세를 볼 때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는 십계명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분노를 참지 못했다. 바울은 많은 일을 한 사도였지만 마가의 일로 바나바와 다투었고, 결국 그 순간만큼은 갈라서야했다. 일반적으로 일중심형 사람들은 결과, 승급에 있어서 항상 관계 중심 형보다 단기과정에서 거의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인정받고 승진도 빠르지만 결국 사람을 얻지 못하는 것을 심심찮게 본다. 물론 결과의 책임을 져야하는 스포츠라면 전혀 다른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 즉 삶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면 일중심형의 사람들은 결국 관계를 소홀히 함으로 큰 문제를 야기시킨다. 로직에러(Logic Err)란? 로직에러(Logic Err)라는 용어는 본인이 처음으로 창시했다. 스마트폰, 테블릿, 컴퓨터는 모두 로직(Logic)화 되어 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로직화된 문명 속에서 자라고, 자신의 재능, 즉 뇌가 이런 쪽으로 발단된 DNA는 훨씬 더 잘 적응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뇌의 전두엽 조직은 더욱 로직(Logic)에 고착화 되어 간다. 결국 일을 빠르게 처리해 내는 능력은 발달할지는 몰라도 기다리고 절제하고 인내하는 능력의 뇌 조직은 약화되어 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쉽게 짜증내고 화로 분출하고, 포기하거나, 목표와 꿈을 잃게 되는 원흉으로 본인은 보고 있다. 물론 인간관계 중심의 능력은 더 없어지고 대인 기피증이나 우울증은 더욱 심화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한참 게임에 몰두해 있는 남편이나 자식이 있다면 지금 그들의 뇌는 통제 불능 상태에 놓이기 쉬운 상황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한다. 우스갯소리이지만 게임에 몰두해 있는 남편이나 자녀들에 분노하게 만들게 되는 상황이 연출되어진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라. 왜 우리가 운전할 때 더 욕과 화를 많이 분출하게 되는 지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하리라 본다. 단, 관계 중심형의 사람들은 로직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듯 하지만 결국 문화와 삶의 전반에 걸쳐, 수학을 중시하는, 뿌리 내려져 있다. 이 쯤하면 독자들은 이 문제의 해답을 눈치챈 분들이 있을 것이다. 로직에러현상. 줄여서 로에현상, 본인은 노예현상이라고 읽기도 한다. 중독문화에 노예된 현 문화인들을 보며 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을 제시하고 싶다. 성경을 읽으라. 기도하라. 그리고 성령을 체험하라. 과학자들은 믿지 않겠지만 우리의 감정과 뇌를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을 맞보게 될 것이다. 이 통로를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주셨다. 관계 중심의 교회. 회복되어야할 덕복이다. (중독문화 -분노조절 장애와 로직에러2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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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9
  • [시사칼럼] 정유년을 맞으며
    정유년(丁酉年) 벽두(劈頭)부터 문득 가덕도(加德島)를 들러야 할 것 같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입소문을 타고 살이 바짝 오른 제철 대구처럼 밀려들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의아할 무렵 작년 내린 집중호우 탓에 토사와 바위가 쏟아져 입산금지가 되었다는 팻말이 기도원 진입하는 입구에서 겨울 나그네들을 반겨주었습니다. 등 뒤론 제법 시린 바람이 길을 재촉하는데 앞으로는 코발트빛 겨울바다를 반사경 삼아 내리쬐는 겨울햇살 탓에 선글라스를 준비한 동행의 지혜를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뜻밖의 인적 없는 해안은, 입 대신 눈을 뜬 채로 완벽하게 어우러진 전능자의 창조와 구원의 경륜을 찬양하게 만드는 그 자체로 견줄 데 없는 기도길이었습니다. “정유년 그해 초봄, 가덕 방면 전투는 헐거웠다. 적의 전투의지가 내 몸에 전해지지 않았다. 전투라기보다는 부지런히 잡초를 뽑는 농사일 같은 느낌이었다. 가덕 해역으로부터 함대를 철수시켜 한산 통제영 모항으로 돌아오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의금부 도사는 선착장에서 나를 묶었다.”(김 훈, 『칼의 노래』, 20) 1597년 1월 하순, 조정에서 연이어 벌어진 어전회의에서 선조(宣祖)는 이순신을 군령 위반과 허위 보고를 이유로 치죄하기 위해 체포령을 내렸습니다(선조실록 1. 23, 27).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한산 통제영에서 그렇게 붙잡혀 한양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악의에 찬 모함과 잔인한 고문 그리고 모친상의 비극이 이어지는 사이, 왜적(倭敵)들은 14만 대군을 앞세워 재침을 감행합니다. 또 하나의 전쟁 정유재란의 시작이었습니다. 전도서 기자가 하늘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한 말은 옳았습니다. 정확하게 일곱 갑자의 시간이 흐르고 난 2017년의 정유년 또한 분별력 없는 위정자들이 토설해 놓은 혼돈을 감당하느라 민초들만 분주(噴走)합니다. 