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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장로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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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9일 전 경남기업 회장이자 19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성완종 씨(63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답답한 심경이었으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탄탄대로를 달려가던 인생이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의 말처럼 ‘리바이어던(Leviathan)’이라고 하는 괴물을 만나 좌초하고 만 셈이니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가 새삼스럽습니다. 이번 사건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고인이 서산에 있는 한 감리교회의 장로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장로는 장로 교회의 꽃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교파를 초월해 장로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장로는 가히 한국 교회의 꽃이라 할 만합니다. 그만큼 장로의 일거수일투족은 교계와 세상에 미치는 파급력이 엄청납니다. 가뜩이나 개신교가 사회적인 신뢰와 대중적인 존경을 잃어가고 있는 마당에, 이번 비사(悲事)가 우리에게 더욱 큰 아픔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장로 직제를 만든 이는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요, 장로 교회를 실질적으로 조직한 이는 존 낙스(John Knox, 1514-1572)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장로는 모세 시대부터 등장하는(출 3:16; 레 4:15; 민 11:16; 신 5:23 등) 성경적 개념입니다. 다분히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는 현대적 의미의 장로와 달리 원어(原語)로 구약의 ‘자켄’이나 신약의 ‘프레스뷔테로스’는 모두 ‘공경할만한 노인 혹은 연장자’를 뜻합니다. 따라서 본래 성경적 의미의 장로는 백성들 혹은 교인들 위에 군림하고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연륜과 지혜와 말씀으로 잘 돌보고 섬기는 직분이라야 합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이러한 장로의 정치적 성격과 목회적 성격 양자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발전하고 있을까요? 칼빈과 낙스 시대의 장로는 군주(君主)에 대립하는 시민 대표로서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대혁명을 기점으로 절대군주체제가 무너지면서 이러한 정치적 의미는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오직 교회만이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기존의 시스템(system)을 고수했고, 그 결과는 여실히 장로교의 몰락으로 나타났습니다. 미국 해외선교연구센터(OMSC) 국제선교통계보고서(IBMR)의 ‘2013년 세계선교통계’에 따르면 전체 기독교 인구 23억 5,500만 명 중 천주교가 12억으로 여전히 최대 교세를 자랑하며, 개신교에서는 영국성공회 9,100만, 침례교 9,000만, 감리교 7,600만 명에 비해 장로교는 1,800만 명으로 전체 기독교인구 대비 0.8%, 전 세계 개신교 인구 중에서도 3.4%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급격히 하락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편 고(故) 이정석 박사(Vrije Universiteit Ph. D.)는 선교 초창기의 영수(領袖) 제도와 유교의 신분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한국 장로 제도는 급격하게 세속화되었고 이것이 교회의 세속화를 부추기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습니다(2002.4.10. 기독교개혁신보).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장로 제도와 관련해서 세계사적인 그리고 토착적인 이중의 부담과 한계에 직면해 있는 셈입니다. 더군다나 더욱 심각한 점은, 이것이 비단 장로교의 문제만이 아니라 일종의 ‘장로교화’되고 있는 한국 교회 전체의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해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장로 본연의 개념과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수임자(受任者)로서 겸손하게 섬기는 장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도 감히 격동할 수 없는 ‘리워야단(Leviathan)’일지라도(욥 41:10), 주께서는 그 머리를 부수시고(시 74:14) 벌하시며 죽이실 수 있다(사 27:1) 말씀합니다. 회개하는 백성을 괴물처럼 변해버린 현실 앞에 좌초하도록 결코 좌시하지 않으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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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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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 푸른 버드나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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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꽃들이 피어난다.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강물이 얼어붙던 겨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1년 사시사철을 하루도 쉼 없이 달리는 삶이기에 겨울과 봄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문득 서재에서 창밖을 본 순간 앙상한 버드나무 가지에서 푸른 싹이 터 오르는 것을 보았다. 싹만 나온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가 봄바람 결에 흔들렸다. 그 순간 나의 마음도 흔들렸다. 아니, 하나의 공간, 우주의 공간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가녀린 나뭇가지의 흔들림 속에 광활한 우주의 질서와 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 겨울나무도 생명이 있기에 봄 햇살 아래 새싹을 피운다. 