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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학교를 살린다] “신앙의 집에 시간을 확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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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엔데의 소설 『모모』는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수작이다. 소설에서 처음에 아이들은 모모를 중심으로 마을 공터에 모여서 매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무 것도 없어도 그저 상상의 나래만으로도 배를 만들고, 파도를 헤치며 행복하게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에 시간을 도둑질해가는 회색 신사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마수에 넘어간 부모들은 너도나도 공터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탁아시설에 맡겨버린다. 이때부터 아이들은 시설 속에 갇히고, 어른들은 돈 버는 일에만 매진하며 매일 기계처럼 살아간다. 잘 먹고 잘 사는 가정을 만들자고 시간을 아끼며 아등바등 살았건만, 정작 가정에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적어지고, 삶을 풍성하게 하는 시간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44년 전에 나온 이 소설은 지금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남녀노소 없이 바쁘게 살고 있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교회도 다음세대를 만날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일주일 168시간 중에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단 1시간뿐이다. 교회에서 아이들은 예배 30분, 성경공부 30분을 바쁘게 마치고는 서둘러 학원과 집으로 향한다. 이러한 시간적 환경은 아이들에게 신앙의 가치관을 전혀 심어줄 수 없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중요한 과목일수록 수업 시간이 많아지는 것을 경험하며 생활한다. 그런데 일주일에 단 한 시간을 신앙교육에 투자한다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교회가 아이들의 신앙을 품고 자라게 하는 신앙의 집으로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일단 아이들이 오래 머물고 생활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또한 가정에서도 신앙의 집을 짓는 시간이 필요하다. 성민교회에서는 올해부터 가정예배 드리기 캠페인을 하고 있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가족 구성원간에 시간 맞추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어떤 가정은 부모님이 밤 10시에 퇴근해서 청소년 자녀와의 고군분투한 가정예배현장의 인증샷을 찍어 교회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했다. 각자 너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어서 한 자리에 모이는 것도, 그 금쪽같은 시간을 신앙교육에 투자하는 것도 참 힘든 세상이 되었다.
올해 초,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부모님께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은 한 설문조사에서 아이들의 52.8%가 선택한 1등은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응답이었다. 용돈이나 선물이라고 응답한 아이들 보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원한다고 응답한 아이들이 두 배 이상 많았다. 우리는 때로 시간이 부족하면 그 적은 시간이라도 질을 높여서 보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함께함의 질은 함께함의 양에서 비롯된다.”는 한 상담전문가의 말이 떠오른다. 함께하는 절대 시간이 부족하면 함께함의 질도 역시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앙교육도 마찬가지이다. 무엇보다 먼저 함께함의 양을 확보해야 한다. 교회에서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뛰어 놀고, 함께 말씀을 나누는 절대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육부서의 예배시간을 점검해서 아이들이 오기 편한 시간대인지, 예배 마치고 식탁공동체를 가질 수 있는지, 오후에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을 여유 있게 제공할 수 있는지 검토해 보자.
