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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 생각해 봅시다] 노인들 넘어지지 마세요
    골절로 입원하면 미동도 못해 근육량 감소로 생명이 위태로워 현대사회에서 오복은 첫째로 건강해야 하고, 둘째는 배우자가 있어야 하고, 셋째는 적당한 재산이 있어야 하고, 넷째는 일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친구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모두 옳고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첫번째인 건강 이상으로 더 소중한 것은 없다. 건강을 잃고 나면 세상 온갖 것이 다 의미가 없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건강을 잃은 후에야 와닿는 말이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아왔든지간에 이제 남은 건강이라도 알뜰히 챙겨야 한다. 필자의 주변에 넘어져 다쳐 고생하는 노인들이 많은 것을 보면서 오늘은 넘어지면 안되는 것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젊은이도 넘어지면 안되지만 특히 노인들은 절대로 넘어지면 안된다. 건강하던 노인도 엉덩이뼈나 고관절이 부러지면 절반이 두달 이내에 숨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한해 넘어져서 사망하는 65세 이상의 노인이 85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넘어지는 원인은 바닥이 미끄러워서가 25%, 문이나 보도 턱에 걸려서가 17.9%, 어지러워서가 17%라고 한다. 필자가 아는 몇몇은 화장실 안에서 넘어져 다쳤다. 서서 바지를 입다가 넘어져 다친 사람도 있다. 웃을 일이 아니다. 서서 균형을 잡기 곤란한 노인들은 바지를 침대에 걸쳐 앉거나 벽에 기대고 입어야 안전하다. 넘어져 다쳐도 팔, 손목 등 상지부위가 부러진 것은 생명과는 관련이 없지만 하지 쪽이면 상황이 달라진다. 사망으로 이어지느냐, 아니냐는 걸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다리만 부러졌는데도 2,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노인은 젊은이와 달라서 하루만 가만히 누워있어도 근육의 손실이 엄청나다고 한다. 근육의 감소는 완만하게 일어나서(매년 0.7%) 60세부터는 2배 이상(매년 2%) 빠르게 진행된다고 한다. 그래서 80세 노인의 근육은 60세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은 근육의 힘으로 생명이 유지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넘어져 다쳐 입원하면 근육을 자극하는 활동을 전혀 못하기 때문에 근육의 양이 급격히 감소한다. 입원환자의 근육은 일주일에 10%씩(혹은 그 이상) 감소해 한달동안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으면 근육이 입원 전에 비해 50% 정도 감소한다고 한다. 젊은이들도 넘어져 다치는 일이 없어야 하지만 특히 노인들은 절대로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해야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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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04
  • [은혜의 말씀] 그 땅을 그려오라 (수18;1~4)
    오늘 성경말씀은 여호수아서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한발자국도 밟아보지 못했던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아직도 기업을 받지 못한 지파가 7지파라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너희들은 언제까지 미적거리고 지체하겠느냐 일어나서 그 땅을 두루두루 다니면서 그 땅을 그려서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40년 전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정탐을 나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 이스라엘 각 지파에 최고 엘리트들 12명을 선발해 가지고 가서 정탐을 하고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 10명의 보고서와 갈렙과 여호수아 2명의 보고서가 확연히 차이가 나는데 오히려 10명이 내는 보고서가 과학적이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정확한 보고를 하는데 그 사람들은 하나님하고 상관없는 눈에 보이는 대로 계산하는 대로 보고를 한 것이고 갈렙과 여호수아는 현실적인 계산을 넘어서 하나님이 주신다, 언약하신 땅을 가서 차지하자고 합니다. 10명의 정탐꾼이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니고 각 지파에 보스들 엘리트들 두령들입니다. 이사람들이 가서 보니까 눈에 보이는 3가지 뚜렷한 차이가 납니다. 첫째, 무기가 다릅니다. 가나안 족속은 철병거로 무장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멩이와 작대기 들고 설칩니다. 둘째, 신체 사이즈가 달랐습니다. 거인 앞에 메뚜기와 같습니다. 셋째, 군량미가 다릅니다. 포도송이를 장정들이 걸머지고 갈만큼 그렇게 큽니다. 10명의 정탐꾼은 정확하게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우리는 메뚜기 같다 이렇게 진단을 하고, 갈렙과 여호수아는 정반대 얘길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단순한 보고가 아닙니다.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믿음에 의한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언약하신 약속하신 것은 우리가 가서 차지하자 믿음에 의한 절대 믿음, 절대 기도, 절대 순종으로 갈렙과 여호수아는 나갔고, 불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을 거역했던 10명의 정탐꾼과 백성들은 다 죽습니다. 6절 끝에 그 땅을 그려가지고 내게로 오라, 그러면 그려서 가지고 온 그 땅을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으리라. 