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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인물탐구] 십자가 형장까지 따라간 요한(5)
    예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체포되자 모든 제자들은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수제자로서 제자들의 대장 노릇을 했던 사도 베드로조차도 예수의 형장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베드로는 오히려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것을 두려워하여 주님의 제자임을 극구 부인하면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멀리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스승의 십자가 형장까지 좇아간 자는 사도 요한이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과거 예수님께서 제자의 도(道)를 가르치실 때, 누구든지 당신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좇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한 유일한 제자였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위험조차도 능히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 바로 이런 자가 주님의 제자 되기에 합당한 자입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사도 요한은 주님의 형장까지 좇아간 유일한 제자입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더불어 예수의 십자가 가까이까지 다가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대화가 가능한 자리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에 달린 스승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승의 당부를 들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또한 스승의 어려움을 도와 드리고자 애쓰고 노력하였습니다. 사실 그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곁에서 높은 자리에 앉을 야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스승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며 그 뜻에 순종할 자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항상 주님 가까이에서 주의 말씀을 듣고 주의 뜻을 이행할 만반의 준비를 갖춤이 마땅합니다. 필요하면 주께로 나가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로부터 멀어지는 그런 자세로는 결코 주 앞에서 합당치 못합니다. 마 10:38-39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요한이 예수의 십자가 가까이에까지 나간 것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이 십자가 형틀에서 죽음을 당하는 마당에 예수의 제자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를 저주하며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요한은 이런 상황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예수의 십자가 바로 발아래까지 나갔던 것입니다. 이는 곧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하는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자신이 주님으로 인해 죽더라도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임을 떳떳하게 밝히겠다는 각오가 바로 요한의 가슴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요한처럼 어려운 상황에 처하더라도 당당하게 주님의 제자임을 밝히는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목숨을 걸면서까지 주님의 제자임을 당당하게 밝힐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참으로 주님의 제자로서의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케 됩니다. 수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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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03
  • [은혜의 말씀] 바보사랑 (요한복음 3장 16절)
    우리 아버지의 사랑은 계산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특성을 사랑으로 이해를 할 때 신구약 성경이 다 love story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비추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신다. 평강주시기를 원하신다’라고 합니다. 은혜 베푸신다는 것은 공짜로 선물 보따리를 내리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놀라운 사랑이 은혜이고, 긍휼이고, 평강입니다.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준으로 BC, AD로 나누어집니다. 구약성경에는 오실 예수님이 누구신가, 왜 예수님이 오셔야 되는가를 구구절절 설명하였고, 신약성경에는 오신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을 아무리 말씀하시고 보여주셔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니깐 답답하셔서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내려오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모든 사람들이 구원 얻기를 기뻐하십니다.