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11(수)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성서연구] 종교보다 신앙!(눅 24:13-35)
    본문은 종교와 신앙의 차이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종교적 사고, 종교적 대화, 종교적 관행들에 익숙하지만, 신앙적 사고, 신앙적 대화, 신앙적 삶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 서북쪽 12킬로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슬픈 빛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들이 슬퍼하는 이유는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나사렛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있던 기대가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이라고 믿었는데, 모든 것이 허사가 된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들의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슬퍼하였습니다. 대화의 주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충만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우선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슬퍼하고, 그분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끝나실 분이 아니며, 부활하실 분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원하신 예수님을 시간적 한계 속에 묶어 두려 했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슬퍼했지만, 정작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 때문에 그들은 바로 자신들 곁에 예수님께서 동행하고 계셨지만, 눈이 가려져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종교와 신앙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종교는 예수님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삽니다. 종교는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님을 느낍니다. 종교는 예수님을 이론화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님을 삶 속에서 맛봅니다. 종교는 예수님을 부지런히 찾지만 공허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님이 곁에 계심을 알고 기뻐합니다. 종교적 교인은 <좋은 예배>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를 헤맵니다. ‘그 교회에는 주님이 계시다, 안 계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던 그 교회에도 주님은 계십니다. 또 훌륭한 설교자, 웅장한 악기 연주, 잘 조화된 찬양이 있을 때, ‘영광의 주님이 임재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조건에 따라 임하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는 분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르겐 하나 변변히 없고, 찬양대도 없는 시골 교회에는 주님이 안 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설교자, 찬양대, 악기 등의 조건과 관계없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종교는 그런 조건을 채우려고 애쓰기 때문에 피곤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 주님이 이미 함께 계신 줄 믿기 때문에 힘이 있습니다. 주님은 빈들에서 잠든 야곱과도 함께 계셨고,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 곁에도 계셨습니다.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고 주님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지금, 그리고 영원히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16-03-24
  • [서임중 칼럼] 부활신앙은 삶으로 연주된다.
    이세돌 천재바둑기사와 알파고의 세기의 바둑대결이 온 세상을 전율케 했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에 대한 기대와 우려는 이미 예견된 것이지만 그것은 지금 우리의 삶의 중심부에서 이미 전개되고 있다. 필자는 5국을 지켜보면서 21세기 바벨탑을 생각했다. 무엇이든 만들어진 것과 만든 존재가 있다. 인간은 만들어진 존재이고 하나님은 만든 창조주이시다. 만들어진 AI가 만든 인간을 앞서는 듯한 현상을 보면서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도전을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면서 딱 부러지게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이 젖어든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에는 하나님이 존재케 하셨고, 하나님이 정돈케 하셨고, 하나님이 번성케 하신다는 근본이치가 있다. 