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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칼럼] 순종에 대한 묵상 (2)
    주후 2016년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성경을 통해 깊이 주목하면서 묵상하고 싶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장엄하고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사건이 무엇일까? 단연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찾아오신 것이다. 이 사건 말고 다른 사건이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제안해주기를 요청한다. 올해는 2016년이다. 이 연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2016년 전 저 이스라엘 땅 베들레헴 한 여관의 마굿관에서 탄생하신 때를 기준한 숫자이다. 이 연호를 지구상 75억 인류가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이 인류 역사 최대의 감동적인 사건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온 인류에게 <사랑과 생명과 우정>을 보급하고 증진시키는 최고 아름다운 국제기구가 「만국적십자사=국제 적십자 본부」이다. 그리고 이 국제기구의 상징모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러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골고다(해골) 언덕에서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붉은 피를 흘리면서 죽으셨는데 이 ‘십자가 죽음’ 또한 인류 역사에서 위대한 사랑과 희생을 웅변해주는 최대의 사건이기 때문에 인류의 사랑과 생명존중을 목적으로 하는 적십자사(Red Cross)가 그 문양을 <십자가十字架>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73억 인류 중 20억 인구가 내면의 진실성에는 다소 차이가 있겠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엄숙하게 부르고 있다. 성경은 가장 오랜 세월동안 가장 많이 출간될 뿐 아니라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영원한 인류의 책>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 우리가 깊이 감동하면서 들여다 보아야 할 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촌 이 세상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요 1:14, 딤전 1:15, 히 5:7~10). 필자는 이 사실에서 내 생애 최대의 전율을 느낀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과 동등 되시며 하나님이신> 그 분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탈도 많고 문제도 많은 이 지구촌을 찾아오셨다니! 그것도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그것도 어린 태아와 아기로, 그것도 베들레헴의 어느 여관집에서 방 하나 구할 수 없어서 그 집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가축이 먹이를 먹는 <구유>에 누이시다니! 우리 인류 역사에서 이 같이 자신을 끝없이 낮추고 또 낮춘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어 본적이 있는가? 이 분 예수 그리스도는 소년 시절에는 <순종하여> 받드셨고(눅 2:51), 청년기부터는 우리가 밟고 겪는 <고달픈 인생현장>을 그대로 밟아가셨다. 이 희귀한 사실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올해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맞이한다. 2016회째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Holy Birth)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떠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고달프고 문제 많은 지구촌으로 내려오시고 찾아주시는 탄생(강림)의 역사와 사건에서 우리가 반드시 주목하고 깊이 깨달아야 할 한 가지 단어가 있다. 무엇일까? 그것은 ‘순종’이다. 그 분의 <순종>이 그 분의 탄생과 고난과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였다. 우리 모두 이번 2016 메시아 성탄에는 <순종>이라는 단어를 오래, 깊이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자. 그 분의 ‘순종’이 가슴 저미게 다가오는 몇 관련 성구를 소개하고 싶다. 함께 깊이 묵상하면서 음미해보자. ①이사야 53:2~3 ②요 1:14 ③딤전 1:15a ④눅 2:6,7,51 ⑤마 8:20 ⑥마 20:28 ⑦마 26:39,42 ⑧히 5:7 ⑨ 히 5:8~9 필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마우신 성탄을 기념하고 감사하면서 올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우리를 가슴 저미게 만드는 그 분의 ‘순종’ 이 두 글자에 우리의 눈과 마음을 고정시켜 보자! 묵상을 통한 이 깨달음이야 말로 분명코 주께서 기뻐 받으시는 구주 성탄 예물이 될 것이다. 히브리서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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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2
  • [교회법률상식] 미조직 교회에 담임 목사 위임예식 불가
