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
[함께 생각해 봅시다] 긍정의 힘
-
-
목회현장에서도 긍정의 힘이 커
큰 포부와 뚜렷한 청사진이 있어야
故 정주영 회장에 관한 얘기이다. 1975년 여름 어느날 박정희 대통령이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달러를 벌어들일 좋은 기회가 있는데 일을 못하겠다는 자가 많군요. 정 회장이 중동에 다녀오십시오. 정 회장도 안된다고 하면 나도 포기하죠” 정 회장이 물었다. “무슨 얘기입니까?” “1973년도 석유파동으로 지금 중동국가들은 달러를 주체하지 못하는데 그 돈으로 여러가지 사회인프라를 건설하고 싶은데 그 곳은 너무 더운 나라이기 때문에 선뜻 일하러 가는 나라가 없는 모양입니다. 우리나라에 일할 의사를 타진해 왔습니다. 그래서 관리들을 보내봤더니 돌아와서 하는 얘기가 너무 더워서 낮에 일을 할 수 없고 건설공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이 없기 때문에 공사를 할 수 없는 나라라는 겁니다” 정 회장이 “그래요. 내가 오늘 당장 출발해서 가 보고 오겠습니다”
정 회장이 5일만에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박 대통령을 만났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는 것 같습니다” “무슨 얘기죠?” “중동은 이 세상에서 건설하기에 가장 좋은 나라입니다” “뭐라고요?” “일년 열두달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일년 내내 공사를 할 수 있습니다” “또요?” “건설에 필요한 모래와 자갈이 현장에 있으니 자재 조달이 쉽고요” “물은?” “그거야 어디서 실어오면 되고요”(물은 기름을 우리나라로 싣고 와서 갈때 유조선에 물을 채워간가는 계산) “그럼 50도나 되는 더위는?” “천막을 치고 낮에는 자고 밤에 일을 하면 됩니다” 박 대통령이 부저를 눌러 비서실장을 불렀다. “임자, 현대건설이 중동에 가려고 하는데 정부가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도와줘” 정 회장의 말대로 한국사람은 낮엔 자고 밤엔 일을 했다. 그때 세계가 놀랐다. 달러가 부족했던 그 시절 30만 명의 일꾼들이 중동으로 몰려 나갔고 보잉 747특별기편으로 달러를 싣고 들어왔다.
정주영 회장은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든지 반드시 된다는 확신 90%에, 되게 할 수 있는 자신감 10%를 가지고 일을 해왔다. 안될수도 있다는 회의나 불안은 단 1%도 끼워 넣지 않는다” 이렇게 말했다.
목회자들도 목회 현장에서 긍정의 힘이 크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교회도 긍정적인 분위기 속에서만이 성장한다. 부정적인 분위기가 지배하는 교회로써 부흥한 예가 없다. 부정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교회에는 왔던 사람도 다른데로 떠난다. 교회는 반드시 큰 포부와 뚜렷한 청사진이 있어야 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
2016-06-02
-
-
[시사칼럼] 자본(money)과 생명(life)
-
-
6월 5일은 환경의 날입니다. 그러나 환경의 날이 무색할 만치 한국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와 그로 인한 적잖은 사회적 후유증에 처했습니다. 원만한 합의와 수긍할만한 사회적 합의(consensus)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번 사건이 환경 이전에 ‘생명’의 소중함과 ‘자본’을 향한 신앙에 대해 울리는 의미심장한 경종(警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생태계나 사회적 구조 혹은 제도와 같은 거대 담론이 아니라, 먹거리나 주거지와 관련된 일상적인 담론에서 그렇습니다. 당장 유전자변형식품(GM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이 문제입니다. 1995년 미국 다국적거대기업 몬산토(monsanto) 사가 개발한 콩을 필두로 현재 많은 농작물이 유전자조작기술에 의해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산품(産品)들이 생태계나 특히 인체에 절대적으로 무해한가 하는 점입니다. 새들이 유전자변형작물을 기르는 밭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거나, 200마리의 쥐에게 이러한 곡물로 만든 사료를 먹인 결과 3/4 가량이 혈액에 이상이 생기고 몸에 탁구공만한 종양이 생겼다는 충격적인 실험 결과도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수퍼마켓에서 팔리는 가공식품의 80%, 특히 식용유 같은 경우 거의 대부분이 GMO 제품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은 현재 사료용과 식용을 합쳐 800만 톤을 수입하는 세계 2위 GMO 수입 대국입니다. 옥수수와 콩 수입량 1,148만 톤의 70%가 GMO인 수준입니다. 레위기 19장 19절입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히지 말지며”. 