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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법률상식] 예정한 일시와 장소에서 진행한 노회가 바로 정통노회
    [질의] 동대전노회 제128회 정기노회가 두 개의 임원회의 조직과 총회 총대를 선정하였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노회장과 서기가 “동노제 127-43호(2016.2.16.), 수신: 노회원 및 장로총대, 제목: 동대전노회 제128회 정기노회의 건, 일시: 2016년 4월 11일(월) 오후 2시 - 13일(수)까지, 장소: 동원교회당(김현국 목사 시무) (대전시 동구 백룡로 11번길 164(자양동 / 042-625-5671), 대한예수교장로회 동대전노회(관인), 노회장 김종성 목사(인), 서기 한규덕 목사(인)”으로 봄 정기노회 소집 통지서를 하달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정한 일시와 장소에서 노회장의 인도로 개회 예배 및 성찬예식을 거행하고 서기가 회원을 호명한 후, 절차상 노회장이 “대한예수교장로회 동대전노회 제128회 정기노회가 개회됨을 선언”해야 할 순서임에도 불구하고 개회 선언은 하지 않고 노회장과 서기가 노회 직인과 노회 서류를 갖고(사전에 노회 현장에 가져오지 않고 서기의 차량에 보관해 두었음) 노회 장소를 떠나 제3의 장소로 약 30명이 함께 가서 노회를 개최하고 있었으므로, 법적인 정기노회 장소에 남아 있던 약 100명의 회원은 “노회 중에 노회장이 부재중이므로 부노회장이 사회할 것”을 권하여 부노회장이 “대한예수교장로회 동대전노회 제128회 정기노회가 개회됨”을 선언한 후 노회장 불신임안을 결의하고 임원 개선 등 회무를 처리하면서 정기노회 장소를 이탈한 직전 노회장과 서기를 제명·처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노회장이 사회한 노회와 부노회장이 사회한 노회 중에 어떤 노회가 정통노회인지 목사님의 법리적 답변을 바랍니다. (동대전노회 K목사) [답] 정치 제10장 제9조(노회 회집)에 “노회는 예정한 날짜와 장소에 회집하고”라는 헌법 조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1. 노회장이 노회장소를 이탈하여 조직한 노회에 대하여 노회장과 서기가 정기노회 소집 통지서를 하달한 후 법적인 정기노회의 일시와 장소에서 그 노회장의 사회로 개회 예배와 성찬 예식을 마치고 그 서기가 회원 호명까지 하였으니 회장은 정회원 목사 3인과 총대 장로 3인 이상이 출석하였으면(정치 제10장 제5조, 동 제19장 제2조) 응당 개회 선언을 함이 회장의 직무요 직권임에도 불구하고 개회 선언도 하지 않고 노회장이 서기와 함께 자기들을 따르는 자 30여명을 대동하고 노회 장소를 이탈하여 별도의 장소에서 노회 임원 선거와 총회 총대까지 선출하는 노회를 했다고 하니 노회장과 서기를 따라 노회 장소를 이탈한 30여명이야말로 거두절미하고 교회를 불법 분리한 범죄 행위(권징 제42조)를 넘어 노회를 이탈하였으니 교회 정치 제8장 제2조 2항에 준거하여 교단까지 이탈한 범죄 집단에 다름 아니다 2. 부노회장이 사회하여 진행한 정기노회에 대하여 반면에 노회장이 노회 개회 선언도 하지 아니하고 노회 관인과 노회 관련 서류를 사전에 서기 차량에 숨겨두었다가 탈취하여 갔고 정기 노회의 법정(法定) 장소를 이탈하여 다른 장소에서 노회를 하는 것을 알고 법적인 노회 장소에 남아있던 노회원들이 “노회 중에 노회장이 부재중이므로 부노회장이 사회할 것”을 권하여 부노회장이 “대한예수교장로회 동대전노회 제128회 정기노회가 개회됨”을 선언한 후 임원 선거와 신구 임원 교체 등 정기노회를 진행하여 안건을 처리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인 정통노회이다. 이는 본 교단의 장로회 각 치리회 보통회의 규칙 제2조(교회 법률 상식 부록 참조)에 “예정한 시간에 성수가 회집하였으되 회장 유고 시 사회할 서열은 아래와 같다. ① 회장 유고 시 대리할 부회장 ② 출석 총대 중 최후 증경회장 ③ 총대 중 최선 장립 자”로 규정한바 제1순위인 부노회장의 사회로 정기노회를 진행한 것은 교회 정치 제10장 제9조와 장로회 각 치리회 보통회의 규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결론 본건에 관한 후속 조치는 노회가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이탈자들 중에서 본인들의 범죄 사실을 회개치 아니 하는 자들에 대하여 노회가 기소위원을 선정하여 기소케 하고 본회를 재판회로 변경하여 재판하든지, 재판국을 설치하여 위탁 판결케 함이 노회의 당연한 책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언론 보도에 의하면 권원 없는 총회 임원회가 동대전노회의 사건에 대하여 실사위원 3인을 선정하고 “실사 파악이 종료될 때까지 2016년 3월 21일 이후 행정 처리 및 재판 진행, 조사 처리, 임시노회를 중지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공문을 동대전노회에 하달하였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이는 총회 임원회가 헌법이 정한바 하회의 고유한 특권에 관한 월권(정치 제12장 제4조)을 행한 범죄 행위에 다름 아니다. 총회 임원회는 치리회가 아니며 또한 하회의 청원 없는 본건에 관하여 실사위원을 보낼 의무나 권리도 없고 실사에 관한 공문을 노회에 하달할 권한도 없다. 총회 임원회는 총회가 결의한 사실만 하회에 공문을 하달할 수 있고 총회가 위탁한 사안만 시행할 수 있다. 총회가 언제 동대전노회 사건에 대하여 실사하라고 위임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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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20
  • [성공칼럼] 두 가지 물음
    삶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과 지금 일어난 일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마음속에서만 있는 일이며 실제로는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 일어난 일만이 현재 삶인 것이다. 이 두 가지 삶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내 삶이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삶을 밝게 살면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음과 행동이 있어야 하는데 마음은 무조건 밝아야 하고 마음이 밝아진 후에야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밝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을 망가뜨리는 것에는 걱정과 화 등의 부정적 감정이 있는데 부정적 감정은 감정이 상처를 입은 것이다. 