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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정칼럼] 감사력(感謝力)을 높이기 위한 십계
    행복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해서 행복한 것이다. 감사는 행복을 부른다. 감사야말로 인생 최고의 항암제다. 근심의 해독제다. 절망의 방부제다. 그뿐인가? 감사는 마음의 등대요. 영혼의 호흡이다. 인생의 보물지도다. 나아가 축복의 통로다. 1. 생각이 곧 감사다 : “Think & Thanks"란 말이 있다. 생각과 감사는 그 어원이 같다. 깊은 생각이 감사를 불러일으킨다. 인도속담에 “호랑이를 왜 만들었냐고 하나남께 투정하지 말고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지 않는 것에 감사하라”는 말이 있다. 생각으로 감사를 열어라. 2. 작은 것부터 감사해라 : 작은 감사가 큰 감사를 낳는다. 큰 강도 처음에는 작은 물방울로부터 시작되었다. 아주 사소하고 작아 보이는 것들을 먼저 감사하라. 그러면 큰 감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나중 감사가 아니다. 바로 지금부터 감사해라. 3. 자신을 감사하라 :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높은 산과 거대한 바다의 파도와 굽이치는 강물과 저 광활한 우주의 태양과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는 감탄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감탄하지 않는다.” 자신을 감사하는 것이 가장 큰 감사다. 4. 일상을 감사하라 : 가장 어려운 감사는 가장 단순한 감사다. 숨을 쉬는 것, 가장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감사가 가장 어려운 감사라는 것이다. 5. 문제를 감사하라 : 문제는 항상 해결책이 있기 마련이다. 만약 해결책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문제도 아니다. 그러므로 해결책이 있음에 감사하라. 그러면 동굴도 터널로 뚫린다. 6. 더불어 감사하라 : 장작불도 함께 있을 때 더 잘 타는 법이다. 혼자보다는 함께 감사할 때 감사는 시너지 효과를 띠게 된다. 가족들끼리 감사를 나누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로 돌아온다. 7. 감사의 기어변속을 잘하라 : 처음에는 ‘만일에’ 감사다. 그 다음이 ‘때문에’의 감사다. 이어 ‘불구하고’ 감사하게 된다. 나아가 우리는 ‘더불어’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저속기어를 넣고 고속도로를 달릴 수는 없다. 기어를 높여라. 8. 잠드는 저녁시간에 감사하라 : 대부분의 사람들이 짜증과 분노, 근심 걱정을 껴안고 잠든다. 잠드는 시각에 감사하라. 저녁의 감사는 영혼의 청소가 된다. 9. 감사의 능력을 믿고 감사하라 : 감사에는 메아리효과가 있다. 감사하면 뇌에 새겨진다. 그리고 감사의 반응은 언제나 긍정이 된다. 감사는 견인력이 있어 꼭 그런 방향을 가리킨다. 감사는 감사한대로 이루어진다. 이를 성취력이라 한다. 10. 받는 감사가 아니라 주는 감사를 하라 : 우리말의 ‘고맙습니다.’는 말의 어원은 ‘고만 마세요. 이제는 제 차례입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영어의 thanksgiving도 마찬가지다. 'thanks' +'giving'이다. 때문에 give and take가 아니라 give, and take가 그 답이다. 언젠가 give and more take로 돌아올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3류 인생은 탓한다. 원망한다. 그리고 핑계거리를 찾는다. 2류 인생은 무조건 참아낸다. 하지만 일류인생은 감사한다. 그렇다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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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06
  • [서임중 칼럼] 마음을 넓히라
    대구에서 부산으로 가는 경부고속도로를 주행하다보면 곳곳에 정체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영남권 젖줄이라는 경부고속도로 대구~부산 구간의 왕복 4차선은 일반 도로보다 더 정체현상이 짙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서 확장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본다. 준공되면 정체 현상이 완화되어 고속도로의 기능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길을 넓히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은퇴 전 교회를 담임할 때 주차 시설이 부족하여 주일만 되면 주차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주일에는 항존직분자들은 할 수 있으면 교회 주차시설을 사용하지 않도록 광고를 하기도 했고, 늘 교회 주변 주차시설을 확보하기 위하여 은행 부채를 내어서라도 주차공간을 확장하는 일이 우선 정책이었다. 주차 시설을 넓히는 것도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더욱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이 넓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좁아서 인간관계는 물론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여 실패하고 낙망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전 6:11-13)고 권고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마음이 넓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얽혀 오해가 되고, 그래서 아름다운 관계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해하고, 관용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은 넓은 마음에서 가능한 것이다. 