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인을 천국에 데려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인자하심, 이 딜레마가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기뻐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시지만 죄인을 천국에 데려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령으로 잉태되신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와 부족과 허물을 혼자 덮어 쓰시고 감당하시고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선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영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모든 현실에서 사람들이 잔머리를 굴리고 한 푼도 손해를 안보며 한마디도 지지 않습니다. 이 까칠 충만하고 이해타산이 빠른 세상에 아버지의 사랑에 순종하여 죽기까지 복종해서 이 땅에 내려오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거룩하신 그분이 연약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자체가 셈법이 안 되는 하나님 아버지의 눈먼 사랑, 애타는 사랑, 바보사랑인 것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손해만 보는 사랑, 계산이 안 되는 사랑, 희생적인 그 사랑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너무나 영악한 현실에서 한 푼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말 한마디 밀리지 않으려고 자존심을 세우고 숨이 막힐 것 같은 이 세상의 현장에 오고가는 사람들의 마음하고는 비교 할 수 없는 이 사랑이 우리를 감동 시키는 것입니다. 귀한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내려 보내셔야 되는 속 터지는 사랑. 사람들이 도무지 알아주지 못하는 그 구약 현실을 천년의 사랑을 하면서도 우리 하나님의 그 본심을 몰라주니깐 예수님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보내버리신 것입니다. 사지로 보내신 겁니다. 죽음의 길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계산이 안 되는 사랑입니다. 거래가 불가능한 사랑입니다. 바보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기억하며 서로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며 존경하며 섬기며 받들며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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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03
  • [서임중 칼럼] 하나님의 아픔
    매주 산골, 어촌,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말씀 사역을 한다. 어느 주일을 무론하고 눈시울이 젖지 않은 날이 없다. 대형교회 담임목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또 다른 행복과 감동,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작은 교회를 통해 온 몸과 영혼으로 담는데 왜 자꾸만 눈물이 흐르는가? 은퇴 전에 느끼지 못했던 산자락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 때로는 귀를 간질이듯 포근함으로, 때로는 심장이 멎듯 하는 우레 같은 소리로 들렸다. 한밤중에 도시에서 볼 수 없었던 하늘의 별을 보면서 아브라함에게 들려주셨던 ‘별처럼’이라는 그 말씀을 은퇴하고서야 아브라함이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을 수 있었다. 벌교의 한 교회에서는 한국교회 어디서도 멈추어 버린 예배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 순간 지난날 아름다운 신앙생활의 추억을 들려주듯 한 그 종소리를 통해 내 영혼이 형언 할 수 없는 감동으로 충만함을 느끼면서 저절로 눈시울이 젖었다. 먹을 양식이 없어서 기근이 아니요 마실 물이 없어서 기갈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없어서 기근이요 기갈이라는 말씀을 매일의 양식처럼 입술로 읊조리면서 행복한 교회생활을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종말론 신앙이 희석되어 버린 듯 한 오늘의 우리들 신앙생활을 돌아보면서 부흥사경회가 열릴 때면 앞자리 차지하려고 야단법석을 떨었고 비지땀을 쏟아내면서 손뼉을 치면서 목이 터지라 불렀던 그 때 그 예배 찬송을 시골, 산골, 어촌교회에서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마음 한 편은 이리도 아플까? 도시의 모든 면면을 갖춘 아름다운 교회이든, 산골 시골의 모든 면면에 부족함이 배어있는 초라한 시설의 교회이든, 수천, 수 만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교회이든, 몇 명이 모여앉아 예배를 드리는 교회이든, 주체는 주님이어야 하는데 주님 안 계신 사람들만의 모임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마음자리는 무엇 때문인가? 어느 작은 교회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그날따라 자리에서 일찍 일어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깊은 주님과의 대화의 시간을 가진 날이 있었다. 말 한 마디 소리 내어 기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이 보고 싶다고 속으로 간구할 때 주님은 조용히 다가오셔서 한 도시교회의 주일 예배 장면을 보주셨다. 화려한 시설과 갖춘 환경과 그 어느 한 곳 모자람 없는 교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신 주님은 설교하시는 목사님 뒤에서 회중석을 바라보시면서 울고 계시는 한 분을 보게 하셨다. 