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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소자행진(마 25장 21절)
    우리는 한 번 뿐인 인생을 어떻게 하면 후회 없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25장 21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의 말씀 속에 여덟 가지 답이 있습니다. 첫째,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그 때 우리는 칭찬과 상급을 받고 면류관을 받아야 합니다. 칭찬과 상급과 면류관 주실 것을 기대하며 언제나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둘째, 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착하게 살아 아름다운 영향력을 미치고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이웃을 향한 성도의 사랑은 물처럼 촉촉하게 스며들고 향기처럼 퍼져나가게 됩니다. 셋째, 충성입니다. 순종하는 자가 쓰임 받고 충성된 자가 복을 받습니다. 충성은 헛된 마음 버리고 허탄한 자랑을 아니 하며 하나님께 성실함과 정직함 입니다. 넷째,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종이라는 존재는 자존심 같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종은 그저 주존심만 있으면 됩니다.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생각과 뜻대로 성경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종의 특징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둘째, 현장에서 평생 일을 한 일꾼이기에 그 일만큼은 전문가요 고수이며 달인입니다. 셋째, 종은 즐겁다는 겁니다.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 있지만 종은 아무 걱정 안하고 시키는 일만 그저 열심히 합니다. 복잡할 것이 없고 단순한 삶을 살아가지요. 우리는 종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 생각대로 큰소리치지 말고 오로지 주인의 뜻을 쫓아 전문가가 되어 즐겁게 일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섭섭할 게 없습니다. 일복이 많은 일꾼은 섭섭할 틈도 아플 틈도 없는 것입니다. 다섯째, 적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평가하실 때 적은 일을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십니다. 작은 것에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크고 많은 일을 맡기십니다. 여섯째, 우리 스스로 역량을 키워 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에 따라서 많은 것을 맡기십니다. 일곱째, 주님께서 맡기실 때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맡긴다는 것은 신뢰한다, 위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지가 되고 신뢰가 될 때 맡기십니다. 우리가 겸손을 감당하면 하나님이 존귀하게 해 주시고 거룩을 감당하면 하나님께서는 깨끗한 그릇으로 쓰기 때문에 거룩을 감당하게 됩니다. 여덟째,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해야 합니다. 주님 오실 때 어린 양 혼인잔치가 열리는데 그 파티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누리는 것들은 순간의 찰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한 이 땅에서 서럽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당하는 것도 유한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장차 받을 축복, 영원한 생명과 기쁨이 있는 곳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천국의 소망이 있기에 언제나 웃을 수 있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빼앗기지 마시고 끝까지 충성되고 착하게 살아 복 있는 사람, 사랑 받는 사람, 원도 한도 없이 후회 없이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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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1
  • [성경인물탐구] 베드로에게 복음을 전한 안드레(3)
    예수님이 모든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임을 알고 그분을 좇았던 안드레는 자신의 형인 베드로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에 관해 정확하게 알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분을 만나지 않고서는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가족을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가족이나 친척이 믿지 않는 것을 보며 심지어 부부라 할지라도 한쪽만 믿는 경우가 매우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의 책임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과 혀로서만 하는 사랑이 아닌 내 가족의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요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안드레는 