마음이 좁기 때문에, 그래서 이해를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부관계도, 이웃관계도 원만하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교회생활에서도 그런 경우는 얼마든지 경험하게 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좁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예수 믿는 사람의 마음이 꽉 막혔다는 말도 종종 듣는다. 어딘가 모르게 답답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융통성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듣기도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 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서로 얽히고 설키여 관계가 불편스럽다가도, 대폿집에 앉아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형님 아우 하면서 마음을 쉽게도 푸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한번 관계가 어긋나면 수년이 지나도 화해하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를 본다. 이것이 믿음일까? 정말 예수님이 그러셨는가? 그렇게 가르치셨는가?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가르친 곳은 없다. 넓은 마음, 이해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가르쳤고 그 마음을 주님이 은혜로 주셨는데 왜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좁다고 막혔다고 판단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며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여 하심이라.”(벧전 3:8) 이 말씀은 축복의 혁명적인 선언이다. 복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것, 그것은 마음을 넓히는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의 몫이다. 마음이 좁다는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꿈이 없다는 말과도 같다. 그래서 꿈이 없으면 방자히 행한다고 잠언은 깨우친다(잠 29:18). 그러니 일상의 언행이 꺼리거나 삼가는 태도가 없이 무례하고 건방지게 연출된다. 그러나 꿈이 있는 사람은 그 꿈을 성취하기 위하여 고난도, 역경도, 아픔도, 억울함도 견딜 수 있다. 요셉이 그랬다. 꿈이 있었기에 미움을 받으면서도 참았고, 미디안 장사꾼에게 팔리면서도 참았고, 보디발의 몸종이 되어서도 참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어도 참았고, 술 맡은 관원장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도 미워하지 않고 참았다. 이래 참고 저래 참았다. 왜? 마음이 넓었기 때문이다. 왜 마음이 넓었나? 꿈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꿈이 있다는 말은 믿음이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일깨운다. 꿈이 있는 사람은 이 믿음을 가져야 한다. 꿈이 성취되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 때 마음도 넓어진다. 믿음 있는 사람은 모든 기준이 주님이다. 교회중심이다. 사명 중심이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함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수용한다. 마음이 넓기 때문이다. 마음이 넓은 사람은 생각이 다르다. 이런 넓은 마음과 믿음은 저울로 달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가니 속에 넣어서 시험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마음이 넓으면 그것이 삶으로 증거 된다. 그것이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이다.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기쁜 것이며, 기쁨의 생활은 축복으로 연결된다. 마음이 넓지 못하면 기쁨이 없다. 바꾸어 말하면 기쁨이 있어야 마음이 넓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기쁨이 있다는 것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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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06
  • [성서연구] 성령과 믿음보다 앞선 것(사도행전 11장 19-30절)
    본문에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길 갈망하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21절 끝의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는 말씀과 24절 후반부의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입니다. 이 말씀은 안디옥교회의 부흥을 보여줍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이후 흩어진 성도들이 곳곳에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의 성도들이 안디옥에도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안디옥에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부흥이 한국교회에서도 일어나길 간절히 기대합니다. 이런 부흥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요? 