제비를 뽑는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사람이 제비를 뽑지만 그것을 허락하시고 결재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파수꾼의 경성함이 여호와께서 지켜주지 않으면 도루묵입니다. 우리가 선택하고 판단하고 경영하고 계획하고 구상을 하지만 마지막 결재를 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속에서 답을 찾는 사람은 성경 속에서 네비게이션을 찾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을 내다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구상을 하고 발상을 하고 착상을 할 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얼마나 큰일을 이루실지 모릅니다.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겁먹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기권하지 말고 자살하지 말고 여러분 중심을 딱 잡고 하나님, 제게 새 힘을 주셔서 성령으로 기름 부어주셔서 성령이 임하시면 늙은이도 꿈을 꾼다고 하는데 제게 꿈을 주시옵소서! 상상력을 주시옵소서! 신앙생활은 내 감정, 내 기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계획이 어디 있는가? 그걸 물어보고 기도하고 찬송하십시오. 이 시대 영혼의 기지개를 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마음의 넉살을 키우고 마음의 담력을 키워서 이 봄철에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상상하고 기대하면서 여러분의 그림을 멋지게 도안하고 그려 나가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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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04
  • [가정칼럼] 완벽주의를 용서해야
    혹 내가 쓰는 말 가운데 ‘절대로’, ‘반드시’, ‘언제나’, ‘매일’, ‘결코’, ‘항상’, ‘꼭’ 등의 단어가 자주 튀어나오지는 않는가? 만약 이런 말들을 되풀이 사용하고 있다면 이미 나는 완벽주의자의 성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완벽주의가 갖는 가장 큰 특징은 지킬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이라도 어기게 되면 스스로 실망하고 자책하게 되어 이제까지 이루어 좋은 커다란 성과까지도 허물어 버릴 위험성이 크다는 점이다. 완벽주의 부모 밑에 자라난 자녀들은 늘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자존감이 낮으며 의욕상실에 빠져 아예 자포자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자신과 타인에 대하여 매우 인색하고 경직되어 있으며 고집이 세고 사고에 유연성이 없다. 도덕과 윤리 가치에 너무 엄격한 까닭에 매사에 비판적이기도 하다. 쓸모없는 일에 과잉 헌신을 하게 되는가 하면 룰이나 규범 스케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까닭에 핵심을 놓칠 수가 있다. 칼 힐티는 이렇게 말했다. “미완성을 괴로워하지 말라.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완성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깨닫게 하려고 일부러 수많은 미완성을 내려 주셨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 때는 일에 몰두할 때이다.” 내가 나의 불완전성과 미완성을 인정할 때 다른 사람의 연약성까지 받아들이게 된다. “용서는 담배를 끊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나는 무려 50번이나 노력했다”고 말한 사람은 루이스(C. S. Lewis)였다. 루이스가 이 정도였다면 보통의 범인들은 도대체 몇 번이나 노력을 해야 할까? 어쩌면 평생 노력해야 할 용서가 있다면 자신의 완벽주의가 아닐까? 이런 완벽주의에 빠져들 때마다 이런 시 한편으로 내 마음을 다스려 보곤 한다.<우리의 아름다움>기대한 만큼 채워지지 않는다고 초조해지지 마십시오. 믿음과 희망을 갖고 최선을 다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몫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더 사랑하지 못한다고 애태우지 마십시오.마음을 다해 사랑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분량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지금 슬픔에 젖어 있다면 더 많은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고 자신을 탓하지 마십시오.우리가 흘린 눈물,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누군가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한다고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아파하면서 용서를 생각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분량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모든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고 괴로워하지 마십시오.날마다 마음을 비우면서 괴로워 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분량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빨리 달리지 못한다고 내 발걸음을 아쉬워하지 마십시오.내 모습 그대로 최선을 다해 걷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세상의 모든 꽃과 잎은 더 아름답게 피지 못한다고 안달하지 않습니다.자기 이름으로 피어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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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04
