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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칼럼] 재물 속에 계신 하나님
    성경에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리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재물을 섬긴다’는 것은 재물이 신의 위치에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섬기든 재물 즉 돈과 권력을 섬기든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섬기고 재물을 위해서 많은 것을 하고 있다. 재물 때문에 걱정하고 분노하고 서로 갈등하고 미워하고 싸우기까지 한다. 그리고 재물을 벌기 위해서 온갖 신에게 기도하고 재물을 바치고 있다. 그리고 힘이 있는 자들은 재물 때문에 거짓을 옹호하고 악을 눈감아주고 악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세상에서는 돈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것 같다. 먹는 것,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값비싼 명품을 사고 집과 땅을 사고 여행을 하고 사람들을 마음대로 다스리고 등등 돈이 힘이며 자유이며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을 얻고 돈이 없는데서 오는 두려움과 고통은 자신의 마음과 몸, 관계, 심지어는 영혼까지 고통스럽게 한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돈이 갖는 힘과 권위는 대단하다. 그러기에 많은 월급을 받는 직장을 가기위해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좋은 성적을 받기를 요구하고 수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다. 그런데 성경은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으며 재물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을 섬길 것을 명령하고 있다. 어떻게 돈이 전부인 이 땅에서 진리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 이스라엘에서 돈은 ‘세겔’인데 이 세겔은 ‘은’으로 만들어져 있다. 은이 상징하는 것은 진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진리이시다. 진리 속에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선을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진리가 되는 것이다. 만약 진리 속에 자기사랑과 세상 사랑이 들어있으면 이 진리는 진리의 모양을 하고 있을지라도 거짓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은 예배와 진리인 성경을 해석하는 직분을 맡았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의 부를 목적으로 예배와 말씀을 이용했기에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썩은 뼈들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이 된 것이다. 그러면 이 땅에 살면서 재물이나 권력을 가지고 돈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있는가? 있다. 그것은 돈을 벌거나 사용할 때 그 속에 사랑과 선이 있으며 하나님의 진리대로 돈을 벌고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음식 하는 사람은 음식이 재물이며, 검사는 검사라는 직업이 재물이며, 사업가는 돈이 재물이며, 의사는 의술이 재물인 것이다. 이 재물을 갖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한다. 그리고 이 재물을 갖게 되면 이 재물로 사람을 살리려는 결심을 해야 한다. 이 모습이 재물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그런데 실제로 재물을 가지게 되면 선택해야 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내가 재물을 갖고 있으면 이 재물로 자기를 사랑하고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권력을 만들기를 바랄 수 있다. 그러면서 회사와 가족을 위한다고 하면서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되는 재료를 사용하고, 나라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거짓과 악을 눈감아주는 것을 선택하는 순간 하나님을 버리고 재물을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도한다, “좋은 성적을 받게 해주세요.” “사업이 잘 되게 해주세요.” “건강하게 해주세요.” 등등의 제목으로. 그러나 이런 기도는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자기를 높이고, 세상의 부를 얻기 위한 재물을 섬기는 기도라 할 수 있다. 반면에 “하나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싸우는데 어찌 고통스럽지 않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어떤 고통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세요.” “하나님, 어떤 삶이든지 받아들이는 여유와 웃음을 갖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어떤 환경일지라도 사랑과 선을 행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또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살도록 해주세요.” 등등의 기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돈과 권력과 지식과 기술과 여러 가지 역할의 재물을 가지고 사랑과 선을 드러내는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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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24
