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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칼럼]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사람은 가장 바깥에 육체가 있다. 또 육체 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 마음이 있다. 마음은 생각과 느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육체와 마음을 넘어서 사람의 실체인 영이 있다. 이 영이 겉사람과 속사람의 갈림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영은 생명이 아니라 그릇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그릇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담으면 죽은 영이 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사랑과 이웃사랑을 담으면 살아있는 영이 되는 것이다. 육체와 마음과 영과 생명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안에 있으며 생명을 싸고 있는 덮개가 있다. 사람의 행동은 손과 발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다. 손, 발에 힘이 있어도 마음이 없으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육체의 생명도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 있는 것이다. 건강한 몸으로 수십 년을 살다가도 영혼이 떠나면 육신은 죽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혼의 생명도 사람의 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영혼에 주님의 생명이 없으면 영은 지옥을 향하게 되는 것이며, 사람이 영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사랑을 담으면 그 영은 살아있는 영이 되어 천국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서 가장 깊은 곳에 주님의 생명이 있어야 모든 삶은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요즈음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한다. 위기란 의미는 교인 숫자가 줄고 교회의 재정이 충분하지 않기에 위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위기는 사람들의 중심에 주님사랑과 이웃사랑보다는 자기사랑과 세상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이 잘 마무리된 후에 “주님께서 도우셨고 함께 애쓴 분들 덕분”이라고 여기기보다는 “내가 잘나고 내가 한 것”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또, 나를 알아주지 않거나 내 생각대로 되지 않거나 나보다 상대방이 더 잘하면 발끈하고, 돈이 있으면 더 소유하기를 원하고 돈이 없으면 걱정하고 자신이 상대방보다 많이 알고 힘이 있으면 상대방을 무시하고 아래로 본다면 이것은 그 속에 주님사랑보다 자기사랑이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의 속이 생명으로 가득하려면 자기사랑이 주님사랑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사랑과 세상 사랑이 중심에 있는 한 고귀한 영적 진리를 만나도 그것은 지저분한 그릇에 귀한 음식을 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의 중심에 주님사랑이 있기 위해서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먼저 자신 속에 주님사랑이 자리 잡는 것을 방해하는 생각의 틀을 깨뜨려야 한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거절해야 한다. 예를 들어 육체를 깨끗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음식은 섭취하고 몸을 망가뜨리는 음식은 거절해야 한다. 그리고 선은 행하되 악을 행하는 일은 거절해야 할 것이다. 또 마음을 밝게 유지하기 위해 걱정하고 화가 나고 우울하고 절망하게 만드는 생각을 바꿔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어떤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도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태도가 만들어질 때 주님사랑을 담을 그릇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육체가 건강하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어 마음이 밝아질 때 드디어 육체도 마음도 아닌 본래의 나를 만나게 된다. 이 본래의 나는 태어난 적도 죽음도 없으며, 고향도, 부모도, 나이도 없다. 나이가 없다는 말은 나이 때문에 갈등하거나 힘들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를 만나면 아이처럼, 젊은이를 만나면 젊은이처럼, 노인을 만나면 노인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사랑이 되고, 기쁨이 되고, 자유가 된다는 것이다. 본래의 나를 만나게 될 때 이제야 예수를 주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는 믿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중심에 자기사랑과 세상사랑은 사라지고 주님사랑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반을 온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주님사랑을 중심으로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아서 진리대로 사는 이웃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진리를 알고 진리대로 살 때 어두운 삶은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 천국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천국은 여기에,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듯이 