그 이치는 결코 무너질 수 없는 것인데, 인간은 끊임없이 그 창조의 이치를 무너뜨려보려고 한다. 구글 딥마인드(DeepMind)가 개발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의 제작팀의 ‘하사비스’는 1승 이후에 한 말이 “달나라에 갔다”고 한 말이 가슴에 남아있다. 그런데 필자는 꼭 하고 싶은 말이 하나있다. 온 우주에 다 이르러도 태양에 갈 수 있는 경우는 없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나 이해하리라. 세월이 유수(流水)와 같다는 말을 한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 보다 더 자연스러운 이치가 없다. 막을 수도 없고 비켜갈 수도 없다. 그렇게 흐르고 난 시간을 역사(歷史)라 한다. 그래서 역사를 거스를 그 무엇도 하나님은 인간세계에 허락하시지를 않았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시간표에 의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수(流水)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를 거울로 보는 혜안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막으면 돌아가고, 끊임없이 낮은 곳을 지향하고, 막으면 그냥 멈추어 더 막을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리고 흐르면서, 구름과도 이야기하고 낙엽과도 대화를 한다. 그렇게 계속 흘러 흘러간다.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이르는 곳마다 생명을 준다. 마른 땅을 적시면서 온갖 잡다한 찌꺼기조차 덮어버리고 메말라 건조한 곳을 소리 없이 적셔 먼지조차도 잠재우는 신비한 힘을 갖고 흐른다. 그것이 창조섭리의 순리(順理)다. 그렇다고 물은 그렇게 순리(順理)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오만함을 꾸짖듯 홍수로 임하기도 하고, 순리를 거스르는 인간의 역리(逆理)를 매질하듯 때로는 쓰나미(tsunami)같이 노도(怒濤)로 경계한다. 그것은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다. 자연의 섭리도 그렇지만 영적 세계는 더욱 그 섭리가 경이(驚異)롭다.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순응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인데, 첫 번째 아담은 그 근본의 순리를 저버리고 역리를 취했다. 그리고 어둠의 권세를 따르고 빛의 자녀로서의 옷을 벗어버렸다. 거기서부터 불법(不法), 불의(不義), 불선(不善), 불신(不信)으로 인하여 죄(罪)를 짓고 생명에서 사망으로 방향설정이 틀어진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대속의 은총을 인간에게 베푸시고 본래 인간의 모습을 회복함으로 창조의 섭리에 순응하게 하셨다. 그것이 교회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순리의 역사가 아닌 역리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마치 소돔과 고모라 때처럼 현실에 동화되어 진정한 역사의 순리를 역행한다. 그 역행의 공통점이 아이러니 하다. 모두가 나는 의롭고 나는 거룩하고 나는 어제의 사람이 아닌 오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제의 사람은 미워하고 기쁨이 없고 분쟁하고 참지 못하고 증오하고 정죄하고 불충하고 사납고 오만함의 옷을 입고 있다. 오늘의 사람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옷을 입고 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다. 바로 오늘의 사람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란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다.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란 그 삶을 통하여 갈라디아 5:22~23절 말씀이 자연스럽게 연주되는 사람을 말한다. 그것이 부활신앙이다. 그런데 하나같이 나는 오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삶의 내용은 어김없이 어제의 사람으로 언행을 일삼으니 아이러니 한 것이다. 잠깐 멈추고 돌아보면 역리의 삶을 살면서 순리라고 하는 그것이 곧 어제의 사람인 것이다. 순리를 행하는 오늘의 사람은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라는 십자가 복음의 삶이 연주된다. 역리의 어제의 사람은 복음의 삶이 아닌 것은 카오스 현상의 어둠의 권세가 지배하면서 분쟁과 분열과 시기와 쟁투로 공멸에 이르게 되는 삶을 연주한다. 올해도 온 누리에 어김없이 부활의 은총으로 충만함을 찬송하고, 축하하고, 기뻐한다. 그리스도인의 부활 신앙이란 값싼 언어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든, 교회이든, 연합회이든 부활절 행사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진정한 부활신앙이란 삶이어야 한다. 부활신앙의 삶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용서와 사랑의 말씀으로 귀결된다. 그 용서와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전부다. 그것이 부활신앙인의 복음의 삶이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16-03-24
  • [중독칼럼] 스마트폰 시대, 중독문화로부터 어떻게 내 자녀들 지킬 것인가?