생명은 감출 수 없다. 꿈과 열정은 무엇도 막을 수 없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속에서 절박한 꿈의 몸부림을 본다. 허공을 향한 생명의 절규를 듣는다. “나, 여기 살아 있어요. 보세요. 마침내 긴긴 겨울을 견디고 다시 살아나 새싹을 피웠잖아요.” 나도 저 푸른 버드나무 잎사귀처럼 꿈꿀 수 없을까. 꿈이 잠든 시대다. 겨울 버드나무처럼 말이 없다. 버려진 주검처럼 차갑다. 청년 실업과 자살, 사이코패스 범죄,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한 성적타락, 이념, 지역, 계층갈등, 경제침체 등 암울한 현실 속에 꿈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메마른 겨울 버드나무처럼 보인다. 겉으로 볼 때는 죽은 나무 같다. 차가운 눈보라에 껍질이 벗겨져 나가고 상처투성이다. 그러나 난 보았다. 봄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 끝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새싹을.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 있었고, 꺼져 있는 것 같았으나 그 속에는 붉은 불덩이가 타오르고 있었다는 것을. 절망과 상실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니다. 그 속에는 분명 생명의 씨앗이 있다. 희망의 노래가 숨겨져 있다. 푸른 버드나무는 차가운 새벽바람과 이슬을 맞으면서도 끝끝내 새싹을 피워 올리지 않는가. 창가로 다가가 봄날 오후의 버드나무를 바라본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싹을 낸 버드나무…. 그건 춥고 가난하고 외로웠던 내 젊은 날의 모습이었다. 버드나무를 바라보며 아주 오래된 반가운 벗이 찾아온 것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버드나무가 내 삶을 투사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덧 나는 혼자 이렇게 고백하였다. “버드나무야, 살아줘서 고맙다. 네가 겨울을 이기고 살아줘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거야. 겨울 끝에서 피어나는 너의 절박한 꿈이 많은 사람들을 살려 낼 거야. 봄날을 향해 달려가는 너의 희망과 생명의 질주가 겨울 들판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서 다시 심장이 뛰게 할 거야. 푸른 버드나무야, 넌 겨울은 봄을 결코 이길 수 없음을 보여주는 한편의 시가 되었구나.” 우리의 새로운 삶, 제2막의 인생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불행한 상황 앞에 절망하지 말고 내 안에 숨겨진 역동적 희망, 꿈의 푸른 에너지를 펌프질해보면 어떨까. 내 안에 죽지 않고 꿈틀거리는 생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 다시 푸른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저 봄날 오후의 버드나무처럼 나 여기 살아 있다고 손짓하며 웃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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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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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가나안보다 중요한 것(출애굽기 5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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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게 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 왕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모세와 아론은 바로 왕에게 단 한 번도 자신들이 가나안에 가려고 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당연히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이들은 가나안을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단지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광야로 가겠다고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모세와 아론이 강조한 것은 자신들이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킬 것>이라고 했고, 이것을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모세와 아론에게 중요한 것은 가나안이라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 절기를 지키는 것, 제사를 드리는 것, 종합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자신들이 광야로 사흘 길 쯤 가서 절기를 지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머물던 고센에서 가나안까지는 가장 빠른 길로 가도 열 하룻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흘 길쯤 가서 절기를 지키겠다는 것은 광야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들은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겠다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광야든, 가나안이든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다는 그 자체였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 신앙에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부록인 <소요리문답> 제 1문항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는 것이며, 그 분이 계심으로 인해 한없이 즐거워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가 광야에 있든지, 가나안에 있든지, 그 장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간과합니다. 