자신의 삶을 건강한 육체에서 밝은 마음으로, 더 나아가 주님사랑을 담는 그릇으로 안으로, 안으로 성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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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성경인물탐구] 형제를 전도한 안드레(2)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안드레는 세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약 6개월 정도 먼저 출생하였지만 그의 사역은 일찍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레위 족속에 속하여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아들인 세례요한은 '외치는 자의 소리여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사 40:3)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주의 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하는 자신의 위치와 직임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의 메시지에 대한 권위와 사백 년 만에 듣는 선지자의 모습에 메시아를 고대하던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따랐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자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막 1:2) 세례요한의 추종자가 많았습니다.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마 3:5) 세례요한의 제자로서 그와 함께 다니던 안드레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다니심을 본 요한은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36)고 증거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저 분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기다리던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밝혀주었습니다. 율법의 역할이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몽학 선생인 것처럼 세례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보내었습니다. 자신의 스승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안드레는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아버지의 아들로 세례요한은 증거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 3:35)지금까지 세례요한의 제자로서 그의 사역을 도왔던 안드레는 자기가 만난 예수님이 우리 모두가 기다리는 메시아임을 알고 나서는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안드레는 그의 스승 세례요한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이 인간의 모든 죄를 도말하실 구주이신 것을 알고 주님을 쫓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행동을 통해 결단과 지식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지식이 없으면 헛된 삶을 살 수밖에 없고 지식이 있어도 결단이 없으면 그 지식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나서는 즉시 결단을 내리고 그분을 쫓은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무장하고 결단하는 용기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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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교회법률상식] 총회 임원회 노회에 목사 시벌지시 어불성설(1)
    [질의] 저는 미조직교회를 시무하면서 언론사를 운영하는 S목사입니다. 총회가 사설 언론사에 관계된 헌의 안에 대하여 임원회에 맡겨 처리하도록 위임하였습니다. 그런데 총회 임원회로부터 S목사가 소속한 서울강남노회에 “S목사를 기소하여 재판하고 2016년 1월 10일까지 보고하라”는 공문이 하달되었습니다. 서울강남노회는 총회에 기간 연장 요청과 S목사를 기소하기 위한 죄상이 무엇인가를 질의한 결과 총회본부 제100-402호(2016.1.8.) “질의 요청에 대한 회신”으로 시행 기간 연장은 요청에 의하여 2016년 2월 29일로 허락하는 내용과 함께 S목사의 죄상에 대하여 “1) 노회 허락 없는 기관목사 시무 사칭 2) 담임목사 직무 해태 3) 총회와 산하 교회의 연합과 화합 저해하는 분열 행위” 등이라는 공문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총회장 박무용, 서기 이승희 명의로 서울강남노회 노회장에게 회신하였습니다. ? 총회 임원회가 S목사를 기소하여 재판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공문을 노회에 하달하는 것이 합법인지와 ? 위의 3가지 죄상으로 치리회가 재판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헌법적인 답변을 바랍니다. (합동 S목사) [답]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없어 질의 내용의 문장에 따라 질의 자가 합동측 목사이므로 합동 총회의 헌법으로 답한다. 1. 총회가 위임한 임원회의 안건 처리 한계 총회가 필요에 따라 헌의 안을 임원회 또는 상비부나 특별위원회에 위탁 처리케 하는 것은 당연한 처리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임을 받은 총회 임원회가 미조직교회의 목사로 시무하면서 언론사를 운영하는 S목사에 대하여 S목사가 소속한 서울강남노회에 노회가 기소하여 재판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공문을 하달한 것은 위원회 심사의 원칙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본회인 총회가 위탁한 업무 처리 한계를 뛰어넘은 월권이요 천부당만부당한 불법 행위이다. 