첫째 <주의 손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21절에는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의 노력과 좋은 조건도 주의 손이 함께 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나 객관적 조건에서 부족해도 주의 손이 도우시면 엄청난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복음 지형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지만,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주의 손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한국교회는 안디옥교회처럼 부흥할 것입니다. 둘째는 아름다운 협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교회의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교회는 바나바를 보내 그들을 도왔습니다. 본래 예루살렘교회는 유대인 중심의 교회로서 이방인들도 복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빌립 집사의 에디오피아 내시 전도와 예루살렘교회의 최고지도자였던 베드로의 고넬료 전도의 경험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열었고, 이들은 안디옥 소식을 들었을 때 기꺼이 바나바를 보냈습니다. 만약 안디옥의 소식을 듣고도 예루살렘교회가 마음을 열지 않았다면 이런 복된 결과를 얻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셋째는 귀한 사람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나바>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합류하기 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온 이후에는 <이게 큰 무리가 주께 더하는> 폭발적 역사가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잘 되고 있던 곳을 백배나 더 잘 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복을 가지고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오늘 본문 24절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바나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입니다. 만약 저를 보고 바나바를 소개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요, 게다가 성품도 착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 충만과 믿음 충만을 최고로 여기면서 성품은 소홀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오히려 바나바가 <착한 사람>임을 더 먼저 언급하였습니다. 여기 <착하다>로 번역된 <아가토스>는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라고 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대부분은 성품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신학교 시절 선배 목회자들을 통해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는 충고를 많이 들은 바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영적 측면 못지않게 인품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에는 성품의 변화도 포함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세상으로부터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그 후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여 부흥을 가져오는 일꾼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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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06
  • [함께 생각해 봅시다] 목사의 언어폭력
    담임목사와 부목사, 뭐가 다른가 조금 먼저 교회를 담임한 것 뿐임 언어 폭력이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없지 않다. 보도에 의하면 최근 목원대 학생상담센터 노성동 교수가 목회 경력 3~12년의 남녀 목회자 16명을 면담한 결과 면담에 응한 부목사들은 담임목사와 중직자로부터 무시, 인격모독, 비난 등의 언어폭력을 당했다고 호소했다. 예를 들면 김 모(45세) 목사는 담임목사로부터 “이따위로 밖에 못해? 나 이는 많아 가지고...” 이같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 분명히 지난번 지적한 내용을 보완했지만 소용없었다. 담임목사는 꾸중을 할때마다 그저 꾸짖지 않고 “나이는 많아가지고...”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김 목사는 뒤늦게 신학공부를 시작한 본인의 처지를 원망했다고 한다. 심지어 담임목사는 예사롭게 “그만 잘라버린다. 여기서 나가면 갈 곳이 있냐?” 이같은 말까지 한다는 것이다. 박 모(38세) 목사는 교인들 앞에서 장로로부터 “평신도보다 못한 놈”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설교하는 중 실수로 성경구절을 잘못 말했다는 이유에서 였다. 부목사가 어쩌다가 그런 실수를 했을지라도 장로가 교인들 앞에서 ‘놈’자를 붙여가며 부목사를 비난하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노성동 교수는 이같은 언어폭력에 시달리는 부목사들은 위축되고 자괴감에 빠지고 수치심을 느껴 목회현장을 불안하고 위협적인 자리로 생각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알고보면 담임목사 중에 언어폭력으로 부목사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담임목사가 의외로 한둘이 아니다. 부목사를 예사롭게 ‘이 새끼’, ‘저 새끼’하며 야단친다는 것이다. 한번은 한 권사가 자기 교회 담임목사는 “세상에 설교하면서 부목사를 ‘아무 목사 그 새끼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겁니까?”라고 필자에게 질문했다. 담임목사가 부목사를 ‘이 새끼’, ‘저 새끼’하면 안 된다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아닌가. 담임목사와 부목사가 뭐가 다른가. 같은 과정으로 신학을 공부했고 같은 목사로 장립받았다. 담임목사와 부목사가 다른 점은 담임목사는 부목사보다 조금 먼저 교회를 담임한 것뿐이다. 오늘의 부목사는 내일의 담임목사이다. 뿐만아니라 지금의 부목사가 머잖아 교회를 담임할 뿐 아니라 그가 교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어떤 목사가 될는지 모른다. 지금의 담임목사가 지금의 부목사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담임목사는 부목사를 진심으로 아끼면서 선도해야만 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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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06
