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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 누가 불씨를 던지는가(마가복음 16장 9-10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전후에 예수님의 사람들의 분위기는 매우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본문 9절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일 때문에 비통에 잠겨 있었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일과 세 번이나 부인한 일들로 인해 깊은 자책에 빠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힘들게 한 것은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모인 곳의 문을 닫고(실제 의미는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요 20:19) 한 마디로 이들은 깊은 침체에 빠져 있었습니다. 침체된 상황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흥>입니다. 그들에게 절박한 것은 부흥이었습니다. 눈물을 닦고 일어설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는 말씀의 회복이 필요했습니다. 죽은 자들처럼 주저앉은 그들을 일으켜 세울 부흥의 불씨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침체의 상황은 오늘 우리의 처지와도 흡사합니다. 현재 우리도 침체되어 있습니다. 국민들은 정치에 대한 희망을 버렸습니다. <누가 해도 마찬가지>라고 자조 섞인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경제는 잘 나가던 산업들이 구조조정의 한파에 내몰리고 있으며, 모두의 입에서는 힘들다는 말들뿐입니다. 출산율 저하로 가만히 놓아두어도 수십 년 후에는 저절로 사라질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극도로 예민하여 <묻지 마 살인> 등의 범죄가 빈발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화가 난 사람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관용과 여유, 사랑과 용서 등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여기에 보태어 교회도 부끄러운 일들이 노정되며 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고, 전도의 문이 닫히고, 교세와 재정의 감소, 그리고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의기소침이라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부흥이 절박합니다. 문제는 <누가 이 침체된 현실에 부흥의 불씨를 던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 불씨를 던진 사람은 누구입니까? 수제자 베드로였나요? 사랑 받던 제자 요한이었나요? 아닙니다. 전혀 뜻밖의 인물인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모두가 슬퍼하며 울고 있을 때,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죽은 자처럼 있을 때, 홀로 흥분된 가슴을 안고 달려간 사람은 마리아뿐이었습니다. 그녀가 제자들에게 들려준 한 마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은 주저앉아 울던 제자들로 하여금 벌떡 일어서게 만들었습니다. 문을 닫고 숨어 있던 그 작은 다락방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게 부흥의 불씨였습니다. 부흥의 불씨를 던지는 것은 주인공 같은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연약한 여성으로서 제자도 아니었고, 한 때 일곱 귀신에 사로잡혔던 여인에 불과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감동이 가슴에 가득할 때, 침체된 상황에 불씨를 던지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부흥의 불씨를 던지는 사람은 예수님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 후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중심으로 움직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누가 중심인물인가를 물으면 대뜸 베드로와 요한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전에 불씨를 던진 마리아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베드로 같은 인물이 나타나길 기다리지 말고 우리 자신이 예수님으로 충만하여 불씨를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작지만 침체된 우리 주변을 깨우는 불씨를 던질 수 있길 원합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의 마리아가 되어 부흥의 물꼬를 트는 사명자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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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6
  • [소강석 칼럼] 사상전을 잘해야 영전에 승리한다
