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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깨어짐의 축복 (시 51:15~1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전 삶을 통해 예배드리기를 바라십니다.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곳에 함께 해 주시며 기뻐하십니다. 하지만 세상 가운데 살아가노라면 하나님 없이 많은 시간들을 보내게 됩니다. 세상적인 관심거리와 재미를 쫓고 성공과 부에 눈멀어 우리의 마음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메말라지고 강퍅해 집니다. 좀 잘 나간다 싶으면 우리의 마음은 교만해 지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 내가 좋은 게 하나님의 뜻인 양 착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복 받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내가 잘해서 잘 나가고 있다는 생각에 빠져 일상의 편하고 바쁜 삶에 젖어듭니다. 우리의 마음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매너리즘, 형식화, 제도화되어 습관처럼 늘 하듯이 의무감에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배를 싫어하시고 받으시지 않습니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겸손히 나아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기뻐 받으십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잘 나간다고 복 받은 것인 양 스스로 교만에 빠진다면 정말 복 받은 것일까요?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원하는 것을 모두 주지는 않습니다. 버릇이 없어지고 감사도 모르고 자신이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고난에 약한 아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에겐 시험과 환난과 고난을 주십니다. 고난을 통해 사람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깨달아 하나님을 의지하고 찾게 하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삶과 죽음, 인생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지 고찰해 보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를 더욱 성숙한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꺾어지고 깨어지고 크나 큰 상처와 좌절을 경험하면서 건방 떨고 세상 자랑하던 것을 내려놓게 됩니다. 인간은 좀 편하고 잘 나가면 하나님을 금세 잊고 교만에 빠지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자들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깨어짐으로 내 삶을 다시 리셋하시고 리모델링해 가시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깨어짐으로써 우리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복 받은 것이지 않을까요? 깨어짐의 완성, 흙이 철저히 깨어졌을 때 장인이 빚어서 도자기를 만들어 가듯이 깨어짐의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그때는 끔찍하고 힘이 들지만 세월이 지나보면 그때가 구원의 날인 것입니다. 깨어짐을 통해 강퍅하고 교만해진 우리의 마음을 온유하고 겸손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 처절히 깨달아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다시 한 번 감사하며 눈물 흘리게 됩니다. 그리고 천국을 사모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권력이나 재력과는 상관이 없는 목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시대 최고 엘리트인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아니라 고기 잡는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부 환경이나 재력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 봐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그 마음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강퍅하고 교만한 우리의 마음을 깨어짐을 통해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을 주십니다. 이 험한 세상, 지는 것 같지만 지는 게 이기는 것이고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 손에 붙들려서 험한 세상을 감당하는 깨어짐으로 완성 되어지는 이 아름다운 비밀을 터득해서 삶의 현장에서 승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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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08
  • [성경인물탐구] 과거의 모든 인생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요한 (2)
    요한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는 부친을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즉 요한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가정을 버린 것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가정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가정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주님의 제자가 되는 데 있어 가정이, 가족이 걸림돌이 된다면, 그래서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기로에 서 있다면 성도는 마땅히 가정을 택하기 보다는 주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선택함이 옳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제자 