이듬해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임진년 옥포 싸움 때의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총상을 입은 채 이런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너는 내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북을 계속 울려라!” 김훈은 정유년을 중심으로 이순신을 묘사하면서 소설의 끝을 이렇게 맺습니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칼의 노래』, 342).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이 존재합니다. 400년 전 가덕도 앞바다에도, 4,000년 전 홍해 앞바다에도, 칼로 벨 수 없는 적들이 있었습니다. 이순신을 포함해 그 누구도 이 싸움에서 이길 장사가 없었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이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케이블 tvN <도깨비>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대판 도깨비는 전래동화처럼 투박한 방망이가 아니라, 커다랗고 신비로운 검을 사용해서 달려오는 차량도 쪼개고 악령도 소멸시키며 사랑하는 사람을 지킵니다.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실타래처럼 얽혀버린 난맥(亂脈)을 그 옛날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을 단칼에 잘라버렸던 알렉산더 같은 이가 나와 해결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해골 언덕에 깊이 박힌 그 십자가야말로 누구도 뽑을 수 없고 그 어떤 것도 베지 못할 것이 없는 신령한 무기입니다. 정유년을 시작하며 가덕도에서 바라본 하늘과 바다처럼, 사람들 사는 땅 위에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검이 만들어내는 화평의 장관이 펼쳐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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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9
  • [소강석 칼럼] 민족적 치킨런을 해야 할 때
    서울대학교 김난도 교수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트렌드 코리아 2016’에서 한국 소비문화의 흐름, 곧 소비트렌드의 키워드를 몽키바스(Monkeybars)로 제시하였다. 몽키바는 어린이 놀이터나 군대 유격장에서 볼 수 있는 구름다리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2016년은 대한민국을 둘러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위기가 깊은 골을 이루게 될 것이기에 원숭이가 구름다리를 넘듯 신속하게 건너야 안정된 2017년에 도달한다는 주장이었다. 그의 정치, 경제, 사회적 예견은 크게 볼 때 거의 정확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몽키바를 염두에 두고 아주 신속하고, 현명하게 건넜어야 했는데 위기의식 없이 안일하게 대처하고 독단에 빠졌다가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러면 2017년 대한민국 소비트렌드 키워드는 무엇일까? 바로 치킨런이다. 올해는 닭의 해이다. 치킨런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면, 영국의 어느 양계장의 닭들이 닭장에 갇혀서 알이나 낳으며 미래가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욕심 많은 주인아줌마가 알만 가지고는 만족을 못해서 치킨파이를 만드는 기계를 들여온다. 닭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에 처하면서 어떻게든지 닭장을 탈출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때 록키라는 슈퍼 닭이 나타나 닭들이 함께 날 수 있는 제트기를 만들어서 닭장을 탈출한다는 이야기다. 마치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자 닭들이 어떻게든지 닭장을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다 비상의 날개를 펴고 극적으로 울타리를 넘어 탈출 한 것처럼, 2017년에는 한국사회도 위기의 담장을 넘어와 치킨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 성경 이사야서를 보면, 바벨론에 끌려가 종노릇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고토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려면 1500km가 넘는 거칠고 험한 아라비아 광야 길을 걸어와야 한다. 뿐만 아니라 광야에는 수많은 장애물과 적들이 매복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감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가는 것처럼 비상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광야의 독수리는 솔개나 매와는 다르다.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광야에 돌아다니는 산양이나 염소, 심지어 늑대까지도 낚아채서 잡아먹는다. 얼마나 날갯죽지에 힘이 강하면 그 무거운 수십 킬로 되는 짐승을 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겠는가.지금 우리 사회는 독수리의 날갯짓처럼 비상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4차원의 창조적 파괴와 혁신을 이뤄야 한다. 기존의 매뉴얼이나 안일한 사고로는 지금의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치킨런의 닭들처럼 4차원적 상상력을 통하여 위기와 불가능의 닭장을 넘어 비상해야 한다. 