그리하여 출애굽의 목적에 대해 오해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출애굽시킨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자유는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게 하는 도구였을 뿐,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자유가 목적이 되면 방종으로 흘러 범죄하게 될 것입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이 자신의 소견에 좋은 대로, 마음대로 하여 범죄한 것이 그 예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출애굽의 목적을 <가나안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도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게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 땅에서 얻은 곡식과 짐승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가나안이라는 땅을 목적으로 여기면 기복적 물신주의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광야에 있든지, 가나안에 있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길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그들의 존재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면 거기가 축복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비록 가나안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는다면, 거기가 멸망의 장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면서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광야를 벗어나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성공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가나안처럼 모든 조건이 좋지 못해도,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어도, 그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면 그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든 조건이 풍족해도 하나님을 제대로 경배하지 않는다면 그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의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만 믿고 높이고 경배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비록 가난해도, 병들었어도, 어려운 환경에 있어도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도록 힘쓰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그에게는 광야도 가나안이 될 것입니다. 어디서나 하나님을 높이는 행복한 삶을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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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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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해 봅시다] 건강은 건강할 때에 챙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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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보다 중요한 것은 예방과 검진이다
이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
필자가 지난 3월 4일 복음병원에 입원했다. 다음 날 위,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기 위해서 였다. 저는 내시경 검사를 비롯해 각종 검진을 정기적으로 받고 있다.
입원실이 2인실인데 들어가 보니 이미 한 사람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서로 인사말을 교환하고 어디가 어떠하길래 입원하셨냐고 물으니 위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받기 위해 이 병원에 왔다는 것이었다. 초면인데도 시원시원하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열심히 하는 분인데 나이가 44세였다. 얼마 전부터 속이 쓰리기에 병원에 갔더니 위궤양 같다며 약을 주기에 먹었으나 효험이 없어 큰 병원에 가서 위내시경 검사를 받아보니 위암인데 초기가 아니고 위를 절반 이상 절제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수술을 잘 한다고 소문이 나 있는 이 병원에 수술 받으러 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엔 암환자 같은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음식도 잘 먹고 환자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위에는 암이 그토록 퍼져 있었다.
제가 왜 이같은 얘기를 하는가. 위, 대장내시경 검사 등 건강검진은 몸에 어떤 증상이 나타나면 그때 할 것이 아니라 아무 증상도 없고 건강하다고 생각되는 때에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건강검진이 뭔가. 내가 건강하다는 것을 확인해 보는 것이다. 검진 결과 건강하면 다행이고 악성종양이 발견되면 더 다행 아닌가. 왜냐하면 아직 초기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발생한지 얼마되지 않은 종양은 내시경 시술로써 간단히 제거하고 만다.
필자가 금번에 절실히 느낀 것은 젊다고 안심하지 말고 40대라도 정기적으로 각종 검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몸에 이상이 있다고 느낌이 있어 진찰을 받으면 암인 경우는 이미 때가 늦은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모두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대로 무서운 병은 대부분 상당히 심해질 때까지는 아무 증상을 못 느낀다. 각종 암이 그렇다. 당뇨병이 그렇고 고혈압도 그렇다. 아프지 않다. 이런 질환은 모두 ‘조용한 살인자’이다. 그러므로 내 몸에 전혀 자각 증세가 없어도 검진을 받아야 한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나 건강이상으로 소중한 것이 있겠는가. 건강을 잃고 나면 재물도, 명예도, 권력도, 재간도, 업적도 모두 아무 소용이 없게된다. 첫째가 건강이다. 그러므로 건강은 반드시 건강할 때에 챙겨야 한다. 치료보다 중요한 것은 예방이고 정기 검진이다. 이 한마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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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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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칼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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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김북경 목사(런던한인교회 원로)로부터 온 E-메일에 첨부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의 연설문’의 내용이 참으로 감동적이여서 함께 나누길 원한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우루과이 대통령(81세)의 연설문은 감동적이다. 