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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해 봅시다] 국회의원의 특권, 진짜 내려놓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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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 특혜가 어느 정도 있어야 하나
우리나라엔 지나치게 많은게 문제
국회의원은 일반 국민에 비해 많은 특권을 누린다. 의정활동에 필요한 특권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아닌게 절대 다수이다. 죄를 범해도 국회의원은 회기 중엔 함부로 구속하지도 못한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고 하지만 국회의원은 예외이다. 민주화 이후 ‘특권 내려놓기’를 발의하지 않은 국회가 없었으나 한번도 실천에 옮긴 적은 없다. 20대 국회에서 여야가 잇달아 ‘특권 내려놓기’를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금번엔 특권을 내려놓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면 국회의원의 특권과 특혜는 어떤 것들인가. 일반인은 상상하기도 어렵고 그 수만해도 무려 200가지가 넘는다. 전 국회의원 K씨가 밝힌 것과 소식통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불체포특권과 면책특권이 있고, 국회의원회관의원실(45평)을 제공받는다. 세비가 연 1억3천여만 원(장관급 예우), 연 2회 해외시찰 지원, 입법활동비 313만 원, 보좌관을 7명까지 둘 수 있다(월급은 국가 부담). 정근수당과 명절휴가비 등이 연 1,400여만 원이고 관리업무수당이 월 58만 원, 차량유지비와 주유비 지원, 항공기(비즈니스석), KTX, 선박 전액무료이용, 공항 귀빈실 이용가능, VIP 주차장 이용가능, 출입국 절차 대행가능, 출입국 검사대 통과하지 않고 출입국할 수 있는 특권(별도의 통로 이용), 골프장 이용시 VIP 대우, 해외출장시 재외공관이 영접, 국가 각종 기념식 때 상석 배려, 전화요금과 우편요금 지원, 자녀 학비 지원(고교생은 44만 원, 중학생은 6만 원), 야근식비 지원, 정책자료 제작비, 발송비 지원, 금배지를 단 하루만 달아도 65세부터 평생 월 120만 원의 연금이 지원된다. 국회 회기 중 출석하지 않아도, 임기 4년간 단 한 건의 법률안을 발의하지 않아도 월급은 꼬박꼬박 통장으로 들어간다.
정치 후원금을 1년에 1억5천만 원, 선거가 있는 해에는 최대 3억까지 모급할 수 있다. 변호사, 의사, 약사, 관세사 등 ‘사’자가 붙은 직업은 겸직이 가능하다. 국회의원의 특권, 특혜는 워낙 많아서 일일이 다 말하기 어렵다.
차제에 선진국 스웨덴 국회를 생각해 보라. 스웨덴 국회의원들은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에 따른다. 그들은 아침 9시에 출근하여 밤 9시가 넘어도 퇴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심히 한다고 한다. 그들의 평균 노동시간은 주당 평균 80시간으로 일반 국민의 2배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열심히 하고도 특권, 특혜는 거의 없는 셈이다. 필자의 의견은 뭔고하니 국회의원에게 어느 정도의 특권과 특혜를 있어야 하나 우리나라엔 지나치게 많은게 문제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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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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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정보민주주의 시대의 그늘, 정보의 부재와 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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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국에서는 자국의 EU(유럽연합) 탈퇴를 묻는 국민투표가 진행되어 결국 찬성이 과반을 넘었습니다. 영국(Britain)과 탈퇴(exit)의 두문자들을 합쳐 브렉시트(Brexit)라 불린 이번 이슈는 유럽을 넘어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영국의 탈퇴가 확정된 후에는 전세계 금융시장, 실물시장에까지 상당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영국이나 유럽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나라들까지 주식시장에 일대 혼란이 일어났고,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손실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정작 놀란 사람들이 바로 영국 국민들이라는 점입니다. 지난 6월 17일 올해 41세로 두 딸의 엄마이자 노동당의 초선이었던 조 콕스(Jo Cox) 의원이 피살되었습니다. 그녀는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는 것에 반대했고 브렉시트 반대 캠페인을 벌여왔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브렉시트’라는 정치적 이슈는 급격하게 감성화되기 시작했고, 시민들의 투표권 행사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추정합니다. 