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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엑스 호도스(Ex-Hod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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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델란드 자유대학교 한스 로크마커교수는 그의 책 ‘예술은 변명을 요하지 않는다’에서 17세기 일본의 유명한 화가였던 후쿠사이 교수의 일화를 소개한다. 유명한 화가였던 그에게 친한 친구 찾아와서 수탉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수탉을 그려본 적이 없었던 그는 친구에게 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다시 친구가 찾아왔을 때 또 일주일을 연기했다. 그 다음에는 2주일을 연기하고 다음에는 한 달을 연기하고 그렇게 3년이 지났다. 3년 후에 다시 찾아온 친구에게 또 그림을 연기를 하려 하자 친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크게 화를 냈다. 그러자 후쿠사이 교수는 말없이 붓을 잡고 종이위에 순식간에 그림을 그렸다. 살아있는 수탉보다 더 생동감 있는 그림이었다. 이를 본 친구는 더 화를 냈다. ‘이렇게 순식간에 잘 그릴 수 있는데도 3년 동안 기다리게 한 것은 자신을 무시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쿠사이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가 난 친구를 자신의 화실로 인도했다. 그런데 그의 화실에는 완성되지 못한 수탉의 그림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삼년동안 수없이 많은 수탉을 그려보았지만 만족할만한 그림이 나오지 않았기에 버리고 또 버리곤 하였던 것이다.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재능이 있어야 한다. 재능이 없이는 훌륭한 예술가가 되기 힘들다. 그러나 재능만으로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 그 재능 위에 후천적인 훈련이 더해져야 한다. 뼈를 깎는 노력이 계속될 때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애굽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출애굽의 노력이 필요하다. 출애굽기의 영어 이름은 ‘Exodus’이다. 이 말은 헬라어에서 유래했는데 'ex'는 ‘밖으로’라는 뜻이고 'hodos'는 ‘길’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아니라 ‘그 길 밖으로 나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출애굽 성인 세대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ex-hodos’ 즉 길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 과거의 애굽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이 없었고, 새로운 길에 들어섰으면 부단히 부단히 노력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교회와 가정이 하나님의 vision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길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김은영 박사는 ‘이미지 메이킹’에서 know youself(너 자신을 알라). Develop Yourself(너 자신을 개발하라). Package Yourself(너 자신을 포장하라). Market Yourself(너 자신을 상품화하라). Be Yourself(너 자신이 되라)고 했다. ex-hodos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이미지를 메이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므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을 보여 드려야 한다. 우리 자신을 살피고,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자세를 발전시키고, 우리 자신을 말씀의 진리로 포장하고, 천국의 시장에 아름다운 상품으로 내어놓아야 한다. 이렇게 교회가, 가정이, 성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상품이 될 수 있도록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후천적인 노력의 ‘ex-hodos’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 베풀어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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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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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률] 봄 정기노회에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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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봄 정기노회를 은혜 중에 마쳤다.”고 언론 보도가 자자하다. 그런데 일부 노회들이 월요일에 개회하여 당일 저녁시간에 노회회무를 마치고 폐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대만 해도 정기노회는 모든 노회가 월요일 오후 2시에 개회하여 수요일 오후 5시까지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에는 “회기 연장을 결의”하고 마지막 날인 수요일 오후 6시가 지나도록 회의를 하던 경우가 노회회원으로서 직접 여러 차례 경험한 일이 기억된다. 그러나 요즈음은 노회가 처리해야 할 안건 수도 1980년대보다는 훨씬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으로 월요일 하루에 서둘러 마치는 것이 일반화 되어 가고 있어 심히 안타깝다. 문제는 노회 기간에 관하여는 노회 규칙에 의하여 노회절차를 옛날과 다름없이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로 정해져 있는데 노회를 진행하면서 월요일 하루에 기필코 마친다는 사실이다.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옛날의 노회기간은 월요일 오후 2시부터 수요일 오후 5시까지였음에 비하여 현재는 월요일 오전 10시부터 수요일 오후 5시까지로 4시간이나 노회 회기를 연장해 놓고 정작 노회는 월요일 하루에 끝내버리는 노회가 대부분이라고 하니 그 속셈을 알 수가 없다. 심지어 금년 봄 노회에서 어떤 노회는 월요일에 개회하여 화요일 새벽 1시까지 마라톤 회의를 했다고 언론에 보도가 되었는데 월요일 하루에 노회를 마치는 것이 무슨 자랑이나 되는 듯 착각 속에 노회를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이상과 같이 1980년대와 그 이전에는 3일 동안 소요되는 노회를 작금의 봄 노회는 월요일 하루에 개회예배, 성찬예식, 임원 선거, 총회 총대 선거, 총신 이사 선거, 지방 신학교 이사 선거, 성경학교 이사 선거, 회의록 채택, 폐회예배 등 그 외에 수백여건의 안건들을 오전 10시에 시작하여 오후 5시까지로 그것도 점심시간 2시간을 제하고 나면 겨우 5시간 동안에 모두 처리하는 것이 현실일진대 이러고도 봄 정기노회가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중에 폐회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착각을 넘어서 망발에 다름 아니다. 