  • [목회자 칼럼] 해외 한인 선교사 가족 수양회 인도 견문록見聞錄 (5)
    우리 민족의 조급성에 대하여 가령 예를 들면 우리는 수도 서울이 600년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라고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을 한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듣고 우리 나라를 여행 와서 서울을 살펴보고 나서는 대부분 실망하면서 의문을 이야기 한다.“서울 시내를 부지런히 탐방하면서 다녀보아도 서울이 오래 된 도시라고 느낄 수 있는 유적 또는 흔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세계 어느 최신의 현대 도시보다 더 요란하고 거대한 딱딱한 도시라는 것이다. 옛것은 차지하고서라도 20년 30년만 사용을 해도 「낡은 건물」로 치부하여 미련 없이 뜯어버리거나 철거해 버리고 새로운 건물을 세운다. 엊그제 통영에서는 수 백년 〈목공예 기술 장인〉의 맥을 이어오는 마지막 남은 뜻깊은 가옥을 새로운 관공서 건물을 짓는데 방해가 된다고 철거하겠다는 통영시의 계획이 보도 되면서 비판 여론이 비등해 지고 있다. 보라! 말이 나온 김에 정부가 밀고 나가는 〈동남권 신공항 건설〉 문제만 해도 그러하다. 지금의 〈김해 공항〉을 좀 더 확장하여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공항 부지 선정 문제〉로 비화하여 “가덕도냐 밀양이냐?”를 놓고 영남지역은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다. 기존의 오랜 주거지역인 밀양에 광활한 〈신공항〉을 건설한다면 극심한 소음은 어떻게 할 것이며 우리나라처럼 제한된 국토에서 그 소중한 농토들이 대량 매몰되는 것과 비행기들이 고도를 낮춰 착륙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김해 쪽의 아름다운 산마루들이 대거 절단돼야 한다니 이런 무리수를 왜 밀고 나갈려고 할까?국제적인 물류의 환적 항만이 부산에 있고 세계적인 부산 신항만이 바로 가덕도에 위치하고 있다. 가덕도에 신공항을 건설하면 소음문제, 농지 대량훼손 문제, 자연환경 파괴문제, 항공기 이착륙 안전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 할 수 있다는 것은 전문가가 아닌 우리 보통 사람들의 시각과 판단으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우리 민족 특유의 조급성과 단견성은 〈교회당 건축〉에서도 쉽사리 발견 된다. 멀쩡한 교회당을 너무 간단히 철거해 버리고 과도한 예산으로 신축을 한다든지 교육관이나 부속 건물들을 마치 교회들끼리 경쟁하시다시피 너무 쉽게 너무 과도하게 건축하는 현상 역시 심히 우려할 부분이다. ‘보이지 않는’ 교회의 신령한 부분을 강화하고, 다음 세대를 위하여 사람 자체를 양육 훈련시키고, 그리스도교의 영성과 품격과 신뢰도를 높이는 일에 우리의 기도와 관심과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2016. 4. 3 주일은 Bonn 한인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내 인생의 만선(滿船)〉(눅5:1~10)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 하였다. 34년 만에 Bonn에서 맞이하는 주일, 그리고 우리 한국인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나의 마음은 실로 감개가 무량하였다. 성도들 중에는 1960년대 초에 〈광부로 또는 간호사〉로 취업하러 와서 한국인의 끈기와 성실과 다정다감함을 여지없이 보여 줌으로써 한국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독일 사회에 인상 깊게 심어 놓은 귀하신 분들도 계셨다. 나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였다. 예배를 마친 후 교회 식당에서 소박한 점심식사를 나누는데 나는 연세 드신 어르신들과 자리를 같이 하였다. 그분들의 무용담과 인생 경륜에서 나오는 말씀들은 산 교훈이요 값진 가르침이었다. 조국이 그립고 그리운 고향 땅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사 당연하지만 이미 자녀들이 독일 땅에 뿌리를 내리고 다들 잘 살고 있는지라 자녀들과 만나면서 가까이서 사는 것이 오히려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1960년대 초, 이 분들은 20대, 30대 초반의 혈기 왕성하고 아름다운 청년들로 독일 땅에 왔었는데 50여년의 세월은 대부분 80대 중, 후반의 어르신들로 변모돼있었다.남은 여생들을 한인교회에 몸과 마음을 의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면서 주님의 위로와 소망 가운데서 건강하게 살아가시기를 소원하고 축복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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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6
  • [중독칼럼] 환경에 지배당하는 자녀들(2)