자기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되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전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해야 되는지를 알지 않고서는 그분을 따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나, 엘리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가 아니라 메시아이십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전하였습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 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복음을 들은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전도가 전하는 것으로만 그치는 경우들이 많은데 이는 현명한 것이 아닙니다. 안드레처럼 자신의 형인 베드로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면서 그 형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우리 역시 복음을 힘써 전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신앙이 성숙할 때까지 철저히 양육해야 합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요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복음 전도의 원칙에 있어서 최우선 순위는 불신자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해야합니다.요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리라불신자를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자신의 가족 중에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해외 선교도 중요하고 국내 선교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가까운 내 친족, 내 이웃부터 전도해야 되겠습니다. 장차 내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 책임은 내게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시기에 있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기회가 무르익었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상관없이 항상 감당해야 할 일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한 기회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자 생각하지 말고 언제나 기회라고 생각하고 전해야 합니다.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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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1
  • [교회법률상식] 원로장로는 당회장에게 당회소집 청원권 없다
    -시무장로 없고 원로장로만 있는 교회 행정은 당회장 단독 처결 -폐당회 당회장은 원로장로 동의 없이 모든 당회권 행사 가능 [질의] 대구동노회 H교회의 사건입니다. H교회는 시무장로 1인만 있는 조직교회였는데 시무장로가 원로장로로 추대됨으로 폐당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H교회 당회장이 노회에 장로 선택 허락을 받고 법이 정한 대로 1주일 전에 장로 선택을 위한 공동의회 광고를 하고 광고한 일시에 공동의회를 하여 피택 장로 1인을 선택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원로장로가 당회도 하지 않고 공동의회를 한 것이 불법이라고 하면서 노회에 소원장을 제출했고 노회 임원회 역시 원로장로의 동의 없이 공동의회를 한 것이 잘못이라고 하여 교회가 혼란스럽습니다. 원로장로의 주장과 임원회의 판단이 옳은 일인지 목사님의 법적인 판단을 부탁드립니다. (합동 대구 K목사) [답] 질의자가 합동측 목사이므로 합동 헌법으로 답한다. 1. 당회 조직과 원로장로의 당회 회원권 정치 제9장 제1조(당회조직)에 “당회는 지교회 목사(필자 주 : 당회장)와 치리장로로 조직하되 세례교인 25인 이상을 요하고 장로의 증원도 이에 준한다.”라 하였고, 정치 제5장 제5조(원로장로)에 “ … 당회의 언권회원이 된다.”고 하였으며, 정치 제9장 제2조(당회의 성수)에 “당회에 장로 2인이 있으면 장로 1인과 목사(필자 주 : 당회장)의 출석으로 성수가 되고, 장로 3인 이상이 있으면 장로 과반수(필자 주 : 과반 수 이상)와 목사 1인이 출석하여야 성수가 된다. 장로 1인만 있는 경우에도 모든 당회 일을 행하되 그 장로 치리 문제나 다른 사건에 있어 장로가 반대할 때는 노회에 보고하여 처리한다.”고 규정하였다. 이상과 같은 헌법 규정을 종합하면 당회의 조직에서 당회장과 시무장로와 세례교인 25인 이상은 절대적인 당회 조직의 필수요건이다. 그러나 당회의 언권 회원인 원로장로는 당회 조직이나 당회 성수에 절대적 요건이 될 수는 없고 당회에서 언권 회원이다. 2. 폐당회 시의 위임목사와 원로장로 제60회 속회 총회(1976년 2월)에서 “2년 내에 당회 조직을 회복하면 위임식을 거행할 것 없이 여전히 위임목사로 시무함이 가하니라.”는 총회 결의에 근거하여 위임목사는 폐당회 후 2년까지는 계속하여 위임목사의 신분이 유지되므로 당연직 당회장으로서 시무장로가 없을지라도 미조직교회의 임시목사가 노회로부터 당회권을 위임 받아 재판 건을 제외한 모든 행정 건을 당회장 단독으로 행사하는 것과 같이 H교회의 당회장도 모든 행정 건을 당회장이 단독으로 처리한다. 