된 자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요한은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곧 요한이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과거를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더불어 완전하게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제자로서 합당한 자세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그릇된 인생을 포기하고 주님의 제자가 되거나, 아니면 제자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여전히 과거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둘 다를 공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제자가 되느냐, 세상의 종이 되느냐의 기로에서 양 편을 다 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선택의 기로에서 과연 어느 편을 선택하는 것이 올바르고 참되며 현명한 선택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요한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곧 배와 부친을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태도는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자는 즉각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마지못해 주의 제자가 된다거나, 아니면 주의 제자가 되는 것을 미루고 망설이는 태도는 결코 제자로서 합당하지 못합니다. 실로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성도의 태도는 즉각적인 '아멘' 만이 있을 뿐입니다. 마 4: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으니라. 요한은 주님의 제자가 된 이후 일평생 변함없이 주를 사랑하고, 충성을 다해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의 결단력은 순간적 감정이나 기분에 사로잡힌 인간적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령에 이끌려 제자로서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노년에 주의 복음을 전하다 밧모 섬에 유배되는 순간까지도 충성을 변치 않았습니다. 비록 스승 되신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그의 곁에 계시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한번 주님의 제자가 된 자는 결코 그 신앙의 절개와 의리를 변치 말아야 합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렇게 의리 있고 신의 있는 신앙의 주인공들이 다 되심으로 합당한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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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08
  • [가정칼럼] 살아 숨 쉬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백혈병 투병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쓰고픈 미래의 작가가 있었다. “내가 백혈병에 걸렸다. 손이 떨리고 글씨가 이상하다.오랜만에 연필을 잡아서인가? 3월 30일 새벽에 코피가 심하게 나고 토해서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실려 왔다. 그러다 저녁 쯤, 백혈병이라고 해서 너무 놀랐다. 무균실이라는데 들어가 머리를 밀었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일. 봄바람, 봄꽃, 봄의 풍경을 하나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너무 억울하고 슬프다. 맞는 골수가 없다 한다. 엄마를 믿고 용기를 내자. 옆 침대의 아이가 죽었다. 천국서 행복하게 잘 살길... 피오줌이 나온다. 누가 날 좀 살려줬으면... 바다에 가보고 싶어... 돈으로 살 수 없는 깨달음을 얻었어. 파란 하늘, 맑은 공기... 이런 걸 느끼기만 해도 큰 행복이란 걸...” 이정표. 13세, 서울 등촌초등학교 6학년, 그는 끝내 소설을 완성하지 못한 채 일기만을 남겨 놓고 떠났다. 1년 9개월 병마와 힘겹게 싸워야 했던 정표, 숨을 거두기 전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다. “정표야 사랑한다. 너 너무 멋졌어, 최고였어, 잘 했다.” 인생의 저주란 목마름이 아니라 감사할 줄 모르는 메마름이라 한다. 정작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기적이고 그 기적과 함께 사는 나야말로 최고의 행복을 누리고 사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불평, 불만에 갇혀 살 때가 많다. 그래서 신앙의 반대는 불신앙이 아니라 불평이라고 한다. 정신의학자 루이스 캐디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런 말을 한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을 허무주의의 수렁으로, 절망의 구렁텅이로, 자기 연민으로, 자신만의 고립된 공간 속으로, 그리고 우울로, 마침내는 죽음으로 치닫게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 어떤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느끼지 않는다면, 해마다 새로 피어나는 꽃과 나무 그리고 우렁찬 소리와 함께 탄생하는 어린 생명의 기적에 대한 경이로움과 감사는 무엇인가?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과 헌신에 대한 존경과 찬미는 무엇인가? 또한 우리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지 갈 수 있게 하고, 우리가 하고 싶은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육체의 고마움에 대해선 생각해 보았는가? 당신은 ‘지구에서의 아름다운 휴가’를 즐기며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는가?” 감사야말로 삶의 원천이 된다. 감사는 평범한 식탁을 생명의 잔칫상으로 만드는가 하면 마음의 분노를 쉬게 하고 평화를 가져다준다. 