이해인님은 ‘사랑과 시간’이라는 수필에서 ‘시간이 없다’는 말은 다른 말로 바꾸면 곧 ‘사랑이 없다’는 말이라고 이야기했다. 시간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사랑을 채워 보자. 올 한해 교회마다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북적이는 행복한 모습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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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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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해방정국의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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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농단사태’로 촉발된 ‘탄핵정국’은 결국 대한민국사회에 촛불세력과 맞불세력, 탄핵찬성세력과 탄핵반대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이라는 반갑지 않은 부산물을 낳았습니다. 헌법재판소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한쪽은 범상치 않은 정치적 내상(內傷)을 입을 터이고, 원치 않는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이들로 말미암아 더 큰 혼란이 초래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교회는 어느 한 편의 입장에 서기보다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러한 분열과 대립이 더 이상 격화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작금의 상황이 7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마치 해방정국의 재림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1945년 해방 후 이 땅은 찬탁과 반탁, 남북협상, 한국문제의 유엔이관, 단정수립여부를 두고 이승만과 한민당을 지지하는 세력, 김구와 한독당을 지지하는 세력, 김규식 등의 중도파, 박헌영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자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와 시대의 격류(激流) 속에서 중지를 모으고 힘을 합쳐도 시원찮을 판에 민족과 사회가 다중으로 분열된 대가를 우리는 결국 몇 차례의 내전과 같은 상황들과 마침내 6.25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치러야 했던 뼈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이 『3차 산업혁명』을,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이 『4차 산업혁명』을 논하는 시대입니다. 세계적인 석학들이 다가오는 시대의 특징으로 에너지 혁명, 사물인터넷(IoT)의 혁신,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넘어선 대체현실(alternative reality), 나노 혁명(nano revolution)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국가의 역량을 총집결해서 전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좌우논쟁으로 해방정국의 속편을 닮은 소용돌이 속에 빠져있으니, ‘개탄(慨歎)’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남겨둔 말 같습니다. 하루 빨리 정쟁을 종식하고 마음을 합하여 21세기 신(新) 성장 플랫폼(platform)을 구축하는 일에 매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대립과 분열을 봉합하고 화해와 화합을 이루어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루시 스톤(Lucy Stone)이 시작한 미국 여성참정권 운동은 또 다른 여성 지도자들과의 반목과 대립으로 말미암아 그 결실이 이루어질 때까지 반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때로는 친구가 가장 큰 적일 수도 있다는(親敵, frenemy) 아이러니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웠습니다. 그밖에도 수많은 사회적 장벽으로 우리는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남녀와 세대와 빈부와 이념의 차이 등으로 인해 양산된 그 모든 차별과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은 성경밖에 없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서로 다를 뿐이지, 서로 틀린 것이 아닙니다. 누군들 나라가 평화롭고 번성하고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각자 생각하는 방식과 표현하는 수단이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에 절대적인 급선무는 상호 이해와 존중과 관용의 정신입니다. 또한 사랑입니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지체들이 한 몸 되게 하는 것은 오직 사랑밖에 없습니다. 비가시적인 담벼락을 쪼갤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이신 주님께서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하신 까닭입니다. 그것도 보통 사랑입니까?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원수를 축복하고 기도해주는 그런 사랑입니다(눅 6:27-29). 이를 통해 분열과 대립을 넘어서 하나 됨의 역사가 먼저는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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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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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예수님을 생각하라(히12장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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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갈 때 무엇을 보고 듣고 관심을 가지냐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눈과 귀를 마음이 가는 그 곳에 우리의 인격은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을 바라보면 롤모델이 되어서 좋은 사람이 만들어 지는 것이고 나쁜 사람을 보고 나쁜 생각을 하면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흉보면서 배우고 우리 속에 각인 되게 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우리 자녀들의 모습 속에 비쳐 나오기도 합니다. 사람은 말하는 대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본대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우리 주변에 롤모델이나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에게 믿음의 영웅들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많은 증거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배우고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살아계십니다.
