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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칼럼] 소통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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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꽃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원장 수녀가 있었다. 꽃을 옮겨 심다 보니 어느 사이 장미정원이 만들어졌다. 원장 수녀님은 너무 자랑스러워 순례객들에게 보여주길 좋아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미꽃을 구경시켜 드릴게요. 얼마나 예쁜지요.”
문제는 그 화려한 장미꽃 정원을 돌아보면서도 순례 객들은 건성건성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기에 바빴다. 심지어 대열에서 이탈해 다른 곳을 기웃거리는 이들까지 있었다. 하지만 견습 수녀가 안내를 맡은 날은 순례객들은 항상 장미꽃 정원에 오래 오래 머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미꽃의 종류에서부터 개화시기, 향에 이르기까지 질문도 많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희 수녀원의 장미가족들에게 오늘 오신 VIP들을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얼굴 좀 비춰 주실 수 있으시죠?”
무릇 대화의 핵심은 화자(話者)중심이 아니라 청자(聽者)중심으로 하라고 한다. 사람은 ‘귀’ 때문에 망하는 사람보다 ‘입’ 때문에 망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날아가는 새는 다시 잡아 가둘 수 있지만 한 번 입 밖에 내던지 말은 다시 붙잡을 수 없다. 과연 어떻게 하면 자식과 통하는 대화를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서 소통의 시대를 열 수 있을까? 여기 소통의 법칙이 있다.
1.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은 ‘뒤’에서도 하지 마라.
뒷말은 가장 나쁘다. 궁시렁거리지 마라
2. ‘말’을 독점하면 ‘적’이 많아진다.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들을수록 내편이 많아진다.
3. 목소리의 ‘톤’이 높아질수록 ‘뜻’은 왜곡된다.
흥분하지 마라. 낮은 목소리가 힘이 있다.
4. ‘귀’를 훔치지 말고 ‘가슴’을 흔드는 말을 하라.
듣기 좋은 소리보다 마음에 남는 말을 하라.
5. 내가 ‘하고’싶은 말보다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해라.
하기 쉬운 말보다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해라.
6. 칭찬에 ‘발’이 달려 있다면 험담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나의 말은 반드시 전달된다. 허물은 덮고 칭찬은 자주해라.
7. ‘뻔’한 이야기 보다 ‘펀’한 이야기를 해라.
디즈니만큼 재미있게 해라.
8. ‘혀’로만 말하지 말고 ‘눈’과 ‘표정’으로 해라.
비언어적 요소가 언어적 요소보다 힘이 있다.
9. 입술의 ‘30초’가 가슴의 ‘30년’ 된다.
나의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
10. ‘혀’를 다스리는 것은 나지만 내 뱉어진 ‘말’이 나를 다스린다.
함부로 말하지 말고 한 번 말한 것은 책임을 져라.
이제 은쟁반에 금사과 같은 커뮤니케이션으로 가정행복을 빚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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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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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광천국(狂泉國)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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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학자 원찬(袁澯)의 <묘덕선생전(妙德先生佺)>에 나오는 광천(狂泉)이야기는 마치 오늘의 우리 사회를 빗대어 쓴 예언적인 글 같아 마음이 서늘함을 느낀다. 옛날 샘(泉)이 하나밖에 없는 나라가 있었다. 그 샘의 이름은 광천(狂泉)이라 불리는 샘이었는데 그 샘물을 마시는 자마다 미치게 되었다.
그렇게 되다보니 부자유친(父子有親)도 무너지고, 장유유서(長幼有序)도 깨어지며, 남녀유별(男女有別)따위는 자연스럽게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니 자연 국가는 존립자체가 무너지게 되었고, 사회 질서는 붕괴되었다. 하나같이 그 물을 마신 자마다 닥치는 대로 빼앗고, 기가 동하면 능욕하고, 화나면 불 지르고, 제멋대로 안 되면 살상을 자행하는 등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니 사회는 살기(殺氣)가 돌았고 사람들의 마음은 황폐한 광야가 되었다.
그런데 그 샘의 물을 마시지 않은 단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그 나라의 임금이었다. 임금은 새로 샘을 파서 그 물을 마시게 되어 미치지 않는 정상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라 안 모두가 미쳐 날뛰는 판국에서 미친 사람들은 오히려 미치지 않은 임금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임금님을 잡아 그 미친병을 고친다고 하면서 뜸질 찜질을 하고, 귀신 쫓는다 하여 거꾸로 매달아 패고 살점을 저미었다. 임금은 고통을 참다못해 그 광천 물을 마시고 결국 미쳐버렸다.
