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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칼럼] 해외 한인선교사 수양회 인도 見聞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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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4일(목) 아침, 드디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공항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대서양의 카나리아 섬으로 떠나야 한다. 공항 구내에서 쉬면서 기다린다. 여기 저기 중무장한 군인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오가고 있다. 며칠 전 벨기에 수도 브뤼셀 공항에서 극렬분자로 추정되는 자들에 의해 <폭탄테러>가 일어나 전체 유럽이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수준 높은 보안과 평온’이 자랑거리이던 유럽이 소수의 테러범들 때문에 요즘 몸살을 앓고 있다. 참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지구촌의 모든 인류는 한 조상 아담(Adam)의 같은 후손들이 아닌가! 그런데 어이하여 서로 의심하고 증오하고 심지어 싸우고 전쟁까지 하고 있는 것일까? 소중한 인간을 죽이기 위하여 끊임없이 무기를 만들고, 더 무서운 성능의 무기를 계속하여 개발하고, 심지어 우리의 동족인 저 북한 같은 경우 한 순간에 수십만 명을 죽일 수 있는 <핵무기>를 비밀리에 연구·개발하고 있으니 이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한 상념에 젖어 있는데 문득 공항 터미널에 걸려있는 현수막 하나가 내 눈을 끌어 들인다. 「우리는 인생을 환승(transfer)하기 위하여 여기 암스테러담 공항에 왔다. 우리는 세상을 보기 위하여 여기에 왔다」 세계적인 공항으로서 자부심을 한껏 과시하는 글귀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날 때 실로 우리는 내 인생을 환승할 수 있다. 카나리아 섬은 유럽 대륙에서 한참 남쪽으로 처져 위치한다. 서부 Africa의 앞 바다인 대서양쪽이다. 그런데도 왜 유럽에 속하고 있으며 거기다가 스페인령일까? 아프리카 사람들은 힘이 없고 눈을 빨리 뜨지 못한 결과 자기들 앞마당을 남에게 내어주고 만 것이다. 아름다운 7개의 섬 전체(카나리아 군도)를 스페인에 내어주고 만 것이다. 우리나라 제주도 크기의 Grand Canaria를 비롯하여 이 섬들은 한결같이 아름다고 특히 연중 따뜻하고 뜨겁기 때문에 북 유럽 사람들의 눈에는 환상적이고 <낙원>으로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스웨덴,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 사람들이었다. 이 아름다운 섬을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은 과분한 축복이다. 학생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던 <카나리아 군도>를 찾아와서 발을 딛는다는 것은 황송하면서도 실로 가슴 뛰는 경험이다. 라스팔마스 선교교회에서 집회인도를 요청해 주심으로 이루어지는 경험이다. 교회에 도착하여 감사기도를 드릴 때 온갖 감회가 떠올랐다. 권사님들이 육개장으로 저녁식사를 만들어 놓았다. 한국에서 보다 더 한국적인 맛을 내는데 실로 최고의 솜씨였다.3월 24일(목)-29일(화)까지 무려 5박 6일 동안 머무는데 <과분한 환대>를 거교회적으로 해 주신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의 사랑 이 이토록 우리를 강권해 주신다.(고후5:14) 난생 처음 만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친가족 이상으로 <환대> 해 주시니 감동 또 감동이다. 이 사랑의 빚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오래 오래 기억하면서 힘써 갚으리라. 라스팔마스 선교교회 성도들은 대체로 35-37년째 그곳에 살고 있었다. 담임목사님도 20년째 그 땅을 지키고 있으니 저절로 내 머리가 숙여진다. 저들이야 말로 <대한독립군>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들은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말 장하고 아름다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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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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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률상식] 미조직교회 목사 임시목사인가 시무목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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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가 임시목사를 시무목사로 헌법 개정한 사실 없어-공포할 권한 없는 총회장이 공포한 개정안 효력 없어
합동총회 산하의 노회들이 각 지교회의 시무목사(정치 제10장 제3조)인 위임목사, 임시목사, 부목사 중 임시목사의 칭호에 대하여 시무목사로 그 칭호를 개정·공포한 것으로 착각하여 임시목사를 시무목사라고 호칭하는 노회가 있는가 하면, 사실 관계의 법리를 바로 이해하는 일부 노회는 여전히 임시목사라고 호칭하는 관계로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바 부득불 글을 쓰게 됨을 먼저 밝힌다. 1. 사건 발단의 법리적 사실 관계 제94회 총회 헌법개정위원회(위원장 서광호 목사)가 목사의 칭호 중에 임시목사를 시무목사로 개정안을 초안하여 제95회 총회에 보고한 결과 총회는 개정 초안을 상세히 검토하지도 아니하고 초안대로 보고를 받아 노회 수의에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노회 수의 과정에서 헌법 개정안 내용 중에 심각한 문제점이 발견되어 언론에 수차례 보도되었고(한국기독신문 제630호, 제632호, 교회 법률상식 pp. 207-209 참조), 당시 홍천에서 개최된 전국 장로회 연합회 수련회 현장에서도 참석자들이 문제를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본 사건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제96회 총회에서 헌법 개정안에 관한 노회 수의 결과를 총회에 보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총회장이 헌법 개정에 대하여 공포를 하지 않고 총회를 파회함으로 임시목사를 시무목사로 개정하기로 한 개정안은 자동적으로 폐기되었다. 