투표일 이전에 실시된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잔류가 탈퇴보다 높게 나왔습니다. 하지만 막상 투표 당일 개표함 두껑을 열어보니 투표율 72.2%, 찬성(탈퇴) 51.89%, 반대(잔류) 48.11%로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대중들의 투표 심리에 무언가가 작용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번 브렉시트 사건에서 드러난 더욱 중요한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습니다. 투표 결과에 당황하고 놀란 영국 국민들 사이에 재투표의 논란이 일고, 6월 말 현재 재투표 청원의 숫자가 500만에 육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요? 전해져오는 뉴스들을 분석해 보면, 정작 논의를 주도하고 안건을 상정한 리더십들조차도 브렉시트가 가져올 파장과 구체적인 영향을 잘 몰랐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일반 국민들은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결국 이번 브렉시트 파동은 정보민주주의 시대에 정보의 부재와 편향이 가지고 온 또 하나의 비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중들은 유럽연합 탈퇴가 함의하는 정치경제공학적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잔류 혹은 탈퇴를 지지하는 지도자들의 의견과 특히 언론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어진 정보를 분석하고 나름대로 숙고하는 일은커녕, 제대로 된 정보를 확보할 수조차 없었고, 그나마 제공된 정보 또한 여론주도층에 의해 한 차례 걸러진 편향된 정보였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이것은 비단 영국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정보화시대에 진입하면서 정보의 불균형 문제, 즉 정보의 부재와 정보의 편향 현상은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일 수 없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견 대립과 혼란의 양상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근저에 이러한 정보의 부재와 편향 현상이 원인으로 도사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각자 자기 지역에 맞는 입지 조건만 생각하고 주장하다가 결국 무산되고 만 중대한 국책 사업이자 공약 사항이던 신공항 문제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역대상 12장 32절에서 제시하는 시대를 바라보는 통찰력이 그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혼란의 시대 다윗에게 모여든 자들은 시세를 알았습니다(understood the times). 그리고 마땅히 행할 것을 알았습니다(know what Israel should do). 통찰력 있는 자가 시대를 선도합니다. 세상을 읽어야 합니다. 세상을 시청해야 합니다. 세상을 관찰하고 분석해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세상에 범람하는 정보를 보고 듣고 생각하고 분석해야 합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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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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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률상식] 총회 총대 임기와 파회 후 위원회 활동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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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회 총대 임기는 서기 호명 시부터 총회 파회 시까지
■ 위원회의 활동은 총대 자격 아닌 사건처결 우선주의로
[질의] 헌법 정치 제12장 제2조에 의거, 각 노회에서 파송하는 총대들의 임기가 ① 총회가 개회 이후 파회까지인지와 ② 총회 파회 후 상비부원이나 특별위원 등으로 활동하는 것은 총대 임기의 연장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하여 헌법에 근거한 유권 해석을 요청 드립니다. 본 질의에 대한 유권 해석은 법원에 제출할 준비서면의 첨부 서류이니 목사님의 서명 날인을 특별히 부탁드립니다.(장로회 합동 교단 ○○○목사)
[답] 질의자가 장로교회의 합동 교단 목사이므로 합동 총회 헌법으로 답한다.
1. 총회 총대의 임기에 대하여
교회 헌법 정치 제12장 제6조(총회의 회집)에 “총대는 서기가 천서를 접수 호명한 후부터 회원권이 있다.”는 규정에 의하여 “총회 총대로 총회 회원권이 발생하는 시기”는 직전 총회장이 총회를 개회하기 직전에, 직전 총회의 서기가 호명함과 동시에 총회 총대로서 총회 회원권이 발생하며 그 임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정치 제12장 제7조(폐회 의식)에 총회가 폐회하기로 결의한 후에는 총회장이 “교회가 나에게 위탁한 권세로 지금 총회는 파함이 가한 줄로 알며 이 총회 같이 다시 아무 날 아무 곳에서 회집함을 요하노라.”라고 파회를 선언한 후 “기도함과 감사함과 축도로 산회한다.”고 폐회 의식을 규정하였다.