  • [시사칼럼] 어린이에게,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생명이 우선입니다
    옥시레킨벤키저(Oci Reckitt Benckiser)라는 회사가 있습니다. 국내 대그룹 계열 회사였던 ‘옥시’를 2011년 외국 기업이 인수해서 붙인 회사명입니다. 이 회사가 그 때로부터 생산한 가습기 살균제 ‘옥시’가 최근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 제품 관련 정부가 확인된 피해자만 530명에 달하고 그 중 사망자만도 143명인데, 그 중 절반이 영유아를 비롯한 어린 아이들이었습니다. 어른들의 탐욕 때문에 어린 생명들이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꺾였습니다. 어린이날 모처럼 긴 연휴를 맞아 비행기 티켓은 물론 휴양지 콘도나 펜션까지도 벌써부터 예약이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장난감 가게나 백화점에는 어린 자녀를 유혹하는 선물들이 즐비합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 아이들은 그리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어린이들 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 꼴찌 수준입니다. 국민소득이 우리보다 훨씬 낮은 몇 나라보다도 한참 밑에 있습니다. 초등학생의 12%, 중학생의 23%, 고등학생의 30%가 시시때때로 자살충동을 느낀다고 답한 리서치 결과도 본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생조차 방과 후에 학원 몇 개를 매일매일 전전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주5일근무제가 정착된 지 얼마인데 아직도 우리 아이들은 주말에도 주일에도 학교에 학원에 가야 합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이것은 일종의 인권유린이며 아동학대입니다. 좀 더 창의적으로 표현한다면 일종의 ‘어린이인권’에 대한 침해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어째서 아무도 이런 현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걸까요? 한국에서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동성애 반대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성애에 대해 미연방대법원이 합법화 취지로 판결을 내린 이후(2015.6) 옹호론자들이 환호성을 질렀지만 동시에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반대하는 운동도 거세졌습니다. 그런데 한국과 미국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에서는 정치인이나 공적 인물들은 물론 일상의 대화 속에서도 낙태찬성론자인지 낙태반대론자인지 밝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abortion controversy, ex. 2013.1.22.). 대부분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낙태를 반대합니다. 그들은 너무나 당연히 동성애를 반대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에는 힘이 실려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다릅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낙태를 반대하는 의사들 모임인 ‘프로 라이프(pro life) 의사회’와 같은 곳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부가 최초로 공식적인 낙태 실태 조사를 한 것은 2004년이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한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낙태는 연간 34만 건인데 모자보건법 상 이루어지는 낙태는 그 중 4.4%에 불과하고, 나머지 32만 건은 불법적인 낙태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5년 후 조사 결과 역시 출생아 대비 낙태건수는 OECD 국가 중 1위, 낙태율(가임여성 1,000명 당 낙태 건수) 세계 4위를 기록했습니다. 버려지는 영아의 경우는 정확하게 파악조차 되지 않는 실정입니다. 인류 역사를 고찰해 보더라도 동성애는 성별 수요공급의 원리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경우 남아선호사상에다가 의학의 발달과 퇴보하는 의료윤리가 합쳐져 여자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처 피워보지도 못하고 꺾여버리는 생명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이런 이야기를 공론화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성애 반대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동성애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낙태를 말하고 영아유기에 대해 말하며 어린이권리 특히 어린이생명의 존엄과 가치에 대해 너무도 무심한 이 사회에 주의를 환기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역할을 교회가 수행했어야 합니다. 목사들이 같은 주제로 설교하다가 잡혀갈까봐 두려워한다는 인상을 주는 정도로 어떻게 이 무심한 사회를 설득시키고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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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04