감사하는 순간 하늘의 소망이 열리고 내일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오르게 된다. 지금 지글러는 이렇게 말한다. “‘감사하다’고 말할 때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과 내가 있는 장소를 그대로 받아들이겠다. 나는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나는 감사할 줄 모르면서 행복한 사람을 한 번 보지 못했다.” ① 큰 것에 감동하고 놀라기보다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를 발견하다. ② 먼 미래에 일어날 일보다는 지금 이곳에서 감사를 찾아낸다. ③ 기적적인 일에 감사하기보다 매일 매일의 일상에 감사하며 산다. ④ 감사를 계속하다 보면 불평과 불만이 치료되는 것을 경험한다. ⑤ 감사는 감사를 불러일으킨다. 그랫 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이 된다. ⑥ 감사하는 순간 세상이 아름다워진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사랑스러운 존재로 바뀐다. 모든 관계에 평화가 깃든다. ⑦ 감사하는 순간 축복이 임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만방에 선포하는 감사의 선교사가 된다. 17세기 영국의 한 시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주님! 주님은 나에게 너무가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나에게 한 가지만 더 주시옵소서. 감사하는 마음을” 13살의 나이에 행복이 무엇인지를 발견했던 정표가 그립기만 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정표야 고맙구나, 넌 참 행복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었어. 이제 널 대신해서 이 행복 널리 전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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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08
  • [성서연구] 사무엘은 죽었지만 (사무엘상 25장 1절)
    본문은 사무엘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그의 어머니 한나가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아들로서 엘리 제사장 밑에서 성장하여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왕이 없던 시절 사무엘은 제사장이요, 행정가요, 통치자였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될 때까지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흐트러진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고, 우상 숭배에 빠져 있던 백성들을 미스바에 소집하여 하나님께 회개하게 하였습니다. 또 늘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숙적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백성들을 건진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조금도 곁길로 나가지 않았고, 청렴결백하였습니다. 그는 라마에 있는 자기 집에서 시작하여 은퇴한 후에도 라마로 돌아와 살다가 본문의 기록처럼 라마에서 별세하였습니다. 그는 평생 짐승 한 마리도 강제로 취하거나 뇌물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시대가 그리워할 진정한 지도자였습니다. 본문은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났음을 보여줍니다. 사무엘의 죽음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슬픔이었지만, 특히 다윗은 사무엘의 죽음으로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어린 목동일 때 기름을 부어 다윗이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임을 알려준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을 만난 후 다윗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인생의 목표가 생겼고,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무엘이 죽었으니, 다윗에게 얼마나 슬픔이 컸겠습니까? 더구나 사무엘이 죽었던 때가 다윗으로 하여금 그 슬픔을 더 크게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사무엘이 세상을 떠날 때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던 때였습니다. 이 위태로운 때 이스라엘 천하에서 다윗을 지지하고 힘이 될 인물은 사무엘뿐이었습니다. 그런 사무엘이 세상을 떠났으니, 다윗은 땅이 꺼지는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사무엘이 죽음만 기록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끝에 짧지만 의미 있는 문장 하나를 덧붙이고 있으니, 그것은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문장 하나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무엘은 죽었으나, 다윗은 바란 광야로 갔다>는 것입니다. 즉 사무엘이 죽었다고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갈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죽었고 충격을 받았지만, 다윗은 자기 길을 의연히 갔습니다. 사무엘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자기 길을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무엘은 죽었어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살아계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윗은 사무엘이 대단한 인물이기는 했으나 사무엘을 의지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다윗의 인생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도 그렇습니다. 사무엘이 베들레헴으로 옮겨와 다윗 곁에 함께 하면서 그를 후원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기름을 부은 후에는 라마로 돌아갔습니다.