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20(토)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목회자칼럼] 해외 한인 선교사 가족 수양회 인도 見聞錄(1)
    고신총회 세계 선교 60주년 행사에 (2015년 6월, 고려신학대학원 강당) 참석한 해외 선교사들로부터 선교지를 방문하여 선교사 가족들에게도 (말씀)을 전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많이 생각하던 중 교회 당회와 의논 후 제법 긴 선교지 방문에 나섰다. 2016. 3. 15(화) 출발하여 4.8(금) 돌아오는 일정이다. 3.15일(화) 김해 공항에서 아침 8시 출발하여 낮 12시경 HongKong 공항에 도착하였다. 밤 12시경 남아공화국으로 출발하므로 시간 여유가 많아 홍콩 엘림 한인교회(조윤태 목사 담임)을 방문하였다. 땅 한 평 값이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집 한 채 값과 비슷하다고 할 정도로 물가가 비싼 곳에서 예배 처소를 장만하여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유산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지켜 나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마치 「대한 독립군」들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감동이 솟아났다. 두 사람이 몸을 바짝 맞대고 누워야 할 만큼 참으로 좁은 공간을 비롯하여 두개의 〈Guest Room〉을 준비하여 교통 요충지인 홍콩을 찾아오는 선교사들의 쉼터로 제공하고 있는 엘림 교회의 갸륵한 배려를 보면서 이 정도라면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회들이 나그네를 위하여 〈Guest Room〉을 얼마든지 장만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우리는 겉치레나 체면문화가 심하여 상당수준의 집을 마련하여야 “Guest Room"이라고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사고 때문에 실제로 이 시설을 갖추고 있는 교회는 얼마 되지 않는 실정이다. 우리 부부는 엘림교회 사모님과 부목사님 그리고 특히 이훈 집사님으로부터 따뜻한 후대를 받고 South Africa Airways편으로 장시간에 걸친 비행 끝에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하였다. 아프리카인들의 땅에 서구 백인들(화란,영국)이 건설한 나라 남아공화국 그리고 아프리카의 최고로 크고 아름다운 도시 요하네스버그는 유럽이나 미국의 여느 도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공항에서는 다시 East London으로 가야 하므로 국내선 터미널로 이동하는데 여행가방(짐)이 세 개나 되다보니 어느새 짐꾼 두명(흑인)이 달라붙는다. 짐짓 못이기는 척 짐을 나누어 운반하는데 가까운 거리임에도 10불을 요구하므로 10불을 팁으로 건네주었다. 출발문(Gate)으로 향하는데 이번에는 짐꾼 친구가 내 겉 옷 점퍼를 자기에게 벗어 달라고 한다. 순간적으로 갈등이 일어난다. 주님께서는 산상보훈을 통하여 “네 겉옷을 달라하는 자에게는 속옷까지 내어주라”고 하셨는데 이를 어찌하나? 짧은 순간이지만 난감해 하던 중 「이곳은 별로 춥지도 않고, 나는 앞으로 추운 곳 독일 Berlin으로 가서도 수양회를 인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점퍼는 내가 사직동 교회를 위임받을 때 꽃다발을 들고 나왔던 화동(사직유치원 어린이)이 성장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 첫 봉급을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담임목사에게 2년 전 선물로 준 것이기 때문에 좀 더 지녀야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스스로 세[우면서 점잖게 거절하였다. 선교사들은 저 멀리 가나, 우간다, 모잠비크, 케냐, 시에나리온, 레소토 그리고 남아공 등 여러 국가로부터 열일곱 가정 50여명이 참석하여 3박 4일 수양회를 가졌다. 나와 조윤태 목사가 번갈아 말씀을 증거하였으며 선교사들의 특강과 선교 보고회를 꼬박 꼬박 참석하여 나도 은혜를 많이 받았다. 모든 선교사들이 나의 후배들이므로 더욱 사랑스럽고 대견해 보였다. 낯선 문화, 열악한 생활환경, 먼 이국땅에서의 외로움, 풍토병, 현지 교회를 세우고 일꾼들을 훈련시켜 세워나가야 하는 일, 그리고 자녀 교육 문제등 태산같이 쌓여 있는 선교사역 속에서도 당당하게 대처해나가는 모습들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여행 경비를 뚝 잘라서 추가로 행사 경비를 후원하였다.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 담임 정은일 목사가 중국과 한국 여행의 여독으로 맡기로 했던 특강 시간을 못하게 되자 이번 행사 디렉트로 섬기는 노록수 선교사가 내 아내에게 (사모의 간증)을 맡겼다. 6년 전, 심각한 탈진 상태로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있던 나에게로 시집와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회복되고 목회를 계속할 수 있도록 결정적 헌신을 하였던 그 세월 속에 묻어 두었던 사연들을 간증할 때 선교사 부부들이 격려와 치유와 회복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므로 이 또한 감사할 일이다. (계속)
    • 오피니언
    • 칼럼
    2016-04-07
  • 제자훈련은 실패했는가?