그 순간 온 몸이 떨리고 마음이 후들거리면서 눈을 떴다. 놀라운 것은 나의 의식에는 주님인데, 서 계시는 모습은 늘 항상 내가 예배당 마당에서 만난 그분이었다. 놀랍게도 그 분은 언제나 교회에는 오셔도 예배당 안에 들어오시지 않고 항상 마당 구석에 서 있던 그 분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면 내 앞으로 쫒아오시던 그 분이었다. 마음이 혼돈되고 상황이 정리가 잘 되지를 않았지만, 그렇게 몇 시간을 앉아 기도하는 가운데 조용히 내 마음에 담겨진 느낌이 하나님의 아픔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픔을 말하는 경우는 참으로 드물다. 은혜를 말 하려면, 사랑을 말 하려면, 먼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의 아픔을, 그분을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셔야 했던 하나님의 아픔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화려했던 예배당 안에 들어오지 않고 언제나 예배당 마당에서만 서성거렸던 그분을 예배당 안의 그 많은 성도들은 얼마나 관심을 가졌을까? 아니, 언제나 주일 행사를 다 마치고 나오면 나를 기다리는 그분을 향한 목사로서 얼마나 관심을 가졌던가?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 왜 그때는 그런 눈물이 내게 없었을까? 악수 한번하고, 용돈 손에 들려드리고, 한번 품에 안고 어깨를 두드려 위로했던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아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헉헉거리면서 울었다. 교인들이 다 간 시골교회 예배당 강대상에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엎드려 울었다.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십자가의 사랑은 값싼 싸구려 사랑이 아니다. 내 죄를 대신하여 그렇게 피범벅 되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사랑이 십자가 사랑이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 이 사랑이 있는가? 이 사랑을 아는가? 이 사랑을 느끼는가? 수 없이 쏟아내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값싼 싸구려 사랑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낄 때 영혼이 견딜 수 없는 통증을 느낀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픔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느낄 때 “나는 죄인입니다”고 고백되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죄인 됨의 존재개념이 없다. 예수 그리스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稱義)의 그리스도인이 마치 자신이 의인(義人)인양 살아간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픔이다. 요나의 문제점, 탕자 비유의 큰 아들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아픔을 모르는 것이었다. 모든 삶의 기준이 언제나 자아가 기준이 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픔이다. 바울이 유대교도로서 자칭 의인(義人)으로 살아갈 때는 하나님의 아픔이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죄인(罪人)됨을 깨달았을 때 진정한 의인(義認)의 삶이 시작되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다. 의인(義認)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픔이 되는 원망, 불평, 비판, 정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기도, 찬송, 감사, 축복, 아멘의 삶이다. 여기저기에서 하나님의 아픔의 소리를 듣는다. 자신이 의인(義人)이라고 야단법석을 떠는 그것이 하나님의 아픔이다. 사순절의 3월에 하나님의 아픔을 깨달아 죄인(罪人)됨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의인(義認)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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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03
  • [성서연구] 이중으로 써 먹을 수는 없습니다(마태복음 6장 1절)
    불행하게도 아직 우리나라는 국가 청렴도가 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관청 민원 창구의 푼돈 뇌물은 사라졌지만, 일반 서민들은 알 수 없는 고위층의 부정부패는 날마다 신문을 도배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부끄러운 김영란법을 통해 통상적인 인정과 예의라고 할 것들까지 규제하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안타까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비하면 우리 사회가 많이 정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당연한 듯 여겨지던 관행이 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논문의 표절 문제입니다. 사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논문 표절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표절 문제가 사회적 화두가 되면서 학자들도 창조적 논문을 쓰려고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논문에 있어 심각한 문제는 단지 표절만이 아닙니다. 아무리 논문 자체가 탁월한 창조적 논문이라 하더라도 그 논문을 중복 게재하는 것 역시 심각한 범죄입니다. 한 논문은 한 학술지에 한 번만 발표할 수 있습니다. 교수가 해당 논문을 승진을 위해 중복 사용하는 것도 불법입니다. 