그 이유는 옛날 선배들은 월요일 오후 2시부터 수요일 오후 5시까지 19시간에 회의했던 노회를 지금은 월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5시간 동안에 단축해서 정기노회를 모두 마쳐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안건은 유인물을 돌리고 있는 중에 안건의 설명을 들어보지도 아니할 뿐만 아니라 유인물을 아직 받지도 못한 회원들이 있는 상황에서 “유인물대로 받자”는 동의와 재청에 의하여 처리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회원들이 박장대소한다. 그 박장대소는 어떤 의미일까? 모르기는 하지만 “해도 너무한다.”는 뜻으로 웃고 넘기자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라 임원 선거 중에 노회장, 서기, 회의록 서기, 회계 등은 단독 후보라고 하면서 은혜(?)롭게 박수로 받는 것이 일반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총회가 그렇게 하고 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언제인가 총회에서 하달된 공문에 노회 임원과 총회총대를 선정할 때에 헌법대로 선정하지 아니하는 노회는 그 사실을 실사하여 무효처리 한다고 한 지시 공한이 있었던바 이와 같은 경우가 곧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이 제격 아니겠는가! 그리고 당일에 노회를 마치기 위하여 시간에 쫒기다 보니 노회 회의 중에 가장 중요한 회의록 채택을 본회에서 채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임원회에 맡기는 것이 일반화 된 것 같아 보인다. 회의록 채택을 임원회에 맡기면 정확한 회의록이 될 수 없고, 반드시 노회 현장에서 채택해야 정확한 회의록이 된다. 그 이유는 회의록이 잘못 기록된 경우에 그 의제를 제안한 자와 동의한 자와 재청한 자들이 낭독하는 회의록 중에 잘못된 부분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교정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으로 거두절미하고 요즈음 정기노회의 회의광경은 옛날 선배들이 노회의 안건 처리에 진지함과 비교해 볼 때에 마치 아이들의 병정놀이와 같아 보여 씁쓸함을 달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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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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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 이웃사랑에서 서로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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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율법을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은 비슷해 보인다. 그렇지만 확실히 다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하든지, 자신이 어떤 해를 입든지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웃사랑은 혼자서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과도 할 수 있고, 내 내면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서로 사랑하는 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하고 반드시 둘이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은 사랑하는데 상대방이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둘 사이가 가깝다는 말이며 서로사랑은 자신의 상태를 넘어서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웃사랑’이나 ‘서로 사랑’이나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수단이 되고 상대방이 목적이 되며 하나가 되려는 결합력이 있는 것이다. 또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선한 행동하는 것이다. 이웃사랑이란 나에게 사기 쳐서 돈을 빼앗아간 사람에게 “그 사람 능력 있네! 나 같은 사람을 속이다니 그 돈으로 잘 살게나~”하면서 복을 빌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디 쉽겠는가? 그래도 이렇게 선을 보여주어야 내가 살 수 있기에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는 것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에 더 쉽지 않다. 만약에 부모는 자녀를 위해 고생고생해서 번 돈을 주는데 자녀는 그 돈으로 술 먹고 노름하고 온갖 쾌락을 누리면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쪽은 항상 명령하는 위치에 있고 다른 쪽은 복종하는 위치라면 이 또한 서로 사랑할 수 없다. 또 한 사람은 사랑하는데 상대방은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이것 또한 서로 사랑이 아니다. 그리고 상대방은 나를 위해 오로지 선한 일을 하는데 나는 받기만하고 더 달라고 한다면 이 또한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동등해야 한다. 부모와 자녀, 사장과 직원, 나이를 떠나 어떤 사이에서도 동등할 때 자유가 생기고 힘이 생기며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옛날 가부장 제도처럼 아버지는 지배자의 위치에 있고 자녀와 아내는 복종의 위치에 있는 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엔 억압이 생기고 상처가 자라나며 한이 쌓이는 것이다. 또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공감과 이해가 있어야 한다. 함께 살다보면 서로 다른 것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 생각, 종교, 정치적 견해, 원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 이런 순간에 나와 다르더라도 공감하고 이해하고 존중할 때 서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마음껏 나누는 사이여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한 번, 두 번, 열 번...계속 나눌 때 신뢰가 싹트고 기쁨이 생겨서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은 사랑하는데 그것을 가슴에만 간직하고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밝고 부드러운 말로 표현하며 또 행동으로 자신의 재능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서로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 표현할 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사랑의 기한은 언제까지 일까? 내 힘으로는 잠깐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사랑은 상황이 바뀌면 순식간에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영원히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존재가 바뀌어야 한다. 