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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칼럼] 섭리와 예견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에 관심이 많다. 지금 나의 선택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지금은 잘되는 것 같은데 마지막까지 잘 될까? 아니면 지금은 어렵지만 나중에는 잘 되지 않을까? 여기에서 섭리(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와 예견(내 그럴 줄 알았다)이 나오게 된다. 섭리란 하나님께서 삶의 매 순간 역사하시기 때문에 지금 어려워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잘 되는 것이고, 예견이란 이 땅에서는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은 망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은 섭리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선과 의를 행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겪는 것이 당장은 고통스러워 보이고 어리석고 약해보일 수 있지만 그 속에 사랑과 선이 있기 때문에 천국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야고보서에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의 옷은 좀 먹었으며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라는 말씀은 예견에 해당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힘과 권력과 거짓된 방법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돈과 기업과 건물과 지위를 얻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신나는 일이겠는가? 그러나 그 속에는 거짓과 악이 있기에 결국은 죽음의 길이라는 말이다. 우리 옛말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속담이 있다. 바늘을 훔칠 때 두려움과 가책을 느껴서 돌이키면 이것은 섭리에 해당되고, 소를 훔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즐거워하고 자신을 자랑하면 이것은 도살할 날을 위해 살찌우는 예견에 해당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처음에 죄를 지으면 걱정하고 두렵고 괴롭기 때문에 어떻게든 치유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돈과 권력을 가진 지배자가 되어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게 되면 분명히 악인데도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즐거워하는 것을 본다. 이 정도까지 오게 되면 이미 거짓과 악을 옹호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다가 발각되면 눈물을 흘리면서 “미안하다, 잘못했다,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후회한다. 그런데 그 의도가 더 이상의 쾌락이나 돈, 권력을 누리지 못하고 잃어버릴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라면 이것은 앞으로의 삶이 죽음으로 향하는 예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고 거짓눈물로 위기를 벗어난 다음에는 또다시 쾌락과 권력을 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술에 중독되어 있는 남편이 술 마시고 집에 들어오면 늘 “미안하다. 다시는 술 먹지 않겠다. 한번만 용서해줘”하면서 다음에 또 반복된 행동을 한다. 또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그 죄가 발각되어서 벌을 받을 지경에 울면서 “용서해 달라.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하면서 다시 반복하는 것은 예견에 해당되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돈과 쾌락과 권력 때문에 잘못을 저질렀다. 이제 모든 잘못한 것을 털어놓고 그에 합당한 벌고 다시는 거짓과 악을 행하지 않겠다.’고 하면 이 사람의 삶은 섭리에 해당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의 삭개오가 세리와 로마의 앞잡이로 권력을 이용하여 많을 세금을 거두었다. 일부는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착복했다. 나중에 예수를 만나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서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모습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섭리에 해당되는 것이다. 예견의 삶은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며, 섭리의 삶은 어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섭리 속에 살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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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0
  • [은혜의 말씀] 요셉의 채색 옷 (창 37장 1~5절)
