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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사랑을 위해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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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찬양예배 시간에 성만찬 예식이 있었습니다. 부목사님의 설교가 끝나면 제가 성만찬 예식을 집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 시간에 갑자기 삶의 의미에 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와서 몇 십 년 동안 살다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3부 예배가 끝난 후 한 가족이 다가와 인사를 나누었는데, 제가 목회하던 부산 땅끝교회 성도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신앙 생활하던 목사가 옮겨서 목회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저를 한 번 만나기 위함이었습니다. 식사라도 대접해야 하지만, 곧바로 다음 예배를 준비해야 하는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반가운 인사만 나누었을 뿐입니다. 제가 그분들의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통해 말씀을 받았습니다. 제가 집례하는 자리에서 성찬에 참여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의 인생에 그 정도의 의미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분들이 그 의미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제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하늘나라에 가신 부모님께는 웃음을 드리고, 의지가 되는 아들이었겠지요. 혹은 우리 아들이 목사라며 자랑하셨을는지도 모릅니다. 또 저는 아내의 인생에 수십 년을 동행하는 중입니다. 아내는 부모님과 산 세월보다 더 긴 세월을 저와 살고 있습니다. 아내 역시 제게 그런 의미로 다가와 있습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먼저 떠나면 남은 사람은 그런 의미에서 힘들 것이라 여겨집니다. 또 저는 자녀들의 인생에도 어느 정도의 의미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저도 옆에서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고, 좀 도왔습니다. 아직도 제게 용돈을 받는 자녀도 있지요. 제 자녀들이 제게서 태어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자녀로 태어날 수도 있었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제게 맡기셨습니다.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와서 살다가 가는 의미는 이렇게 보면 남의 인생에 미친 영향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영향은 긍정일 수도 있고, 부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결국 이런 이야기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인생의 의미는 <사랑>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역시 사랑을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돈 벌려고, 권세를 누리려고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려고 태어났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사랑에서만 그 의미가 확보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원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사랑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매우 관심이 있고, 집중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실제로 노력하는 이들 중에 의외로 다른 사람에게 매정하고, 끊어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은 매우 심각했습니다. 유대인 성도들은 복음이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베드로가 이방인인 로마 사람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가서 말씀을 전한 일에 충격을 받고 베드로를 비방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멸시하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도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오순절 다락방에서 자신들에게 임하신 것과 똑같이 임한 것을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는 분이시며, 유대인과 이방인을 똑같이 사랑하는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세상의 비극은 연결을 끊어내는 데서 발생합니다. 미국 대통령은 다른 나라와 민족을 향해 무소불위의 칼을 휘두릅니다. 그 타당성을 이해는 하지만, 아쉬움을 떨쳐 낼 수 없습니다. 국익, 민족 이익, 집단 이익, 자신이 속한 공동체 이익 앞에서 사랑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임영수 목사님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비로소 행복을 알게 되었다>고 적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의 관점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그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디 사랑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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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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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칼럼] 이 발로 다시 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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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참으로 숨 가쁘게 달려왔습니다. 숨이 가쁠 때마다 심장이 수고하고 폐장이 더 강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지만, 두 발이 이토록 수고했고 소중한 줄을 몰랐습니다. 두 발이 있었기에 전국 방방곡곡뿐만 아니라 오대양 육대주를 마음껏 뛰어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짱짱한 두 다리가 있었기에 매 주일이면 강단에 서서 5번, 6번을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부흥회와 각종 집회를 다닐 때에도 원고에 매이지 않고 강단을 뛰면서 뜨거운 사자후를 토해냈습니다.
저는 두 발 가운데도 발뒤꿈치가 이토록 귀한 줄을 몰랐습니다. 이따금씩 발뒤꿈치에 각질 같은 것이 벗겨지면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두꺼운 발뒤꿈치에 저온 화상을 입고 저는 그 딱딱한 가죽이 얼마나 예민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것입니다.
이 낙타 무릎 같은 발꿈치 가죽이 있었기 때문에 저는 우리나라가 너무나 좁아서 세계 각지로 집회를 다녔습니다. 이 무감각하고 딱딱한 발뒤꿈치 가죽이 얼마나 제게 소중한가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은 것입니다. 뒤꿈치 가죽이 있었기에 산행하는 것을 낙으로 여기며 마음껏 걸을 때도 있었습니다. 어떨 때는 산꼭대기까지 다시 내려가기가 싫어 더 걷고 또 걷고 싶을 때도 있었지요.
그러나 저는 요 몇 주 걷지 못하는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 시련 속에서 주님께서 주신 발뒤꿈치의 선물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는지요. 저는 재생 치료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집사람의 집요하고도 시니컬한 성화에 못 이겨 마침내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전에는 집사람이 원망스럽기도 하였지만, 그것마저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했습니다. 국소마취로 허벅지 살갗을 도려내었을 때 마취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신의 고통을 생각해 봤습니다.