    [상황1] 벗어 날 수 없는 스마트 문화초등학교 졸업생 80명 중 장래 희망이 프로게이머가 꿈인 학생이 10명이 넘었다.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놀지 않고 삼삼오오 둘러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내 자녀가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다면, 또한 능력이 된다면 아빠는 목사이지만 시킬 마음이 있다. 그러나 성공적인 직업으로 추천 할 수 있을 것인가? 해마다 스마트폰 중독으로 늘어나는 학생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최근 해마다 약 2%이상씩 증가세를 보이고 있단다. 스마트폰이 1992년 IBM사가 설계되고 안드로이드가 2007년부터 보급된 지 약 9년 만에 이러한 결과를 낳고 있다.스마트폰을 안 줄 수도 없는 사회구조, 상황은 우리 자녀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은 이러한 문화가 쓰나미와 같이 몰려온 중독 문화로 정의 내리고 있고, 중독 문화는 우리 자녀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스마트폰 문화는 게임, SNS, ... 기타등등 우리 삶에 여러 가지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자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녀들의 교육이전에 부모 교육이 시급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여러 가지 중독문화를 야기시키고 있고 중독되지 않으면 소이 대박나지 않는 상업적 구조로 되어 있다. 앞으로 계속해서 상황2, 상황3 등의 예로 독자들에게 인식 시켜 갈 것이다. 세상을 보는 중독문화(죄문화)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을 때 각각의 성도들도 대처 능력이 생겨나리라 본다. 에베소서 2장2절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조언1] 하나님이 주신 공동체, 가정을 사수하라.본인은 중독문화를 죄문화로 정의 내리곤 한다. 어떤 한 가지에 중독되어 있을 때 나타나는 공동체, 예를 들어, 가족에 미치는 악영향은 여러 가지가 있다. 특별히 갈등의 문제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가족 구성원들의 희생을 요구하면서 정작 본인은 희생하지 않는 개인주의는 참으로 위험하다.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을 만큼 쓰나미처럼 안방 깊숙이 들어와 있는 스마트 문화는 현실에 있어서 중독 문제로 야기시키고 있지만 현실적 대안이 없다. 하지마라. 주지마라. 과연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또한 이러한 문제를 교회 교역자나 교사에게 위임하지 말라. 부모가 먼저 문제점을 인식해야 내 아이를 지킬 수 있다.첫째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회복해야한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이야기 하겠지만 본인은 다섯 아이의 아버지로써 현실적 조언을 한다. 그 중에 감사한 것은 목사이기에 예수님 외에는 내 아이를 지킬 다른 방도를 찾지 못했다.둘째는 가정의 영적질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 부부가 서로 자녀 교육의 의견 차이를 나타내면 자녀들은 더욱 심각해지고, 중독되기 싶다. 부부 서로가 가정의 영적 질서를 세우고 자녀들 앞에서 스마트폰으로 인한 갈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 또한 가정의 머리인 남편을 영적 아비로 세워야 할 것이다.셋째는 일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책임감 있는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부모가 되라. 예배를 우선시 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맡은 본분을 충실히 하며 자신의 여가를 즐기는 아비와 어미가 되라. 그리고 이것을 보여 주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3-24
  • [은혜의 말씀] 말고와 분별(롬 12장 1 ~ 2절)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는 교리로써 복음의 이론을 다루고 있다면 12장부터는 그 이론과 교리에 입각해서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덮어 놓고 하지 말고 성경책을 펼쳐 놓고 해라’ 이런 말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내 마음과 기분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매뉴얼, 인생설명서인 성경책에 적혀 있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론과 실제, 신행,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연결 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믿음을 나눈 그들을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고 있기에 형제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믿음을 가진 그들을 마음으로 진정 사랑하기에 권면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사랑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대상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런 우리가 마귀의 편에 속함으로써 죄가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죄로 죽을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 하셨습니다. 죽어야 할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몸과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죄짓는 죄의 병기로 쓰지 말고 의의 도구로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머무는 전인 우리의 몸을 언제나 깨끗함과 거룩함으로 단장해야 합니다. 