세상 속에 살아가다 보면 우리를 짓누르고 얽매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는 자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경주하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분 앞에 나의 무거운 죄와 어두운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어두움에 속한 것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인생은 달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고통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높고 거룩한 영광스런 자리에서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셔서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죄인 취급을 받으사 갖은 모욕과 핍박과 말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을 당하셨으나 그 모든 것을 끝까지 참으셨고 감당하셨습니다. 심지어 죄 아래 죽을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깨끗함을 입고 살아날 것을 내다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킨 예수님은 죽은 듯 했으나 삼일 뒤 살아나셨고 하나님의 영광스런 우편에 앉으사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너무나 거룩하신 그 분이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를 위해 참으시고 또 참으시고 죽음까지 감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고통과 고난과 아픔을 어찌 예수님의 고난과 비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참아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내어 주신 우리를 향한 그 희생, 그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상황과 사람을 바라보면 실망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로 교정해야 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은 새롭게 되어 힘을 얻고 예수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완전하게 하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닮아가는 우리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식은 근실히 징계한다고 했습니다. 징계에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답게 기르기 위한 징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한 징계인 것입니다. 천번 만번 근실히 연단을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 안에서 의롭게 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찾아와도 이 또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고 우리를 얽매는 것들을 벗어버리고 우리를 위해 끝까지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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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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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 패스트 팔로어를 넘어 퍼스트 무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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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난도 서울대 교수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2017 년 대한민국 소비트렌드 키워드를 치킨 런(Chicken Run)으로 삼았다. 치킨런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에 나오는 닭들처럼 2017년에는 한국사회도 어떻게든 비상의 날개를 펴고 위기의 담장을 넘어 탈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통계청에서 발표한 종교인구 조사에서 기독교가 제1위로 968만명이 됐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수많은 공격과 안티크리스 천들의 빈정거림 속에서도 성장한 것이기에 더 의미가 있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가 돼 끊임없이 교회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전 도에 올인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패스트 팔로어는 빠르게 추격하는 자라는 의미로 1등 기업의 성장을 모델로 해 빠르게 뒤 쫓아 가는 2등 기업을 말한다. 한국교회도 다른 종교를 따라잡으려고 쉬지 않고 빠르게 달려왔다. 그런데 어느새 제1의 종교가 된 것이다. 삼성도 과거에는 패스트 팔로어였다. 일본의 소니, 미국의 애플 등을 부지런히 벤치마킹하며 따라 갔다. 그러나 어느새 창의적 선도자,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도 명실공히 퍼스트 무버 역할을 하게 됐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교회는 4차원의 신지식과 패러 다임을 갖고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 창조적 파괴력을 행사해 나가야 한다. 세를 과시하거나 부풀리자는 말이 아니다. 이 정도의 위상과 영향력을 선점했으니 이제는 4차원의 신지식과 패러다임을 갖고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창조적 파괴력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선 성경적 정체성과 역사적 정통성을 갖고 넓은 포용력을 행사해야 한다.
사실 한국교회 성도가 968 만이라고 하지만 여기에는 정통교인만 있는 게 아니다. 극소수지만 이단들도 있을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있지만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 소위 ‘안나가’ 신자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머징교회나 탈교회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세계적 추세이고 미래 현상이라면 전통 교회 역시 그들을 선도하면서도 포용하며 성경적 가치와 선한 목적 안에서 하나 될 필요가 있다.
지난 미국 대선을 보라. 대부분의 예상과 달리 트럼프가 당선됐다. 상상하지 못할 막말을 했는데도 침묵하고 숨어 있던 미국교회 절대다수의 표가 응집한 것이다. 그가 좋아서가 아니라 청교도 가치 위에 세운 미국과 미국교회 생태계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미국교회는 패스트 팔로어를 넘어 퍼스트 무버가 된 것이다.