논문은 한 번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문제는 신앙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의를 행하여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다면, 그 의로운 행위는 이미 한 번 사용되었기에 그 의를 통해 하나님의 상까지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의 중복 사용을 금지한 셈이지요. 한 의를 통해 한 번만 칭찬을 받는 것이라면, 그 의를 통해 사람의 칭찬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이 둘 중 어떤 것이 더 영광스럽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칭찬입니다. 따라서 어떤 의를 행한다면 사람들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상을 받습니다. 의의 중복 사용은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작은 선행이나 의를 행하고 그것을 평생 우려먹습니다. 이건 논문 중복게재와 똑같은 잘못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새로운 의를 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언제가 현재가 중요합니다. 과거에 제아무리 대단했어도 현재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과거엔 대단한 학자였지만 이미 십 수년째 논문 한 편 쓰지 못한 채 뒤처지고 있는 늙은 학자와 같습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해 준 이래로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과 그 후의 회복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한국 근대사와 궤적을 함께 하면서 민족의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과거 선배들이 행한 아름다운 일만 중복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현재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새로운 의를 제대로 행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빛바랜 사진을 꺼내 들고 눈물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 가지 집어 둘 것은 신앙의 세계에서는 표절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아름다운 일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보았다면 우리도 그대로 따라 하면 됩니다. 선행을 행하는 데는 표절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단지 중복 사용만이 문제입니다. 부디 우리 개인도 한국교회 전체도 새로운 의를 행해야 합니다. 잘 하는 이나 교회가 있다면 따라서 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으로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보다 하나님의 상을 받길 원합니다. 이를 위해 오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날마다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새로워져야 날마다 새로운 의를 행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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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03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쉬면 쉴수록 늙는다
    사람은 나이가 많아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과 정열을 잃으면 비로소 늙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사람은 영국인 토마스 파(1438~1589)로 알려져 있다. 그는 152세까지 장수했다. 그의 장수에 관한 소문이 널리 알려지자 영국 국왕 찰스 1세가 그의 생일에 토마스 파를 왕궁으로 초대하여 축하해줬는데 그는 그때 과식한 것이 원인이 되어 2개월 후에 별세했다고 한다. 인간의 수명을 성경은 120세라고 말했다(창6장). 현대 의학자들도 비슷하게 인간의 수명은 125세라고 말한다. 이제 ‘인간 70’은 옛말이 되었고 100세시대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요즘은 인생 100년을 4계절에 비한다. 즉 25세까지는 봄철 50세까지는 여름, 75세까지는 가을, 100세까지는 겨울, 이렇게 말한다. 70세는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만추인 셈이다. 서양에서는 노인의 기준을 75세로 본다. 그들은 65~75세를 ‘young old'라고 칭한다. 사람은 육체적인 연령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젊음이다. 청춘이란 것도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 때로는 20세 청년보다도 70세 노인에게 청춘이 있다. 사람은 나이를 더해가는 것만으로서 늙지 않는다. 이상과 정열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96세에 타계한 피터 드러커는 별세 직전까지 강연과 집필을 계속했다. “아직도 공부를 하십니까?”라고 묻는 젊은이들에게 “인간은 호기심을 잃는 순간 늙는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세계적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는 “이제 쉴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쉬면 늙는다”는 말을 했따. 정신과 의사들도 말한다. “마음이 젊으면 몸도 청춘이 된다”하고 ‘이 나이에 내가 어찌...’ 이같은 생각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2월 23일자 조선일보에 보니 대만 자오무어는 지금 나이 105세인데 그는 90대에 학사와 석사의 학위를 받았다. 