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1-08(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예수 부활의 역사성
    그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기에 부인하기가 시인하기 보다 어려워 예수의 부활은 신화가 아니다. 전설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다. 뜬소문은 더욱 아니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실제로 죽으신지 삼일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셨다. 이 사실은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한둘이 아니다. 첫째, 무덤의 문이 열렸고 예수의 시신이 없어졌다. 예수의 시신을 그를 죽인 자들이 훔쳐갔을 리가 없고 예수의 제자들은 파수꾼들 때문에 무덤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은 그가 부활하셨기 때문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다음, 천사들이 증언하기를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셨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그랬다. 다음,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제자들에게도 11번 나타나셨다. 한번은 500여 형제에게 나타나셨다. (고전 15:6) 거기 보면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있다”는 말을 했다. 무슨 뜻인가. 내가 하는 말이 안 믿어지거든 그들에게 물어보라는 뜻이다. 다음,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같이 예수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을 전하다가 그의 순교한 것을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확실하다. 그들은 예수께서 잡히실 때에 자취를 감춘 자들 아닌가. 그랬던 그들이 목숨을 걸고 부활하신 예수를 증거한 것을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확실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다음,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어 평생토록 부활하신 예수를 전하다가 순교한 사실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박멸하려던 자아닌가. 그는 자기가 직접 부활하신 예수를 뵙지 않았으면 절대로 남의 말만 듣고 변할 사람이 아니었다. 사울의 변화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라고 아니할 수 없다. 다음, 예수의 교회가 그의 부활의 증거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았으면 그의 제자들이 재기하지 못했을 것이고 교회가 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교회가 서고 교회가 온 세상에 확장된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알고보면 예수의 부활은 부인하기가 시인하기보다 어렵다. 믿기는 쉬우나 부인하려면 부인할 길이 없다. 저명한 학자 프랭크 모리슨을 보라. 그는 예수의 부활을 반박하기 위해 반증자료를 수집하여 연구하다가 되려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되지 않았는가. 그가 펴낸 책 제목이 ‘돌을 누가 옮겼는가’ 이다. 우리가 명심해야할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고로 믿는 우리도 부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알고보면 그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3-24
  • [목회자칼럼] 우리 안에 숨어있는 5가지 적(敵)
    세계 제2차 대전이 절정에 이르고 있을 때 미국 국민들은 전쟁 피로감에 빠져 들고 있었다. 연합국 쪽에 필요한 엄청난 전쟁물자 보급을 미국이 거의 도맡다시피 해야 했으니 그럴 법도 하였으리라. 전쟁을 일으킨 주축국들인 독일, 이태리, 일본은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전쟁 준비를 하였다. 그러므로 몇 년간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물자를 충분히 비축해 두었다. 히틀러는 기습공격과 속전속결 전법으로 순식간에 프랑스, 폴란드, 러시아 서부지역 등 서유럽과 동유럽을 전격적으로 점령하였다. 가공할 힘을 가진 나치 독일군대를 그런대로 대항할 수 있는 나라는 영국 뿐이었다. 그러나 영국역시 <전시 국민총동원령>을 내려 유럽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영웅적으로 나치 독일과 싸우느라고 온 나라가 극도의 피로감으로 빠져 들어갔다. 미국과 영국 국민들의 마음에는 차츰 불길한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이러다가 전 유럽이 저 무지막지한 괴물 히틀러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 연합국이 패배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불길한 생각도 무리가 아니었다. 치밀하게 준비하여 사생결단식으로 싸우는 독일, 이태리, 일본에 비하여 여타 유럽 국가들과 미국 국민들은 난데없는 뜻밖의 침략을 당하였으므로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하고 안락하고 평화롭던 일상의 삶은 산산조각 파괴되고 불안과 공포가 쌓여가면서 마침내 미국 국민들의 마음 속에는 그토록 애써 외면하고 싶어 했던 <두려움>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싸움이든 전쟁이든 <두려움>에 빠져들면 이길 수가 없다. 무기가 많고 인원수가 많아도 <두려움>이 그 집단을 둘러싸버리면 그 구성원들은 전사(戰士)가 될 수 없다. 