즉 총회는 당회나 노회나 대회의 폐회의식에서 “폐회를 선언”함과는 달리 “파회를 선언”함으로 산회와 동시에 총회가 없어진다. 따라서 파회 선언과 함께 총회 총대의 임기도 종료되며 상비부도 임원회도 역시 없어진다.
다만 총회장은 총회 후 공백 기간에 대외적인 면에서 상징적으로 존재하며, 대내적인 업무는 법이 정한바 총회가 위탁한 사안만 수행할 수 있고, 차기 총회를 소집하고 개회하여 신 임원을 선거할 때까지 사회권만 남아 있을 뿐이다.
즉 총회 총대의 임기는 직전 총회의 서기가 총대를 호명할 때부터 총회장이 파회를 선언할 때까지라는 말이다.
2. 총회 파회 후 위원회의 활동 근거에 대하여
총회의 모든 상비부와 특별위원회와 임원회 등이 총회를 파회한 후에도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는 권징 제134조 2항에 상비부의 하나인 재판국의 활동에 관하여 “재판국은 위탁 받은 사건만 심리 판결한다.”는 규정에 준거하여 총회가 파하기 전에 총회가 위탁한 사안만을 처리하기 위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원회나 상비부나 특별위원회가 총회를 파한 후에도 업무를 수행하는 법적 근거는 총대의 임기가 연장되는 특권에 의하여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임원회나 상비부나 특별위원회에 총회가 위탁하여 처리케 한 사안을 처리하는 위원회의 위원 자격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실례를 들어보면, 총회 규칙 제9조(정기위원) 2(임무)에 “절차위원”이나 “천서검사위원” 등은 직전 총회의 총대의 자격으로나 임원회의 자격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요 총회의 규칙에 “절차위원은 직전 총회의 회장과 서기, 천서검사위원은 직전총회의 서기, 부서기, 회록서기”라고 규정한 규칙에 의하여 그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공천위원”은 직전 총회의 총대도 아니요 노회장도 아닌 새로 선임된 각 노회의 노회장들로 위원이 구성되어 활동한다. 만일 총회 파회 후 상비부원이나 특별위원이나 임원들의 활동을 총대 임기의 연장으로 봐야 한다면 공천부원들도 직전 노회장들이 되어야 마땅한데 신임 노회장들이 된다는 것은 모순이 아니겠는가?
즉 임원회나 상비부 등등의 위원회에 총회가 위탁한 업무가 없으면 어떤 부서이든 차기 총회가 조직될 때까지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3. 결론
총회 총대의 임기는 서기가 호명할 때부터 총회장이 파회를 선언할 때까지로 총회가 진행되는 기간뿐이요, 총회를 파회함과 동시에 총회 총대의 임기는 종료된다.
그러나 직전 총회의 임원회나 상비부나 특별위원회가 총회를 파회한 후에도 계속 활동하는 이유는 결코 직전 총회의 회원권인 총대 임기가 연장되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헌법과 총회 규칙이 규정한 바에 따라 총회가 각 위원회에 위탁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업무를 위탁받은 위원회의 위원으로서 장로회 정치의 회원권 우선주의가 아닌 사건처결 우선주의의 관례(교회 법률 상식 pp.94~95참조)에 의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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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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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탐구] 신앙의 위인 야고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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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야고보는 그의 동생 요한과 함께 열정적으로 복음 사역에 헌신하였습니다. 그의 성격은 오히려 주를 위해 봉사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가 승천하신 이후에 많은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초대교회를 박해할 때 첫 공격의 대상자로 야고보를 지목한 데서도 우리는 그가 얼마나 복음 사역에 헌신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뢰의 아들인 야고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부활을 목격한 증인이었습니다. 물론 야고보 외에 여러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였지만 그가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신앙의 체험이었습니다.