    [상황4]스마트폰 중독에 대해서는 청소년 부모들은 점점 포기내지 방관으로 접어 드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시점이다. 외식하다보면 온가족이 식사 중에 대화하는 모습보다는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스마트폰만 쳐다보는 수구리(노모포비아)가족들을 만난다. 요즘 스마트폰 중독은 청소년이 문제가 아니라, 초등학생들에게 그 문제가 더 심각하다고 매스컴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이러한 노모포비아 현상이 우리 자녀들에게 어떤 문제를 일으킬까? AI(인공지능)이 발달한 상황에서 사람과 사람이 함께 일하는 일은 더 줄어 들 것이며, 인성적 결여 현상은 심화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가정 마다 독자나 독녀를 두고 있는 가정이 많고 그 부모 또한 스마트폰에 빠져 있는 경우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교회의 역할은 점점 더 줄어 드는 상황이다. 모이기를 힘쓰기보다는 폐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 교육의 부족 현상은 더 대두 될 것이다. [조언4]첫째, 스마트 시대, 인성교육을 위한 스마트폰 예절이 필요하다. 1) 식사 시간에는 스마트폰을 보지 않는다. 2)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스마트 문화 만들기. 예를 들어 함께 코딩을 통한 프로그램을 그 대표적인 것이다. 또는 함께 전략을 짜며 게임하는 것도 좋다. 3) 예배 시간에 화면을 보는 시간을 줄여 간다. 일부러 자신의 성경과 찬송가를 사용한다. 4) 쉬지 못하는 눈과 뇌를 통한 정신을 쉬어주는 묵상의 시간이 더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이 때 모든 스마트폰을 끄는 무브먼트가 필요하다. 둘째, 일명 단추의 원리이다. 첫 단추, 예비 신랑 신부들이 영적으로 거룩하게 준비하는 시간이 최소 결혼 전 1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둘 단추, 다자녀를 낳아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독자 독녀는 중독에 노출되면 심각해진다. 그러나 다자녀를 둔 가정의 환경은 사회성이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예방 또한 쉽다. 셋 단추, 가정의 예배의 습관화이다. 넷 단추, 아버지의 안수 기도를 습관화하라.다섯 단추, 큰 모임의 예배 보다는 소그룹의 예배에 자녀 양육이 쉽다. 여섯 단추, 다자녀를 출산 시 연령 차이가 많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3자녀를 두고도 연령 차이로 인해 형제간에 대화가 없는 가정들이 많다. 이또한 독자 독녀와 비슷한 환경에 놓일 수 있다. 일곱 단추, 가정의 질서를 바르게 세우고 아내와 남편은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 예컨대 남편이 게임에 중독된 상황을 부부 싸움을 통해 자녀들에게 그대로 다 들어 낸다면 좋은 교육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여덟 단추, 스마트 문화로 소월해 지기 쉬운 친인척간의 교제를 활성화 하라. 이는 사람을 스마트폰 보다 더 좋아하도록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아홉 단추, 아버지는 식탁 교육을 통해 웃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열 단추, 아버지는 가정의 우선순위를 말씀을 통해 정확히 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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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6
  • [교회법률상식] 경남동노회 서○○ 목사 외 3인 면직판결 확정(2)
    (3) 세 번째 하달한 공문에 대하여 “본부 제100-958 (2016.5.20.), 수신: 박창복 목사, 박종희 목사, 제목: 경남동노회 사태에 대한 지시의 건, 내용: 1. 본부 제100-583호의 답변에서 양원 지원영 씨는 경남동노회 선거관리 규칙에 의거하여 자격이 없음이 판명되다. 2. 본부 제100-785호로 지시한 공문에 2016년 3월 21일 이후 모든 행정처리 및 재판진행 조사처리 임시회를 중지 지시한 바 이에 불응하여 진행한 1차, 2차 임시회의 조사처리위원회, 재판국의 판결은 무효로 한다. 3. 박종희 목사 측 임원회와 정치부가 모여 결의한 박창복, 서광호, 곽병찬, 하재몽, 임승인 목사의 당회장 해임과 이화전, 권만규 장로의 당회원 해임을 무효로 한다. 4. 박종희 목사 측에서 조직한 재판국의 판결 박창복, 서광호, 곽병찬, 하재몽 목사의 면직, 제명, 정직은 무효로 한다. 5. 이후 총회 지시를 불응할 시 더 큰 불이익이 있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끝,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관인), 총회장 박무용, 서기 이승희”로 되어 있다. 이 문서 역시도 명백한 불법 문서로서 왈가왈부할 가치도 없는 문서이다. 필자는 총회 서기가 총회관인을 날인하고 서기가 발송한 문서라고 믿고 싶지 않다. 다만 누구인지 문서 발송의 권한이 없는 자가 서기도 모르게 불법문서를 작성하여 총회 명의와 총회 관인을 도용 날인하여 하달한 것으로 보여 지기 때문이다. 이상의 3개 문서를 보면 모 정치꾼들이 모종의 시나리오에 따라 총회 명의와 총회 인장을 도용하여 소위 쌍둥이 사건의 불법문서를 하달하고 노회의 행정과 권징에 대하여 무효 운운하면서 총회와 노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위해를 가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2. 노회를 불법 분리해 놓은 유령 실사 위원회 거두절미하고 첫 번째 하달한 불법 공문의 내용에서 “양측”이라는 용어를 도입 사용함으로 노회 분리를 획책하였고, 두 번째 하달한 불법 공문의 내용에서 노골적으로 “참석 대상: 양측 대표 3명(노회장 서기 포함)”이라는 문장으로 명기해 노회 불법 분리를 공식화함에 다름 아니다. 차제에 공개적으로 유령 실사 위원회에 몇 가지 묻고 싶다. 경남동노회의 봄 정기노회 장소를 이탈하여 다른 장소에서 노회를 별도로 하기위해 동행한 서○호, 박○복, 곽○찬 등 목사 3인만 모여 노회 개회를 선언했다고 하면서 단 목사 3명이 노회임원과 총회총대를 선정한 것이 어찌 노회란 말인가? 또한 필자가 확인한 것은 노회 서기 성경선 목사와 전화 사담을 통하여 그 후에 진○호, 하○몽, 임○인 목사 등이 합세하여 겨우 목사 6명만이 노회를 진행하고 폐회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백번 그 노회를 인정하고 싶어도 장로는 한사람도 없이 목사만 6명이 모여서 회의를 진행하고 폐회한 이탈자들을 어찌 “양측 노회장 서기”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노회의 개회 성수”는 정치 제10장 제5조에 ① 예정한 장소, ② 예정한 날짜, ③ 목사 3인 총대 장로 3인 이상의 출석이 절대적인 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유령 실사 위원들은 정녕 아는가 모르는가? 