한국교회도 이제 변해야 한다. 선거 때마다 줄서기에 바쁘고 후보에 따라 편을 나누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은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 괜히 선거에 생색을 내거나 드러내려 하지 말고 질서정연하게 침묵하면서 한국교회의 저력을 발휘해야 한다. 좌우 진영 논리나 정쟁에 휘말리지 말고 사람부터 찾자. 한국교회의 생태계와 건강한 사회를 지켜낼 수 있는 지도자를 발굴하자. 그런 사람이 없다면 성경적 가치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에 가까운 사람을 키우고 기도하고 후원하자. 미국교회가 산 교훈을 보여줬지 않는가. 한국교회도 이제는 퍼스트 무버가 되자. 창조적 혁신자와 개 척자의 마인드로 시대정신과 흐름을 주도하자. 절대로 분열하지 말고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 에너지를 폭발시키자. 2017년, 한국교회가 시대와 역사의 중심을 잡고 눈부신 미래를 향해 퍼스트 무버 역할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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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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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명사와 동사로 말하기(고린도전서 4장 19-20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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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교수의 생애 첫 시집인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에는 <봄의 시인>, <여름의 시인>, <가을의 시인>, <겨울의 시인>이라는 제목의 연작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시인이 그렇다면 <봄의 신앙인>, <여름의 신앙인>, <가을의 신앙인>, <겨울의 신앙인>이라는 적용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개인적인 호불호와는 별개로 사 계절 중 가장 찬란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은 가을일 것입니다. 울긋불긋한 단풍이 어우러진 가을 산의 풍광은 가히 환상적입니다. 그래서인지 가을이 되면 누구나 시인이 됩니다. 가을처럼 감성을 자극하는 계절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개인적으로 가을을 좋아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어령 교수께서는 팔순에 이르러 펴낸 생애 첫 시집에서 자신을 <늙은 시인>이라 부르면서 <겨울의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왜 봄, 여름, 가을의 시인보다 겨울의 시인이 되고자 한 것일까요? 봄의 시인은 이제 막 입문 단계에 있는 시인이 아닐까요? 여름의 시인은 열정은 넘치지만 푸른 이파리처럼 아직 덜 익은 시인이 아닐까요? 가을의 시인은 어느 정도 성숙하고 화사하게 아름답지만 아직 그 찬란한 이파리들이 낙엽으로 떨어지는 마지막 고통과 아픔을 채 겪지 않은 시인이 아닐까요? 그러나 겨울의 시인은 늙은 시인으로서 겪을 것을 다 겪어 인생이 무엇인지 알게 된 시인이 아니겠습니까? 이어령 교수의 <겨울의 시인>이란 작품에서 제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은 구절은 시의 맨 끝 구절이었습니다. <.....늙은 시인은 / 형용사나 부사를 믿지 않는다. / 모든 잎이 지고난 뒤 / 가지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나목처럼 / 심줄만 남은 언어로 늙은 시인은 / 슬프고 찬란한 시를 쓴다.> 늙은 시인은 모든 잎이 낙엽이 되어 떨어질 때의 슬픔을 압니다. 제 아무리 아름답게 빛나는 것들도 다 부질없는 것임을 압니다. 그 때 처음으로 앙상한 나목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동안에는 이파리들을 가리고 있어서 나뭇가지는 보이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던 이파리들이 다 사라지자 나뭇가지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듬 해 봄이 올 때 나무가 다시 생명력을 뽐낼 수 있는 것은 그 무성한 이파리들 때문이 아니라, 앙상한 나무 등걸과 가지들 때문임을 불현 듯 알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나목이야말로 아름다움의 극치임을 깨닫습니다. 나목의 아름다움은 생명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 시인은 형용사와 부사를 멀리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형용사와 부사는 문장을 화사하고 풍성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문장이 완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장의 생명은 명사와 동사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무의 가지와 같은 명사와 동사에는 주목하지 않고 이파리와 같은 형용사와 부사에만 집중합니다. 그래서 노 시인은 이렇게도 쓰고 있습니다. 같은 시집에 등장하는 <시인과 나목>의 한 구절은 이렇습니다. <......형용사에 속아서는 안 된다 / 움직임을 수식하는 부사 역시 안 된다 / 그것들은 명사나 동사의 조력자가 아니라 / 몰래 의미를 가로채려는 위험한 모함꾼 / 중략... / 나뭇잎이 나무의 피부라면 / 나무 가지는 나무의 정맥과 동맥 / 아니면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뼈>
우리도 늙은 시인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형용사와 부사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명사와 주어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보통 이렇게 말하지요. <나는 너를 진짜, 아주 많이, 끝까지, 진실하게, 정성 다해, 사랑해!>라고요. 그러나 사실은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만 말해도 충분합니다. 진짜, 아주 많이, 끝까지, 진실하게 등의 단어들은 형용사와 부사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무의미합니다. 그렇게 듣기 좋게 말해도 정작 사랑하지는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짧게 말하고 실제로 사랑하는 게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속빈 강정 같은 형용사와 부사보다 명사와 동사로 짧게 말씀하셨지만, 십자가를 지신 참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이유는 형용사와 부사만 너무 많이 말하고 실천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 겨울 신앙인으로 실천의 열매가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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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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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해 봅시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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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일치라고 할찌라도
참 기이한 일도 있을 수 있어
세상에는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도 절묘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들이 가끔 있다. 믿기지 않는다고 할지모르나 사실이다. 먼저 외국에서 있었든 예를 든다.