그 후 초대교회가 형성되었을 때 그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확고한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요 21:1-2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핵심적인 위치에서 주님을 보필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는 초대교회의 지도자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증거 하다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탄압 때 체포되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행 12:1-2 “그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아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원래 명칭은 살렘이었으며 여부스 사람들의 거주지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땅에 정착한 이후 전쟁을 통해 차지하였습니다.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극히 존중히 여기고 경모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곳에서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주님의 마지막 사역 장소였습니다.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가셨습니다.
사마리아는 오므리 왕조 때부터 이교적 영향을 받아 오다가 아합왕에 이르러 바알 숭배로 인하여 야훼 종교는 점점 약화되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오므리 왕이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주전 721년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후 사마리아에는 잡다한 이방인들이 정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종교 생활과 사회생활이 이교적인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방인들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멸시를 받았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급한 성격을 소유했던 야고보의 형제들은 사마리아 촌사람들이 주님과 그의 일행들을 배척하자 강한 분노의 감정을 터뜨렸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에게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 하시나이까'(눅 9:54)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거부한 사마리아인들에게 혹한 벌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급한 성격의 소유자인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감정을 절제할 줄을 몰랐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주의 일꾼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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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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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 위로 혹은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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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에게는 삶이 주어져 있다. 삶이란 몸, 가족, 사람, 일, 물건, 사건, 환경, 자연 등 현재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을 말한다. 이 삶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과 지혜와 힘과 자유와 기쁨 등 온갖 선물이 들어있다. 삶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내 삶의 방향이 위를 향할 것인지, 아래를 향할 것인지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삶을 사는 사람들 중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 사람은 이 땅에서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어떤 삶을 만나든 현재의 삶을 거부하거나 충돌하지 않고 받아들여 밝은 생각과 밝은 행동으로 자신의 원하는 것을 이루어 가는 사람이다. 두 번째 사람은 현재의 삶을 거부하여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걱정하고 원망하고 분노하며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자신과 상대방에게 표현하면서 삶을 망가뜨리며 아래를 향해서 사는 사람이다. 세 번째 사람은 위를 향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현재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면서도 늘 마음에 자신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선을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다.
삶은 늘 낯설고 내 예상을 뛰어넘어서 찾아올 때가 많다. 늘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몇 주일 전 잘 아는 분이 냉장고를 가지고 온다고 전화가 왔다. 지금 사용하는 냉장고가 망가져서 아내가 좋은 냉장고 있으면 구해달라고 부탁한 모양이다. 그런데 혼자 오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 몇 명과 함께 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안함과 고마움에 사다리차를 부르고 이십 만원을 드렸다. 그리고는 그분들이 간 다음에 냉장고를 살펴보니 10년이나 된데다 홈바는 고장 났으며 용량이 기존보다 너무 적었다. 여름수련회를 하기 위해 큰 용량이 필요했던 상황에서 당황스러웠으며 난감했다. 이 순간 우리부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논을 했다. 얼핏 드는 마음은 ‘어떻게 이런 냉장고를 갖다 줄 수 있는가? 돈은 돈대로 들고 사용도 못하고’하며 서운해 할 수도 있었다. 우리 부부는 ‘그 분이 우리를 위해주는 마음은 고맙고 내가 준 돈으로 그분들이 좋아하면 족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힘들지만 새 냉장고를 사기로 결정하고 더 큰 용량의 냉장고를 구입했다. 우리부부는 예상 못한 상황에서 우리의 삶이 아래로 향하지 않고 위로 향하게 한 것에 매우 기뻤다.
