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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누구를 위한 일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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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미친 년 오줌 누듯 여덟 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가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里)로도 모인다.”(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1. 1 중에서) 한국 조계종 소속 현각 스님의 발언이 화제입니다. 예일대 학부, 하버드 대학원의 스펙을 자랑하는 독일계 가톨릭 집안 출신의 미국인 폴 뮌젠(Paul Muenzen)은 숭산을 스승으로 1992년 한국에서 출가하여 ‘현각(玄覺)’이라는 법명을 받고 승려가 됩니다. 독특한 이력을 가진 벽안의 스님은 곧 장안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TV에 출연하는가 하면 그가 쓴 『만행(萬行)-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는 일약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25년간 한국 불교의 자랑같이 보였던 현각이 얼마 전(7.29) 충격적인 일갈(一喝)을 남겼습니다. “실망한 한국 불교와 인연을 끊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가 제시한 이유는, 과도한 순응(hyper conformity) 문화로 대표되는 유교적 잔재, 여전히 만연한 인종 차별과 남녀 차별, 기복 신앙 등이었습니다. 결국 한 마디로 하자면 이렇습니다. “돈만 밝히는 한국 불교를 떠나겠다!” 박상륭의 소설 속 유리(?里)는 구도자의 성명(姓名)인 동시에 구도의 성소(聖所)였습니다. 청소년기 절친의 죽음 앞에서 인생의 삶과 죽음의 비밀 앞에 고뇌하던, 그러나 공문의 안뜰도 바깥뜰도 아닌 곳에 서 있던 미국인 폴 뮌젠은, 또 한 사람의 유리가 되어 또 하나의 유리에 정착해서 구도의 길을 걷는 현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박상륭의 ‘유리’인 동시에 예수 사람으로서 ‘우리’의 자화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현각의 수행을 방해하고 결국 절연선언을 하게 만든-비록 바로 글을 내리고 연을 끊겠단 말은 와전된 것이라 번복했음에도-종교적 구습과 사회적 인습들은 어쩌면 한국 불교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민낯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좀처럼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혜안에 역사적 통찰력과 무엇보다도 성경의 고갱이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굴종(屈從)과 교회에 대한 자기애(自己愛)에 의지하는 성도들, 혹은 백인에 대한 까닭 모를 동경과 유색 인종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은밀하게 자리 잡은 교회들, 교단 중앙에서부터 개(個) 교회에 이르기까지 너나 할 것 없이 만연한 돈봉투의 신화들, 생존을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나라와 거룩한 주님의 뜻이 아니라 일신의 유희와 안락과 건강과 번영에 천착한 값싼 신앙들!> 현각의 일갈이 있은 후, 불교계 안팎에서는 자성과 참회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이 추구하는 진리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회개의 목소리는 힘이 있습니다. 하물며 절대적인 진리요 유일한 길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세계에서야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한국 교회를 향한 일갈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일갈이 있기는 있으되, 한국 교회 전체를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영향력 있는 일갈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일갈이 가끔 있긴 있으되, 거룩한 도전(holy challenge) 앞에서 진정성 있는 반응(realistic response)을 찾아보기가 또한 어렵습니다. “회개하라!” 세례 요한의 외침이 문득 그리운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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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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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칼럼]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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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를 〈인간답게 ,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인류는 오랜 세월 다양한 실험을 해 보았다. 참으로 긴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하나의 이상적인 사회제도를 만들어 내었는데 그것이 곧 〈민주주의, 民主主義〉이다 민주주의 요체 (핵심)는 ①천부 인권사상 ②시장 경제이다 시장경제의 내용은 시장(수요와 공급)의 자유 사유재산인정, 자본흐름의 자유이다.
지금은 ‘시장경제’가 민주주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시장경제는 〈소비가 미덕이다〉고 줄기차게 외친다. 생존과 생계조차 힘들던 1960~70년대에 우리는 이런 구호를 사치스럽고 꿈같은 희망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소비가 남용되고 과잉소비로 말미암는 여러 가지 폐단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소비하는 것이 취미가 되더니 그것도 이제는 싫증을 느끼면서 사람들은 너도 나도 심심하다고 한다.