기대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를 회복하고 예배에 집중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공로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선하신 뜻을 좇아 충성됨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십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생각과 함께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우리의 삶이 예배로 하나님 기뻐 받으시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이 세대가 가지고 있는 유행이나 트렌드 그리고 세속적인 것들을 좇아서는 안 됩니다. 변화 무쌍한 유행이나 트렌드를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 위해 굳건히 바로 서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세대의 풍조와 악하고 음란하고 패역한 시대의 조류에 휩쓸려서는 안 됩니다. 바쁘고 스트레스 많은 일상 가운데 우리의 마음은 강팍하거나 굳어지기가 쉽습니다. 마음의 동맥경화가 일어나고 고집불통인 마음이 굳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가 없게 됩니다. 마음의 근본부터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지금은 넘쳐 나는 정보와 새로운 사조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고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입니다. 무엇을 받아 들여야 하고 버려야 하는지 그 어느 때 보다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사단은 거짓 것을 화려하고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할 수만 있다면 믿는 자들도 미혹하려고 온갖 수를 다 짜내고 있습니다. 분별하기 위해선 변치 않는 기준과 척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기준과 척도가 되어 줍니다. 말씀을 알아야 분별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속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바른 선택은 무엇인지 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분별력과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줍니다. 기도와 말씀 가운데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분별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 기뻐 받으실 만한 삶으로 예배드리시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16-03-24
  • [성공칼럼] 깨끗한 그릇 만들기
    성경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등등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도, 복음을 믿을 수도, 성령세례를 받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회개는 씻는 것이며, 그릇을 깨끗하게 씻는 것이다. 그릇 속에 오물 덩어리가 있는 채로는 그 어떤 좋은 음식을 담을 수 없다. 이처럼 내가 깨끗하지 않고는 천국을 담을 수 없는 것이다. 또 회개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해야 하는 것이다. 내 양심이 일상생활 속에서 겪는 일들이 거짓과 악이라는 생각이 들면 거절해야하고, 옳고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옳다고 여기는 선한 행동을 해야 한다.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때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천국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천국은 주의 나라이며, 사랑의 나라, 진리의 나라, 빛의 나라, 선의 나라, 자유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일상 속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악을 멀리하고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모습을 나타내어야 한다. 이런 일상적인 것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예수를 믿고 천국을 바라는 것은 허황된 꿈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자신의 잘못한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자백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한다. 그런 후에 다시는 그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확인되었을 때 완성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종종 음주운전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술기운에 으스대면서 취하지 않았다고 큰소리치면서 운전을 한다. 어느 날도 음주 상태에서 운전을 하다 그만 경찰에게 걸렸다. 이 때 이 운전자는 그동안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경찰에게 잘못을 빌고 다시는 음주 운전하지 않겠다고 울면서 한번만 봐달라고 한다. 이것은 회개가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을 인식하고 있으나 책임을 지려는 태도가 없으며 다음에 술 마신 후에 음주운전을 하지 않아야 그 때 회개가 완성되는 것이다. 회개란 마음을 넘어서 의지까지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밝고 따뜻한 말과 행동을 보여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없는데서 누군가가 내 잘못을 근거로 험담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런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에 불이 나고 두려움과 분노와 미움이 생길 것이다. 