감정의 상처는 감정이 억압을 받아 생기는 것이며, 억압은 힘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그러기에 걱정과 화 등의 부정적 감정을 치유하는 방법은 힘을 키우는 것이다. 힘을 키우는 방법은 일단 현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일어난 현실을 거부하게 되면 부정적 생각이 일어나고 부정적 감정이 생겨나고 그 후 자연스럽게 현실과 충돌하는 부정적인 말과 행동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이 부정적 말과 행동은 자신과 주변의 삶을 망가뜨려서 남아있는 힘까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삶을 망가뜨리는 걱정과 화는 지금 일어난 현실을 거부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즉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삶을 거부하면 걱정이 일어나고 지금 일어난 현실을 마음으로 거부하면 화가 생기게 된다. 걱정과 화라는 두 감정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물음에 “예”를 하면 된다. 이 물음은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도 되는가?”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집에 값비싼 귀중품을 숨겨 두었는데 누군가 훔쳐갈까 봐 걱정해서 일상생활도 힘들고 잠도 못 잔다고 하자. 이 걱정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위의 두 가지 물음에 “예”하면 되는 것이다. “귀중품을 누군가 훔쳐갈 수 있는가?” “예, 훔쳐갈 수 있습니다.” 또 “그 일이 일어나도 되는가?” “예, 일어나도 됩니다.”라고 생각하면 걱정은 사라지고 잠도 잘 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화를 해결하는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누군가 나를 무시하고 험담해서 화가 났다고 하자. “상대방이 나를 무시하고 험담할 수 있는가?” “예, 험담할 수 있습니다.” 또 “그 일이 일어나도 되는가?” “예. 일어나도 됩니다.”라고 대답하면 화는 사라지고 여유가 생긴다. 그러면 나를 무시하고 험담하는 사람을 향해서 자신의 원하는 대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삶에서 걱정하고 화가 나는 것은 걱정과 화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 되어 걱정과 화를 다스려야 하는데 도리어 걱정과 화가 주인노릇을 하면 나와 내 주변의 삶은 망가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걱정과 화를 해결 못하면 자신의 영혼의 생명이신 주님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도 가능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걱정과 화가 있는 한 이웃사랑이나 서로 사랑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무시하고 아래로 보고 거부하며 부정적 행동을 하는데 어떻게 여기에 사랑이 생길 수 있겠는가? 사랑이 생기지 않는데 내 속에 어떻게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사랑이 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그 속에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고 하며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며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 몸이나 환경, 주변사람, 물건, 그 어떤 말, 사건, 자연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이 선물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이 들어있다. 이 삶을 내 생각으로 거부하게 되면 부정적 생각이 생기고 그 즉시 걱정이 생기고 화가 일어나 삶이 어두워지며 망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삶을 만나든지 먼저 마음속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와 “일어나도 되는가?”의 물음에 “예”하는 연습을 함으로 항상 마음을 밝게 만들어서 밝은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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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20
  • [은혜의 말씀]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창26:25)
    이삭은 아브라함 100세 때에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통해 태어날 아들로 말미암아 자손이 번성해 질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100세에 얻은 귀중한 아들은 아브라함에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의 모든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을 시험하사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써 시험을 통과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며 신뢰하는지 새삼 감동하신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자손들의 번성함과 하나님의 독생자를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청년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을 신뢰하고 사랑하였기에 기이한 그의 행동에 순종하여 따릅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위대한 개척정신을 가지고 나가진 못합니다. 또한 그의 아들 야곱처럼 욕심과 야망이 많지도 않았습니다. 이삭은 치안이 보장되지 않은 곳에서 가족을 지키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젖과 꿀이 나는 가나안 땅은 기후가 건조해 사막이 많고 풀과 물이 매우 귀한 곳입니다. 우물 하나를 발견하면 그 주위에 마을이 형성될 정도로 물은 이들에겐 생명수와 같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우물을 하나 파는데 실비로 억대의 돈이 듭니다. 