즉 자기사랑과 세상 사랑을 버리고 본래의 나를 찾아서 이 그릇에 사랑 그리고 생명이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주님사랑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주님사랑을 받아들일 때 저절로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목적으로 여기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가진 자만, 경험한 자만 알게 되는 비밀 같은 이 주님사랑을 찾고 찾아야 할 것이다. 모든 삶의 근원은 사랑이며, 삶의 존재이유도 사랑이다. 우리는 주님사랑을 받은 존재로서 이웃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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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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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귀중한 자 (역대상 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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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훌륭하신 어머니들이 나옵니다. 한 사람이 훌륭하게 자라는 데에는 누군가의 희생과 눈물이 있어서 입니다. 그녀들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눈으로 자녀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어머니 요게벳은 모세의 준수함을 보고 차마 죽일 수 없어 세달 간 숨깁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아이라면 반드시 살려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하나님 손에 맡기고 아이를 갈대상자에 담아 강물에 떠내려 보냅니다. 애굽의 공주에게 발견된 모세는 누나 미리암의 기지로 어머니 요게벳의 손에 자라게 됩니다. 유모로 모세를 키우게 된 요게벳은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였습니다. 먼 훗날 모세는 고통 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합니다. 40년간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인내하며 험난한 여정 길을 완주한 그는 실로 위대하고 귀중한 민족의 지도자 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어두운 사사시대에 한나는 아기가 없음으로 고통 중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의 거룩한 나실인으로 키워 드리겠노라 서원하였습니다. 애통하는 심령과 눈물로 간절히 기도 합니다. 한나는 아들 사무엘을 낳았고 하나님께 한 서원을 지키기 위해 젖을 뗀 사무엘을 제사장 엘리에게로 데리고 가 그의 평생을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그 뒤 한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어두운 시대에 사무엘은 백성들을 회개케 하여 하나님께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사울 왕과 다윗 왕에게 기름 부은 선지자로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귀중한 자입니다. 야베스의 뜻은 ‘고생을 만들다’, ‘슬프게 하다’ 입니다. 유다 지파 사람으로 고핫 집안에 속하여 서기관 야베스 가문을 창시한 인물입니다. 야베스의 어머니는 그를 무척 힘겹게 출산했습니다. 이름처럼 고통의 자식이요 애물단지였던 야베스를 그녀의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헌신과 눈물의 기도로 양육했습니다. 야베스는 형제 중 귀중한 자요 집안의 유력한 자가 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어두운 시대에 야베스는 하나님께 기도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어두운 시대에 야베스의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의 기도처럼 복에 복을 더하사 그의 지경을 넓혀 주셨고 환난과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야베스의 구하는 바를 들어 주신 것입니다. 어머니들의 헌신과 눈물의 기도가 이처럼 자녀들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귀중한 자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채널을 고정하고 기도의 자리를 사수하고 바쁠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실 것을 알더라도 구해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기업이요 희망인 우리의 거룩한 자녀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말씀으로 양육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귀중한 자로 세워나가야 합니다. 하나님 기뻐하사 쓰시는 귀중한 자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최선의 때에 우리에게 가장 유익이 되는 것들을 주십니다. 비록 그것이 내 생각과 다를지라도 나에겐 최고의 복인 것입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구하며 나아갈 때 우리의 지경을 넓혀 주시고 환난과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해 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승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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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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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칼럼] 스마트시대, 스나미처럼 몰려오는 중독 문화 정말 막을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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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2]본인은 중독 문화를 죄문화로 정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12장 38절 이하에 예수님 말씀처럼 이악한 세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본인의 책임감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육적인 안목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첫째, 물량 공세로 나타나는 상업주의자들의 집요한 꼼수를 들 수 있다. 광고를 보면 돈을 주는 듯 해 보이는 많은 수많은 애플리케션(이상, 앱이라 호칭)있지만 결국 현질이라는 신종어를 만들어 낼 정도로 숨겨져 있다. 공짜는 없다. 결국 공짜인 듯 공짜 아닌 앱은 미성숙하고 절제력이 부족한 우리 자녀들 뿐 아니라 많은 기성세대까지 그들의 현금을 지르도록(일명, 현질) 유혹하는 것이다.