    요셉은 12명의 아들 중 아버지 야곱과 어머니 라헬의 사이에서 태어난 11번째 아들입니다. 야곱의 요셉을 향한 사랑은 그의 옷을 통해서도 잘 나타납니다. 염료가 귀한 시절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화려하고 고운 옷은 매우 값비싼 것으로 족장들이나 집안의 상속자, 후계자 등 신분이 특별한 사람들만이 입을 수 있었습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 중 특별히 더 사랑하는 요셉에게 채색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자신들을 향해 오는 요셉에게 형들은 웅덩이에 가두고 미디안 상인에게 은20냥에 팔아 버렸습니다. 미디안 상인들에 의해 요셉은 애굽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렸고 그는 종의 옷을 입고 10년을 충성스럽게 일했습니다. 형들을 향한 배신감으로 죽을 만큼 힘들었을 요셉은 계속 형들을 미워하고만 있지 않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였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의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인정을 받아 허드렛일을 하는 종의 옷을 벗고 최고 관리자가 입는 옷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셨음에도 시련은 다시 또 찾아왔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고 도망치는 요셉은 그녀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최고 관리자의 옷을 벗고 죄수복 입게 됩니다. 차디 찬 감옥에서 복수할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요셉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에 분노하기 보다는 자신이 처한 최악의 곳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신뢰함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 요셉의 모습에 감명한 감옥의 간수장은 요셉에게 감옥의 제반 사무를 다 맡겼습니다. 바로의 꿈을 아무도 해몽하지 못할 때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불러들입니다. 위기에 처할 뻔한 애굽을 구해 준 요셉은 바로의 은혜로 30세의 나이에 애굽의 총리로 임명되었고 인장반지를 손에 끼고 세마포 흰옷을 입은 채 금사슬에 목에 걸고 왕의 마차에 타고 사람들 앞을 행차하게 됩니다. 그는 일평생을 의롭게 살았지만 고난과 어려움에는 면제 받은 적이 없었고 계속하여 이해 할 수 없는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총리가 되어 형들과 재회 했을 때조차도 형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아시고 내 인생을 설계하시고 디자인하시고 내 인생을 염색하시어 재단하셔서 이제껏 자신을 인도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만큼 각가지 다양한 옷들을 다 입어 보았을 요셉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의 처한 삶을 받아들였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의 삶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셉과 함께 하셨고 은혜를 베푸사 형통케 하셨습니다. 옷은 그 사람의 성향이나 사회적 지위와 재력 등을 나타내주는 척도가 됩니다. 요셉만큼 그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한 옷을 그렇게 많이 입어 보았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가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시절 입었던 형형색색의 채색 옷만큼이나 그의 삶은 실로 컬러풀했습니다. 어느 인생도 심플하기만은 않겠지만 요셉만큼 컬러풀한 인생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원망하고 미워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였고 최선의 삶을 살아간 요셉은 실로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장은 요셉의 죽음과 함께 수의를 입은 그를 입관하면서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는 길이 예측불허의 길이고 돌발변수가 많고 별별 일들이 다 벌어지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가는 길을 아시고 그 길을 주관하시고 설계하시고 디자인하시고 염색하셔서 우리의 삶에 풍성하고 다채롭게 채색 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려울지 몰라도 장차 받을 영광을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음을 기대하며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뜻을 구하며 순종하고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아 승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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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0
  • [가정칼럼] 분수를 아는 행복
    서울대 초빙교수 된 오종남 전 통계청장이 2008년 3월부터 서울대 자연과학대 통계학과에서 학부 1·2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과학적 방법론과 통계학의 이해’라는 강의를 시작하게 된다. 1946년 서울대 문리과 대학 이학부로 출발한 자연과학대가 자연과학 비전공자를 초빙교수로 영입한 첫 케이스다. 그는 행복론 강사로도 유명하다. 그의 행복 강의는 수학·경제학적으로 이뤄졌다. “내가 바라는 것(What I want)을 분모로 놓고, 이루고 성취한 것(What I achieve)을 분자로 놓습니다. 바로 ‘행복지수’ 공식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 아이(I)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자를 키워 행복지수를 키우려고 하지만 사실 분모를 줄여도 효과는 같잖아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부자인 이유죠. 국어 시간에 ‘주제 파악’을 잘하고 수학 시간에 ‘분수’를 잘해야 성적이 잘 나오듯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분수를 잘 지키며 살아야 행복합니다.” 주제파악과 분수에 맞는 행복 방정식은 의외로 간단한데 있다. 1. 거울 공주가 되고 거울 왕자가 된다 : 인상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자주 거울을 들여다보고 표정을 연습한다. 