    [질의] 서울 선천교회(곽효근 목사 시무) 사건입니다. 선천교회는 오랫동안 어떤 교단 어떤 노회도 가입하지 않고 독립 교회로 있다가 얼마 전에 합동측 삼산 노회에 가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선천교회는 시무 장로가 한 사람도 없고 선천교회가 위임 목사를 노회에 청원한 일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삼산 노회 윤남철 목사가 다른 목사 4명을 대동하고 선천교회에 와서 곽효근 목사를 위임 목사로 위임예식을 하였습니다. 선천교회는 미조직 교회인데도 목사 위임예식을 하는 것이 합법인지 불법인지 목사님의 법리적인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서울 평신도 올림) [답] 삼산 노회와 선천교회의 자세한 상황을 알 수가 없어 질의자가 질의한 내용 문장에 따라 위임 목사의 청빙 청원과 위임예식의 요건에 관하여 법리적으로 답한다. 1. 반드시 조직 교회이여야 한다. 정치 제4장 제4조 1항(위임 목사)에 “한 지교회나 1구역(4지교까지 좋으나 그 중 조직 교회가 하나 이상 됨을 요함)의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만 70세까지 시무한다. 목사가 본 교회를 떠나 1년 이상 결근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그 위임이 해제된다.”라고 규정하였다. 지교회의 위임 목사 청빙 청원과 위임예식의 절대적 요건은 반드시 조직 교회이어야 함이 필수 요건이다. 이는 장로교회는 정치 총론 5. (장로회 정치)에 “이 정치는 지교회 교인들이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치리권을 행사하게 하는 주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이다.”라고 규정한 대의 민주정치이기 때문이다. 2. 목사 청빙을 위한 공동의회에 대하여 정치 제21장 제1조(공동의회) 5항에 “일반 의결은 과반수로 하되 목사 청빙 투표에는 투표수 3분의 2 이상의 가와 입교인 과반 수 이상의 승낙을 요하며”라고 규정하였다. 목사 청빙을 위한 공동의회는 일반 공동의회와는 달리 투표수 3분의 2 이상의 가표를 받고 입교인 과반 수 이상의 서명을 받아 노회에 청빙허락 청원서를 제출하여 노회의 허락과 노회가 일임한 위임국에 의하여 위임예식을 행하여야 한다. 즉 조직 교회의 공동의회에서 투표하여 청빙하고 위임예식에서 치리에 복종하겠다고 서약한 위임 목사에게 치리권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3. 세례 교인이 25인 이상에 대하여 정치 제9장 제1조(당회의 조직)에 “당회는 지교회 목사와 치리 장로로 조직하되 세례 교인 25인 이상을 요하고(행 14:23, 딛 1:5) 장로의 증원도 이에 준한다.”라고 규정하였다. 근본적으로 위임 목사를 청빙 청원할 수 있는 절대적 요건은 조직 교회이어야 한다. 그런데 장로 1인을 임직하여 조직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세례 교인 25인이 절대 필수 요건이다. 따라서 위임 목사의 청빙 요건에도 세례 교인 25인이 절대적인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는 미조직 교회가 최초로 당회를 조직 하는 경우를 의미하고 이미 당회가 조직되어 있는 교회의 경우에는 세례 교인이 사망 또는 이명해간 결과로 세례 교인이 25인 미만일지라도 조직 교회 즉 시무 장로가 있기 때문에 위임 목사를 청빙할 수 있다. 4. 결론 본건 선천교회는 시무 장로가 없는 미조직 교회로서 삼산 노회에 가입한 후 위임 목사 청빙 허락 청원을 위한 공동의회도 하지 않았고 노회에 목사 청빙 청원서를 제출하지도 않았는데 윤남철 목사가 목사 4인을 대동하고 선천교회에 와서 목사 위임예식을 거행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범죄 행위요, 목사 위임예식은 당연 무효이다. 이에 대한 후속 조치로 노회는 정기 노회 시에 당회록 검사부가 선천교회 당회록을 검사하여 미조직 교회 여부와 공동의회 여부와 위임예식 여부를 확인하여 관계자를 문책해야 하고, 총회는 총회의 노회록 검사부로 하여금 본건 사실에 관계되는 삼산노회 노회록에 선천교회 위임목사 청빙 허락 여부를 검사하여 불법 사실이 확인되면 총회는 권징조례 제76조에 규정한 대로 총회가 직접 변경 처리하든지 하회에 환송하여 처단할 것을 지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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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2
  • [성공칼럼] 공평(公平)과 의(義)
    성경이나 영화나 T.V.에 나오는 죄악의 종류는 걱정, 분노, 우울함, 증오, 미움, 거짓말, 폭력, 자기를 높이는 것, 권력 추구, 돈, 건물 등의 소유욕, 성적인 쾌락, 지배욕, 자기숭배 등이다. 이 모든 것을 행하게 되면 몸이나 마음, 영이 죽어가고, 자기도 죽고 그 주변의 사람들이나 환경도 망가지는 것이기에 피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쁜 줄 알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런 죄악들을 선택하고 행동으로 옮긴다. 이런 죄악들은 몸과 관계와 사회를 망가뜨리게 된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공평과 의라고 할 수 있다. 공평과 의가 있으면 함께하는 삶이 사랑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 하신다’ 또는 ‘공평과 정의’라는 말씀이 많이 나온다. 천국은 어떤 곳일까? 공평과 의가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평’이란 공정한 분배를 말하고 ‘의롭다’라는 말은 사랑과 선이 있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심판하신다고 하는데 이 ‘공의로 심판 한다’는 말이 무엇일까? 예를 들어, 담배를 피우면 몸이 망가지고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준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것이 공평하고 의로운 법이다. 그런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그래? 담배가 그렇게 나빠? 그러면 끊어야지!”