둘째는 과연 중독법안은 가능하며 국회는 법안 상정에 대한 의지가 있을까? 결론만 말하면 본인은 없다고 본다. 한류 문화보다 많은 국가 수익을 내는 게임 산업을 막을 것인가? 게다가 게임이 일상에 미치는 악영향과의 상관관계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들 아우성이다. 또한 이를 빌미로 90%이상의 수많은 네티즌이 중독법안을 반대했다. 재미난 사실은 그들 대부분이 20~30대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을 일명 pc방 1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게임 산업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오히려 규제가 완화되기 시작했다. TV광고와 스마트폰 속에 수많은 광고들을 보라! 게임 광고가 얼마나 많고 일명 미친 듯한 광고들이 득실거리는지를. 일명 이런 광고를 약빤 광고라 부르기도 한다.
셋째는 스마트IT의 발달속도다. 이러한 급속한 발달은 앞으로 어떤 모양으로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등장하여 유혹할지는 불을 보듯 뻔 한 사실이다. 자세한 내용은 상상에 맡기겠다. 간단한 예로 VR기기를 통한 3D를 넘어선 4D 야동 영상이 등장했다. 일본에서는 이런 기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급속히 늘고 있단다. 연간 새 게임은 50만개가 넘는다.
[조언2]이러한 스마트 중독문화를 통해 다음 세대들은 육적인 필요(Need)를 채우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PC방 폐인이었던 본인은 경험상으로 볼 때 영적인 Need는 결코 채워질 수 없다. 천국에 보화를 쌓고 있는 우리는 이 틈새를 끊임없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본인에게는 5명의 자녀들이 있다. 딸3명과 아들2명이다. 내 자녀들은 공중 권세 잡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할 그들이기에, 그들의 앞날을 생각할 때 과연 아비인 나는 어떻게 가르쳐야 좋은 아빠 목사가 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래서 본인은 내 자녀는 내가 지킨다는 생각에 신앙 교육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바로 가정 내 영적 전쟁을 선포하고 있다.
첫째는 부모를 믿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늘 신앙 교육의 우선순위를 둔다. 이를 위해 힘써 가정 예배에 시간을 들이고 아무리 바빠도 아버지의 안수 기도 시간만큼은 철저히 지키려하며 아빠가 예배 중심을 삶을 살고 있음을 애써 보여 준다. 말씀과 기도만이 그들이 살 길이다. 진리를 알면 그 어떤 중독 문화가 스나미처럼 몰려와 덮칠지도 그들은 이겨 낼 것이다.
둘째는 중독 문화를 하나씩 스스로 알아 갈 때마다 부모는 함께 그것을 재확인하고 문제점을 파악하며 3의 법칙을 통해 환경을 지배하는 자녀로 가르친다. 구체적인 내용은 지면상 생략하겠다. 그러나 부모가 무지하면 결국 내 자녀는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이다.