바로 이 때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미국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격려하였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사악한 저 적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단지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으려고 하는 <두려워하는 마음> 이것뿐입니다. 이것만 극복하면 우리는 능히 적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두려움>이야 말로 우리가 꼭 격퇴해야 할 나쁜 적(敵)이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에는 왜 두려움이 자리를 잡는가? (1) 하나님을 부정(不定)하거나 부인(否認)하면 오히려 두려움이 생긴다. (느부갓네살 왕, 페스토스 총독)(2) 죄를 지으면 두려움이 생긴다. (아담, 가인, 가롯 유다)(3) 몸과 마음이 병들면 두려움이 일어난다. (히스기야 왕, 에바브로디도)(4) 인생을 성실하게 살지 않으면 항상 두려움에 쫓기게 된다.(5) 구원의 확신이 없이 죽음이 다가올 때 사람은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는 <담대함과 평강>을 소유하는 것이다.다음의 성구들이 우리에게 <담대함과 평강>을 준다. 딤후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잠15:13, 17:22, 사41:10, 요16:33, 14:27, 20:19, 롬8:37~39, 빌4:6~7) 요일4:18“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16-03-11
  • [성공칼럼] 밝음과 따뜻함
    생명이 자라기 위해서는 빛과 열이 함께 있어야 한다. 빛이 있으면서 열이 없으면 차가운 한겨울 햇빛처럼 물을 얼게 만들고 나뭇잎을 떨어지게 하고 땅을 꽁꽁 얼게 만든다. 이렇게 생명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빛이 냉기와 결합했기 때문이다. 빛이 따뜻한 열과 결합할 때에만 봄 철, 여름철의 햇빛처럼 생명을 자라게 하며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빛과 열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진리와 사랑은 항상 함께 있어야 한다. 진리는 빛, 총명, 능력, 힘이라고 할 수 있고, 사랑은 열, 따뜻함, 배려, 선함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를 아는 총명하고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 속에는 사랑, 따뜻함, 열정이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뛰어난 실력과 총명함으로 사람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며 사람을 두렵게 만들고 옥죄어서 자유와 기쁨을 사라지게 하는 무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13장 13절에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이 제일이라는 말은 사랑이 최고라는 말일 수도 있지만 사랑이 목적이고 시작이고 생명이라는 말이다. 믿음과 소망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며, 사랑을 이루는 수단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은 항상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과 주변을 살아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 있든지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이어야 하며 진리를 통해서 사랑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이 나온다. 제자들은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부모나 혹은 자신의 죄 때문이다.’라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말한다. 그 속에는 따뜻함이 없었고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있었을 뿐이다. 날 때부터 맹인으로 살아야하는 불행처럼 보이는 이 삶을 보면서 원인을 찾고 책임질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태도는 모두의 삶을 더 불행하고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순간에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하시며 원인이나 책임질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맹인의 불행해 보이는 삶 속에서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인 것을 말씀하신다. 눈이 보이지 상태에서도 어떻게 사랑할까, 어떻게 선을 행할까를 생각하고 행동할 때 불행의 원인과 원망의 대상은 사라지고 삶은 생기를 얻으며 주변은 밝아지고 따뜻해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사랑과 선을 행하려는 마음으로 그 방법을 찾는 것이 어두운 눈을 뜨게 만드는 힘인 것이다. 진리란 ‘이것이 옳다. 이것이 맞다’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란 세상을 밝게 만드는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시대나 진리를 아는 사람이 세상을 밝게 만든다. 불을 발견한 사람, 전구를 발명한 사람, 인체나 과학의 비밀, 전화기를 발명한 사람, 영적인 비밀 등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아는 사람이 시대를 밝게 만들었다. 그리고 비밀을 발견한 사람은 힘 있는 자가 되며 권력과 부를 소유한 지배자로 살아간다. 진리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며 생명이 아니라 생명을 담는 그릇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가지고 사랑과 선을 행하며 세상을 밝고 따뜻하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진리와 비밀을 알아서 힘과 권력을 소유했다면 그것으로 다 이룬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속에 반드시 따뜻하고 선을 행하는 사랑이 있어야 자신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생명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만약 영적인 진리를 알고 있는 종교지도자나 수많은 제자를 둔 선생이나 부자나 권력자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따뜻함과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은 영혼이 없는 육체처럼 생명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와 사랑을 함께 갖추어 밝으면서 따뜻하며 나로 인해 상대방도 밝고 따뜻하게 만드는 진리와 사랑을 모두 갖춘 균형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3-11