    영국교회의 몰락 원인을 아는가? 영국은 전 국민이 크리스천이었으며 세계의 부흥운동과 선교운동을 주도한 나라였다. 그래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영국에도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고 교회 생태계를 파괴하려고 하는 반기독교적인 정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반기독교적인 정서는 반기독교적인 문화와 제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런 문화와 제도가 입법화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교회는 이런 시대적 트렌드를 읽지 못했다. 교회들이 함께 연합하여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반기독교적인 사상과 정서를 막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영국교회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노터치하겠습니다.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정치인들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개교회의 목양을 하는데만 집중을 하겠습니다.”그러나 그렇게 생각을 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35년, 40년 후에는 영국교회가 완전히 박살나 버렸다. 전 국민이 기독교인이나 다름없던 나라가 지금은 기독교 인구가 겨우 2% 밖에 안 되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반대로 이슬람은 8% 가까이 성장하였다. 게다가 지금 얼마나 테러문제로 몸살을 앓고 두려워 떨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은 영국교회가 사상전에서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특별히 사회주의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빌헬름 라이히가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드 심리학을 아주 교묘하게 접목하여 네오마르크시즘(Neo Marxism)을 만들었다. 그는 성정치를 주장하면서 가정, 학교, 종교로부터 억압받고 있는 성적 욕망을 해방시켰을 때 새로운 마르크시즘의 세상이 온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동성애를 앞세워서 가정의 고정관념부터 깨는 운동을 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어느 진보 정당에 속해 있는 국회의원이 동성애나 차별금지법을 입법화하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반기독교적 사상의 흐름이 밀려오며 한국교회의 생태계를 급속하게 파괴해가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여전히 영국교회처럼 사상전을 준비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파도만 보면서 바람은 보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이 왜 불어오는가, 그런 파도를 일으키는 원인인 바람을 보지 못했단 말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가 깨어 일어나 반기독교적 정서와 세력을 직시하고 사상전을 잘해야 한다. 만약에 한국교회도 영국교회처럼 사상전에 실패하여 동성애와 차별금지법이 통과되고 이슬람의 샤리아법이 통과되면 2-30년 내로 몰락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여전히 사상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무관심하다. 오히려 개교회 목회와 개교단 위주의 사역에만 머물러 있었다. 아니, 한국교회는 다툼과 분열의 블랙홀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개교회도 계속 서로 내부 파워게임을 하며 싸우고 교계도 교권 싸움에 몸살을 앓고 있다. 사상전에서 실패하면 영전에서도 패배하게 된다. 그 결과 교회 생태계는 무참히 파괴되어버리고 교회들은 순식간에 사멸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우리가 깨어서 사상전을 잘해야 한다. 그럴 때 시대의 흐름과 바람도 보이고 영전에서도 승리하며 교회 생태계를 보호할 수 있다. 한국교회여, 깨어나 반기독교적 정서와 세력에 맞서 사상전을 준비하라. 영전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일어서자. 그래야 한국교회가 다시 교회 전성기, 크리스텐덤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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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6
  • [함께 생각해 봅시다] 한국도 일본처럼 할 수 없을까?
    한국은 버스가 손님을 기다리고 일본은 손님이 버스를 기다리고 필자는 지난 5월 하순부터 6월 초순까지 일본 선교지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일본에 갈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금번엔 더 절실히 느낀 것이 몇 가지 있다. 모두 길거리에서 느낀 것이다. 첫째, 일본에서는 길에서 불법주차 차량을 한대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대로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주택가 차선이 없는 도로에서도 불법주차는 단 한대로 없었다. 한국과는 대조적이었다. 우리는 자기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어떤 이는 차를 타고 어딜 가면서 ‘주차금지’라는 표시를 해놓고 가기도 한다. 일본인들은 자기집 앞에도 도로에는 절대 차를 세워두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일본에서는 어딜 가든지 통행에 지장을 받는 일이 전혀 없다. 일본은 어째서 그런가. 그 나라는 주택을 건축할 때에 주차 공간이 없으면 건축허가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길가에 세워두는 불법주차가 있을 리가 없다. 중앙선이 없는 길에서도 불법주차가 한대도 없기 때문에 통행도 쉽게 할 수 있고 주행에 방해 받는 일이 전혀 없다. 출퇴근 시간에는 다소 정체가 있을 뿐이다. 일본에는 불법주차가 없는 또 한가지 이유는 차량을 등록할 때에 주차공간이 있어야만 등록이 되기 때문이다. 또 일본에는 차량이 그리 많아도 경적을 울리는 차량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필자가 10일간이나 이곳 저곳 다녔지만 한번도 경적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한국과는 사뭇 달랐다. 특히 한국과 일본이 크게 다른 것은 한국은 버스가 관광객을 기다리는데 일본은 관광객이 버스를 기다린다. 한국은 차로를 점령한채 20분 혹은 30분 손님을 기다린다. 그러나 일본은 손님들이 약속시간 전에 와서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버스가 오면 즉시 타고(보통 90초 이내) 곧 떠난다. 특히 외국관광객이 많이 가는 면세점 앞에서는 출발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 손님이 있으면 버스가 일단 출발하여 주위를 돌아 15분 정도 뒤에 다시 그 자리에 와서 늦게 온 손님을 태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면세점 앞에서는 정해진 정차시간을 초과하면 가차없이 단속에 걸리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관광버스가 도로변에 불법정차하여 10분을 넘기면 경고도 없이 바로 1만2000엔(한화 약 130,700원)의 범칙금과 벌점 2점을 부과한다. 그러므로 버스가 절대 도로변에 장시간 정차할 수 없다. 차가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사람이 차를 기다리는 것과 뭐든 잘하는 것은 우리도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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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15