상식이 무너지고 이성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로 인해 오히려 건강하고, 온전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황폐하게 하는 도덕과 윤리의 마지막 고리마저 빼버리는 난세를 빗댄 이야기다.
한 때 로또 복권의 광기(狂氣)가 온 나라를 휩쓸더니 결국 별별 정신적 광기에 휩싸여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일이 일어나게 되고, 부모도 형제도 돈바람에 죽여 버리는가 하면, 불한당(不汗黨)의 타락한 기운이 바이러스가 되어 이 사람 저 사람 정신의식을 한탕주의 광기에 시달리게 했다. 그것은 숭고한 인간의 땀 흘리는 정신을 타락하게 하여 허무와 무목적으로 오염시켜 패망으로 치닫게 하는 웃지 못 할 사회현상이다.
멈추어 돌아보면 소위 광우병 촛불집회는 또 하나의 광기처럼 이 나라 백성들의 삶의 터전까지 뒤흔들었고, 자살 광기가 연예인들을 자살 바람을 일으키더니 여기 저기 자살 베르테르 효과가 일어나는 가운데 이와 같은 광기를 잠재워야 할 이 나라 지도층은 사리사욕에 정신을 못 차리고, 더 나아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전직 대통령마저 자살을 하게 되는 아픔과 고통을 통감(痛感)하면서 광천(狂泉)이야기를 새삼 생각해 본다.
얼마 전 그토록 진실하고 양심적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존경하는 장로님 한 분이 자살을 하게 된 사건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을 피멍들게 한 아픔이 되었다. 그 분은 진실의 물을 마시다가 더 이상 주위 상황에 견딜 수 없어 마치 광천국 임금처럼 광천의 물을 마시고 말았다.
이와 같은 광기에 휩쓸리면 앞뒤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숭례문을 불태웠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한 정신질환자의 소행으로 국한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는, 그렇다고 딱 부러지게 표현할 어구(語句)가 생각나지 않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불안하고 소름끼치는 어두움의 바람에 휩싸인 듯한 기분이다. 그것이 지금 이 나라의 상황이다.
그런데도 여의도 1번지 정치 현장은 당리당략의 질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정치문외한이라 할지라도 여의도 1번지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고 소위 선량(善良)이라는 분들의 명예를 내 작은 세치 혀로 어떻다고 말할 수 없기에 더더욱 광천의 물 마시는 이야기만 자꾸만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백성들은 굶어 죽는데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 미사일을 만들어 시위 발사하는 지척에 있는 공산주의 광기와 날뛰는 상황을 눈앞에서 지켜보면서 밉든 곱든 민주주의 절차에 의해 세워진 대통령을 향해 별별 속어를 동원하여 언어폭력의 상황을 공영 방송을 통해서도 심심찮게 보는 오늘이 두렵다. 공직사회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그렇고, 경제의 현주소가 불안의 널뛰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 그렇고, 언론사들의 홈페이지 게시판을 도배하는 막가파 같은 언어표현이 그렇고, 도처에 흑백논리의 쟁투적인 현상이 그렇다. 그래서 우리사회 현상은 마치 광천의 샘물을 마신 것 같은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마음을 파고든다. 이것이 어디 하루 이틀의 상황인가? 그런데도 이 광기를 몰아낼 사람도 단체도 대책도 보이지 않기에 더욱 두렵기만 하다.
자살론(自殺論)으로 유명한 뒤르깽은 ‘욕망 투성이의 인간행위를 규제하고 억제시키는 공통의 가치 및 도덕기준을 상실한 혼란 상태를 아노미현상’이라 했다. 광천(狂泉)현상은 바로 아노미현상인 것이다.
정의를 말하면서 불의를 행하고, 개혁을 외치면서 파괴를 일삼으며, 혁신을 주장하면서 이기적 욕망에 눈을 흘기며, 사랑을 말하면서 그 입으로 온갖 미움과 저주와 정죄를 쏟아내는 오늘의 현상은 광천의 물을 마시지 않고는 그러할 수 없는 노릇이라는 생각에 온 몸이 떨린다.