입 꼬리를 2mm만 살짝 들어 올린다. 2. 죽을힘을 다 해 달리고 또 달린다 : 아프리카의 영양은 살아남기 위해, 사자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뛴다. 불행이 잠에서 깨어나 나를 따라오기 전 5분 먼저 일어나 뛴다. 3. 가족들에게 행복의 풍향계가 된다 : 백 마디 말보다 더 소중한 것이 단 한 번의 포옹이다. 8초의 투자로 사랑의 기적을 만든다. 4. 독서로 지혜의 곳간을 채운다 : 독서는 성장의 동력이다. 나의 잠재가치를 높이기 위해 하루 30분 이상, 일 년에 50권 이상의 책과 씨름한다. 5. 소통의 삶으로 통(通)하는 사람이 된다 : ‘발신모드’에서 ‘수신모드’로 전환한다. 다른 이들의 말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1분 동안 말하고 2분간 듣는다. 그리고 세 번은 고개를 끄덕여준다. 6. 꿈을 꾸는 시간을 따로 갖는다 : “꿈에는 한계가 없다. 마음껏 꿈꿔라.”(Dreams have no limits. Go further.) 단 5분이라도 꿈꾸는 시간을 갖는다. 되고 싶은 나를 그려보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다. 7. 스트레스를 스트레스 받게 한다 : 하루에 세 번은 깔깔대고 웃는다. 웃음을 통해 절망을 이겨낸다. 세상의 바보들에게도 화 내지 않고 꾸짖는 법을 터득해 산다. 8. 화는 바로 바로 푼다 : 몸을 자학하면 일만 보약이 소용이 없다. 잠들기 전에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잠든다. 9. 새 노래를 배우고 요리하는 법을 익힌다 : 한 가지 악기를 배운다. 노래를 못할 때면 목욕탕에서 혼자 콧노래라도 부른다. 요리를 못할 때면 맛있는 것을 사먹기라도 한다. 10. 마음의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가 된다 : 짬을 내 연극을 관람하고 봄이 되면 화초를 가꾼다. 가끔은 낙조를 보고 해 뜨는 것을 보기 위해 먼 거리도 마다않고 달려간다. 11. 스트레칭으로 몸의 엔진에 급유를 한다 : 마음을 긴장을 풀고 허리를 편다. 아랫배에 힘을 주고 등을 곧추 세운다. 팔 다리를 뻗어 근육을 푼다. 12.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 : 최소한 세 사람 이상에게 칭찬을 한다. 사소한 일에라도 고마움을 표시하고 상대방의 잠꼬대까지도 새겨듣는다. 물어라? 난 주제파악이 되었나? 그리고 내 분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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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0
  • [서임중 칼럼] 엎드림의 미덕(美德)
    이조(李朝) 역사에 가장 겸손하면서도 충정 어린 재상이자 대표적 청백리로서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은 공사(公私)를 분명하게 하면서 직무에 강직했고 정치의 근간을 오직 목민(牧民)에 두었고 청렴결백(淸廉潔白)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맹사성이 그 유명한 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찬해 역사학을 발전 시켰는데 실록이 마무리가 되어 세종이 보자고 했을 때 맹사성은 “임금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전례(前例)가 되고 사관(史官)들은 두려워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라는 유명한 말을 진언하였는데 이 사건은 맹사성의 성품과 관직 수행의 내용을 가늠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어명을 거역하면서 까지 공직수행에 대한 철학을 갖고 있었던 맹사성의 말에 세종대왕도 따랐다는 사실은 위대한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고, 청렴하면서도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강직했던 고불(古佛)의 정신은 오늘처럼 공직사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처처에 공직자의 비리가 만연해 지는 때에 귀감이 되는 역사의 교훈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고불(古佛)이 본래부터 겸손하고 훌륭한 재상이었던가 하면 그렇지 않다. 어릴 때부터 명석한 머리로 교만했던 고불이 그처럼 훌륭한 인물이 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맹사성이 열아홉에 장원급제하고 스무 살에 파주 군수로 명을 받았을 때 선사(禪師)를 찾아 보다 훌륭한 정치를 수행할 수 있는 고언(高言) 듣기를 청했을 때 스님은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악한 일은 하지 마시오.” 라는 평범한 한마디를 들려주었다. 오만한 맹사성이 “스님, 그 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 말 들으려고 여기까지 올라온 줄 아십니까?” 라고 노기 띤 얼굴로 일어섰을 때, 스님은 “먼 산사(山寺)까지 오셨는데 녹차 한잔이라도 들고 가시기 바랍니다.”고 권유하니 성질 급하고 오만했던 맹사성도 부끄러운 마음으로 못이긴 체 자리에 앉았다. 스님은 맹사성 앞에 녹차 잔을 놓고 주전자의 물을 찻잔에 붓는데 물이 흘러 넘쳐 방바닥을 버리는데도 계속 물을 붓고 있기에 화가 더 난 고불이 “스님, 지금 찻잔에 물이 넘쳐 방바닥을 버리고 있지 않습니까?”고 화를 냈던 것이다. 고불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스님은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녹차 잔의 물이 흘러 넘쳐 방바닥 버리는 것을 보고 알면서 왜 지식이 넘쳐 자신의 성품과 인격을 버리는 것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실까?” 이 말을 들은 맹사성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들 수 없어 황급히 일어서서 문밖으로 나가다가, 급한 바람에 정신없이 나가던 맹사성은 낮은 문지방에 이마를 부딪쳐 상처가 났다. 손으로 상처를 감싸고 나가는 맹사성의 뒤를 향해 스님은 두 번째 혼잣말을 했다. “엎드리면 부딪치는 법이 없습니다.” 이 사건이 위대한 이조의 명재상 고불 맹사성이 되게 한 것이었다. 교회도 가정도 정치도 어느 한곳도 성한 곳 없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왜 모두 이렇게 시끄럽고 불편스러운가를 생각해 보면 맹사성을 향한 스님의 말 한마디가 명언이 되는 것을 생각해 본다. 