투자를 해도 우물이 될까 말까 하는 평생 가문의 영광이 되는 것이 우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물은 부의 척도요 축복의 상징이고 가문의 영광입니다. 우물은 만남의 장소입니다. 모세가 부인 십보라를 만난 곳이며 야곱이 라헬을 만난 곳이기도 합니다. 이삭의 부인 리브가도 우물 땜에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첫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지자 사람들은 곡창지대 애굽으로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가지 말 것을 권고하시며 복을 주시겠다 약속해 주십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블레셋 땅 그랄로 가족들과 함께 내려가 농사를 지어 그 해에 백배나 얻고 양떼와 소떼를 심히 많이 얻었습니다. 이삭은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시기한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을 내쫓았고 이삭은 그랄 골짜기로 장막을 옮기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메워버린 아버지의 우물을 다시 팝니다. 이삭의 종들이 그랄 골짜기에서 우물을 파자 그랄 목자들이 자기들의 것이라며 다툼을 일으키자 우물 이름을 에섹(다툼)이라 하며 줘 버립니다. 다른 곳을 파자 그들은 또다시 다툼을 일으킵니다. 우물을 싯나(대적함)라 하고 그랄 사람들에게 줘 버립니다. 이삭은 또다시 다른 곳을 찾아 이동하여 우물을 팠습니다. 더 이상 다툼이 일어나지 않자 그 이름을 르호봇(장소가 넓음)이라 하며 하나님께서 지경을 넓혀 주심에 감사하였습니다. 브엘세바에 올라간 이삭에게 하나님은 함께 해 주실 것과 자손의 번성을 약속에 주십니다. 이삭은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장막을 치고 거기서도 우물을 팠습니다. 평생을 살아도 우물 하나 파기 어려운데 이삭은 가는 곳마다 우물을 팠습니다. 우리가 억울하고 힘이 들 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우리는 약하여 힘에 부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여야 합니다. 만약 이삭이 다툼이 일어날 때 혈기대로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이삭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고 이제껏 모은 모든 재산을 빼앗겼을 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비싸고 귀한 우물일지라도 사랑하는 가족을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뺏기면 다시 파고 또 다시 파고 이삭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억울함을 하나님은 대신 갚아 주셨습니다. 이삭은 장막을 치는 곳마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았습니다. 뺏기고 부도나고 쪽박 차고 밀려나고 인생의 어려움이 덮쳐올 때 웃음을 잃지 마십시오. 내가 할 수 없다 할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힘이 되사 친히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포기 하지 말고 순종하며 웃으며 나아갈 때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사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실 주님을 기대하며 나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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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20
  • [서임중 칼럼] 가정 같은 교회를 위하여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교회력으로는 첫 주일을 어린이 주일, 둘째 주일은 어버이주일, 셋째 주일은 청년주일, 넷째 주일은 가정주일로 지킨다. 그래서 5월은 행복이 노래되고 삶이 활력을 불러일으킨다. 한 마디로 살맛나는 달이다. 그런데 작금의 5월은 뭔지 모르게 불편하고 행복하지 못함을 느낀다. 정치권이 그렇고, 가정 살림살이가 그렇고, 학원이 그렇고, 일터가 그렇다. 딱 부러지게 이것이다 라고 할 것도 없는데 뭔지 모르게 기쁨이 없다. 나만 그런가? 이사람 저사람 만나보면 모두가 그렇단다. 가수 김종환씨가 부른 ‘사랑을 위하여’라는 가사 내용에 이런 말이 나온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다’는 듣기만 해도 가슴 따뜻해지는 행복감을 불러일으키는 가사다. 그 길이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돈도, 권력도, 명예도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솔로몬에게 물어봐라. 헛되고 헛된 것이라고 대답하리라. 바울 사도에게 물어봐라. 족보도 학벌도 명예도 권력도 부귀영화도 그 길이 아니기에 그런 것은 배설물처럼 생각이 되어 분토(糞土)처럼 버렸다고 외쳤다. 그리고 무엇을 얻었는가? 그 길이 답인데, 그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그렇다면 대답이 가능하다. 왜 행복하지 못한가? 예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면 행복하다. 교회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그 어디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면 평안과 행복이 없는 것은 예수 없는 삶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아이러니한 말인가. 교회에도, 그리스도인에게도 예수 없는 교회 예수 없는 예수쟁이라는 말이다. 오늘날도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 교회 같은 가정’ 이라는 표어로 제정하고 그렇게 가정생활과 교회생활을 하도록 가르치고, 교육받으면서 공동체 생활을 한다. 5월이 되면 더욱 이 표어가 마음에 새롭다. 어느 사회이든 기본 단위는 가정이다. 가정이 파괴될 때 사회는 붕괴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요즈음 언론에 보도되는 가정의 상황은 날마다 무너지는 모습을 접하게 된다. 그래서인가 작금의 교회도 불 꺼진 저녁 같은 상황을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아픔이며 슬픔이며 고통이다. 