발전과 행복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이런 연설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 아래 연설문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알려진 남미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까 대통령이다. 그는 지난 2010년에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지난 2월 말 퇴임했다. 그는 집권기간 중 대통령 궁을 노숙자 쉼터로 내어주고, 대통령 월급 1,300만원 중 90%를 빈민주택기금으로 기부했다. 차는 28년째 타고 다니는 폭스바겐 비틀. 대통령 경호원은 2명, 집은 33년째 살고 있는 우루과이 전통가옥이다. 그의 집권 이후 우루과이는 매년 5.5%대의 경제 성장률을 이뤘고 국민소득 1만5천불, 국민 65% 이상의 지지를 받았다.호세 무히까 대통령의 연설문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저는 이 자리에서 몇 가지 의문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오후 내내 우리는 지속 가능한 발전과 빈곤을 없애는 문제에 대해 논의해왔습니다. 과연 우리의 본심은 무엇입니까? 현재 잘살고 있는 여러 나라의 발전과 소비 모델을 흉내 내자는 게 아닙니까?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독일 가정에서 보유한 자동차와 같은 수의 차를 인도인이 소유한다면 이 지구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산소가 어느 정도 남을까요? 더 명확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서양의 부유한 사회가 하는 그런 소비 행태를 세계의 70~80억 사람이 할 수 있을 정도의 자원이 지구에 있을까요? 그게 가능합니까? 아니면 언젠가 우리가 다른 논의를 해야만 할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문명은 우리가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문명은 시장 경제와 경쟁이 낳았습니다. 그리고 무한의 소비와 발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장경제가 시장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시장 경제가 자원을 찾아 세계 곳곳을 다니는 세계화를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세계화를 통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계화가 우리를 통제하고 있습니까? 이런 무자비한 경쟁에 바탕을 둔 경제시스템 아래서 우리가 연대나 더불어 살아가자는 논의를 할 수 있나요? 어디까지가 동료이고 어디까지가 경쟁 관계인가요? 우리는 발전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지구에 온 것입니다. 인생은 짧고 바로 눈앞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량소비가 세계를 파괴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고가의 상품을 소비하는 생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제 부족한 식견으로 보면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는 정치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문화적인 문제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만든 사회 모델인 것 입니다. 그리고 반성해야 할 우리들의 생활방식인 것입니다. 제 동지들인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6시간 노동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6시간 노동을 하게 된 사람들은 다른 일도 하고 있어 결국 이전보다 더 오랜 시간 일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는 오토바이나 자동차 등의 구매에 들어간 할부금을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 돈을 다 갚고 나면 자신이 저처럼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는 노인이 되어 있고, 자신의 인생이 이미 끝나간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운명이 아닌가 라고요? 제가 말하려는 것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개발이 행복을 가로 막아서는 안됩니다. 개발은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어야만 합니다. 개발은 행복, 지구에 대한 사랑, 인간관계, 아이 돌봄, 친구 사귀기 등 우리가 가진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자산은 바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울 때 우리는 환경 문제의 가장 핵심 가치가 바로 인류의 행복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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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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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률상식] 헌법개정위원회에 바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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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모범의 시벌과 해벌을 권징조례로 옮김은 언어도단 - 시벌과 해벌은 권징재판이 아닌 예배모범의 의식(儀式)