아주 오래된, 낡은 일반 엔진으로는 적폐에 갇혀버린 어두운 맨홀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제트기 엔진이나 헬리콥터 프로펠러 같은 창조적 상상력과 역사의식으로 날아야 한다. 2017년은 위기의 해가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새해는 결단의 해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국가 전체의 공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정파나 진영, 이념 논리를 초극해서 함께 손잡고 날갯짓을 해야 할 때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 민족이 비상하고 이륙할 것인가. 4차원의 창조적 마인드와 필사적 결단이 필요하다. 이제 2017년은 민족적 치킨런을 하자. 절망과 갈등의 담장을 넘어 날자. 모두 함께 힘을 모아 내일의 푸른 하늘로 솟구치며 비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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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9
  • [성서연구] 대세가 아니라, 옳음을 따르라!(대상 12장 1-7절)
    다윗은 왕이 되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고 지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돌보시는 방법 중에는 좋은 사람들을 붙여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올 때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다윗을 도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주목할 사람들은 베냐민 사람들입니다. 이미 아시는 대로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울 왕 자신이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그러므로 베냐민 사람들은 사울 왕의 동족들입니다. 1~2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로 말미암아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 그에게 와서 싸움을 도운 용사 중에 든 자가 있었으니, 그들은 활을 가지며 좌우 손을 놀려 물매도 던지며 화살도 쏘는 자요 베냐민 지파 사울의 동족인데 그 이름은 이러하니라>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대세를 따르지 않고 옳음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대세가 아닌 옳음을 따르는 모습을 보십시오. 첫째, 대세를 따랐다면 자신들의 혈족인 사울을 지지하고 다윗을 적대시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둘째, 당시에 다윗의 형편은 보잘것없었습니다. 당시 다윗은 블레셋의 시글락에 망명해 있는 상태였습니다. 블레셋이 어디입니까?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경험은 적들 중 가장 강력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은 늘 블레셋의 속국처럼 살았습니다. 더구나 블레셋도 다윗이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죽인 일과 다윗이 장군이 된 후로 블레셋을 힘들게 했기에 다윗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블레셋이 지금은 사울의 손에서 다윗을 지키고 있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닙니까? 이런 상황은 다윗의 처지가 이스라엘 안에서 얼마나 위태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런 다윗이 그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었겠습니까? 셋째, 아직도 엄연히 사울이 왕이었으므로, 다윗을 돕는 것은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본문의 베냐민 사람들은 왜 다윗을 도왔을까요? 그것은 다윗을 돕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차기 왕으로 내정한 것을 알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지금은 다윗이 어렵지만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실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눈앞의 권력인 사울보다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을 지지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들은 대세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또 이들은 사울의 행위가 옳지 않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이 볼 때 다윗은 골리앗을 이겨 사울을 위기에서 건졌고, 수많은 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며, 사울의 사위이기도 했으므로, 사울이 다윗을 핍박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여러 이유로 인해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도운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너무도 혼란합니다. 촛불집회와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무엇이 옳은지 알기 힘들 정도로 온갖 설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언론은 현안들에 대해 이미 결정이 난 것처럼 어느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느낌도 받습니다. 