그렇게 가정은 소중한데 그 가정의 중앙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가정은 태양계 조직과 같다고 했다. 중앙에 태양이 있어서 태양계 서로를 주관한다. 만약에 태양이 그렇지 못하면 태양계 조직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태양계 중앙에 태양이 있어서 태양계를 주관하듯, 가정의 중앙에는 하나님이 계셔서 가정을 주관해야 가정이 산산조각이 나지를 않는다. 그래서 여호수아도(수24:14~15), 엘리야도(왕상18:21) 오직 하나님을 섬기라고 역설했던 것이다. 행복한 가정이나 교회는 질서의 이치가 순리로 형성되어야 한다. 즉 위치질서, 역할질서, 관계질서다. 모든 가족이 있어야 할 위치에서 자기의 본분에 맞는 역할을 통하여 가족 상호간의 관계질서가 이루어질 때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다. 가정 같은 교회라는 말은 바로 이 이치가 교회에서도 그대로 물 흐르듯 순리로 적용되기를 바램 하는 것이다. 가정생활의 관계질서 근간이 순종과 사랑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부모와 자녀관계만 아니라 부부관계도 마찬가지다(엡5:22~6:4). 아담은 하와 때문에 망했다. 그러나 욥은 아내 때문에 고통 했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처음 복 보다 나중의 복을 배나 더 받았고, 아브라함은 아내 때문에 복을 받고 은혜로운 가정을 이루어 복의 근원이 되었다. 이 내용의 중심이 행복한 가정의 기본은 곧 사랑과 순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교회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가정생활이 행복한 사람들의 교회생활을 보면 행복한 교회생활을 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부모와 자녀 관계의 내용도 인격적 관계를 전제로 한 순종과 사랑의 관계를 통해 가정은 행복하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것은 교회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와 가정의 영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놀라운 진리를 가르쳤던 것이다. 즉 가정이 무질서하고, 윤리가 무너지고, 가족 상호간의 의무와 도덕적 기반이 무너지면 교회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가정생활에서 질서 있는 생활과 아름다운 언어와 성실한 봉사와 섬김의 생활이 훈련된 사람은 교회생활에서도 어김없이 그 생활이 자연스럽게 연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정생활에서 무질서하고, 언어가 폭력적이며 반항적이고, 행동반경이 자기중심적이며 섬김과 봉사가 전혀 되지 않는 사람은 교회생활에서도 반드시 그렇게 생활이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을 감동케 하고, 한마디 언어에서도 아름다운 천국을 느끼게 해 주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향기로운 삶을 연출해 내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것은 바로 가정생활에서 훈련된 것임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가정처럼,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서 사랑과 순종을 통하여 축복을 노래하는 우리들의 가정이 되기를 소망하고, 욥의 가정처럼 자녀를 위하여 날마다 제단 쌓는 가정으로써 어떤 사탄의 시험도 믿음으로 극복하고 시험에서 승리하여 축복을 노래하는 가정이기를 기도한다. 가정이 무너지지 않아야 교회가 무너지지 않는다. 가정이 시험 들지 않아야 교회가 시험 들지 않는다. 가정이 축복 받고 행복해야 교회가 축복 받고 행복하게 된다. 우리의 가정이 작은 천국이 되고, 우리의 교회가 보다 더 큰 천국이 될 때, 우리 모두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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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20
  • [성서연구] 내가 깨달았도다(사도행전 10장 24-35절)
    본문에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고 싶은 감탄사가 등장합니다. 이 감탄사를 발한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그는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깨달았습니다. 깨달음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합니다. 깨닫기 이전의 그와 깨달은 후의 그는 서로 다른 사람입니다. 우리는 깨달음을 통해 변화되고 성숙합니다. 우리도 날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통해 지금까지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던 미지의 놀라운 세계로 들어가길 원합니다. 베드로가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된 경위는 무엇일까요? 본래 복음은 유대인 공동체에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교회는 구성원 전체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성령께서는 빌립집사를 통해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지게 하시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까지 전도하게 하셨습니다. 빌립집사는 이방인에게 전도하고 세례를 베푼 최초의 인물입니다. 그 후 성령께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에게 직접 이방인 전도를 체험하게 하심으로써 교회 전체가 이방인을 형제로 영접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는 기도하는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이셨고, 경건한 로마군 백부장인 고넬료에게 나타나셔서 베드로를 청하도록 하셨습니다. 고넬료는 사람을 보내 마침 욥바에 와 있던 베드로를 초청하였습니다. 이방인 백부장의 초청을 받은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여기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 유대인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을 상종하지 않소. 