  • [은혜의 말씀] 소자행진(마 25장 21절)
    우리는 한 번 뿐인 인생을 어떻게 하면 후회 없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25장 21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의 말씀 속에 여덟 가지 답이 있습니다. 첫째,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그 때 우리는 칭찬과 상급을 받고 면류관을 받아야 합니다. 칭찬과 상급과 면류관 주실 것을 기대하며 언제나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둘째, 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착하게 살아 아름다운 영향력을 미치고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이웃을 향한 성도의 사랑은 물처럼 촉촉하게 스며들고 향기처럼 퍼져나가게 됩니다. 셋째, 충성입니다. 순종하는 자가 쓰임 받고 충성된 자가 복을 받습니다. 충성은 헛된 마음 버리고 허탄한 자랑을 아니 하며 하나님께 성실함과 정직함 입니다. 넷째,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종이라는 존재는 자존심 같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종은 그저 주존심만 있으면 됩니다.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생각과 뜻대로 성경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종의 특징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둘째, 현장에서 평생 일을 한 일꾼이기에 그 일만큼은 전문가요 고수이며 달인입니다. 셋째, 종은 즐겁다는 겁니다.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 있지만 종은 아무 걱정 안하고 시키는 일만 그저 열심히 합니다. 복잡할 것이 없고 단순한 삶을 살아가지요. 우리는 종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 생각대로 큰소리치지 말고 오로지 주인의 뜻을 쫓아 전문가가 되어 즐겁게 일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섭섭할 게 없습니다. 일복이 많은 일꾼은 섭섭할 틈도 아플 틈도 없는 것입니다. 다섯째, 적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평가하실 때 적은 일을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십니다. 작은 것에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크고 많은 일을 맡기십니다. 여섯째, 우리 스스로 역량을 키워 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에 따라서 많은 것을 맡기십니다. 일곱째, 주님께서 맡기실 때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맡긴다는 것은 신뢰한다, 위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지가 되고 신뢰가 될 때 맡기십니다. 우리가 겸손을 감당하면 하나님이 존귀하게 해 주시고 거룩을 감당하면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그릇으로 쓰기 때문에 거룩을 감당하게 됩니다. 여덟째,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해야 합니다. 주님 오실 때 어린 양 혼인잔치가 열리는데 그 파티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누리는 것들은 순간의 찰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한 이 땅에서 서럽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당하는 것도 유한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장차 받을 축복, 영원한 생명과 기쁨이 있는 곳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천국의 소망이 있기에 언제나 웃을 수 있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빼앗기지 마시고 끝까지 충성되고 착하게 살아 복 있는 사람, 사랑 받는 사람, 원도 한도 없이 후회 없이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16-03-11
  • [성경인물탐구] 베드로에게 복음을 전한 안드레(3)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임을 알고 그분을 좇았던 안드레는 자신의 형인 베드로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에 관해 정확하게 알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분을 만나지 않고서는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가족을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가족이나 친척이 믿지 않는 것을 보며 심지어 부부라 할지라도 한쪽만 믿는 경우가 매우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의 책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과 혀로서만 하는 사랑이 아닌 내 