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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말씀] 잃었던 아들 찾기(누가복음 15:31-32)
    나이가 든다고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다. 결혼을 했다고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다. 아이를 낳았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가만히 앉아서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고 훈련을 받고 준비를 해야 된다. 진정한 부모가 되기까지는 마음이 썩어야 된다. 누가복음 15장의 주인공은 집 잘 지킨 맏아들이 아니다. 집 나갔다 돌아온 둘째 아들도 아니다. 주인공은 아버지이고, 주제는 그 애비의 마음이다. 부모가 되기까지는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썩고 죽어야 된다. 한마디로는 온갖 희생을 다해야 된다는 것이다. 빛과 소금처럼 촛대가 녹아 타 들어가고 소금 자신이 녹아 없어져서 비로소 맛을 내고 간을 들인다. 부모가 되기까지는 한도 끝도 없이 사랑을 주어야 된다. 내 새끼를 위해서라면 피를 뽑아서라도 사랑할 수 있다. 손주 사랑은 오면 좋고 가면 더 좋은 것이다. 우리 포도원교회도 포도송이 키즈카페를 만들어서 다음세대를 위하여 몸부림을 친다. 부모가 되면 열 손가락 안 아픈 곳이 없다. 집 잘 지킨 맏아들도 결국 아버지 마음을 모르고 속을 썩였고, 폐륜적인 둘째 아들도 부모 속을 썩였다. 그야말로 집토끼, 산토끼 둘 다 힘들다. 착한 맏아들은 훨씬 더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이 바보 같은 짓을 할 줄을 뻔히 알면서도 다 품어 주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돌아오기까지 오매불망 기다렸다. 돌아왔을 때는 목을 안고 울어버리고, 잃었다가 찾은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였다. 그래도 대화가 필요해! 미워도 다시 한 번!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자식 농사는 산 너머 산이 아니라, 아예 산 너머 똥밭이다. 평생을 가슴 졸이며 수고와 눈물을 쏟아 부어야 된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에게 그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기까지 다시 해산의 수고를 치른다고 하였다. 또 하나의 열매를 얻기까지 춘하추동 비바람이 불고 천둥번개가 쳐야 되는 것이다. 꽃샘추위에 바람을 겪어야 꽃대가 힘 있게 선다고 한다. 자식 키워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부모님의 희생과 눈물, 가난과 애달픔이 가슴 절절이 느껴진다. 태를 열어 달라고 기도하듯이 전도의 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라. 잃은 아들 돌아오기를 기도하라. 오매불방, 노심초사, 학수고대하시는 아비의 심정을 알고 기도하라.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일꾼을 보내어 달라고 기도하라. 내가 일꾼을 찾아다니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주인에게 청하여 일꾼을 보내어 달라고 해야 한다. 세월이 지나서 돌아보면 내가 찾고 내가 선택한 것은 중요하지가 않았고, 하나님이 떠밀어 주신 곳, 하나님이 붙여 주신 만남이 최고였다. 뉴욕 프라미스 처치의 김남수 목사님은 복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식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내가 전도해서 낳은 영적인 후손의 이름을 적어보고 불러보라.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 주님의 가장 큰 기쁨은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다. 야곱의 축복은 죽어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요셉을 다시 만나고 그 아들이 온 집안을 살리는 것이었다. 잃은 자식을 찾아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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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0
  • [교회법 특강] 교회법과 양삼의 자유에 대해
    지금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이념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 결과 중립을 지켜야 할 국가기관과 공무원이 종종 정치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한다. 참담한 것은 일부 교회가 정치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교회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까?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재가 되시어 신앙 혹은 예배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사람의 교리와 명령으로부터 사람의 양심을 자유롭게 하셨다” 이 글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20장(기독신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2조에 나온다. 이 문구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장로교회의 교회정치원리 제1원리 첫 문장에도 나오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 도입된 교회정치 8대 원리는 본래 1788년 미국 장로교회가 제1회 총회를 앞두고 작성되어 이후 미국장로교회의 정치원리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1원리는 한국교회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교회정치원리를 한국교회에 전한 이는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곽안련 선교사다. J. A. Hodge가 1882년에 쓴 <교회정치문답조례>(원제: 장로교회 헌법이란 무엇인가)를 축약 번역한 책에서 그렇게 했다. 본래 제1원리는 위에 소개한 “양심의 자유”에 대한 고백을 시작으로 문장이 두 개 더 있다. 그런데 곽안련 선교사는 그중에서 두 번째 문장을 제1원리에서 엉뚱하게 제2원리(교회의 자유)로 이동시켰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두 번째 문장 내용이 어떠하기에 그렇게 했을까? 두 번째 문장은 “교회와 국가의 전적인 분리”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곽 선교사가 위 책을 번역하여 처음 출간한 1917년, 1922년에는 제자리에 있었다. 