난 갈 수 없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절했다면 그는 고넬료의 집에서 놀라운 광경을 결코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기꺼이 고넬료의 집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갔을 때, 그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장면과 조우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이요, 유대를 식민 통치하는 로마의 백부장이 땅에 엎드려 가족 친지와 함께 절하면서 그를 영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듣고자 하여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같은 유대인들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닫은 자들이 수두룩한데, 이방인이 이처럼 말씀 앞에 엎드린 것을 보고 베드로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바로 이 순간 그는 “내가 깨달았도다”라고 감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이방인들까지도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파노라마를 보게 되었습니다. 닫혔던 마음이 열렸고, 생각의 지평이 땅끝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깨달음은 언제 주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령께서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입니다. 환상을 보게 하시고, 그 환상의 의미를 마음에 생각할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도착하고, 그들을 통해 자신을 청하는 전언을 듣게 되었는데, 이 모든 과정이 성령께서 이끄신 것이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하십시오. 그래야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도착함으로써 은혜를 입은 사람은 고넬료의 가족인 듯 보이나, 사실은 그 이전에 베드로 자신이 눈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하십시오. 그를 통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길 기원합니다. 매일 깨닫고, 매일 새로워지고, 매일 눈이 열리고, 매일 예수님을 닮아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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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20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 준다는 의식조차 없이 주기만 해 어버이주일이 있는 가정의 달을 맞아 어머니의 사랑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한마디로 희생적인 사랑이다. 주고 또 주고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다. 세상의 모든 관계는 주고받는 관계아닌가. 인간 사회는 ‘Give and take’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친구간의 우정도, 남녀간의 사랑도, 부부간의 애정도 모두 주고 받는 사랑이다. 내가 준 것만큼 받지못할 때 불만이 생긴다. 받은 것만큼 줘야하고 준 것만큼 받아야 한다. 애정의 비극은 사랑을 주고 받는데 있어서 어느 한쪽이 준 것만큼 받지 못하고 받은 것만큼 주지 않은데서 생긴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이러한 주고받는 사랑의 차원을 훨씬 초월한다.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할 때에 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어머니의 사랑은 주고 또 주고 아낌없이 주는 희생적인 사랑이다. 못받는다고 원망하지도 않는다. 어머니는 준다는 의식조차 없이 그저 주기만 한다. 어머니의 사랑은 천성적으로 희생적이다. 영국에서 있었던 얘기이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아가는 청년이 있었다. 어느날 청년이 교통사고로 두 눈을 잃었다. 멀쩡하던 두 눈을 순식간에 잃은 이 청년은 절망에 빠져 그 누구와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닫은채 우울하게 지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는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지나던 어느날 이 청년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져 왔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누군가에게서 한쪽 눈을 기증하겠다는 소식이 온 것이다.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그러나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이 청년은 그 사실조차도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쪽 눈이라도 봐야하지 않겠느냐?” 하는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때문에 수술을 받기로 했다. 아들이 “앞으로 애꾸눈으로 어떻게 살아간단말이냐”하며 투정을 부려도 어머니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며칠 후 아들의 눈에서 붕대를 떼게 되었다. 그런데 앞을 보는 순간 아들이 어머니를 보니 어머니가 한쪽 눈만 갖고 애틋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얘야, 내가 두 눈을 다 주고 싶었지만 두 눈을 다주면 그때부터 내가 네게 평생 짐이 될 것 같아서 그리하진 못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끝내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아들 역시 감격스러워 ‘어머니’하며 어머니를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숭고한 사랑이 또 어디 있겠는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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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20