  • [은혜의 말씀] 예수님을 생각하라 (히 12장 1~3절)
    사람이 살아갈 때 무엇을 보고 듣고 관심을 가지느냐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눈과 귀, 마음이 가는 그 곳에 우리의 인격은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우리 자녀들의 모습 속에 비쳐 나오기도 합니다. 사람은 말하는 대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본 대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우리 주변에 롤모델이나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에게 믿음의 영웅들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많은 증거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배우고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 속에 살아가다 보면 우리를 짓누르고 얽매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는 자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경주하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분 앞에 나의 무거운 죄와 어두운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어두움에 속한 것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마라톤, 장기레이스는 그리 호락호락 하지가 않습니다. 장애물에 익숙치 않은 우리는 곳곳에 숨겨진 장애물을 넘어야 하고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반복되는 죄의 정욕과도 싸워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피곤하고 좌절되며 낙심하게 됩니다. 이처럼 인생은 달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고통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높고 거룩한 영광스런 자리에서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셔서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죄인 취급을 받으사 갖은 모욕과 핍박과 말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을 당하셨으나 그 모든 것을 끝까지 참으셨고 감당하셨습니다. 심지어 죄 아래 죽을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깨끗함을 입고 살아날 것을 내다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킨 예수님은 죽은 듯 했으나 삼일 뒤 살아나셨고 하나님의 영광스런 우편에 앉으사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너무나 거룩하신 그 분이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를 위해 참으시고 또 참으시고 죽음까지 감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받는 고통과 고난과 아픔을 어찌 예수님의 고난과 비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참아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내어 주신 우리를 향한 그 희생, 그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상황과 사람을 바라보면 실망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로 교정해야 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바라 볼 때 우리의 마음은 새롭게 되어 힘을 얻고 예수님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완전하게 하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닮아가는 우리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더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자식은 근실히 징계한다고 했습니다. 징계에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답게 기르기 위한 징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한 징계인 것입니다. 천번 만번 근실히 연단을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 안에서 의롭게 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찾아와도 이 또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고 우리를 얽매는 것들을 벗어버리고 우리를 위해 끝까지 참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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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24
  • [중독칼럼] “한때 나는 PC방 폐인이었다”