링컨 대통령과 케네디 대통령의 우연의 일치이다. 1)두 사람 모두 미국 대통령이다 2)두 사람 모두 금요일에 죽었다 3)두 사람 모두 머리에 총탄을 맞고 죽었다 4)두 사람 모두 피살될 때에 그의 부인이 곁에 있었다 5)암살범 부스는 1839년생이고 암살범 오스왈드는 1939년생으로 39년이 같다 6)두 대통령의 대를 이은 부통령의 이름이 모두 존슨이다 7)두 대통령 모두 재직 중 자식 한명이 죽었다 8)두 대통령의 암살범은 모두 재판하기 전에 의문사로 죽었다 9)링컨 대통령의 비서 이름이 케네디인데 케네디 대통령의 비서 이름은 링컨이었다 10)링컨 대통령과 케네디 대통령은 이름의 알파벳이 일곱자리로 똑같았다 11)후임 대통령 앤드류 존슨과 린드 존슨의 알파벳은 열세자리로 똑같았다 12)암살범 존윌크스 부스와 리하비 오스왈드는 알파벳 열다섯 자리로 똑같았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절묘하지 않은가.
이제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우연의 일치를 예를 든다.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따님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이다. 1)박정희는 5.16으로 정권을 잡았고 박근혜는 51.6%의 득표로 정권을 잡았다(점 하나가 다를 뿐이다) 2)박정희는 18년간 대통령으로 집권했고 박근혜는 18대 대통령으로 집권했다(18이 같다) 3)박정희는 61세에 서거했는데 박근혜는 61세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61이 같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박 대통령 탄핵에 관한 문제로 전국이 분란하다. 한 편에서는 마땅히 물러나야한다며 촛불을 들고 데모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태극기를 들고 탄핵무효를 외치면서 집회를 하고 있다. 처음엔 촛불집회 인원이 많았으나 갈수록 태극기집회 인원이 더 많다는 말까지 나돈다. 그런데 한 가지 실로 절묘한 것이 있다. 그게 뭔가. 박 대통령 탄핵에 관련된 숫자이다.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가결할 때에 불참이 1, 찬성이 234, 반대 56, 무효 7. 8일에 발의하여 9일에 표결하였다. 위의 숫자를 모두 정리하면 123456789 이렇게 된다. 참 기묘하지 않은가. 그런데 아직 나타나지 않은 숫자가 있다. 그게 뭔가. 바로 ‘0’이라는 숫자이다. 그런데 ‘0’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 혹 헌법재판소에서 박 대통령 탄핵에 관한 모든 것을 ‘0’으로, 즉 기각으로 처리하여 없었던 것으로 할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지 하여간 숫자가 기이하기 때문에 지켜볼 일이라고 생각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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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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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부산기독교이야기] 부산에 첫 이양선이 나타난 때는 언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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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라 하면 쇄국정책을 생각하게 된다. 흔히 쇄국(鎖國)은 조선을 멍들게 한 정책으로 여기지만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방아책(防我策)이었고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그 기세등등하던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이 백년을 채우지 못하고 무너졌는데, 조선조는 드물게도 519년(1392-1910) 간 존속한 것을 보면 왕조를 지탱했던 내적 결속력이 있었고, 실사구시를 추구한 정책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시간적 측면에서 조선왕조는 로마제국의 존속기간과 맞먹는다는 점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19세기 변화하는 역사의 길목에서 조선조가 택한 마지막 정책이 쇄국이었다. 그러나 이런 은둔의 나라로 향하는 신흥서구세력과 일본의 도전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실체가 18세기부터 조선의 항구로 스며드는 외국 선박 곧 이양선(異樣船)의 출몰이었다. 탐험이니 측량이니 하면서 서양의 함선들이 출몰하면서 개항과 통상을 요구하자 쇄국의 벽은 높아만 갔다. 그러나 개화지향 세력의 대두와 압력으로 쇄국정책은 10년(1863-1873)으로 막을 내린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서 우리나라와 부산항으로 들어온 첫 이양선은 무엇이었을까?