라고 하면서 담배를 끊으면 이 사람은 공의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담배가 얼마나 유익한데.. 담배는 끊을 수 없어... 담배는 어떤 이유에서든 절대 못 끊어. 난 그냥 일찍 죽을 거야.” 하며 계속 담배를 피우는 것이 공의를 외면하는 것이며 결국은 공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얼마 전에 30년 동안 삼촌의 명의로 되어있는 아버지의 땅이 팔릴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면서 삼촌과 아버지께서 나에게 이 돈의 분배를 맡겼다. 나는 공평과 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 나는 이 돈에 대해 조금의 바람도 없어야 했다. 내가 이 돈에 조금이라도 욕심을 부리면 공의로운 분배는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돈을 어떻게 분배할까? 공평하게 나누고 이 돈으로 인해 형제간에 사랑이 더 깊어져야 했다. 먼저, 이 땅의 법적인 소유자는 삼촌이었다. 그러나 실제 소유자는 아버지다. 삼촌이 “이 땅은 법적으로 내 것이다.”라고 주장하면 삼촌이 100% 이긴다. 공평하다. 그러나 형제사이는 멀어지게 될 것이다. 즉 공평하기는 하지만 의를 잃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도 삼촌과 아버지는 서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을 한다. 형제끼리의 사랑이 가득한 의로운 모습이다. 그러나 돈을 분배할 수 없기 때문에 공평함은 잃는다. 나는 삼촌과 아버지에게 반반씩 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자 두 분이 다 좋아하셨다. 이제 남은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우리 삼남매의 분배가 남았다. 돈에는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힘이 있기에 돈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욕심이 생기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방법도 공평과 의를 잃지 않는데 있는 것이다. 나는 일단 부모님이 다 가지시고 저금해 놓고 노후에 사용하시라고 했다. 우리 형제들도 동의했다. 그런데 부모님은 “싫다.”고 하시면서 “너희가 가지라”고 하셨다.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했지만 나는 공평과 의라는 초점으로 부모님의 통장에 일부를 저금하고 세 자녀들에게는 아들, 딸 구별 없이 똑같이 나눌 것을 요구했고. 우리 삼남매는 자기가 받은 돈에서 일부를 나중에 부모님이 편찮으실 때나 돈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가족통장에 넣어놓을 것을 제안했다. 그러자 모두가 좋다고 했다. 우리가족은 돈으로 인해 공평과 의로움을 잃지 않았으며 더욱 신뢰하고 서로를 위하는 가족이 되었다. 나는 이 돈의 분배를 경험하면서 공의로 심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자신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내 것이 아닌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공평한 분배로 인해 서로 간에 사랑과 신뢰가 넘치는 하나가 되어 공평과 의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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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2
  • [은혜의 말씀] 알고도 하나님께 감사 하였더라 (다니엘 6장 10절)
    다니엘은 최악에서 최상으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 환경, 배경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환경에 위축되지 않고 선명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실패하는 사람들의 열 가지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부정적입니다. 둘째, 옷을 잘 못입습니다. 셋째, 친구관계가 소홀 합니다. 넷째, 사소한데 목숨을 겁니다. 다섯째, 원망과 핑계와 변명이 많습니다. 여섯째, 정확한 목표가 없습니다. 일곱째, 과거에 집착 합니다. 여덟째, 쉽고 편한 길을 가려 합니다. 아홉째, 의소소통능력이 없습니다. 열 번째, 매사에 의욕이 없고 무기력합니다. 실패하는 사람의 10가지 특징은 우리 속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 스타일은 이 10가지 특징과 거의 반대입니다. 다니엘 스타일은 긍정중독이라고 보면 됩니다. 전에 하던 대로 그대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합니다. 좋은 중독인거죠. 그 기도의 결론이 중요합니다. 기.승.전. 감사. 자기한테 불리한 일들이 벌어질 것을 미리 알고도 일단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다니엘의 힘입니다. 나라가 뒤숭숭한 이때에 우리가 감사절을 지내면서 감사할 건더기가 없는데 다니엘 스타일을 보면서 최악에서 최상으로 전혀 환경과 배경 조건이 뒷받침이 안 되는데도 일단 감사, 평생감사, 선불감사 해야 합니다. 일이 많을 때 피곤을 느끼지 말고 일복이 많은 게 복이 많다 그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세계를 경영하시고 운행 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감격 시대를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지낸 청교도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지만 일곱 가지 감사를 했습니다. 