봄꽃처럼 예쁘게 피어나고 있는 속살을 강제로 뜯어 피가 나게 하고, 그 쓰린 속살에 허벅지 살을 붙일 때의 쓰림과 아픔이 저로 하여금 저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마취가 풀릴 때 발뒤꿈치와 허벅지의 아픔과 쓰라림은 영혼의 아림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이 작은 화상에도 고통을 느낀다면 암 환자들은 어떻게 투병을 하고 있을까요? 또 온몸에 악성 종기가 나서 괴로워했던 욥은 어떻게 인내했을까요? 아니, 저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그 고통, 영혼의 아림은 얼마나 크셨을까요?
저는 원하지 않았지만, 당신께서 저로 하여금 로뎀나무 아래 눕게 하셨습니다. 아직은 제 인생에 있어 겨울 끝자락을 맞을 때는 아니지만 믿음으로는 혹독한 겨울의 시련을 겪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황홀한 시련도 다 끝나갑니다. 이제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면, 이식을 한 부위가 잘 생착이 되어 새살이 차오르고 굳은살로 변해간다면 저는 다시 한 번 주님이 주신 힘으로 사명의 길을 달려갈 것입니다.
숨 쉴 수 없는 고난의 뜨거운 바람 내 영혼을 찢으며 불어올 때 광야에 홀로 남겨진 지독한 외로움 속에 깊은 밤 뜨거운 눈물 흘려도 주님이 주신 사명이라면 가시밭길 맨발로라도 걸어갈 것입니다.
사명이 생명이기에, 사명이 눈물이기에 힘들고 어려워도 사명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사명이 은혜이기에 사명이 축복이기에 외롭고 고독해도 사명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저의 심장과 폐장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모든 체중과 모든 무게를 떠받들고 받쳐줄 수 있는 이 두 다리 그리고 발바닥에 주신 당신의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겠습니다.
주님, 저에게 다시 한번 소생의 은혜를 주시고 우리 성도들은 더 이상 저와 같은 화상을 입지 않도록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부족하지만 저의 고난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고난을 대신하게 하시고 성도들이 맞을 환란의 방어막이 되게 하옵소서. 주여 다시 한 번 걷게 하옵소서. 다시 한 번 뛰게 하옵소서. 다시 한번 달려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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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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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호모 피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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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입니까?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라는 말 이래로 비슷한 표현이 많았지만 요즘도 신조어들이 등장합니다. ‘호모 엠파티쿠스’(제레미 리프킨, 공감하는 인간)나 ‘호모 라피엔스’(존 그레이, 하찮은)를 비롯해서 ‘호모 큐라스’(고미숙, 돌보는 사람), ‘호모 디스컨텐트’(선봉란, 불만의), ‘호모 데지그난스’(지상현, 디자인하는), ‘호모 듀비탄스’(박규철, 의심하는), ‘호모 비아토르’(문요한, 여행하는)가 그러합니다. 최근에는 “호모 피델리스”(한민, 저녁달, 2024)가 나타났습니다. 저자는 그 의미를 ‘숭배하는 자들’이라고 풀었습니다. 원래 의미의 ‘숭배’는 신(神)을 전제할 때가 많습니다. 이 책도 서문을 제목부터 “종교는 인생의 화두였다”로 정하고 “종교는 헤아릴 수 없는 옛날부터 인간과 함께 해 왔다”라는 문장으로 출발합니다. 하지만 이 저작물의 탄생 배경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을 최근의 상황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지금 인류는 무엇을 숭배하고 있을까요?
첫째, ‘유사영웅’(pseudo-hero)을 숭배합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나요, 하지만 최근에는 여기저기서 유사영웅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추종자들이 우상처럼 떠받드는 전광훈이란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남쪽 지방에서도 다른 목사 하나가 뜨면서 이런 흐름에 편승했는데, 마찬가지로 담임하는 교회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었습니다. 게다가 가장 최근에는 역사를 가르쳐서 유명해진 일타강사가 정치판에 혜성처럼 합류하여 말 그대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중입니다. 이들을 유사영웅이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이들의 존재감이 객관적인 업적 평가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주관적이면서 신앙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돌발적인 추앙(推仰)에 터를 잡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신문의 사진에 주로 나타나는 유형 역시 중요한 면일수록 역사의 주인공 같아 보이는 사람이 차지하는데 이 논문의 저자들도 이를 일종의 ‘신화’로 간주하고 ‘유사영웅’이라 불렀습니다(임영호·김보영·최수정, “신문사진에 나타난 신화의 유형”). ‘유사영웅’이라도 그들을 둘러싼 지지자들의 열광을 어떻게든 해석하려다 보니 “호모 피델리스”라는 말까지 등장했던 것입니다.