  • [목회자 칼럼] 해외 한인선교사 수양회 인도 見聞錄(2)
    2016년 3월 24일(목) 아침, 드디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공항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대서양의 카나리아 섬으로 떠나야 한다. 공항 구내에서 쉬면서 기다린다. 여기 저기 중무장한 군인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오가고 있다. 며칠 전 벨기에 수도 브뤼셀 공항에서 극렬분자로 추정되는 자들에 의해 <폭탄테러>가 일어나 전체 유럽이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수준 높은 보안과 평온’이 자랑거리이던 유럽이 소수의 테러범들 때문에 요즘 몸살을 앓고 있다. 참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지구촌의 모든 인류는 한 조상 아담(Adam)의 같은 후손들이 아닌가! 그런데 어이하여 서로 의심하고 증오하고 심지어 싸우고 전쟁까지 하고 있는 것일까? 소중한 인간을 죽이기 위하여 끊임없이 무기를 만들고, 더 무서운 성능의 무기를 계속하여 개발하고, 심지어 우리의 동족인 저 북한 같은 경우 한 순간에 수십만 명을 죽일 수 있는 <핵무기>를 비밀리에 연구·개발하고 있으니 이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한 상념에 젖어 있는데 문득 공항 터미널에 걸려있는 현수막 하나가 내 눈을 끌어 들인다. 「우리는 인생을 환승(transfer)하기 위하여 여기 암스테러담 공항에 왔다. 우리는 세상을 보기 위하여 여기에 왔다」 세계적인 공항으로서 자부심을 한껏 과시하는 글귀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날 때 실로 우리는 내 인생을 환승할 수 있다. 카나리아 섬은 유럽 대륙에서 한참 남쪽으로 처져 위치한다. 서부 Africa의 앞 바다인 대서양쪽이다. 그런데도 왜 유럽에 속하고 있으며 거기다가 스페인령일까? 아프리카 사람들은 힘이 없고 눈을 빨리 뜨지 못한 결과 자기들 앞마당을 남에게 내어주고 만 것이다. 아름다운 7개의 섬 전체(카나리아 군도)를 스페인에 내어주고 만 것이다. 우리나라 제주도 크기의 Grand Canaria를 비롯하여 이 섬들은 한결같이 아름다고 특히 연중 따뜻하고 뜨겁기 때문에 북 유럽 사람들의 눈에는 환상적이고 <낙원>으로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스웨덴,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 사람들이었다. 이 아름다운 섬을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은 과분한 축복이다. 학생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던 <카나리아 군도>를 찾아와서 발을 딛는다는 것은 황송하면서도 실로 가슴 뛰는 경험이다. 라스팔마스 선교교회에서 집회인도를 요청해 주심으로 이루어지는 경험이다. 교회에 도착하여 감사기도를 드릴 때 온갖 감회가 떠올랐다. 권사님들이 육개장으로 저녁식사를 만들어 놓았다. 한국에서 보다 더 한국적인 맛을 내는데 실로 최고의 솜씨였다.3월 24일(목)-29일(화)까지 무려 5박 6일 동안 머무는데 <과분한 환대>를 거교회적으로 해 주신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의 사랑 이 이토록 우리를 강권해 주신다.(고후5:14) 난생 처음 만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친가족 이상으로 <환대> 해 주시니 감동 또 감동이다. 이 사랑의 빚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오래 오래 기억하면서 힘써 갚으리라. 라스팔마스 선교교회 성도들은 대체로 35-37년째 그곳에 살고 있었다. 담임목사님도 20년째 그 땅을 지키고 있으니 저절로 내 머리가 숙여진다. 저들이야 말로 <대한독립군>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들은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말 장하고 아름다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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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04
  • [교회법률상식] 미조직교회 목사 임시목사인가 시무목사인가
    -총회가 임시목사를 시무목사로 헌법 개정한 사실 없어-공포할 권한 없는 총회장이 공포한 개정안 효력 없어 합동총회 산하의 노회들이 각 지교회의 시무목사(정치 제10장 제3조)인 위임목사, 임시목사, 부목사 중 임시목사의 칭호에 대하여 시무목사로 그 칭호를 개정·공포한 것으로 착각하여 임시목사를 시무목사라고 호칭하는 노회가 있는가 하면, 사실 관계의 법리를 바로 이해하는 일부 노회는 여전히 임시목사라고 호칭하는 관계로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바 부득불 글을 쓰게 됨을 먼저 밝힌다. 1. 사건 발단의 법리적 사실 관계 제94회 총회 헌법개정위원회(위원장 서광호 목사)가 목사의 칭호 중에 임시목사를 시무목사로 개정안을 초안하여 제95회 총회에 보고한 결과 총회는 개정 초안을 상세히 검토하지도 아니하고 초안대로 보고를 받아 노회 수의에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노회 수의 과정에서 헌법 개정안 내용 중에 심각한 문제점이 발견되어 언론에 수차례 보도되었고(한국기독신문 제630호, 제632호, 교회 법률상식 pp. 207-209 참조), 당시 홍천에서 개최된 전국 장로회 연합회 수련회 현장에서도 참석자들이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본 사건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제96회 총회에서 헌법 개정안에 관한 노회 수의 결과를 총회에 보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총회장이 헌법 개정에 대하여 공포를 하지 않고 총회를 파회함으로 임시목사를 시무목사로 개정하기로 한 개정안은 자동적으로 폐기되었다. 그래서 제96회 총회와 제97회 총회 기간에는 임시목사로 칭호를 계속 호칭하였으나 제98회 총회 시에 이미 폐기된 헌법 개정안에 대하여 공포하여 시행하자는 헌의 안이 접수되어 제98회 총회가 접수해서도 안 되고, 취급할 수도 없는 서류를 총회현장에서 토의하다가 결국은 모 회원이 “추안 공포” 운운하면서 공포를 강요하자 폐기 된지 2년이나 지나서 공포할 수도 없고 공포할 권한도 없는 제98회 총회장이 무리하게 공포한 결과 일부 노회가 불법적으로 임시목사의 칭호를 시무목사의 칭호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2. 