  • [목회자칼럼] 해외 한인 선교사 가족 수양회 인도 견문록見聞錄 (4)
    34년 만에 다시 찾아 본 내 젊은 날 유학생 시절의 서독 수도 Bonn!어찌 잊을 수 있으랴? 얼마나 다시 와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실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바라보면 이루어진다. 마음에 간절히 소원하면 응답 받는다」 이런 믿음이 있었다. 살아오면서,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는 소원하던 것이 응답받은 많은 간증들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자비로우시고 섬세하신 은혜가 그 때, 그 때 있었음을 우리는 깨달으면서 놀라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한다. 꼭 가보았으면 하고 소원을 가지면 놀랍게도 그 지역에서 〈말씀 전파〉 초청을 해 오는 기적을 많이 경험하고 있다. 나에게는 조금 특이한 철학이 있다. 단순한 구경이나 여행 목적으로 외국에 나가는 것을 사양하고 〈말씀(복음) 전파의 요청〉이 있을 경우에 한하여 외국을 방문한다는 철학이다. 이 신조는 절대 불변의 법칙은 아니고 그냥 지난 세월 하나님으로부터 과분한 사랑과 은혜를 받아왔으므로 조금이나마 내 나름대로 예의와 분수를 지켜보고 싶어서 마음으로 작정해 본 철학 이다. 실제로 시편 37:4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우리 부부가 머무는 숙소는 4층 구조의 작고 소박한 빌라인데 4층 한 층에 방 한 칸씩에 세 가구가 있다. 우리처럼 짧은 기간 머무는 여행객들이 주로 이용한다. 독일 사람들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편리하고 또한 청결함이 돋보이는 〈민박 숙소〉 이다.세계화 시대 국제적으로 관광객이 늘어나고 있는 우리나라에도 이런 형태의 저렴한 숙소가 많이 준비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서독의 수도였던 Bonn은 34년 전과 별로 달라져 보이지 않았다. 높은 건물이 별로 없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지막한 단독 주택들로 형성되어진 Bonn 시가지를 내 숙소(4층 빌라)에서도 잘 바라 볼 수 있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도로, 맑은 공기 그리고 하루 서너 차례 울려 퍼지는 교회 음악 종소리 역시 그대로였다. 유학생 시절, 하루 서너 번 정해진 시간이 되면 Bonn 시내의 모든 교회들에서 동시에 음악 종을 울려 주는데 나는 그 시간이 무척 좋았다. 유럽 교회의 종들은 우리나라처럼 종루에 한 개의 종이 댕그라니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개의 종이 함께 달려 있다. 그 여러개의 종들이 이리 저리 서로 부딪치면서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가 음악처럼 그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 음악 종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행복하였다.나는 번잡하고 요란해 보이는 첨단 문명의 도시 ? 예를 들면 뉴욕 ? 보다 이곳 Bonn처럼 아담하고 조용하고 낮은 주택(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는 도시를 좋아한다. 집집마다 크지 않지만 잘 가꾸고 있는 꽃밭이나 잔디밭이 있고 소박한 집들의 창문에는 어김없이 하이얀 색상의 커텐들이 드리워져 있다. 창틀에는 작은 화분들이 몇 개씩 놓여 있어서 집 주인보다 오히려 지나가는 이웃 주민들에게 기쁨과 미소를 선사한다. 이런 유럽풍의 도시가 내게는 편안하고 사랑스럽다.내가 공부하였던 Bonn 대학교 캠퍼스를 둘러보니 독일의 옛 궁전을 대학 본부 건물로 쓰고 있던 그때 그대로였다. 마치 34년 전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특유의 고색창연한 대학 본부 건물은 검소하고 수수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에 평안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면서도 세계 명문 대학으로서의 명성과 품격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이에 비하면 지금 우리나라의 대학 캠퍼스들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마치 다들 외관 경쟁을 하는지 더 넓은 부지, 더 크고 화려한 교사 건축에 여념이 없다. 학생들 개개인의 실력 향상이나 깊이 있는 연구 개발(Research & Development)을 위한 투자는 많이 뒤 떨어지고 있는 줄로 안다. 오늘 우리나라의 이러한 폐단은 멀쩡한 관공서 건물들을 불필요하게 철거, 증축, 신축하는 일이라든지 멀쩡한 도로들을 놓아 두고 그 옆에 기름진 농토들을 마구 훼손해가면서 새로운 도로들을 무분별하게 많이 건설하고 있는 것 등 마치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정부가 밀고 나가는 〈동남권 신공항 건설〉 문제만 해도 그러하다. 지금의 〈김해 공항〉을 좀 더 확장하여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공항 부지 선정 문제〉로 비화하여 “가덕도냐 밀양이냐?”를 놓고 영남지역은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다. 기존의 오랜 주거지역인 밀양에 광활한 〈신공항〉을 건설한다면 극심한 소음은 어떻게 할 것이며 우리나라처럼 제한된 국토에서 그 소중한 농토들이 대량 매몰되는 것과 비행기들이 고도를 낮춰 착륙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김해 쪽의 아름다운 산마루들이 대거 절단돼야 한다니 이런 무리수를 왜 밀고 나갈려고 할까?