  • [소강석 칼럼] 푸른 버드나무의 꿈
    아, 화사한 꽃들이 피어나는 향긋한 봄이다.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강물이 얼어붙던 겨울이 따뜻한 봄바람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느 봄날 오후, 문득 서재에서 창밖을 본 순간 앙상한 버드나무 가지에서 푸른 싹이 터 오르는 것을 보았다. 싹만 나온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가 봄바람 결에 흔들렸다. 그 순간 나의 마음도 흔들렸다. 아니, 하나의 공간, 우주의 공간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가녀린 나뭇가지의 흔들림 속에 광활한 우주의 질서와 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속에서 절박한 꿈의 몸부림을 본다. “나, 여기 살아 있어요. 보세요. 마침내 긴긴 겨울을 견디고 다시 살아나 새싹을 피웠잖아요.” 나도 저 푸른 버드나무 잎사귀처럼 꿈꿀 수 없을까. 꿈이 잠든 시대다. 겨울 버드나무처럼 말이 없다. 버려진 주검처럼 차갑다. 청년 실업과 자살, 사이코패스 범죄,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한 성적타락, 이념, 지역, 계층갈등, 경제공항 등 암울한 현실 속에 꿈이 보이지 않는다. 한국교회도 내부 분열과 다툼, 반기독교 세력과 정서의 공격으로 인하여 끝없이 추락하고 쇠퇴하고 있다. 마치 메마른 겨울 버드나무처럼 보인다. 겉으로 볼 때는 죽은 나무 같다. 차가운 눈보라에 껍질이 벗겨져 나가고 상처투성이다. 그러나 난 보았다. 봄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 끝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새싹을.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 있었고, 꺼져 있는 것 같았으나 그 속에는 붉은 불덩이가 타오르고 있었다는 것을. 절망과 상실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니다. 그 속에는 분명 생명의 씨앗이 있다. 희망의 노래가 숨겨져 있다. 푸른 버드나무는 차가운 새벽바람과 이슬을 맞으면서도 끝끝내 새싹을 피워 올리지 않는가. 우리의 새로운 삶, 제2막의 인생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내 안에 죽지 않고 꿈틀거리는 생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 다시 푸른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저 봄날 오후의 버드나무가 보여주는 생명의 신비처럼 나 여기 살아 있다고 손짓하며 웃을 수 있지 않을까. 문득 내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체면과 내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더 독기를 품고 날마다 도서관에 가서 살았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도서관에 책이 없으면 서점까지 가서 읽고 또 읽었다. 그래서 나를 만나려면 채플실에서 기도하는 나를 만나든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나를 만나든지 해야 했다. 그때 입력해 놓은 것이 축적되어 지식의 인프라가 되고 있다. 그때는 누구도 나를 주목하지 않았다. 누가 부목사로 써주지도 않아 신학교를 졸업하고 갈 곳도 없었다. 죽은 버드나무 같았다.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광대뼈만 쭉 나온 가난하고 배고픈 신학생이었다. 그런데 나에게도 봄날이 다가왔다. 내 삶에도 향기가 나고 푸름을 자랑하는 싹이 나고 꽃이 피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창가로 다가가 봄날 오후의 버드나무를 바라보니 마치 그 나무가 내 젊은 날의 모습을 투사해 주는 것 같았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싹을 낸 버드나무…. 그건 춥고 가난하고 외로웠던 내 젊은 날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어느덧 나는 혼자 이렇게 고백하였다. “버드나무야, 살아줘서 고맙다. 네가 겨울을 이기고 살아줘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거야. 겨울 끝에서 피어나는 너의 절박한 꿈이 많은 사람들을 살려 낼 거야. 푸른 버드나무야, 넌 겨울은 봄을 결코 이길 수 없음을 보여주는 한편의 시요 설교가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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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04
  • [성서연구] 넉 달 빠르게(요 4:31-35)
    중요한 약속에 10분을 지각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상대방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들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일평생 손목시계를 비롯한 집안의 모든 시계를 10분 앞당겨 놓았다고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시계는 10분이 아니라, 무려 네 달이나 먼저 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35절을 보면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두 종류의 시계가 나옵니다. 하나는 추수할 때가 아직 넉 달이나 남았음을 보여주는 시계입니다. 이 시계는 소위 <자연의 시계>로서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시계입니다. 