이 집단적 〈무관심과 심심함〉이 “먹는 것, 요리하는 것, 음식 열풍”으로 쏟아지고 있다.
근래에 읽은 충격적인 글 일부분을 소개한다. 「어느 시간에 TV 채널을 돌려도 요리 Program을 만난다.〈건강 식단 만들기〉도 있고 산해진미 프로도 있다. 어느 여배우 집의 냉장고를 열어젖히자 프랑스에서 비행기로 공수해온 진기한 버섯과 지중해産 요리 재료가 그득했다.
배곯던 시절을 경험한 우리세대의 눈에는 ‘호기심’보다 “저러고도 벼락 안 맞겠나?” 하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요리사〉라는 좋은 우리말을 밀어내고 〈세프〉라는 서양어를 유식한 척 더 선호한다.
영국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을 때 후발국가 독일이 영국을 추격해오자 영국국민들은 〈국가적 위기〉라고 모두 소리를 높였다. 그 때가 100년 전 일이다... 그러나 이내 영국 사람들은 〈무관심과 심심하다〉라는 유행병에 빠져 들었다. 「맛없는 소박한 음식」도 감사하면서 달게 잘 먹던 영국인들이 미식열풍(美食?風)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맛집〉을 찾아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와 이태리 까지 맛을 찾아 떠나는 순례행렬이 줄을 이었다....」
오늘 우리 사회가 국력이 기울기 시작하던 100년 전의 저 영국과 닮은꼴이 돼간다.
참으로 애타는 마음이 일어난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음식 잔반으로 내버려지는 음식이 어느 정도냐 하면 북한주민 전체가 한 해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한다. 전국 곳곳이 지나친 소비와 낭비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폐기물, 쓰레기처리 문제 때문에 대 홍역을 치루고 있다. 정말 “우리가 이렇게 마구 낭비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책망 받지 않을 까?”하는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우선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절제의 은사〉를 발휘하자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충분히 〈부요해진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다. 이제는 얼마든지 적게 쓰고 절제할 수 있다. 지구가 지니고 있는 자원은 한정돼 있다. 우리는 다음세대 우리 후손들도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뱃새다 들판에서 큰 무리를 먹이신 후에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끼고 절제할 때 귀한 줄을 알게 되고 감사하고 만족하게 된다. 편리주의, 낭비주의, 사치화를 경계하고 절제의 미덕을 세워 나감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아름다움을 널리 펼쳐 보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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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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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률상식] 비대위의 교인 총회 노회 탈퇴는 불법, 당연 무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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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담임목사 해임을 위한 공동의회 소집 청원에 대하여
정치 제4장 제4조 1항에 “위임목사는 지교회의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만 70세까지 시무한다.”고 규정하였다.
즉 위임목사는 만 70세까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위임을 해제(해임)할 수가 없는 것이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규정이다. 다만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해임을 할 수 있는데 그 특별한 경우에도 반드시 노회가 해임하는 것이지(정치 제16장, 제17장) 그 목사를 청빙한 지교회가 해임할 수는 없다. 만일 지교회가 정당한 이유 없이 위임목사를 해제하려 함은 하나님과 공회 앞에서 서약한 교회 헌법 정치 제15장 제11조 2의 서약을 어긴 범법행위가 된다.
즉 장로는 지교회가 장립 위임하였으니 지교회가 공동의회로(정치 제13장 제4조) 시무 해임을 할 수 있고, 당회 결의로 권고사직(정치 제13장 제6조) 등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목사는 교회가 담임목사의 해임이나 권고 사임이나 권고사직 등을 할 수 없고, 상술한바와 같이 오직 노회의 직무로서 노회만 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러므로 만일 지교회가 장로의 시무 투표를 하는 것과 같이 담임목사의 해임이나 계속 시무를 묻는 공동의회를 했다면 이는 그 공동의회의 결과는 효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용서 받을 수 없는 범죄 행위이다.