2015년 3월16일 합동 총회 회관에서 헌법개정위원회의 주관으로 헌법 개정을 위한 전문가 초청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간담회의 결과는 별 소득이 없어 보여 아쉬움만 남게 되었다. 1. 예배모범 제16장, 17장을 삭제한 개정안 그 아쉬움 중에 한 가지를 언급하면 모 발제자의 설명 중에 “예배모범에 있는 시벌과 해벌은 권징조례로 옮겨야 한다.”고 하였고, 예배모범 개정 초안에도 역시 예배모범에 “제16장 시벌과 제17장 해벌은 권징조례 편으로 보내는 것이 옳을듯함”이라고 이유를 밝히면서 예배모범에는 삭제되었으나 권징조례 개정 초안에는 추가되지도 않았다. 즉 예배모범 제16장 시벌과 제17장 해벌은 1922년에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번역 출판한 한국 장로교 최초의 헌법인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필자 : 주 예배모범 제17장 시벌 제18장 해벌)의 pp. 232-243에 110행으로 되어 있고, 현행 헌법에는 1922도 판 헌법과 같은 내용으로 pp. 261-266에 107행으로 존재하고 있는데, 개정위원회가 초안한 개정안에는 예배모범 제16장과 제17장 전체를 아예 삭제해 버렸다는 말이다. 교회의 시벌과 해벌 의식 절차가 없어졌으니 만일 개정안대로 헌법이 개정 시행된다면 시벌과 해벌 의식을 어떻게 시행하려는지 자못 궁금하다. 정치 제7장 “교회 예배 의식 10항”에 “권징”을 두고 있어 법리적으로 정치와 권징과 예배의식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그런데 헌법개정위원회는 예배 의식 안에 기도, 찬송, 성경낭독, 강도, 성찬, 헌금, 축복 등을 두는 것과 같이, “권징” 중에 “시벌과 해벌”은 재판에 속하는 부분이 아니고 의식에 속하는 부분이므로 예배모범 안에 두고 있는데 왜 예배모범에서 삭제 하려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2. 일관성 없는 헌법 개정의 원칙 이에 대하여 초청을 받아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필자는 이의를 제기하려 하였으나 발언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기에 이제 지면을 통하여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예배모범에 있는 시벌과 해벌은 권징치리회의 재판에 속한 것이 아니고 행정치리회장이 교인들 앞에서 공포하는 의식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헌법에도 권징조례에 두지 아니하고 예배모범 안에 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헌법 번역판인 1922년 조선예수교장로회헌법 PP. 232-243 참고). 여기에서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모 교수의 신도게요, 소 요리문답, 대 요리문답에 관한 발제 중 “조문의 내용과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성경을 인용한 그 성경을 바꾸거나 삭제할 수 있느냐?”는 의제가 나왔을 때, “원문에 인용한 성경은 절대로 바꿀 수 없고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위원회의 결론이었다. 그런데 필자가 정치에 관하여 발제를 하면서 “웨스트민스터 헌법에 어긋난 개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자 위원회는 “웨스트민스터 헌법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현 시대의 요구에 따라서 과감하게 바꾸어야 한다.”라고 주장을 하였다. 이것은 법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도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물론 교회 헌법 개정에 관련하여 교리 편은 개정이라기보다는 새로 번역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교리 편과 함께 관리 편인 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도 다같이 1643.7.1.부터 1649.1.22.까지 5년 6개월 22일 동안 영국 웨스트민스터 교회당에서 1,064회나 회집하여 제정한 똑같은 웨스트민스터 헌법이다. 이 헌법을 한국 장로교회는 1915년부터 1921년까지(제4회 총회록 P.32, 제6회 총회록 PP.18-19 참고) 9인 위원(마삼열, 양전백, 원두우, 김필수, 김선두, 곽안련, 함태영, 배유지, 남궁혁)에게 위탁하여 장장 6년간 교리 편과 관리 편을 함께 번역하여 출판한 것이 조선예수교장로회 1922년도 판 초유의 헌법이다. 그런데 똑같은 웨스트민스터 헌법 조문 중에 “어떤 조문은 이치에 맞지 않아도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하면서 “어떤 조문은 과감하게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요, 이율배반이다. 즉 어떤 것은 보수를 주장하면서 예배모범의 시벌과 해벌은 총 13페이지의 107행을 전부 삭제해 버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개정안 예배모범에 제16장 시벌과 제17장 해벌을 삭제해 놓고는 개정안 권징조례 제33조 (시벌 및 해벌)에는 “시벌과 해벌은 헌법 예배모범 제16장 제17장의 규정대로 … 행하여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개정위원회의 개정안은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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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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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 사랑과 진리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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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생명이며 모든 만물의 원천이다. 그리고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담는 그릇이며 사랑에서 나오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은 이해이며 존중이며 주고 싶은 마음이며 최고를 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진리는 생각이며 재능이며 말이며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도 솔로몬은 왕으로 백성을 사랑하기 위해 지혜를 간구한다.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로 백성의 문제를 해결하며 나라를 번성하게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랑이 먼저이며 진리는 그 다음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그리고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사람을 살아있는 영으로 창조하셨다. 다르게 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진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은 진리로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있어야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최초의 사람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사랑 없는 진리 즉 자신의 생각으로 삶을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속사람은 죽고 육신만 남았으며 사랑 없는 진리를 진리로 알고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이다.