    2007년, 미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mega church)로 특히 한국교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시카고의 윌로우크릭교회(빌 하이벨스 목사)가 32년 목회연구보고서를 내놓았습니다(『Reveal: Where Are You?』). 그 교회 사역자 출신인 그렉 호킨스(Greg L. Hawkins)와 캘리 파킨슨(Cally Parkinson)이 집필한 이 책은 1만 명 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3년간 조사하고, 수백 명을 일대일로 면담하고, 교회의 철학과 프로그램 전반을 점검한 후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뭔가 잘못됐다, 우리가 실수했다... 숫자로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를 만드는 일에는 실패했다.” 2009년 11월, 국제제자훈련원 발행지인 「디사이플」은 한국형 제자훈련의 완성자라 불리는 목사님과의 대담 기사를 실었는데, 제목이 “나의 교회론과 제자 훈련은 엇박자가 된 것 같다”였습니다. 기사 일부를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제 제자훈련은 한국 교회 안팎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와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은퇴 후 저는 제 목회가 자체적으로 자기모순을 갖고 있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합니다. 제 교회론에 부합한 교회는 너무 비대해져 버리면 그 정신을 살리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 목회가 교회론과 제자훈련이 엇박자를 이룬 것 같습니다.” 2013년 9월, 한국 교계의 원로 한 분이 CBS 대담 프로에 나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장애인 복지에 힘썼고 담임목사가 분가하는 보기 드문 목회로 많은 이들의 존경과 신망이 두터웠던 분의 말이라 상당한 무게감이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실패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목회 40년을 뒤돌아보고, 제가 롤모델로 삼았던 미국 대형 교회 목사들을 볼 때, 제가 그 허상을 좇아 왔어요. 목표가 잘못 설정됐어요. 그런 점에서 실패에요. 그 사람들이 하는 제자훈련도 해 보고 선교도 열심히 하고, 속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모르고 여기까지 왔어요. 다음 세대는 속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20대 총선 전야입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와 한국정치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국가조찬기도회와 같은 모임이 존재했지만 대체로 ‘정교분리’라는 원칙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기독교 정당 운동의 바람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동성애, 할랄(이슬람)과 같은 중대한 이슈들 앞에서 이제는 직접적인 반대 입법이 시급하며 이 일을 위해서 기독교 정당 의원이 국회로 입성해야 하므로 정당투표와 비례대표가 중요하다는 구체적인 전략과 대안까지 제시하는 단계입니다. 물론 기독교 정당의 유래가 한국정치사에 없지는 않습니다. 1945년 해방 후 한경직 목사 등이 주도한 기독교사회민주당, 장로교와 감리교 목사들이 함께 주도한 기독교자유당 등이 있었습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지난 총선과 달리 이번에는 어떻게 반응하고 호응할지 교계 안팎의 귀추(歸趨)가 주목됩니다. 그러나 이번 기독교 정당 운동을 조금 다른 각도로 한국교회 제자훈련의 일종의 파산선고라고 부르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평생 소속정당의 압력과 압력단체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도 폐지에 헌신한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 같은 크리스챤 국회의원이 우리에게는 왜 없는 것입니까? 핍박과 환란 속에서 주를 신뢰하고 사랑했던 한국교회는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19대 국회의원 1/3 이상이 개신교인(전체의 37.1%)이라는 통계가 이를 방증(傍證)합니다. 천주교인을 합치면 국회의원 2/3가 기독교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중에는 심도 있는 제자훈련을 받은 이들도 여럿일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훈련과 달리, 그 동안의 한국교회 제자훈련은 정녕 실패했다는 얘기입니까?