총회 임원회는 총회로부터 위탁받은 사안을 법이 정한 범위 내에서 토의한 후 합의 결정하고 차기 총회에 보고하여 총회의 최종 결의를 기다리는 예비 심의를 위한 일개 위원회에 불과하다. 그런데 총회 임원회는 총회가 맡기지도 아니한 지나친 월권을 행사함으로써 S목사와 서울강남노회를 매우 곤혹스럽게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총회 임원회가 언제 “S목사를 서울강남노회에 기소하여 재판하고 보고토록 하라”는 사안을 총회로부터 위임 받았는가? 총회 임원회는 반드시 이에 대한 답변을 명확히 해야 한다. 혹 총회가 “사설 언론사에 관계된 헌의 안에 대하여 임원회에 맡겨 조사 처리케 하되 조사 과정에서 범죄 사실이 드러날 경우 임원 중에 기소위원을 선정하여 범죄 당사자를 해 치리회에 기소하고 원고가 되어 해 치리회로 하여금 재판하게 하다.”라고 임원회에 기소권과 재판 지시권을 위탁하는 분명한 명시가 있었다면 당연히 그 위임 사안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총회가 위탁하지도 아니한 ‘기소, 재판, 보고’ 운운하면서 위원회에 불과한 임원회가 가당치도 않게 치리회인 노회에 공문을 하달하는 것은 위헌적 범죄 행위에 다름 아니다. 부언컨대 질의자의 질의 내용이나 필자의 기억에도 제100회 총회에 관계된 언론 등 모든 자료를 살펴본 결과, 총회가 “사설 언론사에 대한 헌의에 관련하여 S목사가 소속한 서울강남노회에 S목사를 기소하여 재판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사안을 총회가 임원회에 맡긴 근거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오직 “임원회에 맡겨 처리하게 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임원회가 총회장의 명의를 도용하여 서울강남노회에 공문을 하달하여 ‘기소, 재판, 보고’ 운운한 문서는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총회장과 총회서기의 명의와 총회 직인으로 총회 산하 노회에 하달하는 모든 공문은 총회가 결의하고 총회 회의록에 기록된 사안을 공시 또는 시행 지시할 경우에만 국한될 뿐이요 총회 임원회나 재판국을 포함한 모든 상비부 및 특별위원회가 총회의 위탁을 받은 안건을 처리하기 위해 총회장과 서기의 명의로 노회에 지시 공문을 하달하는 것은 묵과할 수 없는 불법 범죄 행위라는 것을 총회 사무국과 사무 행정 담당자들은 극히 명심해야 할 중대 사안이다. 그동안 이와 같은 총회 사무 행정의 흠결로 여러 교회와 노회와 총회가 혼란과 고통과 시련을 겪어온 사건들이 부지기수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한국기독신문 제754~755호 참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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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소강석 칼럼] 변화하는 자에게 희망은 온다
    2016년 새해의 희망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 절실한 희망은 바로 ‘변화’ 를 통해서 온다. 변화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야 하고 스스로 오랫동안 지켜왔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국내외 급변하는 상황에 발맞추어 변화하며 해결책을 모색하기보다, 과거의 아집과 무사 안일한 자세로 서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독단과 화석화된 전통에만 매달리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스펜서 존스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에 보면 스니퍼와 스커리라는 두 마리의 생쥐가 나온다. 그들은 두뇌구조는 단순하였지만 부지런히 주위의 변화를 체크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치즈를 찾아 나선다. 반면 헴과 허라는 두 사람은 현재에 안주하다 치즈창고가 텅 비자 깜짝 놀라며 누가 내 치즈를 옮겨버렸냐며 불평만 한다.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변화를 거부한다. 아직도 예전의 반복적 습관과 안일한 성공에만 취해있다. 그래서 치즈가 많았던 그 시절이 다시 오기를 기다린다. 상황과 환경이 변화하였는데도 그들은 변화를 거부한다. 그래서 새로운 치즈를 찾아 나서지도 않고 변화를 두려워하기만 한다. 결국엔 허 혼자 새로운 치즈를 찾아 나서지만 거기에는 이미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며 치즈를 찾아 나섰던 스니퍼와 스커리가 먼저 와 있었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주변의 변화를 미리 알아차리고 변화를 추구해나간다면 어떤 위기든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신이 변화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해결되기만을 바란다면 헴과 같이 다시는 치즈를 맛보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만다. 희망은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오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신앙은 정체되어 생명력을 잃고 만다. 불경기로 인해 생활이 더 각박해지고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와 성도들이 위축되고 후퇴해서는 안 된다. 이럴수록 더 하나님을 신뢰하고 더 모이기를 힘쓰고 더 기도하고 더 헌신하는 쪽으로 변화해야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신앙상태를 점검하여 세상의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켜나가야 한다. 우리가 헴과 허처럼 외부세계의 도전과 변화에 둔감하여 안주해서는 결코 안 된다. 2016년은 그야말로 한국교회가 모든 분열과 다툼을 그치고 연합과 일치의 방향으로 가야 한다. 2016년 새해를 맞이하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다시 내딛는다면 희망을 향한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로 인하여 결국엔 모든 환경도 호전되고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여태 “내힘들다, 내힘들다”하며 한숨만 내쉬며 불평하였다. 