(삼상 16:13) 무슨 뜻일까요? <내가 기름을 부었다 해서 날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메시지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을 전한 인물일 뿐, 다윗을 인도하여 다윗을 왕이 되게 할 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하실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애초부터 사무엘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사무엘이 죽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란 광야로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대통령과 측근 인사들의 문제로 나라가 어지럽습니다. 대통령을 지지하던 이들이나, 반대하던 모든 사람들에게 현 사태는 사무엘이 죽은 것처럼 충격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손을 놓고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사무엘은 죽었어도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것처럼, 우리 사회가 어렵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우리는 일어나서 우리의 바란 광야로 의연히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결연한 모습으로 우리의 길을 중단없이 걸어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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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08
  • [서임중 칼럼] 사랑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아내와 함께 이마트에 갔다. 목회현장에서 시무할 때는 상상도 못할 일인데 은퇴하고 난 후 이런 시간은 또 다른 행복이다. 내 앞에서 카트를 빼려고 동전 100원을 찾는 두 아이의 엄마가 동전이 없는 듯 “엄마 동전 교환해 올게 여기서 잠간 기다려.”하면서 다섯 살 정도 된 딸 아이에게 말을 건네 길래 나는 “나에게 100원 동전 있으니 이것 사용해요.”라고 건네주었더니 고마움을 표현하는 그 모습이 우리 딸처럼 생각되어 잠깐이지만 동전 100원의 베풂의 행복함을 느꼈다. 작은 나눔이 주고받는 모두의 마음을 행복하게 했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사랑이란 유별난 행동이 아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진솔하게 행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나의 따듯한 손길을 기다리고, 나의 미소를 보고 싶어 하고, 나의 격려를 기다리는 지치고 외로운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필요한 것을 그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행하는 것이 사랑이다. 목사가 된 큰 아들 석훈이가 여섯 살 때 친구랑 놀다가 싸움질 하는 중 친구 엄마가 와서 석훈이 뺨을 때려 왼쪽 뺨에 어른 손자국이 난 상태로 울면서 돌아왔다. 친구 엄마는 우리교회 집사님이었는데 차마 아이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셨던 모양이다. “아빠, 이게 우리 집 아니야?” “???” 자초지종을 듣고 난 후에 유구무언이었다. 집사님은 자기 아들이 석훈이 밑에 깔려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극한 감정에 손찌검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셨던 모양이다. 석훈이를 씻겨 달래고 그 다음 날 과자봉지를 사들고 집사님을 찾아갔다. “어제는 화가 많이 나셨지요? 아이들이 철없이 그렇게 싸움질 했나봅니다.”라고 아들 친구에게 과자 봉지를 건네주고 “사이좋게 놀아야 한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때 집사님은 눈시울을 붉히면서 “어제는 제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너무 잘못했습니다. 밤새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라고 오히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셨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나의 기쁨과 유익을 위해 살아간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마음으로 너의 기쁨과 유익을 위하여 나의 작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사랑이며 그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때 그것은 그 자체가 지고한 행복이며 아름다움이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되는 삶의 진정한 가치개념이다. 거기서 삶의 근간(根幹)인 예(禮)가 연주된다. 그래서 순자는 인(仁)이나 의(義)보다도 예(禮)의 규범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의 윤리학은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공명정대(公明正大)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거기서 공(公)은 명(明)을 낳고, 편(偏)은 암(闇)을 낳는다고 했다. 순자는 이를 위하여 세 가지를 강조했는데, 첫째는 허(虛), 즉 우리의 마음을 비워야 함을 강조했고, 둘째는 일(一), 즉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하나로 집중해야 하고, 셋째는 정(靜), 즉 마음이 동요되지 않아야 함을 깨우쳤다. 거기서 사랑다운 사랑이 연주된다. 요즈음처럼 살 맛 안 나는 세상에서 그래도 우리는 오늘을 보람 있게, 의미 있게 살기를 소망하면서 다시 하루를 연다. 정치나, 사회나, 경제나, 어디든 터지고 부서지는 이야기로 얼룩진 언론 보도는 우리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슬프게 한다. 작금의 정치권의 행태나 사회현상을 듣고 보노라면 하나같이 나는 소크라테스고 너는 돼지라는 논리로 자신의 소욕을 채우려고 몸부림하는 모습이다. 그 가운데 쏟아내는 말들이 정언(正言)도 정행(正行)도 없는 카오스 현상을 보면서 우리가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그것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첫 번째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 13장에서 그것을 그림처럼 그려놓았다.