삶이란 예상 밖 사건의 연속인 것 같다. 또 며칠 전 지인과 만나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다. 그런데 약속한 사람이 오지 않아서 복잡한 거리에서 주차할 공간도 없는데 도로에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1시간 이상 기다리게 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상황에서 화를 내면서 욕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집으로 갈 수도 있다. 이 상황에서 웃음을 잃지 않고 여유 있게 기다리면서 상대방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는다면 내 삶은 위를 향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는 삶이 내 생각대로 잘 되어간다. 하는 일마다 성공적이며 행복한 일의 연속이다. 만족하고 감사하다. 이렇게 쭉 나가면 평생을 즐겁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것 같다. 돈도 모이고 건물도 몇 채나 되고 자녀들도 잘 자라고 자녀들까지 평생 먹고 살 재물이 있다고 하자. 여기에 만족하고 사회와 사람들에게 사랑과 선을 행하지 않으면 이 삶은 아래를 향하고 있는 삶인 것이다. 그 마음에 사랑이 없고 선을 행하려는 마음 없이 그 속에 자기를 위한 사랑과 세상의 부를 추구하는 마음만 있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재물과 힘과 지식을 사회를 위해,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사용할지 방법을 찾고 행동으로 옮길 때 자신의 삶이 위를 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과 저 세상의 삶은 연결되어 있다. 이 땅에서 아래면 저 세상에서도 아래일 것이며, 이 땅에서 위를 향하면 저 세상에서의 삶은 천국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보거나 보지 않거나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매 순간의 삶을 위를 향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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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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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스데반 집사 (사도행전 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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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평신도 순교자 스데반 집사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스데반 집사는 교회에서 피택을 받은 집사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피 흘리고 순교를 한분이 스데반 집사입니다.
우리가 좋은 사람, 복 있는 사람, 훌륭한 사람, 존경받는 사람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온 형제들, 회중들 가운데서 성령 충만, 믿음 충만, 지혜 충만해서 칭찬을 받는 사람입니다. 오직 성령, 오직 믿음, 오직 지혜 이 3가지가 다 중요하기 때문에 오늘 성경은 형제들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받는 사람,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 집사 이렇게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6장 8절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 스데반 집사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습니다. 성령이 나타나시는데 스데반 집사를 통해서 거침없이 막힘없이 향기롭게 힘차게 한 사람의 인격이라는 채널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그대로 나타나는 겁니다. 성령님이 이 사람을 통해서 축복의 통로로 나타납니다.
스데반 집사의 사역의 결론은 죽음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목숨을 잃어버린 겁니다. 일곱 집사들이 성경에 나타날 때는 전부 다 전도하는데 복음 전하는 데만 나타났습니다. 6장 10절에 ‘스데반이 지혜요 성령으로 말함은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구약성경을 관통을 하면서 일목요연하고 능통하게 설교를 한 사람, 복음을 제시한 사람이 스데반 집사입니다.
6장 15절에 보면 스데반 집사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7장에 가서보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보좌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본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이 사도행전 7장 59~60절에 보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며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손톱만큼도 원망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중보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합니다.
스데반 집사가 위대한 것은 복음전하다가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돌로 스데반 집사를 쳐 죽이고 옷을 바울 앞에 갖다 놓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 악독한 사울이 스데반 집사 순교의 피 흘림을 통해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죽음, 그 피 흘림이 헛되지 않아서 사도 바울이라는 초대교회 최강 리더십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 이름 뜻이 면류관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우리가 직분을 사모한다는 것은 죽을 각오가 되어있어야 됩니다. 손해 볼 각오가 되어있어야 됩니다. 목숨을 내 놓을 각오가 되어있어야 됩니다. 스데반 집사 순교의 피를 통하여 사울이 바울이 되고 그의 사역을 통해서 기독교가 열방으로 퍼져나가서 세계적인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게 한 사람 쓰임 받는 일꾼 주님 나라에 향기로운 영향력을 미치는 주의 일군으로 감당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당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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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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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칼럼] 감사력(感謝力)을 높이기 위한 십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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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해서 행복한 것이다. 감사는 행복을 부른다. 감사야말로 인생 최고의 항암제다. 근심의 해독제다. 절망의 방부제다. 그뿐인가? 감사는 마음의 등대요. 영혼의 호흡이다. 인생의 보물지도다. 나아가 축복의 통로다.