그러므로 H교회의 당회장이 장로 선택을 위한 공동의회는 지극히 합법적인 행정 처리이다. 즉 원로장로는 시무장로가 있을 때에만 당회에서 언권 회원이 되고 시무장로가 사임을 하여 폐당회가 되었을 때에는 당회장이 원로장로와 둘이서 당회를 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모든 회의는 의결 도출을 목적으로 하는데 반하여 의결권이 없는 언권 회원과는 그 어떤 안건도 결의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폐당회는 당회장이 원로장로와는 당회를 해야 할 필요성이 요구되지 않는다. 다만, 2년 내로 당회가 회복되면 원로장로도 역시 당회에 참석하여 언권 회원이 된다. 3. 원로장로의 소원장과 임원회의 판단에 대하여 원로장로는 당회에서 언권 회원일 뿐이요 의결권이 없으므로 사실상 폐당회가 된 위임목사가 원로장로와 독대하여 당회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기에 언권 회원인 원로장로가 당회도 하지 않고 공동의회를 한 것이 불법이라고 하거나 원로장로의 동의 없이 공동의회를 했다는 등의 이유로는 소원장을 제출할 수 없다. 혹 공동의회 시 절차상 잘못된 일이 있다면 원로장로나 세례교인이나 누구든지 공동의회 회원으로서 소원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원로장로가 당회를 하지 않았다거나 원로장로의 동의가 없었다는 등의 사유로서는 소원 건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노회에 소원 건이 접수되면 노회 서기는 서류 형식의 적부를 심사하여 반려하거나 접수하여 노회에 상정하는 것이 그 직무이고 서기가 접수한 서류를 노회 임원회가 검토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판단하는 것은 서기의 고유한 직무를 월권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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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1
  • [가정칼럼] 하나님도 거짓말을 하셨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미국인들은 하루 평균 2백 번의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한국인은 몇 번이나 할까? 누구든 거짓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만약 하나님도 거짓말을 하셨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런데 그 분도 거짓말을 하셨다.“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창세기 18:12-14)천사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찾아 와서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아이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한 천사가 아브라함에게만 은밀히 전했는데 사라가 엿들은 것이었다. 이에 사라는 자신과 아브라함이 이미 나이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성경은 ‘사라는 여성들만이 하는 월경이 이미 중단된 지 오래였다’고 말한다.- 웃음을 터뜨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난 이미 늙었고 내 남편 또한 노쇠했는데 내가 어찌 그런 기쁨을 누릴 수 있으리오?”이를 이중적 절망이라 부른다. 자신만 안 된다고 하면 된다. 그런데도 남의 이야기까지 끌어들인다. 사람의 본성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사라의 구체적인 말과 달리 하나님은 중요한 말 한마디를 생략해 버린다. “사라가 왜 웃으며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나님은 사라가 아브라함에 대해서 했던 말(“내 남편 또한 노쇠했는데”)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이를 놓고 한 신학자는 ‘하나님도 거짓말을 하셨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라의 한마디를 생략해 거짓말(?)의 올가미를 써야 했을까? 해답은 하나다. ‘하나님은 사라의 그 작은 한마디에라도 아브라함이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기막힌 통찰!어떤 목사님이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시던 중 이런 말을 남겼다. ‘만약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더 큰 목회를 하지 않았을까 종종 그런 생각을 하며 당신을 원망한 일도 있노라고’ 목사의 입장에서는 떠나는 순간 자신을 포장하고 있던 모든 거짓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자유하고 싶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픈 마음이었음을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 말은 자신의 감정에는 충실한 결과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남아 있는 자에게는 엄청난 아픔이었고 깊은 상처였다. 사모는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고 한다.결혼생활에서 가장 많은 갈등의 요인 가운데 하나가 대화부족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대화부족이 아니라 지혜로운 대화의 부재에 있다고 할 수 있다.“선한 말은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잠 16:24)“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사과니라”(잠25:11)“결혼생활에 있어서의 거짓말” 옳고 그름의 신학적 논쟁을 떠나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할 때다. 남에게 상처가 될 이야기라면 굳이 옮겨 놓지 않았던 하나님의 작은 ‘배려’가 사랑의 의미를 또 다시 깨우쳐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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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1