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하면서 예언의 능력, 지고한 지식, 어떤 희생과 구제행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했다. 그러기에 구체적 개념으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이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동양인으로서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탄 시인이며, 사상가이며, 소설가인 타고르는 “위대한 날은 사랑의 날이요, 만남의 날”이라고 갈파했다. 톨스토이는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각색하여 그의 유명한 단편 소설 <세 가지의 질문>에서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때는 지금이며,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현재 내가 만난 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일”이라 정의했다. 그것이 사랑이다.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을 넘기면서 작금의 차디찬 겨울바람을 맞는 것처럼 추운 대한민국을 아픈 마음으로 바라본다.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이 서릿발처럼 날카로워진 요즈음, 네가 먼저가 아닌 내가 먼저 이해하고 관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이 추운 12월을 훈훈하게 보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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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08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반드시 시정해야
    ‘보혈’은 보배로운 피라는 뜻 ‘보혈의 피’란 말은 말이 안돼 사람은 누구나 칭찬을 들으면 기쁘고 흐뭇하지만 잘못에 대해 시정하라는 충고는 들으면 기분이 언짢다. 그때문에 누구에게나 잘한데 대한 칭찬은 마음놓고 할 수 있으나 잘못에 관해 고치라는 충고는 좀처럼 하기 어렵다. 특히 목사에게 잘못이 있는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목사에게도 반드시 시정해야할 것이 있으면 누군가가 그걸 지적해야하고 목사는 그것을 시정해야할 것 아닌가.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예수님도 에베소교회의 사자에게 말씀하실 때에 먼저 잘 한데 대해 칭찬하시고 이어 잘못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시정하라고 하셨다.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목사가 설교하면서 잘못 말하는 것을 시정하라는 것이다. 어떤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피를 말하면서 ‘보혈의 피’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수많은 사람이 듣는 방송을 통해 설교하면서 이같이 말한다. ‘보혈’이라고 하든지 ‘보배로운 피’라고 해야지 ‘보혈의 피’라고해서 되겠는가. ‘보혈’이라고 하면 뜻이 ‘보배로운 피’ 아닌가. 그때문에 ‘보혈의 피’라고 하면 뜻이 ‘보배로운 피의 피’라는 말이 되지 않는가. ‘보혈의 피’라고 말하면 이건 보석을 ‘보석의 돌’이라고 잘못 말하는 것과 똑같다. ‘보석’이라고 하면 뜻이 보배로운 돌인데 ‘보석의 돌’이라고 말해 되겠는가. 복음성가에도 ‘보혈의 피로 씻기어...”라는 가사가 있는데 그것도 잘못 아닌가. 지금부터라도 고쳐 불러야 하고 책을 더 출판할 때엔 고쳐서 출판해야할 것이다. 또 한가지 꼭 시정해야할 것은 ‘구속’에 관해 잘못 말하는 것이다. 구속(救贖)이 구속(拘束)처럼 들리도록 말하는 목사가 한둘이 아니다. 국어사전을 보라. 구속(救贖)은 발음이 ‘구:속’으로 되어 있고 구속(拘束)은 발음이 ‘구속’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구:속’을 ‘구속’이라고 말하는 이가 의외로 많다. ‘구속’은 한자로 拘束이다. 그러므로 발음을 ‘구:속’이라고 정확하게 해야한다. 구세주를 ‘구:세주’라고 하듯 ‘구속’ 역시 ‘구’라는 발음을 약간 길게 하면서 ‘구:속’이라고 해야한다. 지금 이후로는 ‘구:속’을 ‘구속’(拘束)이라고 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길 바란다. 끝으로 발음에 관해 말하는 김에 자주 쓰는 단어 중 틀리기 쉬운 것 몇가지만 예를 들고자 한다. 환난은 ‘활란’이라고 말해야 한다. 필요는 ‘피료’이고 목요일은 ‘모교일’이고 조건은 ‘조껀’이다. 가끔 사투리를 쓰는 것은 괜찮으나 표준어를 틀리게 말하는 것은 안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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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08
  • [목회자 칼럼] 지금이 어찌 은을 받을 때냐?(2)
    스승 엘리사가 극구 사양해서 돌려보낸 예물을 사환 게하시가 뒤쫓아 가서 기어이 받아내고야 만다.(왕하 5:16, 20-23) 이 과정에서 게하시는 이중 삼중으로 거짓말을 한다. 범죄에는 필연적으로 거짓말이 따르게 돼 있다. 게하시는 먼저 스승을 속인다. 스승이 사양한 예물(물질, 재물)을 “사양할 수 없다”라고 반대를 한다. 거짓말을 하고 그 예물을 기어이 착복해 놓고서는 아무데도 간 일이 없다고 한다.(25절) 귀국길에 오른 나아만 장군을 뒤쫓아 가서는 “우리 스승(엘리사 선지자)께서 그 예물을 도로 받아 오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다시 거짓말을 한다.(22절) 그리고 도로 받아낸 그 물질(재물)을 자기 집에 감추었다.(24절) 인류역사에서 모든 갈등과 비극은 ‘거짓말’에서 시작되고 확대되었다. 인류를 죽음과 파멸로 몰아간 사악한 세력들은 첫째 마귀사탄이요 그 다음으로는 사탄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 이단, 혹세무민의 사이비 종교들이다. 천하보다 소중한 인간의 생명을 아무렇지 않게 해치고 훼손시키고 살해하는 자들은 모두 사탄의 사주(使嗾)를 받아 악령(惡靈)에 빠져서 그리한다. 그러고 나서 그 사악한 행동에 대하여 끊임없는 거짓말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엘리사 선지자는 사환 게하시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26절) 참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말이다. 