셋째는 위 두 가지를 기본으로 하여 성령의 9번째 열매인 절제력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성령님은 하나님이다. 성령을 체험한 자는 절제라는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심부름과 공부를 하고 여가를 즐기는 훈련, 여가 중에도 유익한 것과 무익한 것을 구분하는 안목, 주 안에서 비전을 발견하고 영육 간에 건강한 삶을 사는 방법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리고 책임감과 성실성이 무기가 되어 여가와 중독을 구분할 줄 아는 자녀가 될 수만 있다면 나의 소임을 다한 아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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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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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20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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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13일. 그날이 지나갔다. 20대 국회의원 선거일이었다. 마음이 감동과 설레임이어야 하는데 왠지 투표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안 가면 나는 소위 선량(選良)이라면서 온갖 부끄러움을 다 드러낸 그분들보다 더 나을 것 없는 국민의 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기에 가기 싫어도 가야했다. 가야하는 당위성이 바로 주권(主權)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4년 전 2012년 4월 11일 시행되어 5월 30일부터 대한민국 제19대 국회가 출범했었다. 대부분 언론과 국민은 19대 국회를 식물국회로 비아냥거렸다. 세비가 아깝다고 온갖 조소를 다 쏟아낸 4년이었다. 매일처럼 안방에 전달되는 뉴스는 짜증이 나서 채널을 돌려버리는 것이 일수였다. 대단히 미안한 마음이지만 나에게 있어서 어느 당이 몇 석을 차지했느냐는 관심도 없었다. 하나 같이 국민을 위한다면서 자기들의 잇속 챙기는 것이 나 같은 바보의 눈에도 보였으니 속된 말로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또 여전히 정치에 관한 뉴스를 관심있게 시청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도 내 자신이 민망스럽다.
특히 올해 20대 국회의원 선거는 공천파동이 유권자들을 짜증나게 했다. 정치(政治)의 이치도 모르는 사람들처럼 자기들이 행하는 것들이 정도(正道)라고 오만과 독선으로 전횡을 행하는 것을 보는 국민의 이맛살이 찌푸려진지 오래다.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어놓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TV 화면에 파안대소하듯 웃으면서 우리가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정당이라고 공언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역겨움을 넘어 슬픈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선거가 끝난 지금, 멈추어 뒤돌아보면 대한민국 국민은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결과가 나타났다. 오만과 독선으로 일관했던 새누리당은 제 1당의 자리를 더불어 민주당에 내어주어야 했고 탄핵보다 더 큰 심판이라는 결과를 맞게 되었고, 더불어 민주당은 수도권에서 대승을 했지만 호남에서는 완패를 하여 절반의 승리를 거두었고, 호남의 민심은 더불어 민주당이 아니라 국민의당에 전폭적인 지지를 함으로 언론은 절묘한 선택이라고 보도하면서 모든 정당은 이제 국민을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정치의 이치를 깨닫게 했다. 총선의 결과를 보면서 국민을 쉽게 생각한 지금까지의 잘못된 정치지도자들의 관점은 국민 심판의 쓰나미를 맞게 되었으니 이제 정신을 차릴 것인가? 엘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세계 지성인들의 영혼을 흔든 책을 출간했다. 1970년에 Future Shock (미래 충격)을 통해 변화의 과정을, 1980년에 The Third Wave (제3의 물결)을 통해 변화의 방향을, 1990년에 그 유명한 Power shift (권력 이동)을 통해 변화의 통제, 즉 다가올 변화를 누가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하는 핵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토플러는 15년의 침묵을 깨고 2005년에 Revolutionary Wealth(부의 미래)를 출간했다. 여기서 주목할 내용이 하나 있다. 성장속도를 자동차 속도 100마일을 기준으로 했을 때, 기업이 100마일, 시민단체80마일, 미국가정 60마일, 노동조합 30마일, 정부관료 조직 25마일, 학교 10마일, 국제기구 5마일, 정치조직 3마일, 법체계 1마일로 비유를 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정치조직과 법체계가 가장 속도가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별로 기대는 안하지만 그래도 20대 국회의원을 선출한 국민들의 마음은 이번만큼은 정치조직과 법체계가 조금은 제 속도를 내기를 바램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i)는 “신과 악마가 싸우고 있다. 그리고 그 전쟁터는 인간의 마음이다”라고 했다. 20대 국회로 들어가는 분들은 웃기 전에 자신들을 선택해 준 국민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고 선량(選良)이라는 이름을 이름되게 하기 위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 국민들이 4년동안 그분들을 볼 때 이번만큼은 파안대소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선거 때만 되면 국민이 무섭다고 큰절도 하고 회초리를 맞겠다고 온갖 엄살을 떨다가도 끝나면 나라와 국민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행태, 정당정치(政黨政治)의 본래 의미조차도 휴지로 만들어 버리고 온갖 미사여구를 사용하면서 사당화(私黨化)로 전락시키고 정치(政治)가 아닌 치정(癡政)을 하는 국회가 되지 않기를 충심으로 기도한다. 그리하여 국민들이 내가 잘못 선택했구나 하면서 가슴 치는 일들을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정당이나 후보의 정치적 수사(修辭)에 또 속았구나 하는 자괴감에 다시 4년을 기다리는 아픔이 없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TV광고의 하나였던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합니다.”