너나없이 모두가 덜 익은 벼이삭처럼 꼿꼿하게 자기를 세우는 오만 때문에 여기저기서 부딪치는 소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엎드릴 줄 모르는 미련한 사람들의 몫이라면, 바울이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못 박은 자”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믿음의 사람은 항상 엎드림의 삶이기에 부딪치지 않는다. 신학적 인간론에서 인간을 Being이 아닌 Becoming으로 정의한다. 즉 존재가 아닌 존재화, 곧 ‘되었다가 아니라 되어져 간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나없이 “되었다”라는 의식에서부터 걸음이 잘못되어 가고 있기에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아픔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되어있지 않는 자기모순의 치명적 정신질환이다. 여기서 발생되는 것이 ‘나는 소크라테스이고 너는 돼지’라는 삶의 공식이 자기 자신은 물론 관계하는 모든 사람을 혼돈에 빠뜨린다. 정제된 용어는 아니지만 “나는 하나님”이고 “너는 죄인”이라는 타락한 카오스적 공식이 성립되고 그로 인해 모두가 무질서로 인한 삶의 가치개념이 뒤틀린 현상을 연주하게 된다. 작금에 언론을 도배를 하고 있는 최순실씨 사건이 그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조금만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못써먹어 안달하는 소인배, 좁쌀만 한 명예와 권력을 가졌거나 관계되면 별별 희한한 짓을 당연한 듯 행사하는 졸부들이 지도자로 있는 한 공리(公利)는 요원한 것이라 생각한다. 세월이 그래서인가? 요즘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내 탓이오”가 없고 하나같이 너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예수님이 그렇게 경계했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으니 걱정스럽기만 하다. 이 황량한 사막 같은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난국이 나의 잘못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겸손함으로 엎드림의 삶이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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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0
  • [성서연구] 자루를 채우는 하루 (출애굽기 17장 8-16절)
    사람이 어릴 때는 아무 것도 하는 게 없습니다. 부모님께서 해 주시는 일을 누리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조금씩 자라나면서 옷도 스스로 입어야 하고, 공부도 스스로 해야 합니다. 청소년이 되면 인생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스라엘도 그러하였습니다. 애굽에서 나오던 초기에는 그들이 하는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는 모든 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일 등은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누리기만 했습니다. 그랬던 이스라엘이 드디어 스스로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전쟁이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예상치 못했던 아말렉이란 적을 만났고, 단 한 번도 전쟁 혹은 전투를 해 본 적이 없었던 그들은 여호수아의 인솔로 처음으로 나가 싸우게 되었습니다. 전투를 처음 만나기는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싸우는 동안 산에 올라가 팔을 올렸습니다. 그가 팔을 올리면 전투에서 이기고 내리면 지는 일이 벌어지자 그는 아무리 팔이 아파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양쪽에서 붙잡아 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성장하면서 전쟁을 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믿음이 자람에 따라 술과 담배를 끊기 위한 전쟁, 죄악에 빠지지 않기 위한 전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한 전쟁,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전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전쟁은 과거에는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벌이는 이러한 전쟁을 바울 사도는 <선한 싸움>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본문은 모세의 팔이 <해가 지기까지 내려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하루 종일 팔을 들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선한 싸움은 인생의 황혼이 덮일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때때로 우리 팔이 피곤할 때입니다. 그럴 때면 팔을 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때 팔을 내리면 전쟁에서 패배할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팔을 들어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3장 25절에 보면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달려갈 길을>이란 부분은 헬라어로 <드루모스>인데, ‘인생여정’이란 의미입니다. 또 <마칠 때에>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플레로오>인데, ‘가득 채우다’란 뜻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생을 끝마칠 때까지 인생의 자루를 가득 채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하루가 인생의 자루를 채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들도 그러합니다. 