기형의 인간들이 광천물 먹고 난무하는 듯한 오늘의 세상! 교회도 그런 기운이 밀려들지는 않는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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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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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해 봅시다] 성경봉독을 아무나 해도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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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전적으로 목사의 책임이고
설교본문 봉독 역시 목사의 책임
요즘 공예배 시간에 성경봉독을 목사가 하지않고 아무나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집사가 등단하여 봉독하고 어떤 교회에서는 인도자와 회중이 교독을 한다. 어떤 교회에서는 인도자와 회중이 한 목소리로 함께 봉독한다. 공예배 시간에 성경을 봉독하는 것은 누가 봉독하든지 어떤 방식으로 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는가. 아니다. 사리에 맞지 않는다. 성경봉독은 설교자 본인이 하든지 예배인도자가 하든지 반드시 목사가 봉독하여야 한다. 이유는 예배하는 시간에 봉독하는 말씀은 설교의 본문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교회헌법과 예배기준에 보면 성경봉독은 의례히 목사가 해야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헌법41조 목사의 직무 2항에 ‘하나님의 말씀은 봉독하고 설교하는 일’이라고 했다. 성경봉독은 목사 고유의 직무 중 하나이다. 또 예배지침 제17조에는 ‘목사가 성경을 봉독할 때에 청중은 일체의 잡념을 버리고 겸허한 마음과 진리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여야 한다’ 이렇게 되어있다. 또 헌법해설 제17조에 보면 ‘문)공예배 시에 성경을 누가 봉독하여야 하는가? 답)공예배에서 성경봉독은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봉독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목사의 독특한 책임이기 때문에 그 동일한 말씀을 읽는 것 역시 목사의 책임이다’ 이렇게 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헌법과 예배기준이 성경봉독에 관해 말한 요지는 성경봉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설교자 자신이 봉독하든지 예배인도자가 봉독하든지 반드시 목사가 해야한다는 것이다. 성경봉독을 인도자와 회중이 교독하거나 인도자와 회중이 함께 합독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배하는 시간에 성경봉독을 목사가 아닌 다른이가 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예를 들면 신년하례회 혹은 연합집회, 장로 장립식 같은데서 기도인도는 목사에게 맡기고 성경봉독을 장로에게 맡기는 것을 이따금 보게된다. 아니 거의 그렇게 한다. 장로에게 순서를 맡기려면 기도인도를 장로에게 맡기고 성경봉독은 목사에게 맡겨야 옳지 않은가.
어디서나 설교는 아무나 하지않고 반드시 목사에게 맡긴다. 목사는 말씀 사역을 위해 세움 받은 주의 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근거가 되는 설교본문인 그 성경을 봉독하는 것 역시 의례히 목사가 해야한다. 공예배시에 성경봉독을 목사가 아닌 다른 이가 하거나 교독을 하거나 합독을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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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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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청렴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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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는 정(情)이 많은 민족입니다. 개인이나 사회 전반적인 정서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경제 영역에 적용될 때 두 가지 현상이 발생합니다. 긍정적인 면으로 대표적인 것은 덤 문화입니다. 지불한 대가 이상으로 얹어주는 모습은 보기에 훈훈합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특유의 ‘우리가 남이가’ 문화에서 파생되는 소위 급행료, 와이로(わいろ), 뇌물 같은 것들입니다. 2012년 1월 4일 기획재정부가 펴낸 <2011년 국가경쟁력 보고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과 한국을 비교해 “경제는 많이 성장했지만, 형평성, 신뢰도가 낮다.” 이렇게 총평했습니다. 경제수치는 좀 올랐을지 몰라도 양극화와 계층 부조화, 그에 따른 소통의 부재 현상이 만연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9월 28일 드디어 발효되는 ‘부정 청탁 및 금품 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약칭 청탁금지법)은 공시론적으로도 통시론적으로도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이 법에 따르면 중앙행정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 공직유관단체나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준공무원, 학교(법인)에 있는 교직원, 언론사 근무자들은 직무대가성과 관련 없이 1회에 100만 원 이상을 수수할 수 없으며, 3만 원 이상의 식사, 5만 원 이상의 선물, 10만 원 이상의 경조사비를 받을 수 없습니다. 제대로만 시행되고 적용된다면 이 법은 앞으로 공직사회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을 개혁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한국남부발전 감사 임정덕 교수가 최근 주장한 ‘적극적 청렴’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지만, 한국사회의 부패하고 타락한 면을 일소하는 일은 논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사회법의 적용 여부와 관계없이 교회는 더욱 고결한 가치를 지향하고 거룩함을 추구하며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직자들이 그럴진대 하물며 성직자들은 더욱 부정과 불법에서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더욱 정직하고 투명한 삶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사회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청렴한 공동체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재정 면에서도 정직하고 투명해야 합니다. 교회의 지출은 철저하게 공식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불투명하게 지출되는 재정 관행은 사라져야 합니다. 