또 하나의 시계는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시계로서 <실존적 시계, 혹은 영적 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계는 자연의 시계 보다 넉 달을 먼저 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추수할 때가 넉 달이 남았다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의 이미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유대에서는 우기가 시작되는 11월경에 농사를 시작하여 봄에 추수하는 게 보통입니다. 10-11월경에 와서 땅을 적시는 비를 <이른 비>라고 부르고, 봄철에 내리는 비를 <늦은 비>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 말씀은 11월-12월경에 하신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니 추수할 봄까지는 아직 넉 달이 남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곡식의 추수를 말씀하신 게 아니라, 영혼의 추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수가 성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메시아로서 복음을 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넉 달>을 앞당겨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넉 달 빠르게 살아가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연적 시간 보다 실존적 시간을 더 중시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지금 우리는 자연적 나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이 보다 우리 시간이 더 많이 흐른 것처럼 여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즉 현재 실제 나이가 오십 세라면, 마음으로는 육십 세 정도 된 것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게으름과 어리석은 여유를 부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실존이란 자연적 시간과 별 관계가 없습니다. 나이가 사십 세인 사람이 육십 세인 사람 보다 더 먼저 부르심을 받을 수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기면 관심의 대상도 자연스럽게 달라집니다. 시간이 많이 남은 것으로 여기면 여기 저기에 쓸데없는 관심을 가지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면 쓸데없는 것, 덜 중요한 것은 걸러내고 정말로 중요한 것만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할 때 맨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한 랍비는 ‘그 누구도 임종 때에 더 많은 일을 못한 것이나,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은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시간을 앞당겨 사는 사람은 사랑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을 따스한 가슴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이종선씨의 <따뜻한 카리스마>란 책에 의하면 성공의 비결 중 85%가 사랑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기술과 능력이 성공에 차지한 비율은 겨우 15% 뿐이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될수록 사랑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실존 시계의 바늘을 <넉 달> 정도 당겨 놓고 사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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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04
  • [목회자칼럼] 엑스 호도스(Ex-Hodos)
    네델란드 자유대학교 한스 로크마커교수는 그의 책 ‘예술은 변명을 요하지 않는다’에서 17세기 일본의 유명한 화가였던 후쿠사이 교수의 일화를 소개한다. 유명한 화가였던 그에게 친한 친구 찾아와서 수탉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수탉을 그려본 적이 없었던 그는 친구에게 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다시 친구가 찾아왔을 때 또 일주일을 연기했다. 그 다음에는 2주일을 연기하고 다음에는 한 달을 연기하고 그렇게 3년이 지났다. 3년 후에 다시 찾아온 친구에게 또 그림을 연기를 하려 하자 친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크게 화를 냈다. 그러자 후쿠사이 교수는 말없이 붓을 잡고 종이위에 순식간에 그림을 그렸다. 살아있는 수탉보다 더 생동감 있는 그림이었다. 이를 본 친구는 더 화를 냈다. ‘이렇게 순식간에 잘 그릴 수 있는데도 3년 동안 기다리게 한 것은 자신을 무시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쿠사이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가 난 친구를 자신의 화실로 인도했다. 그런데 그의 화실에는 완성되지 못한 수탉의 그림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삼년동안 수없이 많은 수탉을 그려보았지만 만족할만한 그림이 나오지 않았기에 버리고 또 버리곤 하였던 것이다.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재능이 있어야 한다. 재능이 없이는 훌륭한 예술가가 되기 힘들다. 그러나 재능만으로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 그 재능 위에 후천적인 훈련이 더해져야 한다. 뼈를 깎는 노력이 계속될 때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애굽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출애굽의 노력이 필요하다. 