쇠털 같이 많은 날들 중 하루일뿐이라고 가볍게 여길 수 있겠지만, 우리의 하루는 절대로 무시해도 좋을 시간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하루 동안에 자루를 조금 더 채워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매일 새벽기도를 인도하고 심방을 하는 일들이 갑자기 무슨 기적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목회자는 그 날 하루만큼 인생의 자루를 채워가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누구나 기적을 원하지만, 그건 우리 삶을 허공에 뜨게 만들 뿐입니다. 비롯 기적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날마다 자루를 조금씩 채워가는 삶을 살다보면 어느 새 우리의 자루가 아귀까지 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루도 삶의 자루를 조금이라도 채워가는 보람 있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고, 만나는 사람들을 성실과 친절로 대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자루가 채워지는 것을 바라보는 기쁨이 가득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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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0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오래 살아도 이건 아니다
    오래 사는 것이 복인 것은 사실이나 건강을 잃고 오래 사는건 복이 아님 고금을 막론하고 오래 사는 것을 복 중에서 첫째로 손꼽아 왔다. 복을 말할 때에 “수부귀...” 이렇게 말했다. 오래 사는 것이 복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살지라도 이건 아니다 싶은 것이 있다. 그게 뭔가. ‘유병장수’, ‘무전장수’, ‘독거장수’, ‘무업장수’ 이 네가지이다. 한 가지씩 생각해 보라. ‘유병장수’가 어찌 복이겠는가. 오래 살지라도 건강하면서 오래 살아야지 건강을 잃고 오래 살면 그게 어찌 복이겠는가. 치매에 걸렸다고 하자. 본인은 걱정도, 근심도 없겠지만 가족을 얼마나 괴롭히는가. 또 투석을 한다고 하자. 일주일에 세 번씩 한 번 할 때 4시간씩, 본인만 고생하는가. 가족들까지 고생이 얼마나 많겠는가. 나는 교인 중에 중풍으로 12년간이나 병석에 누워서 장수하는 노인을 보았다. 사람은 장수하되 건강하면서 장수해야지 건강을 잃고 장수하는 건 결코 복일 수 없다. 그때문에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 둘째로 ‘무전장수’가 어찌 복이겠는가. 사람이 오래 살되 돈이 있고 오래 살아야지 돈 없이 오래 사는 것은 복일 수 없다. 노인에게 돈이 없으면 사람 구실도 못하고 어딜 가던지 천데기가 된다. 자식들까지도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인에게 재산이 있는 경우엔 다르다. 부모에게 재산이 있으면 자녀들이 경쟁하듯 부모에게 효도(?)하다가 재산을 분배받고는 부모에게 관심조차 갖지 않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그 때문에 재산은 일찍 분배하지 말고 노인이 끝까지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파다하다. 셋째, ‘독거장수’가 어찌 복이겠는가. 사람은 오래 살되 배우자가 있는 가운데 오래 살아야지 배우자 없이 혼자 오래 사는 것은 복이 아니다. 노부부가 손잡고 오손도손 얘기하면서 다니는 것을 보면 그것같이 보기좋은 것이 없고 배우자 없이 혼자 다니는 것을 보면 그것같이 쓸쓸해 보이는 것이 없다. 방송인 한분은 남자들이 상처한 후 몇달 뒤 재혼하는 것을 보고 “사람이 저럴 수가 있나” 했는데 자기가 상처한 후 말하기를 “이제 누가 상처하고 곧 재혼해도 흉보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람은 오래 살되 배우자와 함께 살아야만 그게 복이다. 마지막으로 ‘무업장수’가 어찌 복이겠는가. 사람은 오래 살되 하는 일이 있어야지 일이 없으면 장수가 복일 수 없다. 사람은 나이가 많아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일을 해야한다. 그래야만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되고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적당한 일이 없으면 취미활동을 시작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사진 촬영같은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 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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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0
  • [시사칼럼] 낙화(落花)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머지않아 열매 맺을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형기 시인이 지은 <낙화>라는 시를 단락 구분 없이 소개한 전문(全文)입니다. 경남 진주 출신의 이형기(1933-2005)는 고등학생이던 17세에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의 추천으로 정식으로 등단한 천재 시인이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시 <낙화>는 그가 20살이 되던 해 지은 시로 알려졌습니다. 같은 소재로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둘 스러지고”로 시작하는 조지훈의 <낙화>와는 또 다른 감성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이런 시를 약관의 나이에 지었다니! 부러움 반 존경의 마음 반,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를 얼마나 읊고 다녔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시가 나온 때는 전쟁의 상흔이 절정이던 1953년이었습니다. 