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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생명수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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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골드러시(Gold Rush)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성장한 도시가 바로 샌프란시스코입니다. 20세기 들어서는 블랙골드(black gold)라 불리는 석유가 등장합니다. 중동 발(發) 몇 차례의 석유파동으로 전세계경제가 몸살을 앓았고 최근까지도 석유전쟁은 멈출 줄 모르고 있습니다만, 검은 황금의 시대가 영원하리라 믿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 새로운 황금은 무엇일까요? 미래학자 최윤식은 “블루골드의 시대, 물이 석유보다 값비싼 자원이 된다.”라는 답을 이미 제시한 바 있습니다.(『2030 대담한 도전』 588)
왜 물을 블루골드(blue gold)라고까지 부르게 되었을까요? 한 마디로 물부족현상 때문입니다.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아시아와 만성적인 가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나 중동은 벌써부터 물로 인한 분규가 발생할 정도로 심각한 절대적 물부족현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선진국들은 환경오염으로 인한 상대적 물부족현상에 시달립니다. 물은 있어도 마실 물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단적인 증거가 물산업의 폭발적인 증가세입니다. 영국 물 전문 리서치 기관인 GWI(Global Water Intelligence)에 따르면 2010년 이미 세계 물산업 규모는 약 4,848억 달러로 당시 반도체 시장 2,800억 달러, 조선(造船) 산업의 2,500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한국의 LG 경제연구원은 수년 내로 물시장 규모가 1조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합니다.
얼마 전 한국의 한 일간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중심가 공원(Golden Gate Park) 한복판에 설치된 병마개 모양의 음수대에서 시민들이 물을 받고 있는 사진과 함께 물 관리를 위한 백년대계를 취재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공공서비스위원회는 ‘물은 인권’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2009년부터 ‘글로벌 탭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골드러시의 도시로부터 이제는 블루골드의 도시로 변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캐나다의 밴쿠버 또한 “깨끗하고 안전한 식수 공급과 원수의 지속가능한 사용, 상수원의 효과적 공급” 세 가지를 목표로 향후 100년간의 물관리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물 공급 전략은 물론 기후변화협약까지 준비하고 있다 합니다.
삼천리금수강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아직까지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물 소비량이 얼마나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지를 안다면 결코 그럴 수 없을 겁니다. 햄버거 한 개 만드는데 3,000리터, 면 소재 잠옷 한 벌을 만드는데 9,000리터, 초콜릿 1kg 생산에 27,000리터의 물이 소비된다고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물관리를 위한 백년대계를 준비해야 합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아르헨티나 등이 미래의 산유국 지위를 누리리라고 추정합니다. 블랙골드가 아니라 블루골드, 즉 물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나라들입니다. 그렇다면 예로부터 물이 좋기로 유명한 한국이야말로 미래 블루골드의 산유국이 될 가능성이 누구보다도 크지 않겠습니까?
물은 성경에서도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3)로 시작하는 성경은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계 22:1)로 마칩니다.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재창조의 주님은 영생을 또한 물로 상징화하셨습니다(요 4:13-14). 향후 ‘물의 신학’을 정립하고 실천하는 일이야말로 21세기 한국교회에 주어진 시급한 과제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삼천리금수강산을 허락하신 이유가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블랙골드의 산유국은 못 되었지만, 블루골드의 산유국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은혜로 주신 물의 힘을 빌려 영생의 물을 세계만방에 널리 전하는 생명수의 나라가 되게 하소서, 신년 벽두에 새로운 기도 제목이 하나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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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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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률상식] 합동 총회 임시 목사인가 시무 목사인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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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무 목사는 정회원, 위임 목사는 언권 회원 정치 제10장(노회) 제3조(회원 자격)에 “각 지교회 시무 목사와 정년 이전의 원로 목사와 총회나 노회가 파송한 기관 사무를 위임한 목사는 회원권을 구비하고 그 밖의 목사는 언권 회원이 되며 총대 권은 없다.”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의 “각 지교회 시무 목사”는 임시 목사의 칭호가 있을 때에는 대명사로서 “위임 목사, 임시 목사, 부목사”를 의미하였다. 그런데 임시 목사를 시무 목사로 개정한 후에는 전에 존재했던 임시 목사 대신 시무 목사라는 목사 칭호가 등장하게 되어 “각 지교회 시무 목사”가 고유명사로서 지교회를 맡아 사역하는 시무 목사로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직 “시무 목사, 정년 전 원로 목사, 총회나 노회가 파송한 기관 목사”만 회원권이 구비하고, “그 밖의 목사는 언권 회원이 되고, 총대 권은 없다.”라는 규정에서 그 밖의 목사 칭호는 정치 제4장 제4조에 열거한 대로 “위임 목사, 부목사, 정년 후 원로 목사, 무임 목사, 종군 목사, 교육 목사, 은퇴 목사” 등인데, 그 중에 위임 목사도 그 밖의 목사에 속하여 언권 회원이 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혹 부목사, 정년 후 원로 목사, 무임 목사, 종군 목사, 교육 목사, 은퇴 목사는 언권 회원이 된다고 해도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으나 위임 목사가 언권 회원이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에 관하여 개정하기 전의 임시 목사 제도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임시 목사를 시무 목사로 잘못 개정한 결과 법리적으로 위임 목사가 언권 회원이 되는 엄청난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3) 헌법 개정 절차상 흠결 근본적으로 총회 결의와 노회 수의를 거친 헌법 개정안은 총회장이 공포하여 시행해야 하는데 총회장이 공포하지 않고 총회를 파회하면 그 개정안은 자동 폐기되는 것으로 종결되는 것이 법리이다. 