재정 운용 또한 민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의 중요 재산 변동에 관한 사항은 원칙적으로 전교인의 동의와 추인을 얻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교회의 수입과 지출을 사회에 공개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다윗의 고백이 마땅히 교회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입술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나의 공평함을 보옵소서. 나를 감찰하셨지만 흠을 찾지 못하셨습니다.”(시 17:1~3) 속고 속이는 세상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건 값을 중량을 속이고, 학력과 학위를 속이고, 자신의 잘못을 속이는 거짓과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정직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요즘입니다. 그러나 시대를 막론하고 정직은 가장 큰 자산이었습니다(Honesty is the best policy). 하물며 성경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경제 영역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1:1). 성경 전편을 도도하게 흐르는 중요한 이러한 가치를 ‘하나님의 공의’라고 합니다. 성경적인 공의는 사회적으로 ‘청렴’의 개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분발하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더욱 두렵고 떨림으로 공의와 청렴의 가치를 선도하고 심화하고 발전시켜 가는 목회자와 성도와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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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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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칼럼] “부산 시민의 애국심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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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나라는 또 다시 지역이기주의가 심각하게 확산돼나가고 있다. 북한이 파괴력 강한 미사일 공격을 해 올 경우를 대비하여 최소한의 ‘방어망’을 구축하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마땅히 여길 것인데, 설치하기에 가장 적합한 지역 주민들이 결사적으로 반대를 하고 나서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무지 믿을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집단이 북한 공산주의이기 때문에 우리 대한민국 공동체의 ‘평화와 안전’을 위하여 울타리 보호망을 튼튼히 해야 하는 것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는 국민이라면 모두가 찬성하고 더 나아가서 헌신과 희생을 서로 먼저 하겠다고 자원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저 이스라엘을 보라! 강력한 적대국들인 아랍 계통 20여 나라에 둘러싸여 있다. 아랍 국가들의 총 인구는 대략 2억에 이르는데 이스라엘은 겨우 450만 인구이다. 그럼에도 지금 이스라엘은 조금도 위축됨 없이 당당하게 나라를 보위하면서 활기차게 살아간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전 국토가 요새화 되어 있다. 자신들의 국토와 하늘을 지켜내기 위하여 전 국토에는 하늘을 방어하는 지대공 미사일, 땅을 지키는 지대지 미사일 기지가 그물처럼 촘촘하게 설치돼있다. 실로 독수리 한 마리 빠져 나갈 수 없도록 완벽한 국토 방어망이 갖춰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국민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지역이 “우리 마을, 우리 지역에는 첨단 군사기지 설치 절대 불가하다.”라면서 반대시위를 한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 너무나 작은 나라, 적은 인구지만 온 나라가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있기 때문에 주변의 극단적인 적대국들은 감히 이스라엘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1950. 6. 25~1953. 7. 27 만 3년 간 우리나라는 북한 공산주의의 남침전쟁으로 말미암아 5천년 한국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파괴를 맛보았다. 전 국토가 초토화되고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전쟁 난민’이 되었다. 피난민들은 전국에서 부산으로 부산으로 밀려왔다. 지독하게 가난하던 시절임에도 부산은 이들 피난민을 다 받아들였다. 6.25 전쟁 3년간만 아니라 전쟁 이후 극심한 혼돈과 가난의 세월에서도 오갈 데 없는 전쟁 난민들을 고스란히 품어주었다. 그 시절의 여파로 부산은 지금도 전쟁의 상처와 흔적을 제대로 지우지 못하여 도시의 기반 시설이나 도시계획, 미관이 매우 저조하고 열악하다. 부산은 또한 1979. 9~10월의 ‘부마항쟁’을 통하여 1945. 8. 15 조국 해방이후 40여 년간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고 혼미를 거듭하고 있던 이 나라를 단숨에 민주주의가 꽃 피우는 나라로 출발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해내었다. 실로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이 아시아에서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배경에는 부산 시민들의 ‘단순하면서도 용기 있는 헌신과 희생’이 깊게 깔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부산 경남 울산 경주 울진 지역에는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량의 80%가 설치 가동 중이거나 현재 계속 확장 중에 있다. 쉽게 말하면 우리나라의 원자력 발전소 80%가 우리 지역에 집중 설치돼 있다. 원자력 발전을 가동하는데 어찌 전자파가 발생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편함과 염려가 왜 없겠는가마는) 우리는 나라와 민족의 생존과 삶을 위해서는 어딘가는 그리고 누군가는 희생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국민으로서 이를 기꺼이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사생결단식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정말 답답하고 마음이 괴로웠다. 제주도 앞 바다를 일본, 중국 함대들이 자기네 바다처럼 휘젓고 다니는데 정작 주인 된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군사기지 건설마저 지역이기주의에 막혀 6년, 10년씩이나 공사가 지연되었다니 오히려 이웃 나라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 어떤 생각을 가지겠는가? 우리의 국가 수호의지를 의심하거나 비웃지 않을까?