  • [시사칼럼] 필리버스터
    한 동안 필리버스터(Filibuster)가 세간의 화제였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국회에서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는 ‘의사 진행 방해 연설’쯤 되겠습니다. 테러방지법 상정을 놓고 2월 23일부터 시작된 야권 국회의원들의 필리버스터 행진은 39명의 참여 인원이 192시간 동안 발언한 후 지난 3월 2일 마침내 끝이 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숱한 기록들이 갱신되었는데, 그 중에는 1964년 의원 신분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5시간 19분 기록이 있는가 하면, 1969년 신민당 박한상 의원이 세운 10시간 15분 최장 시간의 기록도 있고, 2011년 캐나다 의원들이 세운 58시간 연속 기록도 있습니다. 한편 같은 기간 동안 국회 본회의장에 일반 방청객들이 쇄도하고 국회 TV 시청률이 폭주하는 진기록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이번 필리버스터 사건을 보면서 ‘세렌디피티(Serendipity)’를 다시 한 번 떠올립니다. ‘우연한 발견 혹은 성공’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세렌디피티와 이번 필리버스터는 작년 8월 국내에서 방영된 ‘어셈블리’라는 드라마를 매개로 연결됩니다. 극중에서 노조위원장 출신인 진상필 의원은 정략적인 판단에 따라 여당 추천 후보가 되어 보궐선거에 나가 당선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비리 많은 국무총리후보자의 임명 동의안을 놓고 홀로 필리버스터를 시작합니다. 극중에서 진상필 의원이 남긴 기록은 25시간 2분, 이는 1957년 미국 스트롬 서먼드(James Strom Thurmond) 상원의원의 24시간 18분 최장 기록을 깨뜨리는 상징적인 숫자로 쓰였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의자에 앉는 것도 화장실 가는 것조차도 금지되는 상황에서 만 하루를 넘기도록 계속해서 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고역(苦役)입니다. 더군다나 여당 소속 의원이면서 동조자 한 명 없이 홀로 필리버스터를 단행하고 결국 법안 통과를 저지한다는 상당히 비현실적인 가정이었지만, 적어도 그 비현실성만큼은 이번 사건으로 실제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결과를 도외시하더라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1939년 미국에서 독특한 영화 한 편이 개봉되었습니다. 어쩌면 한국 드라마 어셈블리가 오마쥬(Hommage) 했을지 모르는 이 영화의 제목은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Mr. Smith Goes to Washington)>, 명장 프랭크 카프라(Frank Capra) 감독에 제임스 스튜어트라는 명배우가 주연을 맡은 명품입니다. 영화 속에서 소년단(Boy Rangers) 단장인 순박한 시골뜨기 제임스 스미스는 지역 상원의원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역시 정략적인 판단에 따라 상원의원직에 임명됩니다. 그가 상원의원이 된 이유는 단 하나, 노회한 정치가들이 추진하던 댐 건설 사업에 한 표 보태라는 무언의 압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을 위한 야영장을 짓는 꿈에 부풀어있던 순박한 의원 스미스 씨는 마음씨 착한 비서 아가씨의 도움으로 필리버스터를 알게 되고 결국 24시간에 걸친 의사 진행 방해 발언을 통해 정치꾼들의 야욕을 분쇄합니다. 비디오 대여점 한 구석에서 그야말로 우연히(세렌디피티) 발견한 영화였는데 보는 내내 너무 큰 감동을 받아 그 이후로도 서너 번 더 보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어떤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편이 있고 그것을 막으려고 하는 편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국민들 중에도 법안 지지파가 있고 필리버스터 지지파가 있지만, 정치판과 달리 어느 쪽도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대중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입니다. 걸핏하면 몸싸움을 벌이는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소개하던 대한민국 국회를 전 세계 언론들이 앞 다투어 긍정적인 뉘앙스로 대서특필하였습니다. 하기야 1980년대 혼돈의 시절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를 보면서 느꼈던 부러움이 더 이상 남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니 그것만 해도 멋진 일이 아닙니까? 비관적인 전망과 온갖 억측을 일삼는 이 민족을 그래도 너무나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나라를 온전하게 발전시키는 일을 멈추지 않고 계신다, 이번 필리버스터를 바라보며 느끼는 소회(素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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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1