출애굽기의 영어 이름은 ‘Exodus’이다. 이 말은 헬라어에서 유래했는데 'ex'는 ‘밖으로’라는 뜻이고 'hodos'는 ‘길’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아니라 ‘그 길 밖으로 나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출애굽 성인 세대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 이유는 ‘ex-hodos’ 즉 길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 과거의 애굽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마음이 없었고, 새로운 길에 들어섰으면 부단히 부단히 노력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교회와 가정이 하나님의 vision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길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김은영 박사는 ‘이미지 메이킹’에서 know youself(너 자신을 알라). Develop Yourself(너 자신을 개발하라). Package Yourself(너 자신을 포장하라). Market Yourself(너 자신을 상품화하라). Be Yourself(너 자신이 되라)고 했다. ex-hodos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이미지를 메이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므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을 보여 드려야 한다. 우리 자신을 살피고,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자세를 발전시키고, 우리 자신을 말씀의 진리로 포장하고, 천국의 시장에 아름다운 상품으로 내어놓아야 한다. 이렇게 교회가, 가정이, 성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상품이 될 수 있도록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후천적인 노력의 ‘ex-hodos’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 베풀어주시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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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21
  • [교회법률] 봄 정기노회에 유감
    “2016년 봄 정기노회를 은혜 중에 마쳤다.”고 언론 보도가 자자하다. 그런데 일부 노회들이 월요일에 개회하여 당일 저녁시간에 노회회무를 마치고 폐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대만 해도 정기노회는 모든 노회가 월요일 오후 2시에 개회하여 수요일 오후 5시까지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에는 “회기 연장을 결의”하고 마지막 날인 수요일 오후 6시가 지나도록 회의를 하던 경우가 노회회원으로서 직접 여러 차례 경험한 일이 기억된다. 그러나 요즈음은 노회가 처리해야 할 안건 수도 1980년대보다는 훨씬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으로 월요일 하루에 서둘러 마치는 것이 일반화 되어 가고 있어 심히 안타깝다. 문제는 노회 기간에 관하여는 노회 규칙에 의하여 노회절차를 옛날과 다름없이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로 정해져 있는데 노회를 진행하면서 월요일 하루에 기필코 마친다는 사실이다.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옛날의 노회기간은 월요일 오후 2시부터 수요일 오후 5시까지였음에 비하여 현재는 월요일 오전 10시부터 수요일 오후 5시까지로 4시간이나 노회 회기를 연장해 놓고 정작 노회는 월요일 하루에 끝내버리는 노회가 대부분이라고 하니 그 속셈을 알 수가 없다. 심지어 금년 봄 노회에서 어떤 노회는 월요일에 개회하여 화요일 새벽 1시까지 마라톤 회의를 했다고 언론에 보도가 되었는데 월요일 하루에 노회를 마치는 것이 무슨 자랑이나 되는 듯 착각 속에 노회를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이상과 같이 1980년대와 그 이전에는 3일 동안 소요되는 노회를 작금의 봄 노회는 월요일 하루에 개회예배, 성찬예식, 임원 선거, 총회 총대 선거, 총신 이사 선거, 지방 신학교 이사 선거, 성경학교 이사 선거, 회의록 채택, 폐회예배 등 그 외에 수백여건의 안건들을 오전 10시에 시작하여 오후 5시까지로 그것도 점심시간 2시간을 제하고 나면 겨우 5시간 동안에 모두 처리하는 것이 현실일진대 이러고도 봄 정기노회가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중에 폐회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착각을 넘어서 망발에 다름 아니다. 그 이유는 옛날 선배들은 월요일 오후 2시부터 수요일 오후 5시까지 19시간에 회의했던 노회를 지금은 월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5시간 동안에 단축해서 정기노회를 모두 마쳐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안건은 유인물을 돌리고 있는 중에 안건의 설명을 들어보지도 아니할 뿐만 아니라 유인물을 아직 받지도 못한 회원들이 있는 상황에서 “유인물대로 받자”는 동의와 재청에 의하여 처리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회원들이 박장대소한다. 그 박장대소는 어떤 의미일까? 모르기는 하지만 “해도 너무한다.”는 뜻으로 웃고 넘기자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라 임원 선거 중에 노회장, 서기, 회의록 서기, 회계 등은 단독 후보라고 하면서 은혜(?)