이미 3,500년 전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자연계 특히 생태 질서를 교란하지 말 것과 일상생활에서도 순수와 거룩을 실천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와 같은 추상적인 명령과도 물론 연관이 있지만, 이 모든 거룩의 규례(The Holiness Code)는 전부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의 산물이라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대 가운데에서 우리는 거대 자본(money) 앞에 이러한 우선순위와 생명존중의 가치가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너무나 쉽사리 발견합니다. 기이할 정도로 아파트를 많이 짓고, 또 그런 아파트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이 땅의 불편한 현실입니다. 편한 줄로만 생각했던 아파트가 인간의 건강이나 생명에 상당히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점차 밝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게 모르게 아파트 공사에 많이 사용되던 석면의 유해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론화가 이루어졌으며, 이른바 ‘새집증후군’ 또한 주로 아파트를 중심으로 등장해서 상당히 널리 보급된 새로운 개념이 아닙니까? 공사에 주로 사용되는 시멘트나 폐타이어에 대해서도 말이 많습니다. 발암 물질이 인근 국가보다 훨씬 높은 수치라든지, 심지어 후쿠시마를 연상할 수밖에 없는 방사능이 검출된 재료들도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사는 집의 벽에 색점 같은 것이 생길 경우 해당 부분을 제거하거나 집을 폐쇄하거나 헐어버릴 것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레 14:33-47), 집의 정결례를 사람의 정결례와 똑같이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레 14:48-53). 거주지는 단순한 하나의 자본재(資本財)가 아니라 인간의 생명이 거하는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사람이 돈보다 먼저입니다. 자본보다 생명이 먼저입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또한 해야만 하는 일은, 이 세상을 향하여 이러한 성경의 원리를 선포하고, 가르치고, 또한 직접 실천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
2016-05-20
-
-
[목회자 칼럼] 해외 한인 선교사 가족 수양회 인도 견문록見聞錄(3)
-
-
2016.3.24.(목)~29(화)까지 무려 5박 6일 동안 스페인령 카나리아 군도의 중심도시 라스팔마스 (‘팔머나무가 많이 자라는 땅’이라는 뜻임!)에 머물면서 한인교회 연합 부활절 감사예배 강사로 초청 받아 매우 아름다운 예배당 라스팔마스 순복음한인교회에서 설교(예수님이 주시는 3대 선물 / 요 20:19~23)로 섬겼다. 예배당에서 내려다보는 시가지 전경은 참으로 환상적이었다. 고독한 이역만리에서도 아름다운 예배당을 마련하고 새벽 일찍 한국인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여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내가 감동하고 은혜 받았다. 주일 낮 예배와 저녁예배는 나를 초청해 준 라스팔마스 선교교회(이성열 목사)에서 설교로 섬겼다. 과분한 환대를 받으면서 계획된 일정들을 마친 후 3.29(화) 우리 부부는 독일 Koln(쾰른)으로 떠나야 했다. 라스팔마스 공항에서 여행용 큰 가방 세 개를 탁송하는데 애로사항이 발생하였으나 한국인 목회자라고 교회 장로님이 소개를 한 덕분에 그래도 적잖은 편의를 제공받았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걱정이 되는 것은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이 큰 가방 세 개가 라스팔마스 공항을 출발하여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 공항에서 환승(transfer)을 하고, 다시 출발하여 독일의 뮌헨(Munchen) 공항에서 한 번 더 환승하여 최종 목적지 쾰른(Koln) 공항에 무사히 안착(安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주님 의지합니다” 하면서도 온갖 걱정들이 떠나지 않는다. 그런데 결과를 먼저 말하자면 큰 가방 세 개는 아주 정확하고 안전하게 우리와 함께 비행기를 세 번이나 갈아타면서 최종 목적지 쾰른에 늠름하게 잘 도착하여 우리 품에 꼬옥 안겼다. 그 순간의 소감은 마치 고생스런 외국여정 중에 잠시 잃어버린 자식을 다시 찾은 것처럼 마음이 찡해왔다. 문제는 오히려 ‘사람’이었다. 마드리드(Madrid) 공항에서 뮌헨(Munchen)행 비행기를, 그리고 뮌헨공항에서 쾰른(Koln)행 비행기를 연결 편으로 바꾸어 타느라고 (transfer) 아슬아슬한 탑승시각을 붙잡기 위하여 롬 8:28말씀(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을 계속 읊조리면서 겪은 마음고생과 <육체의 훈련: 달리기>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는다. 쾰른 공항을 아주 편안하게 빠져나올 때 시편 107:30말씀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이 절로 떠오른다.