라는 글귀는 백번 맞는 말이다. 그리하여 2016년 4월 13일은 대한민국이 국민 모두가 선택을 잘하였다고 파안대소하는 날로 오래 오래 역사에 기록되었으면 좋겠다. 인류의 스승, 20세기의 성자, 세계의 양심 ‘간디’는 우리를 파멸시키는 일곱 가지를 갈파 했다. 첫째는 원칙 없는 정치(政治), 둘째는 근로 없는 축재(蓄財), 셋째는 양심 없는 쾌락(快樂), 넷째는 인격 없는 지식(知識), 다섯째는 도의 없는 기업(企業), 여섯째는 인간성 없는 과학(科學), 일곱째는 희생 없는 신앙(信仰)이다. 지난 4월 13일에 우리가 선택한 국회의원은 간디가 말한 것을 기억하면서 그와 반대적인 삶을 실천하고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건설케 하는 삶의 자리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지도력이 발휘되도록 우리는 이제 기도하면서 후원해야 한다. 이제는 건강하고 바람직한 정당정치로 20대 국회는 밥그릇 챙기려고 그토록 밤을 지새우며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정책대결을 하노라 밤을 지새우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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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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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터가 흔들릴 때(시편 11편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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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4일 밤에 이어 16일 오전 1시 25분경에 또 다시 지진이 있었습니다. 이번 지진은 진도 7을 넘는 강진으로서 일본 큐수의 구마모토현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늘 지진의 위협 속에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일본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갖 우상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부산에서도 집이 흔들리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14일 밤에도 흔들리는 것을 보았는데, 16일 새벽에는 자다가 깰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제 둘째 딸이 놀라 깨어서는 큰 딸 방으로 달려가 책상 아래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지진이 나면 밖으로 나가야 하고, 그럴 형편이 못되면 책상 아래에 숨어야 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배운 모양입니다. 책상 아래는 집이 무너져도 공간이 생겨 오래 생존할 수 있답니다. 어쨌든 이번 지진으로 많은 이들이 지진에 대한 경각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지진은 고대 근동 지방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대에서 소아시아 방향으로, 그리고 이스라엘 쪽으로 내려오는 지역에도 지진이 빈번했습니다. 그 지역은 주로 석조 구조물이 많은 곳인데, 그것들이 무너진 이유는 대개 지진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지진으로 무너진 신전 터, 성벽 터, 궁궐 터 등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했기에 성서 시대의 사람들도 지진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땅이 흔들리는 지진보다 더 무서운 지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생의 지진입니다. 지진이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발생하듯이, 인생의 지진도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발생해서 인생을 뒤흔들고 가정을 갈라놓습니다. 이스라엘 왕 다윗도 그러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충성을 다 바쳤건만 왕이자 장인인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창을 던지거나 자객을 보냈을 때 그의 인생의 터가 사정없이 흔들렸습니다. 수천 명의 군사가 그를 추격할 때 그는 디디고 설 터가 없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그는 들판으로 도망하고 굴에 숨기도 했고, 마지막에는 외국으로 망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을 통해 그가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어디도 안전한 터전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가 동굴에 숨었을 때 사울 왕이 동굴 입구까지 온 적이 있었습니다. 동굴도 안전한 터가 아니었습니다. 블레셋에 망명했으나 블레셋 신하들이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살고자 찾아간 곳이 죽음의 구덩이였습니다. 그는 깊이 깨달았습니다. 터가 흔들릴 때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구약성경 시편 11편 3-4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인생의 터가 흔들릴 때 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지금 터가 흔들린다고 느끼신다면 만세반석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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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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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4월이여 노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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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S.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4월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하지만 이 시가 한국 현대사만큼 잘 어울리는 곳도 없을 것입니다. 1948년 제주도 4.3 사건, 1919년 4월 15일 화성 제암리교회 사건, 1960년 4.19 혁명,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4월을 슬프게 했으니 말입니다. 1919년 4월 15일 제암리교회 사건은 스코필드 박사와 생존자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두렁바위에 흐르는 눈물』)을 통해 전모가 알려졌습니다. 