국민들은 정치적 입장이나 지연과 학연, 혹은 어떤 설에 자극받고 있습니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때 그리스도인들은 대세나, 이익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즉 옳음을 따라, 진리와 정의를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시끄러운 세상인데, 우리까지 쓸 데 없는 이야기를 보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엎드려 무엇이 옳은지 깨닫게 해 주시길 기도하고, 그 옳음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대세가 아니라 옳음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결국엔 진리가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진리 편에 서는 사람들이 되길 원합니다. 주여, 이 땅의 백성으로 하여금 결국은 하나님의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을 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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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9
  • [함께 생각해 봅시다] 나이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다
    내가 이 나이에 어떻게 그러지말고 내 나이가 어때서 이렇게 생각해야 노인학교에 나가서 잡담을 하거나 장기를 두는 것이 고작인 한 노인이 있었다. 어느 날 장기를 둘 상대자가 없어 그냥 멍하니 있는데 한 젊은이가 지나가다가 말했다. “할아버지 그냥 그렇게 앉아계시느니 그림을 그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가 그림을? 나는 붓을 잡을 줄도 모르네” “그것이야 배우면 되지요” “그러기엔 너무 늦었어. 나는 이미 일흔이 넘었는걸” “제가 보기엔 할아버지의 연세가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더 문제인 것 같은데요” 젊은이의 핀잔은 곧 그 할아버지로 하여금 화실을 찾게 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지 않았고 더욱이 그 연세가 가지는 풍부한 경험으로 인해 성숙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붓을 잡은 손이 약간 떨렸지만 그는 매일 그르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이 새로운 시도는 그의 마지막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장식해주었다. 그가 누군고 하니 바로 평론가인 ‘미국의 샤갈’이라고 극찬을 받은 해리 리버만이다. 그는 많은 이들의 격려 속에서 수 많은 그림을 남겼다. 그는 101세에 22회째인 그림전시회를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일들을 보면 문제는 나이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이다. 지난 해 신문에 게재된 기사를 보니 인도의 만카우르(여)는 1916년생으로 나이 100세인데 그는 92세에 달리기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꾸준히 노력한 결과 지금까지 미국과 중국 등 세계 각국을 돌며 목에 건 메달이 무려 20개가 넘는다고 한다. 2016년 캐나다 밴쿠버 육상 여자부(70세 이상 부문) 100m 경주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앞서 창던지기와 포환던지기에서도 정상에 올라 이 할머니는 이 대회 3관왕이 됐다. 역시 신문기사에서 본 것이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차사순(69)씨는 운전면허 도전 5년만에 드디어 면허증을 획득했다고 한다. 그는 필기시험은 960번 만에 합격하고 도로주행시험은 10번만에 합격했다고 한다. 그는 중고차라도 사서 장사도 하고 아들과 딸 집에도 차로 갈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문제는 나이가 아니다. 마음의 자세가 문제다. 뭐든 못하는 것은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이젠 나이가 많아서 못하겠다는 마음 때문이다. 여간 나이가 많아도 “나는 늙었다” “내가 이 나이에 어떻게” 이 같은 생각을 버리고 “내 나이가 어때서” 이렇게 생각을 바꾸고 뭐든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뭐든 못하는 것은 나이 때문이 아니고 생각 때문이고 마음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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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19
  • [시사칼럼] 기억과 거짓말
    이른바 <국정농단청문회>가 끝났습니다. ‘농단(壟斷)’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이익과 권력을 교묘한 수단으로 독점함”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본래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시장에서 하는 일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가지지 못한 것을 바꾸는 것이었고, 관리하는 사람은 다만 그것을 살필 뿐이었다. 그런데 천한 사람이 나타나 우뚝 높은 언덕(롱, 壟)에 올라가 좌우를 살펴보고는 시장의 이익을 그물질해 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이를 천하게 여겼다.”(맹자 공손추하(公孫丑下) 편) 그런데 이번 청문회를 보니 농단이라는 말도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기억상실청문회’ 혹은 ‘거짓말청문회’라는 이름을 붙여야 하지 않을까요? 