작은 배라도 주셨으니 그것 타고 대서양을 건너게 되니 감사, 117일간 계속 항해를 할 수 있었으니 감사, 두 사람이 항해 중에 죽었지만 어린아이가 태어났으니 감사, 닻이 부러졌으나 파산되지 않았음을 감사, 파도에 휩쓸린 사람들이 구출되었으니 감사, 호의적인 원주민을 만나 상륙지점을 잘 만났으니 감사, 한명도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자는 사람이 없으니 감사. 이 상황에서 감사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지만 일곱 가지 감사를 하고 살아간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우리 하나님은 협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니깐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영생의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염려와 걱정을 태산같이 하고 우울하게 보낼 일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라, 감사함으로 아뢰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킬 것입니다. 감사가 일상이 되고 성품이 되기까지 몸과 마음을 늘 새롭게 하여 우울한 현식 속에서 기가 막힐 일들이 닥칠 때마다 눈을 들어 주를 바라보고 항상 우리에게 복 주실 주님을 대망하면서 현실의 고단함을 떨치고 일어나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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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2
  • [중독칼럼] 온라인 중독 문화가 어디까지 우리 삶에 침범할 수 있을까?
    온라인 문화에 이미 익숙하거나 별 생각이 없는 부모세대들이 사실 많다. 특히 pc방 1세대라 할 수 있는 7080세대다. 이들 부모들은 스마트폰 세대의 자녀를 두고 있다는 것이 특징인 동시에, 육아를 스마트폰으로 한 경우가 허다하다. 거의 대부분의 부모들은 이 온라인 중독 문화도 사람들이 쉽게 극복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PC방 폐인 생활의 경험과 다섯 아이를 키우고 있는 환경 속에서, 중독 문화 치유 사역을 하며 공부하고 체험한 결과, 그 내용 중에 경각심을 일으킬 만한 심각한 내용을 한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공부도 잘하고 말 잘 듣는 신앙의 가정의 고등학생 아들을 둔 부모의 이야기다. 평범한 아이, 자기 할 거 잘 하니까, 스마트폰도 별 문제 없겠지 하고 2-3년이 흘렀다. 그런데 온라인 스포츠 도박에 빠진 것이다. 쉽고 빠르게 승부를 볼 수 있다는 점에 끌려, 잘하면 한 방에 대박 날 수 있다는 생각에,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거나, 알바하면서 모은 돈을 다 탕진했다. 결국 부모의 돈을 손대기 시작했고, 알바하면서 사장에게 급전을 선불하기도 했다. 그는 대학생이 되어서 급기야 사채까지 손을 되어 낭패를 보게 되었다. 짧은 시간에 일확천금을 노리는 마음이 결국 한 청년을 깊은 수렁에 빠지게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연출 되어 진 것은 이 청년의 뇌 구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1. 세상 문화의 방식으로 바뀌었고 2. 성공 출세 쉬운 방법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3. 충동적이고 중독성이 강한 류에 끌리기 시작했다. 4. 점점 자아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보다는 세상 가치관에 우선 순위를 뒀기 때문이다. 어떤 중독 치료사들이 이렇게 말한다. ‘결국 중독증을 극복하려면 자기 내면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인간의 타락한 죄성, 그런 자아에 대한 깨달음 없이는 청소되어지고 나면 더 강하고 더 더러운 것들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청소되어진 그 내면에 성령의 충만함으로 채우지 않는다면 결국 똑같거나 더 강한 중독에 빠지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자기 내면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다. 또한 이 말씀을 주입하기 위해 동기 부여가 필요하다. 때론 간접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P폐나목”(나침반출판사)의 저서를 읽어보라. 참고로, 본 저자는 그 동기 부여의 한 방법으로 “프로게이머육성 발굴 대회(vol.1)”를 준비하고 있다. 칼럼8번째에 이미 언급했지만, 음지의 있는 청소년들을 양지로 끌어내기 위한 사역 중 하나다. 그 통과는 1순위가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면 멘탈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현 시점에서 교회는 가장 훌륭한 후견이 될 수 있다. 이 사역에 대해서는 다음 칼럼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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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2
  • [소강석 칼럼] 진정한 성탄 선물, 화해