둘째, 운명을 숭배합니다. 현재 가장 급증하는 종교는 ‘무종교’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미국도 지난 50년 간 무종교인 비율이 5%에서 30%로 증가했다지요?(Pew Research Center, 2024). 한국도 2015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종교가 없다고 답한 사람의 비율이 56.1%였고 나이가 어릴수록 수치가 높아지는 추세를 보입니다. 반면에 무속인은 늘어나고 점집이나 인터넷으로 운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집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이들은 사람이나 귀신보다는 운명을 숭배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무당이나 점집을 찾는 사람들은 자기 운명이 궁금한 자들입니다. 현대는 바야흐로 ‘탈종교시대’ 내지 ‘후종교시대’라고 해야 하지만 동시에 미래가 궁금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넘쳐납니다. 새로운 사업이 잘 될지, 다음 선거는 어떻게 될지, 언제쯤 좋은 짝을 만날 수 있을지 등 운명을 향한 수요는 다양합니다. 대중들을 탓할 수만도 없습니다. 쇼펜하우어는 ‘운명을 원망하지 말라’ 했고, 니체는 한술 더해 ‘운명을 사랑하라’(아모르 파티)를 남길 정도였으니 운명에 우호적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었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운명은 무(無)다’(불안의 개념, 임춘갑 역)를 외쳤습니다. 운명은 무언가 실제(實際)인듯 말하지만 실재(實在)않는,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라 우리의 숭배 대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되는 허상입니다.
셋째, 자신을 숭배합니다. 운명론자의 반대편에 현대판 나르시스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자율성을 강조하며 자유의지를 절대시하면서 스스로를 우상화하는 자들입니다. 교회 내부에서도 이런 조짐이 보였습니다. 카를로스 오르티즈가 일찍 간파했듯이, ‘공관복음’이나 ‘제4복음’이 아니라 ‘내가복음’을 선호하는 무리들이 많습니다. 수년 전 바이올라 대학의 윌리엄스 교수(조직신학)는 현재 세상에서 가장 빨리 번지는 종교는 ‘자기숭배’(Self-Worship)고 미국인 84%가 ‘자신을 즐기는 게 인생의 가장 큰 목표’라면서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 1번은 이제 “사람의 제일가는 목적은 자신을 영화롭게 하고 자기를 즐거워하는 것”으로 바뀐 듯하다는 자조 섞인 분석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TGC 칼럼). 상기한 첫째와 둘째 역시 자기숭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중요하니 자기 운명을 알고 싶어 하고, 자기가 중요하니 자타가 신격화를 즐깁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국은 우리의 허영심과 자기애가 숭배를 부추긴다.”(키르케고르) 우리는 다른 무엇을 숭배할 수 없지 않습니까? 신자들이여, 부디 그리스도만을 숭배하는 인간인 ‘호모 피델리스 크리스티’(Homo Fidelis Christi)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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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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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 (창세기 41: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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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 보면 위기의 때에 혜성과 같이 등장하는 요셉이 나온다. 살아서 석방되기 힘들다는 왕실의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 요셉이 30세에 전격적으로 석방이 되어 바로왕의 꿈을 해석하는데 그날 총리가 되고, 이방 제국 애굽의 모든 신하들의 지지를 받았다. 당파에 치우친 반쪽 지도자가 아니라 통합적이고 융합적인 온전한 지도자로서 데뷔한 것이다. 이방 황제인 바로의 한 줄 평가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이다. 그는 꿈꾸는 자요, 용모가 아담하고 준수한 자요, 샘 곁에 심기 운 나무요, 범사에 형통케 된 자이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는 열 받고 분노의 화신이 되고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 아니라 바울처럼 성령에 매여 살아가는 자이다. 다윗처럼 성령에 감화감동을 받은 자이다. 비둘기같이 성령이 임하심을 받은 후에 예수님도 공생애사역을 시작하셨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위로부터 난 지혜와 명철이 있어서 신의 한수를 두었다.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한 베드로가 "내 양을 치라"고 사명을 받았듯이 요셉도 마침내 "내 집을 다스리라"는 어명을 받았다. 왕의 인장 반지를 받으며 하루아침에 죄수에서 대국의 총리로 등극하였다. 온 무리가 무릎을 꿇으니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 증거이다.
그길로 요셉은 바로 나가서 온 땅을 순찰했다. 달란트 비유에서 칭찬받은 종들처럼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남기는 모습이다.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잠27:23). 현장에 답이 있다. 탁상공론만 하고 있지 말고, 일어나 가서 현장을 사수하라. 평안하여 안정이 될 때 그곳에 머물지 마라. 야성을 잃지 마라. 우물 밖의 개구리가 되라. 가서 제자 삼으라.
요셉은 총리가 되고 한풀이를 하거나 권력의 맛에 취하여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서 애굽 온 땅을 순찰하였다. 그리하여 칠년 대풍년에 흥청망청하지 않고, 각 성에 곡식을 착실하게 저장하여 칠년 대기근을 여유 있게 준비했다.