그런데 분당의 대형교회인 모 교회는 목사 스스로 7년마다 장로처럼 공동의회로 위임목사의 계속 시무를 묻는 투표를 한다고 자랑삼아 TV방송으로 공개까지 하였으니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해 교회는 전국 교회와 교단의 헌정 질서를 위하여 즉시 그 위헌적 불법 공동의회를 취소해야 한다. 전국의 많은 교회들이 분당의 그 교회를 사례로 들면서 우리 교회도 “7년마다 위임목사 계속 시무 투표를 시행하자”는 위헌적 불법 요청으로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현실을 분당의 그 대형교회 목사는 아는가 모르는가?
부언컨대 소위 비대위가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하여 “영동중앙교회 담임목사 해임 결의 및 신임 담임목사 선임을 위한 임시 공동의회 소집 요청 건”을 통보하였다고 하니 이는 담임목사에게 담임목사 자신의 해임을 위한 공동의회 소집 요청이므로 허락하지 않을 것을 예견하고 2주 동안 기다렸다가 법원에 공동의회(교인 총회) 소집 허락 청원을 하고자 하는 꼼수를 부리는 것 같아 보인다.
이에 대하여 법원은 종교 단체인 교회를 종교 단체로 보지 않고 비법인 사단으로 비하하여 교회의 공동의회 소집 청원을 허락한 예가 있다. 그러나 교회 헌법은 장로를 공동의회로 시무 해임하는 것은 교회 헌법의 정한바 당연하지만(정치 제13장 제4조) 위임목사의 시무 해임을 위한 공동의회는 교회 헌법이 정한바 없으므로 법원도 역시 정교분리의 원칙에 의하여 법이 정한 다른 일반 행정 사안이라면 혹 몰라도 “담임목사 해임을 위한 공동의회”를 허락해서는 절대 안 된다.
소위 비대위에 묻노니 비대위는 청빙하고자 하는 신임 목사를 미리 지정해 놓고 신임 목사 선임을 위한 공동의회 소집을 청원한다고 허세를 부리는가? 현재 담임목사가 버젓이 시무를 하고 있는데 어찌 잠꼬대 같은 신임 목사 선임을 위한 공동의회 운운하는가?
4. 총회 사무국의 서류 발급 거부에 대하여
총회 사무국은 스스로 비대위 측 영동중앙교회 측 운운하면서 양측에 대하여 서류 발급을 거부하지는 아니한 것으로 본다.
다만 비대위가 총회 임원회에 6월 8일 교인 총회를 하였고, 6월 9일 비상대책회의를 하였고, 6월 10일 노회 탈퇴 공고를 하였다고 통고한 것을 빙자하여 총회 임원회가 총회 사무국 담당 직원에게 지시한 것이 아니겠는가?
총회 임원회는 상술한바 교회의 비대위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 총회 서기는 비대위가 서류 발급을 요청하는 것은 거부할지언정 영동중앙교회의 담임목사가 합법적인 서류 발급을 요구할 경우 정당한 이유 없이 서류 발급을 거부하면 직무 유기가 될 뿐만 아니라 노회가 사건을 수습하는 일에 훼방 자가 됨에 다름 아니다.
5. 결론
질의자의 질의 내용으로 볼 때 비대위가 행한 일은 한 가지도 합법적인 행위는 없고, 불법만 골라서 행함으로 교회와 노회와 총회 임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 같아 보인다.
해 노회는 본 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마18:15-17에 말씀한 주님의 교훈대로 권고하여(권징 제9조, 제18조) 비대위의 해산과 그들의 범죄 행위를 회개케 함으로 신령적 유익을 도모하여(권징 제3조) 교회를 더 잘 섬기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게 할 것이요, 끝까지 회개치 아니하면 권징하여(권징 제35조: 출교도 할 수 있음) 교회를 평안케 해야 한다.
또한 본 건에 관하여 총회 임원회가 간섭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총회 임원회가 이와 같은 사건을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이나 임무를 규정한 헌법 규정이나 어떤 법규에도 명문 규정을 찾아볼 수가 없고, 제100회 총회로부터 위임받은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며, 교회와 노회가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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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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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 진리는 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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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길이며 생명이다. 길이 없으면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진리를 믿고 영접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 속에 사랑과 선을 행하려는 의도가 없거나 진리 혹은 길을 알기만하고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이 진리는 생명의 길인가? 죽음의 길인가? 요즘은 가짜를 보면 더 진짜 같다. 그래서 속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다. 악한 자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 어떤 사람보다 멋지고 말도 부드럽고 선해 보이고 좋은 일을 많이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는 악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사람들의 진리는 말만 진리일 뿐, 그 사람은 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는 진리대로 살아야 진리가 생명이 되고 믿음이 있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아무리 대단해도 내가 살지 않으면 그 진리는 알맹이 빠진 껍데기가 되는 것이다.