1. 생각이 곧 감사다 : “Think & Thanks"란 말이 있다. 생각과 감사는 그 어원이 같다. 깊은 생각이 감사를 불러일으킨다. 인도속담에 “호랑이를 왜 만들었냐고 하나남께 투정하지 말고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지 않는 것에 감사하라”는 말이 있다. 생각으로 감사를 열어라.
2. 작은 것부터 감사해라 : 작은 감사가 큰 감사를 낳는다. 큰 강도 처음에는 작은 물방울로부터 시작되었다. 아주 사소하고 작아 보이는 것들을 먼저 감사하라. 그러면 큰 감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나중 감사가 아니다. 바로 지금부터 감사해라.
3. 자신을 감사하라 :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높은 산과 거대한 바다의 파도와 굽이치는 강물과 저 광활한 우주의 태양과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는 감탄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감탄하지 않는다.” 자신을 감사하는 것이 가장 큰 감사다.
4. 일상을 감사하라 : 가장 어려운 감사는 가장 단순한 감사다. 숨을 쉬는 것, 가장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감사가 가장 어려운 감사라는 것이다.
5. 문제를 감사하라 : 문제는 항상 해결책이 있기 마련이다. 만약 해결책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문제도 아니다. 그러므로 해결책이 있음에 감사하라. 그러면 동굴도 터널로 뚫린다.
6. 더불어 감사하라 : 장작불도 함께 있을 때 더 잘 타는 법이다. 혼자보다는 함께 감사할 때 감사는 시너지 효과를 띠게 된다. 가족들끼리 감사를 나누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로 돌아온다.
7. 감사의 기어변속을 잘하라 : 처음에는 ‘만일에’ 감사다. 그 다음이 ‘때문에’의 감사다. 이어 ‘불구하고’ 감사하게 된다. 나아가 우리는 ‘더불어’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저속기어를 넣고 고속도로를 달릴 수는 없다. 기어를 높여라.
8. 잠드는 저녁시간에 감사하라 : 대부분의 사람들이 짜증과 분노, 근심 걱정을 껴안고 잠든다. 잠드는 시각에 감사하라. 저녁의 감사는 영혼의 청소가 된다.
9. 감사의 능력을 믿고 감사하라 : 감사에는 메아리효과가 있다. 감사하면 뇌에 새겨진다. 그리고 감사의 반응은 언제나 긍정이 된다. 감사는 견인력이 있어 꼭 그런 방향을 가리킨다. 감사는 감사한대로 이루어진다. 이를 성취력이라 한다.
10. 받는 감사가 아니라 주는 감사를 하라 : 우리말의 ‘고맙습니다.’는 말의 어원은 ‘고만 마세요. 이제는 제 차례입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영어의 thanksgiving도 마찬가지다. 'thanks' +'giving'이다. 때문에 give and take가 아니라 give, and take가 그 답이다. 언젠가 give and more take로 돌아올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3류 인생은 탓한다. 원망한다. 그리고 핑계거리를 찾는다. 2류 인생은 무조건 참아낸다. 하지만 일류인생은 감사한다. 그렇다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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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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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마음을 넓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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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부산으로 가는 경부고속도로를 주행하다보면 곳곳에 정체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영남권 젖줄이라는 경부고속도로 대구~부산 구간의 왕복 4차선은 일반 도로보다 더 정체현상이 짙다. 그런데 요즈음 들어서 확장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본다. 준공되면 정체 현상이 완화되어 고속도로의 기능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길을 넓히는 것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은퇴 전 교회를 담임할 때 주차 시설이 부족하여 주일만 되면 주차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주일에는 항존직분자들은 할 수 있으면 교회 주차시설을 사용하지 않도록 광고를 하기도 했고, 늘 교회 주변 주차시설을 확보하기 위하여 은행 부채를 내어서라도 주차공간을 확장하는 일이 우선 정책이었다. 주차 시설을 넓히는 것도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더욱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이 넓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좁아서 인간관계는 물론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여 실패하고 낙망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전 6:11-13)고 권고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마음이 넓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얽혀 오해가 되고, 그래서 아름다운 관계를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해하고, 관용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은 넓은 마음에서 가능한 것이다. 마음이 좁기 때문에, 그래서 이해를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부관계도, 이웃관계도 원만하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교회생활에서도 그런 경우는 얼마든지 경험하게 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좁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예수 믿는 사람의 마음이 꽉 막혔다는 말도 종종 듣는다. 어딘가 모르게 답답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융통성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듣기도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 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서로 얽히고 설키여 관계가 불편스럽다가도, 대폿집에 앉아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형님 아우 하면서 마음을 쉽게도 푸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한번 관계가 어긋나면 수년이 지나도 화해하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를 본다.