    한때 나는 PC방 폐인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의 나 된 것은, 게임 중독으로부터 치유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목사이기에 앞서 게임을 좋아하는 게이머 마니아로서, 그리고 한 가정의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진솔하고자 한다. 그래서 나는 체면을 벗어던지고 나의 가정을 자랑하는 팔불출이 되려한다. 이유는 PC방 폐인이었던 내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5명의 아이를 둔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 문씨 장손으로 태어났지만 불신 가정이라 제사가 많은 집안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집안에 서자였다. 아버지의 조강지처였고, 나를 기르신 어머니는 중학교 1학년 때 자살하셨다. 게다가 나를 자신의 생명만큼이나 애지중지 하시던 아버지마저 간암으로 고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다. 유산도, 어린 내가 세상에 자리 잡을 만한 환경도 없는 나는 청년 시기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봤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키가 154cm 밖에 되지 않아 자존감이 극도로 낮았고,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과 포기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렇게 PC방 폐인이 되어 수천만 원의 빚과 빚쟁이에게 쫓겨다니며 20대를 살았다. 불우한 환경은 사람을 뭔가에 집착하게 하고 중독되게 한다. 나에게 있어서 중독은 온라인 PC게임이었다. 환경은 우리를 지배한다. 그래서 인간은 환경에 지배 당하기 쉽다. 그러나 그 환경을 지배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18장 20절) 바로 교회가 그 대안책이다. 나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교회를 통해 인생의 가치를 발견했으며, 교회를 통해 사람을 사귀었고, 교회를 통해 한 가정의 남편이자, 다섯 아이의 자랑스러운 아비이자, 한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으며 한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다. 오늘날 중독 문화는 스나미처럼 휘몰아쳐 우리 삶을 뒤덮었다. 여기에 파묻힐 것인가 아니면 서핑을 할 것인가는 자신의 자세에 달려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에너지 전환만이 살 길이다. 당신의 에너지를 전환하라. 거룩한 에너지로 전환하라. 무엇에 중독되어 살고 있는가? 돈, 운동, 일, 사람... 결국 우리가 예수께 중독되지 않으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마귀의 세상 속에서 묻어 갈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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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24
  • [소강석 칼럼] 대한민국의 심장은 무엇으로 뛰는가
    대한민국은 국정농단 사태로 인하여 집단 멘탈붕괴와 정치적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 급기야 대통령이 국민 앞에 머리 숙여 사죄하고 검찰조사까지 수용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분노와 여론은 들끓고 있다. 시민들이 광장으로 나오고 대학가는 대자보를 붙이면서 국가지도자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다. 눈에 보이는 외상보다 더 치명적인 정신적 내상을 입고 신음하고 있다. 그렇지만 분노와 적의, 상심의 시대를 바라보며 ‘과연 누구를 위한 대한민국인가. 무엇을 위한 분노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목회자와 의사는 공통분모가 있다. 의사는 의술로 몸이 아픈 환자를 치료하는 사람이고 목회자는 구도의 복음으로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의사가 수술대 위에 있는 환자를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냉철함이다. 만약 의사가 환자의 슬픔에 너무 감정이입이 되거나 통증에 함께 흥분하면 수술을 할 수 없다. 그래서 아무리 실력이 좋은 명의라도 가족은 수술을 할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분명 분노해야 한다. 광장으로 나오는 시민들과 대자보를 붙이며 분노하고 있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피투성이가 되어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환자를 바라보는 의사의 냉철함도 가져야 한다. 모두 다 분노만 하고 흥분만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냉철한 집단 지성으로 잘못된 것은 철저하게 심판하여 도려내고 새로운 원칙과 질서를 세워야 한다. 사법기관은 한 점의 의혹이나 티도 남김없이 명약관화하게 밝혀내어 다시는 사술이나 사교에 기승한 부정부패가 사회를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법집행의 엄중함을 보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도올 선생의 일침이 가슴을 쳤다. “우리 국민 모두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두 분노만 하지 말고 국민 모두의 책임과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대한민국이 부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 국민 모두가 먼저 공동체적 문제의식과 자성, 참회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곪은 환부를 도려내고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절대로 미봉책으로 끝내려고 하면 안 된다. 국민을 기망하거나 우롱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을 대수술한다는 심정으로 도려낼 것은 도려내고 꿰맬 것은 꿰매야 한다. 