3.29(화) 한밤 12시경, 옛 서독의 수도 Bonn의 외곽지대 Koenigswinter Strasse 252번지, 소박한 민박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Bonn 한인교회 심태영 목사께서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공항에 마중을 해주고 이 곳 숙소까지 안내를 해주는 덕분에 무사히 독일 땅에 도착한 것이다. 이번 선교여행의 네 번째 사역은 베를린(Berlin)에서 펼쳐질 것인데 이 곳 Bonn에 먼저 내린 것은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였다.
나는 1982년 여름에 이 곳 서독의 수도 Bonn대학으로 유학을 왔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꼭 34년 만인 오늘 2016.3.29.(화), 그토록 다시 와 보고 싶었던 Bonn에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사람이 무엇을 간절히 소원하면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옛 어른들의 말이 맞다. 오, 주 은혜 크시도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후 9:15). 이튿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를 놀라게 하면서도 한없는 평화를 마음껏 느끼도록 해주는 광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계속)
-
2016-05-20
-
-
[중독칼럼] 중독문화: 환경에 지배당하는 자녀들
-
-
[상황3]작년 우리 다섯 자녀 중 2자녀가 오케스트라 단원이라 초등학교 졸업식에 참여 하였다. 졸업식을 마치고 교장선생님께서 학부모들을 따로 모아 스마트폰 중독에 대한 강연을 했다. 현 초등학생들의 그 중독성과 해마다 심각해지고 있다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교장선생님의 대안은 이러하다. 스마트폰을 주지 말고 컴퓨터를 주라는 것이다.나는 pc방에서 게임중독자가 되었다. 부모님께서 오락실 사장이었기에 초등학교 시절 오락을 마음껏 즐기며 자란 탓에 기기에 쉽게 적응하는 체질이 되었다. 내가 어릴 때는 TV를 보지 못하게 했다. 바보상자를 가까이 하면 바보가 된다는 교육이 지배했다. 앞으로 우리 자녀들은 VR시대에 접어들고 곧 이어 인공 로봇이 우리 삶에 24개월 약정되어 스마트렌즈 등 웨어러블로 말미암아 수많은 광고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즉 환경과 유행에 지배당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중독 자녀를 둔 부모로부터 상담을 자주 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상담을 요청하는 가정의 자녀들 나이가 거의 대부분 군대를 다녀 온 성인이라는 사실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부모의 심정을 알기에 처음에 한 15분 동안 우시는 그들을 가만히 위로할 뿐이다.매월 현질로 인한 폰요금이 50만원이상 나오거나, 가출하거나, 게임으로 인한 가정의 불화와 갈등을 일으키며 N포 세대가 된 그들 뿐 아니라 온라인 도박의 유혹을 못 이겨 28년 동안 잘 자란 믿음의 가정의 자녀도 한방에 넘어지는 경우가 다 반사다.
[조언3]환경에 지배당하는 자녀들의 잘못된 삶의 가치관이 문제인 것이다. 마치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음에도 바알 문화에 빠져드는 여호수아 이후 세대의 모습이 사사기에 그대로 나타난다. 누구나 한 번 쯤은 실수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마라톤과 같은 인생 속에서 죄를 짓기 마련이다. 다음 세대에게 희망은 교회다. 교회를 통해 환경을 지배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가장 좋은 대안책이다.본인도 불신앙 가정에서 자라 PC방 폐인이 되었다. 허리디스크, 거북목병, 십이지궤양을 겪으며, 흑수저인 인생을 비관하는 시기가 있었다. 부모는 어린 시절 모두 돌아가시고, 80만원 유산으로 받아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국 키 작고, 부모 없고, 돈 없고, 학벌 낮은 나에게 중독이란 환경은 더 쉽게 죄악과 더불어 지배당했다. 결국 빚더미 속에서 깡패들이 찾아오고, 쫓기는 삶 속에서 교회를 통해 인생의 희망의 빛을 보았던 것이다. 폐인 생활로 머리가 다 벗겨지고 골룸처럼 몰골이 변했을 때 나는 비로소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하나님은 말씀과 기도로 깨달음을 주셨고, 거듭남의 인생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다. 다음 세대를 살리는 방법은 부모의 노력도, 물질도, 학벌이나 권력, 인기가 아닌 하나님의 대한 경외심만이 그들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부모들에게 감히 조언을 한다. 내 자녀를 부모의 경험으로 가르치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며 다음 세대가 바르게 자라기를 말씀에 맡겨라. 물질과 잔소리가 아닌 예배로 가정 회복의 초점을 두고, 한나가 사무엘을 성전에 맡기듯이 말이다.