이런 상태가 되면 순간 내 마음이 어두워지며 악한 기운이 가득차서 가슴도 답답해지고 몸도 긴장하게 된다. 이런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해 질문을 해 보려고 한다. “내가 없는데서 내 험담을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인가?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 물음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라고 생각할 때 분노와 미움이 사라지게 된다. 그 후에 “내 험담을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는 그 사람과 만나서 “내 험담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당신의 행동을 통해서 내 모습을 깨닫고 고치게 되었습니다. 아프기도 하지만 고맙네요.”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잘못한 상황에서 마음도 깨끗해지고 행동도 선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되어서 진정한 회개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회개에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던 세례요한도 회개를 선포하면서 “속으로 우리 조상이 아브라함이라고 말하지 말라.”라고 했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주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주셨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다.” 등을 자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주라는 것이다. 즉 옷 두벌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세리들은 정한 세외에는 받지 말고, 군인은 힘으로 강탈하지 말고 지금 받는 월급을 족한 줄 알고 살라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나기 전,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보여줘야 할 회개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밝고 선한 행동을 할 때 내 그릇은 더 깨끗해지고 더 큰 사랑의 세계, 빛과 자유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3-24
  • [교회법률상식] 만 70세 전 원로목사 총회 총대, 운영이사장 될 수 있다(1)
    모 인터넷 신문(2016.2.10. 입력)에 “정년 전 은퇴한 원로목사의 노회 회원권의 한계”라는 제목의 기사 내용 중 헌법에 상충되는 위헌적 기사를 보았다. 그런데 그 기사는 교회 헌법을 뿌리 채 흔들어 놓는 아연실색할만한 내용이기에 부득불 이 글을 쓸 수밖에 없음을 먼저 밝혀 둔다. 논점이 될 만한 기사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만 70세 전에 은퇴하여 원로목사 된 자는 노회 회원권이 주어진다는 교단 헌법에 근거하여 총회 총대나 운영이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운영이사장 직무 대행은 법적으로 그 신분이 유지되므로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회 회원이면서 조직교회 위임목사가 아니라 미조직교회 임시목사라는 이유로 총회 총대가 될 수 없다는 총회 결의(제87회)가 있다. 정년 전 은퇴한 원로목사는 노회 회원권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총회 총대가 될 수 있으므로 운영이사장 직무대행을 맡을 수 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그리고 조직교회 위임목사직을 사임하고 은퇴한 원로목사는 운영이사회 이사로 파송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운영이사회 규칙 제4조에 운영이사회 구성요건에 21당회 이상의 노회에서 파송한 이사로 구성한다. 원로목사는 운영이사로 파송할 수 없으며 이사 자격이 상실된다. 이같은 법리에 따라 당회가 구성된 위임목사가 아니면 운영이사회 이사가 될 수 없으며 위임목사직을 사임한 목사가 단지 정년 이전의 은퇴자로 노회회원권이 주어져 있다 하더라도 운영이사 자격이 상실되므로 운영이사장 직무대행을 맡을 수 없다. 이사장이 아닌 이사장 직무대행을 맡을 수 있는 자격이 유지되지 못하므로 ‘현행 송춘현 목사가 운영이사회 소집권을 갖고 있으며 송춘현 목사가 소집하지 않는 운영이사회의 소집은 위법이다’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이 해석은 총회의 몫이다.”라는 대목이다. 이상의 기사에서 송춘현 목사가 운영이사장 직무대행을 맡을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옳지 않다”함이나 “설득력이 없다”함이나 “이 해석은 총회의 몫이다.”라는 주장은 교단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정당한 법리에 대하여 교단헌법에 상충된 반론을 제기하는 역풍에 다름 아니다. 1. 이사장 직무대행을 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만 70세 전의 원로목사는 교단 헌법에 근거하여 총회 총대나 운영이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운영이사장 직무대행은 법적으로 그 신분이 유지되므로 할 수 있다.”는 주장은 흠잡을 것이 전혀 없는 지극히 합법적이고 정당한 법리이다. 또한 만 70세 전 원로목사인 “송춘현 목사가 운영이사회 소집권을 갖고 있으며 송춘현 목사가 소집하지 않는 운영이사회의 소집은 위법이다.”라는 주장 역시 교단 헌법이 보장한 지극히 합당한 법리이다. 그 이유는 교단 헌법 정치 제10장(노회) 제3조(회원 자격)에 “각 지교회 시무 목사와 정년 이전의 원로목사와 총회나 노회가 파송한 기관 사무를 위임한 목사는 회원권을 구비하고, 그 밖에 목사는 언권회원이 되며 총대권은 없다.”라고 규정하였고 본 조항은 노회의 회원 자격 규정으로 “정회원”(회원권을 구비 하고)과 “언권회원”으로 구별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① 언권회원은 “그 밖에 목사는 언권 회원이 되며 총대권은 없다.”