근데 1930년 판부터는 두 번째 문장이 제2원리로 이동되었다. 당시 1930년대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교회에 대해 국가에 대한 충성과 동방요배, 신사참배 등을 강요한 반면 교회는 여러 일로 특혜를 받기 위해 조선총독부와 교섭하며 그들의 권력을 의지할 때였다. “양심의 자유” 선언에 이어지는 첫째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래서 종교와 관련한 모든 문제에서 개인적인 판단의 권리를 보편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제2원리로 옮긴 두 번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심지어 보호와 안전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또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고 보편적인 것 이상으로 국가 권력에 도움을 받는 어떤 종교적인 법을 바라지 않는다.” 이 문구만으로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런데 곽 선교사는 1882년 미국에서 출간된 <교회정치문답조례>에서 의도적으로 제1원리의 일부를 제2원리로 옮길 뿐 아니라, 심지어 이 문구에 대한 해설도 생략해버렸다. 당시 국가를 최고 가치로 강요한 조선총독부의 눈치를 의식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민감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해설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신조나 정치가 국가에 의해 강요되어선 안 된다. 우리 교회도 보호와 안전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고 보편적인 것 이상으로 국가 권력에 도움을 받는 어떤 종교적인 법을 바라서는 안 된다...국가는 교회정치형태의 어떤 것이라도 부과하고 강요할 권한이 없으며 교회 일부를 특별하게 지지하고 후원할 권리가 없다. 사람들이 양심을 따라 예배하도록 공평하고 보편적인 보호를 제공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다. 이 나라와 관련해서 교회와 국가의 전적인 분리(the entire separation)보다 더 좋은 원리가 세워지지 않았다. 로마천주교나 어떤 다른 교파라도 설립과 확장을 위해 헌금하도록 시민에게 세금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이제 의문이 풀렸다. 곽안련 선교사가 교회와 국가의 전적인 분리 조항을 엉뚱한 곳으로 옮기고, 이에 대한 해설도 생략한 것은 당시 우리나라는 총독부가 국가 권력을 대신해서 교회에 신사참배, 국가헌금을 강요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교회정치원리가 가르치는 교회와 국가의 전적인 분리 원리가 지금 우리에게 간절한 때다. 물론 신앙과 정치는 분리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앙은 누룩처럼 정치에 역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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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2
  • [목회자칼럼] 아이는 어른의 선생
    임연당 이양연(李亮淵, 1771-1853)은 조선 후기의 시인이다. 그의 시 野雪에서 穿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朝我行跡, 遂作後人程.(천설야중거, 불수호란행. 금조아적행, 수작후인정“- 눈을 뚫고 들판 길을 걸어 갈 때는 모름지기 어지럽게 걷지를 마라 오늘 내가 밟고 간 이 발자취가 뒷사람이 따르는 길이 될 터이니”)이라 노래했다. 이 시를 백범 김구 선생이 널리 애송했다. 김구 선생이 애송한 시는 이양연의 시가 아니라 서산대사가 지은 선시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금일아적행, 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이였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도덕과 윤리의 핵심은 정직이다. 정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제자나 자녀들에게 항상 정직하라고 가르치고 훈계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어른이 되면 될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출세하면 출세할수록 정직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오히려 어릴수록 더 정직하다. 어린 아이들은 선생님의 가르침과 자신이 배운 것을 따라 본능적으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세상 사욕에 물든 어른들은 습관적으로 정직을 회피하려고 한다. 자신과 타인을 속이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분이 된다. 거짓말과 거짓 행동이 일상생활이 된다. 따라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신의 감정을 잘 감추고, 표가 나지 않게 진실을 숨기고, 거짓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실력이 좋아지는 것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정직에 있어서 결코 순수하지가 않다. 어른들 중에 정직하지 못한 상위 부류들이 정치인들과 고위관료들이다. 청문회나 국정조사가 TV를 통해서 생중계가 될 때 가만히 보면, 소위 이 나라의 지도자들과 리더라고 지칭되는 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아니다.” “기억이 안 난다.” “모르겠다.” 등이다. “아기모”의 행진이다. 정말 머리가 나쁜 사람들만 모인 것 같다. 저들이 어떻게 대한민국의 지도자와 리더로 살아왔는지 또 앞으로 살아갈 것인지가 정말 궁금하고 걱정이 된다. 일반 서민들과 국민들보다 더 무지하고 아둔한 사람들이다. 저들의 통치를 받아왔고 또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속이 쓰리고, 삶이 슬프고, 마음이 아프다. 만약 그들이 머리가 아둔하지 않다면 정직을 상실한 거짓의 달인들이다. 어른과 지도자들은 눈 덮인 들판 길을 먼저 걸어가는 선각자들이다. 이들의 발자국을 따라 아이들과 국민들이 그 뒤를 따라간다. 앞선 자들이 잘못된 길로 가면 뒤 따라 가는 자들도 동일한 잘못을 범할 수밖에 없다. 언제 우리나라는 먼저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가는 어른들과 지도자들의 발자국을 따라 아이들과 국민들이 걱정 없이 따라 걸어갈 수 있을까? 방정환 선생이 아이들은 어른들의 선생이요 아버지라고 했다. 요즘의 세태를 보면 진실인 것 같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이 어른들을 가르치고 있다. 