그리고 대통령 역시 사교에 빠지지는 않았다고 밝혔지만,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 고리를 과감하게 끊어야 한다. 민태원의 ‘청춘예찬’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청춘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라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겠는가? 이제 다시 대한민국의 심장에 희망의 피가 돌게 하고 맥박이 뛰게 하자. 몇 십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인도 다음으로 못사는 가난한 나라였지만 근대화를 이루어 세계 경제부국과 문화강국으로 우뚝 서지 않았는가. IMF의 위기 속에서도 우리 국민은 다시 일어서는 저력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지 않는가. 아무리 힘들어도 여기서 좌절해서 안 된다. 다시 냉철한 이성과 청춘의 희망으로 달려가야 한다. 지금은 진영이나 선악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국가의 안정이고 국민행복이다. 가장 어둠이 짙을 때 새벽이 밝아오는 것처럼, 지금의 위기야말로 이 땅 위에 바른 정의를 세워 위대한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다시, 대한민국의 심장을 뛰게 하고 싶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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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24
  • [성서연구] 큰 틀은 이미 정해졌습니다(사무엘상 22장 3-5절)
    사울 왕에게 쫓기던 다윗은 자신을 따르는 사백 여명의 사람들과 모압으로 망명을 시도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 이새와 형님들의 모든 가족들이 다윗에게 와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윗을 죽이지 못해 분노한 사울 왕이 베들레헴에 있는 다윗의 가족들을 해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억울한 사연이 있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다윗에게 합류하였습니다. 다윗이 모압으로 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첫 번째 이유는 이스라엘 영토 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머물 은신처를 찾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직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다윗에게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3절입니다. 그는 모압 왕에게 망명을 요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그는 자신이 왜 이토록 어려운 처지에 떨어졌는지 명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또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도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하실지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알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까지 머물게 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어떻게 인도하실지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어린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고, 그 때 분명히 다윗이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것, 즉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떻게 하실 것인지는 이미 알려진 상태였고, 다윗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큰 틀은 이미 정해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혼란스러워한 이유는 큰 틀은 정해졌지만, 왕이 되기까지 그 중간 시기에 어떤 과정을 밟아나가게 될 것인지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어떤 방법으로, 어디서, 언제쯤 왕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는 길이 이토록 험난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했고,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큰 틀은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다가 천국에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하신 큰 틀의 계획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도착하기까지의 구체적 과정은 하나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살게 될지,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누구와 결혼할지, 언제쯤 주님께 가게 될지....하나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합니다. 미리 다 알려주셨으면 하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구체적 과정을 알려주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신께 대한 절대적 신뢰를 요구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만 믿고 따라와라. 내가 알아서 인도해 줄 것이다. 