가족의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요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안드레는 자기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되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전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해야 되는지를 알지 않고서는 그분을 따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나, 엘리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가 아니라 메시아이십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전하였습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 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복음을 들은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전도가 전하는 것으로만 그치는 경우들이 많은데 이는 현명한 것이 아닙니다. 안드레처럼 자신의 형인 베드로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면서 그 형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우리 역시 복음을 힘써 전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신앙이 성숙할 때까지 철저히 양육해야 합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요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복음 전도의 원칙에 있어서 최우선 순위는 불신자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해야합니다.요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리라불신자를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자신의 가족 중에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해외 선교도 중요하고 국내 선교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가까운 내 친족, 내 이웃부터 전도해야 되겠습니다. 장차 내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 책임은 내게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시기에 있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기회가 무르익었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상관없이 항상 감당해야 할 일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한 기회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자 생각하지 말고 언제나 기회라고 생각하고 전해야 합니다.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 오피니언
    • 칼럼
    2016-03-11
  • [교회법률상식] 원로장로는 당회장에게 당회소집 청원권 없다
    -시무장로 없고 원로장로만 있는 교회 행정은 당회장 단독 처결 -폐당회 당회장은 원로장로 동의 없이 모든 당회권 행사 가능 [질의] 대구동노회 H교회의 사건입니다. H교회는 시무장로 1인만 있는 조직교회였는데 시무장로가 원로장로로 추대됨으로 폐당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H교회 당회장이 노회에 장로 선택 허락을 받고 법이 정한 대로 1주일 전에 장로 선택을 위한 공동의회 광고를 하고 광고한 일시에 공동의회를 하여 피택 장로 1인을 선택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원로장로가 당회도 하지 않고 공동의회를 한 것이 불법이라고 하면서 노회에 소원장을 제출했고 노회 임원회 역시 원로장로의 동의 없이 공동의회를 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여 교회가 혼란스럽습니다. 원로장로의 주장과 임원회의 판단이 옳은 일인지 목사님의 법적인 판단을 부탁드립니다. (합동 대구 K목사) [답] 질의자가 합동측 목사이므로 합동 헌법으로 답한다. 1. 당회 조직과 원로장로의 당회 회원권 정치 제9장 제1조(당회조직)에 “당회는 지교회 목사(필자 주 : 당회장)와 치리장로로 조직하되 세례교인 25인 이상을 요하고 장로의 증원도 이에 준한다.”라 하였고, 정치 제5장 제5조(원로장로)에 “ … 당회의 언권회원이 된다.”고 하였으며, 정치 제9장 제2조(당회의 성수)에 “당회에 장로 2인이 있으면 장로 1인과 목사(필자 주 : 당회장)의 출석으로 성수가 되고, 장로 3인 이상이 있으면 장로 과반수(필자 주 : 과반 수 이상)와 목사 1인이 출석하여야 성수가 된다. 장로 1인만 있는 경우에도 모든 당회 일을 행하되 그 장로 치리 문제나 다른 사건에 있어 장로가 반대할 때는 노회에 보고하여 처리한다.”고 규정하였다. 이상과 같은 헌법 규정을 종합하면 당회의 조직에서 당회장과 시무장로와 세례교인 25인 이상은 절대적인 당회 조직의 필수요건이다. 그러나 당회의 언권 회원인 원로장로는 당회 조직이나 당회 성수에 절대적 요건이 될 수는 없고 당회에서 언권 회원이다. 2. 폐당회 시의 위임목사와 원로장로 제60회 속회 총회(1976년 2월)에서 “2년 내에 당회 조직을 회복하면 위임식을 거행할 것 없이 여전히 위임목사로 시무함이 가하니라.”는 총회 결의에 근거하여 위임목사는 폐당회 후 2년까지는 계속하여 위임목사의 신분이 유지되므로 당연직 당회장으로서 시무장로가 없을지라도 미조직교회의 임시목사가 노회로부터 당회권을 위임 받아 재판 건을 제외한 모든 행정 건을 당회장 단독으로 행사하는 것과 같이 H교회의 당회장도 모든 행정 건을 당회장이 단독으로 처리한다. 그러므로 H교회의 당회장이 장로 선택을 위한 공동의회는 지극히 합법적인 행정 처리이다. 즉 원로장로는 시무장로가 있을 때에만 당회에서 언권 회원이 되고 시무장로가 사임을 하여 폐당회가 되었을 때에는 당회장이 원로장로와 둘이서 당회를 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모든 회의는 의결 도출을 목적으로 하는데 반하여 의결권이 없는 언권 회원과는 그 어떤 안건도 결의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폐당회는 당회장이 원로장로와는 당회를 해야 할 필요성이 요구되지 않는다. 