그래서 제96회 총회와 제97회 총회 기간에는 임시목사로 칭호를 계속 호칭하였으나 제98회 총회 시에 이미 폐기된 헌법 개정안에 대하여 공포하여 시행하자는 헌의 안이 접수되어 제98회 총회가 접수해서도 안 되고, 취급할 수도 없는 서류를 총회현장에서 토의하다가 결국은 모 회원이 “추안 공포” 운운하면서 공포를 강요하자 폐기 된지 2년이나 지나서 공포할 수도 없고 공포할 권한도 없는 제98회 총회장이 무리하게 공포한 결과 일부 노회가 불법적으로 임시목사의 칭호를 시무목사의 칭호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2. 폐기된 헌법 초안의 문제점 본 건의 문제점은 부지기수이나 2가지만 열거한다. (1) 시무목사에게 독재 정치의 특권을 허용하는 개정안 장로회 정치의 근본 원리는 교인들이 치리장로를 투표하여 교인의 대표자로 장립 위임할 때에 치리에 복종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또 위임목사를 투표하여 청빙하고 위임예식을 거행하면서 치리에 복종하겠다는 서약을 함으로 당회에 치리권이 발생하여 목사와 장로가 회의하여 결의된 대로 치리하는 것이 곧 대의 민주 정치인 장로회 정치이다. 그런데 개정안 내용의 시무목사는 교인의 대표자인 치리장로도 없으면서 교인들의 투표도 없이 당회장의 청원으로 노회의 허락을 계속 시무하게 함으로 마치 감독 정치나 교황 정치 체제의 기틀을 마련하는 헌법이 되어 시무목사에 한해서 독재 정치를 합법화하여 스스로 장로회 정치를 포기하는 교단으로 전락하는 개정안이다. (2) 임시목사는 정회원, 위임목사는 언권 회원이 되는 개정안 제96회 총회를 파회하면서 폐기된 시무목사로 명칭을 개정 초안 되었던 개정안은 정치 제10장(노회) 제3조(회원 자격)에 “각 지교회 시무목사와 정년 이전의 원로목사와 총회나 노회가 파송한 기관 사무를 위임한 목사는 회원권을 구비하고 그 밖에 목사는 언권 회원이 되며 총대 권은 없다.”고 하였으니 본 규정의 문장과 문맥상으로 볼 때 “위임목사는 그 밖에 목사”가 될 수밖에 없어 언권 회원이 되고 총회 총대권도 없는 목사가 되어 버린다. 헌법을 개정할 때 헌법 전체를 보지 않고 어느 한 부분만 개정하게 되면 이와 같은 부작용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헌법 개정 초안은 아무나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헌법 전체를 파악하고 있는 교회헌법 전문가들로 구성된 특별 위원회에 위탁하여 초안토록 함으로 헌법 개정 후에 모순이나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게 해야 한다. 3. 제98회 총회임원회 행정의 흠결과 부작용의 대안 제98회 총회장이 이미 폐기된 헌법 개정안을 불법으로 시행·공포하자마자 누구인지 비호같이 임시목사의 칭호가 시무목사로 개정된 것처럼 새 헌법 책을 발간하였고 총회임원회는 개정된 시무목사로 시행하라는 공문을 각 노회에 하달하였다. 이와 같은 헌법 책의 신속한 발간과 총회임원회 행정의 흠결로 인하여 전국 노회는 임시목사의 칭호와 불법적인 시무목사의 칭호를 혼용하는 대혼란에 직면하고 있다. 각 치리회는 교회 회의법과 교회법의 법리를 깊이 숙달하여 본건과 같은 치리회의 흠결이 재발되지 않기를 바라며, 본건에 대한 치유의 대안으로 총회가 속히 임시목사의 칭호를 전임목사로 개정하면 그 어떤 모순과 부작용도 발생치 않을 것임으로 이를 제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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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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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탐구] 사도 야고보의 인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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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야고보는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입니다. 그는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갖기도 하였는데 그는 사도 중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지닌 야고보는 사도요한의 형으로서 어부인 세베대의 아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이종 사촌지간이었습니다. 그가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지니게 된 것은 그의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야고보는 열두 제자 중에서도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예수께 특별한 신뢰와 사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변화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실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이 그 자리에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신임을 받을 만큼 신앙에 열심이 있었는데 이는 초대교회 박해 때에 헤롯 아그립바 1세에게 최초로 순교당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로부터 시작된 순교자들의 피는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의 영광을 받으실 때가 가까워 온 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사마리아 지역을 통하여 가시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사마리아에서 예수께서 쉴 곳을 마련하려 했으나 예루살렘을 향하여 간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였으므로 사마리아인도 유대인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자신들이 불을 명하여 하늘로 쫓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말에 대해 