    • 오피니언
    • 칼럼
    2016-04-07
  • [성서연구] 누가 왕이 될 것인가(사사기 9장 7-21절)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사사들이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활약했던 인물들로서 세습권력자가 아니었습니다. 사사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왕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본문은 이처럼 왕이 없던 사사시대에 왕이 되고자 했던 인물과 그를 추종했던 어리석은 사람들에 관한 비유입니다. 비유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기드온은 사사로서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기드온은 무려 칠십 명에 이르는 아들을 두었고, 이 외에도 세겜의 한 첩을 통해 아비멜렉이란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기드온이 죽은 후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형제들을 학살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이 비유는 그 때 간신히 목숨을 건진 말째 요담이 선포한 것입니다. 나무들이 왕이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감람나무에게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감람나무는 기름을 두고 갈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포기할 수 없어 거절했고, 포도나무는 새 술을 포기할 수 없어 포기했습니다. 나무들은 할 수 없이 가시나무에게 요청했고, 가시나무는 ‘내 그늘에 피하라’고 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불이 나와 사를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왕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합니다. 왕이 되기를 거절한 감람, 무화과, 포도나무는 기드온과 그의 선한 아들들을 가리킵니다. 본래 기드온은 왕이 되어 다스려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오직 여호와께서 통치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참조, 8:22-23). 반면 아비멜렉은 가시나무와 같이 폭력적 방법으로 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요담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이 다 함께 망하게 될 것이라고 저주했고, 그 저주는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참고, 9:56-57) 우리는 이 비유에서 두 가지 종류의 악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가시나무의 악입니다. 가시나무는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왕이 되는 게 무엇일까요? 감람, 무화과, 포도나무가 왕이 되기를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라고 합니다. 왕이 되려는 것은 뿌리가 뽑혀 요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는 땅에 박혀 자라야 가치 있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열매는 그 나무에 주어진 본래적 사명입니다. 그러나 왕의 명예를 추구하는 것은 본래적 사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가시나무는 아무런 열매가 없는 쓸모없는 나무였습니다. 그런 나무이기에 왕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자기 삶에 충실하고, 자기 열매를 하나님 앞에 맺는 사람은 헛된 명예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왕이 되는 것보다 열매 맺기를 좋아합니다. 두 번 째 악은 나무들의 악입니다. 나무는 왕이 필요 없습니다. 뿌리만 땅에 내리고 있으면 하나님이 자라게 하십니다. ‘하나님 외에 왕이 필요 없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전통적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무들이 왕을 구하듯, 그들은 쓸데없는 왕을 세운 것입니다. 왕들이 이스라엘을 행복하게 했습니까? 왕정 역사를 보면 왕들 때문에 나라 전체가 고통을 받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는 하나님 외에 어떤 왕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유대 군중들은 예수님 대신 가이사를 왕으로 모셨습니다(참고, 요 19:14-15). 그러나 우리의 왕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되든, 우리의 통치자는 하나님뿐임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난국에 우리 스스로 왕이 되려는 허망한 꿈을 버립시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 우리만의 열매를 충실히 맺읍시다. 아울러 어떤 사람을 우리나라와 인생의 왕으로 추대하려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왕으로 바라봅시다. 총선을 앞둔 우리가 투표할 지도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4-07
  • [교회법률상식] 만 70세 전 원로목사 총회 총대, 운영이사장 될 수 있다(2)