허버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망각이란 복종과 포기를 지속시키는 정신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일관하는 청문회 증인들을 보면서 떠오른 문장입니다. 공부도 많이 하고 경험도 풍부한 분들인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일종의 집단기억상실증에 빠지게 했을까요? 독일 신학자 얀 아스만(Jan Assmann)는 말했습니다. “전체주의는 망각과 결탁한다.” 혹시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집단의 힘이나 구조적인 압력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청문회 현장에 선 의도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을 보면서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가 남겼다는 명언이 새삼스럽게 다시 떠올랐습니다. “과거를 망각하는 자는 그것을 반복하도록 심판 받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번 청문회를 보면서 묘한 기시감(dejavu)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청문회 현장에서 자신이 발언했던 앞 뒷말이 모순되어서 거짓말을 하고 있음이 바로 탄로 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장에는 교묘한 말로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기 어렵게 만든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진리는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도 등불을 다 숨길 수 어렵고 감춰진 것은 반드시 알려지고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엠마누엘 카레르(Emmanuel Carrere)라는 작가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적』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주인공 장클로드 로망은 의대에 입학한 지 2년 후 예과 시험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부모에게는 시험을 잘 치렀으며 본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후로 15년을 이어지는 거짓말의 시작이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갖지만 계속해서 거짓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이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가족을 죽이고 비참한 파국을 자초하고 만다는 내용입니다. 스위스 출신의 페터 비에리(Peter Bieri)는 거짓말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존엄성과 타인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라고 평했습니다. 이번에 증인이나 참고인으로 등장했던 사람들 중에는 모르기는 해도 그리스도인들도 여럿 있었을 것입니다. 신자는 정직해야 한다는 성경 구절을 모를 리가 없는 분들입니다. 아마도 개인적으로는 자성하며 지금쯤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이 사람들이 가짜 기억을 만들어내고 거짓말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고 있는 이 사회의 정서와 풍조입니다. 정직은 성경의 가치만은 아닙니다. 정직은 어떤 사회든 자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인류의 자산입니다.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확한 사실에 기초한 정확한 기억은 역사를 발전시켜가는 도구입니다. 왜곡된 기억과 굴절된 거짓이 난무하는 사회는 반드시 퇴행과 갈등의 역사를 반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유년입니다. 멀리서 새벽을 깨우는 닭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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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 [목회자 칼럼] 다음 세대를 염려하면서 (1)
    최근 우리나라 인구는 5천만명을 넘어섰다. 전 세계적으로 28위에 드는 인구 강국이다. 물론 남북을 합하면 7300만명으로 터키 다음으로 21위가 된다. 인구가 많은 것은 강점이다 중국이 세계 2위의 강대국으로 지위를 굳히고 있는 것도 세계 최대의 인구를 가진 덕택임을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 우리나라 인구는 2030년에 5296만명으로 최절정에 도달할 것이고 그 뒤로는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 인구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줄어드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100년 후가 되는 2115년경에는 2580만명으로 우리나라 인구가 반 토막 난다고 한다. 그동안 오랜 세월 매년 출산으로 신생아가 100만명 가량이었으나 지금은 한 해에 40만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예를 들면 서울 교동초등학교는 한창 왕성하던 시절에는 전교생이 5천명을 넘었는데 지금은 단지 118명이라고 한다. 지금 청년 대학생들의 34%가 결혼에 대하여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며 막상 결혼을 한 신혼부부들의 43%가 ‘당장 출산할 계획이 없다’라고 대답한다. 