    1954년 인도차이나 문제로 강대국의 총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 자리에 중국의 주은래가 제일 먼저 도착하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팰래스 장관은 시간이 급해서 제일 늦게 도착을 했다. 그가 도착하자 주은래가 반갑다고 악수를 청했다. 그런데 팰래스는 “나는 지독한 공산주의자와는 악수를 나눌 수가 없다”고 하면서 매몰차게 악수를 거절해 버렸다. 그 때 주은래가 얼마나 무안했는지 모른다. 낮이 뜨거워서 회의를 어떻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 일로 인해 주은래는 앙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앙심은 펠래스에 대한 개인적인 앙심이 아니라 미국을 향한 앙심으로 비화되었다. 그래서 주은래는 중국을 20년 동안이나 다스리면서 미국과 원수를 안 맺을 사소한 것을 가지고도 꼬투리를 잡아서 원수를 맺었다. 그리고 마침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주은래였다. 이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미국은 얼마나 많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소비했는가? 마침내 미국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가 되었다. 이유도 없는 전쟁, 이윤도 없는 전쟁을 끝내는 실패한 전쟁으로 마감해야 했다. 훗날 역사가들은 미국과 중국의 단절과 앙숙관계가 주은래의 호위를 받을 줄 몰랐던 펠래스 때문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주은래와 펠래스가 그 때 반갑게 악수를 하고 호의를 베풀었다면 미국과 중국의 단절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두 사람이 화해하지 못해서 나라는 불화하게 되었고 월남전쟁의 파국까지 몰고 간 것이다. 이는 지도자 한 두 사람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오늘 우리 사회를 보면 한 두 사람의 갈등과 오해 때문에 집단의 오해과 사회적 갈등으로 빚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교회 문제도 큰 문제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문제, 한 두 사람의 오해와 갈등이 교회의 큰 갈등으로 번진다. 한 사람의 목사와 한 사람의 장로와의 갈등, 한 사람의 장로와 장로의 오해, 집사와 집사의 불화가 온 교회의 갈등과 불화의 요인이 되고 만다. 20세기가 분열과 반목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통합과 화해로 가는 한몸 시대다. 그만큼 우리 시대는 화해와 통합의 정신과 사상이 중요하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실 때 평강의 왕으로 오셨지 않는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고, 또 이웃과 이웃 사이를 화해하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 아기 예수님이 낮고 천한 말구유에 누우셨다. 그리고 비천하게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화해자요, 평강의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도 그냥 화해자가 될 수 없다. 그냥 피스메이커가 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낮은 곳에 오신 예수님의 정신과 비천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영성이 우리 안에 살아 움직여야 한다. 성탄절을 맞으면서 우리 모두 다시 한 번 이 시대의 화해자가 되자. 금번의 성탄 선물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내가 먼저 화해의 선물을 건네자. 그래서 신년에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화목관계를 이루고 애틋한 하나됨을 이루자. 진정한 성탄 선물, 그것은 바로 화해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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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칼럼
    2016-12-22
  • [성서연구] 이상한 능력 (이사야 53장 1-3절)
    2016년 성탄절을 맞이하여 이 글을 읽은 모든 분들에게 탄생하신 주님의 평안이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본문을 통해 성탄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란 질문은 <전한 내용이 쉽게 믿기 힘든 것인데, 이 메시지를 누가 믿겠는가?>라는 말로 이해됩니다. 즉 전한 내용이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운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전해진 메시지 내용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이상한 능력>에 관한 것입니다. 1절 후반부에 보면 또 하나의 질문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뇨?>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임했을까요? 그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사야 53장은 <고난의 종>이신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는 어떤 능력이 임했을까요? 일반적으로 능력이란 약한 것을 강하게 하고, 무명한 사람을 유명하게 만들고, 볼품없는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힘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임한 능력은 이런 일반적인 능력과는 너무도 다른 <이상한 능력>이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 이 능력이 임한 결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보좌에 계신 분이었는데, 자신을 낮추어 사람들 중에 오셨습니다. 이게 예수님의 탄생이지요. 그 후 예수님께서는 <약한 분>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연한 순 같으시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은 분입니다. 