그런데 폐기 종결된 개정안을 회원들이 공포요 하면서 강요나 압박한다고 해서 개정안을 공포할 권한이 있는 총회장이 공포하지 아니하므로 폐기된 개정안을 2년이 지난 후 권원 없는 다른 총회장이 공포했다고 하면서 시행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불법이요 당연 무효이다. 그 연유는 당연히 공포해야 할 결의안이라고 할지라도 공포해야 할 회장이 공포하지 아니하고 폐회되었으면 그 안건은 자동 폐기되는 것이 법리이거늘 2년이나 경과한 후 권원 없는 회장이 불법으로 공포했기 때문에 법률로서의 효력을 발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3. 본 건에 관한 후속 조치 교회 법률에 대한 시행의 우선순위는 세상 법과는 달리 상위법이 우선이다. 즉 법원은 교회 헌법 보다 지교회 정관을 우선하는 판례를 앞세운다. 그러나 교회 치리회는 교회 정관이나 결의보다 교회 헌법을 우선한다. 그러므로 임시 목사를 시무 목사로 개정한 법조문은 상술한 바와 같이 당연히 위임 목사는 언권 회원이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후속 조치로는 정치 제10장 제3조의 노회 회원 자격을 보완 개정하거나, 임시 목사를 시무 목사로 개정한 것을 다시 “전임 목사” 등으로 목사의 칭호를 바꾸어 개정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4. 결론 총회가 “헌법에 위반되게 처리한 사건이 있는 줄을 확인 하면”(권징 조례 제76조) 총회는 상회가 없으므로 차기 총회에서 총회의 잘못된 결의를 변경해야 한다. 본건과 관련하여 한 가지 첨언할 것은 언론의 잘못된 기사가 문제를 부추기고 있다. 한 예로 모 언론에서는 총회 헌법에 상충되는 결의일지라도 “… 총회가 확정된 해석을 불법이라는 취지의 주장은 옳지 않다. … 얼마든지 부목사나 기관 목사, 선교사, 교육 목사도 노회 정회원이며 정회원이기 때문에 총회 총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총회가 내린 유권 해석은 노회 회원 자격과 상관없이 총회 총대에 대한 자격 기준을 총회 결의로 확정하고 있다. 즉 총회 총대는 위임 목사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 [2016.3.6.(12:35) 입력 총회결의 정신 왜곡하면 안 된다]라고 하면서 필자의 신문기사를 110행이나 되는 장문으로 논평하면서 사람의 실명을 11번이나 기록하는 상식 이하의 글을 보았다. 필자가 크리스천포커스에 기고한 신문 기사를 잘못 논평한 모 언론에 되묻고 싶다. 아무리 최고회인 총회라고 할지라도 총회 결의가 교회 헌법에 상충되는 결의를 하여 시행하는 것을 불법이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또한 총회가 헌법을 해석하면서 회원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인 기본권을 박탈하고 장로회 정치의 근본 원리를 말살하고 위임 목사만 총회 총대권이 있다는 총회의 유권 해석 및 결의가 정당하다고 찬양하는 언론이 과연 정론의 철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밭갈이 하는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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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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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탐구] 나서기를 좋아하는 요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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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특별히 남들 안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의 열심이 너무 지나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모든 제자들은 가만히 있는데, 유독 앞장서서 사마리아 사람을 저주하는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음의 열심을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열심이 너무 지나쳐 정도를 벗어나면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매우 해롭게 합니다. 옛날 사도 바울 당시 빌립보 교인 중에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성도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교회를 섬기다 오히려 파벌이 생기고, 그래서 바울을 근심케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절제할 줄 아는 것도 참으로 중요한 신앙의 미덕임을 알아야 합니다.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요한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불을 내려 태워 죽이자고 요청한 것은 그에게 잔혹한 일면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런 잔혹한 성품은 결코 주님의 백성들이 가져서는 안 될 악덕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서도 바람직하지 못한 성품으로 여겨지는 잔혹한 성품을 우리 믿음의 자녀들이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행위로는 이런 잔혹한 일을 행치 않지만, 행여 우리 중심에라도 이런 생각이 들어 있다면 당장에 버리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의 생각이 행위로 실천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요한이 사마리아 사람을 불에 태워 죽이자고 요청한 것은 그가 예수를 사랑의 주로 보지 않고 심판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은 마지막 재림 때에는 심판주로 오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심판 직전까지는 할 수 있는 한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주님입니다. 이런 주님의 성품을 요한은 망각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의 사랑의 성품을 본받고 그 사랑을 널리 선포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합니다. 전한 복음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에게 저주나 심판을 선포하는 무서운 행동은 삼가고 조심해야 합니다. 