청년 시인은 길가에 아무렇게나 놓인 시신을 까마귀들이 와서 파먹던 시대의 참상을 “내 영혼의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던 걸까요? 말년에 뇌질환으로 고생했던 시인은 “고통과 고독은 시인의 양식”이라는 말을 남기고, 자신이 사랑했던 시구처럼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꽃답게 죽었습니다. 창조주의 섭리와 경륜 앞에 가야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알고 아름답게 퇴장하지 않는 피조물이 없습니다, 인간을 제외하고는;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질 때가 있습니다(花無十日紅). 계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서(酷暑)도 혹한(酷寒)도 가야할 때를 압니다. 하지만 인간만은 가야할 때가 되었음에도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가야할 때를 알면서도 떠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야할 때를 알고, 가야할 때 깨끗이 떠나는 자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 출생을 예언했으며(눅 1:13),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자요(막 1:9), 땅의 임금 헤롯 왕도 두려워하는 민중의 선지자였고(마 14:5), 안드레와 베드로를 비롯한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스승이었습니다(요 1:35). 그러나 예수가 등장하자 요한은 거짓말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립니다. 어찌 요한뿐이겠습니까? 모름지기 예수를 믿는 자라면, 항상 가슴 속에 신령한 사표(辭表)를 간직하고, 주님을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을 각오와 자세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이것이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정해주신 사람다운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 아닐까요? 인간이 탐욕과 집착 때문에 가야할 때를 모른 척하고, 가야만하는 당위성을 홀로 부인할 때만큼 추할 때가 없는 법입니다. 스스로 위난을 자초한 경우라면,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위치에 놓인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 중에 <끝이 좋으면 다 좋아(All's Well That Ends Well)>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원작은 좀 다른 내용입니다만,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박수칠 때 떠날 수 있다면 조금은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학도 마찬가지요, 정치도 마찬가지요, 인간사 모든 일이 아름다운 계절 가을을 닮아 꽃답게 마무리할 수만 있다면, “까마득한 하늘가에 내 가슴이 파랗게 부서지는 날 코스모스는 지리”(이형기, <코스모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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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27
  • [교회법률상식] 직전 총회장은 총회 재판회장 될 수 없어
    ■직전 회장은 신구 임원 교체까지 사회권뿐 안건 처리 못해 ■제100회 총회장이 임원 선거 전 직할 재판한 것 당연 무효 필자는 제101회 총회를 파회한 후 고명하신 선배 목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합동측 제101회 총회가 제101회 총회장이 아니고 직전 총회장인 제100회 총회장이 해서는 아니 되는 불법 재판을 한 사건에 대하여 법을 아는 사람들이 글을 쓰지 아니하고 잠잠하면 죄가 되는 것이니 속히 글을 쓰라.”는 충고였다. 이는 곧 합동 총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반에 위기가 만연하게 퍼져 있음을 경고하는 메시지로 알고 글을 쓰게 된 것을 먼저 밝혀둔다. 때를 같이하여 제101회 총회의 임원 선거 직전에 행한 직할 재판의 동영상과 녹취록을 보내주신 고마운 분이 있어 그 내용을 살펴보니 직전 총회장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실로 제101회 합동 총회는 총회 개회 선언 후 임원 선거를 하기 전에 쑥대밭에 진흙탕이 되어버렸다. 그 내용인즉 당연한 순서인 임원 선거는 하지 아니하고 느닷없이 소위 “해 총회 행위자 조사처리위원회”라는 유령위원회의 보고를 빙자하여 권원 없는 직전 총회장인 제100회 총회장이 신임 총회장만이 처리할 수 있는 제101회기의 총회 안건을 처리하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도 일반 행정 건도 아닌 총회가 직할하는 재판회의 회장이 되어 재판을 진행하는 허무맹랑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증경 총회장이 언권을 얻어 불법임을 지적하면서 자제할 것을 촉구함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5명의 목사에게 재판 절차도 무시하면서 고퇴만 두드리면 되는 것처럼 여기고 판결을 난발함으로 성 총회에 먹칠을 하였다. 1. 직전 총회장의 직무 직전 총회장인 제100회 총회장은 정문 제456문에 “누가 총회를 개회하느냐?”는 답으로 “전회장의 설교로 개회하고 신회장이 선임되어 교체될 때까지 사회한다. 만일 전회장이 결석하였으면 전부회장이 개회하고, 그도 결석하였으면 총대 중 최후 증경 회장에서 시작하여 거슬러 올라가면서 사회하는 순위를 정할 것이요, 증경 회장들도 다 결석하였으면 총대 목사 중 최선장립자로 사회하여 개회케 한다.”