또 진리는 그릇이며 옷이다. 진리는 사랑을 담는 그릇이며 나를 표현하는 옷이기도 하다.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담은 신적진리이고 악한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진리인 척 하는 진리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라는 그릇 속에 사랑을 얼마나 담느냐에 따라 좋은 그릇, 찬란한 옷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의 옷 즉 역할, 사람들이 갖고 있는 돈, 권력 등은 나름대로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담는 그릇은 반드시 상대방에게 선으로 드러나야 한다. 만약 자신이 사람들에게 악한 것으로 드러나면 나는 거짓이 되며, 추한 옷을 입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인 나는 속에는 사랑이,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는 선으로 나타나야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빠지면 진리가 아닌 것이다. 진리에는 생각, 지식, 사상, 말이 있고, 지위, 역할, 권력, 물건 등의 모든 힘들이 있을 것이다. 이 속에 사랑이 담겨있으면 진리이지만, 사랑대신에 이기심이나 악한 의도가 담겨 있으면 이것은 진리로 가장한 악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남편, 아버지, 목사, 의사, 검사 등은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부부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자면 결혼 하려는 남자가 아내가 될 사람을 사랑하고 위해주고 힘이 되고 기쁨이 되고자 하는 마음 없이 결혼을 한다고 하면 이것은 아내를 수단으로, 자신의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악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친구가 친구를 사랑하고 친구에게 힘이 되어주는 마음 없이 친구를 만난다면 이것은 악한 의도로 만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만나서 자신의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계속 이용할 것이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버리든지 위협하든지 악한 행동을 할 것이다.
예수께서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라고 말씀하셨으며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께 하리라” 그러면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인 것은 그 속에 하나님 아버지라는 신령사랑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진리는 그릇이며 포장지며 현재 있는 모든 실존이다. 이 실존 안에 존재가 있어야 진리가 되는 것이다. 사랑은 존재이며 사랑이 담겨있는 진리가 실존인 것이다. 즉 영원한 존재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영원한 실존은 하나님 아들이다. 이렇게 하여 아들 안에 아버지가 늘 함께 계시는 것이며 길이며 진리이신 하나님 아들을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믿음을 통해서 사랑의 세계에 가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소유하고 대단한 재물과 힘을 갖고 있다고 해도 자신 속에 이기적인 마음과 악한 의도를 갖고 있으면 그 사람은 진리로 가장한 거짓이기에 늘 깨어있어 자신을 경계하면서 자신 속에 사랑이 있는지, 자신의 행동이 모든 사람에게 선을 더 많이 나타내는지 살피는 진리의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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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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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욘 3장10절~4장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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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의 통치 시절 활동하던 선지자 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니느웨로 가서 멸망할 날이 다가왔으니 회개할 것을 선포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을 지키고 싶지 않아 다시스(스페인)행 배를 탑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로 상종도 하기 싫은 나라였습니다. 자신들 유대인들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선택과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요나는 어차피 구원 받지 못할 이방나라가 망하든가 말든가 먼 길을 가서 에너지를 소비하여 외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이성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감정적으로도 도저히 수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탄 배가 큰 폭풍으로 더 이상 항해 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폭풍의 원인으로 요나가 지목되었고 결국 요나는 바다에 던져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커다란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게 하였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의 잘못으로 고난 받고 있음을 고백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서원을 갚겠노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3일 후 물고기는 요나를 뭍에 토합니다. 요나는 자신이 받는 고난과 환난을 아뢰며 자신을 구해 준 하나님께 감사하며 아직까지도 자신에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요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두 번째로 명하십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니느웨는 4일을 걸어야 다 돌아 볼 수 있는 큰 성읍입니다. 요나는 하루 동안 다니며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다.”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발생합니다. 저 악독한 이방 니느웨가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신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심지어 왕까지 회개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진심 어린 회개를 보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너무나 약이 오르고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폭발하여 막말을 하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질문하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는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니느웨가 정말 망하는지 안 망하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 있는 요나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미리 준비하여 요나의 머리에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튿날 새벽에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 먹어 시들어버립니다. 요나는 열기로 고통스러워하며 정신이 혼미해져 사는 것 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십니다. “너는 네가 수고 한 것이 하나도 없는 하루 피고 지는 이 박넝쿨도 매우 아끼는 구나. 