또 예수님은 <인기 없는 분>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셨고, 사람들이 보지 않으려고 했으며, 귀히 여기지 않는 분이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배척받는 분>이 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와 간고를 겪으셨습니다. 결국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게 예수님께 능력이 임한 결과였습니다. 예수님께 임한 능력은 낮아져서 고난 받는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이게 능력이라면, 그래서 이 능력을 받은 후 예수님처럼 된다면 누가 능력을 사모하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께 임한 능력은 참 이상한 능력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능력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어떤 목사님께서 <요즘 얼굴 좋다>는 말을 들을 때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주님은 <고운 모양도 없고>라고 했는데, 자신은 잘 먹고 편안해서 얼굴이 좋아 보이다니, 주님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아픔이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 주님처럼 <고운 모양이 없는> 목사, 주님의 뒤를 따르는 수고와 헌신으로 거룩한 피로가 쌓이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최소한으로 입고, 최소한으로 먹고, 최대한으로 사랑하고, 최대한으로 헌신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한국 전쟁 당시 어떤 목사님께서 공산당에게 체포되셨습니다. 차례가 되었을 때 불려나간 목사님은 순교를 각오하고 <난 목사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심문관이 <목수 동무? 손 좀 봅시다.>라고 하더랍니다.시 목사님은 예배당을 짓느라고 막노동을 해서 손이 엉망이었습니다. 심문관은 <동무, 인민의 친구답게 열심히 일해서 손이 엉망이구만. 자 가시요!>라고 했답니다. 목사님께서는 심문관의 귀에 역사하서서 <목사>를 <목수>로 알아듣게 하심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두 손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충성할 것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고운 모양이 없었기에 살 수 있었습니다.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고운 모양이 없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치료하고 짐승에 태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짐승의 고삐를 잡고 터덜터덜 걸어야 했고, 그 사랑의 과정에 <거룩한 피로>가 쌓였습니다. 거룩한 피로를 느끼는 삶, 고운 모양 따위엔 관심 없는 삶,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랑과 헌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능력>입니다. 우리를 위해 낮아져 이 땅에 탄생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한국의 성도들이 이런 능력으로 무장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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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2
  • [함께 생각해 봅시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영원하신 예수께서 속히 오시는 것도 사람은 너무 더디다고 생각할 수 있어 요한계시록의 맨 마지막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셨고, 사도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계시록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럼에도 요즘 예수의 재림을 목마르게 고대하며 그날을 사모하는 성도가 얼마일까.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며 깨어있는 성도도 있지만 재림을 염두에도 두지 않고 마치 예수의 재림이 없는 것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도 많은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셨고 그것도 수없이 말씀하셨다. 사도들도 말했고 수없이 말했다. 천사들까지도 증거했다. 성경 중에 예수의 재림에 관한 말씀이 무려 1,518번이나 언급되어 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단 한번 말씀한 것도 그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 없다. 아기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이라는 미가서 5장 2절의 성취를 보라. 만삭된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에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베들레헴에 갈 일이 생겼고 예언했던 그대로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지 않았는가. 이같이 단 한번 말씀한 것도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는데 1,518번이나 말씀한 예수의 재림이 성취되지 않겠는가. 예수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갖고 있는 의문점이 있는 듯 하다. 그게 뭔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신 예수께서 어찌하여 지금까지 안오시나, 2000년이 지나지 않았느냐, 이같은 생각이다. 이건 비유를 만들어 설명해 볼 수 밖에 없겠다. 