    2. 이사장 직무대행을 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그런데 본 기사 내용에 “하지만 노회 회원권이면서 조직교회 위임목사가 아니라 미조직교회 임시목사라는 이유로 총회 총대가 될 수 없다는 총회 결의(제87회)가 있다. 정년 전 은퇴한 원로목사는 노회 회원권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총회 총대가 될 수 있으므로 운영이사장 직무대행을 맡을 수 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는 논리는 교단 헌법을 짓밟고 하위 법을 우선하는 역행으로서 오히려 교단을 혼란케 하는 위헌적 주장이다. 교단 헌법이 보장한 노회의 정회원인 “만 70세 이전의 원로목사”에 대하여 “운영이사장 직무대행을 맡을 수 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라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이런 법리는 밭갈이하는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그 이유로써 기사내용을 분석해 보면 제87회 총회가 결의한 “전북 노회장 유성종 씨가 헌의한 미조직교회 목사(임시목사)가 노회장과 총회 총대가 될 수 있는지를 질의하는 건은 법(노회장과 총회총대가 될 수 없다)대로 하기로 가결하다.(제87회 총회 촬요 및 요람 p.53)”의 결의를 준거하여 엉뚱하게 “정년 전 은퇴한 원로목사가 총회 총대와 운영이사장 직무대행을 맡을 수 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는 논리는 하위 법을 내세우면서(세상법원과 같이) 상위법인 교단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법을 박탈하는 논거이기 때문이다. 또한 “운영이사회 규칙 제4조에 운영이사회 구성요건에 21당회 이상의 노회에서 파송한 이사로 구성한다. 원로목사는 운영이사로 파송할 수 없으며 이사 자격이 상실된다.”는 잘못된 규칙을 준거한 것 역시도 규칙 내용에 규칙으로서의 미비점은 차치하더라도 하위 법을 내세우면서(현행 세상법원의 법리를 따르면서) 상위법인 교단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원로목사의 기본권인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논거이기 때문이다. 3. 상위법 우선의 원칙 장로회정치는 “총회의 규칙과 결의는 헌법을 우선하지 못하고 노회의 규칙과 결의는 총회의 규칙과 결의를 우선하지 못하고 당회의 규칙과 결의는 노회의 규칙과 결의를 우선하지 못하고 동류 치리회의 결의는 동류 치리회의 규칙에 우선하지 못한다.”는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의하여 교회와 치리회의 행정을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기사 내용은 총회의 결의와 운영이사회의 규칙을 빙자하여 상위법인 교단 헌법보다 하위 법을 우선하면서(정교 분리의 원칙에 어긋난 세상법원의 법리를 따르면서) 교단헌법을 짓밟고 장로교회의 헌정질서를 어지럽히는 괴변으로 정년 전 원로목사의 기본 회원권인 피선거권을 박탈하려 들고 있다. 부언컨대 제87회 총회의 결의는 수치스러운 결의이다. 왜냐하면 ① 교단헌법에 상충되는 결의요, ② “미조직교회 목사(임시목사)”라는 문장은 미조직교회 목사와 임시목사를 분간하지도 못하는 무지의 소치요 ③ “법대로 하기로”의 괄호 안의 설명으로 “노회장과 총회총대가 될 수 없다.”고 함은 법을 잘못 설명한 총회의 씻을 수 없는 수치요, ④ 노회는 질의의 대상도 되지 않는 법리를 질의하였고, 총회는 “법대로 하기로”라는 결의를 하면서 교단헌법은 임시목사가 정회원이므로 “노회장과 총회총대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회장과 총회총대가 될 수 없다”고 답하였으니 질의한 노회도, 답변한 총회 역시도 법리해석에 있어서 수준미달의 수치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노회는 이런 수치스러운 질의를 해서도 안 되고 총회는 이런 수치스런 질의에 대하여는 질의의 대상이 아니므로 반려하거나 “노회장과 총회총대가 될 수 있다”고 답해야 한다. 임시목사는 노회의 회원권에 있어서 위임목사와 동등하므로 투표만 받으면 노회장과 총회총대는 물론 총회장도 될 수 있는 것이 현행 교단헌법이 규정한 권리인 것을 총회는 아는가 모르는가? 또한 기사 내용 중 운영이사회 규칙 제4조와 관련하여 “원로목사는 운영이사로 파송할 수 없으며 이사 자격이 상실된다.”는 문장에 “정년 전”이라는 단어가 없고 단순하게 원로목사라고만 한 것을 정년 전 원로목사까지 포함하여 피선거권이 없는 것처럼 호도하였다. “정년 전 원로목사”와 단순하게 “원로목사”라는 용어는 그 신분이 엄연히 다르다. 보편적으로 “원로목사”는 정년이 되어 은퇴하면서 원로목사로 추대된 자를 칭하고 “정년 전 원로목사”는 노회의 정회원으로서 피선거권을 구비한 노회원이다. 4. 결론 거두절미하고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의하여 치리회가 상위법인 헌법에 상충되는 규칙이나 결의는 할 수 없고, 만일 헌법에 상충되는 규칙을 정하거나 결의를 했다면 그 규칙과 결의는 시행해서도 안 되고 그 규칙과 결의는 폐기처분해야함이 법리이다. 따라서 노회의 정회원에 속한 정년 전 원로목사로서 운영이사장 직무대행인 “송춘현 목사가 운영이사회 소집권을 갖고 있으며 송춘현 목사가 소집하지 않는 운영이사회의 소집은 위법이다.”라는 주장은 교단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정당한 법리이자 논리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4-07
  • [성공칼럼] 깨끗한 그릇 만들기(2)
    깨끗한 그릇을 만든다는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 첫째는 그릇이 무엇인가이며 둘째는 그 그릇에 담겨있는 더러운 것은 무엇인지이며 셋째는 깨끗해진 그릇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릇이란 본래의 나를 말하며 ‘나’라는 그릇에 담겨 있는 더러운 것은 자기사랑과 세상 사랑이며, 깨끗해진 그릇에 담겨야 할 것은 주님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사랑과 세상 사랑을 제거하지 않고 본래의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어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으며 그릇 속에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데 어찌 그 그릇에 생명을 담을 수 있겠는가? 그릇이라고 하는 나는 ‘영’이라고도 한다. 사람의 영이 진짜 사람이며 육체는 이 영을 싸고 있는 덮개이다. 영이 육체를 떠나면 육체의 생명도 끝나버리는 것이다. 이 본래의 내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버리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성경에 ‘십자가에 육체와 정과 욕심을 못 박는다’라는 말씀처럼 세상에 태어나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 즉 눈에 보이는 것들, 태어나면서 생긴 자아, 명칭, 신분, 소유 등 모든 것을 버릴 때 본래의 나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나를 만나는 그 순간은 자유와 독립의 순간이며 내가 사랑이며 기쁨과 환희인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머니 뱃속에서 한 번 태어나고 그 다음 내가 나를 낳는 순간이 이 때인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을 경험했다고 내 영이 생명 있는 산 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영은 생명이 아니라 생명을 담는 그릇인 것이다. 