3.1만세운동 후 일본군 아리타 중위가 제암리로 찾아와 과잉진압을 사과한다면서 15세 이상 남자들을 교회에 모았습니다. 기독교 교리에 대해 물어보는 척하면서 밖으로 빠져나오자 대기하던 군경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고 짚더미와 석유를 던져 불까지 질렀습니다. 김정헌(金正憲), 안경순(安慶淳), 홍원식(洪元植), 노경태는 겨우 살아남았으나 뒷산으로 도망친 노경태를 제외하고는 결국 총격에 맞아 사망했고, 교인이었던 강태성의 아내 김씨(19세)와 홍원식의 부인 김씨도 남편이 걱정되어 달려왔다가 일본 병사에 의해 살해되는 등 이날만 총 23명이 희생되었습니다. 2014년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2주기입니다. 딸을 잃은 한 어머니는 이번 일과 관련하여 신앙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에게 “이제 내게 남은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라며 절규했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도 비슷한 외침을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사 45:15) 라틴 교부들은 이를 ‘숨어계시는 하나님(absconditus deus)라고 불렀습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이렇게 외치지 않으셨습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 시 22:1) 연약한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철학자 김용규도 『데칼로그』에서 존재에서 분리된 존재물은 근본적으로 탐욕과 의심과 불안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1960년 이른바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시작으로 4월 11일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부둣가에 떠오르면서 점화된 4.19 의거는 당일에만 서울 사망자 104명(경찰 측 3명 포함), 부산 사망자 13명 부상자 60명, 광주는 사망자 6명(경찰 1명 포함) 부상자 70명이 나왔습니다. 특히 4.19 전체 사망자 186명 중 학생이 77명, 그 중 대학생은 22명, 고등학생도 36명, 그리고 초중생이 19명이나 되었습니다. “민주주의 나무는 국민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60.5 사상계), “자유의 나무는 압제자와 애국자들의 피로 새로워진다(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the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토마스 제퍼슨)고 했지만, 어린 생명들의 희생은 언제나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토마스 롱은 독일의 ‘다하우’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의 사진 한 장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끌려가는 한 어머니와 어린 딸의 모습입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비극을 중단시키기 위해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행위를 합니다. 딸 뒤에 바짝 붙어 걸어가면서 손으로 아이의 눈을 덮어 아이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보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숨어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외면하지도 않으십니다. 부재하지도 않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고백하는 저 하늘 위로 4월의 슬픈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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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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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해 봅시다] 목양일념(牧羊一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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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투수가 전력투구 하듯 해야
다른 것에 몰두하는 건 있을 수 없어
목사님 한 분이 저를 자택으로 초대하기에 갔더니 붓과 종이를 주면서 “글 한마디만 써주세요” 하기에 한자로 ‘牧羊一念’이라고 써주었다. 뜻은 문자 그대로 목회자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양(교인)을 먹이고 돌보는 일에만 정성을 쏟으라는 뜻이다.
목회자는 목회 외에 다른 것은 몰라도 허물이 아니다. 목회 외에 다른 것은 몰라야 그가 참 목회자다운 목회자이다. 목회자는 세상 정치에 관해 몰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골프, 테니스 등을 할줄 몰라도 전혀 허물이 아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목회에만 전념하면 그가 목회자다운 목회자이다.
한 침대 만드는 회사는 광고하기를 “우리는 침대 외엔 다른 것은 모릅니다” 그랬다. 그 침대가 그리 잘 팔린다고 한다. 목회자도 목회 이외엔 몰라야 교회로부터 인정받는 목회자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목회자들은 목회는 건성으로 하고 다른 것에 정신을 팔고 있다.
한 곳에 바둑을 무척 좋아하는 목사가 있다. 어느 토요일 기원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날 오후 2시부터 세례문답을 하도록 되었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바둑에 빠져 있었다. 세례문답을 시작할 시간이 지나고 두시간이 지나도 목사가 오지 않는다. 사택에도 안계시고 혹시나 하여 장로가 기원에 가보니 목사가 바둑에 빠져 정신이 없었다. 장로가 “목사님” 이렇게 부르기가 미안해서 옆을 가서 서있었다. 얼마후 인기척을 느낀 목사가 장로를 보더니 “장로님이 여기 무슨 일이세요?” “오늘 세례문답하는 날 아닙니까” 그제서야 목사가 ‘아차’하며 일어나 교회당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목사 한분은 지난번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국이 진행되는 동안 시작부터 마칠때까지 TV중계를 보느라 주일준비도 뒷전이었다고 한다.