심히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급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분을 토해 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마리아인에 대해 저주의 말을 함으로써 예수께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 형제 요한과 함께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께서 영광중에 계실 때 자신들을 좌우편에 앉게 해주실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메시야로서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세상의 왕이 되어 다스릴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께 높은 권세의 자리를 구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야고보와 요한뿐 아니라 예수를 쫓는 자들이 보편적으로 품고 있는 야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 중에 누가 더 높은가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제자들의 어리석은 논쟁을 책망하시면서 가장 낮아지는 자가 높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세상과 천국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교훈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쫓으면서도 세속적 욕망에 가득 찬자들이었기에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다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러한 어리석은 자를 변화시키시어 야고보를 최초의 순교자라는 영광된 자리에 앉히셨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순교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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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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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 믿습니다와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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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나는 당신만 믿는다.”, “나만 믿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교회에서도 “믿습니까?” “믿습니다”라는 말과 성경에서도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등의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나를 믿어라.”와 “믿습니다”의 믿음과 성경에 나오는 ‘믿음’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이다. ‘믿습니다’의 믿음은 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믿음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에게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할 때 이 말은 자녀가 부모의 뜻대로 따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에 자녀를 얽어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도 믿음을 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믿음이란 진리를 시인하고 진리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말은 예수께서 주님과 하나님, 구원자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시인하고 예수께서 명하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 믿음에는 믿음을 이용하여 무언가를 얻으려는 것은 없고 도리어 내가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성경 마가복음에 예수께서 시장하실 때 무화과나무가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하셨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에 무화과나무가 뿌리 채 마른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하셨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수많은 종교적 행사는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집인 예루살렘 성전은 종교권력과 이권다툼으로 강도의 소굴이 되었으며, 최소한의 선도 없는 뿌리부터 썩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회복한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할 수 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근본을 놓치지 말라는 말씀이다. 한국교회는 수십 년간 믿음을 내 목표를 이루어내는 수단으로 사용해 왔다. 어려서 교회에서 부흥회할 때면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주님 믿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 고 했다. 연 초나 병 고침을 받는 기도원에서도 ‘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하다. 믿음이 없다’하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믿음은 전혀 이런 것이 아니다. 믿음은 내 원하는 것을 얻는 도구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 쳐해 있든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의 말씀대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나무를 살펴보면 나무속에 생명과 사랑과 좋은 것들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생명, 사랑, 좋은 것들이 나무의 형체 안에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나무는 그늘로, 향기로, 새들의 보금자리로, 열매로 주변에 선을 베풀고 있다. 