롭게 박수로 받는 것이 일반화 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총회가 그렇게 하고 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언제인가 총회에서 하달된 공문에 노회 임원과 총회총대를 선정할 때에 헌법대로 선정하지 아니하는 노회는 그 사실을 실사하여 무효처리 한다고 한 지시 공한이 있었던바 이와 같은 경우가 곧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이 제격 아니겠는가! 그리고 당일에 노회를 마치기 위하여 시간에 쫒기다 보니 노회 회의 중에 가장 중요한 회의록 채택을 본회에서 채택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임원회에 맡기는 것이 일반화 된 것 같아 보인다. 회의록 채택을 임원회에 맡기면 정확한 회의록이 될 수 없고, 반드시 노회 현장에서 채택해야 정확한 회의록이 된다. 그 이유는 회의록이 잘못 기록된 경우에 그 의제를 제안한 자와 동의한 자와 재청한 자들이 낭독하는 회의록 중에 잘못된 부분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교정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으로 거두절미하고 요즈음 정기노회의 회의광경은 옛날 선배들이 노회의 안건 처리에 진지함과 비교해 볼 때에 마치 아이들의 병정놀이와 같아 보여 씁쓸함을 달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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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21
  • [성공칼럼] 이웃사랑에서 서로사랑으로
    예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율법을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은 비슷해 보인다. 그렇지만 확실히 다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하든지, 자신이 어떤 해를 입든지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웃사랑은 혼자서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과도 할 수 있고, 내 내면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서로 사랑하는 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하고 반드시 둘이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은 사랑하는데 상대방이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둘 사이가 가깝다는 말이며 서로사랑은 자신의 상태를 넘어서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웃사랑’이나 ‘서로 사랑’이나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수단이 되고 상대방이 목적이 되며 하나가 되려는 결합력이 있는 것이다. 또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선한 행동하는 것이다. 이웃사랑이란 나에게 사기 쳐서 돈을 빼앗아간 사람에게 “그 사람 능력 있네! 나 같은 사람을 속이다니 그 돈으로 잘 살게나~”하면서 복을 빌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디 쉽겠는가? 그래도 이렇게 선을 보여주어야 내가 살 수 있기에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는 것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에 더 쉽지 않다. 만약에 부모는 자녀를 위해 고생고생해서 번 돈을 주는데 자녀는 그 돈으로 술 먹고 노름하고 온갖 쾌락을 누리면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쪽은 항상 명령하는 위치에 있고 다른 쪽은 복종하는 위치라면 이 또한 서로 사랑할 수 없다. 또 한 사람은 사랑하는데 상대방은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이것 또한 서로 사랑이 아니다. 그리고 상대방은 나를 위해 오로지 선한 일을 하는데 나는 받기만하고 더 달라고 한다면 이 또한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동등해야 한다. 부모와 자녀, 사장과 직원, 나이를 떠나 어떤 사이에서도 동등할 때 자유가 생기고 힘이 생기며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옛날 가부장 제도처럼 아버지는 지배자의 위치에 있고 자녀와 아내는 복종의 위치에 있는 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엔 억압이 생기고 상처가 자라나며 한이 쌓이는 것이다. 또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공감과 이해가 있어야 한다. 함께 살다보면 서로 다른 것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 생각, 종교, 정치적 견해, 원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 이런 순간에 나와 다르더라도 공감하고 이해하고 존중할 때 서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마음껏 나누는 사이여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한 번, 두 번, 열 번...계속 나눌 때 신뢰가 싹트고 기쁨이 생겨서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은 사랑하는데 그것을 가슴에만 간직하고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밝고 부드러운 말로 표현하며 또 행동으로 자신의 재능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서로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 표현할 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사랑의 기한은 언제까지 일까? 