너에게 필요한 것은 신뢰와 순종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불안해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가길 원합니다. 우리는 잘 될 것입니다. 반드시 주님을 위해 살다가 천국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저는 대한민국도 하나님의 은혜로 잘 될 줄 믿습니다. 작금의 혼란스러운 시국은 마치 다윗이 도망하던 때처럼 일시적인 혼란일 뿐이요, 반드시 아름다운 미래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침착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시국을 위해 기도하며 오늘 우리의 길을 담담히 가야 하겠습니다. 실패를 모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대한민국을 붙드시고, 아름다운 길로 인도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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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24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멀리하라
    이단은 얼핏보면 기독교 같아 보이지만 알고보면 이단은 기독교와는 전혀 달라 디도서 3장에 보면 “이단에 속한 사람을 멀리하라”고 했다. 요즘 이단들이 부쩍 설치는 것을 보면서 이단에 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이단이란 무엇인가? 사이비 기독교가 이단이다. 즉 기독교와 비슷하면서 실은 기독교가 아닌 것이 이단이다. 기독교와는 전혀 닮은 데가 없는 종교는 이단이 아니고 다른 종교이다. 얼핏 보기에 기독교와 방불하면서 실은 기독교가 아닌 것이 이단이다. 예를 들면 여호와의증인, 신천지, 몰몬교 등이고 이 외에도 기독교의 탈을 쓰고 내막인즉 기독교가 아닌 것이 이단이다. 다음, 이단은 언제부터 있어 왔는가? 이단은 구약시대부터 있었다. 교부시대에도 있었고 이단이 없었던 시대가 없었다. 그러나 이단이 오늘처럼 많았던 때는 없었다. 우리 한국에서만 해도 기독교의 탈을 쓴 이단이 64개라고 한지가 여러해 전이다. 가짜 예수가 25명이고 가짜 하나님이 3명이라 한지도 여러해 되었다. 다음, 사이비 기독교를 왜 이단이라고 하는가? 처음과 마지막 즉 양쪽 끝이 기독교와는 다르고 중간만 기독교와 비슷하기 때문이다.(끝이 다르다고 異端이라 한다.) 이단은 출처가 다르고 끝이 다르다. 출처는 사단으로부터이고 끝은 멸망이다. 그러면서 중간은 기독교와 비슷하다. 비슷한 이것 때문에 많은 이들이 미혹된다. 다음, 이단의 사명이 무엇인가? 이단의 사명은 구원이 아니고 사람을 멸망에 이르게 하고 기독교를 매장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누구를 상대로 포교하는지 보라. 기독교인만을 상대로 한다. 그들이 내 집에도 종종 와서 초인종을 누르기에 교패를 떼버렸더니 그후로는 일체 오지 않는다. 다음, 이단의 특성이 뭔가? (1)가만히 들어오는 것이다.(유다서 9) (2)이단은 성경 전체를 부인하지 않고 많은 부분을 시인하면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가서는 부인하거나 달리 해석한다. (3)이단에게는 성경 외에 다른 책이 있다. 여호와의증인에게는 ‘성서연구’가 있고 몰몬교에는 ‘몰몬경’이 있고 신천지에는 ‘영핵’이라는 책이 있다. 그들은 이것들을 성경처럼 혹은 성경보다 더 권위있게 본다. (4)이단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밖에 없는 구원의 종교라고 말한다. 따라서 자기들에게 와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취할 태도는 무엇인가? (1)그들과 변론하지 말고 (2)그들을 가까이하지도 말아야 한다.(디도서 3:10, 요한2서 10) 사도요한은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하지도 말라”고 했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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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24
  • [시사칼럼] 어두움 후에 빛이 있으라
    <판도라(Pandora)>라는 한국 영화가 연말 개봉을 앞두고 ‘국내 최초 원전(原電) 재난 블록버스터’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홍보 중입니다. 예상 밖의 지진을 겪으면서 특히 진앙(震央)과 멀지 않은 지역에 밀집된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관심과 우려가 어느 때보다 급증했던 터라, 영화사 나름대로는 잠재 관객들을 자극하기에 가장 효율적인 전략을 찾은 듯합니다. 천문학적인 자금이 투입된 대작이라고 하니 영화는 개봉되어야 하겠지만, 누구나 실제로 원전(原電)을 담고 있는 지역의 판도라의 상자만은 열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성 이름입니다. 인간을 위해 불을 훔쳤던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에 대한 응징으로 제우스(Zeus)는 선물과 함께 판도라를 지상으로 보냅니다. 그것이 바로 ‘판도라의 상자’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Epimetheus)는 형의 경고를 무시하고 판도라와 결혼했고,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판도라는 결국 열지 말라는 금령(禁令)을 어기고 상자를 열어버리고 말았는데, 그 속에 들어있던 질병, 가난, 증오, 전쟁과 같은 것들이 튀어나와 인간 세상에 만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깜짝 놀란 판도라는 급하게 상자를 닫았는데, 그 바람에 무언가 하나가 갇혀서 미처 나오지 못했고, 신화는 그것을 <희망>이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수천 년 전 만들어진 그것도 신화(神話) 속 이야기 비슷한 일들이 지금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판도라의 상자 같은 것이 열리고 그 속에 있던 무언가가 한꺼번에 튀어나와 세상을 가득채운 느낌입니다. 