이처럼 믿음에는 진리가 있어야 하며 그 진리 속에는 생명인 사랑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랑과 진리를 담고 있는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만약 이 셋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이 된다. 예수께서 마지막에 ‘불법이 성함으로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마지막 날이란 믿음이 있노라하면서 불법을 행하거나 믿음에 사랑이 없거나 그 믿음이 선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날 즉 믿음을 잃어버린 날일 것이다. 믿음은 누구를 이용하여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고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밝고 당당하고 힘이 되어주고 자유를 만들어주는 삶을 살면서 믿음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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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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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해 봅시다] 노인들 넘어지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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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절로 입원하면 미동도 못해
근육량 감소로 생명이 위태로워
현대사회에서 오복은 첫째로 건강해야 하고, 둘째는 배우자가 있어야 하고, 셋째는 적당한 재산이 있어야 하고, 넷째는 일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친구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모두 옳고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첫번째인 건강 이상으로 더 소중한 것은 없다. 건강을 잃고 나면 세상 온갖 것이 다 의미가 없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건강을 잃은 후에야 와닿는 말이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아왔든지간에 이제 남은 건강이라도 알뜰히 챙겨야 한다.
필자의 주변에 넘어져 다쳐 고생하는 노인들이 많은 것을 보면서 오늘은 넘어지면 안되는 것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젊은이도 넘어지면 안되지만 특히 노인들은 절대로 넘어지면 안된다. 건강하던 노인도 엉덩이뼈나 고관절이 부러지면 절반이 두달 이내에 숨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한해 넘어져서 사망하는 65세 이상의 노인이 85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넘어지는 원인은 바닥이 미끄러워서가 25%, 문이나 보도 턱에 걸려서가 17.9%, 어지러워서가 17%라고 한다.
필자가 아는 몇몇은 화장실 안에서 넘어져 다쳤다. 서서 바지를 입다가 넘어져 다친 사람도 있다. 웃을 일이 아니다. 서서 균형을 잡기 곤란한 노인들은 바지를 침대에 걸쳐 앉거나 벽에 기대고 입어야 안전하다.
넘어져 다쳐도 팔, 손목 등 상지부위가 부러진 것은 생명과는 관련이 없지만 하지 쪽이면 상황이 달라진다. 사망으로 이어지느냐, 아니냐는 걸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다리만 부러졌는데도 2,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노인은 젊은이와 달라서 하루만 가만히 누워있어도 근육의 손실이 엄청나다고 한다. 근육의 감소는 완만하게 일어나서(매년 0.7%) 60세부터는 2배 이상(매년 2%) 빠르게 진행된다고 한다. 그래서 80세 노인의 근육은 60세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은 근육의 힘으로 생명이 유지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넘어져 다쳐 입원하면 근육을 자극하는 활동을 전혀 못하기 때문에 근육의 양이 급격히 감소한다. 입원환자의 근육은 일주일에 10%씩(혹은 그 이상) 감소해 한달동안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으면 근육이 입원 전에 비해 50% 정도 감소한다고 한다. 젊은이들도 넘어져 다치는 일이 없어야 하지만 특히 노인들은 절대로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해야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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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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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그 땅을 그려오라 (수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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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말씀은 여호수아서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한발자국도 밟아보지 못했던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아직도 기업을 받지 못한 지파가 7지파라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너희들은 언제까지 미적거리고 지체하겠느냐 일어나서 그 땅을 두루두루 다니면서 그 땅을 그려서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40년 전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정탐을 나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 이스라엘 각 지파에 최고 엘리트들 12명을 선발해 가지고 가서 정탐을 하고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 10명의 보고서와 갈렙과 여호수아 2명의 보고서가 확연히 차이가 나는데 오히려 10명이 내는 보고서가 과학적이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정확한 보고를 하는데 그 사람들은 하나님하고 상관없는 눈에 보이는 대로 계산하는 대로 보고를 한 것이고 갈렙과 여호수아는 현실적인 계산을 넘어서 하나님이 주신다, 언약하신 땅을 가서 차지하자고 합니다. 10명의 정탐꾼이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니고 각 지파에 보스들 엘리트들 두령들입니다. 