해방 이후 지금까지 70여 년 동안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기 위하여 큰 헌신과 희생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는 도시가 ‘부산’이다. 하나님께서 부산을 지켜주시고 부산의 시민들에게 평강과 위로를 많이 내려 주시기를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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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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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률상식] 비상 정회는 치리회 회장의 고유한 특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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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회의 위원장은 비상 정회 선언권 없어
■위원회 위원장의 비상 정회 선언은 전례도 없는 불법행위
[질의] 총회를 1주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마지막 총회선거관리위원회로 모여 임원 후보 결정에 대하여 투표로써 최종 결정하기로 하고 위원장이 선거관리위원회를 소집하였습니다.
그런데 위원장은 임원 후보자를 투표로써 결정하겠다고 소집한 최종 회의에서 투표는 하지 않고 시간을 소진하다가 “나는 다른 모임이 있어서 정회했다가 속회하여 투표할 것입니다”라고 하는 말에 위원들이 “그러면 부위원장에게 사회권을 위임하고 다녀오시라”고 하니 위원장이 비상정회를 선언하고 퇴장해버렸습니다.
그 후 위원들 중 위원장을 포함하여 5명은 퇴장하였으나 10명은 회의장을 떠나지 않고 위원장이 퇴장한 것을 불법으로 판단하고 위원들 중에 최고 연장자 목사님을 사회자로 추대하였으며 재적 위원 3분의 2 이상인 10명 전원의 만장일치로 위원장 해임안을 결의하고 위원회 서기를 위원장 직무대행으로 결의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①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 비상 정회를 선언하고 퇴장하는 것이 합법인지요? ② 위원장이 퇴장한 후 재적 위원 중 3분의 2 이상의 위원들이 회의장을 떠나지 않고 회의를 계속 진행하여 위원장 해임을 결의하고 서기를 위원장 직무대행으로 결의한 것이 잘못인지요? ③ 서기가 제101회 총회 총대로 천서가 되지 않았는데도 위원장 직무 대행을 할 수 있는지요? 목사님의 법리적 답변을 바랍니다.(합동 K목사)
[답] 질의자가 합동 총회 소속 목사이므로 합동 총회 헌법으로 답한다.
1.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의 비상 정회 선언에 대하여
비상 정회는 누구나 아무데서나 선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교회 각 치리회 회장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특권으로 장로교 헌법은 규정하였다.
이에 대하여 교회 헌법 정치 제19장 제1조(회장)에 “교회 각 치리회는 모든 사무를 질서 있고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회장을 선택할 것이요 그 임기는 그 회의 규칙대로 한다”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동 제19장 제2조의 “치리회 회장의 직권”에는 “ … 회장은 매 사건에 결정을 공포할 것이요 특별한 일로 회의 질서를 유지할 수 없는 경우에는 회장이 비상 정회를 선언할 수 있다”고 명백히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본건 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은 위원회 심사의 원칙에 의하여 본회가 위탁한 안건을 심의하여 본회가 신속히 처리할 수 있도록 심의하는 위원회의 위원장일 뿐이요, 비상 정회라는 권한을 부여한 법적 근거는 헌법, 규칙, 결의 등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기독교 100여년 역사에도 상비부 부장이나 특별위원회 위원장이 비상 정회를 선언한 전례도 없다.
따라서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 총회를 한 주간도 채 남지 않은 다급하고 긴박한 상황에서 마지막 회의를 소집했으나 회의소집 시에 약속으로 전제한 투표는 하지도 않고 시간만 소진하다가 자기가 다른 모임이 있으니 거기 참석하기 위하여 정회를 하겠다고 할 때에 위원들 다수가 부위원장에게 사회권을 위임하고 다녀오라고 함에 대하여 이를 거부하면서 권원 없는 비상 정회를 선언하고 퇴장하였다고 하니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불법 행위이다.