이제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다고 한다. 자오 할아버지는 86세에 대학에 입학했다고 한다. 대학에 가고 싶지만 성적이 안 좋아 눈물을 흘리는 손자를 위해 대학에 함께 원서를 내고 손자와 할아버지가 재수 끝에 나란히 대학생이 되었다고 한다. 자오 씨는 매일 자전거로 통학하며 졸업할 때까지 단 하루도 결석하지 않았고, 4년만에 회계학과를 졸업했다는 것이다. 자오 씨는 대학원까지 마쳐 세계 최고령 석사학위취득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그의 좌우명은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은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이다’라는 말이라고 한다. 사람은 일할 수 있고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생을 마칠 때까지 활동해야 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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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03
  • [이상규 교수의 부산기독교이야기 2] 부산에 살았던 첫 서양인 가족은 누구였을까?
    부산에 살았던 최초의 서양인은 누구였을까? 많은 이들이 부산에 왔던 호주 혹은 미국인 선교사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부산을 일시적으로 방문했던 서양인들도 없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부산에 온 첫 서양인은 1593년 웅천에 왔던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a de Cespedes)로 알려져 있다. 경상남도 진해 인근의 웅천에 주둔하고 있던 왜장 고시니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요청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12월 27일 내한한 그는 약 1년간 웅천과 인근 부산지역에서 살았다. 화란인 하멜이 제주도 모슬포에 표착했을 때가 1653년이었으니 하멜보다 60년 앞선다. 그러나 세스페데스는 종군신부였고 가족이 함께 조선에 정착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부산에 정착했던 첫 서양인 가족은 누구였을까? 그가 바로 1883년 10월부터 1886년 5월까지 2년 7개월 간 부산에 살았던 영국태생 미국인 윌리엄 넬슨 로바트(William Nelson Lovatt, 1838-1904)였다. 영국인인 그는 1883년 10월 단신으로 부산으로 와 초대 부산 해관장으로 근무하던 중 1884년 여름 미국출신의 부인 제니(Jennie)와 막내 딸 마벨(Marbel Elizabeth)이 부산으로 와 정착함으로 부산에 거주한 첫 서양인이 되었다. 로바트에게는 장녀 헬렌 마가렛(Helen Margaret)과 차녀 이다 엘리자벳(Ida Elizabeth), 장남 존 쇼우(John Show)가 있었으나 교육문제로 미국 미네소타 주 레익랜드(Lakeland)에 남겨두고 부인과 4살 된 막내딸만 데리고 부산에 거주하게 된 것이다. 부산해관은 1883년 7월 행정업무를 시작하였는데, 당시 본정(本町)으로 불리던 동광동 2가 3번지 소재 일본인 가옥을 빌려 개청했다. 1885년에는 현재의 부산데파트 자리에 목조 2층 청사와 보세창고 1동을 지어 이전하게 된다. 로바트가 내한했을 당시 별도의 사택이 없었음으로 지금의 동광동 1가 입구쪽의 일본인 주택에 기거했는데, 그가 부산에 거주하는 동안 해관업무를 총괄하면서도 해안지대에 해관청사를 건축하고 보세창고를 지었다. 사실 그는 주목 할만한 역사적 인물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의 역사가들에게 알려져 있지도 않고, 그의 행적은 주목을 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최근 그의 일기, 편지 그리고 여러 사진이 발굴되어 조선 후기 격변기에 대한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이런 자료를 근거로 웨인 패터슨(Wayne Patterson)은 로바트에 대한 책 『폐하의 분부를 받들어』(In the Service of his Korean Majesty)를 썼는데, UC버클리의 동남아시아연구소에서 출판되었다. 나는 우연하게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Korea Times)에서 이 책자를 알게 되었고, 급하게 주문하였으나 여러 일로 분주하여 탐독을 미루고 있다. 그는 당시 흔치 않던 사진기를 소지하여 그가 남긴 사진 자료는 중요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북장로교의 사이더보텀(Richard Sidebotham)의 사진이 1899년 이후 것이고 엥겔(G. Engel)의 사진이 1900년 11월 이후의 것인 반면에 로바트의 사진은 1883~ 85년 부산 사진이니 그 가치가 높을 수 밖에. 지금의 광복동 롯데백화점에 인접한 해안 사진을 비롯하여 북항과 남항 자칼치 사진, 용두산 송림 아래의 일본 영사관 사진, 광복동 일본인 거리, 부산포 내항 전경, 일본인 거류지 사진, 자성대 성벽이 보이는 부산진 사진 등은 로바트가 남긴 역사의 기록이다. 부산에 거주한 첫 서양인 가족 로바트는 청나라의 압력으로 묄렌돌프가 해임되자 자신도 재신임을 받지 못하고 결국 부산을 떠나게 된다. 복잡하게 얽힌 조청(朝淸) 간의 정치적 이해관계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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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17-02-16
  • [목회자칼럼] 같아 보이나 다르다 (1)