농촌에서 볼 수 있는 하루살이는 유충으로는 1년 살고 날기 시작하면 하루밖에 살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하루살이이다. 농가 주인의 아들이 외국에 유학을 가면서 1년 안에 돌아오기로 하고 집을 나서면서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속히 돌아오겠습니다” 그랬다. 이 말을 하루살이가 듣고 메모해 뒀다. 하루살이가 평생 기다려도 주인의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대가 바뀌고 바뀌고 백번 바뀌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와 같다. 영원하신 예수께서는 정한 그 날짜에 속히 오실 것인데도 백년도 살기 어려운 사람들의 생각엔 “‘속히 오리라’ 하신 예수께서 왜 지금까지 안오시나” 이같이 생각될 수 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아 초림의 예수를 생각하는 동시에 다시 오실 예수를 생각해 봐야 할 것 아닌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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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2
  • [시사칼럼] 기시감(旣視感)과 미시감(未視感)
    분명히 처음 보는 사람이나 장소인데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고 언젠가 한 번은 가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경험을 할 때,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기시감' 혹은 '데자뷰(deja vu)'라고 부릅니다. 20세기 초 의사이자 심리학자였던 플로랑스 아르노(Florance Arnaud)가 최초로 이러한 현상을 규정했고, 에밀 부아라크(Emile Boirac, 1851∼1917)가 용어로서는 처음 사용했다고 합니다(위키백과). 이후 심리학뿐만 아니라 사회문화 전 방위에 걸쳐 널리 애용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멀리 갈 것 없이, 2016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데자뷰'라 할 만합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역사학자들은 한국의 1987년과 2016년을 함께 거론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장차 더 중요해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우리는 날마다 살고 있는 셈입니다. 이번처럼 기시감(deja vu)이 사회 변화를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만, 혁신적 변화는 종종 미시감(vuja de)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와튼스쿨 아담 그랜트(Adam Grant) 박사의 견해입니다. 미시감이란 기시감과 반대로 '본 적이 없는, 낯선'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지만, 익숙한 일들이라도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정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랜트 박사는 “늘 봐온 익숙한 것이라도 그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기존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오리지널스』, 29)할 때가 있는데, 순응(conformity)과 구별되는 이러한 독창성(originality)이야말로 창조적 파괴의 동력이라고 했습니다. 기존의 문제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풀리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지금 이대로가 아니라 무언가 변화를 원한다면 창의적인 시각과 사고로 당면한 현안들을 마주 대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일은 누구에게라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수도사로서 성경을 연구하고 명상하며 살기를 원했지 결코 종교개혁의 기수가 되려는 의사가 없었습니다. 존 칼빈(John calvin) 역시 기욤 파렐(Guillaume Farel)이 반협박조로 강권하지 않았다면 개혁가로서의 인생을 살지 않았을 사람이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 King) 목사는 흑인민권운동의 지도자로 나서는 일을 상당히 망설였습니다. 이미 목회 활동을 하면서 박사 학위를 따고 대학총장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걸어가는 길 또한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가 만날 시대와 사회는 데자뷰(deja vu)가 아니라 뷰자데(vuja de)의 세상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본능적으로 두려움과 망설임이 우리 마음과 발걸음을 붙잡을 것입니다. 환경마저 변화에 저항할 때가 많습니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가 주도한 사역은 시급하기도 했고 또 대의명분(大義名分)도 확실했지만, <그냥 이대로>를 부르짖는 무리들의 커다란 저항에 직면해야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변화해야 합니다. 변화는 이제 잉여(surplus)가 아니라 생존(survival)의 키워드가 되었습니다. 