국제적인 물류의 환적 화물이 부산에 있고 세계적인 부산 신항만이 바로 가덕도에 위치하고 있다. 가덕도에 신공항을 건설하면 소음문제, 농지 대량훼손 문제, 자연환경 파괴문제, 항공기 이착륙 안전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 할 수 있다는 것은 전문가가 아닌 우리 보통 사람들의 시각과 판단으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우리 민족 특유의 조급성과 단견성은 〈교회당 건축〉에서도 쉽사리 발견 된다. 멀쩡한 교회당을 너무 간단히 철거해 버리고 과도한 예산으로 신축을 한다든지 교육관이나 부속 건물들을 마치 교회들끼리 경쟁하시다시피 너무 쉽게 너무 과도하게 건축하는 현상 역시 심히 우려할 부분이다. ‘보이지 않는’ 교회의 신령한 부분을 강화하고, 다음 세대를 위하여 사람 자체를 양육 훈련시키고, 그리스도교의 영성과 품격과 신뢰도를 높이는 일에 우리의 기도와 관심과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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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02
  • [시사칼럼] 한강 그리고 광주
    여류소설가 한강(漢江, 1970~)이 영국의 맨부커상(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을 수상했습니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권 최초라 하니 축하할만한 일입니다. 언론은 앞 다투어 ‘낭보(朗報)’를 보도하기에 바빴고, 수상작인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 뿐만 아니라 한강의 기존 작품은 물론(『소년이 온다』) 신작까지도(『흰』)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합니다. 분명히 기쁜 소식인데, 동시에 답답한 마음이 있습니다. 마치 목욕탕에서 맛있게 먹었던 맥반석 구운 계란이 어딘가에 막혀서 내려가지 않는 그런 먹먹함 말입니다. ‘아시아 작가 최초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 수상!’ 일반 언론이나 인터넷 기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문구입니다. 여기서 동전의 양면 같은 두 가지 문제점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최초집착증’입니다. ‘세계 3대 문학상’ 운운하는 것도 결국은 마찬가지 증세라고 봅니다. 도대체 누가 언제부터 노벨, 프랑스 콩쿠르(concours), 맨부커(Man Booker)를 세계 3대 문학상으로 제정했나요? 그렇다면 스페인어로 써진 작품에 주어지는 세르반테스상(Premio Miguel de Cervantes)은 왜 이들보다 권위가 떨어집니까? 30~50대의 비교적 젊은 작가에게 주어지는 맨부커상이 화제성이나 파급효과 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퓰리처상(Pulitzer Prize)을 배제하고 영미권을 대표하는 문학상이 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세상은 이러한 일종의 쇼비니즘이나 공공적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다 할지라도, 외모보다는 중심을(삼상 16:7) 겉사람보다는 속사람을(고후 4:16) 더 소중히 여기는 성경적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이슈가 된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는 제목을 보고 으레 떠올릴 법한 ‘다이어트’나 ‘환경보호’와 관련된 작품이 아닙니다. 여주인공은 어느 날 꿈을 꾸고 갑자기 냉장고 안의 모든 육류를 다 치우기 시작합니다. 20년 전의 아픈 ‘기억’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기억’이 단순히 소설 속에 나타난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합니다. 이 작품을 두고 ‘미와 공포의 섬뜩함’이라는 표현을 썼던 심사위원장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출세작인 『소년이 온다』에서부터 한강의 기억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맨부커 측이 하필 수상 발표를 5월 17일에 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중은 맨부커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에만 환호하고, 정작 어떤 소재와 문제의식이 세계인들의 관심과 동감을 이끌어내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후자(後者)가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한강은 1980년 광주를 둘러싼 이데올로기 논쟁에 가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와 체제 속에서 함몰될 수 없는 인간의 가치와 생명이 영특한 이 여류소설가가 장기(長技)로 다루고자 하는 주제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바에 따라 또한 같은 생각을 하는 집단을 찾아 생각을 공유하고 의견을 발출(發出)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에 대해서는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면서도, 막상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 교회가 많았습니다. 한강을 말하려면 광주를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한강을 말하면서 광주를 말하지 않는다는 건 한강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광주를 말하기 곤란한 처지와 상황이라면, 한강에 대해서도 침묵하는 것이 더 성경적인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분별력과 통찰력입니다. “시세를 알고(understand the times)”(대상 12:32)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분별하여 실천할 때(롬 12:1-2) 다윗과 바울의 시대처럼 교회는 다시 한 번 비상(飛翔)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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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02