귀츨라프가 지금의 충청도 보령시에 속한 고대도로 왔을 때가 1832년이었고, 곧 북한지역 동해안의 단천(1848), 북청(1848), 함흥(1897)에 이어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으로, 그리고 프랑스함대가 천주교도 박해를 구실로 강화도로 침입했을 때가 1866년이었다. 2년 후인 1868년에는 충청도 아산만에 상륙하여 덕산에 있던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는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발생했다.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거했을 때는 1885년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그리고 부산에 첫 이양선이 나타난 때는 언제였을까? 그때가 1797년 정조 21년이었다. 1797년 10월 14일 이른 새벽 부산 용당포 해안으로 이국의 배가 나타났다. 날이 밝자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선박은 조선의 선박과 다른 것이었다. ‘다른 모양의 선박’라는 점에서 ‘이양선’이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작은 쪽배를 탄 선원들이 해안으로 상륙했고 땔감 나무와 식수를 요청했다. 이 선박에 대한 첫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정조조 21년 9월, 곧 1797년 10월 26일이었다. “이국선 한척이 동래 용당포 앞 바다에 도착했다. 어떤 나라의 선박인지 무슨 연류로 도래했는지, 중국어 만주어 일본어 몽고어로 물었지만 통하지 않았고, 붓을 받아 글을 쓰는데, 그 모양이 구름이 산을 넘는듯하여 해독할 수가 없었다.” 이 배가 영국 군함 프로비던스(Providence)호로 영국 해군 윌리엄 로버트 브로톤(William Robert Broughton) 함장의 휘하에서 북태평양 탐험 중 땔감과 식수를 구하기 위해 일시 용당포로 기항한 군함이었다. 바로 이 배가 우리나라에, 그리고 부산에 나타난 첫 이양선이었다. “구름이 산을 넘는듯하여 해독할 수가 없었던” 엉어는 바로 영어였다. 1866년 대동강으로 거들러 올라가 평양으로 향했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80톤급 증기범선이었는데, 프로비던스호는 86톤급이었다고 김재승 박사는 지적한다.
이 선박 승선원은 이 때 부산항을 그렸는데, 부산항을 조선 하버(Chosan Harbour)라고 불렀다. 이런 연유로 부산항은 조선항이란 이름으로 서구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런 접촉이 후일 기독교의 전파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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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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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칼럼] 교회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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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국민들은 누구나 국가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드러나면서 시작된 질풍노도와 같은 정국은, 이제 헌재의 대통령 탄핵안에 대한 판결을 눈앞에 두고 있다. 어떤 결과가 날지는 모르나, 우리나라 정치사에 큰 획이 그어지는 사건이 될 것임에는 틀림없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 역시 이런 현실정치에 대해서 나름의 생각과 판단을 갖고 있고 또 바라는 바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나라에 속한 우리에게 세상 국가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왜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갖고 관여해야 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할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야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논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단순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답을 찾기 위해서 노력할 가치가 있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AD 390년 로마의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면서 시민 7천명을 극장에 모아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밀란의 감독이었던 암브로시우는 이 황제의 비인간적인 만행을 강하게 책망하면서 그를 8개월간 파문하였고, 이에 굴복한 황제는 그해 성탄절에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통회자복하였다. 암브로시우는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교회의 감독은 신앙과 관련된 인간사에 대해 자유롭게 교훈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는데, 그 인간사에는 당연히 정치적인 일이 예외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세상을 가르치려고 할 때에 원하건 원치 않건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후 중세로 들어가면서 교회와 국가, 교황과 황제 사이의 힘겨루기가 진행되었고, 교회는 세속권력을 행사하고 정치와 뒤엉키면서 그야말로 정치화의 길을 걷고 말았다. 이런 정치와 종교의 혼합이 가톨릭의 타락의 원인이라고 규정한 마틴 루터는, 정교 분리를 강조하는 두왕국설을 가르쳤다. 교회와 국가는 서로 다른 영역이므로 교회는 정치의 일에 국가는 교회의 일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고, 이것이 이후 개신교의 중요한 정치윤리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분리에 대한 강조로 인해 개신교인들은 정치를 부정적인 죄의 산물로 여기고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치적인 무관심과 무책임을 낳게 만들었다. 개인 경건과 교회사역이나 선교에는 열정이 있지만, 사회구조적인 악에 대해서는 침묵 내지 방조했고, 나아가 무비판적인 지지 세력이 되기도 하였다. 훗날 독일에 나치가 집권하여 온갖 만행을 저지르게 된 원인으로 이런 신앙적인 가르침이 지적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반면에 한세대 뒤에 활동한 칼빈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영역은 한 곳도 없다는 하나님주권설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정치적인 책임을 가르쳤다. 두왕국설이 국가의 역할을 단지 국민의 안전과 범죄를 막는 것에 둔 것과 달리, 그는 하나님의 공의 실현을 국가의 중요한 과제로 이해했고, 이러한 과제를 바르게 이행하지 못하는 권력에 대한 저항권을 인정했다.