장로는 단 1명도 참석치 않고 목사 6명만이 모여서 노회를 했다고 하는 자들이 과연 노회일수는 없고 결국 불법 이탈 범죄 집단일 수밖에 없다. 3. 노회 재판국 판결에 상소 없으면 노회 판결로 확정 경남동노회에 관련한 유령 실사 위원회가 불법 공문으로 불법 지시를 해놓고 정당한 노회가 설치하여 위탁한 재판국의 판결을 무효라는 불법공문을 노회에 하달하였으니 이런 경우를 두고 적반하장이라 했던가? 교회 재판 소송 건에 관한 판결을 취소하거나 변경하고자 하면 상소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권징 제94조). 그러므로 노회 재판국이 혹 불법재판을 하였을 지라도 피고가 선고 후 10일이 지나도록 노회서기에게 상소통지서를 제출하지 아니하면 노회의 판결은 확정된다(권징 제96조, 97조). 따라서 경남동노회 서○○ 목사 외 3인은 면직이 확정되었으므로 다시 목사가 되는 길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 후 노회가 해벌 복직 결의하고 다시 안수하는 절차를 이행해야 한다. 4. 결론 경남동노회는 유령 실사 위원회의 지시 등에 관계없이 4인의 면직된 목사는 교회 헌법 권징조례의 규정대로 혹 상소를 한다할지라도 재판국의 선고 즉시 시행하되 책벌자 명부에 옮겨 기록하고 면직된 목사가 시무했던 교회는 즉시 당회장을 파송하여 조속히 후임자를 선정 위임하여 노회와 교회의 평안을 유지해야 한다. 또한 총회 임원회는 경남동노회와 동대전노회의 소위 쌍둥이 사건에 관하여 더 이상 간섭하지 말고 총회 총대 천서검사위원회가 “총회 총대의 천서를 검사하여 적당하지 못한 총대가 있을 때에는 해 노회에 통고하여 재 보고토록 하고 이를 이행치 않을 경우 총회에 보고하여 그 지시대로”하는 것이 교회헌법과 총회규칙이 정한 법리이다(권징 제100조, 총회 규칙 제9조 2-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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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6
  • [성공칼럼] 의존성과 추종
    사람들은 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한다. 선을 행하는 사람이나 싸우는 사람이나 심지어는 악을 행하는 사람도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한다. 그러므로 각자의 생각을 갖고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 생각으로 인해 생긴 말과 행동으로 삶이 망가지면 그 때서야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먼 후일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지금도 몇 가지 태도를 보면 그 생각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먼저, 무조건 추종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생각은 결국 옳지 않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조건 추종은 내가 나를 버리고 이미 다른 사람에게 나를 맡긴 것이기에 그 생각은 옳은 생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독립적이 되어서 나오는 생각은 100% 잘 되는 옳은 생각인가? 그렇지 않다. 모른다. 삶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확률은 아주 많이 클 것이다. 내가 누구를 추종하고 있다하자. 그러면 나는 추종자의 생각에서 나온 말과 명령이 옳은지 그른지 따지지 않고 그대로 따른다. 혹시 어떤 사람이 내가 추종하는 사람을 반대하면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을 비난하며 싸우게 된다. 실제 그가 나에게 잘못한 것도 없으며, 나를 위하는 사람일 수 있고, 실상은 그 사람이 옳을 수도 있는데 이런 판단을 하지 않고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여 싸우는 것이다. 이런 추종하는 태도가 자신을 망가뜨리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의존성을 버리고 추종하지 말고 판단해야 한다. 성경에 사도바울도 처음에는 자신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괴롭히고 심지어는 잡아 죽이기까지 했다.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자신이 유대교의 추종자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추종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생각은 자신의 생각에는 옳은 것처럼 보여도 필경은 죽는 길인 것이다. 또 아내가 남편을 위한다고 남편이 욕하는 대상을 무조건 미워하고 싫어하는 행동은 옳지 않다. 내가 남편을 위하지만 그 대상은 나에게 어떤 잘못을 하지 않았음으로 그냥 남편의 말에 공감하고 남편의 입장을 이해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 외에 정치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다. 나와 다른 종교, 정치 성향이 있다하자. 내가 따르는 어떤 권위자의 말을 듣고 다른 종교가 나에게 해를 입히지 않았는데도, 내가 잘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비난하고 싫어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닌 것이다. 내가 만약 사람을 추종하면 그 사람은 나에게 “너는 내 말을 듣고 무조건 나를 위하지 말고 독립해서 네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라. 심지어 내가 누군가와 갈등한다고 해도 말이다.”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어릴 적에 하신 어머니의 말을 잊을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 아버지는 오랜 세월 노름을 하셨고 어머니는 늘 울면서 아버지를 원망했다. 