고 한 법해석에 따라 총회를 소집하여 예배와 성찬예식을 행한 후 총대를 호명하고 “예정한 날짜에, 노회 수 과반수와 목사 수 과반수와 장로 수 과반수로 성수”(정치 제12장 제3조)가 되면 제101회 총회가 개회됨을 선언한 후 혹 신설 노회가 있는 경우 노회 설립 보고를 받고 설립된 노회의 총대를 호명하여 회원 수에 가입하고(정치 제22장 제1조 2항) 임원 선거를 하여 신구 임원 교체와 제101회 총회장의 취임 예식을 행하는 일(정문 제617문)로서 직전 총회장의 모든 직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101회 총회의 모든 안건 처리는 오직 제101회 신임 총회장의 몫이다. 다시 말하면 제101회 총회가 개회된 후에 직전 총회장은 신설 노회 보고 외에는 어떤 안건도 처리할 수 없다는 말이다. 2. 제100회 총회장의 불법 행위 상술한 바와 같이 직전 회장의 사회로 총회는 개회된다. 그러나 직전 총회장의 직무는 임원을 선거하여 신임 총회장의 취임 예식을 행할 때까지의 사회권뿐이다. 그런데 지난 제101회 총회에서는 권원 없는 직전 총회장이 일반 행정 사건도 아닌 재판 사건을 법적인 절차도 무시하고 불법으로 총회를 재판회로 변경하고 무자격자가 스스로 재판회장이 되어 목사 5명에게 목사 면직, 본 교단 목사 제명, 영구 출교, 당회로 하여금 원로목사 취소, 소속 노회 명부에서 제명, 본 교단에서 출교 처결, 총대권 5년 정지처결, 공직 정지 1년 처결 등의 판결을 행하는 엄청난 불법 재판을 행하였다. 이것은 재판도 아니고 총회도 아니고 연극도 아니고 어떤 특정인들의 난장판에 불과하다. 우선 직전 총회장은 본건의 사회권이 없다는 법리적 사실과 “총회 결의 시행 방해 조사처리위원회”라는 것은 제100회 총회가 결의하여 맡기지도 아니한 위원회이기 때문에 유령위원회에 다름 아니다. 총회가 언제 “조사처리위원회”를 결의하였으며, 언제 그 위원회에 기소권을 주었으며, 언제 그 위원회에 재판권을 주었으며, 언제 100회 총회장에게 재판회장권을 주었는가? 직전 총회장은 제100회 총회 회의록에서 총회가 상기 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사 처리하도록 위탁한 회의록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므로 제101총회가 임원 선거를 하기 전에 권원 없는 직전총회장이 재판회장이 되어 땅에서 솟아났는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알 수도 없는 “총회 결의 시행 방해 조사처리위원회 보고”라는 것을 빙자하여 총회가 직할 재판을 행한 모든 판결은 당연 무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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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27
  • [성공칼럼] 거짓생각 다스리기
    사람의 삶이 망가지는 것이나 망가진 몸이 다시 회복되는 것이나 먼저 생각이 찾아온다. 몸이 망가질 때도 그 전에 생각이 찾아오고, 망가진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가장 먼저 생각이 찾아온다. 내 몸을 망가지게 하는 생각은 ‘몸에 관한 거짓’이고 내 몸을 건강하게 하는 생각은 ‘몸에 관한 진리’인 것이다. 사람의 위기는 가장 먼저 ‘거짓된 생각’을 ‘진리’라고 믿는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거짓된 생각’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고 이것이 반복될 때 결국 모든 것이 망가지는 마지막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거짓된 생각’은 몸에 생기는 암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암은 유전자가 변형되는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 걱정과 분노와 미움 때문에 담배를 피웠다고 하자.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담배를 피우면 좋은 것이 많다고 하면서 피운다. 그러나 담배의 노폐물이 폐에 상처를 입힌다. 일정한 시간은 몸에 있는 자연치유능력이 폐를 치유를 한다. 그런데 계속해서 폐에 상처를 입히면 세포가 살기 위해 뇌의 통제를 받지 않는 유전자로 변형되어 자기 마음대로 자라나는 세포가 되는 것이 바로 암이라는 것이다. 내 삶에 문제와 어려움이 생겼다고 즉시 멸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모든 문제와 어려움이 그 문제를 보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먼저 시작되는 것이라면 문제와 위기의 삶을 기회로, 좋은 것으로, 행운으로 만드는 것도 ‘생각’일 수 있는 것이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만 잘 살피면 모든 위기는 위험으로 가지 않고 기회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오랫동안 아파서 누워있는 것이 속상할 일인가? 기쁜 일인가? 이 물음에 속상하고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면 화가 나고 말도 거칠어지고 누워있는 부모님을 더 아프게 하게 되고, 본인도 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그동안 부모님께 받은 사랑을 갚을 수 있는 기회이며 바빠서 부모님과 이야기 할 시간이 없었는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 그리고 전에는 간호하는 일을 힘들게만 여겼는데 이번만은 밝게 보면서 잘해볼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거짓된 생각을 다스리는 방법은 삶을 살면서 걱정과 화와 원망을 일으키는 부정적 생각이 일어난다. 이 때 이 생각과 느낌이 내 몸에 오지 않도록 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귓가에 들리지 않게 해야 하며 상대방의 몸이나 물건에까지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그 거짓된 생각이 내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며칠 전 집 계단을 올라오는데 갑자기 대학 졸업 후 취직을 못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 때 아버지께서 걱정되고 화가 나서 나에게 “나이가 들었으면 인간 노릇을 해야지 뭐하는 것이냐!”하면서 돈 벌어오라고 다그친 사건이 떠오르면서 화가 치밀었다. 이 순간 나는 ‘생각일 뿐이다.’ ‘아버지의 말에 대한 해석이다.’ ‘이런 생각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그래 하고 싶은 데로 해봐라’고 내 생각에게 요구했다. 나는 ‘상상으로’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해보았다. 