이런 칼빈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가능하게 하면서, 에른스트 트뢸취의 표현대로 스코틀랜드와 영국, 화란등의 서유럽에서는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결실되었고, 독일에서는 나치시대 고백교회가 만든 바르멘선언의 신학적인 밑받침이 되어 기독교의 가장 모범적인 정치윤리의 근간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교회는 짧은 역사에서 국가에 대해 다양한 경험을 하였다. 3.1운동까지 국가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지만, 그 이후 철저히 정교분리로 돌아서면서 정치적 무관심과 무책임으로 일관했다. 그러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교단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일제와 독재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지지하면서 정치적인 편력을 보이는 이중성에 빠지기도 했다.
이번 국가의 중대사안을 대하면서, 우리는 교회와 국가와의 건강한 신앙이 무엇인가를 묵상하면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일에 앞장 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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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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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학교를 살린다] 교회학교를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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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교회에서 창립기념주일을 맞이하여 초등학생 백일장을 열었다. 주제는 ‘미래의 우리 교회’였다. 아이들의 작품 속에는 우주선과 공중부양 자동차 같은 첨단기기가 가득한 미래교회의 모습이 가득했다. 또한 교회 식당에서 스테이크를 먹는 등 다채롭고 희망찬 상상이 줄을 이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유독 시선을 끄는 글이 있었다. 미래 교회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교회 건물은 폐허가 될 거라는 흉흉한 상상이었다. 실로 암울한 미래였다. 그 마지막 대목은 이렇게 끝났다. “휴~ 걱정이다.”
10년 전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던 그 아이의 상상은 오늘날 놀랍게도 현실이 되었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그야말로 “휴~ 걱정이다.” 1970~80년대 인구의 증가와 경제발전으로 불이 붙은 이른바 교회의 부흥기에는 교회 안이 어린이들로 가득했다. 당시에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장년 교인들보다 월등히 많았다. 어린이들이 부모님을 전도하는 시대, 청소년들이 국기게양대에 모여서 학교를 복음화 시키자고 기도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2016년 10월에 발표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전국청년연합회 보고서에 따르면, 교단의 교회는 8,799개, 교인은 총 280만 명이다. 이중에 미취학 아동은 95,000명으로 3.4%, 아동부는 165,000명으로 5.8%, 중고등부는 164,000명으로 5.2%, 청년부는 61,000명으로 2.1%밖에 되지 않으며 다음 세대를 모두 합쳐도 16.5%밖에 되지 않고, 이나마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2~30년이 지속되면 교회는 붕괴되고 말 것이다. 아니, 10년 후면 교회의 미래를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위급한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교회의 미래인 교회학교를 살려내지 못하면 이제 교회는 응급환자가 위기상황에서 회생할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을 놓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를 가득 채우던 다음세대들은 어디로 간 걸까? 오늘날 다음세대들은 세상의 가치관에 물든 채 교회를 떠나 살아가고 있다. 학원과 학교가 그들의 집이 되었고, 교회는 일주일에 한 시간 머무는 정류장이 되었다. 그들에게 최고의 친구는 스마트폰이며, 가정은 숙식을 해결하는 장소로 전락하고 있다. 그들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점점 더 개인화되고, 물질과 성공의 노예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만을 탓할 수는 없다. 다음세대를 이렇게 키운 것은 바로 기성세대인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본인들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의 행복을 누리고,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며 이만큼 성장하였지만, 정작 자녀 세대들에게는 공부와 성공만 강조하느라 본인들이 누렸던 신앙생활의 행복을 모두 빼앗아버린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녀세대에게 우리가 누렸던 교회의 품을 돌려주어야 한다. 그것은 다음세대를 위한 “신앙의 집을 짓는 일”이다. 이 신앙의 집은 먼저 다음 세대들이 교회 안에서 머무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교회를 스쳐가는 정류장이 아닌 머물고 싶은 가정으로 만들자. 또한 다음세대가 사랑받고, 존중받고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할 수 있도록 공간을 디자인하자. 그리고 그곳에서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진정한 만남과 사귐이 있는 즐거운 활동을 채워주자. 