그런데 이 니느웨 성읍에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고 가축도 매우 많이 있다. 그러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않겠는냐?” 요나는 자신이 이제껏 감정적으로 대처하며 고집을 부린 것이 잘못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 마음을 방치하거나 그냥 감정 흘러가는 대로 놔두면 안 됩니다. 내 기분과 감정이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살아갈 때 하나님 아버지의 본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자기 감정선에 빠져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세계에서 충실한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이제는 자기만의 이기적인 세계가 아니라 열방과 원수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넉살을 가지고 이 마지막 시대에 감정선을 벗어나서 쓰임 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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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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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탐구] 예수께서 꾸짖으시는 야고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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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매우 급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보아너게 즉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까지 있었습니다. 그들은 원래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였습니다. 갈릴리 주민들은 미개하고 상스러웠으며 매우 거칠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핵심적인 제자의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그들의 급한 성격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철저히 자아를 죽여야 하는데 그들은 여전히 혈기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성격을 통제하지 못하고 크게 분개한 야고보와 요한에게 주님은 꾸짖으셨습니다. 이들은 오랜 기간 주님과 동고동락하면서도 예수님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멸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주님의 뜻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감정과 성급함을 표출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을 오용하거나 남용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말을 주님은 꾸짖으신 것입니다.
(눅 9:54-55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주의 마음을 갖지 못한 사람은 육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 행하는 것 전부가 주의 뜻에 어긋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신 예수님의 마음, 자기를 버리기까지 영혼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육을 좇아 행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됩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주의 뜻에 무지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직무를 남용하게 됩니다. 그들은 아무리 힘써 달음질할지라도 주께서 원하시는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직무를 남용한 사람들은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에 불법을 행한 자라는 엄한 책망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
분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갖지 못한 자입니다.
주님의 일행을 배척한 사마리아인들에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멸할 것을 주님께 제안한 것은 야고보와 요한이 분을 이기지 못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주님의 온유하신 모습, 죄인을 사랑하시는 마음을 소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분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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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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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칼럼] 상처치유, 가정에서 해야 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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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하고 싶고 잊어버리고 싶지만 반드시 직면해서 깨뜨려야 할 악순환이 있다. 나는 아버지가 싫다.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싫다. 그 사람이 나의 인생에 끼친 너무나도 많은 굴레들. 정죄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정죄함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모습이 이렇게 일그러진 것이 나의 어린 시절 때문이라는 사실은 내게 너무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설 수 있는 열쇠는 현재가 아니며 미래도 아닌 가장 생각도 하기 싫은 외로운 과거에 있다. 놓아주지 않은 풀려고도 하지 않는 단단한 과거의 운명의 줄, 아버지는 내게 너무 큰 고통이다. 새 어머니는 주말만 되면 나와 동생을 목욕을 시켜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칠일마다 돌아오는 그 날이 너무나도 괴로운 날이었다. 비록 우리의 몸은 깨끗하였지만 우리의 마음은 증오들로 더욱 더러워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만큼 우리는 어머니에게 화풀이 대상이었다. 우리의 때를 밀어 주는 그 손길에서 느끼는 것은 미움과 그것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이었다. 지금도 생각만 하면 도살장의 소와 같은 기분이었다고 생각이 들고 소름이 끼친다. 그러면서 우리는 고등학생이 되기까지 매일매일 정말 이유도 없이 두들겨 맞았다. 7살 때부터 그 작은 몸뚱이는 구타를 당하며 커 나갔던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내일이 오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던가? 초등학생 때 얼마나 죽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던가? 그 당시 미래가 나에게 준 것은 단지 고통과 두려움뿐이었다. 그 때 나와 내 동생은 누구에겐가 구원의 손길을 뻗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도. 우리는 철저하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희생자였다. 지금껏 나는 이러한 미래의 두려움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한 청년의 가슴 먹먹한 고백을 들으며 맹인 가수이면서 작사가인 켄 미드머(Ken Medema)가 부른 노래 ‘이곳이 아니라면’(If This Is Not a Place)을 떠올렸다.