-
2016-05-20
-
-
[교회법률상식] 예정한 일시와 장소에서 진행한 노회가 바로 정통노회
-
-
[질의] 동대전노회 제128회 정기노회가 두 개의 임원회의 조직과 총회 총대를 선정하였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노회장과 서기가 “동노제 127-43호(2016.2.16.), 수신: 노회원 및 장로총대, 제목: 동대전노회 제128회 정기노회의 건, 일시: 2016년 4월 11일(월) 오후 2시 - 13일(수)까지, 장소: 동원교회당(김현국 목사 시무) (대전시 동구 백룡로 11번길 164(자양동 / 042-625-5671), 대한예수교장로회 동대전노회(관인), 노회장 김종성 목사(인), 서기 한규덕 목사(인)”으로 봄 정기노회 소집 통지서를 하달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정한 일시와 장소에서 노회장의 인도로 개회 예배 및 성찬예식을 거행하고 서기가 회원을 호명한 후, 절차상 노회장이 “대한예수교장로회 동대전노회 제128회 정기노회가 개회됨을 선언”해야 할 순서임에도 불구하고 개회 선언은 하지 않고 노회장과 서기가 노회 직인과 노회 서류를 갖고(사전에 노회 현장에 가져오지 않고 서기의 차량에 보관해 두었음) 노회 장소를 떠나 제3의 장소로 약 30명이 함께 가서 노회를 개최하고 있었으므로, 법적인 정기노회 장소에 남아 있던 약 100명의 회원은 “노회 중에 노회장이 부재중이므로 부노회장이 사회할 것”을 권하여 부노회장이 “대한예수교장로회 동대전노회 제128회 정기노회가 개회됨”을 선언한 후 노회장 불신임안을 결의하고 임원 개선 등 회무를 처리하면서 정기노회 장소를 이탈한 직전 노회장과 서기를 제명·처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노회장이 사회한 노회와 부노회장이 사회한 노회 중에 어떤 노회가 정통노회인지 목사님의 법리적 답변을 바랍니다. (동대전노회 K목사)
[답] 정치 제10장 제9조(노회 회집)에 “노회는 예정한 날짜와 장소에 회집하고”라는 헌법 조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1. 노회장이 노회장소를 이탈하여 조직한 노회에 대하여 노회장과 서기가 정기노회 소집 통지서를 하달한 후 법적인 정기노회의 일시와 장소에서 그 노회장의 사회로 개회 예배와 성찬 예식을 마치고 그 서기가 회원 호명까지 하였으니 회장은 정회원 목사 3인과 총대 장로 3인 이상이 출석하였으면(정치 제10장 제5조, 동 제19장 제2조) 응당 개회 선언을 함이 회장의 직무요 직권임에도 불구하고 개회 선언도 하지 않고 노회장이 서기와 함께 자기들을 따르는 자 30여명을 대동하고 노회 장소를 이탈하여 별도의 장소에서 노회 임원 선거와 총회 총대까지 선출하는 노회를 했다고 하니 노회장과 서기를 따라 노회 장소를 이탈한 30여명이야말로 거두절미하고 교회를 불법 분리한 범죄 행위(권징 제42조)를 넘어 노회를 이탈하였으니 교회 정치 제8장 제2조 2항에 준거하여 교단까지 이탈한 범죄 집단에 다름 아니다 2. 부노회장이 사회하여 진행한 정기노회에 대하여 반면에 노회장이 노회 개회 선언도 하지 아니하고 노회 관인과 노회 관련 서류를 사전에 서기 차량에 숨겨두었다가 탈취하여 갔고 정기 노회의 법정(法定) 장소를 이탈하여 다른 장소에서 노회를 하는 것을 알고 법적인 노회 장소에 남아있던 노회원들이 “노회 중에 노회장이 부재중이므로 부노회장이 사회할 것”을 권하여 부노회장이 “대한예수교장로회 동대전노회 제128회 정기노회가 개회됨”을 선언한 후 임원 선거와 신구 임원 교체 등 정기노회를 진행하여 안건을 처리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인 정통노회이다. 이는 본 교단의 장로회 각 치리회 보통회의 규칙 제2조(교회 법률 상식 부록 참조)에 “예정한 시간에 성수가 회집하였으되 회장 유고 시 사회할 서열은 아래와 같다. ① 회장 유고 시 대리할 부회장 ② 출석 총대 중 최후 증경회장 ③ 총대 중 최선 장립 자”로 규정한바 제1순위인 부노회장의 사회로 정기노회를 진행한 것은 교회 정치 제10장 제9조와 장로회 각 치리회 보통회의 규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결론 본건에 관한 후속 조치는 노회가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이탈자들 중에서 본인들의 범죄 사실을 회개치 아니 하는 자들에 대하여 노회가 기소위원을 선정하여 기소케 하고 본회를 재판회로 변경하여 재판하든지, 재판국을 설치하여 위탁 판결케 함이 노회의 당연한 책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언론 보도에 의하면 권원 없는 총회 임원회가 동대전노회의 사건에 대하여 실사위원 3인을 선정하고 “실사 파악이 종료될 때까지 2016년 3월 21일 이후 행정 처리 및 재판 진행, 조사 처리, 임시노회를 중지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공문을 동대전노회에 하달하였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이는 총회 임원회가 헌법이 정한바 하회의 고유한 특권에 관한 월권(정치 제12장 제4조)을 행한 범죄 행위에 다름 아니다. 총회 임원회는 치리회가 아니며 또한 하회의 청원 없는 본건에 관하여 실사위원을 보낼 의무나 권리도 없고 실사에 관한 공문을 노회에 하달할 권한도 없다. 총회 임원회는 총회가 결의한 사실만 하회에 공문을 하달할 수 있고 총회가 위탁한 사안만 시행할 수 있다. 총회가 언제 동대전노회 사건에 대하여 실사하라고 위임했단 말인가?