도덕과 윤리의 핵심은 정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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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2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이승만의 반공주의(3)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은 정략적 고려에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에 대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준 바 있고, 1945년 10월 21일 행한 방송 연설에서, 경제적인 면에서 근로대중에게 복리를 줄 목적으로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인사들과는 협조할 용의가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한 바 있으나 이런 시사는 정략적인 의도였다. 1945년 12월 17일과 19일 행한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연설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진심을 드러냈다. 그는 조선공산당 내의 친소파당원들을 소련의 세계적화 정책에 농락당한 반민족적 이기주의 집단으로 규정하고 이들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1946년 1월 13일 좌우합작을 위한 5당 회담이 결렬되자 이승만은 기자회견을 통해 “공산분자와 합동이 사실상 될 수 없는 것을 알고도 성의를 다해 왔으나 파괴자와 건설자가 어떻게 합동되며, 애국자와 매국자가 어떻게 한길 갈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재차 공산당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 후 동서냉전이 악화되자 공산당은 계급 간 알력을 조장하고 계급투쟁을 선동한다며 강력하게 비판했다. 1949년 5월의 일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에서의 반공운동은 ‘세계 모든 자유민들의 싸움’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할 명분으로 일민주의(一民主義)를 제창했다. 이것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혹은 건국과 함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반공체제 구축을 위한 새로운 이념 제시였다.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6.25 전쟁 이후 심화되어, “공산주의와는 절대로 함께 살 수 없다”는 보다 철저한 반공주의로 발전했다. 이런 이승만의 신념은 그 시대의 보편적 가치로 수용되었다. 그것은 북한에서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경험적 확신이자 6.25 전쟁을 통해 얻는 교훈이었다. 해방 이후부터 전쟁기까지 100만이 넘은 월남 인구도 반공주의의 심화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뒤돌아보면 우리나라는 건국 전후 좌익세력의 건국준비위위원회 활동, 좌우합작운동 혹은 박헌영의 인민공화국의 선포, 신탁통치안에 대한 좌우익의 대립, 미소공동위원회, 남한에서의 좌익 활동, 유엔의 한반도 문제 논의, 남북협상, 5.10 총선거 등 고비 고비마다 한반도는 이념적 경계에서 심각한 위기를 경험했다.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소련의 기도, 남로당의 활동, 특히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대중의 무지 가운데 남한에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반공 체제를 구축한 것은 이승만의 지도력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사실상 미군정은 공산주의와의 대립보다는 타협을 원해 좌우합작을 선호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과 충돌하면서까지 소련편에 선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대한민국의 건국을 이끌었다. 이것은 그의 기독교적 가치, 국제 정치 질서에 대한 인식,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신, 그리고 공산주의의 허구성에 대한 깊은 이해에 기초한 것이었다. 정리하면,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건국투쟁에서 3개의 이념 구릅이 대립하고 경쟁했다. 첫째는, 자유민주주의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우익진영이었고, 둘째는, 공산주의 통일국가를 세우고자 했던 좌익 진영이 있었다. 셋째는 좌우합작 정부를 세우고자 했던 중간파 집단이 있었다. 임시정부 구성원 중에서도 우파는 우익진영을, 좌파는 공산진영을, 일부는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거나 참여했다. 이런 혼란과 대립 가운데서도 자유민주의 공화제 정부를 건국한 것은 이승만의 공헌이라 할 수 있고 특히 그의 반공주의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의 반공 노선은 그의 건국 사상이라기보다는 그가 추구했던 자유민주주의의 소극적인 측면이었지만, 그가 청년 시절부터 가졌던 반로(反露)사상은 약 60년 이후 전개되는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지침이 된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이승만은 1898년 3월 19일자 「협성회회보」에 기고한 논설에서 제정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지금의 영도) 조차 기도를 비판하여 이를 좌절시킨 바 있고, 그 후 한성감옥에서 쓴 한문논설에서, 그리고 1904년 2월부터 한성감옥에서 저술한 자신의 『독립정신』(1910)에서 반로사상을 피력한 바 있다. 러시아에서의 공산혁명과 공산주의의 확산, 소련에 의한 북한에서의 공산화, 그리고 한반도 공산화를 기도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이승만의 반로 사상은 시대를 앞서가는 성찰의 결과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사상은 김재준 한경직 손양원 김홍도 김준곤 조용목 목사 등 교계지도자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한국교회는 반공주의적 성격을 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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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5-05-12
  • [교회건축칼럼] 교회공간의 다양성 연출을 위한 계획