여기에서 눈물을 이해 받지 못한다면/ 나는 어디에 가서 울어야 하나/ 내 마음에 날개를 달아 줄 수 없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에 가서 날아야 하나/ 착하고 덕스런 모습으로/ 당신의/ 기억에 남기 위해 다른 곳은 필요치 않아/ 언제나 남보다 뛰어나기 위해 또 다른 곳은 필요치 않아/ 거짓말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어.//(중략)
내 의문에 답해 줄 수 없는 곳이라면/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이라면/ 어디에 가서 말해야 하나/ 여기에서 눈물을 이해 받지 못한다면/ 나는 어디에 가서 울어야 하나.
그래서 가정은 치유의 센터라 한다. 위로와 격려, 용서와 용납, 친밀감과 존중감이 그 핵심이다. 그런데 도리어 가정으로부터 상처를 받는다. 어느새 가정은 형무소가 되고 만다. 의학적 통계에 의하면 인간의 많은 질병이 용서하지 않는 마음 상태에서 생긴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 메닝거는 인간의 모든 질병의 70%는 스트레스에서 오고 모든 스트레스의 90%는 정신적 질병, 곧 미움과 증오 그리고 용서의 결핍에서 온다고 했다. 미움과 증오와 용서의 결핍이 결국 암, 고혈압, 심장병, 뇌졸중, 치매, 우울증 등의 원인이 된다.
가정은 과연 치유의 센터로서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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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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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W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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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질문이 없다면 이미 생명력이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해 본다. ‘왜?’ 라는 질문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왜?’ 라는 질문은 그 사람의 삶의 자리가 힘들고 이해할 수 없는 카오스 현상이지만 그것은 그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할 것이다.
은퇴 후 나는 매 주일 농어촌 산골 교회 초청을 받고 말씀 사역을 한다. 대형교회를 담임할 때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주일마다 경험하면서 눈물행전을 쓰고 있다. 그 때마다 후배 목회자들의 공통된 질문을 받게 되는 것이 있다. 하나 같이 목회현장에서 경험되는 사역 가운데 아무리 풀려고 해도 풀리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어내는 것이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마치 내가 해결사라도 되는 듯 질문을 할 때 내가 그들에게 들려주는 대답은 한결 같은 한 마디였다.
“목회 현장은 언제나 ‘왜?’ 라는 질문이 있는 곳이야. 그러나 답도 있어요.”
목회 35년을 마무리하고 난 후에도 나는 ‘왜?’ 라는 질문을 하루에도 수 없이 한다. 아무리 엎드려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내 앞에 전개 되는 상황에서 저절로 ‘왜?’ 라는 질문을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신다. 아니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전도서 3:11절을 통하여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섭리신앙이며 믿음이다.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이듯, 사울 왕이 다윗을 그렇게 죽이려고 혈안이 되듯, 히브리 민족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면서 걸핏하면 원망하고 불평하듯, 고라가 작당하여 모세를 향해 반기를 들듯,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의 왕좌가 탐이나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여 세력을 규합한 후 반역 하듯, 설상가상으로 그런 상황에 시므이가 따라오면서 다윗을 향하여 입에 담을 수 없는 악담과 저주를 쏟아 붓듯, 들릴라가 자기를 사랑하는 삼손에게 거짓사랑으로 다가와 나실인의 상징인 머리를 잘라 버리고 블레셋 군에게 넘기듯, 가룟 유다가 자기의 잇속을 챙기려 예수님에게 다가와 거짓 사랑으로 입맞춤하면서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넘기듯, 바울 사도와의 관계에서 가장 가까이에서 동역했던 구리장색 알렉산더와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바울이 병들고 약하고 옥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별 볼일 없는 존재로 느껴질 때 바울을 다양하게 괴롭히고 창질의 썩음 같은 말로 바울을 대적했던 것처럼, 겉옷까지 벗어 주님 앞에 깔아주며 호산나를 외치던 백성들이 몇 날이 지나지 않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듯, 은퇴를 하고 난 후 나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상황은 마치 이와 같은 성경의 역사를 그림판을 찍듯 흡사하기에 ‘왜?’ 라는 질문이 내 안에서 수 없이 읊조리게 된다.