오늘 우리나라를 보라! 북한의 인권문제, 핵 문제만 해도 우리로서 벅차다. 여기다가 안하무인인 저 중국의 횡포와 일본의 간사한 행동들을 보라. 온 국민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계를 해도 턱 없이 부족한 터인데 온 나라가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야단법석이다. 나라의 최고 통치자와 그 주변의 유치한 하이애나들 때문에 우리나라는 지금 온 지구촌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하루 빨리 저 북녘 땅에서 사악한 공산주의가 사라지고 인간의 존엄성을 철저히 말살 당하면서 비참하게 신음하고 있는 북한 동포들의 인권(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을 찾아주고 마침내 <남북통일>을 이루어내야 하는 일이 우리 한민족(韓民族)으로서 거룩한 소명(召命)이요, 시급한 국가적 과제이거늘 지금 어찌 돈을 탐하고 권력을 탐하고 국정(國政)을 농단하고 국가의 기본(基本)을 흔든다는 말인가? 청와대와 대통령 주변에 도둑들과 하이애나 떼가 득실거리고 있었는데 국무위원들, 검찰, 감사원, 국정원,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 그리고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선실장... 이들은 다 무얼 하고 있었는가? 매달 꼬박 꼬박 챙기는 국가의 봉록(봉급)이 부끄럽지 않는가? 국력이 세계 220여 국가 중 10위권이요, 올림픽과 월드컵을 개최한 나라요, 국민의 지능지수(IQ) 세계 1위인 대한민국에서 어찌 이런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권력을 빙자한 사기 거짓말 스캔들이 끝없이 터져 나오고 있단 말인가? “아아 대한민국~필승 코리아”라고 자랑스럽게 외치던 그 노래를 다시는 부를 수 없을 것 같다. 사환 게하시는 스승 엘리사 선지자와 함께 이방나라 아람왕국의 나아만 장군이 이스라엘에게까지 찾아와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 무섭던 나병이 깨끗이 치유 받고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십니다. 이제부터 나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것입니다>(왕하 5:15,17)라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외치는 그 모습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고 충분히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선지자 엘리사는 그리하고 있다.(19절) 그런데 사환 게하시는 이러한 깨달음과 행복을 모른 채 은과 금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착복하여 숨겨두었던 은금과 함께 엄청난 부끄러움을 당하고 망하고 말았다. 게하시를 향하여 슬픈 눈빛으로 탄식하던 엘리사 선지자의 그 책망 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왕하 5:26,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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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24
  • [교회법률상식] 제101회 총회 직할 재판의 흠결 (2)
    4. 총회 직할 재판회의 구성에 대하여 총회 직할 재판은 1500여명의 총회 회원 전원이 재판관이 되어 피고를 재판하는 것을 의미한다. 재판 회장은 당연직으로 총회장이 되고 재판회 서기는 당연직으로 총회 서기가 된다. 그런데 “제101회 총회가 개회됨을 선언합니다.”라고 선언한 후에 임원 선거를 하지 아니했으니 정작 제101회 총회장도 없고, 제101회 총회 서기도 없으므로 제101회 총회 재판회 회장될 사람도 없고 재판회 서기될 사람도 없어서 사실상 제101회 총회의 직할 재판을 절대로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1500여명의 총대들은 제100회 총회의 총대가 아니라 제101회 총회의 회원들이다. 그러므로 제100회 총회장이 제101회 총회의 임원을 선거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계속하여 사회를 하면서 자기가 스스로 총회의 안건을 처리하려하면 제101회 총회의 회원들은 헌법이 정한(정치 제12장 제7조)바에 따라 제100회 총회장이 제101회 총회장노릇 하는 것을 거부하고 제지하여 제101회 총회의 임원 선거를 하여 제101회 총회를 조직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그런데 제101회 총회의 회원들이 직전 총회장인 제100회 총회장의 농간에 놀라나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직전 총회의 서기가 총대를 호명하면 총대들은 제101회 총회의 회원권이 구비된다. 그러므로 제100회 총회장은 “총회가 개회됨을 선언”한 후 혹 신 설립 노회가 있을 경우에 한해서 신 설립 노회의 보고만 받고 그 노회의 총대 호명을 하여 회원으로 가입한(정치 제22장 제1조 2항) 후 즉시 임원을 선거하여 제101회 총회장 취임 예식을 하기까지의 사회권만 있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에 속한 법리이다. 부언컨대 제100회 총회는 총회장이 “파회를 선언”할 때에 제100회 총회는 없어졌고, 총회장도 없어졌고, 임원들도 직전 임원으로 남아있을 뿐 모두 없어졌다. 그러므로 제101회 총회가 선언된 후부터는 오직 제101회 총회가 정통을 이어 총회의 모든 안건을 처리해야 하는데 제100회 총회장이 임원 선거를 제쳐놓고 스스로 제101회 총회의 직할 재판회 회장이 되어 판결을 한 행위는 천부당만부당한 특수 범죄 행위이다. 5. 권징조례에 접근도 하지 못한 판결문 재판회장 권한도 없는 제100회 총회장이 제101회 총회의 재판회장 노릇을 한 제101회 총회의 직할 재판의 판결은 모두다 당연 무효로서 효력이 없다하겠다. 그 이유인즉 권원 없는 자의 재판 진행과 판결임은 물론이요, 교회 재판에서는 권징조례 제41조에 명시된 대로 권계, 견책, 정직, 면직, 수찬 정지, 출교, 정직 및 수찬 정지, 면직 및 수찬 정지 이상 8가지의 책벌만 합의 투표로써 결정 선고할 수 있고 그 외에 어떤 책벌도 할 수 없다. 그런데 권한도 없는 자가 재판하여 판결한 책벌 내용을 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도대체 “본 교단 목사 제명, 영구 출교, 당회로 하여금 원로목사 취소, 소속 노회 명부에서 제명, 본 교단에서 출교 처결, 총대권 5년 정지 처결, 공직 정지 1년 처결” 등의 책벌은 어느 쓰레기장에서 주어다 붙인 판결문인가? 