끝까지 그리스도의 사랑만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요일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한은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려는 줄로 착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를 통해 예수께 높은 자리 하나를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주님은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이렇게 요한은 희생과 섬김을 위해 오신 주님을 세상 통치자로 오해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직분을 이용하여 남의 위에 군림하려 하고 지배하려 하면 이는 참으로 잘못된 행실이요, 또한 우리 주님의 참 뜻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주님을 떠난 인간의 속성은 기회만 되면 군림하고 지배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희생하는 섬김의 삶에 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고 섬김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사랑하고 섬김으로 승리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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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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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너는 그리스도의 편지라 (고린도후서 3장1절-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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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받을 때, 아이들한테 편지를 받을 때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편지라는 것은 늘 우리의 마음을 산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잠언 25장 25절에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생수와 같다고 합니다.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편지가 우리의 마음을 상쾌하게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너희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이 말은 아름다운 의미가 들어 있지만, 오늘 전체적인 말씀의 배경은 사도바울이 자기를 변증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사도바울이 본문에서 얘기하는 것은 사람들이 “어디서 추천장을 받아 왔느냐”, “네가 어떻게 사도냐”며 공격을 하니까 “내가 사람의 손으로 쓴 추천장이나 돌에 새긴 돌판에 쓴 글이 추천서가 아니고, 마음에 쓰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편지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자체가, 내가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믿게 하고 복음 안에서 성장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 너희들 존재 자체가 나를 보증하는 추천장이다. 그것이 오늘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다. 나의 기쁨, 나의 면류관, 너희들이 바로 예수님의 편지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 복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의 공통점은 세 가지 증세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갈증, 긍정, 열정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갈증이 있을 때, 타는 목마름이 있을 때 시원한 냉수 한잔이 우리를 후련하게 하고 십년 묵은 체증을 내려가게 하고 온 마음을 상쾌하게 만듭니다. 고넬료와 같은 숨통을 틔우는 사람, 물꼬를 틔우는 사람, 비상구를 열어 재끼는 사람, 그런 우리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편지라는 겁니다.
미디어의 화려한 조명아래 언론의 조작이 판을 치고 가벼운 글들이 홍수를 이루는 이 시대에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중심에는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고 고뇌하면서 신앙적으로 몸부림 치면서 적은 글들이, 편지가, 신앙고백들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어린 아이가 하나님께 편지를 적었는데, “하나님 힘내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요즘 성도들이 너무 힘들어하고 아빠, 엄마가 힘들어 하니깐 하나님이 기도 접수하신다고 얼마나 바쁘실까? 그래서 하나님 힘내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아기다운 편지에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나 가정 속에서 항상 쓴물이 아니라 좋은 것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신앙의 일기를 쓰세요. 신앙의 기록을 남기세요. 좋은 것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인간 편지가 되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김 집사 보면 살맛이 느껴진다, 나 같았으면 못 살았을 텐데, 내가 정말 살맛이 난다”는 인간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요. 냄새나는 이 세상의 그리스도의 향기요. 어두운 세상에 그리스도의 한줄기 빛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어나 빛을 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시고, 썩어져가는 세상에 소금덩이가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소금물을 들이키면 갈증을 유발하듯이 ‘내가 살아야 되겠다, 내가 더 힘을 내야 되겠다’ 남에게 갈증을 유발시키는 그런 존재감으로 매일매일의 삶이 그리스도의 편지로 그리스도의 향기로 그리스도의 빛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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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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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승화를 위하여(요한복음 3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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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에 제작된 영화⟪죽은 시인의 사회⟫를 아시지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최고의 명문고교인 <웰튼아카데미>에 <존 키팅>이란 영어선생님이 새로 부임합니다. 