  • [소강석 칼럼] 수치를 기억하라
    역사의 여정에는 부귀와 영화의 기록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남녀노소, 심지어는 금줄이 쳐져 있는 임산부의 집에까지 들어가 코와 귀를 베어갔다. 유성룡이 기록한 징비록에 의하면 '당시 갓난아기는 죽은 엄마의 젓꼭지를 빨며 울부짖었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거리를 방황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인조는 삼전도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큰절을 세 번하고 이마를 땅바닥에 아홉 번이나 피가 나도록 찧었다. 그리고 치욕적인 굴욕문서에 사인을 해야 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1956년에 삼전도비의 역사가 너무 수치스럽다고 흙으로 메워버리고 말았다. 훗날 다시 복원하였지만 말이다. 기억은 흙으로 덮는다고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유대민족은 철저하게 고난의 역사를 교육을 한다. 민족적 자존심을 최고로 짓밟았던 맛사다, 야드바셈, 통곡의 벽 등으로 수학여행을 시킨다. 그리고 지난날 자기 민족의 수치의 역사를 기억하며 이렇게 외친다. "아! 나는 유대인임을 자랑하노라. 아! 나는 유대인으로 살기를 원하노라." 또한 야드바셈 전시실 현판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망각은 포로상태로 이어진다. 그러나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민족의 수치와 고난의 역사 교육을 한다. 직접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남한산성과 삼전도비를 찾아가고,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울들목을 찾아가 민족의 정기를 심어준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역사 교육의 의미와 중요성을 잘 모르고 장난을 치다가도 우리 민족이 당한 수치와 고난의 역사를 이야기해 주면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는 아이들도 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과거 우리 역사의 고난과 수치를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해마다 6월이 되면 6.25전쟁 한국전참전용사 초청행사를 한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에게 역사의 시련과 아픔을 교육하고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심을 심어주기 위해서다.김훈은 소설 '남한산성'에서 '치욕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청 태종에 쫓겨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의 47일간의 수치와 비탄의 기록을 생생하게 그려 놓았다.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작가는 독자들의 망각된 기억을 수치의 역사현장 속으로 회귀시킨다. 그렇다. 우리는 수치를 기억해야 한다. 기억은 힘이다. 과거의 수치와 고난을 기억하는 자에게 힘이 있다. 우리 민족의 환희와 영광이 계속되려면 과거의 수치와 고난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일본이 자행했던 정신대 할머니들의 인권유린과 언어말살, 문화침탈 등의 만행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세계화 시대에 일본문화를 받아들이고 도요타나 렉서스와 같은 차를 타고 다니더라도 그것은 기억해야 한다. 과거를 용서하더라도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고난의 역사현장 방문과 역사교육을 강화시켜야 한다. 그럴 때 역사의 지평에서 개인의 인생도 힘이 있고 민족도 희망의 수레바퀴를 굴릴 수 있다. 기억하는 자에게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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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02
  • [성서연구] 영혼의 무게(다니엘 5장 22-31절)
    다니엘서의 신 바벨론 제국은 그 역사가 길지 못하였습니다. 주전 626년에 나보폴라살에 의해 세워진 후 539년에 멸망하였습니다. 그 중 전성기는 느부갓네살이 통치하던 605-562년 사이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의 아들이 아니라, 나보니두스의 아들입니다. 19세기의 고고학자들은 갈대아 우르의 달 신의 신전 기둥에서 <바벨론 왕 나 나보니두스는 내 주 당신께 죄를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의 장자 사랑하는 아들 벨사살의 마음속에 당신에 대한 경외심이 일어나길 기원합니다>란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나보니두스는 주전 555-539년의 재임 기간 중 마지막 10여 년을 아들로 하여금 위임통치하게 하였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벨사살을 폐하심으로 바벨론이 멸망하고 메디아와 페르시아에게 나라가 넘어간 것을 보여줍니다. 벨사살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달아보았을 때 함량미달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는 과거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탈취한 성전의 금은 그릇들로 술을 마시고 취해 있었는데, 거대한 손가락이 벽에 글씨를 쓰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아무도 그 글을 읽을 수 없었기에 다니엘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손가락이 쓴 글자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었고, 이는 하나님께서 벨사살을 저울에 달아보았을 때 함량미달이었고, 이제 벨사살의 나라가 끝나 다른 이에게 넘어간다는 뜻이었습니다. 왜 그는 하나님께 버려졌을까요? 