가난과 고통과 질병과 전쟁이 인류 사회에 등장하자마자 마치 오래 전부터 익숙했던 일인 마냥 일상과 역사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처럼, 범인(凡人)들은 한 번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름들이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연인 마냥 입을 타고 전파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계층을 초월해 회자(膾炙)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암묵적인 동맹 혹은 침묵의 카르텔이 존재하기라도 했던 걸까요? 지식격차(knowledge gap)가 참여격차(participation gap)로 이어질 수 있다는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의 지적이 새삼 서글프게 살갑습니다. 하지만 더욱 두려운 것은, 아직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판도라 상자가 이 사회 어딘가에 깊이 감추어져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구심입니다. 기밀의 정도와 보안의 강도는 정비례한다는 상식을 염두에 둘 때, 이번에 열린 상자로 인한 충격만 해도 지진으로 인한 내외상증후군쯤은 비교도 되지 않음을 익히 경험했는데, 만에 하나 존재할지도 모르는 또 하나의 상자가 정말로 개봉된다면 우리는 미증유의 당혹감과 대혼란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송곳은 겹겹이 싸도 튀어나오기 마련이고, 아무리 가려도 빛은 새어나오기 마련입니다. 만일 이 시대 판도라의 상자에 감추어진 것이 진리(眞理)라면, 아무리 꼭꼭 감싸고 은폐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튀어나오고 새어나오기 마련입니다.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됩니다. 제네바 대학 곁 공원에 새겨진 네 사람의 종교개혁자들(칼빈, 파렐, 베자, 녹스) 부조(浮彫) 위에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post tenebras lux> 그렇습니다. 문자 그대로 어두움 후에는 빛이 있습니다. 아니,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어둠이라는 말 자체가 빛의 부재가 아니었던가요?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진리를 현대판 판도라의 상자 속에 가두어 두고 있는 시대와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진리를 수호해야 할 진리의 사도들이 시류와 대세에 편승하고 영합하여 스스로 어둠의 시종들로 전락하는 그런 시대와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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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0
  • [목회자 칼럼] 금이 어찌 은을 받을 때냐? (1)
    주전 700년 경, 이스라엘에 <엘리사>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나라의 형편은 참으로 딱하였다. 악명 높은 아합-여호람-아하시야 왕은 3대에 걸쳐서 지독한 악정(惡政)을 펼치고 있었다. 그 악정의 내용은 ① 바알과 아세라 우상종교를 이스라엘 땅에 확산시킨 것, ② 통치권을 활용하여 재물을 착취하는 것, ③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과 위협 앞에 치밀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것, … 대략 이 세 가지였다. 그러니 백성들의 삶은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나라의 앞날이 불투명하고 곳곳에서 백성들의 탄식과 절규가 멈추지를 않았다. 앞의 ①~③ 세 가지를 척결하고 철저히 대비하여 백성들이 맑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나라를 가꾸고 세워나가라고 세워진 것이 왕도(王道)이거늘, 군왕(君王)들은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데에 <주어진 권력과 힘>을 남용하고 악용하였다. 그것도 3대(代)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땅 위에 그리고 역사 속에 <이스라엘Israel>을 세우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계명을 따라 살아갈 때 인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하게 되는가」를 온 세상에 보여주라고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뽑아 세우셨다.(신명기 7:5~11; 마 5:13~16)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부르심의 위대한 <의미>를 망각하고 있다. 온 백성을 대표하는 통치자인 왕이 그 의미를 망각한 채 방종과 타락의 길을 걷고 있으니 백성들의 모습 굳이 더 말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너는 나 외에는 결코 다른 신(神)을 두지 말라 /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그것들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십계명 중에서 1~2계명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시금석(試金石)이다. 