그런데 ‘왜?’ 라는 이 물음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질문이다. 주님이 이미 이런 질문을 하셔야 할 상황을 다 겪으셨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는데도 목사인 내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된다고 “왜 이렇습니까?” 라고 항변하는 것이 욥의 죄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무릎이 꺾어지고 입이 다물어지고 주님처럼 여전히 침묵으로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는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 대부분 한숨을 푹 쉬면서 입을 다물고 천정만 바라본다. 이해는 되는 것 같은데 현실은 그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침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때 내가 조용히 들려주는 말이 있다.
“그것이 목회야. 주님도, 바울도 그렇게 목회하셨지. 답은 오직 하나 믿음이야.”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에서는 수 없는 ‘왜?’ 라는 질문의 상황을 맞게 된다.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이해되지 않는 현실을 맞을 때는 어떤 말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이해가 안 된다고 ‘왜?’ 라는 질문을 반복하게 되면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을 경험한다. 어쩌면 그래서 침묵이 금보다 낫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주신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다. 백 천 번 생각해도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왜?’ 라는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한 마디도 ‘왜?’ 라고 하지 않았다. 말씀대로 행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도 그랬고 다윗도 그랬다.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하나님 앞에서 ‘왜?’ 라는 질문은 어리석은 것이다. 목회 현장은 수모와 아픔만 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엘리야에게 사르밧 여인이, 엘리사에게 수넴 여인이, 예수님에게 마리아와 마르다가, 바울에게 누가와 디모데와 뵈뵈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수많은 동역자들이 있었듯 목회현장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품에 안겨 어깨를 들먹거리는 후배 목사를 안고 나도 모르게 국제시장의 윤덕수 할아버지의 통한의 독백이 내 안에서 내 말로 읊조려진다.
“아버지, 이만하면 됐지예?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그런데 너무 힘들었어예.”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는 왜? 라는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 수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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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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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사랑이란 이름의 수학(요한일서 1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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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한 가지는 무엇일까요? 입장에 따라 그 대답은 다양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게 묻는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는 것도 부부 사이의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예쁜 옷을 철따라 입히고 공부를 시키는 것도 다 사랑입니다. 그 아이가 자라 가정을 이루고 또 자녀를 낳아 부모가 그에게 했듯이 똑같이 돌보며 키우는 것이 다 사랑입니다. 그리고 나중엔 자신에게 그토록 사랑을 베푸신 부모님이 병들고 늙어갈 때 그 곁에서 안타까워하는 자녀의 눈물, 역시 사랑입니다.
인생에서 사랑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요?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그것을 산수로 풀면 <○○○ - 사랑 = 0>이 될 것입니다. 부부 생활을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에서 사랑을 빼면 0입니다. 사랑을 뺐을 때 남는 것은 지극히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관계뿐인데, 그것은 사실은 0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인데,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관계는 아무런 영양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 이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빼면 남는 것은 0입니다. ○○○ 이 돈일지라도, 권력일지라도, 미모일지라도, 학벌일지라도, 거기서 사랑을 빼면 0만 남습니다.