이사람들이 가서 보니까 눈에 보이는 3가지 뚜렷한 차이가 납니다. 첫째, 무기가 다릅니다. 가나안 족속은 철병거로 무장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멩이와 작대기 들고 설칩니다. 둘째, 신체 사이즈가 달랐습니다. 거인 앞에 메뚜기와 같습니다. 셋째, 군량미가 다릅니다. 포도송이를 장정들이 걸머지고 갈만큼 그렇게 큽니다. 10명의 정탐꾼은 정확하게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우리는 메뚜기 같다 이렇게 진단을 하고, 갈렙과 여호수아는 정반대 얘길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단순한 보고가 아닙니다.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믿음에 의한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언약하신 약속하신 것은 우리가 가서 차지하자 믿음에 의한 절대 믿음, 절대 기도, 절대 순종으로 갈렙과 여호수아는 나갔고, 불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을 거역했던 10명의 정탐꾼과 백성들은 다 죽습니다. 6절 끝에 그 땅을 그려가지고 내게로 오라, 그러면 그려서 가지고 온 그 땅을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으리라. 제비를 뽑는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사람이 제비를 뽑지만 그것을 허락하시고 결재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파수꾼의 경성함이 여호와께서 지켜주지 않으면 도루묵입니다. 우리가 선택하고 판단하고 경영하고 계획하고 구상을 하지만 마지막 결재를 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속에서 답을 찾는 사람은 성경 속에서 네비게이션을 찾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을 내다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구상을 하고 발상을 하고 착상을 할 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얼마나 큰일을 이루실지 모릅니다.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겁먹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기권하지 말고 자살하지 말고 여러분 중심을 딱 잡고 하나님, 제게 새 힘을 주셔서 성령으로 기름 부어주셔서 성령이 임하시면 늙은이도 꿈을 꾼다고 하는데 제게 꿈을 주시옵소서! 상상력을 주시옵소서! 신앙생활은 내 감정, 내 기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계획이 어디 있는가? 그걸 물어보고 기도하고 찬송하십시오. 이 시대 영혼의 기지개를 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마음의 넉살을 키우고 마음의 담력을 키워서 이 봄철에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상상하고 기대하면서 여러분의 그림을 멋지게 도안하고 그려 나가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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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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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칼럼] 완벽주의를 용서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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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내가 쓰는 말 가운데 ‘절대로’, ‘반드시’, ‘언제나’, ‘매일’, ‘결코’, ‘항상’, ‘꼭’ 등의 단어가 자주 튀어나오지는 않는가? 만약 이런 말들을 되풀이 사용하고 있다면 이미 나는 완벽주의자의 성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완벽주의가 갖는 가장 큰 특징은 지킬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이라도 어기게 되면 스스로 실망하고 자책하게 되어 이제까지 이루어 좋은 커다란 성과까지도 허물어 버릴 위험성이 크다는 점이다. 완벽주의 부모 밑에 자라난 자녀들은 늘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자존감이 낮으며 의욕상실에 빠져 아예 자포자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자신과 타인에 대하여 매우 인색하고 경직되어 있으며 고집이 세고 사고에 유연성이 없다. 도덕과 윤리 가치에 너무 엄격한 까닭에 매사에 비판적이기도 하다. 쓸모없는 일에 과잉 헌신을 하게 되는가 하면 룰이나 규범 스케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까닭에 핵심을 놓칠 수가 있다. 칼 힐티는 이렇게 말했다. “미완성을 괴로워하지 말라.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완성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깨닫게 하려고 일부러 수많은 미완성을 내려 주셨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 때는 일에 몰두할 때이다.” 내가 나의 불완전성과 미완성을 인정할 때 다른 사람의 연약성까지 받아들이게 된다. “용서는 담배를 끊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나는 무려 50번이나 노력했다”고 말한 사람은 루이스(C. S. Lewis)였다. 