요셉이 어려서 엄마를 잃고 형들에 의해 팔려 끌려가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했지만 비로소 때가 차매, 30세에 애굽 왕 바로 앞에 섰다. 요셉은 위기의 순간들이 연속적으로 찾아올 때도 결코 속단하지 않고 결코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대하며 꿈꾸며 기다렸다. 마침내 꿈 꾼 대로 된 것이다. 요셉에게 지난 세월은 끔찍한 시간들이었지만 뒤돌아보면 잘 준비된 골든타임이었다. 버릴 것이 없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 형통한 때였다. 그러니 어떤 순간에도 원(망)불(평)교(만)하지 말고 용(서)감(사)사(랑)하라. 사람이 판단하기에 불운의 연속일지라도 어떤 놀라운 역사에 밑천으로 쓰일지 모르는 일이다.
요셉을 보면 이 시대의 모든 사람이 기다리는 최고의 지도자이다. 하나님 손에 붙잡힌 자, 예수로 충만한 자, 성령에 감동된 자, 혈기와 분노가 없이 평화의 왕, 지혜와 명철이 충만한 자, 나라의 위기, 대풍년, 대기근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인재, 온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자! 요셉은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자다. 이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시절을 탓하고, 누군가를 원망할 필요가 없다. 그저 주어지는 현실마다 감당하며, 나의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하신 길을 인도하시는 대로 뚜벅뚜벅 걸어가면 멋지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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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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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애] 따뜻한 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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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신학교를 다닐 때에 겪은 일이다.
지금의 나는 전동휠체어를 이용하여 보행을 하지만, 당시(2009년)에는 지팡이를 이용하여 보행을 할 때였다. 수업을 마치고 쉬는 있는데 한 분이 교실로 오셔서 나를 보시더니 “전도사님,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해봤어요?” 라고 물으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분위기를 고려하여 “당연히 기도했죠” 라고 미소로 답한 적이 있다.
나처럼 장애로 인하여 불편함을 겪거나, 질병으로 아픈 사람치고 그 상태가 호전되거나 사라지기를 위해 기도를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나에게 질문을 던진 분처럼 말하는 분들이 실제로 교회 안에 많이 있다. 물론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는 줄은 알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의 심정을 한 번쯤은 헤아려 보았는지 묻고 싶다.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에는 듣는 사람에 상황과 환경을 고려하여 어울리는 말을 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만약 듣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한다거나,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는 건 그저 시끄럽게 울리는 소음이거나, 오히려 듣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비수(匕首)가 될 수도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상대방의 상황과 환경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는 '말'과 관련된 속담들이 많은데, 그 중에 하나가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 이다. 이 속담은 우리가 내뱉는 말 한마디에 영향력이 큼을 내포하고 있다. 성경에도 '말'과 관련된 구절들이 많다.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잠언 12:18),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언 15:1),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골로새서 4:6). 모두 말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늘 사람들과 다양한 방법으로 말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그 말이 때로는 누군가를 살리거나 힘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때로는 그 말로 인하여 사람이 죽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말을 듣고 싶은가? 힘이 되는 말, 사랑이 담긴 말을 듣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상대방도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을 듣고 싶지 않을런지.
아직은 추운 겨울이지만 며칠 전에 따뜻하고 생명이 싹트는 계절인 봄으로 접어든다는 입춘(立春)이 지났다. 사람들은 외롭고 아프고 힘들다. 춥다. 그런 사람들에게 환경과 상황에 맞는 말을 함으로써 온기(溫氣)를 전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잠언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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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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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공산주의자가 된 최문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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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목사들 가운데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와 무신론 공산주의가 동시에 동가적으로 한 사람의 내면에 공존할 수 있을까? ‘황금 송아지’(The Golden Cow)라는 책을 쓴 존 화이트(John White)는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하나님 아닌 어떤 피조물을 섬기든지 그 어느 하나만을 섬기도록 지음 받은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즉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어떤 것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무신론적이고 반기독교적인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실제로 한국에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목사들이 없지 않았다. 존 화이트의 주장에 근거한다면 이들 좌익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목사는 진실된 의미의 목사라고 볼 수 없다. 그 한 사람이 최문식 목사였다.
최문식의 행적은 6.25전쟁기에 그 실체를 드러냈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로 입성하자 친북조직인 ‘기독교민주동맹’이 결성되었다. 위원장은 김창준(金昌俊) 목사였다. 평남 강서 출신으로 숭실학교와 일본 아오야마 가꾸인(靑山學院) 출신인 그는 감리교 목사였고,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다. 1924년에는 미국 유학을 하고 1926년 귀국하였는데 해방 이후 좌익운동에 가담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기독교의 인민군 환영대회를 준비했는데 이 환영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장로교 대표가 바로 최문식(崔文植, 1905-?)이었다(민경배, “해방70년과 남북통일의 문제,” 「개혁논총」 36호<2015>, 22).