라는 문장에서 “그 밖에 목사”란 무임목사, 전도목사, 정년 후 원로목사, 은퇴목사를 의미하며(정치 제4장 제4조 참조) “총대권은 없다”란 총회총대 피선거권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총대권은 없다.”라는 필요치 않는 문장을 덧붙인 것은 개정되기 전의 옛 헌법이 노회에서 장로 총대가 아닐지라도 투표만 받으면 총회총대가 될 수 있었던 것과 무임목사도 위원회에서는 피선거권이 있었던 것을 삭제개정하면서 강조한 문장이고 언권 회원은 정회원 그 밖에 목사이므로 선거권, 피선거권, 결의권, 총회 총대권이 없는 노회 회원이다. ② 정회원은 지교회 시무 목사인 위임 목사, 임시목사, 부목사 와 정년 이전의 원로목사, 기관 목사로서 선거권, 피선거권, 결의권, 총회 총대권을 구비한 노회 회원이다. 따라서 언권회원이 아니고 정회원(회원권을 구비한)에 속한 정년 이전의 원로 목사는 노회와 총회가 투표만 해주면 총회총대, 운영이사, 운영이사로서의 운영이사장 또는 운영이사장 직무대행이 되는 것은 헌법이 규정한바 정당한 권리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3-24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예수 부활의 역사성
    그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기에 부인하기가 시인하기 보다 어려워 예수의 부활은 신화가 아니다. 전설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다. 뜬소문은 더욱 아니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실제로 죽으신지 삼일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셨다. 이 사실은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한둘이 아니다. 첫째, 무덤의 문이 열렸고 예수의 시신이 없어졌다. 예수의 시신을 그를 죽인 자들이 훔쳐갔을 리가 없고 예수의 제자들은 파수꾼들 때문에 무덤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은 그가 부활하셨기 때문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다음, 천사들이 증언하기를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셨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랬다. 다음,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제자들에게도 11번 나타나셨다. 한번은 500여 형제에게 나타나셨다. (고전 15:6) 거기 보면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있다”는 말을 했다. 무슨 뜻인가. 내가 하는 말이 안 믿어지거든 그들에게 물어보라는 뜻이다. 다음,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같이 예수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을 전하다가 그의 순교한 것을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확실하다. 그들은 예수께서 잡히실 때에 자취를 감춘 자들 아닌가. 그랬던 그들이 목숨을 걸고 부활하신 예수를 증거한 것을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확실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다음,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어 평생토록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다가 순교한 사실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박멸하려던 자아닌가. 그는 자기가 직접 부활하신 예수를 뵙지 않았으면 절대로 남의 말만 듣고 변할 사람이 아니었다. 사울의 변화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라고 아니할 수 없다. 다음, 예수의 교회가 그의 부활의 증거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았으면 그의 제자들이 재기하지 못했을 것이고 교회가 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교회가 서고 교회가 온 세상에 확장된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알고보면 예수의 부활은 부인하기가 시인하기보다 어렵다. 믿기는 쉬우나 부인하려면 부인할 길이 없다. 저명한 학자 프랭크 모리슨을 보라. 그는 예수의 부활을 반박하기 위해 반증자료를 수집하여 연구하다가 되려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되지 않았는가. 그가 펴낸 책 제목이 ‘돌을 누가 옮겼는가’ 이다. 우리가 명심해야할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고로 믿는 우리도 부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알고보면 그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3-24
  • [목회자칼럼] 우리 안에 숨어있는 5가지 적(敵)
    세계 제2차 대전이 절정에 이르고 있을 때 미국 국민들은 전쟁 피로감에 빠져 들고 있었다. 연합국 쪽에 필요한 엄청난 전쟁물자 보급을 미국이 거의 도맡다시피 해야 했으니 그럴 법도 하였으리라. 전쟁을 일으킨 주축국들인 독일, 이태리, 일본은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전쟁 준비를 하였다. 그러므로 몇 년간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물자를 충분히 비축해 두었다. 히틀러는 기습공격과 속전속결 전법으로 순식간에 프랑스, 폴란드, 러시아 서부지역 등 서유럽과 동유럽을 전격적으로 점령하였다. 가공할 힘을 가진 나치 독일군대를 그런대로 대항할 수 있는 나라는 영국 뿐이었다. 그러나 영국역시 <전시 국민총동원령>을 내려 유럽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영웅적으로 나치 독일과 싸우느라고 온 나라가 극도의 피로감으로 빠져 들어갔다. 미국과 영국 국민들의 마음에는 차츰 불길한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이러다가 전 유럽이 저 무지막지한 괴물 히틀러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 연합국이 패배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불길한 생각도 무리가 아니었다. 