내 힘으로는 잠깐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가진 사랑은 상황이 바뀌면 순식간에 달라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영원히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존재가 바뀌어야 한다. 즉 자기사랑과 세상 사랑을 버리고 본래의 나를 찾아서 이 그릇에 사랑 그리고 생명이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주님사랑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주님사랑을 받아들일 때 저절로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목적으로 여기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가진 자만, 경험한 자만 알게 되는 비밀 같은 이 주님사랑을 찾고 찾아야 할 것이다. 모든 삶의 근원은 사랑이며, 삶의 존재이유도 사랑이다. 우리는 주님사랑을 받은 존재로서 이웃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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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21
  • [은혜의 말씀] 귀중한 자 (역대상 4:9~10)
    성경에는 훌륭하신 어머니들이 나옵니다. 한 사람이 훌륭하게 자라는 데에는 누군가의 희생과 눈물이 있어서 입니다. 그녀들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눈으로 자녀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어머니 요게벳은 모세의 준수함을 보고 차마 죽일 수 없어 세달 간 숨깁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아이라면 반드시 살려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하나님 손에 맡기고 아이를 갈대상자에 담아 강물에 떠내려 보냅니다. 애굽의 공주에게 발견된 모세는 누나 미리암의 기지로 어머니 요게벳의 손에 자라게 됩니다. 유모로 모세를 키우게 된 요게벳은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였습니다. 먼 훗날 모세는 고통 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합니다. 40년간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인내하며 험난한 여정 길을 완주한 그는 실로 위대하고 귀중한 민족의 지도자 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어두운 사사시대에 한나는 아기가 없음으로 고통 중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의 거룩한 나실인으로 키워 드리겠노라 서원하였습니다. 애통하는 심령과 눈물로 간절히 기도 합니다. 한나는 아들 사무엘을 낳았고 하나님께 한 서원을 지키기 위해 젖을 뗀 사무엘을 제사장 엘리에게로 데리고 가 그의 평생을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그 뒤 한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어두운 시대에 사무엘은 백성들을 회개케 하여 하나님께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사울 왕과 다윗 왕에게 기름 부은 선지자로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귀중한 자입니다. 야베스의 뜻은 ‘고생을 만들다’, ‘슬프게 하다’ 입니다. 유다 지파 사람으로 고핫 집안에 속하여 서기관 야베스 가문을 창시한 인물입니다. 야베스의 어머니는 그를 무척 힘겹게 출산했습니다. 이름처럼 고통의 자식이요 애물단지였던 야베스를 그녀의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헌신과 눈물의 기도로 양육했습니다. 야베스는 형제 중 귀중한 자요 집안의 유력한 자가 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어두운 시대에 야베스는 하나님께 기도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어두운 시대에 야베스의 기도를 기뻐하셨습니다.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의 기도처럼 복에 복을 더하사 그의 지경을 넓혀 주셨고 환난과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야베스의 구하는 바를 들어 주신 것입니다. 어머니들의 헌신과 눈물의 기도가 이처럼 자녀들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귀중한 자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채널을 고정하고 기도의 자리를 사수하고 바쁠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실 것을 알더라도 구해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기업이요 희망인 우리의 거룩한 자녀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말씀으로 양육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귀중한 자로 세워나가야 합니다. 하나님 기뻐하사 쓰시는 귀중한 자들이 많이 배출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최선의 때에 우리에게 가장 유익이 되는 것들을 주십니다. 비록 그것이 내 생각과 다를지라도 나에겐 최고의 복인 것입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구하며 나아갈 때 우리의 지경을 넓혀 주시고 환난과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해 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승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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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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