    한국교회의 공간구조는 본당위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교육공간이나 지역사회를 위한 공간이 절대 부족한 현실이다. 특히 입당 후 3-4년이 경과되면 교육공간의 절대부족 현상이 초래된다. 따라서 내부 공간의 합리적인 계획은 융통성과 가변성이 절대로 요청된다. 내부는 항시 유기적으로 변화 가능하게 계획되어야 한다. 교회의 첫인상은 주출입구의 로비와 홀에서 어느 정도 결정되어질 만큼 중요하다. 대부분 교회의 로비와 홀은 단순히 공유면적의 개념으로 제공되어진 면이 보편적 현실이다. 하지만 로비와 홀이 덩그러니 면적만 차지하고 통로의 기능만 수행한다면, 이 역시 대단히 비경제적이다. 로비와 홀은 교회의 첫인상으로서 밝고 쾌적한 연출이 요청되므로 기능면에서도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로비와 홀은 지역주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며 교회의 대외적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고 문화적공간의 연출이 가장 효과적인 위치이다. 따라서 로비와 홀은 단순히 머무르는 곳이나 통로의 공간이 아니라 북카페나 갤러리, 교회홍보관 커피숍, 서점, 문화공연장 등과 같이 다양한 활동이 연출되는 곳으로 꾸며야 한다. 일반인도 쉽게 와서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용도의 설정도 중요하다. 보통 전체연면적의 15~20% 정도의 면적을 점유하므로, 시야의 확장과 개방감, 바닥의 레벨차를 도입하여 역동적인 곳으로 특별히 계획해야 하며 교회의 규모가 크더라도 로비, 홀이 협소하면 전체교회가 협소해보이게 된다. 반면 교회규모가 작더라도 로비, 홀이 넓으면 교회규모도 넓게 인식된다. 로비홀은 교회 여건상 협소하게 배치할 수밖에 없다면 수직면으로 개방하는 것도 지혜이다. 공간이 수평적으로 넓지 못한 경우 수직으로 넓히면 시야가 수직으로 확장되어지므로 넓게 그리고 개방감이 확보된다. 남가주 사랑의 교회는 협소한 로비홀이 수직으로 개방되여져서 넓게 보이게 되어있다. 또 비교적 교회역사가 오래되거나 기념비적인 내용을 홍보할 경우 로비홀은 홍보 전시관, 교회를 알리는 정보공간으로 꾸며서 교회를 처음 출석하는 초신자와 지역주민에게 교회를 소개하는 곳으로 사용해도 효과적이다. 로비홀은 교인의 작품이나 유명작가의 미술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이용해도 문화적 공간으로 활동될 수 있다. 지구촌 교회의 로비홀은 미술품을 상설 전시하는 공간으로 이용되며 테이블을 설치하여 차도마시고 만남의 장이되며 휴게공간이 되기도 한다. 복도에 면한 각 실의 벽은 유리창을 크고 넓게 배열하여 쾌적한 복도가 되게 해야 하며 창을 통해 외부의 빛이 간접적으로 도입하면 복도도 밝고 생기 있는 공간이 된다. 또 복도에서는 내부실이 들여다보이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부에 중요한 행사를 할 경우에는 브라인드로 가리게 하면 되므로 평시에는 빛과 안전에서 창을 설치해야하며 복도의 벽은 획일적으로 처리하기보단 작은 그림이나 성경문구 그래픽, 게시판, 알림판, 행사홍보전시공간 등 정보와 다양한 표정이 상존하는 곳으로 꾸며서 단순한 통로에서 의미 있는 곳으로 변화가 필요하다. 교회의 화장실은 문화공간으로 변해가는 추세에 있다. 한편의 시와 성경문구, 아름다운 성화 한쪽구석에서 가지런히 정돈된 책자들 나무와 어항, 새소리가 들리는 화장실은 아마 문화적 공간으로 손색이 없는 연출이다. 교회화장실 역시 교회의 첫인상을 결정 짖는 중요한 요소이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 여성화장실에는 화장을 고칠 수 있는 카운터설치, 유아용 기저귀부스, 변기에는 온좌를 설치하여 이용자를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는 인상을 심어주고 수납공간을 충분히 두어 물건을 잘 놓고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화장실에 자연적인 요소를 많이 도입할수록 화장실은 쾌적해 진다. 마감재료도 타일과 같은 소재를 너무 획일적으로 사용하여 화장실이 획일화되지 않도록 적절한 재료를 잘 배열하여 기존의 화장실다움에서 탈피하는 발상이 필요하다. 또 계단도 고려할 점이 많다. 대부분 교회계단은 정상인과 성인위주로 되어있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 난간의 손잡이는 90cm로 성인들만 잡을 수 있고 노약자나 어린아이들은 어렵게 되어있다. 이것은 노약자나 어린이도 난간을 잡고 오르내릴 수 있게 동시에 2개의 손잡이 난간을 설치하여야 하며 난간 재질도 차가운 금속성의 소재로 대부분 되어있다. 이 부분도 목재나 부드러운 마감으로 바꾸어야 한다. 계단이 통로의 기능만 수행하는 것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기능이 수반하도록 세심히 배려할 필요가 있는데 예를 들면 어린이 교육관 쪽의 계단은 옆에 미끄럼틀을 배치하면 내려올 땐 미끄럼틀이된다. 계단의 벽면은 성경의 이야기를 그래픽으로 연출하여 교육의 기능도 병행할 수 있고 계단참에는 간단한 화분이나 꽃과 같은 자연적인 연출을 도입하면 계단공간이 단순한 통로에서 다양성이 있고 표정이 풍부한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어린이들이 머무는 유초등부실, 유아부실, 소년부실 등은 안전에 특별히 고려해야 한다. 바닥은 딱딱한 후로링과 같은 소재나 벽은 콘크리트소재 등을 사용하면 넘어지거나 부딪히면 안전사고가 빈번히 발생되는 부위이다. 보통 바닥은 쿠션이 있는 다공질의 매트릭스와 같은 바닥재를 깔아야 하며 바닥에서 1.5m 정도까지의 벽은 쿠션이 있는 소재나 스펀지가 내장된 천류 등으로 마감하여 마음 놓고 행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어야 한다. 어린이위주의 공간은 다양한 학습기구나 보조 장치물, 장난감등이 많이 수반되므로 실 한쪽에는 반드시 수납공간을 배치해야 하며 면적상 배치가 어려울 경우 천정 속에라도 수납공간을 설치해 봄도 바람직하다. 보통 신발을 벗고 들어가므로 신발수납공간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으면 끝나고 나올 때 굉장히 혼잡한 입구가 된다. 교회의 가구도 일반적인 가구의 도입은 적절치 않다. 왜냐하면 하나의 공간에서 하나의 기능만 수행하지 않기 때문이며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이 다양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공간의 이동성과 더불어 가구의 융통성이다. 예를 들면 중고등부실에서 예배를 드릴 때 청소년들은 개인의자와 테이블을 하나씩 이용할 것이다. 이 경우 예배후에 분반공부가 시작된다고 할 때 개인의자와 테이블 10개를 맞추면 10명이 모일 수 있는 원탁으로 바로 조립된다면 10명단위의 분반이 신속히 이루어지고 이동식 칸막이 4개가 중고등부실을 구획하면 분반 교실로 바로 변하는 것처럼 공간의 융통성과 이를 대응하는 가구의 모듈개념은 교회내부공간의 중요한 개념이다. 교회 로비와 홀은 단순히 공유공간의 제공에서 탈피하여 기능이 수반되도록 연출해야 한다. 