사랑을 거부한 진리를 택한 것이 죽음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사랑을 버렸기에 진리를 알아보는 눈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품은 진리만이 사람을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증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인 것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하나님의 자녀 즉 본래의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 속에 사랑과 선이 있어야 한다. 내가 악을 행하면서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악행을 하면서 진리를 “무조건 믿어라. 믿기만 하면 된다.” “믿으면 구원 받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랑과 진리를 모독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거짓과 악이 하나이듯 사랑과 진리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삶 속에서 사랑과 선을 행하지 않으면서 “나는 진리를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과 선이 없는 진리가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회개란 매 순간 자신의 거짓되고 악한 모습을 깨닫고 돌이켜서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사랑과 선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과 진리는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하며 같은 양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있는데 진리가 없으면 이 진리는 거짓이 된다. 그리고 사랑은 없는데 진리가 있으면 이 진리는 악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악과 거짓의 기원은 사랑과 진리가 함께 있지 않기에 생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가정에서 혹은 교회에서 어디서든지 화를 내고 상대방을 무시하고 악담을 하면서 자신의 옳음을 주장한다면 이 모습은 악한 모습이며 사랑 없는 진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겉과 속이 다르게,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선한 모습을 하면서 속으로는 어떤 나쁜 의도를 갖고 있다면 이것은 사랑은 있으나 진리는 없는 겉과 속이 다른 거짓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사기를 치는 사람이나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사람의 모습이 이러하다고 볼 수 있다. 무슨 말을 하든지 사람을 돕든지 기도를 하든지 어떤 행동을 하든지 자신 속에 사랑이 있는지, 그 행동이 선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사랑과 진리가 함께 있는 그 길이 천국의 길이며 옳은 길이며 생명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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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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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겨루어 이긴 자 (창세기 32: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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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성경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야곱입니다. 성경에서 제일 얄미운 사람이 야곱인데 시간이 흘러갈수록 야곱과 제가 너무나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잔꾀를 부리고, 남을 속이고, 자기가 고백한 대로 험악한 세월을 살았던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이라는 인물은 태생적인 한계가 많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시작하는 말씀이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창32:24) 인생외톨이로 평생 고독한 싸움을 싸웠던 사람이 야곱이었고, 기질 상으로 남에게 지고는 못살아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야망의 사나이가 야곱입니다. 일평생을 그렇게 늘 외롭고, 목이마른 삶을 살아온 사람이 야곱이라고 봅니다. 저는 야곱의 기질 중에 가장 독특한 것이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형님하고 다투고, 태어날 때부터 형님의 발뒤꿈치를 붙들고 나오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하는데 포기하지 않고 질수 없는 씨름을 하는 겁니다. 어떤 상황이 되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샅바를 잡고 놓지 않는데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는 이유가, 오늘 내 삶의 스타일을 보고 요즘 만나는 사람들을 볼 때 너무 약하다는 겁니다. 맷집이 없고 끈기가 없고 전투력이 없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너무 쉽게 울고, 너무 쉽게 상처받고, 너무 쉽게 포기하고 도무지 내공이 없습니다. 사탄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온갖 간교와, 속임수와, 사탕발림으로 덤비는데 오늘날 저와 여러분은 무장해제 되어있습니다. 샅바도 잡기 전에 기권하고 있습니다. 그런 느낌이 제 마음속에 있습니다. 여러분 야곱이 좋다 나쁘다 하기 전에 갖고 있는 강점이 지기 싫어하는 욕심입니다.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이 있는데 그것을 야곱이 가지고 있고 지기 싫어하는 이것이라고 봅니다. 이걸 갈증과 긍정과 열정이라고 봅니다. 갈증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목마름에 본능적으로 찾아다닙니다. 오늘 성도들이 살아갈 때에 야곱이 가지고 있는 기질,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이 기질 이것이 얼마나 아쉬운지 모릅니다. 