루이스가 이 정도였다면 보통의 범인들은 도대체 몇 번이나 노력을 해야 할까? 어쩌면 평생 노력해야 할 용서가 있다면 자신의 완벽주의가 아닐까? 이런 완벽주의에 빠져들 때마다 이런 시 한편으로 내 마음을 다스려 보곤 한다.<우리의 아름다움>기대한 만큼 채워지지 않는다고 초조해지지 마십시오. 믿음과 희망을 갖고 최선을 다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몫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더 사랑하지 못한다고 애태우지 마십시오.마음을 다해 사랑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분량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지금 슬픔에 젖어 있다면 더 많은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고 자신을 탓하지 마십시오.우리가 흘린 눈물,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누군가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한다고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아파하면서 용서를 생각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분량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모든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고 괴로워하지 마십시오.날마다 마음을 비우면서 괴로워 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분량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빨리 달리지 못한다고 내 발걸음을 아쉬워하지 마십시오.내 모습 그대로 최선을 다해 걷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세상의 모든 꽃과 잎은 더 아름답게 피지 못한다고 안달하지 않습니다.자기 이름으로 피어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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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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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어린이에게,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생명이 우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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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레킨벤키저(Oci Reckitt Benckiser)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국내 대그룹 계열 회사였던 ‘옥시’를 2011년 외국 기업이 인수해서 붙인 회사명입니다. 이 회사가 그 때로부터 생산한 가습기 살균제 ‘옥시’가 최근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 제품 관련 정부가 확인된 피해자만 530명에 달하고 그 중 사망자만도 143명인데, 그 중 절반이 영유아를 비롯한 어린 아이들이었습니다. 어른들의 탐욕 때문에 어린 생명들이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꺾였습니다. 어린이날 모처럼 긴 연휴를 맞아 비행기 티켓은 물론 휴양지 콘도나 펜션까지도 벌써부터 예약이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장난감 가게나 백화점에는 어린 자녀를 유혹하는 선물들이 즐비합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 아이들은 그리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어린이들 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 꼴찌 수준입니다. 국민소득이 우리보다 훨씬 낮은 몇 나라보다도 한참 밑에 있습니다. 초등학생의 12%, 중학생의 23%, 고등학생의 30%가 시시때때로 자살충동을 느낀다고 답한 리서치 결과도 본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생조차 방과 후에 학원 몇 개를 매일매일 전전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주5일근무제가 정착된 지 얼마인데 아직도 우리 아이들은 주말에도 주일에도 학교에 학원에 가야 합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이것은 일종의 인권유린이며 아동학대입니다. 좀 더 창의적으로 표현한다면 일종의 ‘어린이인권’에 대한 침해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어째서 아무도 이런 현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걸까요? 한국에서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동성애 반대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성애에 대해 미연방대법원이 합법화 취지로 판결을 내린 이후(2015.6) 옹호론자들이 환호성을 질렀지만 동시에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반대하는 운동도 거세졌습니다. 그런데 한국과 미국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에서는 정치인이나 공적 인물들은 물론 일상의 대화 속에서도 낙태찬성론자인지 낙태반대론자인지 밝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abortion controversy, ex. 2013.1.22.). 대부분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낙태를 반대합니다. 