그러니 아들인 나도 어린 마음에 어머니 앞에서 아버지를 욕을 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의 원망과 울음을 그대로 추종한 것이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화를 내면서 “아버지가 나에게는 잘못을 했지만 너에게는 잘못하지 않으셨어!”하면서 나의 무조건 추종하는 습성을 끊어주셨다. 나는 그 후로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에서 아주 많이 벗어날 수 있었으며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의 추종자가 되기를 바라실까? 내가 독립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실까? 하나님은 내가 추종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내가 어느 종교의, 어떤 사람의, 어떤 조직의 추종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에서 떠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의존성을 버리고 독립적인 사람이 되어 내가 맞이하는 상황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런 태도를 가지면 옳은 생각을 훨씬 더 많이 하게 되어 더 행복하고 자유스럽고 부유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상사나 부모나 권위자를 추종하지 말고 자신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에게 힘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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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6
  • [은혜의 말씀] 절반의 이유(삼상 1장 9~11절)
    기도하는 여인 한나를 통해 사무엘이 태어납니다. 하나님이 들으셨다. 말씀이 희귀하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그의 이름을 부르시고 말씀해 주십니다. 마지막 사사로서 미스바 대성회를 통해 백성들을 회개케 하였고 성실히 주의 일을 감당해 나가는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는 날 동안 이스라엘에 평화를 주십니다. 그는 실로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의 아들들은 그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왕을 요구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자신들을 보호하고 다스릴 강력한 왕을 원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않게 사람을 왕으로 추대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사울은 사무엘의 기름 부음으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400여 년 전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을 대적한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할 것을 사울에게 명하십니다. 사울과 백성들은 아말렉을 쳐서 승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아각왕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만 진멸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까지 세웁니다. 사무엘이 진멸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묻자 하나님께 제사 드릴 제물을 위해 좋은 것을 남겼노라 변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울 왕에게 실망하여 마음 아파하사 그를 왕으로 세웠음을 후회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 원하시는 것은 제사나 숫양의 기름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됩니다. 하지만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요, 멸시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임의대로 편리주의, 실용주의, 합리주의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함께 출전한 백성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자신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을 테니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히 그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는 것은 때로는 아주 어리석어 보이고 비효율적으로 보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멋도 없고 계산도 못하는 어리석은 자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편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재미와 유익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의미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저주대로 죽음을 맞이했고 새로운 왕 다윗이 등극하게 됩니다. 그런 다윗도 치명적인 죄를 지었지만 그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하며 나아갑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며 언제나 함께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행한 자 입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의 약하고 부족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감싸 안아 주셨습니다. 