미국 한인교회 K목사는 예배시간을 앞두고 잠시 낚시터에 갔다. 웬일인지 고기가 잘 잡힌다. 예배인도할 것을 잊어버리고 계속 고기를 잡다가 결국 예배인도를 하지 못한 큰 실수를 했다. 이건 필자가 본인에게 직접 들은 얘기이다.
목회자도 적당한 취미생활은 할 수 있다. 그러나 목회는 건성으로 하면서 취미생활에 몰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목회는 투수가 전력투구하듯이 해도 제대로 감당하기가 어렵다. 하물며 취미생활에 빠져 정신을 잃고 그래가지고서 어찌 목회다운 목회를 할 수 있겠는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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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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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 잔인한 4월의 꽃향기 휘날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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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부터 따뜻한 봄이 밀려온다.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강물이 얼어붙던 겨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1년 사시사철을 하루도 쉼 없이 달리는 삶이기에 겨울과 봄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나 뿐만이 아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 한 성도의 가정에 심방을 갔다. 심방을 가서 보는데 창문으로 푸른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봄은 계절의 여왕이고 여자의 계절이란 사실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여자 집사님들께 물어보았다. “봄이 되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개나리, 진달래, 철쭉꽃이 피면 여자로서 머리를 곱게 꾸미고 싱그러운 옷을 입은 채로 나들이를 가고 싶은 마음이 안 생깁니까?”꾸미지 말고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라고 하였다. 사실은 함께 동석한 제 집사람의 마음을 엿보기 위해서 물어 보았던 것이다. 그랬더니 여자 집사님들이 이런 말을 하였다.“목사님, 새에덴교회에 와서는 봄이고 가을이고 뭐 그런 것 다 잊어 먹었어요. 전도하고 심방하고 양육하느라 계절의 여왕이고 여행이고 이런 것 다 잊어 먹었어요. 시간만 나면 전도하고 싶고 새가족 보면 양육하고 싶고 조금만 여유 있으면 헌신하고 싶고 그렇게 살다보면 한 해가 훌쩍 가 버려요. 누가 그렇게 만들어 준 줄 아세요? 목사님이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새에덴교회가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면서 한 편으로는 너무 감사하고 또 한 편으로는 너무 미안했다. 주의 교회와 영혼 구원을 위해서 즐겁게 충성하는 모습이 너무나 감사하면서도, 또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또 한 분의 집에 심방을 했다. 정말 적극적으로 교회에 충성하고 헌신하는 성도의 집이었다. 그곳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참 못난 목사를 만나 죄송합니다. 내가 좀 평안하고 조용한 스타일로 목회를 하면 좋은데, 한국교회 영광성과 거룩성 회복을 위한 열정이 지나쳐서 우리 성도들도 너무 고생을 하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그래도 우리 성도들이 부족한 나를 지지해주고 눈물로 후원해 주어서 민족을 섬기고 한국교회를 지키는 일을 감당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그랬더니 “목사님,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목사님이 개교회 성장에만 관심 갖고 편하게 안주하는 목사님이 아니라 국가를 섬기고 한국교회의 공익을 위해서 일사각오로 일하시는 모습이 얼마나 자랑스러운데요. 저희도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목사님의 하시는 일을 돕고 섬기겠습니다.”나는 이런 성도들의 고백을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하고 내 작은 눈에 눈물이 고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도들의 아로새긴 은쟁반의 옥구슬 같은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잔인한 4월에 나에게 준 가장 큰 위로의 선물이고 격려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시인 엘리어트는 “4월은 황무지에서 라일락을 꽃피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우는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그 잔인한 생명력이 있기에 황폐했던 겨울 산야에 화사한 개나리와 진달래, 철쭉꽃이 피어나지 않는가? 나는 봄이 되어도 너무 바빠서 꽃구경을 할 시간도 없다. 여전히 내 앞에는 수많은 외부일정과 집회, 심방 등이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나에게는 4월은 잔인한 달이다. 그러나 그 잔인한 4월 때문에 한국교회의 들녘 위에 순백의 영적 목련을 꽃피우기도 하며 신앙의 라일락을 꽃 피우고 화사한 철쭉꽃을 피우기도 하리라. 그리고 그 꽃은 결국 푸르고 푸른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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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