또 사랑의 수학 계산중에는 <○○○ × 사랑 = 0>이란 것도 있습니다. ○○○ 이 아무리 나쁜 것이더라도 사랑만 곱해지면 0이 됩니다. ○○○ 이 경제적 손실이라도, 증오일지라도,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사랑을 곱하면 0이 됩니다. 사랑하게 되는 순간, 과거의 미움도, 원수 맺은 것도 다 사라집니다. 과거의 은원관계가 사라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과거청산 방법은 가슴 아픈 과거에 사랑을 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0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과거 청산의 방법으로 특정인들을 재판하고 감옥에 보내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방식은 한쪽에서는 청산되었다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또 다른 미움의 과거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동일한 방법으로 기회를 노려 과거를 청산하고자 할 것이고, 아픈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란 이름의 수학으로 우리를 대하셨습니다. 신약성경 요한일서 1장 9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란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과거가 추해도 그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때, 그 분은 거기에 사랑을 곱하셔서 부끄러운 과거를 0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 분께 지은 죄로 인한 많은 부채를 0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랑의 수학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수학은 잘 하면서도 사랑의 수학은 잘 하지 못합니다. 수학 영재도 사랑이란 수학에는 빵점짜리가 있습니다. 세상의 수학은 상급 학교 진학에 도움이 되고, 특정 분야를 전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수학은 인생 전체를 유지해 주고, 빛을 내는 비결입니다.
어떻습니까? 위대한 <사랑>을 가지고 인생의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어 보십시오. 그리고 덧붙여 <○○○ + 사랑 = ∞>이란 계산법도 잊지 마시구요. ○○○ 이 아무리 힘든 현실이라 하더라도 사랑만 더하면 삶의 기쁨은 무한대(∞)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이란 인생의 수학 시험에서 모두 백점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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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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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해 봅시다] 두 다리가 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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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를 앉아 받아먹는 사람보다
배달하는 사람이 훨씬 더 건강해
독자 여러분도 운동 하시죠? 운동은 꼭 해야한다. 이유는 현대인은 운동부족증에 걸리기 쉽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생계수단이 곧 신체활동이었다. 별도로 운동이 필요 없었다. 생을 영위하기 위해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 그들은 운동부족증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장수하지 못하고 모두 일찍 돌아가셨는가. 그때는 제대로 먹지 못했고, 병이 나도 약도 제대로 쓰지 못했고, 그러면서도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모두 골병이 들어 일찍 세상을 떴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대인은 어떤가. 대부분 운동부족증에 걸려있다.
우리 몸을 도우는 것은 종류가 세 가지이다. 음식을 먹어 몸을 도우는 식보가 있고, 약을 먹어 몸을 도우는 약보가 있고, 운동을 해서 몸을 도우는 행보가 있다. 우리 조상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해 식보를 못했고, 약보를 제대로 못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면서 노동은 지나칠 정도로 많이 했다. 그로인해 골병이 들어 일찍 세상을 떴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어떤가. 먹을 것이 너무 많다. 한정식 식당에 가보면 먹은 것이 많은지, 남아 나가는 것이 많은지 모를 정도이다. 약보는 약을 너무 많이 먹는다. 거기다가 건강보조식품을 얼마나 많이 먹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행보는 매우 부족하다. 건강유지를 위해서는 식보와 약보도 중요하지만 행보가 더 중요하다. 운동을 부지런히 해야만 건강이 유지된다.
현대인은 왜 운동이 부족한가. 왜냐하면 기계문명이 고도로 발달되어 생활에 필요한 것이 대부분 자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자동차,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세탁기 등이 신체활동을 대신 해준다. 이로 인해 우리 몸은 점점 허약해지고 무기력하게 된다.
1950년대 영국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버스운전 기사는 건강이 좋지 않고 일찍 죽는데 차장은 건강하고 장수한다. 왜 그런지 알고보니 운전기사는 가만히 앉아 운전만 하는데 차장은 2층을 오르내리면서 활동하기 때문이었다. 알고보면 어느 직장이든 사무직원보다 외무직원이 훨씬 건강하고 장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고(故) 황수관 박사가 했던 말이 있다. 그는 “승용차는 알고보면 영구차입니다” 그랬다. 실제로 걷지는 않고 차를 많이 타면 탈수록 몸은 망가진다. 알고보면 의사가 병원에도 있지만 두 다리가 의사이다. 실제로 두 다리가 튼튼한 사람은 확실히 건강하고 장수한다. 분명한 사실은 우유를 받아 먹는 사람보다 배달하는 사람이 훨씬 더 건강하다. 두 다리가 의사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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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