일컬어 딩크족(族) (DINK = Double Income No Kids ‘부부가 같이 직업을 가짐으로 수입은 두 배로 늘리고 아기는 갖지 않겠다는 사고를 가진 젊은이들’ 이라는 뜻임) 이 확산되는 추세에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우리나라 미래의 교육위기, 경제위기, 국방위기를 몰고 오고 있다. 교육 위기란 취학 아동수가 해마다 급격하게 줄어들므로 폐교, 폐 교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그 결과 앞으로 전국의 대학들이 정원보다 훨씬 못 미치는 입학생 수 감소로 말미암아 대학 운영이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경제 위기란 생산 공장의 인력이 태부족하게 되므로 후발 신흥 경제 도약 국가들에게 경쟁력을 추월 당 할 수 있다. 국방 위기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위치 해 있는 것이 우리 한반도이므로 기본적인 국방 인력이 항시 준비 돼 있어야 하는데 그 ‘절대적인 수치 유지’에 위험 신호가 켜지고 있다고 한다. 다음 세대를 전망 할 수 있는 〈오늘의 우리나라 종교 현황〉은 어떠할까? 종교를 가진 자가 44%, 무종교라고 답하는 국민이 56%이다. 대표적인 종교 현황을 보면 기독교 967만명 (전 인구의 19.7%), 불교 761만명 (15.5%), 로마교 389만명 (7.9%) 이다.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한 것은 그 동안 침체되고 위축 돼 오던 우리 기독교가 상당한 회복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한 때 800만명 이하로 떨어졌다거나 심지어 600만에도 미치지 못 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컸었는데 이번에 정부 통계청이 가장 정확한 방법으로 조사 연구하여 발표한 결과이므로 그 어느 때 보다 〈신뢰도〉가 높다. 우리 기독교가 그 동안의 우려와 달리 많이 회복 되었다고 하나 오늘의 현상은 마치 〈살얼음판〉을 딛고 있는 것과 같다. 하도 예측 할 수 없는 돌발 사태와 변수들이 많이 일어나는 복잡한 시대이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조심 또 조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만이 이 땅의 희망〉임을 진실과 정직과 깨끗한 삶을 통하여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한다. (마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고후 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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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 [성경인물탐구] 이스라엘이 최고라 생각하는 요한 (3)
    요한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선민이요, 따라서 이스라엘이 최고의 민족이라는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과 더불어 사마리아로 지나 가다가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는 아주 심한 저주의 말을 내뱉었습니다. 이처럼 그릇된 특권 의식, 그릇된 선민의식을 가진 자는 매우 위험스럽습니다. 옛날 독일의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이 세계의 제일이라 주장하며 다른 모든 민족들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생각으로 200만 명이나 되는 유태 민족을 학살하였습니다. 이렇게 위험스런 특권이나 선민의식은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키고, 나아가서 주의 나라를 파괴하는 매우 위험스런 생각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릇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요한은 모든 이방인은 멸망 받을 존재인 줄로 알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 역시도 이방인들과 혼혈 민족을 이루었기에 이런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 불 심판을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받지 않는 것은 민족과 국가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들은 이렇게 외모로, 혹은 성별로, 혹은 재산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도, 경멸해서도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은 직업의 유무, 빈부귀천, 지위 고하, 남녀 성별에 관계없이 동일한 한 형제요, 또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롬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 도다. 