첫째, 그가 하나님의 성전 기명으로 술을 마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과거에 자신들이 존경하는 느부갓네살이 하나님께 교만하다가 권좌를 잃었던 일을 알면서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느부갓네살은 하나님만이 진정한 주권자임을 깨달은 후에야 비로서 다시 권좌로 돌아왔습니다.(참고, 다니엘서 4장) 셋째로 때를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사건이 있을 때는 이미 바벨론의 거의 전 영토가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손에 넘어갔을 때입니다. 비상시국에 최후의 전투를 준비해야 할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바벨론성이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것을 믿고 여전히 방종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다니엘을 셋째 치리자의 자리에 앉히겠다고 말했는데, 자신의 권력이 그 날 밤이면 끝날 것을 여전히 모르는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결국 그 날 밤 벨사살은 죽었고, 바벨론 제국은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연합군에게 넘어갔습니다. 이에 비해 다니엘은 왕이 바뀌고 나라가 바뀌어도 여전히 건재하였습니다. 다니엘 6장 28절을 보면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는 다니엘은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볼 때 함량이 충분했던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당신의 저울에 달아보십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존재의 무게를 더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저울은 무거울수록 무게가 많이 나갑니다. 많이 먹고 많이 쥘수록 무게가 더 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울은 그 반대로 비울수록 무거워집니다. 욕망과 교만을 버리면 존재는 더 무거워집니다. 한경직목사님은 비우고 살아감으로써 무게감이 더했던 분입니다. 다 비웁시다. 그리고 그 자리를 하나님으로 채운다면 우리는 무게감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니엘처럼 형통하고 존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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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02
  • [교회법률상식] 경남동노회 서○○ 목사 외 3인 면직판결 확정(1)
    - 치리회의 재판 판결의 취소 및 변경은 상소하는 길밖에 없어- 총회 임원회의 면직 제명 정직, 무효 통지는 위헌적 범죄행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 임원회의 위헌적 사무행정의 흠결이동시에 같은 양상으로 발생한 동대전노회와 경남동노회가 소위 쌍둥이 사건으로서 도마 위에 올라 정치권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쌍둥이 사건 중 동대전노회의 사건은 한국기독신문 제772<2016.5.21.>와 크리스쳔포커스 참조). 1. 사건 발단의 법리적 사실 관계 먼저 총회 임원회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노회에 하달 지시한 공문을 살펴보자. (1) 첫 번째 하달한 공문에 대하여 “본부 제100-785호(2016.4.6.), 수신: 수신처 참조, 제목: 경남동노회 문제 실태 파악 관련 지시의 건, 내용: 총회 임원회는 귀 노회에서 양측에서 올린 문건을 검토하고 실태를 파악하기로 한바 실태 파악이 종료될 때까지 2016년 3월 21일 이후 처리된 행정처리 및 재판 진행 조사처리 임시노회를 중지하시기 바랍니다. 총회 실사 위원회의 지도와 실사에 불응할 시 그 책임은 불응하는 자에게 있으니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끝,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관인) 총회장 박무용, 경남동노회 실사위원장 김동관, 수신처: 박창복 목사, 박종희 목사”로 되어 있다. 이 문서는 치리회인 노회가 접수 처리해야할 문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총회가 경남동노회 사건에 대하여 실사 위원회를 설치하여 처리하도록 임원회에 맡긴 바가 없다. 그런데 권원 없는 임원회가 불법으로 위원회를 설치하였고 그 유령 위원회는 “총회 실사 위원회”라는 총회 명칭까지 도용하여 경남동노회 사건을 실사 운운하면서 노회에 “행정처리 및 재판 진행 조사처리 임시노회를 중지”하라는 등 당치도 않는 월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정치 제12장 제4조, 교회정치 해설 pp.60-68 참조). 즉 장로회 정치는 치리권 행사에서의 상회와 하회 관계에 있어서 “청원권과 허락권의 합의에 의한 정치이므로 청원권을 배제한 허락권(상회권)의 독주와 또한 허락권을 배제한 청원권(하회권)의 독주는 장로회 정치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물며 치리회도 아닌 임원회가 하회가 청원도 하지 아니한 노회를 실사하겠다고 하면서 유령 실사 위원회를 불법으로 설치하였고 소위 실사위원장은 총회와 총회장의 명의를 도용하여 일개 위원회가 치리회인 노회에 불법 공문을 발송하였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 뿐만 아니라 법적 근거도 없이 불법으로 설치된 유령 위원회가 치리회인 노회에 “2016년 3월 21일 이후 처리된 행정처리 및 재판 진행 조사처리 임시노회를 중지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공문을 하달한 것은 교회헌법을 짓밟는 행위요, 수신자를 박창복, 박종희등 개인으로 해놓고 지시와 지시내용은 노회로 하였으니 공문형식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 불법문서이다. (2) 두 번째 하달한 공문에 대하여 “본부 제100-788호(2016.4.7.) 수신: 박종희 목사님, 제목: 출석 요청 건, 일시: 2016년 4월 8일(금) 오전 7시, 장소: 창원 인터내셔널 호텔 커피숍, 참석대상: 양측 대표 3명(노회장, 서기 포함)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관인) 총회장 박무용 경남동노회 실사위원장 김동관”으로 되어 있다. 