  • [소강석 칼럼] 방황하는 별들은 길을 묻는다
    오래 전 스코틀랜드 언약도와 영국 청교도들의 신앙을 연구하기 위해 유적지를 답사한 적이 있다. 물론 책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을 연구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적 체취와 흔적들을 보면서 더 실감나게 공부하기 위해서 갔다. 역시 그리스도의 왕권 신앙을 사수하기 위하여서 지붕 없는 감옥에서 고초 당하면서 죽기까지 했던 언약도들의 순결한 신앙을 보면서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는 청교도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국교도에 반대해서 야외에서 천막교회를 하면서까지 신앙의 경건과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지켰던 복음의 열정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런데 그 못지않게 또 하나 충격 받은 것은 문 닫는 교회들이 너무나 눈에 많이 띈 것이다. 어느 교회는 백화점이 되고, 술집에 팔리고, 댄스홀로 바뀌어 인테리어 공사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회교 사원으로 팔리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졌다. 스코틀랜드가 어떤 곳인가. 피로 물든 언약도의 신앙이 서려 있는 곳이며 전 세계 장로교회의 본산이 아닌가. 영국도 마찬가지다. 저 푸른 바다를 넘어 낯선 이방의 땅, 조선에 복음을 전하여 준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하였던 교회마저도 텅 빈 건물과 교회를 지키는 사람 밖에 없는 것을 보았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영국 교회가 미래의 부흥을 위한 다음 세대를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영적 황무지요, 피폐한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60-70년대만 해도 교회마다 장년 성도보다는 주일학생들이 오히려 더 많았다. 그 때 주일학교에서 말씀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아이들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이룬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 모습은 어떤가. 90년대를 지나면서 주일학교 학생이 점점 적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중고등부나 청년들이 많은가? 그렇지도 않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다음세대를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 목회자의 안목의 문제다. 미래 목회에 대한 대안이 부족하니까 다음세대를 향한 관심과 투자를 하지 않는다. 우선 당장 도움이 되는 장년 교육과 전도에만 관심을 갖는다. 둘째, 한국교회의 미래 문제이다. 이대로 20-30년이 흘러간다고 생각해보자. 한국교회도 고령화되고 힘을 잃고 말 것이다. 아니, 50-60년이 지나간다면, 한국교회도 영국교회를 닮아가지 않으란 법이 어디 있는가. 성경에도 보면 여호수아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잘 섬겼지만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죽고 나자 다음 세대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들을 섬겼다고 하지 않는가.(삿2:7-10) 이것은 여호수아 세대를 칭찬한 것이 아니라 역설적 견책의 말씀이다. 그렇다. 한국교회가 미래에도 세계 교회의 등불이 되어 선교의 주도권을 잡고 복음의 빛을 비추려면 반드시 다음세대를 위한 준비와 투자를 해야 한다. 지금 한국교회가 현재의 명예와 위용, 목회자의 명성에만 만족한다면 미래의 희망은 없다. 다음세대를 생각하지 않는 목회, 미래에 대한 대안이 없는 오늘의 현실은 방황하는 별과 같다. 그러나 방황하는 별은 길을 물어야 한다. 그 물음의 해답은 다음세대를 준비하고 세우는 것이다. 그럴 때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다. 방황하는 별들이 길을 찾고 눈부신 아침을 맞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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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1
  • [함께 생각해 봅시다] 국회, 이대론 안된다
    비례대표제는 폐지해야 하고 국회의원의 수는 대폭 줄여야 오는 4월 13일은 제20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날이다. 이제 한달 남짓 남았다. 출마하는 당사자와 선거에 관련이 있는 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듯 하다. 필자는 선거에 관해 관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솔직히 정치에 관하여는 아는 것이 너무 없다. 문자 그대로 문외한이다. 그러나 국회의원을 선거할 때마다 생각되는 것이 있다. 무엇인고 하니 국회를 개혁해야지 이대론 안된다는 생각이다. 우견인지는 모르겠으나 유권자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본다. 첫째, 국회의원 비례대표제는 폐지해야 하지 않느냐 이것이다. 이 제도는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시에 도입되었고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시에 사라졌다가 제11회 선거 시에 다시 도입되었다. 