변화하지 않는 개체는 존속하기 어려운 사회적 생태계 안에서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작은 변화마저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에 관해 마셜 골드스미스(Marshall Goldsmith)는 『트리거(Triggers)』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이루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로, 정작 자신에게 변화가 필요함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꼽았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어렵게 변화를 결심해도 데자뷰(deja vu) 같은 방해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강적은 우리 안에 있는 타성(惰性)입니다. 이어서 친숙한 타인(他人)과 친근한 환경이 차례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어차피 주님이 가신 길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 문자 그대로 미시감(vuja de) 가득한 좁고 협착한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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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08
  • [목회자 칼럼] 순종에 대한 묵상 (1)
    시대마다 엇비슷한 현상이 있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21세기 우리 시대야말로 ‘순종하는 미덕(예의)’이 크게 위축되고 희귀해지고 있다. 여기저기에서 ‘불순종하는 서글픈 이야기’들이 많이 들려온다. 인생은 도전해야 하고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거나 기존의 관념이나 윤리마저도 과감히 깨어버리거나 뛰어넘을 수 있어야 전혀 새로운 창의성이 살아날 수 있다는 주장과 외침들이 하도 강해지는 시대가 되다보니 사람들은 ‘순종’이라는 소중한 인류 자산마저 쉽게 평가 절하 하거나 외면을 한다. 기존의 가치관이나 질서, 예의, 전통은 아무 의미도 없거나 오히려 사람을 속박하는 것이라고 가볍게 단정을 해 버린다. 그 결과 오랫동안 인간 사회를 지켜주고 유지해 오는 데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질서나 가치관 가운데 특히 ‘순종하는 마음’이 개인이나 가정 그리고 사회 전반에서 별다른 고민이나 저항 없이 빠른 속도로 해체(解體) 되어 가고 있다. 가령 어떤 학교 교사 한 분이 실수를 하거나 학생을 지도함에 있어서 무리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 해당 학생 한 명만 그 교사에게의 순종을 거두는 것이 아니고 그 학급, 그 학교 심지어 뛰어난 정보 매체를 통하여 순식간에 전국으로 전달되는 그 소식을 접하는 학생들이 자신의 일인양 자기들의 교사에 대한 ‘순종’도 일거에 대폭 줄여 버리거나 거두어 버린다. 이같은 현상이 전국적으로 빠른 속도로 확산 되어 버린다. 이런 슬픈 풍조는 우리 사회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교회를 향해서도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조금씩 스며들어 온다. 성경은 ‘십계명’을 비롯하여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교회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정확한 지침(규범)을 가르치고 있다. 교회는 인간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다.(마5:13~26, 고후 2:15, 3:3, 벧전 2:12) 세상은 자세히 모르고 있으므로 크게 탓할 수 없으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인격을 닮은 존재로 창조된 고상한 존재”이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으로 지음 받은 새로운 피조물” 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수시로 훼손되는 가치관이나 풍조에 휘둘리거나 밀려 다녀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세상을 향하여 맑고 밝고 선한 영향력을 삶의 많은 분야에 끼쳐 주어야 한다.(롬 12:1-2, 고후 2:15)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문화나 풍조(사상, 유행)를 배우거나 참작하는 데는 할 수 있는 한 좀 느리게 반응하고 위에서 언급한 기독교의 고상하고 순전한 가치들을 세상에 소개하거나 보급하는 일에는 적극적이고 민첩해야 한다. 인류 그리고 이 세상에 고통과 혼돈과 갈등과 비극이 왜 찾아 왔는가? 성경은 말한다. 인간의 ‘불순종’ 때문이라고! (롬 5:19a) 성경은 ‘믿음’을 ‘금보다 귀하고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벧전 1:7, 히 11:6) 그런데 믿음은 ‘순종으로 증거’ 되어 져야 한다. 로마서 5:19에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예수님께서는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하셨다(마 7:20). 그러므로 한 사람 그리스도인 그의 믿음은 그의 순종심을 보면서 평가를 하거나 증거를 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순종’이라는 열매를 하나님과 사람 앞에 보여드려야 한다. 성경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순종’이라고 요약을 하고 있는데(히 5:7-10) 우리가 그 분의 제자로서 ‘순종의 삶’을 보여드릴 의향이 없다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맞는지를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진단을 해 보아야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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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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