그 중에서도 특히 “당회로 하여금 원로목사 취소”는 또 뭔가? 원로목사 취소는 당회가 하는 것이 아니고 노회가 하는 것도 모르면서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고퇴를 두드리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그리고 “영구 출교”는 또 뭔가? 책벌자는 치리회가 회개를 권유하고 그 진상이 만족할 때는 치리회의 결의로 해벌 복직 등을 하므로(예배모범 제17장, 교회정치 제9장 제5조 6항) 범죄자의 신령적 유익을 도모하는 것이 권징의 목적인데(권징조례 제2조) 같은 예수를 믿는 형제간에 무슨 원한이 있기에 책벌 명칭도 없는 영구 출교(?)를 했단 말인가? 또 “총대권 5년 정지 처결, 공직 정지 1년 처결”은 무슨 뚱딴지같은 병정놀이인가? 다른 장로교회의 헌법에는 헌법 개정으로 존재하지만 우리 합동 헌법은 아직 그렇게 개정한바가 없다. 그리고 “제명”은 어디에서 복사해 붙인 책벌인가? 우리 합동 교단 헌법에는 재판을 하여 “제명”이란 책벌은 할 수 없다(권징조례 제41조, 교회법률 상식p.376, 기독신문 1207호 나의발언 참조). 6. 결론 본 사건에서 제100회 총회장이 “제101회 총회가 개회됨을 선언하자마자 임원을 선거해야 할 순서임에도 불구하고 임원 선거는 하지 않고 스스로 제101회 총회장 노릇을 하면서 느닷없이 총회를 재판회로 변경한 것은 헌정 질서를 짓밟는 범죄행위이다. 그런데 그 재판회의 구성도 엉터리, 재판 절차도 엉터리, 판결문까지 권징조례에도 없는 엉터리 판결 선고를 한 직전 총회장의 행태야말로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말해서 총회장으로나 재판회장으로나 수준 미달이요 교단의 대망신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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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24
  • [성공칼럼] 재물 속에 계신 하나님
    성경에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리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재물을 섬긴다’는 것은 재물이 신의 위치에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섬기든 재물 즉 돈과 권력을 섬기든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섬기고 재물을 위해서 많은 것을 하고 있다. 재물 때문에 걱정하고 분노하고 서로 갈등하고 미워하고 싸우기까지 한다. 그리고 재물을 벌기 위해서 온갖 신에게 기도하고 재물을 바치고 있다. 그리고 힘이 있는 자들은 재물 때문에 거짓을 옹호하고 악을 눈감아주고 악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세상에서는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것 같다. 먹는 것,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값비싼 명품을 사고 집과 땅을 사고 여행을 하고 사람들을 마음대로 다스리고 등등 돈이 힘이며 자유이며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을 얻고 돈이 없는데서 오는 두려움과 고통은 자신의 마음과 몸, 관계, 심지어는 영혼까지 고통스럽게 한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돈이 갖는 힘과 권위는 대단하다. 그러기에 많은 월급을 받는 직장을 가기위해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좋은 성적을 받기를 요구하고 수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다. 그런데 성경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으며 재물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을 섬길 것을 명령하고 있다. 어떻게 돈이 전부인 이 땅에서 진리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 이스라엘에서 돈은 ‘세겔’인데 이 세겔은 ‘은’으로 만들어져 있다. 은이 상징하는 것은 진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진리이시다. 진리 속에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선을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진리가 되는 것이다. 만약 진리 속에 자기사랑과 세상 사랑이 들어있으면 이 진리는 진리의 모양을 하고 있을지라도 거짓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은 예배와 진리인 성경을 해석하는 직분을 맡았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의 부를 목적으로 예배와 말씀을 이용했기에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썩은 뼈들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이 된 것이다. 그러면 이 땅에 살면서 재물이나 권력을 가지고 돈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있는가? 있다. 그것은 돈을 벌거나 사용할 때 그 속에 사랑과 선이 있으며 하나님의 진리대로 돈을 벌고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음식 하는 사람은 음식이 재물이며, 검사는 검사라는 직업이 재물이며, 사업가는 돈이 재물이며, 의사는 의술이 재물인 것이다. 이 재물을 갖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한다. 그리고 이 재물을 갖게 되면 이 재물로 사람을 살리려는 결심을 해야 한다. 이 모습이 재물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그런데 실제로 재물을 가지게 되면 선택해야 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내가 재물을 갖고 있으면 이 재물로 자기를 사랑하고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권력을 만들기를 바랄 수 있다. 그러면서 회사와 가족을 위한다고 하면서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되는 재료를 사용하고, 나라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거짓과 악을 눈감아주는 것을 선택하는 순간 하나님을 버리고 재물을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도한다, “좋은 성적을 받게 해주세요.” “사업이 잘 되게 해주세요.” “건강하게 해주세요.” 등등의 제목으로. 