이 제도는 원래 전문가들을 국회에 입성시키자는 좋은 취지로 도입되었지만 요즘은 지난 날의 행적을 드러내기 곤란한 자들과 돈으로 국회의원이 되려는 자들을 국회로 입성시키는 창구처럼된 것 같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국회를 만들려면 비례대표제는 없애야 한다고 생각된다. 다음, 지역구 의원의 출마자격은 그 지역 주민으로만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전략공천이니 뭐니 하면서 그 지역과는 상관이 없는 자를 후보로 세우거나 출마를 위해 조금 전에 거주지를 옮긴 자를 후보로 세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 국회의원의 수를 대폭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무슨 법안이든 국회에서 의결되기만 하면 시행될 것인데 굳이 의원 수가 많아야한다는 이유가 있는가. 의원 수를 지금의 절반으로 줄여도 괜찮다고 생각된다. 다음, 국회의원의 급여를 일당제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된다.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을 적용하여 일을 한 것만큼 급여를 받게하여 일하는 국회로 만들어야 할 것 아닌가. 이같은 생각은 아마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다음, 국회의원의 급여결정체계를 개선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타직종에서는 급여수혜자가 자신이 받을 급여를 결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은 자기들이 받을 급여를 자신들이 결정하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 이런 것도 기필코 개선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음, 국회의원의 뺏지를 단 하루만 달아도 종신토록 월 120만원의 연금을 받도록 되어있는 제도는 합리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웨덴 같은 나라에서는 국회의원직을 12년간 유지해야만 연금이 지급된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이 제도를 개정해야지 국회의원 뺏지를 하루, 이틀 달고도 연금을 평생 받다니 말이 되는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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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0
  • [시사칼럼] 2월 혁명
    부산 출신 임영준 시인은 2월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이제 / 한 꺼풀 벗고 / 당당히 나서 볼까 / 핑곗김에 둘렀던 / 장막도 걷어야지 // 햇살 마중 나가던 / 새순의 속삭임이 / 불을 지폈다” 얼어붙었던 겨울 땅을 뚫고 새순이 돋는 것을 보고 시인은 ‘2월 혁명’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2월의 속성인지-역사 속에서도 2월은 혁명의 달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1848년 2월 22일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공화정을 세웠고, 1917년 2월 22일 러시아에서도 파업이 일어나면서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었습니다. 1919년 2월 8일, 흰 눈이 펑펑 내리는 일본의 수도 동경 한복판에 한국인 유학생 수백 명이 모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를 쟁취한 세계 모든 나라 앞에 독립을 성취할 것을 선언한다!” 3.1 운동보다 한 달 앞선 2.8 독립선언입니다. 일본 경찰들이 들이닥쳐 일단 강제 해산을 당했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2월 12일 오전 YMCA 강당에 50여 명의 학생들이 다시 모여 독립 운동을 협의하다가 주동자들이 검거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2월 한 달 내내 학생들의 독립 운동이 간헐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광수에 의하여 국내외에 알려졌으며, 결과적으로 2.8 독립 운동은 다음 달에 벌어진 3.1 독립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97년 전 적들의 심장 한복판에서 일어난 2월 독립 운동은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 나라 선포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학생운동의 본산이나 다름없던 YMCA를 거점으로 독립 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 또한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합니다. 1928년 1월 28일 이용도는 협성신학교 제14회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목회 초창기 그는 ‘이성적인 전도인이요 문화적인 교역자’였다고 합니다. 결국 어느 날 뜻한 바 있어 그는 이른바 ‘신앙 혁명’에 들어갑니다. 박재봉이라는 청년과 함께 금강산으로 들어가 10일 간 불식불음(不食不飮)의 금식기도를 드리고 하산했습니다. 이후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산기슭이나 시냇가에 엎드려 몸부림치며 기도했고, 초저녁이나 밤중이나 새벽이나 언제든지 때를 가리지 않고 엎드렸습니다. 어느 날 새벽 3시쯤 되어 성전에 나갔다가 성령의 감동이 그의 영혼을 감쌌다고 합니다. “아버지여 나의 혼을 빼어버리소서. 