최문식은 1939년 3월 28일자로 평양신학교 34회로 졸업했다. 일반적 관례로 본다면 1936년 4월 입학한 것으로 보이고, 신사참배 문제로 1938년 1학기를 끝으로 평양신학교가 사실상 폐교되었기에 졸업식을 하지 못하고 통신으로 졸업장이 수여된 경우였다. 그의 동기들이 경남지방의 한대식, 이수필, 주상수 등이고 장준하의 아버지 장석인, 합동측의 지도자가 되는 김윤찬, 통합측의 총회장이 되는 김종대 등이 동기였고, 공산주의자가 되는 이재복도 그의 동기였다. 최문식의 행적은 해방 이후 드러나게 되지만 그는 이미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적으로 경도되어 있었다. 그는 1923년 11월 평양 숭실전문학교 재학 중 무정부주의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바 있었고, 1930년 7월에는 조선청년동맹 평남연합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고, 1932년 9월에는 대구노동자협의회 결성에 참여하고, 조합정리부와 종교부를 담당했다. 대구노동자협의회는 앞에서 언급한 이재복, 조홍기, 김병창 등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혁명적 대중운동 결사체였다. 이런 상황에서 평양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나 목회 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 결성에 참여하는 한편, 조선인민당 대구지부 간부를 역임하였고, 1945년 10월에는 경북도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고 부위원장 겸 내정부장이 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이처럼 그는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한 전력이 있다.
그러다가 최문식은 1946년 10월 대구의 철도파업이라는 폭동을 배후 조종하고 이에 가담한다. 미군정기인 1946년 9월 조선공산당의 주도하에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일으켰는데, 9월 23일 부산지역 철도 노동자의 파업 투쟁을 시작으로 9월 24일부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주도로 각 산업별 노동조합이 연대투쟁에 들어갔는데, 10월 1일에는 대구폭동사건으로 번져갔던 것이다. 대구 폭동은 인명 피해가 적지 않아 커다란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고 치안상 큰 혼란을 야기하였다. 대구 폭동은, 해방 이후 정판사 사건, 1948년의 여수 순천 반란 사건, 제주 4·3사건과 함께 해방 이후 남한사회를 혼란으로 몰고 갔던 커다란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연류된 이들이 이재복, 최문식 같은 목사들이었다.
이 일로 최문식은 제5관구 경찰서에 구금되었고, 이후 10월 항쟁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징역 3년형(5년 형이라는 설도 있음)을 언도 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 되었다. 그러나 그의 고향 친구로 후에 YMCA 총무로 일하게 되는 김태묵 목사가 당시 미군정청 고위 관리로 있어서 그의 도움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자 발생한 여수 순천 반란사건으로 다시 구금되었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게 되자 석방되었다. 그리고는 서울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대회라는 것을 조직하고 가담했다. 이런 충성에도 불구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구역사문화대전에 의하면, 마포형무소 복역 당시 전향 발언을 한 것이 알려지면서 북한 당국에 끌려다니다가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 목사직을 버리고 좌익 친북 활동에 목숨 걸었으나 결국 그들에 의해 버려진 존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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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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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사모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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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직분이 아닌 직분을 가진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사모다. 임명을 받은 것도 아니고, 교회의 조직이나 교단의 헌법에도 없는 참 어색한 이름이다. 사실 아무런 실권도 없는데 성도들의 요청과 요구는 너무 많다. 교회의 그 어떤 조직이나 회의에도 들어가지를 못한다. 남녀기관의 회원도, 제직도, 당회원도 아니다. 아무리 해가 바뀌어도 봉사직에 지원할 수가 없다. 더욱이나 선출직에는 아예 피택과 선택의 자리에 접근조차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하지 않는 일은 거의 없다. 성도들도 교회의 모든 일에 사모가 다 참여하기를 원한다.
남편인 목사는 사명자로 부름을 받고, 신학교를 나오고, 정규직으로서의 훈련도 긴 시간 동안 받았다. 그러나 사모는 사모 신학교를 나온 것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다. 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는데 그 남자가 신학교를 가고 목회자가 되었다. 아니면 신학교를 졸업한 남자를 만났는데 목사였다. 그러니까 사모는 소명도, 부르심도 아닌 상태에서 결혼과 동시에 그냥 성도들이 사모라고 부르는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여자 부교역자의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부임한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원래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 출석하면서 직분을 감당해도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남자 부교역자의 아내는 남편이 사역하는 교회에 함께 다녀야 한다.
사모가 청년 시절에는 그 교회에서 촉망받는 젊은이였고, 또래의 무리 가운데서 제일 신앙이 좋은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런데 사모가 되면 재능과 은사에 관계없이 자의적으로 할 수 있는 교회의 봉사직은 없다. 봉사자가 없는 사역의 빈자리를 채우거나 결석하는 봉사자의 뒷자리를 감당해야 한다.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을 정도의 사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사모가 직장에 다니면 성도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정죄하고 비난하는 공동체도 있다.