그러나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다들힘내” 라는 말이 된다. 다들 힘을 내자.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자. 절망에 쌓여 있는 사회 속에 희망의 확신을 심어주자.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추구하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가장 큰 위기는 가장 큰 축복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깊은 절망이 아니라 거대한 희망 앞에 서 있다. 우리 모두 2016년을 변화와 희망의 해로 만들자.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은 자에게 찬란한 희망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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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성서연구] 새 사람이 되기 위하여(에베소서 4장 17-24절)
    새해가 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새 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려는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새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마음을 바꾸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예컨대 <아무리 화가 나도 말하기 전에 3초쯤 기다리자>,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어떤 일에든 불가능은 없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다>, <눈앞의 이익보다 먼 미래의 더 큰 이익을 추구하자>, <늘 같은 방식으로 하지 말고 새로운 방식으로 도전하자>, <마음을 비우자> 등의 생각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합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특별한 환경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 예가 불교의 템플 스테이입니다. 일상을 떠나 조용한 산사에 몸을 담고 며칠 동안 마음 다스리기를 합니다. 시끄러운 소음을 떠나 산사 처마 아래의 풍경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을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명상이나 심리학적인 수련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란 마음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마음 다스리기만으로 변화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마음보다 더 깊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잘 말씀합니다. 신약성경 에베소서 4장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마음>이란 헬라어로 <누스>를 말하는데, ‘생각, 마음’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mind입니다. 그 다음 18절에는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했는데, 여기의 <마음>은 헬라어로 <카르디아>, 즉 정서를 말합니다. 영어로는 heart라고 번역됩니다. 그런데 새 사람이 되는 비결을 말씀하는 23절에는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라고 했는데, 여기 <심령>이란 헬라어로 <프뉴마 투 누스>라고 되어 있고, 이것은 <마음의 영>이란 뜻입니다. 영어로는 <spirit of mind>라고 했습니다. 즉 마음의 배후에는 영혼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보다 더 깊은 곳에 마음을 움직이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나 정서를 다스리는 것만으로는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영혼이 변해야 비로소 새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영혼은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영혼은 사람의 노력으로는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심령을 새롭게 하여>란 능동적 표현 대신 <심령이 새롭게 되어>라고 수동형으로 쓴 것입니다. 우리 영혼은 심리학적 방법이나 명상으로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그저 마음의 일부를 다스릴 뿐입니다. 마음의 근본인 영혼을 새롭게 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뿐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성령님께서 도와주실 때 새롭게 되고, 영혼이 새롭게 되어야 마음과 정서가 새롭게 되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새로운 말과 행동이 이루어져 새 삶을 살게 됩니다. 새 사람이 되고자 하십니까? 그래서 마음 다스리기에 힘을 쓰고 있습니까? 그 보다 중요한 기도를 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마음 다스리기나 명상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손길이 영혼에 임할 것입니다. 2016년에는 우리 모두 새 사람으로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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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함께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인은 나이가 많아져도 (3)