키팅 선생님도 그 학교 출신이었지만, 학교와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학교는 <전통, 명예, 규율, 최고>를 중시하면서, 학생들을 엄격한 규율로 통제하고, 명문대학 진학을 위해 최고가 되도록 공부만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키팅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카르페 디엠, Carpe diem>이란 유명한 말을 가르칩니다. <카르페 디엠>이란 <미래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오늘을 즐기라>는 뜻입니다. 본래 <카르페 디엠>은 예수님보다 60여년 먼저 태어난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의 한 구절인데, 시인은 쾌락를 강조하는 에피쿠로스학파에 속해 있었기에 미래를 기대하지 말고 오늘을 즐기라고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키팅 선생님은 학생들이 공부벌레가 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되고 싶은 사람이 되어 주어진 시간을 만끽하도록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카르페 디엠은 주어진 시간을 즐기면서 열정적으로 살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을 즐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혹시 미래를 포기한 게 아닌가 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카르페 디엠은 정말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미래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늘을 즐겨야 한다면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그런데 영화에서 키팅 선생님으로 등장했던 영화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2014년에 자살했습니다. 그는 영화 속에서 학생들에게 미래를 보지 말고 현재를 즐기라고 했는데, 영화 밖의 배우 로빈 윌리엄스에게도 미래가 없었습니다. 그는 우울증과 파킨슨병을 앓았고, 두 번의 이혼으로 인한 위자료 때문에 경제적으로 핍절했습니다. 그는 희극배우 출신이었지만, 마지막은 비극이었습니다. 그의 주검이 발견되었을 때 손목시계를 양말 속에 넣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는 째깍 째깍 하면서 흘러 오늘과 내일을 보여주는 시계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대로 시계가 멈추길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미래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도 많습니다. 요즘 청년들은 미래가 없다고 말합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직장에서 밀려난 중장년층에게도 미래가 없습니다. 그리고 궁극적 차원에서 말한다면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만족스럽다 해도, 죽음이 존재하는 한 참된 미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조건이 만족스러운 선진국 국민들에게도 슬픔과 절망이 있는 것입니다. 선진국에도 죽음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해결하여 우리에게 궁극적 미래를 열어줄 존재는 누구입니까? 그 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씻는 길을 여시고,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극복하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이 열림으로써 참 미래가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은 영생으로 나아가는 입구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오늘을 즐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카르페 디엠은 미래가 없는 사람들의 퇴폐적인 쾌락추구가 아니라, 영생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기쁨을 즐기는 차원으로 승화됩니다. 우리들은 오늘을 즐기되 내일을 바라보면서 거룩한 기쁨을 맛보는 것입니다. 이 모든 축복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심으로 가능하게 되었으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고, 그 미래는 하나님과 함께 할 하늘나라의 영생입니다. 그것을 내다보며 오늘 힘들더라도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살게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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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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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세움과 무너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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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형과 함께 시냇가에서 모래성 쌓기를 했다. 큰집, 작은 집 지으면서 내 집이 더 좋아, 형아 집이 더 좋아 하면서 모래성 쌓기를 하다가, 형이 내가 쌓은 집을 실수로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 순간 “왜 내가 쌓은 집을 무너뜨렸느냐”고 앙탈을 하면서 우니깐 형도 미안한 마음으로 달래다가 계속앙탈을 부리니 형은 발로 내가쌓은 집과 형이 쌓은 집을 휘휘 뭉개버리고 “무너지면 다시 쌓으면 되잖아.” 하면서 일어서 먼저 가버린 추억이 있다.
그렇다. 무너지면 다시 쌓으면 된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앙탈을 부리면서 울었던 어린 시절이지만, 그 앙탈과 울음에는 내가 모르는 무의식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느끼고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무너뜨리기는 쉬워도 세우기는 너무도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모래성 쌓기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무너뜨림은 ‘흩뜨리거나 헐어서 내려앉게 하다’라는 말이다. 영어에서 말하는 ‘break, destroy, collapse’라는 단어 뜻하는 것은, 지난 모든 것들을 여지없이 쓸모없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움은 ‘다른 사람이나 물건을 올려 바로 서게 하다’이다. 근본을 훼파하거나 파괴함이 아닌 근본으로 다시 돌리는 것이다.
은퇴 후 나는 전국교회를 방문하면서 말씀 사역을 한다.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생활을 했을 때의 아름다운 추억을 되살리면서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 초청을 받으면서 1년 내내 말씀 사역을 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낀다. 대형교회이든, 산골 작은 교회이든 교회를 세운 역사가 있기 마련이고 그 세움의 역사는 눈물겹도록 감동스러운 헌신과 봉사와 희생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상황도 종종 듣고 보면서 모래성 쌓기 놀이를 할 때의 생각이 새삼 떠오른다.