이것이 믿음일까? 정말 예수님이 그러셨는가? 그렇게 가르치셨는가?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가르친 곳은 없다. 넓은 마음, 이해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가르쳤고 그 마음을 주님이 은혜로 주셨는데 왜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좁다고 막혔다고 판단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며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여 하심이라.”(벧전 3:8)
이 말씀은 축복의 혁명적인 선언이다. 복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것, 그것은 마음을 넓히는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의 몫이다.
마음이 좁다는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꿈이 없다는 말과도 같다. 그래서 꿈이 없으면 방자히 행한다고 잠언은 깨우친다(잠 29:18). 그러니 일상의 언행이 꺼리거나 삼가는 태도가 없이 무례하고 건방지게 연출된다.
그러나 꿈이 있는 사람은 그 꿈을 성취하기 위하여 고난도, 역경도, 아픔도, 억울함도 견딜 수 있다. 요셉이 그랬다. 꿈이 있었기에 미움을 받으면서도 참았고, 미디안 장사꾼에게 팔리면서도 참았고, 보디발의 몸종이 되어서도 참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어도 참았고, 술 맡은 관원장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도 미워하지 않고 참았다. 이래 참고 저래 참았다. 왜? 마음이 넓었기 때문이다. 왜 마음이 넓었나? 꿈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꿈이 있다는 말은 믿음이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일깨운다. 꿈이 있는 사람은 이 믿음을 가져야 한다. 꿈이 성취되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 때 마음도 넓어진다.
믿음 있는 사람은 모든 기준이 주님이다. 교회중심이다. 사명 중심이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함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수용한다. 마음이 넓기 때문이다.
마음이 넓은 사람은 생각이 다르다. 이런 넓은 마음과 믿음은 저울로 달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가니 속에 넣어서 시험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마음이 넓으면 그것이 삶으로 증거 된다. 그것이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이다.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기쁜 것이며, 기쁨의 생활은 축복으로 연결된다. 마음이 넓지 못하면 기쁨이 없다. 바꾸어 말하면 기쁨이 있어야 마음이 넓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기쁨이 있다는 것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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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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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연구] 성령과 믿음보다 앞선 것(사도행전 11장 19-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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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길 갈망하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21절 끝의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는 말씀과 24절 후반부의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입니다. 이 말씀은 안디옥교회의 부흥을 보여줍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이후 흩어진 성도들이 곳곳에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의 성도들이 안디옥에도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안디옥에 큰 부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부흥이 한국교회에서도 일어나길 간절히 기대합니다.
이런 부흥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요? 첫째 <주의 손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21절에는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의 노력과 좋은 조건도 주의 손이 함께 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나 객관적 조건에서 부족해도 주의 손이 도우시면 엄청난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복음 지형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지만, 우리가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주의 손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한국교회는 안디옥교회처럼 부흥할 것입니다.