    세상의 삶의 끝이 천국의 시작이라 성도는 임종을 앞두고도 소망이 넘쳐 둘째는 그리스도인은 나이가 많아져도 소망이 넘친다는 것이다. 로마서 12:12에 보면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 그랬다. 그리스도인은 사후에 소망이 없는 불신자와는 다르다. 불신자는 소망이 없기 때문에 나이가 많아질수록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불안해질 것이고 사후에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하는데 진짜 지옥이 있으면 어떡하지, 별의별 생각을 하게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나이가 많아져도 심지어 임종이 임박해도 소망이 넘친다. 순교자 박관준 장로는 “하늘에서 오라고 전보가 왔구나” 하시고 운명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어째서 죽으면서도 소망이 넘치는가. 그 이유는 고린도후서 5:1에 있는대로 그리스도인은 땅에 있는 장막집(육신)이 무너지면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집(천당)으로 옮겨갈 것이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3:20에 보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그랬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이 지상에 있을지라도 하늘의 시민권을 소지하고 있다. 천국에 가서 비로소 천국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시민이다. 영생도 그렇다. 천국에 가서 비로소 영생을 얻게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생을 얻었다. 요한복음 5:24에 보면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랬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끝이 천국의 시작이다. 죽음이 없는 셈이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에 가면 누굴 만나게 되는가. 앞서간 성도들과 믿고 떠난 가족들을 만난다. 그 누구보다도 주 예수를 만나게 된다. 그의 곁에서 그의 얼굴을 뵙게 된다. 상상만해도 가슴이 뛰고 설레인다. 찬송가 85장을 지은 버나드가 1절에서 뭐라고 했던가. “구주를 생각만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그러지 않았는가. 천국은 경치가 좋아서 천국이 아니다. 거기 예수께서 계시기 때문에 천국이다. 이렇게 좋은 천국에 그리스도인은 결정적으로 들어가도록 되어있다. 이런 은혜를 받았음에도 어떤 이는 어째서 감격하는 마음이 적은가. 이유는 다른 많은 사람이 받지 못한 은혜를 남달리 나는 받았다는 절실한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시인 송명희 여사를 보라. 그는 나면서부터 심한 장애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나’라는 노래를 통해 뭐라고 했는가. “나 남이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건강 없으나, 나 남이 가진 명예 없으나, 나 남이 갖지 못한 것 가졌네” 하면서 공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았는가. 남이 갖지 못한 것이 뭐겠는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은혜가 아니겠는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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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목회자칼럼] 2016년 목회방향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으로 어떤 형편과 어떤 사건가운데서도 우선 기뻐하고, 우선 기도로 아뢰고, 우선 감사하는 삶을 살려고 힘써 나갑니다. 그런 삶의 자세도 감사제목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함께 나눴던 영국 청교도들의 인사말을 기억하십니까? “인생은 한번밖에 없습니다. 이 인생도 금방 지나갑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한 일만이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경건한 청교도의 인사말에서 땅위의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도전을 받습니다. 모쪼록 역사와 생사화복의 주가 되신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며 2016년 새해를 소망가운데 시작합시다.매년 새해에는 교회가 힘써 나가야할 목회방향을 소개합니다. 올해 목회 방향 중 몇가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교회의 양적성장을 계속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많은 교회들의 부정적인 모습과 그 결과 때문에 담임목사는 교회 앞에 숫자를 제시하며 교회성장을 독려하는 목회에는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교회적으로 공적으로 양적 성장을 선포한 적이 없으며 교회성장은 결과에 의탁하는 목회철학입니다. 그런 가운데 2015년도에 들어서면서 처음으로 교회 앞에 양적 성장 선포하면서 교회표어도 강력한 말씀을 택했습니다. “내 집을 채우라”(눅14:23). 그 까닭은 다음과 같은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되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재건교회는 오래전부터, 한국교회는 1990년대 이후부터 마이너스 성장으로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 안타까운 현상가운데 우리 교회는 2014년 5월에 분에 넘치는 아름다운 새성전을 받았습니다. 새성전을 받은 사건을 계기로 교회의 양적 성장을 생각하게 되었고, 작은 부분일지라도 재건교회와 한국교회에 도전과 소망을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2015년에 처음으로 교회 앞에 양적 성장을 선포케 된 것입니다. 