우리는 비록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거할 곳은 하늘나라임을 확신하기에 주님의 재림을 그리움으로 기다리는 신앙생활을 했었다. 그러기에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서로를 이해하고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면서 위하여 기도하고, 넘어지면 손잡아 일으켜 세워주고,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더불어의 삶을 기쁨으로 노래했던 행복한 교회 생활이었다. 이것이 세움의 역사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삭막한 장터같이 되어가는 느낌, 네가 없어야 내가 있다는 타락한 존재의미가 교회공동체 안에서 느껴지는 아픔과 슬픔을 보고, 듣고, 느껴진다. 그것은 사단의 목표가 되는 무너뜨림의 역사다.
로마서를 통하여 일깨워준 메시지처럼 한 사람 아담 때문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죄와 사망이 우리 가운데 거하는가 하면, 한 사람 예수님 때문에 다시 세워지고 의와 생명으로 말미암아 광명한 빛으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처럼, 한 사람 때문에 교회가 무너지기도 하고 한 사람 때문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한다. 그런데 두려운 것은 세우는 것은 너무도 많은 것, 즉 눈물과 땀과 피와 수고의 대가로 세워지는데, 무너뜨림은 단순한 인간적 소욕 하나로 인하여 한 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을 통해 하나님은 마귀로 틈타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2절은 우리가 주목할 말씀이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했다. 온전케 한다는 말은 χαταρτιαμός(카타르티아모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정치적으로는 연합, 의학적으로는 어긋난 관절, 골절된 수족을 다시 맞추는 것, 찢어진 그물을 깁는 것, 이전의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경우에 사용된 단어다. 어근을 들여다보면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이의 구체적 행동이 봉사(διάκονια)로써 실제적 섬김을 말한다. 섬김의 자세는 하인, 종(διακονος)의 자세로 섬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이다. 이것이 교회 직분의 핵심이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을 수행하는 것은 세움이지 무너뜨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에서 직분을 받은 자들의 정사(正思)이며, 정언(正言)이며, 정행(正行)이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 교회인 것이다.
세우기 위하여 쏟은 수고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기에 그 세움이라는 역사 때문에 공동체가 평행감축을 노래하면서 천국생활처럼 일상화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에 그 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본다. 그 무너짐에는 역사도 없고 기본가치도 없고 배려도 없고 복음의 핵심인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도 없는, 속된말로 표현하면 비인간적이다. 비인간적이란, 다른 말로 동물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더 무섭고 두려운 것은 그 무너짐의 중심언어에는 ‘개혁’이라는 단어가 자리 잡고 있다. 진정한 개혁은 비판과 부정과 무너뜨림이 아니라 더 나음을 향한 세움의 몸부림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는 스스로를 진단할 수 있는 체계와 능력을 상실했다. 믿음과 은혜라는 용어로 모든 것들을 용해시키는 신비로운 구조 속에서 교회의 본질이 무의식적으로 왜곡되기도 하지만, 내 것이 아니면 다 틀렸다는 타락한 의식구조에서 나타나는 비판과 정죄와 거짓과 위선으로 포장된 또 다른 개혁의 대상이 되어가는 것이 더 큰 아픔이 되는 것이다. 그 결과 개혁은 구호에만 그쳤고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시기를 원하셨던 교회, 곧 에클레시아의 현상은 결코 세워지지 않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십자가 복음의 핵심인 용서와 사랑이 빠진 세움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는 지금 세우고 있는가? 무너뜨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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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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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해 봅시다] 故 허순길 목사의 장례식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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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 앞에 헌화, 바람직한가
쓸데없는 허례허식에 불과해
지난 2월 12일 고 허순길 목사의 장례식이 복음병원 장례식장에서 거행되었다. 고인은 저보다 조금 연하이지만 저와 함게 고려신학교 제15회 동기동창이다. 그 때문에 허 목사의 별세 소식을 듣고 다음 날 오전에 서둘러 장례식장으로 갔다. 의례히 조화가 많이 세워져있을 것을 예상했는데 예상 밖에 조화가 한 개도 놓여있지 않았다. 분위기가 썰렁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빈소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고인의 영정(사진)도 없고 이름(명패)도 없고 국화(꽃)도 놓여있지 않았다. 부의함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고인의 유족도 빈소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었다.