    우리 주변에는 얼핏 보면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확연히 다른 것이 적지 않다. 사람을 생각해 보자. 우리 눈에는 영국, 독일, 네델란드 사람들이 같아 보인다. 도저히 구분이 안 된다. 그러나 그들 세 나라는 언어와 풍속이 아주 다르다. 마찬가지로 서양 사람들의 눈에는 한국, 중국, 일본 이 삼개국 사람이 전혀 구분이 안 된다. 그러나 우리들의 눈에는 구분이 된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언어와 문화 그리고 사고방식에서 차이가 매우 크다. 〈남북한〉도 그러하다. 대부분의 외국 사람들은 South Korea이냐 North Korea이냐 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때 그 때 생각나는대로 “당신은 북한 사람인가? Are you north korean?” 이렇게 물어오는 사람도 있다. 우리 입장에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그 서양 사람이 얼마나 한심한 사람으로 보이는지 모른다. 그들의 눈에는 〈남한 사람이나 북한 사람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비슷할 것이다.〉 이렇게 예사로 생각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남북한을 연구하고 공부하였다면 남북한은 비슷한 것이 아니고 엄청난 차이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 이다. 남북한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요즘 토요일 저녁마다 광화문 앞과 서울 시청 앞에서는 “대통령을 탄핵하라!”고 외치는 촛불 시위대 100여만명과 “대통령을 탄핵하지 말라!”고 외치는 태극기 시위대 100여만명이 불과 500m 거리를 가운데 두고 열심히 외치면서 시위를 하고 있다. 만약 평양의 최고 중심거리에서, 최고 통치자가 거주하는 만수대 정문 가까운데서 평양 시민 100만명이 모여 “김정은 퇴진하라!”고 목청껏 외치면서 촛불을 들고 시위를 한다면 과연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그 결과를 자유민주주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남쪽에는 예의상으로도 참으로 지나친 행동이지만 광화문쪽 시위대에는 대통령 얼굴에 온갖 공격적이고 증오가 담긴 문구를 새긴 사진이나 그림 피켓을 들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심지어 짓밟기까지 한다. 그러나 북쪽은 어떠한가? 평양 모란봉 언덕에는 70년간 3대(三代)에 걸쳐 공산 독재를 이끌고 있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父子)의 동상이 20m 높이로 세워져 있고 북한 2300만 주민들은 차례대로 쉴 새 없이 그 곳을 찾아 꽃다발을 바치면서 절 (숭배) 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북한의 가정에는 통치자의 사진이 안 방 벽면에 액자로 만들어 걸려있으며 북한 사람들의 겉옷에는 통치자의 얼굴 사진 뺏지가 부착 되어 있다. 실제로 우리 남한(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최고 수준의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 개인의 자유가 지나치리 만큼 넘쳐나고 있다. 경제력도 전 세계 220여 국가들 중에서 거의 10~12위권 톱 클래스(최상위) 권을 달리고 있다. 그러므로 외국 사람들의 눈에 남과 북은 너무도 비슷해 보이겠지만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난다. 이런 현상은 종교 또는 신앙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오해나 착각이 수시로 일어난다. 필자는 대한민국의 남자로서 군복무를 〈군종 장교 : 군목〉 로 수행하였다. 신학대학 재학 중 국방부의 〈군종 장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을 하고, 7년의 대학과 신학대학원 과정을 다 마친 후 입대하여 상무대 보병 학교에서 만 4개월 동안 강도 높은 교육과 훈련을 이수하고서 육군 중위로 임관하였다. 강원도 최전방 부대로 배치를 받아 군종 장교로서의 임무를 시작하는데 목회자로서 첫 번째 직면해야 하는 문제가 〈신입 병사 · 新入兵士)들 「종교 선택 카드 작성」 문제 였다. 이 문제는 특이하면서 신기하기도 하였지만 목회자로서는 참으로 우려스럽고 슬픈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심각한 문제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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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16
  • [중독칼럼] 분노조절 장애와 로직에러(2)
    본인은 로에현상과 일중심형을 비슷한 인격으로 구분한다. 일중심형의 사람들은 대체로 대인관계가 썩 좋지 않다. 아무래도 일중심이다 보면, 결과론적 사고방식으로 말미암아 그 과정은 깡그리 무시한 채 상대방을 힘들게 한다. 본인은 이들을 일중독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중독에는 게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론 설교자 가운데도 모든 것을 열매 위주로 설교하시는 분들도 봐왔다. 안타깝다. 결국 우리는 한 영화의 ‘뭣이 중헌디?’ 유행어처럼 삶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짧은 지면상 내 감정부터 쓴다.) 앞 칼럼11에서 로직에러(Logic Err, 로에) 현상의 대한 용어를 정의한 바와 같이, 우리는 컴퓨터, 스마트폰, 그 외 사회 조직 등이 수와 관련된 Logic의 체계가 더 좋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이유로 우리의 뇌는 여기에 고착화되기 쉬운 환경에 놓여있다. 그래서 부부, 가정생활도 이러한 개념 속에서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 범위 내에 관계가 형성되어진다. 교회도 마찬가지 인듯하다. 목사가 성도의 삶을 눈치 보며 따라 갈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라고 말한다. ‘뭣이 중한가?’ 이것을 놓치게 되면 결국 인본주의적 중심으로 합리화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본질, 법, ruler, 말씀, 진리, 율법,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이런 단어들의 공통점 즉 우리에게 주는 핵심은 인간 삶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중독, 즉 과의존 된 또 다른 기준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삶이다. 중독과 여가는 한 끗 차이다.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고 본다.