교회성장을 선포한 첫해에 만족할 만한 성장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바라는 교회성장이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아시기에 때가 되면 반드시 성취해 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 2016년은 이곳에 교회가 세워진지 70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입니다.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2015년은 “광복70년 & 분단70년”의 해라하여 정부차원에서 그 어느 해보다 남과 북의 평화통일을 위해서 각가지 행사들을 실시해 나왔고 한국교회 역시도 민족의 안녕과 평화통일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여러 가지 뜻 깊은 행사들과 사역들을 펼쳐 나왔습니다. 2016년은 마산재건교회에게 특별한 해입니다. 이곳에 교회가 세워진지 70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비록 작은 공동체이나 “과거의 선진들+오늘의 우리들+내일의 다음세대들”을 위해서 뜻 깊은 해로 보내고자 합니다. 우선 2016년의 표어로 교회설립70주년-“처음 사랑을 회복하라”(요21:15, 계2:4)로 정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호수에서 한가롭게 고기를 잡고 있던 제자들을 찾아가서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동일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 질문은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잃어버린 첫사랑의 열정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짐시키시는 물음입니다.요한계시록 2장에는 성령님께서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길, 그들이 말씀으로 무장된 것은 참으로 감사하나 언제부터인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초신자 시절의 구원의 감격은 찾아볼 수 없고 지금은 영적으로 교만하여 형제를 쉽게 판단하고 정죄함으로 교회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드는 죄악을 책망하시면서 순수하고 겸손했던 처음 사랑의 회복을 권고하십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새해 표어를 생각하면서 신앙의 연륜과 직분에 관계없이 주님을 만난 그때의 처음 사랑! 회복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언제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언제 교회를 만났습니까? 언제 눈물콧물 쏟은 은혜의 체험을 하셨습니까? 2016년 새해에도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 공동체 위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간구합니다. 그리하여 위로부터의 능력과 비전을 공급받아가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영광을 마음껏 드러내는 아름다운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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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4
  • [교회법률] 예배모범의 뿌리
    한국의 장로교회는 미국, 호주, 캐나다 등의 장로교회로부터 복음을 수입하여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교회 헌법(신조,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 신도게요, 교회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은 미국이나 호주, 캐나다 등의 교회에서 제정된 헌법이 아니라 영국 웨스트민스터 성총회가 제정한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세계 만국장로교회가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장로교회 역시 1915년부터 1921년까지(제4회 총회록 p.32, 제6회 총회록 p.p.18~19 참고) 9인 위원(마삼열, 양전백, 원두우, 김필수, 김선두, 곽안련, 함태영, 배유지, 남궁혁)에게 위탁하여 6년 동안 영국 웨스트민스터 헌법(신조, 요리문답, 교회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을 번역하여 출판한 1922년도 판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이 최초의 헌법이다. 그러므로 예배모범의 뿌리는 미국이나 호주, 캐나다 등의 선교국가들이 아니요 오직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헌법과 그 뿌리를 같이 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헌법은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1월 22일까지 영국 교회의 목사 120명과 장로 30명(10명은 귀족, 20명은 하원 의원)으로 도합 150명을 위원으로 선정하여 영국 웨스트민스터 교회당에서 5년 6개월 22일 동안에 1,064회를 회집하여 제정하는 중에 매월 하루는 150명 전원이 모여 금식 기도를 하였고, 매회 모일 때마다 3명이 기도하고 시작하는데 한 사람이 1시간씩 기도를 하였으니 3시간을 기도하고 헌법 제정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헌법 제정에 있어서 유일한 규칙으로는 “누구를 막론하고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입증하라.”는 것으로 반드시 성경을 근거로 하여 헌법 조문을 제안하고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헌법을 제정하였으니 곧 성령의 역사로 제정된 헌법이라는 말이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는 독단적으로 역사하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고 기도가 더하는 곳에 충만히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 헌법 제정에 대한 시대적 정치적 배경을 살펴보면 영국의 종교개혁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신앙과 교리’는 개혁교회를 따르고 ‘의식과 제도’는 카톨릭 교회의 것을 그대로 두었다. 