치밀하게 준비하여 사생결단식으로 싸우는 독일, 이태리, 일본에 비하여 여타 유럽 국가들과 미국 국민들은 난데없는 뜻밖의 침략을 당하였으므로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하고 안락하고 평화롭던 일상의 삶은 산산조각 파괴되고 불안과 공포가 쌓여가면서 마침내 미국 국민들의 마음 속에는 그토록 애써 외면하고 싶어 했던 <두려움>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싸움이든 전쟁이든 <두려움>에 빠져들면 이길 수가 없다. 무기가 많고 인원수가 많아도 <두려움>이 그 집단을 둘러싸버리면 그 구성원들은 전사(戰士)가 될 수 없다. 바로 이 때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미국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격려하였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사악한 저 적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단지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으려고 하는 <두려워하는 마음> 이것뿐입니다. 이것만 극복하면 우리는 능히 적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두려움>이야 말로 우리가 꼭 격퇴해야 할 나쁜 적(敵)이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에는 왜 두려움이 자리를 잡는가? (1) 하나님을 부정(不定)하거나 부인(否認)하면 오히려 두려움이 생긴다. (느부갓네살 왕, 페스토스 총독)(2) 죄를 지으면 두려움이 생긴다. (아담, 가인, 가롯 유다)(3) 몸과 마음이 병들면 두려움이 일어난다. (히스기야 왕, 에바브로디도)(4) 인생을 성실하게 살지 않으면 항상 두려움에 쫓기게 된다.(5) 구원의 확신이 없이 죽음이 다가올 때 사람은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는 <담대함과 평강>을 소유하는 것이다.다음의 성구들이 우리에게 <담대함과 평강>을 준다. 딤후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잠15:13, 17:22, 사41:10, 요16:33, 14:27, 20:19, 롬8:37~39, 빌4:6~7) 요일4: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16-03-11
  • [성공칼럼] 밝음과 따뜻함
    생명이 자라기 위해서는 빛과 열이 함께 있어야 한다. 빛이 있으면서 열이 없으면 차가운 한겨울 햇빛처럼 물을 얼게 만들고 나뭇잎을 떨어지게 하고 땅을 꽁꽁 얼게 만든다. 이렇게 생명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빛이 냉기와 결합했기 때문이다. 빛이 따뜻한 열과 결합할 때에만 봄 철, 여름철의 햇빛처럼 생명을 자라게 하며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빛과 열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진리와 사랑은 항상 함께 있어야 한다. 진리는 빛, 총명, 능력, 힘이라고 할 수 있고, 사랑은 열, 따뜻함, 배려, 선함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를 아는 총명하고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 속에는 사랑, 따뜻함, 열정이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뛰어난 실력과 총명함으로 사람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며 사람을 두렵게 만들고 옥죄어서 자유와 기쁨을 사라지게 하는 무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13장 13절에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이 제일이라는 말은 사랑이 최고라는 말일 수도 있지만 사랑이 목적이고 시작이고 생명이라는 말이다. 믿음과 소망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며, 사랑을 이루는 수단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항상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과 주변을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 있든지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이어야 하며 진리를 통해서 사랑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이 나온다. 제자들은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부모나 혹은 자신의 죄 때문이다.’라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말한다. 그 속에는 따뜻함이 없었고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있었을 뿐이다. 날 때부터 맹인으로 살아야하는 불행처럼 보이는 이 삶을 보면서 원인을 찾고 책임질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태도는 모두의 삶을 더 불행하고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순간에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하시며 원인이나 책임질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맹인의 불행해 보이는 삶 속에서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인 것을 말씀하신다. 눈이 보이지 상태에서도 어떻게 사랑할까, 어떻게 선을 행할까를 생각하고 행동할 때 불행의 원인과 원망의 대상은 사라지고 삶은 생기를 얻으며 주변은 밝아지고 따뜻해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사랑과 선을 행하려는 마음으로 그 방법을 찾는 것이 어두운 눈을 뜨게 만드는 힘인 것이다. 진리란 ‘이것이 옳다. 이것이 맞다’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란 세상을 밝게 만드는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시대나 진리를 아는 사람이 세상을 밝게 만든다. 