이런 문서를 어찌 총회가 하달한 문서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이유는 수신자가 개인으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상술한 바와 같이 하회의 청원이 없는 상회의 독주적 허락에 의한 지시문건이요, 총회 서기 란에는 엉뚱하게 권원 없는 실사위원장의 명의가 기재되어 있으니 이런 공문이 총회가 하달한 공문일 수는 없고 단지 사문서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총회가 노회에 하달할 수 있는 공문은 위원회 심사의 원칙에 의하여 총회 산하 모든 위원회와 상비부가 치리회인 노회에 공문을 하달할 수 없고 오직 총회의 결의사항을 시행하기 위하여 총회장과 서기의 명의로 서기가 날인한 것을 서기만 발송할 수 있다는 것을 총회 임원회는 아는가 모르는가? 뿐만 아니라 문서의 내용을 보면 정치적 이해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다급하고 중차대한 정치적인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그 내용인즉 문서의 시행일자는 2016.4.7.로 되어 있는데 회의 일시는 다음날인 2016년 4월 8일 오전 7시로 되어 있어 단 하루의 여유도 없이 공문을 송달한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회의 전날에 ① 실사 위원 김○관, 양○수 ② 이탈자 중 정통노회로부터 면직된 서○호, 박○복 ③ 총회장 ④ 언론에 수시로 보도된 바 있는 소위 총회의 실세라고 통하는 허○민 등 6명이 회의 장소로 예고된 인터내셔널 호텔 내 뷔페식당에 모여 식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경남동노회의 서기 성경선 목사가 총회장에게 “어떻게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습니까?”라고 항의를 하니까 “밥값 돌려주면 될 거 아니야”라고 하기에 다시 “밥값 돌려준다는 말은 잘못을 인정하는 거지요”라고 하니 “뭐, 잘못을 인정해?”라고 하는 웃지 못할 언쟁이 있었다는 얘기가 들리니 생각할수록 궁금증이 더해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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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02
  • [성공칼럼] 사람의 질(質)
    사람의 질이란 사람 속에 엄마나 많은 사랑과 선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어떤 사상과 신념이 있든, 부자이든, 가난하든 사랑과 선의 양에 따라 그 사람의 질이 결정되는 것이다. 성경에 솔로몬왕이 기브온 제단에서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그 때 솔로몬은 왕으로서 백성의 문제를 듣고 판단하는 지혜를 구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가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도 주셨다. 그 후 솔로몬은 백성을 사랑하는 지혜로 수많은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하였다. 솔로몬왕이 원하는 것을 볼 때 솔로몬의 마음에 백성을 위하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랑의 왕이며 지혜의 왕이며 평화의 왕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살펴보면 자신이 어디에 속해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원하는 것이 그 사람의 질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사람은 마음에 상처를 받아 미움과 증오 속에 자신과 세상을 원망하고 증오하며 복수하기를 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를 높이기 위해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해 세월을 보낸다. 또 어떤 사람은 한 번 사는 인생 즐겨야 한다며 맛있고 특별한 음식, 오락, 스포츠, 술, 여행 등 온갖 쾌락을 즐긴다. 또 어떤 사람은 책에서 진리를 찾기 위해 하루 종일 연구하고 책을 읽는다. 또 어떤 사람은 행복이 최고라며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고 만족하고 행복해한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삶을 살아간다. 사람들의 원하는 것은 참 다양하다. 질 높은 삶을 살기 위해서 내가 원하는 것 속에 사랑이 얼마나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원망과 증오에서 나온 복수심이면 그 사람은 지금 악한 자이다. 그리고 원하는 것이 먹을 것이나 칭찬이면 그 사람은 어린아이이다. 또 원하는 것이 육체와 자기를 위한 돈과 지위와 명예이면 이 사람의 상태는 에고상태이다. 또 사람이 원하는 것이 육체와 세상의 부가 아니라 진리이며 진리를 찾기 위해 연구하고 진리대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기를 원하면 그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 내가 그릇인 것을 알고 이 그릇 속에 생명이신 주님사랑을 받아들여 주님사랑을 품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면 이 사람은 산 영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사람은 처음에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좋은 성적과 기술과 힘과 능력을 키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 자신의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사람의 질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자신의 힘으로 상대방의 힘이 되기 위해 노력을 한다. 그래서 좋은 부모, 좋은 남편, 좋은 목사...가 되기를 원한다. 이 원함이 이루어지면 사람의 질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사람의 질은 상대방에게 힘이 된 후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부모로, 목사로, 사업가로... 내가 가진 힘으로 사람을 기쁘게 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인정과 찬사를 얻었다고 하자.