나는 고인의 영정이 있는 곳에서도 그 앞에서 기도하지 않고 바로 유족에게 인사(절)을 하거니와 거기서는 빈소의 분위기만 보고 곧 밖으로 나와서 유족에게 인사를 드렸다. 부의함은 없지만 준비한 부의금을 유족에게 전하니 고인의 뜻이라고 설명하면서 극구 사양하며 받지 않으셨다. 조화도 여러 곳에서 들어오는 것을 고인의 뜻이라고 설명하고 정중히 사양하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테이블에 붙어있는 ‘알리는 글’을 보니 다음과 같았다. 「본 장례식장은 고 허순길 목사의 유언에 따라 부의금과 조화를 사양하오며 영정을 설치하지 않으며 유족에게 위로의 문안하는 것으로 상례를 대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고인은 사후에도 하나님보다 자신의 이름이 드러날까 하여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장례식도 간소했다. 고인의 약력소개, 추모사, 조사 등의 순서는 일체 없었다. 고인이 생전에 부탁하기를 허 목사는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나도록 장례식을 간소하게 거행하라고 하더란 것이다. 장지로 갈 때에도 가족들만 가서 하관하기로 하고 대형버스는 아예 준비하지도 않았다고 하며 조문객들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장의차는 리무진이 아니었고 응급구호차량인 밴이었다. 유족과 친지들은 각기 자기 차량으로 장지로 갔다. 고인의 묘는 평토장으로 하여 비석이 없으면 묘인지도 모를 정도로 만들었다고 한다.
고 허순길 목사의 장례식은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고 말만할 것이 아니라 그를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보라. 헌화에 무슨 뜻이 있는가. 누구에게 바친단 말인가. 쓸데없는 허례허식 아닌가. 사진 앞에 서서 기도하는 그런 일도 하지 말아야한다. 유족이 빈소 안에 있는 경우 들어가자마자 바로 유족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리면 그것으로 조문이 충분하지 않은가.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이면 기도하면 더 좋겠고...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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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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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칼럼] 다음 세대를 염려하면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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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른(기성)세대는 기독교 신자로서 신앙 생활하기에 정말 좋은 시대를 누려왔다.
자유 민주주의 나라에서 신앙의 자유가 100% 보장되고 타 종교와의 갈등도 전혀 없이 그리스도인 자신이 의지와 열심만 있으면 원하는 대로 마음껏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다. 불신자들의 영혼을 사랑하므로 불쌍하게 여겨 얼마든지 ‘전도’ 할 수 있다. 길거리에서 전도 할 수 있고 집집을 방문하여 예의를 갖추어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좋은 신앙 서적을 선사하고 전도지를 전해 줄 수 있다. 심지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찬양’을 부르면서 복음을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의 종교적 전망은 밝지가 않다. 염려하면서 기도해야 할 당면 문제 몇 가지를 제시해 볼려고 한다.
○ 동성애 문제와 탈 도덕 탈 윤리주의의 범람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최고의 피조물로 만들어 주셨다. ‘최고의 피조물’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인격을 닮은 존재〉 라는 뜻이다.
이 얼마나 황송하고 과분한 축복인가!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을 ‘남자(아담)와 여자(하와)’로 창조하셨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남자요 여자는 여자이다. 〈중간 사람〉은 없다. 따라서 때가 되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여 〈부부 夫婦〉가 되어 자녀(子女)를 출산하도록 창조하셨다. 그런데 범죄 하여 마음이 어두워지면서 인간은 ‘엉뚱한 짓’을 끊임없이 연구 해 내었다. 남자와 여자가 때가 되어 서로 사랑을 하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아 키우는 모습은 인간이 땅 위에서 누릴 수 있는 참으로 성스럽고 가장 행복한 모습이다. 그리고 자녀를 출산해야만 가문과 교회와 사회와 우리나라의 역사를 계승할 수 있고 지구를 가꾸고 지킬 수 있다.
〈동성애 同性愛 homosexuality〉 문제가 왜 인류 사회에 나타났을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는 분명히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이들이 서로 사랑하도록 하셨고 결혼하여 자녀를 출산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답고 행복하다(시편128편). 그런데 어찌하여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여자가 여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한다는 말인가?(로마서 1:26,27)
그 원인 제공자는 인간의 〈죄〉다. 〈죄〉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의 법칙과 질서’를 어기는 것(범하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1:28은 인간의 ‘죄성’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
우리 사회는 〈소수 인권 보호〉 또는 〈성 소수자 인권 보호〉라는 이름으로 〈동성애〉를 합법화 하려는 시도와 운동이 끈질기게 시도 되고 있다.
온 세상이 어그러진 길로 나갈찌라도 우리나라 만큼은 ‘바른 길’ ‘인륜지도(人倫之道)’를 걸어가고 지켜야 한다. 한국은 세계의 희망이다. 동성애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가장 혐오하시고 무섭게 진노하신다. 창세기 18:20,21과 창세기 19:4,5,24,25을 보라.
하나님께서 〈소돔 · 고모라〉라고 불리우는 한 도시를 철저히 응징하신다.