2. 위원장 해임과 서기를 직무대행으로 결의함에 대하여
“법의 정의는 상식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비추어 보건대위원장이 회의를 진행하다가 다른 모임 참석 운운하면서 정회를 하겠다는 유치하고 무책임한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절대 다수의 위원들이 사회권을 부위원장에게 위임하고 다녀오라는 요청을 거부하면서 권원 없는 비상 정회를 선언하고 급기야 퇴장까지 했다고 하니 이와 같은 상황에서 총회 준비에 중대한 직무를 유기한 위원장에 대하여 위원회 자체로 그 직무를 불신임하고 해임 결의함은 상식에 속한 사안이요, 위원장 직무 대행자를 선정한 후속 조치는 당연한 순리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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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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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 사랑이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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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나를 지배하고 군림하고 요구하는 분이 신이 아니라 신적 사랑이 신이며 근원이며 생명인 것이다. 이 사랑에서 지혜와 능력과 힘이 나오는 것이다. 이 사랑은 진리의 그릇에 담겨야 하며 선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기에 내가 사랑과 선을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할 때 나는 살아있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십계명의 핵심은 주님사랑과 이웃사랑이며 천국의 핵심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목적을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에 두는 것은 모든 거짓과 두려움과 분노와 비난과 악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약속을 계속 바꾸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약속을 바꿀 때마다 화가 나는가?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하면 약속이 바뀔 때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어떻게 선을 행할까를 찾으면 약속 어김이 문제가 되지 않게 된다.
사랑과 선을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거짓과 악의 세계에서 나오게 하는 비결이다. 그리고 삶이 내 생각대로 되거나 안 되거나, 환경이 쉽거나 어렵거나, 가진 것이 있거나 없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살면 사는 것이 참 행복하고 자유롭고 모든 것이 부유해지는 것 같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사랑으로 어떤 상황에서든 선을 행하면서 일주일, 한 달, 일 년, 십 년을 지내면 삶은 고차원적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높이 올라갔다 할지라도 사랑과 선을 잃으면 그 즉시 수렁으로 떨어지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고린도 전서 13장에는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며 심지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할지라도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사랑이 생명인데 생명이 없어지면 아무리 높은 곳에 올랐을지라도 소용이 없다는 말씀이다.
‘육체’속에 사랑과 선을 잃으면 육체는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 남녀 간에도 사랑이 사라지고 서로 선을 행하지 않으면 성적 쾌락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고 돈으로 성을 사고파는 감각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소돔과 고모라도 이런 쾌락적인 수준으로 전락하여 멸망을 당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감각을 사용하고 정보를 수집하여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마음이 사랑과 선을 잃게 되면 그 합리적 지식이 거짓과 악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예를 들면 판사, 검사, 학자, 선생, 목사들이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으로 독재와 권력과 돈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거짓과 악을 옳다고 주장하며 타락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참 나’를 발견한 후 사랑과 선을 잃으면 ‘내가 우주의 중심이다.’ ‘내가 근원이다.’ ‘내가 신이다.’라고 주장하며 자기 숭배로 떨어지게 된다. 구약에 나오는 이집트의 바로왕은 사랑과 선이 있었을 때는 7년 가뭄에서 전 세계를 구원하는 왕이 되었지만 요셉을 모르고 “여호와가 누구냐? 나는 여호와를 모른다.”라고 하며 사랑과 선을 잃었을 때는 백성을 괴롭히고 이용하고 지배하는 폭군이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육체와 마음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영적 진리’를 발견하면 그 삶은 신적인 사랑 속에 있게 되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 권세와 칭송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이 ‘영적진리’ 속에 사랑과 선을 잃게 되면 그 즉시 하늘 높은 곳에서 떨어지게 된다. 예를 들면 이사야서에 계명성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스올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겉으로는 종교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속은 권력욕과 물질욕 등의 시체의 뼈들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 같은 존재로 전락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주님사랑과 이웃사랑이 생명이다! 내가 어떤 위치와 상황에 처해 있든지 사랑과 선을 잃어버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의 소유를 위해 사랑과 선을 이용하는 삶을 살면 내 삶은 그 즉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임을 알고 자신을 잘 살피며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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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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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히스기야의 눈물 (열하 18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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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왕국 유다에서 BC739년 제4대 왕이 될 히스기야가 태어납니다. 히스기야의 뜻은 ‘하나님으로 강해지다’입니다. 히스기야는 25세에 왕이 되어 29년간 나라를 다스리며 여러 일들을 겪게 됩니다. 히스기야는 이전 왕들과는 다른 전무후무한 길을 걸어갑니다. 그는 하나님께 연합하여 하나님과 함께하였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습니다.
특히 히스기야는 오랫동안 잘못되어온 민족의 신앙을 바로잡습니다. 이방신과 우상을 섬기기 위해 찾던 산당들을 모두 제거하고 바알 산당과 아세라 목상도 부수었습니다.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재정비하고 레위인들을 세워 성전 일을 하게 하였고 유월절의 전통을 회복시킵니다.