로비와 홀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는 면에서 대화와 만남, 음료, 스넥, 커피, 서점, 갤러리와 같은 공공적 기능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단순히 통로에서 적극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특히 지역사회주민이나 초신자들에게는 종교적인 기존 선입감을 없에고 교회가 친근하고 접근하기 쉬운 장소라는 느낌을 제공할 수 있어 더욱 효과적이다. 예수소망교회의 로비와 홀은 이와 같은 기능이 비교적 잘 고려되어있어 일반 보행자나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머무를 수 있는 곳이다. 로비와 홀은 만남의 장소로서 약속장소로서 매력적이고 부담 없는 곳이다. 이곳은 일반 공간과는 달리 경영마인드가 도입되고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은연중에 기독교적인 문화가 전달되고 보다 자연스럽게 복음의 영역이 확장되는 곳이므로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의 특성을 잘 고려하여 교회가 지역사회와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질 수 있는 프로그램의 실행이 필요하다. 다양한 교회 교육의 프로그램, 세미나, 문화강좌 등이 이곳에서 충분히 홍보되고 교회의 비젼과 사역의 내용, 교회의 역사 등을 알릴 수 있는 다양한 로비, 홀의 연출이 필요하다. 따라서 로비, 홀은 접근하기 쉬운 주출입구 부근이 좋다. 이 교회의 서점과 카페는 근접되어있어 동선의 이동이 짧고 편리하다. 복도칸막이가 완전히 유리로 되어있으므로 시선의 개방감이 좋고 쾌적하다. 복도에는 상시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으므로 잠시 감상하면서 사색할 수 있어 표정이 풍부한 공간으로 잘 꾸며저 있다. 일반 교육관과는 달리 복도 천장이 간접조명, 색체의 계획, 바닥 재료나 벽체의구성 등 인테리어의 연출이 교회의 도입부를 세련되게 구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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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2
  • [위드애] 장애에 대한 자부심
    ‘자부심’이란 말을 한 번쯤은 들어보거나 사용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 자부심’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는 마음’이 ‘자부심’(自負心, pride)인데, “장애에도 자부심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거나,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있는 가 반면, “장애를 갖고 있다고 해도 자부심이 있지”하는 사람도 있다. ‘장애 자부심’이란, ‘기존의 사회가 만들어 온 부정적인 장애 이미지에 대한 장애인 스스로의 도전이며, 역량강화된 자기 인정이고, 외부 세계에 대한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자기표현’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전신거울을 보지 않는다고 한다. 집에 전신거울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장애를 가진 자신의 모습을 마주할 용기가 아직은 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본인 역시 선천적 뇌성마비장애와 스무 살에 갖게 된 왼쪽 편마비장애로 인하여 왼쪽과 오른쪽 어깨 길이에 차이가 있고, 허벅지 굵기 차이도 크게 난다. 그리고 마비된 왼손은 대체적으로 굽어 있고 얼굴은 기울어져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샤워를 한 후, 또는 옷을 입기 전이나 외출을 하기 전에 현관 신발장에 있는 전신거울을 자주 본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장애로 인하여 비틀어지고 좌우대칭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는 꺼려하고 보기 싫어할 수도 있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장애를 가진 그 모습도 인정해야 할 나의 모습이며, 하나님께서도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아름답게 여겨 주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만약 장애를 가진 몸에서 장애를 갖지 않은 몸을 가질 수 있는 신약이 개발된다면 어떠할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픔을 겪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나를 아픔과 고통, 장애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신약을 구입해서 복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선택은 무엇일까? 먹지 않을 것이다. 왜 먹지 않을 거냐고? 내게 장애 자부심이 없었던 예전이었으면 복용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타인이 보기에 불편해 보이고 행복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내 모습이 좋다. 물론 불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불행하지는 않다. 오히려 장애로 인하여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하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장애인식개선강사로, 목사로 학생들이나 성도들에게 알려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나의 장애 자부심을 가득 채우고 있다. 장애당사자이면서, 장애인식개선교육 강사인 내가 먼저 나의 장애를 마주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한다면, 즉 장애 자부심이 없다면 어찌 타인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어찌 글을 쓸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함에 있어서 머뭇거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장애인식개선은 물리적 환경변화도 중요하고, 비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선적으로 장애 당사자부터 자신이 가진 장애에 대한 자부심을 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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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2
  • [시사칼럼] 누가 본회퍼와 히틀러를 자꾸 소환하는가