이것을 안 지키면 <이스라엘 백성된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백성된 자가 우상(허망한 것·헛된 것·전혀 무의미한 것, 고전 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을 숭배하고 우상에게 매이면 그의 인간성 즉 감정, 이성, 의지가 어두워져서 분별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것은 악한 영(靈)의 지배 아래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인격을 닮은 고상하고 아름다운 인간이 유치하고 허망한 우상을 숭배하면, 인간은 사탄의 영향 아래로 전락하게 된다. 그 결과 인간은 만물 중에서 가장 거짓되고 부패한 자리로 떨어지면서 감정과 이성(異性)이 타락하고 마비된다.(롬 1:18~32; 렘 17:9) 주전 700년 경, 아합과 여호람 그리고 아하시야에 이르는 3대(代)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재임(在任)하면서 이스라엘의 국력과 도덕성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신앙심은 총체적으로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이스라엘의 상황, 이스라엘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은 절체절명의 난국(難局)이었다. 이스라엘(북Israel왕국) 전역에는 곳곳에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세워져 있었다. 저급하기 짝이 없는 저들 우상의 제사장들이 통치자의 권력을 등에 업고 백성들을 미신과 맹신으로 이끌고 있었다. 통치권자인 왕은 백성의 안위(安慰)와 행복을 도모하는 주된 임무에는 철저히 무관심하고 눈을 돌리면서 폭정과 일탈(逸脫)에 여념이 없었다. 주변 강대국들(아람, 이집트, 암몬, 모압)은 수시로 국경을 침범하거나 기습 침략을 자행해오고 있었다. 그러니 사방 어디를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였다. 그나마 백성들이 기댈 곳은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 <선지자>들인에 저 폭군들은 이미 선지자들을 많이 죽였다. 당시의 이 상황을 열왕기상 19:14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엘리야 선지자)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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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0
  • [성경인물탐구] 그리스도를 위해 생업을 포기한 요한
    요한은 배에서 그물을 깁다가 예수님의 눈에 띄어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이제 막 고기잡이를 끝내고 다음 번 고기잡이를 위해 찢어진 그물을 깁고, 또 고기잡이 장비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고기잡이를 마치고 몹시 피곤했겠지만 요한은 내일을 준비하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여 가정을 돕는 자였습니다. 바로 이런 요한이 주님의 눈에 띈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는 자, 그리고 생업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애쓰는 자, 이런 자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요한은 그 부친 세베대와 그물을 깁는 도중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저자 마태가 굳이 요한이 부친과 더불어 일했다고 언급하는 것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즉 요한이 주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열심히 가정을 보살피며 그 부친에 효성을 다했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공생애 전에는 열심히 가정을 보살피며 아버지 요셉의 목수 일을 도왔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가정을 보살피며 그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는 자야말로 정녕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에 합당합니다. 부모에게 불효하고, 가정에 성실치 못한 자가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잘 섬길 리가 없는 것입니다. (엡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요한은 주님의 부름을 받기 전, 야고보와 더불어 부친의 가업을 도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요한이 부친에게도 효도를 다했지만, 형제 야고보와도 매우 우애가 돈독한 자였음을 암시해 줍니다. 그리고 그는 훗날 주님의 제자로서 활동할 때도 끝까지 형제 야고보와 더불어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형제와도 화목하지 못한 자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도 영적 형제자매와 화목할 수 없는 법입니다. 이런 사실을 익히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요한이 형제와 더불어 우애가 돈돈한 것을 훌륭한 장점으로 보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제자가 되고, 또 영적 형제, 자매를 사랑하려면 먼저 육신의 친형제들과도 화목하며 화평함이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요한은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고서는 배를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이는 곧 요한이 자신의 생업을 완전하게 버려두었음을 보여 줍니다.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과거의 생업을 완전히 버리고 포기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의 제자가 되는 데 있어 자신의 생업이 걸림돌이 된다면,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면 때로는 이렇게 완전하게 생업을 버리고 포기할 줄 아는 결단력도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 주님은 그보다 더 훌륭한 생업을 허락해 주십니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생업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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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0