다만, 2년 내로 당회가 회복되면 원로장로도 역시 당회에 참석하여 언권 회원이 된다. 3. 원로장로의 소원장과 임원회의 판단에 대하여 원로장로는 당회에서 언권 회원일 뿐이요 의결권이 없으므로 사실상 폐당회가 된 위임목사가 원로장로와 독대하여 당회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기에 언권 회원인 원로장로가 당회도 하지 않고 공동의회를 한 것이 불법이라고 하거나 원로장로의 동의 없이 공동의회를 했다는 등의 이유로는 소원장을 제출할 수 없다. 혹 공동의회 시 절차상 잘못된 일이 있다면 원로장로나 세례교인이나 누구든지 공동의회 회원으로서 소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원로장로가 당회를 하지 않았다거나 원로장로의 동의가 없었다는 등의 사유로서는 소원 건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노회에 소원 건이 접수되면 노회 서기는 서류 형식의 적부를 심사하여 반려하거나 접수하여 노회에 상정하는 것이 그 직무이고 서기가 접수한 서류를 노회 임원회가 검토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판단하는 것은 서기의 고유한 직무를 월권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3-11
  • [가정칼럼] 하나님도 거짓말을 하셨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미국인들은 하루 평균 2백 번의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한국인은 몇 번이나 할까? 누구든 거짓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만약 하나님도 거짓말을 하셨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런데 그 분도 거짓말을 하셨다.“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창세기 18:12-14)천사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찾아 와서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아이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한 천사가 아브라함에게만 은밀히 전했는데 사라가 엿들은 것이었다. 이에 사라는 자신과 아브라함이 이미 나이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성경은 ‘사라는 여성들만이 하는 월경이 이미 중단된 지 오래였다’고 말한다.- 웃음을 터뜨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난 이미 늙었고 내 남편 또한 노쇠했는데 내가 어찌 그런 기쁨을 누릴 수 있으리오?”이를 이중적 절망이라 부른다. 자신만 안 된다고 하면 된다. 그런데도 남의 이야기까지 끌어들인다. 사람의 본성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사라의 구체적인 말과 달리 하나님은 중요한 말 한마디를 생략해 버린다. “사라가 왜 웃으며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나님은 사라가 아브라함에 대해서 했던 말(“내 남편 또한 노쇠했는데”)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이를 놓고 한 신학자는 ‘하나님도 거짓말을 하셨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라의 한마디를 생략해 거짓말(?)의 올가미를 써야 했을까? 해답은 하나다. ‘하나님은 사라의 그 작은 한마디에라도 아브라함이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기막힌 통찰!어떤 목사님이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시던 중 이런 말을 남겼다. ‘만약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더 큰 목회를 하지 않았을까 종종 그런 생각을 하며 당신을 원망한 일도 있노라고’ 목사의 입장에서는 떠나는 순간 자신을 포장하고 있던 모든 거짓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자유하고 싶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픈 마음이었음을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 말은 자신의 감정에는 충실한 결과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남아 있는 자에게는 엄청난 아픔이었고 깊은 상처였다. 사모는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고 한다.결혼생활에서 가장 많은 갈등의 요인 가운데 하나가 대화부족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대화부족이 아니라 지혜로운 대화의 부재에 있다고 할 수 있다.“선한 말은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잠 16:24)“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사과니라”(잠25:11)“결혼생활에 있어서의 거짓말” 옳고 그름의 신학적 논쟁을 떠나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할 때다. 남에게 상처가 될 이야기라면 굳이 옮겨 놓지 않았던 하나님의 작은 ‘배려’가 사랑의 의미를 또 다시 깨우쳐 주고 있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3-11
  • [시사칼럼] 필리버스터