-
2016-05-20
-
-
[성공칼럼] 두 가지 물음
-
-
삶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과 지금 일어난 일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마음속에서만 있는 일이며 실제로는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 일어난 일만이 현재 삶인 것이다. 이 두 가지 삶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내 삶이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삶을 밝게 살면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과 행동이 있어야 하는데 마음은 무조건 밝아야 하고 마음이 밝아진 후에야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밝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을 망가뜨리는 것에는 걱정과 화 등의 부정적 감정이 있는데 부정적 감정은 감정이 상처를 입은 것이다. 감정의 상처는 감정이 억압을 받아 생기는 것이며, 억압은 힘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기에 걱정과 화 등의 부정적 감정을 치유하는 방법은 힘을 키우는 것이다. 힘을 키우는 방법은 일단 현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일어난 현실을 거부하게 되면 부정적 생각이 일어나고 부정적 감정이 생겨나고 그 후 자연스럽게 현실과 충돌하는 부정적인 말과 행동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이 부정적 말과 행동은 자신과 주변의 삶을 망가뜨려서 남아있는 힘까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삶을 망가뜨리는 걱정과 화는 지금 일어난 현실을 거부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즉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삶을 거부하면 걱정이 일어나고 지금 일어난 현실을 마음으로 거부하면 화가 생기게 된다. 걱정과 화라는 두 감정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물음에 “예”를 하면 된다. 이 물음은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도 되는가?”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집에 값비싼 귀중품을 숨겨 두었는데 누군가 훔쳐갈까 봐 걱정해서 일상생활도 힘들고 잠도 못 잔다고 하자. 이 걱정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위의 두 가지 물음에 “예”하면 되는 것이다. “귀중품을 누군가 훔쳐갈 수 있는가?” “예, 훔쳐갈 수 있습니다.” 또 “그 일이 일어나도 되는가?” “예, 일어나도 됩니다.”라고 생각하면 걱정은 사라지고 잠도 잘 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화를 해결하는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 나를 무시하고 험담해서 화가 났다고 하자. “상대방이 나를 무시하고 험담할 수 있는가?” “예, 험담할 수 있습니다.” 또 “그 일이 일어나도 되는가?” “예. 일어나도 됩니다.”라고 대답하면 화는 사라지고 여유가 생긴다. 그러면 나를 무시하고 험담하는 사람을 향해서 자신의 원하는 대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삶에서 걱정하고 화가 나는 것은 걱정과 화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 되어 걱정과 화를 다스려야 하는데 도리어 걱정과 화가 주인노릇을 하면 나와 내 주변의 삶은 망가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걱정과 화를 해결 못하면 자신의 영혼의 생명이신 주님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도 가능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걱정과 화가 있는 한 이웃사랑이나 서로 사랑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무시하고 아래로 보고 거부하며 부정적 행동을 하는데 어떻게 여기에 사랑이 생길 수 있겠는가? 사랑이 생기지 않는데 내 속에 어떻게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사랑이 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그 속에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고 하며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며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 몸이나 환경, 주변사람, 물건, 그 어떤 말, 사건, 자연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이 선물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이 들어있다. 이 삶을 내 생각으로 거부하게 되면 부정적 생각이 생기고 그 즉시 걱정이 생기고 화가 일어나 삶이 어두워지며 망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삶을 만나든지 먼저 마음속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와 “일어나도 되는가?”의 물음에 “예”하는 연습을 함으로 항상 마음을 밝게 만들어서 밝은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
2016-05-20
-
-
[은혜의 말씀]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창26:25)
-
-