교회 안에서 처신하기도 정말 어렵다. 교회마다 요구하는 내용이나 수준이 다 다르다. 열심히 공동체에 참석하면 나댄다거나 설친다고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사모가 왜 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말을 조금 많이 하면 입만 살았다고 하고, 말이 없으면 꿔다 둔 보리 자루라고 말한다. 심방을 가서 세 번 칭찬하면 사모가 가지고 싶어서 계속 말한다고 하고, 칭찬하지 않으면 성도의 삶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봉사를 열심히 하면 성도들의 자리를 빼앗는다고 하고, 봉사를 안 하면 놀고먹는다고 한다. 옷을 잘 차려입으면 사치한다고 하고, 검소하게 입으면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고 폄하한다. 교인들과 조금 친하게 지내면 자기 사람 만든다고 하고,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 사교성이 없다고 말한다. 자녀들이 교회에서 떠들면 가정교육이 엉망이라고 말하고, 엄격하게 훈육하면 사랑이 없다고 말한다. 목사인 남편이 목양을 잘하면 무슨 복이 저리도 많아서라고 하고, 남편이 목회를 잘못하면 도대체 사모는 뭐 하느냐고 말한다. 남편이 목양을 잘하면 남편의 실력이고 목양을 잘못하면 사모는 자신의 부족함 같아서 늘 마음이 아프고 냉가슴을 앓는다. 사모의 몸이 자주 아프면 기도하지도 않고 목사의 목회에 방해가 된다고 하고, 건강하면 아픈 사람들의 삶을 공감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래서 사모는 오늘도 마음과 정신과 육체가 아프다. 젊은 시절의 자존감이 사라졌다. 평생에 축복을 선포하고 기도했는데 소수를 제외하면 정작 사모는 가난하다. 교회에서 어쩌면 그냥 시간을 보내는지도 모른다. 남편의 목회가 끝나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물론 교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성도들을 시험 들게 하고, 남편의 목회를 힘들게 하는, 위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 사모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모는 교회와 목회와 남편에게서 소외 된 채 외롭고도 힘든, 사명과 사랑과 동역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참 외로운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힘내라는 말 대신에 그냥 사랑과 긍휼의 눈으로 가만히 쳐다봐 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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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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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 특강] 교회법(法)과 교회 건설(建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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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이 교회 건설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교회 건설과 교회 세우기가 교회법(교회질서, 교회규정)보다 더 높은 상위(上位)에 있다. 생소하게 들릴 수 있는 ‘교회 건설’ ‘교회 세우기’ 개념은 성경에서 나왔다. 교회가 건물이나 집, 성전, 건축물에 비교되면서 ‘건설’이라는 말이 특별히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3장(9-17절), 에베소서 2장(20-22절)이 대표적이다.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오이코도메인’(oikodomein, to build up, 세우다), ‘오이코도메이’(oikodomee, building up, 세움)인데 각각 동사와 명사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대부분 교회와 관련해서 교회 건설 혹은 교회 세우기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공예배에서 지켜야 할 ‘질서’ ‘품위’를 강조하고 있다. 40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고린도 교회에 공예배에서 방언이나 통역, 예언과 같은 은사가 있었으나 질서와 품위 대신 무질서가 있었다. 그 결과 교회에 화평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 있었다. 33절에서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한 것에서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여기 나오는 ‘질서’ ‘무질서’ ‘품위’ ‘화평’은 좁게는 교회의 공예배 맥락에서 나온 용어들이지만, 넓게 본다면 비단 공예배 뿐 아니라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해당한다(26절은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한다).
그런데 공예배에서 지켜야 할 질서와 품위를 권면하는 고린도전서 14장에 ‘세운다’는 뜻의 ‘오이코도메인’ 용어가 나온다(4, 5, 12, 26)! 한글성경(개역개정)은 원문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덕’이라는 말을 삽입하여 그 뜻이 이상하게 되었다: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4절),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5절),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12절). 다행히 최신 영어 성경 ESV는 ‘덕’이라는 말은 빼고 ‘교회를 세운다’(builds up the church, 4절)로 번역을 잘했다. 26절은 위 세 구절과 달리 ‘교회’라는 말이 없이 그냥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하고 있지만 고린도전서 14장 전체 맥락을 볼 때 이는 ‘개인’이나 ‘몇 사람’의 덕이 아니라 ‘교회’의 덕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 특히 공예배와 법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목표로 것은 무엇보다 ‘교회 건설’ ‘교회 세우기’이다. 강조점은 ‘개인’ 세우기가 아니라 ‘교회’ 세우기에 있다. 한글성경은 ‘덕’이라는 불필요한 말을 첨가하여 번역함으로써 마치 공예배와 질서가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처럼 만들었다. 교회 역사에 나타난 17, 18세기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은 교회론적 맥락을 무시하고 개인의 경건과 덕을 세우는 것만을 주장했는데, 여기 ‘교회 세우기(교회건설)’ 뜻으로 교회론적 맥락에서 사용된 ‘오이코도메오’를 순전히 개인의 덕을 함양하고 교화하는 뜻을 가진 “edify”(개인의 덕을 교화하다)로 바꾸어 버렸다.