둘째는 아름다운 협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교회의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교회는 바나바를 보내 그들을 도왔습니다. 본래 예루살렘교회는 유대인 중심의 교회로서 이방인들도 복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빌립 집사의 에디오피아 내시 전도와 예루살렘교회의 최고지도자였던 베드로의 고넬료 전도의 경험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열었고, 이들은 안디옥 소식을 들었을 때 기꺼이 바나바를 보냈습니다. 만약 안디옥의 소식을 듣고도 예루살렘교회가 마음을 열지 않았다면 이런 복된 결과를 얻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셋째는 귀한 사람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나바>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합류하기 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는>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온 이후에는 <이게 큰 무리가 주께 더하는> 폭발적 역사가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잘 되고 있던 곳을 백배나 더 잘 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복을 가지고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오늘 본문 24절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바나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입니다. 만약 저를 보고 바나바를 소개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요, 게다가 성품도 착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 충만과 믿음 충만을 최고로 여기면서 성품은 소홀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오히려 바나바가 <착한 사람>임을 더 먼저 언급하였습니다. 여기 <착하다>로 번역된 <아가토스>는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라고 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대부분은 성품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신학교 시절 선배 목회자들을 통해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는 충고를 많이 들은 바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영적 측면 못지않게 인품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에는 성품의 변화도 포함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 세상으로부터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그 후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여 부흥을 가져오는 일꾼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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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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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각해 봅시다] 목사의 언어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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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목사와 부목사, 뭐가 다른가
조금 먼저 교회를 담임한 것 뿐임
언어 폭력이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없지 않다. 보도에 의하면 최근 목원대 학생상담센터 노성동 교수가 목회 경력 3~12년의 남녀 목회자 16명을 면담한 결과 면담에 응한 부목사들은 담임목사와 중직자로부터 무시, 인격모독, 비난 등의 언어폭력을 당했다고 호소했다. 예를 들면 김 모(45세) 목사는 담임목사로부터 “이따위로 밖에 못해? 나 이는 많아 가지고...” 이같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 분명히 지난번 지적한 내용을 보완했지만 소용없었다. 담임목사는 꾸중을 할때마다 그저 꾸짖지 않고 “나이는 많아가지고...”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김 목사는 뒤늦게 신학공부를 시작한 본인의 처지를 원망했다고 한다. 심지어 담임목사는 예사롭게 “그만 잘라버린다. 여기서 나가면 갈 곳이 있냐?” 이같은 말까지 한다는 것이다.
박 모(38세) 목사는 교인들 앞에서 장로로부터 “평신도보다 못한 놈”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설교하는 중 실수로 성경구절을 잘못 말했다는 이유에서 였다. 부목사가 어쩌다가 그런 실수를 했을지라도 장로가 교인들 앞에서 ‘놈’자를 붙여가며 부목사를 비난하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노성동 교수는 이같은 언어폭력에 시달리는 부목사들은 위축되고 자괴감에 빠지고 수치심을 느껴 목회현장을 불안하고 위협적인 자리로 생각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알고보면 담임목사 중에 언어폭력으로 부목사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담임목사가 의외로 한둘이 아니다. 부목사를 예사롭게 ‘이 새끼’, ‘저 새끼’하며 야단친다는 것이다. 한번은 한 권사가 자기 교회 담임목사는 “세상에 설교하면서 부목사를 ‘아무 목사 그 새끼가...’” 이렇게 말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겁니까?”라고 필자에게 질문했다. 담임목사가 부목사를 ‘이 새끼’, ‘저 새끼’하면 안 된다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아닌가.
담임목사와 부목사가 뭐가 다른가. 같은 과정으로 신학을 공부했고 같은 목사로 장립받았다. 담임목사와 부목사가 다른 점은 담임목사는 부목사보다 조금 먼저 교회를 담임한 것뿐이다. 오늘의 부목사는 내일의 담임목사이다.
뿐만아니라 지금의 부목사가 머잖아 교회를 담임할 뿐 아니라 그가 교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어떤 목사가 될는지 모른다. 지금의 담임목사가 지금의 부목사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담임목사는 부목사를 진심으로 아끼면서 선도해야만 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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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