    최근 총신의 조직신학자 문병호 교수가 <칼 바르트 비판>을 출간했습니다, 저자는 지피지기의 마음으로 바르트의 대표작인 <교회교의학> 4권 16부 내용 전체를 개괄하고 핵심 내용을 병기한 한국 최초의 작업물을 저서의 말미에 남겼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바르트 신학을 비판하는 7가지의 테제를 역시 권말에 결론처럼 제시합니다. 하지만 자신만의 도그마에 빠지지 않기 위해 칼빈, 투레틴, 하지, 바빙크, 워필드, 오웬 등을 소환하면서도 불트만, 몰트만, 블로허, 판넨베르크 등 현대신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하고 심지어 가톨릭 계열의 칼 라너와 발타자르까지 언급합니다. 뿐만 아니라 최근 학자들 즉 미글리오리나 마이클 호튼 등의 성과도 소개하고 특히 현대 바르트의 권위자라 할 수 있는 맥코막이나 헌싱어 등의 의견을 빠짐없이 인용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주목할 사람은 에버하르트 부시인데, 방대하고 탁월한 바르트 전기를 기록한 학자이기 때문입니다. 상기한 비판서 앞부분도 바르트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소개하는데 그럴 때 필연적으로 만나는 인물이 있습니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바르트는 히틀러를 비판하면서 바르멘 선언(1934)의 주역을 자처했는데 당연하게도 나치당의 핍박을 받아 추방과 망명 아닌 망명을 거듭해야 했습니다. 나치의 전체주의가 지배하던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광기의 시대에 히틀러를 공박하던 또 하나의 상징적인 인물이 바로 본회퍼입니다. 그는 “일부 사람의 권력은 다른 이들의 어리석음을 필요로 한다”고 설파했는데, 당시 히틀러를 메시아처럼 추앙했던 독일 교회를 두고 한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종교개혁의 발상지였던 독일 기독교는 히틀러를 지지하고 심지어 일종의 메시아라면서 추종했습니다. 다시 독일을 하나가 되게 하고 부강하게 만들며 경제를 일으키고 민족자긍심을 높여준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들은 히틀러 정권이 자행했던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인권 모독 및 억압 그리고 민주주의에 가한 모욕은 물론 유대인 학살 같은 만행도 눈을 감거나 옹호하기 바빴습니다. 당시에는 그들이 주류였고, 그들이 옳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칼 바르트는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타국으로 이주를 거듭해야 했고, 본회퍼는 1945년 4월 9일 결국 나치정권에 의해 사형에 처해집니다. 하지만 불과 한 달이 지나지 않는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후 역사는 누구도 히틀러를 정당화하고 당시 그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독일의 그리스도인들을 의롭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최근 한국에 그것도 기독교계에 “미친 자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는 본회퍼의 말을 인용하면서 본회퍼를 자처하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본회퍼 전문가인 김성호 박사에 따르면 정확한 표현은 ‘거리에 미친 사람이 차를 몰고 인도로 돌진하는 모습을 본다면 목사로서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르거나 유족을 위로하기보다는 먼저 차에 뛰어올라 운전대에서 운전자를 끌어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1946년 3월 본회퍼 사후 공개된 편지에서)이며, 설령 그와 같이 바르트 식으로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를 하더라도 과연 운전대를 잡은 미친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왜곡이 있고 역사적 평가 앞에 정당할 수 있겠는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정치인 한 사람도 현재 일단의 세력이 히틀러보다 더하다고 발언하는 바람에 이번에는 <해리 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볼드모트” 같은 그 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대에 히틀러 같은 존재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일 있다면 누가 과연 히틀러 같은 존재입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역사는 냉정하게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는 누가 과연 옳은 지, 누가 과연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지,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공의를 구현하는 길을 가고 있는지를 다 알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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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2
  • [소강석칼럼] 빛의 나라에서부터 빛의 연대기까지
    4월 23일 수요일 오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빛의 연대기’ 공연을 하였습니다. 남들은 그냥 지켜보는지 모르지만 저는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제가 작사를 할 뿐만 아니라 영상 하나하나, 멘트 하나하나까지 다 체크를 해야 했거든요. 사실 제가 영상 내레이션을 몇 번을 보면서 “이렇게 고쳐라, 이렇게 편집하라”고 수정하고 또 수정했습니다. 영상 실무를 담당하는 나유진 자매가 우리 교인이 아니었다면 엄청난 시험에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마지막 순간까지 꼼꼼하게 체크를 하고 지적을 했거든요. 사실 장소를 허락해 주신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님께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마는. 아쉬운 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직도 한국교회 연합기관이 하나 되지 못했다는 사실 입니다. 저는 애당초 한교총과 한기총이 합하여 이 칸타타를 공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실무선에서부터 반대가 심하고 어떤 적대감, 증오심 같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같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또 하나는 사실 ‘빛의 연대기’ 공연을 더 넓은 광장에서 하고 싶었지만, ‘광장’하면 긍정적이라기보다 부정적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잖아요. 