예수님께 미치기 전에는 주를 온전히 따를 수 없사옵고 또한 마귀와 싸워 이기지 못하겠나이다.” 그날 밤 마귀와 사투를 벌이고 동리 밖까지 마귀를 쫓아내고 할렐루야를 부르며 돌아왔다는 얘기는 유명합니다. 암울했던 일제시대를 살았던 젊은 목회자 이용도는 그렇게 내적인 신앙혁명을 이루기 위해 고투를 벌였고, 마침내 울분을 품고 살았던 이 시대 수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위로와 도전을 던지면서 영적인 회개와 쇄신을 부르짖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 세상에 오셔서 얼어붙은 땅을 깨고 굳어버린 마음들을 녹이셨습니다. 전쟁과 공포와 학대와 차별이 횡행하던 세상에 오셔서 평화와 위로와 연합과 통일의 혁명을 이루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들은 언제 어디서든 동토의 땅을 뚫고 나오는 새순과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국내외적으로 힘들고 난해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용도처럼 필요하다면 신앙의 내적 혁명을 위해 금식하고 기도해야 할 때가 바로 이 때가 아니겠습니까? 기독청년들처럼 필요하다면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목숨 걸고 기도라도 해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2월입니다. 새순 같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우리 마음에 조국의 산하에 교회마다 곳곳에 불꽃처럼 일어나기를 간절하게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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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5
  • [목회자칼럼] 나의 마음에 울림을 준 기도
    WEC국제선교회(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는 영국의 C. T. Studd에 의해 1913년에 창립된 선교단체인데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를 갖고 있다. Studd는 귀족출신, 캠브리지대학의 수재, 유명 크리켓 운동선수로서 졸업 후 출세의 길이 확실히 보장된 청년이었다. 어느 날 대학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예수님을 영접했고 선교사의 꿈을 갖게 되었다. 졸업 후에는 많은 유산, 직책, 명예 등 출세가 보장되었음에도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사의 길로 나서려 할 때에 이런 에피소드가 전해져 온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교수가 스터드에게 말한다. “여보게, 그것은 자네에게 너무 지나친 헌신이 아닌가?”, 그 말에 스터드 청년의 대답은? “교수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내가 그 분을 위해서 바치는 희생은 그 어떤 것도 지나친 희생일수 없습니다.” 그 이후 그의 고귀한 믿음은 고귀한 삶으로 표현되었다. 많은 유산을 상속 받을 그였지만,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중국에서 10년 동안 사역하다가 건강 악화로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선교에 대해 강연을 했다. 그리고 50살이 넘어선 어느 날 어느 문에 새겨진 “식인종은 선교사를 원한다”는 글귀를 보고 이번에는 아프리카 선교사로 선교현장에서 헌신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 우리 가족이 영국에 살 때에 나는 런던 근처에 위치한 WEC국제본부를 여러 차례 방문한바 있다. 귀족이 살던 고풍이 찬란한 성과 수만평의 넓은 대지는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이 팍 트였다. 기다란 복도에는 선교지에서 사역하다 순교한 WEC선교사들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몇 주 전 주일오전예배에 뜻밖에 한국WEC국제선교회대표 박경남, 조경아 선교사 부부가 참석했다. 두분 모두가 의사출신으로 언젠가 선교사로 강한 부름을 받고 위험천만한 아프카니스탄에서 5년 가까이 사역하다가 2011년부터 대표로 섬기는 분들이다. 국제WEC는 80여 개국, 2200여 명의 선교사가 있고, 한국WEC는 60여 개국, 460여 명의 선교사가 소속돼 있다. 몇 주 전에 나는 믿음의 친구인 한철호 선교사(선교한국-미션 파트너스 대표)로부터 박 선교사 부부가 7주간 안식월을 갖는데 거처할 처소를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우리 교회 집사의 조용하고 아늑한 별장을 연결시켜주었다. 그곳에서 안식하고 계시는 중이다. 그런데 사전에 연락도 없이 먼 거리를 마다않고 우리 교회를 방문하여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다. 마산재건교회는 설립70주년을 맞이하여 2016년 표어로,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요21장, 계2장)로 정했다. 주일예배의 설교는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1)”(요21장)로 주님께서 베드로의 잃어버린, 식어진 처음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는 사건이었고, 다음 주일설교는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2)”(요계2장)로 주님께서 에베소교회의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강한 권고의 말씀이었다. 예배 후에 담임목양실에서 박 선교사 부부와 교회 성도 몇 명과 함께 기쁨의 교제시간을 가졌다. 교제 후에 나는 사모인 조경아 선교사께 기도를 부탁드렸다. 기도 가운데 조 선교사의 이런 기도가 나의 마음에 울림으로 다가왔다. “주님, 매일의 삶을 시작할 때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그런 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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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5