교회에서 법(질서)의 목적은 화평(33)을 통한 교회 건설이다. 질서를 위한 질서, 법을 위한 법이 아니다. 장로교회 선진들은 공예배 질서에 관한 <예배지침>(The 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 1645년)을 작성했다. 근데 예배지침 표지에 고린도전서 14장, 이미 위에서 언급된 구절이 나온다. 26절(“모든 것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과 40절(“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이다. 이들은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공예배의 질서를 교회 세우기와 연결했고 그래서 위 구절을 첫 페이지에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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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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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아직도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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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나라 안팎은 혼돈 그 자체다. 무안공항 사고로 올해는 새해맞이 행사도 대부분 취소되고 179명의 귀한 생명의 사망뉴스 보도를 통해 새해벽두부터 아프고 슬픈 소식에 마음이 우울하다. 그렇게 2025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대통령 탄핵이라는 정치적 핵폭탄이 헌법재판소에서 언제 어떻게 터질 것인가에 온 국민은 좌불안석인데 광화문과 여의도에서는 밤낮없이 찬반 시위로 홍역을 앓고 있다. 국태민안의 보루가 되어야 할 여의도 1번지는 어느 하루도 삼류정치의 쌈박질하지 않는 날이 없다. 아프다. 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이 늙어가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마지막 희망의 줄을 놓지 않고 쉬지 않고 하는 것이 있다.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나라 이 민족을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2025년도 그렇게 하루하루 열리고 닫힌다. 그러면서 나는 오늘도 말씀 사역자로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송구영신 예배로 시작한 2025년 새해 첫날은 감림산기도원에서 신년 축복 성회로 시작되었다. 대성전을 가득 메운 성도들을 보면서 울컥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새해 첫날에 기도원에 올라와 기도하는 성도들의 젖은 눈을 보면서 내 마음이 젖었다. 성도들의 목이 터지라고 부르짖는 기도 소리에 거룩한 소름이 돋았다. 설교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임을 알기에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마음을 그림처럼 그려 보여 주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2025년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하신다고 선포했다.
젊은 청년이 조용히 다가와 “목사님 저 한 번만 안아 주시면 안돼요?” 한다. 23세의 손자 같은 청년이다. 조용히 내 품에 안아주니 품에 안겨 헉헉거리면서 울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한다. “목사님 대한민국이 아파요.” 순간 천둥소리를 듣는 느낌이었다. 귀도 마음도 가슴도 먹먹했다. 그 언젠가 TV 연속극에서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할말을 잃은 나는 “그래, 기도하자.”라는 한마디 밖에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아니 지금도 내 영혼은 그 청년의 젖은 목소리에 아픔이 가시지 않는다.
몇 년 전 시골교회 목사님이 부흥회 강사 초청을 하셨다. 일정이 나오지 않아 정중하게 거절했더니 전화로 내게 들려주는 한마디에 내 마음은 얼어붙은 느낌이었다. “우리 교회 78세 할머니가 서목사님 방송 설교를 듣고 제게 찾아와 ‘죽기 전에 그분 설교를 직접 한번 듣고 천국 갔으면 원이 없겠다’라고 하셨습니다. 한 시간도 좋으니 허락해 주시면 안 됩니까?” 이리저리 일정 조정하여 주일 1일 집회를 약속하고 갔다. 우리 부부를 포함하여 13명이 예배를 드렸다. 강사를 바라보는 대부분의 연로하신 성도님들의 눈은 주님을 바라보는 혈루증 여인을 느끼게 했다. 많이 울었다. 그 1일 집회만큼 은혜와 감동을 마음에 담은 집회는 없다고 지금도 고백한다.
오래전 일이지만 점심을 먹으면서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국을 더 먹겠다고 하였더니 아내는 국자에 국을 떠 국그릇에 보충해 주었다. 그런데 국자는 신혼 시절에 샀던 것으로 손잡이가 휘어져 있는 것이었고 오랫동안 사용하다 보니 닳아 있었다. “여보, 인제 그만 사용하고 새것으로 바꾸지.”라는 무심코 하는 말에 아내는 “아직은 더 쓸 수 있잖아요.”라는 대답을 했다. 그 순간 뭔지 모를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고 손잡이가 휘어진 국자를 통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렇게 사용하는 것은 비단 국자뿐이 아니다. 성도님들이 선물로 주신 좋은 것들도 많지만 목사관에는 신구 문화가 공존되어 있는 살림살이들이다. 버리자니 사연도 있거니와 아깝고, 사용하자니 불편한 것들이 어디 국자 하나뿐이겠는가? 손잡이가 부러진 국자를 보면서 인생도 목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계륵’(鷄肋)의 교훈과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깨우침을 다시금 생각했다.
‘鷄肋’이란 말은 쓸모는 별로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운 사물의 비유로 사용되는 용어로서 진서(晉書) 유령전(劉伶傳)과 후한서(後漢書) 양수전(楊修傳)에 나오는 말이다. 진(晉)나라 초기에 죽림칠현 가운데 ‘유령’(劉伶)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유령이 술에 만취가 되어 행인과 말다툼을 벌였다. 상대가 주먹을 치켜들고 달려들자, 유령이 점잖게 한마디 건넸다. “보시다시피 계륵(鷄肋, 닭갈비란 뜻)처럼 빈약한 몸이라 그대의 주먹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소.” 그러자 상대방이 엉겁결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는 이야기에서 계륵이 상용되었다.