이삭은 아브라함 100세 때에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통해 태어날 아들로 말미암아 자손이 번성해 질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100세에 얻은 귀중한 아들은 아브라함에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의 모든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을 시험하사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써 시험을 통과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며 신뢰하는지 새삼 감동하신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자손들의 번성함과 하나님의 독생자를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청년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신뢰하고 사랑하였기에 기이한 그의 행동에 순종하여 따릅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위대한 개척정신을 가지고 나가진 못합니다. 또한 그의 아들 야곱처럼 욕심과 야망이 많지도 않았습니다. 이삭은 치안이 보장되지 않은 곳에서 가족을 지키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젖과 꿀이 나는 가나안 땅은 기후가 건조해 사막이 많고 풀과 물이 매우 귀한 곳입니다. 우물 하나를 발견하면 그 주위에 마을이 형성될 정도로 물은 이들에겐 생명수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우물을 하나 파는데 실비로 억대의 돈이 듭니다. 투자를 해도 우물이 될까 말까 하는 평생 가문의 영광이 되는 것이 우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물은 부의 척도요 축복의 상징이고 가문의 영광입니다. 우물은 만남의 장소입니다. 모세가 부인 십보라를 만난 곳이며 야곱이 라헬을 만난 곳이기도 합니다. 이삭의 부인 리브가도 우물 땜에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첫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지자 사람들은 곡창지대 애굽으로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가지 말 것을 권고하시며 복을 주시겠다 약속해 주십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블레셋 땅 그랄로 가족들과 함께 내려가 농사를 지어 그 해에 백배나 얻고 양떼와 소떼를 심히 많이 얻었습니다. 이삭은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시기한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을 내쫓았고 이삭은 그랄 골짜기로 장막을 옮기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버린 아버지의 우물을 다시 팝니다. 이삭의 종들이 그랄 골짜기에서 우물을 파자 그랄 목자들이 자기들의 것이라며 다툼을 일으키자 우물 이름을 에섹(다툼)이라 하며 줘 버립니다. 다른 곳을 파자 그들은 또다시 다툼을 일으킵니다. 우물을 싯나(대적함)라 하고 그랄 사람들에게 줘 버립니다. 이삭은 또다시 다른 곳을 찾아 이동하여 우물을 팠습니다. 더 이상 다툼이 일어나지 않자 그 이름을 르호봇(장소가 넓음)이라 하며 하나님께서 지경을 넓혀 주심에 감사하였습니다. 브엘세바에 올라간 이삭에게 하나님은 함께 해 주실 것과 자손의 번성을 약속에 주십니다. 이삭은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장막을 치고 거기서도 우물을 팠습니다. 평생을 살아도 우물 하나 파기 어려운데 이삭은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팠습니다. 우리가 억울하고 힘이 들 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우리는 약하여 힘에 부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여야 합니다. 만약 이삭이 다툼이 일어날 때 혈기대로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이삭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고 이제껏 모은 모든 재산을 빼앗겼을 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비싸고 귀한 우물일지라도 사랑하는 가족을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뺏기면 다시 파고 또 다시 파고 이삭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억울함을 하나님은 대신 갚아 주셨습니다. 이삭은 장막을 치는 곳마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았습니다. 뺏기고 부도나고 쪽박 차고 밀려나고 인생의 어려움이 덮쳐올 때 웃음을 잃지 마십시오. 내가 할 수 없다 할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힘이 되사 친히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포기 하지 말고 순종하며 웃으며 나아갈 때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사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실 주님을 기대하며 나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2016-05-20
-
-
[서임중 칼럼] 가정 같은 교회를 위하여
-