져주시는 하나님께서 30절에『그러므로 야곱이 그곳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드디어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뵈옵고 난 뒤에 독대, 직고, 대면의 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것이 봄눈 녹듯이 녹습니다. 만사가 해결이 됩니다. 주의 얼굴을 뵈옵고『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창32:31) 해가 돋았다는 사실, 드디어 불안에 쫓기면서 속고 속이는 삶을 살았던 야곱의 인생에 서광이 비춰지고 이제는 인생이 전혀 새로워집니다. 흑암의 권세, 어둠은 사라지고 햇살이 떠오를 때 야곱이 절뚝거리면서 걸어가는데 그의 몸은 절었지만 그의 인생은 방황 없이 똑바로 나아갑니다. 하나님 앞에 그런 꺾어진 경험, 영적인 씨름을 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 맷집이 나오고 내공이 형성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긴 자에게만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십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살리고 윈윈 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긴 자에게는 생명나무 열매를 주셔서 세마포 흰옷을 입히시고 세마포 흰옷 입은 자만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입장이 됩니다. 하나님나라에 기둥같이 쓰임 받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고, 사망의 해를 받지 않고, 환란은 벗어나고, 사망을 이기는 자가 됩니다.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고,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고, 새벽 비를 주시고, 주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리라 하십니다. 할렐루야!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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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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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탐구] 애굽의 총리가 요셉(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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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술 관원장의 추천으로 바로 앞에 나가 바로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써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풍년 뒤에 따라올 흉년을 대비함으로써 기근으로부터 애굽과 주변 나라 백성들을 구원하였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해석하는 자가 없으므로 번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꿈의 내용은 바로가 하수가에 섰는데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그 뒤에 흉악하고 파리한 소가 살진 일곱 소를 먹었습니다. 바로가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은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와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켰습니다. 바로는 그 꿈의 정확한 의미는 몰랐지만 뭔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바로가 꿈의 해석자를 찾고 있을 때 술 맡은 관원 장은 2년 전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 자신의 꿈을 해석하여 석방과 복직을 예언했던 요셉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바로에게 요셉에 대해 고하였습니다. 요셉은 바로 앞에 불려 나갔고 바로의 꿈을 명쾌하게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 해석은 칠 년 동안 큰 풍년이 든 후에 이어서 칠년 동안 큰 흉년이 들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속히 행하실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앞일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였습니다. 그것은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를 세워 풍년이 들 동안 곡식을 저장하여 흉년에 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면 흉년으로 인한 멸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의 해몽을 들은 바로 왕은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하면서 애굽의 모든 백성을 치리하라고 명하였습니다. 바로는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지혜를 주셔서 꿈의 해석을 알게 하셨음을 고백하며 요셉을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바로는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가 타는 버금 수레에 태우고 모든 백성으로 절하게 하였습니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 와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까지 하던 요셉이 애굽의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하에 진행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아비 집에 거할 때에 꿈을 통해 요셉을 높이실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시하신 뜻이 오랜 세월을 거쳐 요셉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믿었기에 억울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소망과 믿음을 잃지 않고 신앙을 지켜 왔습니다. 