이것이 영국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호응을 받았으나 철저한 개혁을 바라는 자들에게는 불만이 대단하였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청교도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들은 영국 교회에 남아 있으면서 카톨릭 교회의 잔재를 뿌리까지 뽑아내겠다는 결의를 가지게 되었다. 때를 같이 하여 찰스 1세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마자 반 칼빈주의 자인 윌리엄 로드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면서 왕의 고문직까지 겸임케 하였다. 윌리엄 로드는 ‘가지이론’을 내세웠는데 그 ‘가지이론’이란. “원래의 교회는 카톨릭 교회 하나뿐이었으나 거기에서 몇 개의 가지가 나왔는데, 그 가지 중에서 가장 순수한 교회가 영국교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지이론”을 스코틀랜드까지 따르도록 강요함으로 영국과 스코틀랜드 사이에 종교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영국이 패전하자 영국은 전쟁 배상 요구를 당하게 되었고 찰스 1세는 배상금 지불에 대한 동의를 위하여 국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국회의원 대다수가 청교도들이었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고 로드를 파면하고, 종교재판소를 폐지하며, 3년마다 국회를 소집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국왕은 청교도들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체포 구금케 하니 청교도들은 이에 불복하고 청교도 혁명을 감행하였고, 국회 노장인 올리버 크롬웰이 국회 군대를 지휘하여 왕 군(王軍)을 제압하고 청교도 혁명의 승리를 이끌어 냈다. 여기에서 청교도 혁명과 그 승리의 기간은 1642년부터 1649년까지인 반면, 웨스트민스터 헌법은 청교도 혁명 승리의 가장 순수한 기간이었던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1월 22일까지 제정한 후 1649년에 찰스 1세를 참수하고 장로교를 영국의 국교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웨스트민스터 헌법 제정에 관련한 영국의 시대적·정치적 배경을 보면 웨스트민스터 헌법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청교도들을 통하여 성경의 권위 위에 성령의 역사로 제정되었으니 제2의 성경이라는 말이다. 즉 예배모범의 뿌리는 웨스트민스터 헌법이요 웨스트민스터 헌법은 성경의 권위 위에 성령의 역사로 제정되었으니 곧 예배모범의 뿌리는 성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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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4
  • [성공칼럼] 사랑이 시키는 대로 해보기
    천계에서 예수 이름이 나타나면 모든 영들이 무릎을 꿇는다고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며 지옥의 권세를 굴복시키시고 천계의 질서를 회복하시고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중보하신 천계의 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의 악한 영은 그 예수 이름을 절대로 부를 수 없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이해가 된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뭔가를 얻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음으로 뭔가를 얻는다는 것은 예수가 수단이 되고 내가 목적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기면서 내가 목적이 되는 것은 악이며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 신문에서 학생들을 교회에 오게 하기 위해 예배에 참석하면 만 원씩 주는 교회가 있다고 한다. 이것을 안 불량학생이 예배 끝날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 돈을 빼앗아서 도리어 예배에 참석한 아이의 삶이 망가지게 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학생들이 하도 예배를 나오지 않으니 이런 방법이라도 사용해서 말씀을 듣게 하려한 것이라 이해가 가지만 예배가 돈 받는 수단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통탄스러웠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교회가 예수를 잘 믿으면 내가 잘 되고, 내가 높아지고, 내 가문이 번창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적이 되고, 진리와 하나님은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는 사실 또한 우려스럽다.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내 중심에 주님 즉 하나님 사랑이 주인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 사랑이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주님이 목적과 주인이 되고 나는 수단과 종이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님사랑이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며칠 전에 기대했던 일이 취소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순간 가슴이 덜컹하고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 두려움이 시키는 대로 말했다면 취소한 상대방을 향해서 비난을 했을 것이고 여러 가지 잘못된 증거를 찾아서 서운함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사랑이 시키는 대로 반응을 해 보았다. 걱정보다 서운함보다 당당함과 여유가 밀려왔다. 