-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교회력으로는 첫 주일을 어린이 주일, 둘째 주일은 어버이주일, 셋째 주일은 청년주일, 넷째 주일은 가정주일로 지킨다. 그래서 5월은 행복이 노래되고 삶이 활력을 불러일으킨다. 한 마디로 살맛나는 달이다. 그런데 작금의 5월은 뭔지 모르게 불편하고 행복하지 못함을 느낀다. 정치권이 그렇고, 가정 살림살이가 그렇고, 학원이 그렇고, 일터가 그렇다. 딱 부러지게 이것이다 라고 할 것도 없는데 뭔지 모르게 기쁨이 없다. 나만 그런가? 이사람 저사람 만나보면 모두가 그렇단다. 가수 김종환씨가 부른 ‘사랑을 위하여’라는 가사 내용에 이런 말이 나온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다’는 듣기만 해도 가슴 따뜻해지는 행복감을 불러일으키는 가사다. 그 길이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돈도, 권력도, 명예도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솔로몬에게 물어봐라. 헛되고 헛된 것이라고 대답하리라. 바울 사도에게 물어봐라. 족보도 학벌도 명예도 권력도 부귀영화도 그 길이 아니기에 그런 것은 배설물처럼 생각이 되어 분토(糞土)처럼 버렸다고 외쳤다. 그리고 무엇을 얻었는가? 그 길이 답인데, 그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그렇다면 대답이 가능하다. 왜 행복하지 못한가? 예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면 행복하다. 교회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그 어디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면 평안과 행복이 없는 것은 예수 없는 삶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말인가. 교회에도, 그리스도인에게도 예수 없는 교회 예수 없는 예수쟁이라는 말이다. 오늘날도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 교회 같은 가정’ 이라는 표어로 제정하고 그렇게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을 하도록 가르치고, 교육받으면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 5월이 되면 더욱 이 표어가 마음에 새롭다. 어느 사회이든 기본 단위는 가정이다. 가정이 파괴될 때 사회는 붕괴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요즈음 언론에 보도되는 가정의 상황은 날마다 무너지는 모습을 접하게 된다. 그래서인가 작금의 교회도 불 꺼진 저녁 같은 상황을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아픔이며 슬픔이며 고통이다. 그렇게 가정은 소중한데 그 가정의 중앙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가정은 태양계 조직과 같다고 했다. 중앙에 태양이 있어서 태양계 서로를 주관한다. 만약에 태양이 그렇지 못하면 태양계 조직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태양계 중앙에 태양이 있어서 태양계를 주관하듯, 가정의 중앙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가정을 주관해야 가정이 산산조각이 나지를 않는다. 그래서 여호수아도(수24:14~15), 엘리야도(왕상18:21) 오직 하나님을 섬기라고 역설했던 것이다. 행복한 가정이나 교회는 질서의 이치가 순리로 형성되어야 한다. 즉 위치질서, 역할질서, 관계질서다. 모든 가족이 있어야 할 위치에서 자기의 본분에 맞는 역할을 통하여 가족 상호간의 관계질서가 이루어질 때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다. 가정 같은 교회라는 말은 바로 이 이치가 교회에서도 그대로 물 흐르듯 순리로 적용되기를 바램 하는 것이다. 가정생활의 관계질서 근간이 순종과 사랑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부모와 자녀관계만 아니라 부부관계도 마찬가지다(엡5:22~6:4). 아담은 하와 때문에 망했다. 그러나 욥은 아내 때문에 고통 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처음 복 보다 나중의 복을 배나 더 받았고, 아브라함은 아내 때문에 복을 받고 은혜로운 가정을 이루어 복의 근원이 되었다. 이 내용의 중심이 행복한 가정의 기본은 곧 사랑과 순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교회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가정생활이 행복한 사람들의 교회생활을 보면 행복한 교회생활을 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부모와 자녀 관계의 내용도 인격적 관계를 전제로 한 순종과 사랑의 관계를 통해 가정은 행복하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것은 교회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와 가정의 영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놀라운 진리를 가르쳤던 것이다. 즉 가정이 무질서하고, 윤리가 무너지고, 가족 상호간의 의무와 도덕적 기반이 무너지면 교회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가정생활에서 질서 있는 생활과 아름다운 언어와 성실한 봉사와 섬김의 생활이 훈련된 사람은 교회생활에서도 어김없이 그 생활이 자연스럽게 연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정생활에서 무질서하고, 언어가 폭력적이며 반항적이고, 행동반경이 자기중심적이며 섬김과 봉사가 전혀 되지 않는 사람은 교회생활에서도 반드시 그렇게 생활이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을 감동케 하고, 한마디 언어에서도 아름다운 천국을 느끼게 해 주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향기로운 삶을 연출해 내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것은 바로 가정생활에서 훈련된 것임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가정처럼,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서 사랑과 순종을 통하여 축복을 노래하는 우리들의 가정이 되기를 소망하고, 욥의 가정처럼 자녀를 위하여 날마다 제단 쌓는 가정으로써 어떤 사탄의 시험도 믿음으로 극복하고 시험에서 승리하여 축복을 노래하는 가정이기를 기도한다. 가정이 무너지지 않아야 교회가 무너지지 않는다. 가정이 시험 들지 않아야 교회가 시험 들지 않는다. 가정이 축복 받고 행복해야 교회가 축복 받고 행복하게 된다. 우리의 가정이 작은 천국이 되고, 우리의 교회가 보다 더 큰 천국이 될 때, 우리 모두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다.