폐기된 헌법 초안의 문제점 본 건의 문제점은 부지기수이나 2가지만 열거한다. (1) 시무목사에게 독재 정치의 특권을 허용하는 개정안 장로회 정치의 근본 원리는 교인들이 치리장로를 투표하여 교인의 대표자로 장립 위임할 때에 치리에 복종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또 위임목사를 투표하여 청빙하고 위임예식을 거행하면서 치리에 복종하겠다는 서약을 함으로 당회에 치리권이 발생하여 목사와 장로가 회의하여 결의된 대로 치리하는 것이 곧 대의 민주 정치인 장로회 정치이다. 그런데 개정안 내용의 시무목사는 교인의 대표자인 치리장로도 없으면서 교인들의 투표도 없이 당회장의 청원으로 노회의 허락을 계속 시무하게 함으로 마치 감독 정치나 교황 정치 체제의 기틀을 마련하는 헌법이 되어 시무목사에 한해서 독재 정치를 합법화하여 스스로 장로회 정치를 포기하는 교단으로 전락하는 개정안이다. (2) 임시목사는 정회원, 위임목사는 언권 회원이 되는 개정안 제96회 총회를 파회하면서 폐기된 시무목사로 명칭을 개정 초안 되었던 개정안은 정치 제10장(노회) 제3조(회원 자격)에 “각 지교회 시무목사와 정년 이전의 원로목사와 총회나 노회가 파송한 기관 사무를 위임한 목사는 회원권을 구비하고 그 밖에 목사는 언권 회원이 되며 총대 권은 없다.”고 하였으니 본 규정의 문장과 문맥상으로 볼 때 “위임목사는 그 밖에 목사”가 될 수밖에 없어 언권 회원이 되고 총회 총대권도 없는 목사가 되어 버린다. 헌법을 개정할 때 헌법 전체를 보지 않고 어느 한 부분만 개정하게 되면 이와 같은 부작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헌법 개정 초안은 아무나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헌법 전체를 파악하고 있는 교회헌법 전문가들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에 위탁하여 초안토록 함으로 헌법 개정 후에 모순이나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게 해야 한다. 3. 제98회 총회임원회 행정의 흠결과 부작용의 대안 제98회 총회장이 이미 폐기된 헌법 개정안을 불법으로 시행·공포하자마자 누구인지 비호같이 임시목사의 칭호가 시무목사로 개정된 것처럼 새 헌법 책을 발간하였고 총회임원회는 개정된 시무목사로 시행하라는 공문을 각 노회에 하달하였다. 이와 같은 헌법 책의 신속한 발간과 총회임원회 행정의 흠결로 인하여 전국 노회는 임시목사의 칭호와 불법적인 시무목사의 칭호를 혼용하는 대혼란에 직면하고 있다. 각 치리회는 교회 회의법과 교회법의 법리를 깊이 숙달하여 본건과 같은 치리회의 흠결이 재발되지 않기를 바라며, 본건에 대한 치유의 대안으로 총회가 속히 임시목사의 칭호를 전임목사로 개정하면 그 어떤 모순과 부작용도 발생치 않을 것임으로 이를 제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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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04
  • [성경인물탐구] 사도 야고보의 인생(1)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야고보는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입니다. 그는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갖기도 하였는데 그는 사도 중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지닌 야고보는 사도요한의 형으로서 어부인 세베대의 아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이종 사촌지간이었습니다. 그가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지니게 된 것은 그의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야고보는 열두 제자 중에서도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예수께 특별한 신뢰와 사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변화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실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이 그 자리에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신임을 받을 만큼 신앙에 열심이 있었는데 이는 초대교회 박해 때에 헤롯 아그립바 1세에게 최초로 순교당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로부터 시작된 순교자들의 피는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의 영광을 받으실 때가 가까워 온 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사마리아 지역을 통하여 가시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사마리아에서 예수께서 쉴 곳을 마련하려 했으나 예루살렘을 향하여 간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였으므로 사마리아인도 유대인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자신들이 불을 명하여 하늘로 쫓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말에 대해 심히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급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분을 토해 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마리아인에 대해 저주의 말을 함으로써 예수께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 형제 요한과 함께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께서 영광중에 계실 때 자신들을 좌우편에 앉게 해주실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메시야로서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세상의 왕이 되어 다스릴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께 높은 권세의 자리를 구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야고보와 요한뿐 아니라 예수를 쫓는 자들이 보편적으로 품고 있는 야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 중에 누가 더 