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차이가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여기서 우리 삶의 향방뿐 아니라 삶의 질까지 결정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새법을 주셨다. 용납하고 용서하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대접하며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법을 주셨다. 이것은 일 중심형의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영혼 중심의 삶을 뜻한다.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의 뇌가 logic적인 삶의 방식에만 매여 - 본인은 합리적인 사고 방식도 이에 포함한다. - 예배와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살피며 보이는 것만 쫓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보는 안목이 있을 때, 성령의 간섭으로 인해 이 모든 타락한 문화를 대적할 능력이 생김을 확신한다. 에베소서 6장 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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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16
  • [교회법률상식] 총회 기소위원회, 정치부 상설화 어불성설(1)
    - 기소 위원은 범죄 예상 아닌 범죄 발현 후 치리회가 선정해야 - 총회의 기소 위원 정치부 상설화 결의 위헌적 결의로 시행 불가 [질의] 합동 제101회 총회가 총회 기소위원회와 정치부의 상설화를 결의하여 기소위원회는 해당 회기에 총회 결의를 이행하지 않는 자를 기소하게 하고, 정치부는 총회를 파회한 후에도 계속 존속하여 총회가 위탁하지도 않은 새로운 차기 총회의 업무를 심의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였습니다, 이는 교회 헌법과 상충되는 것이므로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총회 결의로는 시행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에 대한 목사님의 법리적 답변을 바랍니다. (P목사) [답] 질의자의 질의 내용 안에 답이 정리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보다 더 상세히 정리하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본건에 대한 사실 관계 합동 제101회 총회가 총회 기소위원회와 총회 정치부를 상설화한다고 하면서 기소위원은 총회를 파한 후 새로운 사건을 기소케 하고, 정치부는 총회를 파한 후에도 계속 존속하여 정치적인 안건이 접수되는 대로 심의케 한다는 잠꼬대 같은 기상천외한 불법 결의를 하여 합동 교단에 먹칠을 하고 있다. 그 실상의 내역은 2016년 10월 11일자 기독신문 제2076호 4면에 “제101회 총회 헌의 안 처리 결과 기구 개편 및 신설”이라는 머리기사의 소제목으로 “총회 기소위원회(상시) 신설의 건”의 내용으로 “해당 회기 총회 결의를 이행하지 않는 자에 한하여 권징 조례 제2장 제7조에 의거 기소 위원을 두어 기소토록 하되 해 기소 위원이 기소한 건은 본 총회가 원고로 기소한 것으로 하며 기소 위원 선정은 매회 때마다 총회 파회 전 임원회가 3인을 선임하여 본 회의 허락을 받는다.”라는 보도에 이어 2016년 12월 13일자 기독신문 제2084호 2면에 “제101회기 총회 특별위원 명단, 총회 상설 기소위원회 : 서○○, 이○○, 김○○”이라고 기소 위원의 명단을 보도하였으니 이미 시행 단계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2016년 10월 4일자 기독신문 제2075호 2면에는 “정치부 상설화하고 실행위원회 역할 강화”라는 머리기사 내용으로 “제101회 총회의 … 가장 주목할 만한 결의는 정치부 상설화와 총회 실행 위원회 역할 강화다.”라고 보도하였다. 이는 총회 정치권의 일부가 불법을 자행하면서 마치 혁신 개혁이나 하는 것처럼 의시대면서 총회를 불법 탈법으로 난장판을 만들려 하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2. 총회는 비상설체 조직 정치 제12장 제7조(개폐회 의식)에 “총회가 기도로 개회하고 폐회하되 폐회하기로 결정한 후에는 회장이 선언하기를 「교회가 나에게 위탁한 권세로 지금 총회는 파(罷)함이 가한 줄로 알며 이 총회 같이 조직한 총회가 다시 아무 날 아무 곳에서 회집함을 요하노라.」 한 후에 기도함과 감사함과 축도로 산회(散會)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에서 “지금 총회는 파함이 가한 줄로 알며 이 총회 같이 조직한 총회가 다시 … 회집함을 요하노라”라는 파회 선언의 의미는 총회야 말로 비상설체 조직으로서 파회를 선언함과 동시에 총회도 없어지고 총대권도 종결되었으니 차기 총회가 회집될 때까지 파회된 총회의 모든 조직이 절대로 상설 존재할 수 없으므로 총회 파회 후의 새로운 모든 사건과 안건에 대하여 차기 총회 외에는 어느 누구도 어떤 사건도 처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제101회 총회가 어떤 미지의 범죄 사건을 미리 예상이라도 하듯 교회 헌법이 금하고 있는 기소 위원을 상설 조직화하기로 결의하여 범죄 사건이 발생하면 기소 위원이 즉시 기소하여 총회의 원고 노릇을 하게 했다. 거기에다 총회 파회 후에 접수된 일반 행정 서류는 정치부를 상설 조직화하기로 결의하여 정치부에 초헌법적 특권을 부여하여 심의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상설 기소 위원이 기소한 사건이나 상설 정치부가 심의한 그 일반 행정 안건들은 “위원회 심사의 원칙”에 의하여 예비 심의에 불과하고 차기 총회의 본 심에서 종결하는 것이 법리이거늘 비상설체인 총회 조직을 상설화로 결의하여 시행하려는 것은 헌법을 짓밟고 헌법과 상충되는 내용을 치리회의 결의로 시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천부당만부당한 불법 범죄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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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16
  • [교회학교를 살린다] “신앙의 집에 시간을 확보하라.”