    한 동안 필리버스터(Filibuster)가 세간의 화제였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국회에서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는 ‘의사 진행 방해 연설’쯤 되겠습니다. 테러방지법 상정을 놓고 2월 23일부터 시작된 야권 국회의원들의 필리버스터 행진은 39명의 참여 인원이 192시간 동안 발언한 후 지난 3월 2일 마침내 끝이 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숱한 기록들이 갱신되었는데, 그 중에는 1964년 의원 신분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5시간 19분 기록이 있는가 하면, 1969년 신민당 박한상 의원이 세운 10시간 15분 최장 시간의 기록도 있고, 2011년 캐나다 의원들이 세운 58시간 연속 기록도 있습니다. 한편 같은 기간 동안 국회 본회의장에 일반 방청객들이 쇄도하고 국회 TV 시청률이 폭주하는 진기록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이번 필리버스터 사건을 보면서 ‘세렌디피티(Serendipity)’를 다시 한 번 떠올립니다. ‘우연한 발견 혹은 성공’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세렌디피티와 이번 필리버스터는 작년 8월 국내에서 방영된 ‘어셈블리’라는 드라마를 매개로 연결됩니다. 극중에서 노조위원장 출신인 진상필 의원은 정략적인 판단에 따라 여당 추천 후보가 되어 보궐선거에 나가 당선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리 많은 국무총리후보자의 임명 동의안을 놓고 홀로 필리버스터를 시작합니다. 극중에서 진상필 의원이 남긴 기록은 25시간 2분, 이는 1957년 미국 스트롬 서먼드(James Strom Thurmond) 상원의원의 24시간 18분 최장 기록을 깨뜨리는 상징적인 숫자로 쓰였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의자에 앉는 것도 화장실 가는 것조차도 금지되는 상황에서 만 하루를 넘기도록 계속해서 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고역(苦役)입니다. 더군다나 여당 소속 의원이면서 동조자 한 명 없이 홀로 필리버스터를 단행하고 결국 법안 통과를 저지한다는 상당히 비현실적인 가정이었지만, 적어도 그 비현실성만큼은 이번 사건으로 실제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결과를 도외시하더라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1939년 미국에서 독특한 영화 한 편이 개봉되었습니다. 어쩌면 한국 드라마 어셈블리가 오마쥬(Hommage) 했을지 모르는 이 영화의 제목은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Mr. Smith Goes to Washington)>, 명장 프랭크 카프라(Frank Capra) 감독에 제임스 스튜어트라는 명배우가 주연을 맡은 명품입니다. 영화 속에서 소년단(Boy Rangers) 단장인 순박한 시골뜨기 제임스 스미스는 지역 상원의원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역시 정략적인 판단에 따라 상원의원직에 임명됩니다. 그가 상원의원이 된 이유는 단 하나, 노회한 정치가들이 추진하던 댐 건설 사업에 한 표 보태라는 무언의 압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을 위한 야영장을 짓는 꿈에 부풀어있던 순박한 의원 스미스 씨는 마음씨 착한 비서 아가씨의 도움으로 필리버스터를 알게 되고 결국 24시간에 걸친 의사 진행 방해 발언을 통해 정치꾼들의 야욕을 분쇄합니다. 비디오 대여점 한 구석에서 그야말로 우연히(세렌디피티) 발견한 영화였는데 보는 내내 너무 큰 감동을 받아 그 이후로도 서너 번 더 보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어떤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편이 있고 그것을 막으려고 하는 편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국민들 중에도 법안 지지파가 있고 필리버스터 지지파가 있지만, 정치판과 달리 어느 쪽도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대중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입니다. 걸핏하면 몸싸움을 벌이는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소개하던 대한민국 국회를 전 세계 언론들이 앞 다투어 긍정적인 뉘앙스로 대서특필하였습니다. 하기야 1980년대 혼돈의 시절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를 보면서 느꼈던 부러움이 더 이상 남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니 그것만 해도 멋진 일이 아닙니까? 비관적인 전망과 온갖 억측을 일삼는 이 민족을 그래도 너무나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나라를 온전하게 발전시키는 일을 멈추지 않고 계신다, 이번 필리버스터를 바라보며 느끼는 소회(素懷)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16-03-11
  • [소강석 칼럼] 방황하는 별들은 길을 묻는다
    오래 전 스코틀랜드 언약도와 영국 청교도들의 신앙을 연구하기 위해 유적지를 답사한 적이 있다. 물론 책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을 연구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적 체취와 흔적들을 보면서 더 실감나게 공부하기 위해서 갔다. 역시 그리스도의 왕권 신앙을 사수하기 위하여서 지붕 없는 감옥에서 고초 당하면서 죽기까지 했던 언약도들의 순결한 신앙을 보면서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는 청교도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국교도에 반대해서 야외에서 천막교회를 하면서까지 신앙의 경건과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지켰던 복음의 열정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런데 그 못지않게 또 하나 충격 받은 것은 문 닫는 교회들이 너무나 눈에 많이 띈 것이다. 어느 교회는 백화점이 되고, 술집에 팔리고, 댄스홀로 바뀌어 인테리어 공사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회교 사원으로 팔리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졌다. 스코틀랜드가 어떤 곳인가. 피로 물든 언약도의 신앙이 서려 있는 곳이며 전 세계 장로교회의 본산이 아닌가. 영국도 마찬가지다. 저 푸른 바다를 넘어 낯선 이방의 땅, 조선에 복음을 전하여 준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하였던 교회마저도 텅 빈 건물과 교회를 지키는 사람 밖에 없는 것을 보았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영국 교회가 미래의 부흥을 위한 다음 세대를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영적 황무지요, 피폐한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60-70년대만 해도 교회마다 장년 성도보다는 주일학생들이 오히려 더 많았다. 