높은가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제자들의 어리석은 논쟁을 책망하시면서 가장 낮아지는 자가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세상과 천국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교훈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쫓으면서도 세속적 욕망에 가득 찬자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다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러한 어리석은 자를 변화시키시어 야고보를 최초의 순교자라는 영광된 자리에 앉히셨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순교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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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04
  • [성공칼럼] 믿습니다와 믿음
    많은 사람들이 “나는 당신만 믿는다.”, “나만 믿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교회에서도 “믿습니까?” “믿습니다”라는 말과 성경에서도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등의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나를 믿어라.”와 “믿습니다”의 믿음과 성경에 나오는 ‘믿음’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믿습니다’의 믿음은 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믿음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에게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할 때 이 말은 자녀가 부모의 뜻대로 따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에 자녀를 얽어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도 믿음을 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믿음이란 진리를 시인하고 진리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말은 예수께서 주님과 하나님, 구원자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시인하고 예수께서 명하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 믿음에는 믿음을 이용하여 무언가를 얻으려는 것은 없고 도리어 내가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성경 마가복음에 예수께서 시장하실 때 무화과나무가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하셨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에 무화과나무가 뿌리 채 마른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하셨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수많은 종교적 행사는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집인 예루살렘 성전은 종교권력과 이권다툼으로 강도의 소굴이 되었으며, 최소한의 선도 없는 뿌리부터 썩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회복한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할 수 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근본을 놓치지 말라는 말씀이다. 한국교회는 수십 년간 믿음을 내 목표를 이루어내는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어려서 교회에서 부흥회할 때면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주님 믿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고 했다. 연 초나 병 고침을 받는 기도원에서도 ‘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하다. 믿음이 없다’하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믿음은 전혀 이런 것이 아니다. 믿음은 내 원하는 것을 얻는 도구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 쳐해 있든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의 말씀대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나무를 살펴보면 나무속에 생명과 사랑과 좋은 것들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생명, 사랑, 좋은 것들이 나무의 형체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나무는 그늘로, 향기로, 새들의 보금자리로, 열매로 주변에 선을 베풀고 있다. 이처럼 믿음에는 진리가 있어야 하며 그 진리 속에는 생명인 사랑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랑과 진리를 담고 있는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만약 이 셋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이 된다. 예수께서 마지막에 ‘불법이 성함으로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마지막 날이란 믿음이 있노라하면서 불법을 행하거나 믿음에 사랑이 없거나 그 믿음이 선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날 즉 믿음을 잃어버린 날일 것이다. 믿음은 누구를 이용하여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고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밝고 당당하고 힘이 되어주고 자유를 만들어주는 삶을 살면서 믿음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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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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