당시 그 지역의 강국 앗수르를 섬기고 있던 남유다는 사르곤이 죽고 그의 아들 산헤립이 즉위하는 혼란을 틈타 이집트와 동맹을 맺습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앗수르는 유다의 성읍들을 쳐서 점령 하였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리게 됩니다. 위기에 처한 히스기야는 막대한 배상금을 물려도 앗수르의 침입이 계속되자 하나님 앞에 나아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예루살렘성을 보호하여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진영에 천사들을 보내셨고 앗수르 군사 185,000명이 몰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에 산헤립은 앗수를 땅으로 돌아갔고 그의 아들들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됩니다.
대제국 앗수르에 맞서 승리한 유다의 소식은 급속히 주변 나라들로 퍼져 나갔습니다. 바벨론 왕은 히스기야의 병문안을 구실 삼아 사절단을 보내며 편지와 선물을 선사합니다. 남유다의 모든 전략과 정보를 수집하게 된 바벨론은 동맹을 뒤로 하고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앞으로 유다는 바벨론의 침입을 받아 모든 것을 바벨론에 빼앗기고 히스기야의 아들 중 바벨론에 사로잡혀 환관이 될 자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히스기야의 죽음 이후 80년 뒤 BC606년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사람이 귀한 시대에 히스기야는 우상을 제거하고 성전을 거룩히 구별하며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린 전무후무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알아 순종했고 하나님께선 그런 그와 함께 하사 그의 하는 일에 형통함을 주셨습니다.
위기의 순간은 찾아 왔고 또 찾아왔습니다. 두려운 마음이 너무 커서일까 그는 하나님 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을 하며 세상적인 방법을 쫓아갔습니다. 뒤늦게나마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의 실수에도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사 구원해 주셨습니다. 위기가 해소되자 교만해진 마음을 회개하며 기도하는 히스기야에게 그의 살아생전에는 어려움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상황이 어려워지면 하나님은 어디에도 없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세상적인 방법을 쫓고 근심하며 우리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꼭 히스기와와 같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짧은 세월, 한 번 뿐인 인생 어떠한 위기가 찾아오고 또 찾아오더라도 하나님만 의지하며 감사를 잃지 않고 굳건한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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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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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칼럼] 자녀 문제 해결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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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6] 가정마다 다양한 환경과 내력이 있다. 부모가 중독과 관련되었거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라는 자녀들, 혹은 바르게 가르쳤지만 세상의 환경으로 인한 자녀들의 탈선과 중독은 그 예방법이나 치료법이 다양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가정 내에서의 갈등이다. 눈만 뜨면 게임에 빠져 있는 자녀를 보고 있자면 속에서 천불이 나는 부모. 한 마디가 열 마디가 되고, 나중에는 한 번의 훈계가 폭력과 칼부림까지 발생하게 되는 상황이다.
[해결 방안1] 가장 시급한 문제 해결점, 갈등 환경
중독 자녀의 눈높이를 맞춘 환경과 준비된 사역자
1. 가장 급선무는 게임 중독자와 가정 구성원과의 갈등을 해소시켜야 한다. N포세대가 되어 공부, 취직, 연애, 결혼, 출산 등 아무런 계획 없이 집 안에 틀어박혀 부모의 등골을 빼먹는 자녀들을 보고 있는 가족은 얼마나 화가 나고 답답할까? 또한 정작 자신도 그 문제를 해결하기엔 의지가 약하여 전혀 절제되지 않는 자신을 보고 있거나 그 환경을 탓해야하는 그 심정은 오죽할까! 그렇기 때문에 그 갈등을 해소해 줄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녀를 어디로 보낼 것인가? 정신병원?, 감옥?, 경찰서?, 게임 중독 치료 센터라는 이름의 명목이 가장 그럴 듯하지만 또한 당사자는 자신이 중독자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달에 휴대폰 요금이 게임비 결제로 100만원이 나와도 말이다. 본 저자가 준비하는 ‘게이머 힐링 센터’는 이러한 당사자들을 위한 곳이 될 것이다. 1) 가족 구성원과의 갈등을 단절 시킨다. 그리고 당사자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생각하고, 뭔가를 보고 느낄 수 있는 장소. 2) 현질을 하지 않고 수준 있는 게임을 구분하도록 인도해준다. 더 가치 있는 게임을 찾도록 한다. 그리고 중독과 여가를 구분하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다. 3) 혹, 프로게이머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기회의 장소. 4) 프로게이머가 될 수 없다면 차선책의 직업 훈련의 장소가 필요하다. 5) 자연과 더불어 천렵, 운동, 노동을 통한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는 곳 6) 그리고 책임감과 성실성을 키울 수 있는 모범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 본인은 한 때 PC방 폐인의 삶을 살았지만 지금은 다섯 아이의 아버지이고 한 교회 담임 목사로써 책임감 있는 삶을 살고 있다. 7) 그리고 말씀과 기도로 성령을 체험할 수 있는 곳에서 거듭남의 비밀을 경험 하는 것이 이들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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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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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 지금은 꽃씨를 거두어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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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가을이 완연하다. 어디를 가도 어지간한 거리에는 코스모스가 흔 들리고 있다. 그래서 코스모스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어느새 들녘에는 은빛 갈대 들이 손짓한다. 산에는 사랑하는 님의 입술 같은 단풍이 물들게 될 것이고... 그때 석양빛이 비추는 가을길을 걷노라면 그 리운 고향생각, 사랑하는 님의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어린 시절, 고향 마을의 들길을 바람개비를 돌리며 달리던 추억, 동무들과 함께 코스모스 길을 걸으며 노래를 부르던 그 행복했던 나날...