그들은 너무나 당연히 동성애를 반대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에는 힘이 실려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다릅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낙태를 반대하는 의사들 모임인 ‘프로 라이프(pro life) 의사회’와 같은 곳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부가 최초로 공식적인 낙태 실태 조사를 한 것은 2004년이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한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낙태는 연간 34만 건인데 모자보건법 상 이루어지는 낙태는 그 중 4.4%에 불과하고, 나머지 32만 건은 불법적인 낙태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5년 후 조사 결과 역시 출생아 대비 낙태건수는 OECD 국가 중 1위, 낙태율(가임여성 1,000명 당 낙태 건수) 세계 4위를 기록했습니다. 버려지는 영아의 경우는 정확하게 파악조차 되지 않는 실정입니다. 인류 역사를 고찰해 보더라도 동성애는 성별 수요공급의 원리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경우 남아선호사상에다가 의학의 발달과 퇴보하는 의료윤리가 합쳐져 여자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처 피워보지도 못하고 꺾여버리는 생명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이런 이야기를 공론화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성애 반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동성애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낙태를 말하고 영아유기에 대해 말하며 어린이권리 특히 어린이생명의 존엄과 가치에 대해 너무도 무심한 이 사회에 주의를 환기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역할을 교회가 수행했어야 합니다. 목사들이 같은 주제로 설교하다가 잡혀갈까봐 두려워한다는 인상을 주는 정도로 어떻게 이 무심한 사회를 설득시키고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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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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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 푸른 버드나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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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화사한 꽃들이 피어나는 향긋한 봄이다.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강물이 얼어붙던 겨울이 따뜻한 봄바람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느 봄날 오후, 문득 서재에서 창밖을 본 순간 앙상한 버드나무 가지에서 푸른 싹이 터 오르는 것을 보았다. 싹만 나온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가 봄바람 결에 흔들렸다. 그 순간 나의 마음도 흔들렸다. 아니, 하나의 공간, 우주의 공간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가녀린 나뭇가지의 흔들림 속에 광활한 우주의 질서와 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속에서 절박한 꿈의 몸부림을 본다. “나, 여기 살아 있어요. 보세요. 마침내 긴긴 겨울을 견디고 다시 살아나 새싹을 피웠잖아요.” 나도 저 푸른 버드나무 잎사귀처럼 꿈꿀 수 없을까. 꿈이 잠든 시대다. 겨울 버드나무처럼 말이 없다. 버려진 주검처럼 차갑다. 청년 실업과 자살, 사이코패스 범죄,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한 성적타락, 이념, 지역, 계층갈등, 경제공항 등 암울한 현실 속에 꿈이 보이지 않는다. 한국교회도 내부 분열과 다툼, 반기독교 세력과 정서의 공격으로 인하여 끝없이 추락하고 쇠퇴하고 있다. 마치 메마른 겨울 버드나무처럼 보인다. 겉으로 볼 때는 죽은 나무 같다. 차가운 눈보라에 껍질이 벗겨져 나가고 상처투성이다. 그러나 난 보았다. 봄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 끝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새싹을.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 있었고, 꺼져 있는 것 같았으나 그 속에는 붉은 불덩이가 타오르고 있었다는 것을. 절망과 상실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니다. 그 속에는 분명 생명의 씨앗이 있다. 희망의 노래가 숨겨져 있다. 푸른 버드나무는 차가운 새벽바람과 이슬을 맞으면서도 끝끝내 새싹을 피워 올리지 않는가. 우리의 새로운 삶, 제2막의 인생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내 안에 죽지 않고 꿈틀거리는 생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 다시 푸른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저 봄날 오후의 버드나무가 보여주는 생명의 신비처럼 나 여기 살아 있다고 손짓하며 웃을 수 있지 않을까. 문득 내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체면과 내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더 독기를 품고 날마다 도서관에 가서 살았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도서관에 책이 없으면 서점까지 가서 읽고 또 읽었다. 그래서 나를 만나려면 채플실에서 기도하는 나를 만나든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나를 만나든지 해야 했다. 그때 입력해 놓은 것이 축적되어 지식의 인프라가 되고 있다. 그때는 누구도 나를 주목하지 않았다. 누가 부목사로 써주지도 않아 신학교를 졸업하고 갈 곳도 없었다. 죽은 버드나무 같았다.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광대뼈만 쭉 나온 가난하고 배고픈 신학생이었다. 그런데 나에게도 봄날이 다가왔다. 내 삶에도 향기가 나고 푸름을 자랑하는 싹이 나고 꽃이 피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창가로 다가가 봄날 오후의 버드나무를 바라보니 마치 그 나무가 내 젊은 날의 모습을 투사해 주는 것 같았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싹을 낸 버드나무…. 