우리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기대하시는 우리의 다음세대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 언젠가 교회학교를 이야기하면서 이런 반응을 나누는 날을 기대해 보자. “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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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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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생명수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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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골드러시(Gold Rush)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성장한 도시가 바로 샌프란시스코입니다. 20세기 들어서는 블랙골드(black gold)라 불리는 석유가 등장합니다. 중동 발(發) 몇 차례의 석유파동으로 전세계경제가 몸살을 앓았고 최근까지도 석유전쟁은 멈출 줄 모르고 있습니다만, 검은 황금의 시대가 영원하리라 믿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 새로운 황금은 무엇일까요? 미래학자 최윤식은 “블루골드의 시대, 물이 석유보다 값비싼 자원이 된다.”라는 답을 이미 제시한 바 있습니다.(『2030 대담한 도전』 588)
왜 물을 블루골드(blue gold)라고까지 부르게 되었을까요? 한 마디로 물부족현상 때문입니다.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아시아와 만성적인 가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나 중동은 벌써부터 물로 인한 분규가 발생할 정도로 심각한 절대적 물부족현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선진국들은 환경오염으로 인한 상대적 물부족현상에 시달립니다. 물은 있어도 마실 물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단적인 증거가 물산업의 폭발적인 증가세입니다. 영국 물 전문 리서치 기관인 GWI(Global Water Intelligence)에 따르면 2010년 이미 세계 물산업 규모는 약 4,848억 달러로 당시 반도체 시장 2,800억 달러, 조선(造船) 산업의 2,500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한국의 LG 경제연구원은 수년 내로 물시장 규모가 1조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합니다.
얼마 전 한국의 한 일간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중심가 공원(Golden Gate Park) 한복판에 설치된 병마개 모양의 음수대에서 시민들이 물을 받고 있는 사진과 함께 물 관리를 위한 백년대계를 취재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공공서비스위원회는 ‘물은 인권’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2009년부터 ‘글로벌 탭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골드러시의 도시로부터 이제는 블루골드의 도시로 변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캐나다의 밴쿠버 또한 “깨끗하고 안전한 식수 공급과 원수의 지속가능한 사용, 상수원의 효과적 공급” 세 가지를 목표로 향후 100년간의 물관리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물 공급 전략은 물론 기후변화협약까지 준비하고 있다 합니다.
삼천리금수강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아직까지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물 소비량이 얼마나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지를 안다면 결코 그럴 수 없을 겁니다. 햄버거 한 개 만드는데 3,000리터, 면 소재 잠옷 한 벌을 만드는데 9,000리터, 초콜릿 1kg 생산에 27,000리터의 물이 소비된다고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물관리를 위한 백년대계를 준비해야 합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아르헨티나 등이 미래의 산유국 지위를 누리리라고 추정합니다. 블랙골드가 아니라 블루골드, 즉 물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나라들입니다. 그렇다면 예로부터 물이 좋기로 유명한 한국이야말로 미래 블루골드의 산유국이 될 가능성이 누구보다도 크지 않겠습니까?
물은 성경에서도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3)로 시작하는 성경은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계 22:1)로 마칩니다.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재창조의 주님은 영생을 또한 물로 상징화하셨습니다(요 4:13-14). 향후 ‘물의 신학’을 정립하고 실천하는 일이야말로 21세기 한국교회에 주어진 시급한 과제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삼천리금수강산을 허락하신 이유가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블랙골드의 산유국은 못 되었지만, 블루골드의 산유국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은혜로 주신 물의 힘을 빌려 영생의 물을 세계만방에 널리 전하는 생명수의 나라가 되게 하소서, 신년 벽두에 새로운 기도 제목이 하나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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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