그래서 잠실에 있는 체조경기장이나 기타 다른 곳도 찾아봤지만, 대여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본당 2층을 가득 메운 우리 교회 성도들의 그 뜨거운 열기는 강단으로 까지 전해졌고 저의 제스처에 따라서 다 움직이는 성도들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음악감독을 맡은 류형길 지휘자가 너무 수고가 많았습니다. 사실은 총 9곡인데 제가 과감하게 한 곡을 뺐습니다. 저라고 아쉬움이 있는 걸 왜 모르겠습니까마는, 저는 항상 시간을 예측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한 곡을 더 불렀으면 그 한 곡 때문에 지루함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류형길 지휘자에게 서곡을 한번 멋지게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지역 차량이 돌기 때문에 12시까지 예배를 마쳐야 되거든요. 그런데 정확하게 행사가 끝나는 시간이 12시 1분 30초였습니다. 제가 7번 곡을 뺀 것이 너무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특별히 서곡에서부터 시작하여 피날레에서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할 때는 그야말로 모든 청중이 감동을 받고 다 일어서서 함성과 박수를 보냈습니다. “태초의 밤하늘에 떠오르던 별 / 달빛 아래에 잠든 꽃들이 깨어나고 / 구속사의 푸른 장강 이 흐르고 / 한라에서 백두까지 그 길을 따라가 / 눈물과 상처로 얼룩진 역사 / 길고 길었던 시간들 / 하나님 섭리로 이겨냈네 / 빛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 / 이제 어두웠던 역사 그 치고 / 밝은 빛의 향해를 시작하네 / 우린 진정한 하나가 되어서 / 이 빛을 지켜가리라 / 우 린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 빛의 선민으로 나아가리라 / 우린 진정한 한민족 되어서 / 이 빛 을 지켜가리라 / 거룩한 환상 생명의 언어로 /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리라 / 어둠을 뚫고 밝 아오는 찬란한 / 찬란한 새벽빛이여 /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 아멘 아멘 아멘 아멘!” 행사가 끝나고 나니까 어느 국회의원은 “이거 목사님이 진짜 쓴 거 맞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또 어떤 총회장은 “목사님이 시인이라는 걸 이제 알았네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아니 국민일보도 안 보십니까?” 사실 이 공연은 한 교회에서만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유튜브에 올릴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본다 한들 현장에서의 느낌과 감동을 그대로 전해주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유튜브를 시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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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2
  • [성서연구]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런 저런 목적으로 몇 차례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재미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둥그런 중국식 식탁에 둘러앉아 십여 명이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음료수 잔은 우리의 것보다 많이 작습니다. 거기에 사이다를 부어 마시는데 제가 한 모금 마시면, 중국인 형제가 다시 채워주곤 했습니다.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 조금이라도 잔이 내려가면 다시 채워주는 것이 중국식 손님 접대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배가 부르면 마시지 말고 그냥 놔둬야 합니다.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다시 채워줄 테니까요. 끝없이 채워주는 것, 그것이 그들의 환대법이었습니다. 중국식 손님 접대법의 원조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잔을 채우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잔을 빈 채로 놔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우리 잔을 가득 차고 넘치도록 채우십니다. 다윗은 이 은혜를 체험한 후에 노래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잔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빈손으로는 은혜의 생수를 받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 잔은 클수록 좋겠지요. 믿음만큼 받고, 기도한 만큼 응답 받는 것은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크게 기도하고, 크게 응답 받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큰잔을 준비하십시오. 아무리 큰잔도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잔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 모든 잔에 넘치도록 채우실 분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21) 하나님은 우리 생각과 기대 이상으로 채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잔을 엎어놓고 있으면 곤란합니다. 엎어놓은 잔에 무엇을 채울 수는 없을테니까요. 반드시 잔은 바로 놓아야 합니다. 엎어놓은 잔은 배가 튀어나왔습니다. 교만합니다. 그러나 바로 놓은 잔은 안으로 움푹 들어갔습니다. 겸손합니다. 모름지기 은혜는 겸손한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자, 이제 앞을 보십시오. 잔이 채워졌습니까? 그러면 잔을 들어 감사하면서 들키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잔이 채워졌건만, 아직 자신의 잔을 빈 잔으로 여깁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을 찾아 온 세상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을 발견하지 못한 채 몹시 지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랜만에 편안한 잠자리에서 단잠을 잤습니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깬 그는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 순간 뜰에 갖가지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뜰 안의 화단에 행복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집 뜰 안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미 잔이 채워져 있답니다. 