  • [교회법률상식] 제101회 총회 직할 재판의 흠결 (1)
    ■직전 총회장이 임원 선거 하지 않고 직할 재판함은 범죄 행위 ■직할 재판 인정한다 해도 재판회 구성과 판결문은 엉터리 합동 제100회 총회장이 제101회 총회가 개회됨을 선언한 직후에 기독교 100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최대 불법 사건으로 총회장직의 직권을 남용하여 스스로 총회 직할 재판의 재판회장이 되어서 목사 5명에게 목사 면직, 본 교단 목사 제명, 영구 출교, 당회로 하여금 원로목사 취소, 소속 노회 명부에서 제명, 본 교단에서 출교 처결, 총대권 5년 정지 처결, 공직 정지 1년 처결 등의 판결을 하여 제100회 총회장이 제101회 총회장 노릇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월권을 행사하여 제101회 총회의 후속 조치가 어수선하게 되었다. 1. 직전 총회장의 직권 남용 및 월권 행위에 대하여 직전 총회장인 제100회 총회장이 “제101회 총회가 개회됨을 선언합니다.”라고 개회 선언을 했으면 제101회 총회장 노릇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 오직 임원을 선거하여 신구 임원 교체와 신임 총회장 취임 예식(정문 617문)에 관한 사회권만 행사하는 것이 교회 헌법이 정한 법리이다. 이에 대하여 정문 제456문에 “누가 총회를 개회 하느냐?”의 답으로 “전회장의 설교로 개회하고 신회장이 선임되어 교체될 때까지 사회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제100회 총회장은 제101회 총회가 개회됨을 선언하자마자 당연한 순서인 임원 선거는 제쳐 놓고 제100회 총회가 결의하여 위탁하지도 아니한 “총회 결의 시행 방해 조사 처리 위원회”라는 유령 위원회를 등장시켜 총회를 재판회로 변경하고 총회장의 직권을 남용하여 재판회장의 자리에 앉는 등 철면피한 월권을 행사하였다. 이와 같은 직전 총회장의 극단적 행패에 대하여 증경 총회장 중 한 분이 불법이라는 지적과 함께 자제를 촉구하였으나 막무가내로 권징조례에 맞지도 아니한 엉터리 재판을 진행하여 권징조례에 명시도 되지 않은 엉터리 책벌을 행하는 범죄 행위를 계속하였다. 2. 총회 직할 재판의 법리적 절차에 대하여 총회 직할 재판의 성립 요건은 신임 총회장이 취임(정문 617문)한 후 하회에서 올라온 안건을 처리하면서 헌의부 보고 시에 상소 건이나 소원 건 중에 재판국으로 보내지 아니하고 본회가 직접 재판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건이 있으면 총회가 직할 재판으로 하기로 결의하면 그 사건만 총회 직할 재판 건으로 성립된다. 그런데 제100회 총회장이 불법으로 목사 5명을 판결한 것은 상소나 소원 건이 아니요, 총회에서는 할 수 없고 노회에서만 할 수 있는 목사의 원심 재판(권징조례 제19조)을 총회가 직접 하였다. 그 증거는 판결문의 책벌 내용이 상소 건이나 소원 건의 판결문이 아니고 원심 재판의 판결문인 것으로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다. 혹 노회가 그 목사들을 재판하기 어려워 총회에 위탁판결을 청원을 했다고 변명을 하거나, 가정할지라도 ? 직전 회장이 할 수는 없고 반드시 신임 총회장이 해야 함은 물론이요 ? 목사가 5명인데 5개 노회가 다 같이 위탁판결 청원을 한 흔적이 없고 ? 제100회 총회가 권징 제19조에 근거하여 5명의 목사를 지명하여 해 노회에 책벌하고 보고하도록 결의한 회록도 없기 때문에 위탁 판결 운운하는 변명은 할 수도 없다. 3. 제101회 총대들의 자세에 대하여 그런데 증경 총회장 수십 명이 있었고 총대 1500여명이 총회 회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직전 총회장의 불법 횡포를 막아내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는 연유에 관하여는 백 번을 생각해 보아도 필자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본 사건이 엄청난 불법이라는 것을 증경 총회장들 중에 딱 한 분만 알고 있었고, 다른 분들 모두가 모르고 있을 리는 만무하다. 또한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두 다 보고만 있었다면 총회는 무엇 하러 참석하였는가? 총회의 원로들로서 총회가 진흙탕이 되는 것을 강 건너 불 보듯 보고만 있어서야 되겠는가? 뿐만 아니라 1500여명 총대들은 총회 현장이 난장판이 되어 불법 재판이 진행되는 총회 석상에서 함께 재판관이 된 자들로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묻고 싶다. 어찌 제101회 총회의 회원들이 임원 선거도 하지 아니하고 자격 없는 제100회 총회장이 제101회 총회장 노릇을 하면서 총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데도 그대로 앉아서 보고만 있으면서 과연 총회의 회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제101회 총회 직할 재판은 제100회 총회장이 해서는 절대로 안 되고 제101회 총회의 총회장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에 속한 일이 아닌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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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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