이 그릇에 생명이 담겨야 드디어 생명이 되는 것이다. 내 영이 생명을 담는 깨끗한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나를 더럽게 하는 자기사랑과 세상 사랑을 제거해야 한다. 자기사랑이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가 근원이며 자신의 목적이 가장 중요하고 자신이 가장 대단하다 생각하며 자기를 높이기 위해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누군가 나를 무시하면 발끈하며 누군가 나보다 더 뛰어나면 샘을 낸다. 자기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사랑이 아니며 주님사랑과는 반대이며 실제로는 악이다. 그리고 세상사랑은 자기사랑의 짝으로 자기를 높이기 위해 세상의 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의 부가 없으면 ‘자기’의 존재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세상의 부가 있어야 하며 부가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의 가치는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온갖 거짓과 술수와 지배욕과 악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사랑과 세상사랑은 모든 거짓과 악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깨끗한 그릇이 된다는 것은 삶의 방향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만약 그 반대가 되면 예를 들어, 돈을 바라는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먹을 것을 주고 칭찬을 한다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분명 깨끗한 모습이지만 그 속은 상대방을 속이고 이용하는 것이기에 더러운 것이다. 그리고 점치는 사람, 우상숭배자가 악하고 어리석은 이유는 생명이 없는 대상을 믿는 것이지만 그 사람의 목표가 자기사랑과 세상 사랑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내 원함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사랑이 목적이 되어서 주님사랑이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 깨끗한 그릇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안에 자기사랑과 세상 사랑을 제거했을 때 나는 깨끗한 그릇이 된다. 자기사랑과 세상 사랑을 제거하지 않고 그 방법도 모르면서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지저분한 상태로 주님과 결합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사랑과 주님사랑은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깨끗한 자신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4-07
  • [은혜의 말씀]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요11:1~4)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도다. 오늘 말씀에 특별한 단어들이 나옵니다. 사랑하시는 자가 왜 병이 걸릴까? 사랑하는 자가 왜 죽을병이 생길까?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는데 무엇이 필요 할까요? 저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3가지 일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사람이 살아갈 때 필요, 충분, 완전한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하실 때 첫째 하늘 문이 열립니다. 둘째 성령이 임하십니다. 셋째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데 저는 이 세 가지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어주시고 각양 좋은 은사와 가장 좋은 선물을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에 사람이 애쓰고 노력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앞길을 열어주셔야 되고 자녀들이 노력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앞길을 형통하게 열어주셔야 되고 하나님께서 며느리의 태를 열어주셔야 되고 교회는 하나님께서 전도의 문을 열어주실 때 교회가 부흥이 되는 겁니다. 둘째는, 성령이 임하셔야 됩니다. 힘으로 능으로 깡으로 돈으로 안 되는 세상입니다. 성령님만이 우리 마음을 감화 감동 하십니다. 셋째는, 사랑을 받을 때 모든 것이 되어 지는데 그래서 저는 사람을 바라볼 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앞길을 열어주는 사람, 하나님께서 특별히 성령으로 감동하시고 성령님이 이끌어 주는 사람 또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1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본래 마르다와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애시 당초 사랑을 받은 가정이 이 가정, 신약성경에 예수님이 가장 심방을 많이 간,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했던 가정이 이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다루시는 겁니다. 11장 4절에 가서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을 위함이요. 저는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마다 이 일은 망할 일은 아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늘 기억해야 됩니다. 