하늘로서 유황불이 쏟아져 내려 그 크고 화려한 도시가 〈롯 Lot〉이라는 한 사람의 가족만이 피신하고 모두 멸절되었다. 창조주의 진노를 초래한 결정적인 원인은 〈죄〉 였는데 그 죄는 바로 ‘동성애’ 였다.
이런 탈 도덕적이고 탈 윤리적인 질적으로 아주 사악한 〈동성애〉를 「합법화 하여 소수자에 속하는 그들을 보호해 주고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살 수 있도록 기정사실화 해 주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나라 어느 대도시의 시장과 유력하다는 대선 후보도 여기에 동조를 하고 있다. 법을 제정하여 〈동성애자〉들을 보호해 주어야 하겠노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참으로 고약한 사람들이다.
동성애가 범람하면 우리 사회는 혼돈에 빠지고 〈다음 세대로의 계보 · 계승〉이 심각하게 약화 되고 차질을 빚는다. 다음 세대를 위하여서도 동성애는 엄격히 〈금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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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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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률상식] 합동 총회 임시 목사인가 시무 목사인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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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목사이면 임시 목사와 위임 목사 모두 정회원-시무 목사이면 시무 목사는 정회원, 위임 목사는 언권 회원
소제목과 같이 시무 목사를 고집하고 시행하는 현실은 법리적으로 개정 전 “임시 목사”를 “시무 목사”로 개정한 결과 노회에서 “시무 목사는 정회원”이 되지만 “위임 목사는 언권 회원”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각 치리회가 시무 목사나 위임 목사나 정회원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필자는 심히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시 글을 쓰게 된 것을 먼저 밝혀 둔다. 1. 본건의 사실 관계 제95회 총회가 임시 목사를 시무 목사로 개정하기로 결의하고 각 노회 수의 결과를 제96회 총회에 개정함이 가한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제96회 총회장이 당시 정황을 반영하여 헌법 개정 공포를 하지 아니하고 총회를 파회한 결과 법률상으로 노회 수의까지 마친 개정안이 폐기 처분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그래서 제96회 총회 이후 제98회 총회 전까지는 임시 목사로 계속 시행하였으나 폐기 처리된 후 2년이 지난 제98회 총회에 7개 노회에서 임시 목사 개정 건을 공포하여 시행할 것을 헌의하였고, 제98회 총회에서 그 헌의 안을 토의하는 중에 “이미 공포할 권한이 있는 제96회 총회장이 공포하지 아니한 결과 자동 폐기 종결되었으므로 공포 시행은 불가하다.”라는 법리적 발언에 대응하여 총대 중 한 분이 “추완(追完) 공포하면 됩니다. 나 법학 박사입니다.”라는 법리에 반하는 억지 발언에 마지못해 제98회 총회장이 “추완 공포합니다.”라고 선언하였다. 제98회 총회가 파회되자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재빨리 헌법 책자를 개정안으로 인쇄하여 서점에 진열되었고 총회 임원회가 시무 목사 시행 지침을 각 노회에 하달하여 현재까지 시무 목사로 시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 개정했다고 한 시무 목사에 관한 법리적 문제점 개정되었다고(이하 개정안) 하는 법조문 내용은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노회 허락으로 조직 교회는 1년간 시무 목사로 시무하게 할 수 있고 만기 후에는 다시 노회에서 1년간 더 승낙을 받을 것이요 미조직 교회는 3년간 시무 목사로 시무하게 할 수 있고 만기 후에는 다시 노회에 3년간 더 승낙을 받을 것이요 노회 결의로 당회장 권을 줄 수 있다.”(제98회 총회 결의 및 요람 p.74, 참조)라고 하였다. 본 개정안의 시행에 관하여 여러분들로부터 질의를 받았다. 이는 질의하는 목사나 장로들 역시 법리적 문제점을 감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1) 시무 기간이 조직 교회는 2년, 미조직 교회는 6년뿐 시무 목사의 시무 기간에 관련한 문제점에 관하여 알기 쉽게 설명하고자 한다. ① “조직 교회는 1년간 시무 목사로 시무하게 할 수 있고 만기 후에는 다시 노회에서 1년간 더 승낙을 받을 것이요”라고 한 내용과 ② “미조직 교회는 3년간 시무 목사로 시무하게 할 수 있고 만기 후에는 다시 노회에 3년간 더 승낙을 받을 것이요”라고 한 내용의 문장이 “조직과 미조직, 1년과 3년”만 다르고 그 외에는 글자 한 자도 다르지 않고 똑같다. 법조문의 문장과 글자 하나까지 다르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직 교회의 시무 목사는 공동의회의 결의로 총투표 수 3분의 2이상의 가와 재적 입교인 과반수의 서명을 받아 노회의 허락으로 1년간씩의 시무로 2번만 시무할 수 있고 3번째는 위임 목사로 청빙을 받지 못하면 그 교회를 떠나야 한다는 의미인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상식이요, 수십 년간 시행해 온 역사이다. 마찬가지로 미조직 교회의 시무 목사도 역시 공동의회의 결의로 총투표 수 3분의 2이상의 가와 재적 입교인 과반수의 서명을 받아 노회의 허락으로 3년간씩의 시무로 2번만 시무할 수 있고 3번째는 당회를 조직하여 위임 목사로 청빙을 받지 못하면 그 교회를 떠나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조직 교회와 미조직 교회가 글자 한 자도 다르지 않고 똑같은 문장의 시무 목사로서 시무할 수 있는 기간만 2년과 6년으로 종결되는 것이다. 