역사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지만 100% 완벽한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절반은 괜찮고 절반은 부족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간다고 하지만 부끄럽고 죄송한 게 너무나 많습니다. 비록 이런 부족하고 약한 모습일 지라도 우리의 초점을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간구하며 회개함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분의 은혜로 받아주시고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령충만함으로 날마다 순종해 하나님의 영광을 잘 감당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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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6
  • [시사칼럼] 프로테스탄티즘을 회복하라
    6월 14일은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막스 베버(M. Weber, 1864-1920)가 사망한 날입니다. 현대 사회의 많은 집단이나 기관이 조직화, 분업화를 통해 효율성을 추구하는 ‘관료제(Bureaucracy)’를 도입하게 될 것이고, 이는 인간 소외와 영혼의 파편화라는 문제를 양산할 것이며, 따라서 인간성을 지켜내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현대사회의 중요한 화두가 될 것으로 본 인물입니다. 동시대인이었던 로버트 미헬스(Robert Michels, 1876-1936)는 현대사회가 발전하고 관료제화할수록 의사결정권력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되고, 하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힘없는 처지에 있게 된다는 ‘과두제의 철칙(the iron law of oligarchy)’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5월 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홀로 수리하던 외주업체 직원 한 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SNS를 타고 퍼져나갔고, 많은 이들이 인터넷 상으로 혹은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애도의 표시를 남겼습니다. 스물이 채 안 된 젊은이의 안타까운 죽음은 그러나 우리가 몰랐거나 어쩌면 등한시했던 많은 사실들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이른바 메피아(메트로+마피아)의 실체와 이들과 결탁한 외주업체의 비리, 그리고 그 사이에서 희생과 굴종을 강요당하는 수많은 비정규직 특히 젊은이들의 이야기들 말입니다. 전형적인 관료제의 병폐요 우리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최근 롯데 그룹의 로비 사건과 관련된 비자금조성 및 기업운영실태에 대한 대대적인 검찰 조사 과정에서 우리는 ‘과두제의 철칙’ 현상이 우리 사회에 문자 그대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룹 후계 문제를 놓고 벌였던 재벌 부모와 자식 간, 그리고 형제들 사이의 충격적인 싸움을 목격한 지 불과 6개월이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입니다. 그룹 총수(摠帥) 일가는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 해 동안 주식배당금을 제외해도 수백억에 달하는 임금을 꼬박꼬박 받고 있음이 만천하에 공개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열사들은 정규직 자리를 계약직 직원들로 채우고, 계약직 사원들은 용역업체에 떠넘기는가 하면, 계약직마저 ‘지원사원’이라 불리는 아르바이트 직원들로 보충하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메트로나 재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똑바로 쳐다보십시오. 인간의 존엄과 생명보다 때로는 경제적 논리가 더 앞서는 모습을 도처에서 목격합니다. 중세로마교회보다 더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도처에서 목격합니다. 그러니 불의한 권력은 여전히 유령처럼 사회의 구석구석을 배회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극악한 이단이 설치고, 동성애를 신봉하는 무리 수천 명이 거리에 쏟아져 나오는 불의한 시대가 아닙니까? 개신교는 본래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불렸습니다. ‘저항자(抵抗者), 항거자(抗拒者)’라는 뜻입니다. 개신교는 16세기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교권(敎權)에 맞서 저항했습니다. 불의한 권력(權力)에 맞서 항거했습니다. 물질과 우상을 숭배하는 세상을 하나님 나라와 성경적 가치를 들고 맞섰습니다. 오직 말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를 기치(旗幟)로 들고 싸웠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해 순교의 피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의 사람들과 예수의 교회들이 다시 한 번 진정한 프로테스탄트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습니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할 수 없다! 돈보다 사람이 우선이다! 생명을 존중하고 환경을 보호하라! 젊은이들이여, 창조주를 기억하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용기와 희망을 가져라! 이러한 믿음과 고백으로 다시 한 번 일어서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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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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