그러나 이런 기도는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자기를 높이고, 세상의 부를 얻기 위한 재물을 섬기는 기도라 할 수 있다. 반면에 “하나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싸우는데 어찌 고통스럽지 않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어떤 고통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세요.” “하나님, 어떤 삶이든지 받아들이는 여유와 웃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어떤 환경일지라도 사랑과 선을 행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또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살도록 해주세요.” 등등의 기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돈과 권력과 지식과 기술과 여러 가지 역할의 재물을 가지고 사랑과 선을 드러내는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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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24
  • [은혜의 말씀] 예수님을 생각하라 (히 12장 1~3절)
    사람이 살아갈 때 무엇을 보고 듣고 관심을 가지느냐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눈과 귀, 마음이 가는 그 곳에 우리의 인격은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우리 자녀들의 모습 속에 비쳐 나오기도 합니다. 사람은 말하는 대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본 대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우리 주변에 롤모델이나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에게 믿음의 영웅들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많은 증거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배우고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 속에 살아가다 보면 우리를 짓누르고 얽매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는 자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경주하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분 앞에 나의 무거운 죄와 어두운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어두움에 속한 것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마라톤, 장기레이스는 그리 호락호락 하지가 않습니다. 장애물에 익숙치 않은 우리는 곳곳에 숨겨진 장애물을 넘어야 하고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반복되는 죄의 정욕과도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피곤하고 좌절되며 낙심하게 됩니다. 이처럼 인생은 달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고통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높고 거룩한 영광스런 자리에서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셔서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죄인 취급을 받으사 갖은 모욕과 핍박과 말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을 당하셨으나 그 모든 것을 끝까지 참으셨고 감당하셨습니다. 심지어 죄 아래 죽을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깨끗함을 입고 살아날 것을 내다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킨 예수님은 죽은 듯 했으나 삼일 뒤 살아나셨고 하나님의 영광스런 우편에 앉으사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너무나 거룩하신 그 분이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를 위해 참으시고 또 참으시고 죽음까지 감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고통과 고난과 아픔을 어찌 예수님의 고난과 비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참아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내어 주신 우리를 향한 그 희생, 그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상황과 사람을 바라보면 실망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로 교정해야 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바라 볼 때 우리의 마음은 새롭게 되어 힘을 얻고 예수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완전하게 하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닮아가는 우리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식은 근실히 징계한다고 했습니다. 징계에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답게 기르기 위한 징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한 징계인 것입니다. 천번 만번 근실히 연단을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 안에서 의롭게 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찾아와도 이 또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고 우리를 얽매는 것들을 벗어버리고 우리를 위해 끝까지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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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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