他山之石이란 다른 산의 거친 쓸모없는 돌이라도 옥(玉)을 가는 데에 소용이 된다는 뜻으로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서 이 말은 쓸모없는 것이라도 쓰기에 따라 유용한 것이 될 수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돌(石)을 소인에 비유하고 옥(玉)을 군자에 비유할 때 군자도 소인에 의하여 수양과 학덕(學德)을 쌓아 나갈 수 있음을 이를 때 타산지석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인생을 살면서 강자에게 굽실거리고 약자에게 군림하는 졸부의 삶을 엮어 갈 것이 아니라 작은 것, 쓸모없어 보이는 것 하나라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지닐 때 그 삶을 더욱 넓고 깊고 고고(高高)해지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부러진 국자 같은 상황이 언제나 있기 마련이고 이를 소중히 사용할 수 있는 넉넉함이 우리의 삶에 있을 때 그 삶은 더욱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다.
내 나이 팔순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은퇴 이후에도 한해 60여 교회 초청을 받아 말씀 사역을 한다. 불편한 잠자리와 음식, 교통수단 어느 것 하나 여의찮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고 방지일 목사님이 101세의 고령에 포항중앙교회 주일설교를 인도하신 후 안수기도 해 주실 때 “서목사님은 녹슬어 못 쓰는 목사가 아니고 닳아서 못 쓰는 목사가 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응답이 오늘 나의 삶이 되고 있다. 부러지고 닳아버린 국자 같은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오늘도 하나님이 나를 향해 “아직은 사용할 수 있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감사함으로 다음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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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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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하나님의 영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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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이하여 반갑게 인사하면서 복 많이 받으시라고 인사를 건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가볍지는 않습니다.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정치 사회적 혼란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와 해지, 그 뒤를 이어 나온 대통령 탄핵과 대통령 권한 대행인 총리의 탄핵, 그리고 대통령과 주변 사람들을 내란 세력으로 규정하여 체포하려는 시도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현직 대통령을 체포하기 위해 경찰이 집중되어 경호처와 대치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생중계로 나가는 것은 정말 국가적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 야당 지도자는 여러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고, 남북 관계도 그 어느 때보다 경색되어 있고, 북한군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되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침체 국면을 벗지 못하고, 창조 질서를 부정하는 세력과 맞서야 하는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마음이 가벼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소망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본문은 창조 전의 상태를 말씀합니다. 첫째, 혼돈입니다. 카오스, 즉 무질서의 상태였습니다. 둘째, 공허였습니다. 존재하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였습니다. 셋째, 흑암이었습니다. 캄캄한 세상이었습니다. 이런 중첩된 절망의 상황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 모든 것을 놀랍게 바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혼돈에 질서를 가져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우주는 코스모스입니다. 코스모스에는 ‘질서’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정교한 질서의 메카니즘입니다. 일 년 사시가, 계절의 변화, 밤과 낮의 뒤바뀜, 파종하여 추수하기까지의 자연의 응답이 정교합니다. 산천초목이 정확히 때를 알고 반응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공허를 채우셔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창조 세계는 가득 채워진 충만의 세계입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 어디에나 놀랍고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르지 않는 샘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공허한 세상을 온갖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 채우셨으나, 부족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 16절은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충만은 온 세상을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흑암에 빛을 가져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첫 창조가 빛입니다. 빛이 존재하는 순간, 어둠은 사라졌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 마니교에 심취했습니다. 그는 마음속의 악을 몰아내기 원했으나, 마니교 지도자인 파우스트는 빛이 있으면 어둠이 당연히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실망하여 마니교를 떠나 회의론에 빠졌습니다. 그 후 그는 주님 안에서 해결책을 발견했습니다. 빛이 밝혀지는 순간, 어둠은 사라진다는 일원론을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의 빛이 영혼에 밝혀지는 순간, 어둠은 물러갑니다. 그는 로마서 13장의 말씀을 통해 빛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혼돈도 물러가고, 공허도 채워지고, 흑암도 빛으로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지금 우리 상황을 타개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다면, 우리의 혼돈과 공허와 어둠은 물러갈 것입니다.
새해가 되었습니다. 더욱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길 사모해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 운동과 같은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근원적인 역사의 차원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님 안에서 한국교회가 질서를 갖길 원합니다. 하나님만 영화롭게 하길 원합니다. 모든 성도가 그 앞에 무릎 꿇길 원합니다. 우리의 공허와 부족을 성령께서 채우시길 원합니다. 예배당의 빈 공허함을 성도들로 채워주시길 빕니다. 우리 안의 어둠이 물러가고 기쁨과 감사의 빛으로 충만하길 원합니다. 주여, 주의 영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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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