잔이 채워져 있음을 발견하는 지혜가 있길 원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잔이 채워져 있음을 알면서도 마시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마시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면 “오래도록 소유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은혜는 누리는 것이지,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샘은 퍼낼수록 맑은 물이 솟는 법입니다. 퍼내지 않고 놔두면 썩습니다. 은혜는 사용하고 나눌수록 더 많이 주어집니다. 록펠러가 죽은 후에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록펠러는 무엇을 남겼는가?” 그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남겼다” 그렇습니다. 소유하고 있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대로 두고 갈 뿐입니다. 사용하십시오. 누리십시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마시고 나면 잔이 빌까 염려하여 마시지 못합니다.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잔을 빈 채로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채우고, 또 채우실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 고단한 인생 길에서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수 있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다윗처럼 고백합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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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2
  • [은혜의말씀] 살면 전도 죽으면 천국 (시편 118:17~19)
    본문은 하나님께서 나를 경책하시되 생명을 거두지 아니하시고, 나의 앞길을 열어주시고, 전도의 문을 열어주심을 감사하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탁하신 사명이 있다면 그 사명을 이루기까지 건강도 주시고 물질도 주신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고민하지 말라. 후패할 육신을 위해 살지 말고, 영혼이 아름다워지는 길을 가라. 인생에서 보람 있는 삶, 목적이 이끄는 삶, 영혼구원을 위한 삶을 따라가라. 생생한 꿈을 가지면 그 꿈이 나의 발을 이끌어간다. 성도는 구도자, 예배자, 전도자로서 삶의 구호가 분명해야 한다. "살면 전도 죽으면 천국"은 할렐루야 아줌마, 고(故)최자실 목사님의 사진 밑에 기록된 평생의 구호이다. 최자실 목사님은 경남 진해에서 살다가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당시 전도사였던 고(故)조용기 목사님을 만났고 전도에 힘쓰며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개척했다. 함께 사역을 하던 조용기 목사님에게 따님인 김성혜를 시집보내고 조용기 목사님의 장모가 되었다. 그리고 기도의 영성을 강조하면서 오산리 최자실국제금식기도원을 만들었다.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도원이 되었다. 지금은 그 오산리 금식기도원의 한 자리에 조용기 목사님도, 김성혜 사모님도, 최자실 목사님도 묻혀 있다. 또 최자실 목사님은 아들인 김성광 목사님과 강남 금식기도원을 세웠는데, 기도원 곳곳에 "살면 전도, 죽으면 천당"이라는 구호가 걸려있다. 한 여인의 신앙적인 열정이 세계 최대의 교회를 세우고 국제적인 기도원을 세워서 수많은 기도의 용사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CTS 청년 독수리의 진행자 김형민 목사님도 최자실 목사님을 롤 모델로 삼고 따라하려고 같은 모자를 쓴다고 한다. 모자만 흉내 내어도, 모양이라도 따라하다 보면 큰 영향력을 미친다. 사람은 생사관이 분명해야 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이다. 이순신장군의 정신은 필사즉생 필생즉사이다. 신앙생활은 내 옛 사람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의 증인이 되어 복음 전하는 것이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는다. 전도는 살아있는 사람이 해야 될 사명이다. 전도를 하게 되면 죽은 영성이 깨어난다. 전도는 무기력한 교회를 살린다. 전도하기 시작하면 기도해야 되고, 기도하고 나서면 성령님이 역사하시고 복음을 전하면 사람이 바뀌고 가정이 변하고 역사가 만들어진다. 전도하면 교회학교가 살아나고, 전도하면 교회에 생기와 소망이 넘치게 된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부흥되고 건축하고 그 이후에 어느 순간 전도의 불씨가 꺼지게 되었다. 편리주의, 적당주의에 편승하여 본질을 잃어버리니 무기력해지는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사나 죽으나 복음전파 하리라. 복음 전도는 취미활동이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고 사명이다. 사명은 죽어도 해야 되는 것이다. 전도는 교회의 존재 이유요, 성도의 핵심 사역이다. 한번뿐인 인생을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가 아니라 더 늦기 전에 주의 일을 해야 된다. 살아서 건강한 동안에 전도 하리라. 죽으면 전도할 수가 없다. 천국에 가서는 전도할 필요가 없다. 아난티 회장 이중명 장로님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긍정적인 생각과 창의적인 실행, 그리고 몰입을 해야 된다고 하였다. 대구의 어느 장로님은 주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일하지 않고 적당히 사는 것이라고 한다. 살면 선교, 죽으면 영생 복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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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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