  • [가정칼럼] 세상을 투명하게 살아라
    큰아들이 고등학교 일학년 때로 기억한다. 우리 가족은 저녁 식사를 위해 한 식당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들이 식당 입구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며 제 엄마는 먼저 들어가라는 눈치였다. “아빠,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래 여기서 이야기할래? 무슨 얘긴데?” 아들의 얼굴 표정이 자못 진지했다. “아빠! 저를 용서하실 수 있겠어요?” “무엇이든 용서 못할 게 없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대범하게 대답했지만 무슨 사고를 쳤나 내심 걱정스러웠다. “아빠! 저, 음란 사이트에 세 번 들어가 봤어요.” 아들의 고백은 청소년기 남자아이들이 한 번쯤 빠져드는 고민이었다. 오랜 망설임 끝에 심각하게 고백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성적 호기심이 큰 청소년 시절에 흔히 있는 문제이므로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죄책감을 덜어줄까 생각하는데, 적당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아들의 고백을 들으며 내 속으로는 뜨끔했다. 아들은 세 번 봤다고 했지만 나는 그 이상 보았을 것이다. 그런 고백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줘서 고맙다. 아빠는 너보다 더 많이 봤지만 이야기하지 못했구나. 우리 사나이 대 사나이로서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자. 앞으로 안 보면 될 거 아냐.” 이렇게 말했다면 아들이 나를 멋지고 화끈한 아빠로 기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내가 솔직하지 못했기에 아쉬움이 남아 있다. 나는 내 자존심과 체면을 차리느라 훈계조로 한마디 내뱉고 말았다. “이제 그것으로 끝내라.” 아들은 용기를 내서 솔직하게 이야기했는데, 나는 당황한 나머지 내가 원치 않는 답이 튀어나왔다. 평소에 무엇이든 솔직하게 이야기하라고 해놓고 정작 나는 아들에게 솔직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 고등학교 시절에는 일탈의 즐거움을 맛보느라 하지 말라는 짓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 몰래 친구들과 술집에도 가보고, 친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집단폭력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아버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용기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창피함을 무릎 쓰고 솔직하게 고백한 아들을 보면서 나는 세상살이에 대해 한 수 배운 느낌이었다. 뿌듯하면서도 한편 으로는 나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가부장적 권위에 의해 부모 자식 간의 기강이 유지되던 시대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지도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스승으로 여기며 따라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버지는 아들에게서도 배울 것이 많다. 그날 나는 아들에게서‘용기도 힘’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용기는 진실을 말할 수 있게 하고 진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힘이 되는 법이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당연히‘거짓말하지 말라’는 진리를 가르쳐준다. 그런데 세상에는 아이들보다 어른들의 거짓말이 더 많고 심각하다. 거짓말이 많은 사회일수록 거짓말하지 말라는 가르침의 강도가 높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어릴 적 부모로부터 받은 감화가 자식에게는 두고두고 교육적 효과를 일으킬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는 위압적 가르침보다‘우리 모두 투명하게 살자’고 말한다. 시간에 투명하고, 장소에 투명하고, 생각에 투명하자는 것이다. 가족에게 자신이 언제 어디에 있는지를 항상 알려서 시간과 장소에 투명한 것은 물론이고,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함으로써 생각에 투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생각에 투명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스스로 투명하기 위한 노력은 결국 인격함양이라는 자기계발의 단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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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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