사랑하는 자가 병들고 사랑하는 자가 심각한 문제가 생기지만 그것은 오픈전이예요! 하나님의 모든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기 때문에 한판에 쓰러지면 안됩니다. 성도들이 살아갈 때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그저 성실할 따름이지만, 기도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께 물어보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 대신 전쟁을 선포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불구덩이에서 우리를 끄집어내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지금 현실은 피투성이가 되고 극심한 고통에 있지만 현재에 당하는 고통은 장차 받을 영광과 장차 비교할 수 없도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별꼴을 다 당하지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도 별별 일을 다 당하지만 반드시 붙드실 것입니다. 실패할 수 없는 구원이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여정 이 길 끝에서 반드시 주님 보좌 우편에 여러분들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 자리를 바라보고 나가는 겁니다. 지금은 어떤 자리 병든 자리 무서운 자리 많은 그런 일들이 있지만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포기하지 말라 그 최후승리 얻어서 마지막 주님 보좌우편에 주와 함께 앉아서 성문에 높이 앉게 되기까지 여러분 남편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세요! 여러분 자녀를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세요! 높은 자리로 예수님 보좌 우편으로 반드시 인도하실 것입니다.이해할 수 없는 현실 가운데 사랑하는 자가 병들고 사랑 받은 자가 망하고 전문가가 실패하고 큰소리치던 사람이 그렇게 훌륭한 분들이 쓰러지는 이 시대에 주의 길을 끝까지 감당해서 마침내 천국잔치에 초청받고 주님 보좌우편에 어엿이 서는 높은 성문에 앉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4-07
  • [성경인물] 4.인정이 많은 사람 안드레
    안드레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세례요한의 제자로서 활동하였습니다. 그의 직업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는 어부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세례요한으로부터 예수님이 모든 사람이 오래도록 기다리던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분을 쫓아다녔습니다. 그의 성실성과 결단을 높이 평가하신 예수님은 안드레를 자신의 제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마 12:49-50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의 형 베드로를 주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형제는 영광스럽게도 주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두 명이나 포함되었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의 동생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혈기가 왕성하고 침착하지 못한 반면에 안드레는 인정이 많고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없이 주님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으뜸 되기를 좋아했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는 전혀 다른 성품을 지녔습니다. 요 1:41-42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예수님께서 하루는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알아본 큰 무리가 표적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안드레는 군중 속에 들어가서 먹을 것을 가지고 온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리하여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온 소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그 소년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안드레의 말 속에서 그가 인정이 많은 사람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가 각박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인정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인정이 많은 안드레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성도들은 이 사회를 향해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전해 주어 삭막해져 가는 이 사회에 훈훈한 바람을 불어 넣어야 합니다. 안드레는 떡과 고기를 가진 소년을 예수께 소개합니다.요6:8-9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은 사람을 대할 때에 강퍅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굳어져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자비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기주의의 풍조에 매몰되어 이웃의 삶에 무관심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악이 관영하고 어둠의 세력이 득세하는 현장에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삶을 살아 잘못된 환경들을 변화시켜야 하겠습니다. 