불을 발견한 사람, 전구를 발명한 사람, 인체나 과학의 비밀, 전화기를 발명한 사람, 영적인 비밀 등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아는 사람이 시대를 밝게 만들었다. 그리고 비밀을 발견한 사람은 힘 있는 자가 되며 권력과 부를 소유한 지배자로 살아간다. 진리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며 생명이 아니라 생명을 담는 그릇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가지고 사랑과 선을 행하며 세상을 밝고 따뜻하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진리와 비밀을 알아서 힘과 권력을 소유했다면 그것으로 다 이룬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속에 반드시 따뜻하고 선을 행하는 사랑이 있어야 자신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생명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만약 영적인 진리를 알고 있는 종교지도자나 수많은 제자를 둔 선생이나 부자나 권력자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따뜻함과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영혼이 없는 육체처럼 생명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와 사랑을 함께 갖추어 밝으면서 따뜻하며 나로 인해 상대방도 밝고 따뜻하게 만드는 진리와 사랑을 모두 갖춘 균형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3-11
  • [은혜의 말씀] 소자행진(마 25장 21절)
    우리는 한 번 뿐인 인생을 어떻게 하면 후회 없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25장 21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의 말씀 속에 여덟 가지 답이 있습니다. 첫째,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그 때 우리는 칭찬과 상급을 받고 면류관을 받아야 합니다. 칭찬과 상급과 면류관 주실 것을 기대하며 언제나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둘째, 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착하게 살아 아름다운 영향력을 미치고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이웃을 향한 성도의 사랑은 물처럼 촉촉하게 스며들고 향기처럼 퍼져나가게 됩니다. 셋째, 충성입니다. 순종하는 자가 쓰임 받고 충성된 자가 복을 받습니다. 충성은 헛된 마음 버리고 허탄한 자랑을 아니 하며 하나님께 성실함과 정직함 입니다. 넷째,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종이라는 존재는 자존심 같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종은 그저 주존심만 있으면 됩니다.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생각과 뜻대로 성경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종의 특징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둘째, 현장에서 평생 일을 한 일꾼이기에 그 일만큼은 전문가요 고수이며 달인입니다. 셋째, 종은 즐겁다는 겁니다.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 있지만 종은 아무 걱정 안하고 시키는 일만 그저 열심히 합니다. 복잡할 것이 없고 단순한 삶을 살아가지요. 우리는 종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 생각대로 큰소리치지 말고 오로지 주인의 뜻을 쫓아 전문가가 되어 즐겁게 일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섭섭할 게 없습니다. 일복이 많은 일꾼은 섭섭할 틈도 아플 틈도 없는 것입니다. 다섯째, 적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평가하실 때 적은 일을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십니다. 작은 것에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크고 많은 일을 맡기십니다. 여섯째, 우리 스스로 역량을 키워 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에 따라서 많은 것을 맡기십니다. 일곱째, 주님께서 맡기실 때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맡긴다는 것은 신뢰한다, 위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지가 되고 신뢰가 될 때 맡기십니다. 우리가 겸손을 감당하면 하나님이 존귀하게 해 주시고 거룩을 감당하면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그릇으로 쓰기 때문에 거룩을 감당하게 됩니다. 여덟째,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해야 합니다. 주님 오실 때 어린 양 혼인잔치가 열리는데 그 파티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누리는 것들은 순간의 찰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한 이 땅에서 서럽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당하는 것도 유한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장차 받을 축복, 영원한 생명과 기쁨이 있는 곳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천국의 소망이 있기에 언제나 웃을 수 있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빼앗기지 마시고 끝까지 충성되고 착하게 살아 복 있는 사람, 사랑 받는 사람, 원도 한도 없이 후회 없이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16-03-1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