-
2016-05-20
-
-
[성서연구] 내가 깨달았도다(사도행전 10장 24-35절)
-
-
본문에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고 싶은 감탄사가 등장합니다. 이 감탄사를 발한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그는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깨달았습니다. 깨달음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합니다. 깨닫기 이전의 그와 깨달은 후의 그는 서로 다른 사람입니다. 우리는 깨달음을 통해 변화되고 성숙합니다. 우리도 날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통해 지금까지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미지의 놀라운 세계로 들어가길 원합니다. 베드로가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된 경위는 무엇일까요? 본래 복음은 유대인 공동체에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교회는 구성원 전체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성령께서는 빌립집사를 통해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지게 하시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까지 전도하게 하셨습니다. 빌립집사는 이방인에게 전도하고 세례를 베푼 최초의 인물입니다. 그 후 성령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에게 직접 이방인 전도를 체험하게 하심으로써 교회 전체가 이방인을 형제로 영접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는 기도하는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이셨고, 경건한 로마군 백부장인 고넬료에게 나타나셔서 베드로를 청하도록 하셨습니다. 고넬료는 사람을 보내 마침 욥바에 와 있던 베드로를 초청하였습니다. 이방인 백부장의 초청을 받은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여기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 유대인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을 상종하지 않소. 난 갈 수 없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절했다면 그는 고넬료의 집에서 놀라운 광경을 결코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기꺼이 고넬료의 집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갔을 때, 그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장면과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이요, 유대를 식민 통치하는 로마의 백부장이 땅에 엎드려 가족 친지와 함께 절하면서 그를 영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듣고자 하여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같은 유대인들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닫은 자들이 수두룩한데, 이방인이 이처럼 말씀 앞에 엎드린 것을 보고 베드로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바로 이 순간 그는 “내가 깨달았도다”라고 감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이방인들까지도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파노라마를 보게 되었습니다. 닫혔던 마음이 열렸고, 생각의 지평이 땅끝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깨달음은 언제 주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령께서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입니다. 환상을 보게 하시고, 그 환상의 의미를 마음에 생각할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도착하고, 그들을 통해 자신을 청하는 전언을 듣게 되었는데, 이 모든 과정이 성령께서 이끄신 것이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하십시오. 그래야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함으로써 은혜를 입은 사람은 고넬료의 가족인 듯 보이나, 사실은 그 이전에 베드로 자신이 눈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하십시오. 그를 통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길 기원합니다. 매일 깨닫고, 매일 새로워지고, 매일 눈이 열리고, 매일 예수님을 닮아가길 기원합니다.
-
2016-05-20
-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어머니의 사랑
-
-
어머니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
준다는 의식조차 없이 주기만 해
어버이주일이 있는 가정의 달을 맞아 어머니의 사랑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한마디로 희생적인 사랑이다. 주고 또 주고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다. 세상의 모든 관계는 주고받는 관계아닌가. 인간 사회는 ‘Give and take’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친구간의 우정도, 남녀간의 사랑도, 부부간의 애정도 모두 주고 받는 사랑이다. 내가 준 것만큼 받지못할 때 불만이 생긴다. 받은 것만큼 줘야하고 준 것만큼 받아야 한다. 애정의 비극은 사랑을 주고 받는데 있어서 어느 한쪽이 준 것만큼 받지 못하고 받은 것만큼 주지 않은데서 생긴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이러한 주고받는 사랑의 차원을 훨씬 초월한다.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할 때에 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어머니의 사랑은 주고 또 주고 아낌없이 주는 희생적인 사랑이다. 못받는다고 원망하지도 않는다. 어머니는 준다는 의식조차 없이 그저 주기만 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천성적으로 희생적이다.
영국에서 있었던 얘기이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아가는 청년이 있었다. 어느날 청년이 교통사고로 두 눈을 잃었다. 멀쩡하던 두 눈을 순식간에 잃은 이 청년은 절망에 빠져 그 누구와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닫은채 우울하게 지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는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지나던 어느날 이 청년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져 왔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누군가에게서 한쪽 눈을 기증하겠다는 소식이 온 것이다.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그러나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이 청년은 그 사실조차도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쪽 눈이라도 봐야하지 않겠느냐?” 하는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때문에 수술을 받기로 했다. 아들이 “앞으로 애꾸눈으로 어떻게 살아간단말이냐”하며 투정을 부려도 어머니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며칠 후 아들의 눈에서 붕대를 떼게 되었다.
그런데 앞을 보는 순간 아들이 어머니를 보니 어머니가 한쪽 눈만 갖고 애틋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얘야, 내가 두 눈을 다 주고 싶었지만 두 눈을 다주면 그때부터 내가 네게 평생 짐이 될 것 같아서 그리하진 못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끝내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아들 역시 감격스러워 ‘어머니’하며 어머니를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숭고한 사랑이 또 어디 있겠는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
2016-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