신 15:9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웠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가진 것 중에 지극히 작은 부분을 나누어 주는 것조차 아까워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운다고 하지만 적은 것을 형식적으로 베푸는 데 그칩니다. 이처럼 인색한 자들이 베푸는 자선은 외식이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 것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넉넉히 베풀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누구를 보고 본받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일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때문에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배우고 그분만을 본받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끊임없이 희생과 헌신으로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받을 때 우리는 인정이 많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안드레처럼 인정이 많은 사람들이 되도록 예수그리스도를 닮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4-07
  • [가정칼럼] 미소-일곱 색 행복 무지개
    “미소는 한여름의 소낙비다. 짜증나는 마음을 시원하게 날려보내니까.”“미소는 무지개다. 사람마다 다른 색깔의 미소를 가졌지만 한 데 모으면 조화를 이뤄 더 아름다우니까”“미소는 진공청소기다.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깨끗하게 만드니까”“미소는 아름다움의 압축파일이다. 사랑 ? 존경 ? 반가움 ? 그리움 ? 추억이 모두 담겨 있으니까”“미소는 요리다. 정성들인 만큼 제 맛을 내며 감동을 전해주니까”“미소는 바로 ‘나’자신이다. 언제나 사람들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으니까”밝은 미소를 나누는 미소사절단원들이 미소에 대한 생각을 담아낸 그림언어들이다. 일찍이 네일 카네기는 미소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이것은 별로 소비되는 것은 없으나 건설하는 것은 많으며, 이것은 주는 사람에게는 해롭지 않으나 받는 사람에게는 넘치고, 이것은 짧은 인생으로부터 생겨나나 그 기억은 길이 남으며, 이것이 없이 참으로 부자가 된 사람도 없으며, 이것을 가지고 정말 가난한 사람도 없다.이것은 가정에 행복을 더하며 사업에 호의를 찾게 하며!, 친구 사이를 더욱 가깝게 하며, 이것은 피곤한자에게 휴식이 되고, 우는 자에게 위로가 되고, 인간의 모든 독을 제거하는 해독제이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살수도 없고, 꿀 수도 없고, 도둑질할 수도 없는 것이다.“미소야말로 진정한 경쟁력이 아닐까 싶다. 요즈음 들어 부쩍 내 얼굴을 살피게 된다. 늘어나는 주름살이나 피어나는 주근깨 대문이 아니다. 표정을 보고 싶어서다. 나의 얼굴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져 있을까? ‘소망’ ‘깊이’ ‘평안’ ‘행복’......어려서 나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말없이 가만있으면 “화가 났느냐?” 또는 “중국 00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얼굴은 더 굳어져 갔다. 그러다가 마음마저 잃어갔다. 더 늦어버리기 전에 표정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요즈음 열심히 연습하는 것이 있다. 거울 앞에서 미소를 지어보는 일이다. 사진을 찍을 대 사람들은 미소를 짓기 위해 “김치” “치-즈"를 외친다. 그런 피눈물(?) 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표정은 안 만들어진다. 핵심은 대협골근과 소근, 구각거근을 훈련시키는데 있다. 따라서 제일 좋은 해답은 주를 가까이 하는 일이다. ! 주를 열심히 사모해야만 미소가 나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외친다. “위-스-키”그렇게 열심히 미소 연습을 했더니 정말 표정이 달라진다. 하나님이 내게 속삭여 온다. 하루가 즐거워진다. 내가 미소짓고 웃음 지었더니 세상이 따라 웃기 시작한다. 나는 믿는다.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면 마음속의 감정도 침묵한다”는 것을 오늘도 미소연습으로 행복 세상을 열어본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4-07
  • [함께 생각해 봅시다] 4.13총선 유감(有感)
    후보에게 발언기회를 주면 안되고 그를 교회 앞에 소개하는 것도 안돼 4.13총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금번 선거를 앞두고 몇가지 생각되는 것을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기독교정당의 난립은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기독교정당은 기독자유당, 기독민주당, 진리대한당 등 3개 당이다. 이들은 모두 이번 4.13총선에서 승리하여 반드시 원내 진입에 성공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정당을 표방하는 여러 당의 출현은 한국교회뿐아니라 국민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기독교를 대표할 수 있고 국민에게 인정받는 훌륭한 인물이 과연 몇이나 있느냐하는 지적도 일고 있다. 무엇보다도 하나되지 못한 기독교정당의 난립으로 인해 원내 진입이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제19대 총선에서 기독교정당들이 단일화를 통해 한 목소리를 내면서 총력을 경주했지만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 하나된 힘으로도 뜻을 이루지못했는데 3개 정당의 난립으로 어찌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인들도 기독교 정당이 셋이나 되는 것을 보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하면서 등을 돌릴런지도 모른다. 