그건 춥고 가난하고 외로웠던 내 젊은 날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어느덧 나는 혼자 이렇게 고백하였다. “버드나무야, 살아줘서 고맙다. 네가 겨울을 이기고 살아줘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거야. 겨울 끝에서 피어나는 너의 절박한 꿈이 많은 사람들을 살려 낼 거야. 푸른 버드나무야, 넌 겨울은 봄을 결코 이길 수 없음을 보여주는 한편의 시요 설교가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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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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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넉 달 빠르게(요 4: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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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약속에 10분을 지각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상대방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들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일평생 손목시계를 비롯한 집안의 모든 시계를 10분 앞당겨 놓았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시계는 10분이 아니라, 무려 네 달이나 먼저 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35절을 보면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두 종류의 시계가 나옵니다. 하나는 추수할 때가 아직 넉 달이나 남았음을 보여주는 시계입니다. 이 시계는 소위 <자연의 시계>로서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시계입니다. 또 하나의 시계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시계로서 <실존적 시계, 혹은 영적 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계는 자연의 시계 보다 넉 달을 먼저 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추수할 때가 넉 달이 남았다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의 이미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유대에서는 우기가 시작되는 11월경에 농사를 시작하여 봄에 추수하는 게 보통입니다. 10-11월경에 와서 땅을 적시는 비를 <이른 비>라고 부르고, 봄철에 내리는 비를 <늦은 비>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 말씀은 11월-12월경에 하신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니 추수할 봄까지는 아직 넉 달이 남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곡식의 추수를 말씀하신 게 아니라, 영혼의 추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수가 성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메시아로서 복음을 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넉 달>을 앞당겨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넉 달 빠르게 살아가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연적 시간 보다 실존적 시간을 더 중시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지금 우리는 자연적 나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이 보다 우리 시간이 더 많이 흐른 것처럼 여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즉 현재 실제 나이가 오십 세라면, 마음으로는 육십 세 정도 된 것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게으름과 어리석은 여유를 부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실존이란 자연적 시간과 별 관계가 없습니다. 나이가 사십 세인 사람이 육십 세인 사람 보다 더 먼저 부르심을 받을 수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기면 관심의 대상도 자연스럽게 달라집니다. 시간이 많이 남은 것으로 여기면 여기 저기에 쓸데없는 관심을 가지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면 쓸데없는 것, 덜 중요한 것은 걸러내고 정말로 중요한 것만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할 때 맨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한 랍비는 ‘그 누구도 임종 때에 더 많은 일을 못한 것이나,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은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시간을 앞당겨 사는 사람은 사랑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을 따스한 가슴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이종선씨의 <따뜻한 카리스마>란 책에 의하면 성공의 비결 중 85%가 사랑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기술과 능력이 성공에 차지한 비율은 겨우 15% 뿐이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될수록 사랑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실존 시계의 바늘을 <넉 달> 정도 당겨 놓고 사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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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