요한은 참으로 다른 제자에 비해 유달리 특권 의식과 계급의식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 사역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때도 그 어머니를 통해 예수님의 오른팔에 해당하는 직책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은 이렇게 특권 의식에 젖어 있었고, 또 지나친 계급의식에 젖어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교회에서 섬김과 봉사를 위해 주어진 직분을 이렇게 상하를 구분하는 계급으로 그릇 오해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 20:20-21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 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엡 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요한은 매우 성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얼마나 성격이 급하고 불과 같았던지, 그는 형제 야고보와 더불어 '우뢰의 아들' 즉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성급한 성품을 빗대는 그의 별명은 바로 여기 본문의 사건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사마리아 사람을 태워 버리자는 그의 이 요구 속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성급하고 혈기 왕성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한은 비록 주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그 신앙 인격이 성숙되지 못한 제자였습니다. 막 3:17 또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우리도 각자의 성품이 있습니다. 온전히 주님을 만남으로 주님을 닮은 성숙한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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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 [교회법률상식] 장로교 총회 명칭의 변천사
    한국 장로교회가 원래는 하나의 장로교회였다. 그런데 1950년 6·25동란을 전후하여 장로교가 분열로 이어졌다. 하나였던 장로교가 둘로 분열된 후에는 연이어 분열하다가 핵분열 하듯 현재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라는 명칭을 가진 교단이 일백 수 십 개의 교단이 된다는 어떤 통계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모르기는 해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일 때만 해도 장로교는 하나이었는데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로 명칭이 변경된 이후부터 장로회 총회가 헤아릴 수 없이 급격히 나누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장로교 명칭의 변천사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대한국예수교장로회 노회(1907년 제1회 독노회) “하나님께서 은혜를 풍부히 주심으로 수년 젼에 미국 남 쟝로교회와 북 쟝로교회와 영국 오스드렐냐 쟝로교회 가나다 쟝로교회 이 네 곳 총회에셔 특별히 대한국 쟝로회 노회를 세우기로 허락한 고로 쟝로 공의회 회쟝 마포삼열 목사께서 네 곳 총회의 권을 엇어 한국 교회에 로회 되난 취지를 설명하시되 이 로회는 교회의 머리되시난 쥬 예수 그리스도를 힘립어 십자가를 튼튼히 의지하고 견고하여 흔들니지 말고 셰샹사람 압혜 영화로운 빗치 되며 하나님 압혜 거룩하고 정결한 로회를 일우어야하겠다 하시고 쥬 강생 일천 구백 칠년 구월 십칠일 오졍에 한국로회를 셜립한 후에 대한에 신학교 졸업 학사 닐곱 사람을 목사로 쟝립하고 “대한국 예수교 쟝로회 로회라 하셨스니 이는 실노 대한국 독닙 로회로다. 할넬누야 찬숑으로 셩부 셩자 셩신님께 셰셰토록 영광을 돌리세 아멘”(독노회록p.3). 2. 예수교장로회조선 총회(1912년 제1회 총회) 독노회 회의록은 원문대로 기록하였으나 총회록은 현대어로 기록하였다. “주후 1912년 9월 1일 상오 10시 30분에 예수교장로회조선 총회 제일회로 평안남도 평양 경창문 안(內) 여성경학원에서 전 회장 리 눌서 씨가 히브리서 12장에 ‘장자회’라는 문제로 강도함으로 개회한 후에 마포삼열 씨는 떡을 가지고 원두우 씨는 포도즙을 가지고 축사함으로 성찬례를 거행하고 정회하였다가 하오 2시 30분에 계속하여 김석창 씨의 로마서 8장에 ‘나는 괴롭다’는 문제로 강도한 후에 김종섭 씨의 기도로 폐회하다. 서기 한석진”(제1회 총회록p.1). 3.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1915년 제4회 총회) “1915년 9월 4일 하오 8시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제4회 총회가 전주부 서문 밖 예배당에 회집하여 회장 배유지 씨가 기도하고 부회장 양전백 씨가 딤전4:1-16을 낭독함으로 개회하다”(제4회 총회록p.1). “예수교장로회조선 총회”에서 “조선”만 앞으로 옮겼다. 4.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1949년 제35회 총회) “조선예수교장로회는 금후로는 대한예수교장로회로 함이 가한 줄 아오며”(제35회 총회록 p.51) 여기에서는 “조선”을 “대한”으로 변경했다. 한국 장로교회는 선교 1세기를 지난 후 제2세기를 향한 시점에서 서구 교회의 사양화와는 반대로 놀라운 양적 성장에 대하여는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다. 그러나 장로교의 분열은 주로 선교 정책과 신사 참배의 신학적 차이점 WCC적 에규메니컬 운동 등으로 처음에는 고려파, 기장, 통합, 합동 등의 4대 교단으로 나뉘었다가 현재는 수도 헤아릴 수 없이 일백 수십 개 교단으로 분열되었다. 그 분열의 배경을 간단히 요약하면 ① 역사적 정치적 배경과 지역성 ② 정치적 갈등 ③ 유교의 배타성을 꼽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국외적 배경으로 미국의 교파 중심적 선교와 선교지 분할 정책, 그리고 신학적 상이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신사 참배 문제 보수주의와 자유진보주의 및 사회 참여 신학적 배타성 WCC적 에규메니컬 운동의 찬반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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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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