다음 기독교인들은 선거 후보 중에 국회에 진입해서는 안되는 후보가 누구인지를 살펴 당선돼서는 안되는 후보에게는 표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예를 들면 종북좌파에게는 물론이고 동성애를 옹호, 조장하는 후보에게는 표를 줄수 없다. 국민일보는 4월 4일자 신문을 통해 낙선대상자들을 발표했다. 말하자면 당선돼선안될 사람들이다. 거기보면 동성애를 차별금지 사유에 포함시킨 차별금지법안 대표발언자들의 명단, 군대내 동성애를 허용하는 군형법 제92조 개정안 발의자들의 명단, 동성애를 옹호, 조장하는 국가인권위원회 법의 개정에 반대하는 자들의 명단, 동성애 옹호활동자의 명단 등이 밝혀져 있다. 다음, 선거후보자를 교회 앞에 소개하고 심지어는 발언을 하게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한데 그게 허용될 수 있는 일인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선거후보자들의 교회방문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결과발표에 따르면 10명 중 7명이 발언기회를 주는 것은 부적절하다 했고 응답자의 절반은 발언 기회를 주는 것은 물론, 소개만하는 것도 적절치 않다고 응답했다. 실제로 교회 앞에 소개하는 것은 안되고 “아무개 후보가 이 예배에 참석했다”는 광고도 하면 안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4-07
  • [시사칼럼] 레버넌트(Revanant)
    2016년 2월 28일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마침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Leonardo DiCaprio)가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마침내’란 말을 쓴 이유는, 그 동안 그가 이 상(賞)의 유력한 후보가 된 것만 해도 다섯 차례였기 때문입니다. 디카프리오는 아직 20대 초반(1974년 생)에 불과하던 1997년 영화 타이타닉(Titanic)으로 일약 신드롬을 일으키며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이후 그는 이전의 명성과 아이돌 이미지를 탈피하고 연기파 배우의 반열에 오르고자 나름 사투(死鬪)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라는 작품 이름 그대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기 나흘 전, 한국 영화 한 편이 국내에서 개봉되었습니다(2월 24일). 「귀향(歸鄕)」입니다. 일본군 강제위안부로 잡혀간 소녀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그러나 제작비 부족과 투자자들의 외면으로 난산(難産)을 거듭하다가 수만 명이 넘는 국민들의 후원과 뜻있는 분들의 재능 기부로 14년 만에 ‘마침내’ 세상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영화는 여전히 험로(險路)를 걸었습니다. 상영관이 확보되지 않아 힘들게 태어난 작품이 빛을 보지도 못하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때 온라인(on-line) 청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원하는 관객들의 요청으로 상영관이 확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라져가던 「귀향」이 제목 그대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개봉한지 열흘 만에 관객 100만을 돌파하고, 현재까지 누적 관객이 300만 명을 훌쩍 상회하는 기적을 배태(胚胎)한 채로 말입니다. 「귀향」이 돌아오고 있는 동안, 「동주」도 함께 돌아왔습니다.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0대 꽃다운 나이에(1917년 생) 급사(急死)한 윤동주를 기리며 만든 영화입니다. 애당초 흥행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 제작비도 일반 상업 영화의 1/10 수준에도 못 미치는 저예산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주가 사망한 바로 다음 날인 2월 17일 개봉한 「동주」는 비록 「귀향」처럼 잰걸음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시구(詩句)처럼 어느새 100만이 넘는 사람들 곁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 나의 길 새로운 길 //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 아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 오늘도... / 내일도... // 내를 건너서 숲으로 / 고개를 건너서 마을로”(윤동주, 〈새로운 길〉, 1938). 마치 전 날 죽은 동주가 바로 그 다음 날 새로운 길을 걸어 돌아온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가만 보니 다시 돌아온 존재들은 예전 모습 그대로 오지만은 않았습니다. 「귀향」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피해자들을 결코 잊지 않는 무언(無言)의 국민들 존재를 새삼 일깨워 주었습니다. 「동주」를 통해 우리는 시대를 향한 순결한 양심이 조용히 포효(咆哮)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죽음에서 돌아온 자」 디카프리오(DiCaprio)도 수상 소감을 통해 뜻밖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기후 변화는 현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아들딸을 위해, 탐욕의 정치로 소외된 약자들을 위해, 이제는 우리가 바뀌어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많은 할머니들이 실제로는 귀향하지 못했습니다. 윤동주는 시로, 영화로만 우리 가슴에 살아있습니다. 디카프리오는 환경운동가로 거듭났지만 부활은커녕 실제로는 죽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지금도 살아있는 실체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순간마다 끊임없이 만물을 갱생(更生)하고 계십니다(recapitulatio, Irenaeos).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a), 레버넌트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16-03-2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