    미카엘 엔데의 소설 『모모』는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수작이다. 소설에서 처음에 아이들은 모모를 중심으로 마을 공터에 모여서 매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무 것도 없어도 그저 상상의 나래만으로도 배를 만들고, 파도를 헤치며 행복하게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에 시간을 도둑질해가는 회색 신사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마수에 넘어간 부모들은 너도나도 공터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탁아시설에 맡겨버린다. 이때부터 아이들은 시설 속에 갇히고, 어른들은 돈 버는 일에만 매진하며 매일 기계처럼 살아간다. 잘 먹고 잘 사는 가정을 만들자고 시간을 아끼며 아등바등 살았건만, 정작 가정에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적어지고, 삶을 풍성하게 하는 시간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44년 전에 나온 이 소설은 지금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남녀노소 없이 바쁘게 살고 있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교회도 다음세대를 만날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일주일 168시간 중에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단 1시간뿐이다. 교회에서 아이들은 예배 30분, 성경공부 30분을 바쁘게 마치고는 서둘러 학원과 집으로 향한다. 이러한 시간적 환경은 아이들에게 신앙의 가치관을 전혀 심어줄 수 없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중요한 과목일수록 수업 시간이 많아지는 것을 경험하며 생활한다. 그런데 일주일에 단 한 시간을 신앙교육에 투자한다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교회가 아이들의 신앙을 품고 자라게 하는 신앙의 집으로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일단 아이들이 오래 머물고 생활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또한 가정에서도 신앙의 집을 짓는 시간이 필요하다. 성민교회에서는 올해부터 가정예배 드리기 캠페인을 하고 있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가족 구성원간에 시간 맞추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어떤 가정은 부모님이 밤 10시에 퇴근해서 청소년 자녀와의 고군분투한 가정예배현장의 인증샷을 찍어 교회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했다. 각자 너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어서 한 자리에 모이는 것도, 그 금쪽같은 시간을 신앙교육에 투자하는 것도 참 힘든 세상이 되었다. 올해 초,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부모님께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은 한 설문조사에서 아이들의 52.8%가 선택한 1등은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응답이었다. 용돈이나 선물이라고 응답한 아이들 보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원한다고 응답한 아이들이 두 배 이상 많았다. 우리는 때로 시간이 부족하면 그 적은 시간이라도 질을 높여서 보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함께함의 질은 함께함의 양에서 비롯된다.”는 한 상담전문가의 말이 떠오른다. 함께하는 절대 시간이 부족하면 함께함의 질도 역시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교육도 마찬가지이다. 무엇보다 먼저 함께함의 양을 확보해야 한다. 교회에서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뛰어 놀고, 함께 말씀을 나누는 절대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육부서의 예배시간을 점검해서 아이들이 오기 편한 시간대인지, 예배 마치고 식탁공동체를 가질 수 있는지, 오후에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을 여유 있게 제공할 수 있는지 검토해 보자. 이해인님은 ‘사랑과 시간’이라는 수필에서 ‘시간이 없다’는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곧 ‘사랑이 없다’는 말이라고 이야기했다. 시간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사랑을 채워 보자. 올 한해 교회마다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북적이는 행복한 모습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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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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