요셉의 고난과 인내의 세월이 결국엔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랜 고난의 시간을 통하여 요셉의 인격과 신앙을 연단시키시고 때가 이르자 요셉을 높이 드셔서 이방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인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됨은 애굽 백성과 함께 주변 여러 나라 백성들에게 구원이 임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요셉은 복의 근원으로서 주변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을 나누어 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의인 한 사람을 통하여 여러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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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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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칼럼] 집 문 앞에 있어야 할 쓰레기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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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은 부부 갈등을 겪는 제자에게 ‘부부간에 도리를 지키는 것은 힘들지만 이것이 가정 행복의 근본이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고 한다. 이황은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선조 임금의 부름을 받음은 물론 학문으로도 세상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행복한 사람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 평소 이황의 인품을 믿었던 스승이 자신의 딸을 거두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그 딸은 어릴 때 사화를 겪은 충격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 이황은 스승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여 어린아이처럼 철없는 아내의 행동을 감싸 주며 평생 남편의 도리를 다하며 살았다. 평소 부부가 서로 이해하며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아는 이황은 아내와의 사이가 좋지 않은 제자가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제자에게 편지를 써 주며 말했다. “편지를 여기서도 말고 집에 들어가서도 말고, 집에 도착하면 사립문 앞에서 읽게.” 제자는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스승의 명이라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스승의 말대로 집 사립문 앞에 도착해서 스승이 써 준 편지를 뜯었다. 그 내용은 사립문 앞에서 편지를 읽으라고 한 이유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부부가 함께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한 설명이었다. “사립문은 가정과 세상의 경계 지점이네. 가정은 세상의 가치가 적용되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이네. 집 밖에서 있었던 울분과 괴로움은 집안으로 들이지 말고 사립문 앞에서 마음을 정화하고 들어가야 하네. 이것이 사립문 앞에서 편지를 읽으라고 한 이유이네. ……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되네. 가장 가까운 사이이지만 또한 가장 조심해야 하는 사이이므로 늘 손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아내에게 예를 다하게. 그럼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평생 이해하며 살 수 있을 것이네.” 한 순간의 분노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한다. 세계최고의 여자골퍼 캐리 웹이 자신의 어이없는 플레이에 화가 난 나머지 골프채로 모래를 내리쳤다가 2벌 타를 먹고 우승을 놓친 일이 있었다. 결국 1타차로 준우승, 우승 상금까지 놓치고 말았다. 그 흥분의 대가는 무려 5천4백만 원이나 되었다. 과연 나는 내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 마음을 다스리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다. 가정 밖에서 쌓인 스트레스는 바이러스와 같아서 순식간에 가족들을 전염시켜 고통스럽게 만들고야 만다. 집에 들어서기 전에 그 쓰레기통에 사회에서의 절망, 한숨, 욕망을 모두 뱉어 버리고 집안으로 들어갈 때 가정은 행복해 진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일하러 가기 위한 준비는 철저히 하는데 가정의 행복이 시작되는 퇴근 시간을 준비하는 데는 무신경하다. 가족이 행복하지 않고서는 절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가족에게 불행 바이러스 대신 행복 바이러스를 심으려면 퇴근하여 대문을 열기 전 속세의 모든 걱정과 분노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밝고 환한 얼굴로 집에 들어서 보면 어떨까? 영업으로 잔뼈가 굵은 분이 있었다. 영업부 세일즈맨으로 시작해 사장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어떻게 세일즈맨으로 입사해서 사장이 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성공의 비밀은 가정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도 집에 들어서자마자 잔소리를 하던 전형적인 남편이었지만 어느 순간 가정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고, 그래야 일도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정의 행복을 위해 한 가지를 지켰는데, 일을 마치고 들어서는 집 앞에서 크게 한숨을 쉬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 마지막 고객을 만나러 왔다.” 어떻습니까? “나는 오늘 마지막 고객을 만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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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