그 때 주일학교에서 말씀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아이들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이룬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 모습은 어떤가. 90년대를 지나면서 주일학교 학생이 점점 적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중고등부나 청년들이 많은가? 그렇지도 않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다음세대를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 목회자의 안목의 문제다. 미래 목회에 대한 대안이 부족하니까 다음세대를 향한 관심과 투자를 하지 않는다. 우선 당장 도움이 되는 장년 교육과 전도에만 관심을 갖는다. 둘째, 한국교회의 미래 문제이다. 이대로 20-30년이 흘러간다고 생각해보자. 한국교회도 고령화되고 힘을 잃고 말 것이다. 아니, 50-60년이 지나간다면, 한국교회도 영국교회를 닮아가지 않으란 법이 어디 있는가. 성경에도 보면 여호수아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 섬겼지만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죽고 나자 다음 세대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들을 섬겼다고 하지 않는가.(삿2:7-10) 이것은 여호수아 세대를 칭찬한 것이 아니라 역설적 견책의 말씀이다. 그렇다. 한국교회가 미래에도 세계 교회의 등불이 되어 선교의 주도권을 잡고 복음의 빛을 비추려면 반드시 다음세대를 위한 준비와 투자를 해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가 현재의 명예와 위용, 목회자의 명성에만 만족한다면 미래의 희망은 없다. 다음세대를 생각하지 않는 목회, 미래에 대한 대안이 없는 오늘의 현실은 방황하는 별과 같다. 그러나 방황하는 별은 길을 물어야 한다. 그 물음의 해답은 다음세대를 준비하고 세우는 것이다. 그럴 때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다. 방황하는 별들이 길을 찾고 눈부신 아침을 맞는 것처럼.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16-03-11
  • [함께 생각해 봅시다] 국회, 이대론 안된다
    비례대표제는 폐지해야 하고 국회의원의 수는 대폭 줄여야 오는 4월 13일은 제20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날이다. 이제 한달 남짓 남았다. 출마하는 당사자와 선거에 관련이 있는 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듯 하다. 필자는 선거에 관해 관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솔직히 정치에 관하여는 아는 것이 너무 없다. 문자 그대로 문외한이다. 그러나 국회의원을 선거할 때마다 생각되는 것이 있다. 무엇인고 하니 국회를 개혁해야지 이대론 안된다는 생각이다. 우견인지는 모르겠으나 유권자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본다. 첫째, 국회의원 비례대표제는 폐지해야 하지 않느냐 이것이다. 이 제도는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시에 도입되었고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시에 사라졌다가 제11회 선거 시에 다시 도입되었다. 이 제도는 원래 전문가들을 국회에 입성시키자는 좋은 취지로 도입되었지만 요즘은 지난 날의 행적을 드러내기 곤란한 자들과 돈으로 국회의원이 되려는 자들을 국회로 입성시키는 창구처럼된 것 같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국회를 만들려면 비례대표제는 없애야 한다고 생각된다. 다음, 지역구 의원의 출마자격은 그 지역 주민으로만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전략공천이니 뭐니 하면서 그 지역과는 상관이 없는 자를 후보로 세우거나 출마를 위해 조금 전에 거주지를 옮긴 자를 후보로 세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 국회의원의 수를 대폭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무슨 법안이든 국회에서 의결되기만 하면 시행될 것인데 굳이 의원 수가 많아야한다는 이유가 있는가. 의원 수를 지금의 절반으로 줄여도 괜찮다고 생각된다. 다음, 국회의원의 급여를 일당제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된다.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을 적용하여 일을 한 것만큼 급여를 받게하여 일하는 국회로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 이같은 생각은 아마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다음, 국회의원의 급여결정체계를 개선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타직종에서는 급여수혜자가 자신이 받을 급여를 결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은 자기들이 받을 급여를 자신들이 결정하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 이런 것도 기필코 개선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음, 국회의원의 뺏지를 단 하루만 달아도 종신토록 월 120만원의 연금을 받도록 되어있는 제도는 합리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웨덴 같은 나라에서는 국회의원직을 12년간 유지해야만 연금이 지급된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이 제도를 개정해야지 국회의원 뺏지를 하루, 이틀 달고도 연금을 평생 받다니 말이 되는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3-1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