이렇게 세월은 강물처럼 무심히 흘러가고 언젠가 우리 마음의 정원에도 낙엽이 떨어지고 달빛 아래 속삭이던 갈대들마저 잠들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사랑은 가을처럼, 그리움은 갈대처럼’이라고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흘러간 세월을 반추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를 상념의 오솔길로 이끄는 그윽한 계절, 가을이 오고 있다. 잠 못 드는 기나긴 가을밤이 되면 밤새워 사랑하는 이와 함께 시와 노래와 별빛 같은 꿈들을 이야기하며 촛불을 끄지 않은 채 사랑을 나누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가을의 상념에 만 잠기면 안 된다. 감상적 사색의 바람에만 흔들려서는 안 된다. 김현승시인의 말 대로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는 때를 기다려 더 깊은 기도를 드려야 할 때이다. 뿐 만 아니라 가을에는 꽃씨를 받아야 할 때 다. 옛날 어린 시절에 가을이 되면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꽃씨 등을 받았지 않았던가. 오늘 우리도 가을에는 꽃씨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꽃씨를 돌아오는 봄에 심어야한다.
이청준의 ‘꽃씨 할머니’라는 이야기를 보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과부 할머니가 나온다. 그녀는 일찍 남편을 떠나보내고 자녀 하나 낳지 못한 채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깊은 고독을 느끼며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에게는 왜 자녀를 주지 않고 남편을 일찍 데려갔습니까? 왜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단 말입니까? 저도 정말 보람된 일,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그 할머니의 기도에 이렇게 응답해 주셨다. “딸아, 너는 남편도 없고 생산능력이 없는 할머니가 되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꽃동산을 만들 능력이 있지 않느냐, 내가 너에게 희망의 꽃씨를 뿌리는 은혜를 주었지 않느냐.”그 이후부터 할머니는 가는 곳마다 꽃씨를 뿌렸다. 그래서 그 할머니가 뿌리는 꽃씨로 인하여 주변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났다는 것이다.
소설 속 이야기이지만, 우리도 그 할머니처럼 꿈의 꽃씨, 희망의 꽃씨를 거두어 뿌려야 할 때 이다. 한국교회의 영광성과 거룩성이 훼손되고 이미지가 땅바닥까지 추락하여 온갖 비난과 조롱을 당하고 있지만, 이럴 때 일수록 희망의 꽃씨를 뿌리며 역설적 꿈을 외쳐야 한다. 굳이 안 된다 하지 말자. 더 이상 비관적인 말을 하지 말자. 옛말에 말은 씨가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아니, 말은 말(馬)이 되어 우리의 삶을 말대로 이끌어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말의 꽃씨부터 많이 뿌려야 한다. 그럴 때 아름다운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부디 하루속히 교계 연합기관이 하나 되어 함께 한국교회의 대표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한국교회의 자연환경과 생태계에 많은 꽃씨를 뿌려 주었으면 좋겠다. 이미 황폐화 되어 깨져가고 있는 황무지 같은 생태계에 말이다. 그런 곳에도 다시 꽃씨를 뿌리면 한국교회의 주변 생태계가 다 꽃밭이 되지 않겠는가. 저 가을들녘에서 꽃씨를 거두어 내년 봄에 한국교회를 위해서 꽃씨를 심어보자. 그래서 다시 한국교회 안에 사랑과 용서, 화해의 향기로운 꽃이 만발하게 하자. 가을이다. 지금은 꽃씨를 거두어야 할 때다. 그 꽃씨를 손에 쥐고 한 마음으로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향기로운 봄의 들녘을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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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