즉 조직 교회가 2년만 시무 목사로 시무한 후에도 계속 시무를 위해서는 위임 목사로 청빙을 받아야 하는 것과 같이 미조직 교회도 역시 6년만 시무할 수 있고 계속 시무를 위해서는 6년 이내에 당회를 조직하여 위임 목사로 청빙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차라리 개정 전 미조직 교회의 임시 목사는 계속 시무 허락만 받으면 몇 십 년이라도 시무할 수 있는 개정 전의 임시 목사의 제도보다 시무 목사의 입지가 더 어렵게 되었다고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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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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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 새로 생긴 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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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이란 내 원함을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래서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묻는다. 이 물음에 어떤 사람은 “나는 돈을 원합니다.” “건강하기를 원합니다.” “건축하기를 원합니다.” 등등의 자신의 원함을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성공하기 전이나 후에도 행복하기를 원하는 행복한 성공을 원합니다.” 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즉 “항상 자유롭고 기쁘고 밝고 당당하고 생로병사를 초월한 본래의 나를 알기를 원합니다.”라고 말을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모든 원함은 ‘자기중심의 원함’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결국은 내가 더 많이 소유하고, 내가 높아지고, 내가 기뻐하고, 내가 자유로운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기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의 원함을 이루어주는 것을 자신의 원함으로 삼는 ‘타인 중심의 원함’을 원하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기에 상대방에게로 넘어가는 것이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가? 내가 원했던 모든 것을 그들도 원할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의 원함을 이루어주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기업에서 ‘본성리더십’을 강의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기업이기에 돈이라고 하자. 돈은 사람들이 모여야 생기는 것이다. 사람이 오랫동안 함께 모이기 위해서는 본성 즉 내가 밝고 당당하고 기쁘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이런 본성을 유지하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중심에 사랑과 선을 행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어야 한다. 만약 그 목적이 이기적이고 거짓이 있고 악하다면 본성과 관계를 잃고 결국에는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상대방의 원함을 이루어주는 것을 원함으로 사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부모는 자녀를, 자녀는 부모를, 목사는 성도를, 성도는 목사를 위해 온 힘과 정성을 다하는 사랑의 관계가 상대방의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상대방의 원함을 이루어주는 것은 원하는 것을 넘어서서 내가 어떤 상황이든, 어떤 역할을 하든 ‘사랑과 선을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원함’이 있다.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하면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나 거짓과 악을 행하거나 걱정과 분노가 자리 잡을 여지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예를 들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하자.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원함으로 하면 화내거나 미워할 수 없다. 이 상황에서 걱정지향, 짜증지향으로 가지 않고 해결지향, 행동지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모든 부부나 기업이나 국가는 처음에는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시작을 한다. 그래서 힘을 얻고 열정을 불태운다. 그 열정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로 인해 조직과 건물이 생기고 물질과 힘이 생긴다. 계속해서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하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 텐데 여기에서 자기 자랑과 자기 소유, 자기 쾌락, 자기지배를 목적으로 함으로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누구를 만나든, 어떤 환경에서든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성공하는 길이며, 이 땅에서 사랑의 세계인 영적인 세계로 가는 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새로 생긴 원함은 먼 후일 죽음 후에 신적인간의 모습이신 예수 나의 주님을 뵙는 것이다. 요한이 만난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은 인자 즉 사람의 아들 같은 주님을 만나고 싶다. 직원이 회장을 만나는 것이나 국민이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고 만날 조건을 갖추어야 만날 수 있다. 하물며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주님을 만나는 것은 조건을 갖추어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성공이란 내 원함을 이루는 것을 시작으로 자기중심, 타인 중심,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하는 원함을 거쳐 주님의 얼굴을 뵙기 원하는 원함이 어떻게 나를 변화시킬 런지 기대감이 크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행하면서 내 삶을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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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