극한 서운함과 분노의 감정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 후 실제로 아버지를 뵈었을 때 서운한 감정은 전혀 없었으며 평소처럼 아버지가 좋아보였다. 이것이 생각을 내 몸과 내 주변과 상대방의 귓가에 가지 못하게 하고 마음에만 있게 하는 것이다. 내 몸과 내 삶을 망가뜨리는 부정적 생각은 내 허락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일어나서 마치 진리인 것처럼 가장한다. 진리는 내 몸과 관계를 살리고 내 삶과 상대방의 주변을 밝고 자유롭고 사랑으로 가득하게 만든다. 만약 자신에게 일어나는 생각이 걱정과 화를 나게 하거나 자신은 이익을 보고 상대방은 손해 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이유도 없이 상대방을 비난한다면 이 생각은 옳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거짓된 생각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잠언 4:23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이에서 생명의 근원이 남이니라.’말씀하고 있다.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잘 살펴서 사랑과 선을 행하는 진리의 길로 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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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27
  • [은혜의 말씀] 순례자의 길, 나그네의 길 (출 17장 8~16절)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은 마치 출애굽 여정과 비슷합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을,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죽어 천국 가게 되는 것에 빗대어 말하곤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벗어나서 홍해를 건너 40년 광야생활 하는 것이 마치 이 세상에서 인생을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그런 사건, 사고들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순간의 일들이 쌓여서 시간이 되고 세월이 되고 역사를 만들어 갑니다. 그 역사를 통해 오늘을 점검하고 내일을 예상하며 준비하기도 합니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솔로몬의 말처럼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세대를 막론하고 비슷하니 말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의 목적은 애굽을 벗어나 해방을 맞는 게 아니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축복의 땅 가나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굽을 벗어났다 하더라도 광야 길을 순적히 통과하지 못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너무나 허무한 여정이 될 것입니다. 애굽을 벗어나 안도하기도 잠시 어려움은 찾아왔습니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 되었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만사형통이 아닙니다. 문제는 찾아오고 또 찾아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앞길을 생각하면 막막하기 짝이 없고 홍해 앞에서 백성들이 불평했듯이 우리의 인생도 비슷합니다. 문제 앞에서 힘들다고 불평하고 곧 죽을 듯이 했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말입니다. 문제 앞에 한 없이 연약한 것이 인간들입니다. 광야 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10번의 원망과 불평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마다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셨음에도 문제와 어려움 앞에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대화 하셨고 이스라엘은 무슨 일만 생기면 모세를 찾았습니다. 모세 또한 신이 아니라 죽을 수 있는 사람임을 알게 하셨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찾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광야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고비가 찾아올 때 원망하는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시며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직접 알게 해 주셨습니다. 애굽에서 400년 넘게 있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가물가물 해진 그들과 함께 동행 하며 그들이 하나님을 찾고 의지 하도록 끊임없이 고난을 주셨습니다. 강건하여야 100년을 사는 나그네의 삶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광야와 같은 이곳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너무 잘살면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천국을 소망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광야와 같은 고난이 계속해서 찾아오더라도 낙망치 마시고 하나님을 더욱 찾고 의지함으로 이 땅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향 하늘나라, 가나안 땅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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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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