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칭송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원하면 자신의 무엇이라도 줄 것 같은 이 순간, 나는 무엇을 원할 것인가? 내가 원하는 것에 따라 나의 속사람의 질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 순간에 내가 사람들에게 돈을 원하면 나는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내가 사람들에게 나를 존경하고 나를 높이는 것을 원하면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힘이 되어준 것을 근거로 뭔가를 요구하면 나는 상대방을 이용하는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이 주님사랑 때문이며 힘이 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앞으로도 사람들에게 힘이 되기를 원하면 이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질 높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랑을 베푼 후에 마지막 모습으로 사람의 질이 결정된다. 그러기에 어떤 상황에 있든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목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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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02
  • [은혜의 말씀] 사랑으로(고전13장1~3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이 하는 그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을 등한시 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상처를 주거나 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이 너무 중요하고 크게 느껴질 때 우리는 그 일이 우상이 되어 하나님의 관점이나 본심은 아랑곳 하지 않게 됩니다. 누구를 위해 하는 일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의 일하는 그 곳은 나의 사역지 입니다. 우리는 앉으나 서나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로 인해 사람이 상처받거나 하나님이 외면 당한다면 과연 그 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나의 혈기대로 감정대로 거침없이 할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나의 마음을 주장하게 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일하게 됩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일을 하듯 하게 되어 조금 느리고 돌아가는 것 같아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이 형상인 사람을 먼저 헤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작동하게 됩니다. 성령님을 배제한 채 우리가 열심히 일을 하고 사역이 잘 될 때는 자꾸만 뭔가를 조직화, 체계화, 시스템을 갖추려고 합니다. 덩치가 커지고 성과는 나올지 모르나 자칫 사랑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윤활유가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공동체는 생기는 사라지고 모든 것이 형식적이며 기계적으로 돌아가다 어느 순간 화석처럼 멈춰 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지혜와 선행과 성공과 업적이 제 아무리 높다 하여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사랑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순종하며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갈 때 성령님은 내 안에 살아계십니다. 나의 삶을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언제나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 순종하며 나아갈 때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향해서 열정을 가진, 열심이 특심인 선지자였습니다. 열정이란 단어는 영어로는 enthusiasm로써 라틴어로는 en deos의 합성어 입니다. deos는 ‘하나님’으로, ‘하나님 안에서’란 뜻 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 상태를 열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열정이란 단어는 passion. 예수님의 고난 당하심. 고난을 이기는 것을 열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없는 열정은 독이 되어 나를 그릇된 길로 인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실 때 우리는 엘리야처럼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는 열정을 가진 자가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게 고린도전서에 있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최고의 경지인 사랑을 행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할 때 하나님 또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사랑을 날마다 작동하며 생기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다 잘해도 사랑에 실패하면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인생이 되고 맙니다. 다시 사랑으로, 그래도 사랑으로, 사랑의 묘약, 하나님 아버지의 그 사랑, 예수님의 그 사랑, 사도바울이 가르쳐 주는 이 사랑의 원리를 가지고 승리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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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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