나는 상대방을 향해서 그동안 힘이 되어준 것에 대해서 밝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감사인사를 했다. 전혀 미안해하시지 말라고 했다. 상대방도 기뻐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이런 거절의 순간에 밝게 반응한 내 자신이 뿌듯했으며 상대방도 미안해하지 않아 전보다 더 좋은 관계기 되었다. 이런 것이 사랑이 시키는 대로 한 덕분인 것이다. 올해 막내가 대학교에 입학하면 딸 두 명이 대학생이다. 등록금과 책값과 생활비와 기숙사비를 조달해야하기에 걱정을 하고 있었다. 두 딸 중의 한명이라도 기숙사가 되지 않으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학점관리를 잘할 것을 신신당부를 했다. 그러나 성적을 보니 잘 하기는 했으나 기숙사는 되지 않을 것 같다. 원룸을 얻어야하는 상황이 될 것 같다. 이런 상황이 되자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아 걱정이 밀려왔다. 걱정이 되면 걱정을 일으킨 원인을 찾아서 비난을 하게 된다. 나는 당연히 딸을 향해서 비난과 잔소리의 화살을 쏘고 싶어졌다. 그 때 나는 주님사랑이 시키는 대로 하고 사랑은 무엇을 하기를 원할까를 생각했다. 그러자 “두려워하지 말라. 해결책을 찾으라.”고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해결책을 찾기로 결정하고 찾은 해결책대로 행동하고 있다. 물론 딸에게도 웃으면서 대화하게 되었다.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우리는 매 순간 주님사랑이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보면 두려움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이 해결책을 얻는 순간으로, 욕심이 사라지고 사랑과 자유가 생기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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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4
  • [은혜의 말씀] 사무엘과 말씀 (사무엘상3:19~4:1)
    사무엘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무엘이라는 사람은 성경역사상 독특한 사람입니다. 사무엘이 14명 사사 중에 마지막 사사시대의 사사이기도 하고, 최초의 선지자이기도 하고, 제사장이기도 하는데 그 시대에 어머니의 기도로 태어난 사무엘은 독특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무엘에 대한 말씀 몇 가지 중에 19절에 보면 「사무엘이 자라매」 이렇게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성장엔진이 있는데 성장본능을 상실하고 성장엔진이 꺼져버린 시대가 이 시대가 아닌가! 엘리가 오늘 본문에서 죽습니다. 4장에 가면 엘리와 그의 아들 홈니와 비느하스가 죽습니다. 이 사사시대는 모든 것이 어두운 시대이고 성경역사상 가장 암흑의 시대입니다. 이 어두움의 시대에 아이 사무엘만큼은 쑥쑥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이 사무엘과 함께 하셔서 나타나는 증거가 있는데 그것이 19절 하반 절에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저는 오늘 말씀 중에 이 말씀이 가장 은혜가 됩니다. 여러분,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는 반드시 자랍니다. 시편 92편에 보면 「의인은 종려나무와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시92:12) 우리가 이 시대에 성장본능을 잃어버리고, 성장 엔진이 꺼지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사사시대와 한국교회가 비슷하다고 하는데요! 사사시대 암담한 시대에 지도자들이 쓰러지고 엘리는 늙어서 눈도 안 보이고 그런데 사무엘은 지금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사무엘은 젖을 떼자마자 성전에서 자랍니다. 엄마의 기도를 통해서 태어난 이 아이, 사무엘의 기도를 보면 재미있는 것이 어머니의 기도가 굉장히 힘이 있어서 그 어머니의 기도덕분에 사무엘이 태어나고,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셨다’ 이것이 사무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신 결과로 결실로 태어난 아기가 사무엘인데, 사무엘은 많은 쓰임 받고 큰일을 했지만 사무엘의 자식들은 실패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무엘은 자식농사를 실패한 사람입니다. 기도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서 울어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화의 한 때를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재물을 주시고 시간을 주신 것은 섬기라고, 그렇지 않습니까! 가정에서 돕는 배필이 되고 회사에서 일터에서 어디든지 섬김의 자리가 되고,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고, 살아 있는 것이 감사하고 주의 일을 할 때가 좋고, 쓰임 받을 때 그때는 죽을 틈이 망할 틈이 없는 기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에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었다’ 오늘 성도들이 받는 데만 급급해가지고 은혜를 받고 내가 은혜의 막장 내가 은혜의 마지막 종착점이 되면 안 되고, 우리가 플랫폼이 되고 파이프, 행복통이 되고, 유통자가 소통자가 되어야 됩니다. 사무엘이 말을 하면 그대로 적중이 되고, 기도를 하면 그대로 응답이 되고, 찬송을 부르면 그대로 주님께 사무칩니다. 이 시대, 마지막시대에 연말에 혼란한 시대에 지치지 않는 힘을 가지고 성장발전을 시켜서, 하나님 말씀을 받는 대로 그것을 자녀에게 이웃에게 하나님 내게 짝지어 준 사람들에게 유통해서 필통해서 소통해서 아름답게 쓰임 받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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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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