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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 믿음이 승리다
    새해가 밝았습니다만, 지구촌 곳곳에서 테러와 전쟁 소식이 들려옵니다. 가난과 기아와 실업과 불황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 세상입니다. 월터 윙크(Walter Wink)에 의하면 이 ‘세상’에 해당하는 단어 ‘코스모스(cosmos)’는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버린 인간의 사회학적 영역을 의미합니다. 즉, 세상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버린 인간사회의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는 죄가 지배하는 영역이요(로마서 3장),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다스리는 영역입니다(에베소서 6장). 신년 벽두부터 북쪽으로부터 수소폭탄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뿐만 아니라 거대한 폭력 단체들이 난무하는 나라들 이야기를 듣습니다. 여전히 악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이슬람제국(IS)과 내란 그리고 고문을 마다하지 않는 독재정권들을 보십시오. 자크 엘륄(Jacques Ellul)은 인간의 시간 안에서 인간의 방식을 통해서는 이러한 세상 권력에 맞서 장엄한 승리라는 것을 결코 이룰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계속 권세를 확장합니다. 그러나 엘륄은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거기 계신다. 그가 세계사의 심장에 꽂아 놓은 십자가를 어느 누구도 다시 뽑을 수 없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결코 사라질 것 같지 않아 보이던 로마 제국을 바라보면서 사도 요한은 주님의 말씀 의지하여 다음과 같이 토로(吐露)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 5:4~5) 여기서 “승리”라는 단어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와 어원이 같습니다. 니케는 티탄(Titan)족의 하나인 팔라스(Palas)와 저승에 흐르는 강의 여신 스틱스(Styx) 사이에 태어났는데, 날개가 있고 손에 종려나무 잎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고대 희랍인들은 니케 여신을 유달리 숭상했습니다. 아테네의 그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 옆에도 니케 여신상이 세워져 있었고, 터키의 에베소 유적지에도 니케 여신의 모습이 비교적 온전하게 새겨진 바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승리의 여신 니케를 믿지 않았습니다. 대신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b)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다’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믿음이 승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문으로는 ‘nike estin pistis’, 영어로 하면 ‘belief is victory’가 되겠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더 열심히 믿고, 더 큰 믿음을 가지고, 더 굳건한 믿음을 가져야만 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칠고 타락하고 사악한 세상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야말로 그 자체가 위대한 승리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히말라야라는 영화가 개봉되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를 등반한 산악인 엄홍길 대장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영화 속에서 어떤 기자가 그에게 질문을 합니다. “가장 위대한 산악인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등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잠시 생각하다가 나온 대답이 가슴을 아련하게 했습니다. “후배 산악인 박무택 대원이 에베레스트 등정을 나섰다가 조난을 당했는데, 지독한 악천후 속에서 누구 하나 선뜻 구조하러 나설 수 없었습니다. 그 때 홀로 강풍과 눈보라,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그것도 밤중에 등반을 강행해 결국 박무택 대원을 만나 함께 마지막 순간을 보냈던 박정복 대원, 그리고 그날 밤 등반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산악인, 가장 위대한 등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하나 알아주지 않는 평범함 속에 곧잘 위대한 진리가 숨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를 향한 단순하고 소박한 믿음,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을 향한 승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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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4
  • [서임중 칼럼] 軍·農·競의 정신으로
    우리는 언제나 그렇지만 더 좋은 내일을 소망한다. 2016년도 더 좋은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이 만복을 내려주시고 예수님이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고 성령님이 분초마다 도우시는 은혜로 충만한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다. 그렇다고 우리가 손 놓고 가만있어서는 안 된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하나님과 우리의 마주침이 있어야 기적 같은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마음을 정돈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제일 원인을 발견할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둘째는 무엇을 하든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는 하루를 살더라도 살아가는 목적을 알고 살아가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리할 때 주님도 우리를 도우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어디 말대로 쉬운 일인가?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자기관리를 통하여 새해는 그렇게 축복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첫째는 군인정신을 가져야 한다. 군인정신은 고난을 각오하는 것, 사사로운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것,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 것, 개인주의가 아니라 연합정신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수님의 군병이라면 주님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각오해야 하고, 주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오직 주님이어야 하고 내 자신이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또한 군인은 ‘아니오.’가 없다. 그랬다가는 죽는 날이다. 그래서 속된 말로 “엉덩이로 밤송이를 까라면 깐다.”라는 말이 군인정신을 대변하는 속언이다. 둘째는 경기자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경기자의 정신은 rule을 지키는 정신이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고 탁월한 경기 능력을 가졌어도 경기에는 규칙이 최우선이다. 그래서 올림픽에서 1등을 하고도 규칙을 벗어난 조그마한 일 하나 때문에 탈락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또 한 가지 경기자의 정신은 인내다. 승리의 면류관을 쓰기까지 참아야 할 일들이 어디 한 두 가지이겠는가? 포기하고 싶고 벗어버리고 싶을 때가 수없이 다가와도 승리의 그 시간을 바라보면서 경기자는 참고 또 참으면서 경기에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기에 임하는 선수의 지고한 가치는 페어플레이다. 이기기만 위한 전략은 진정한 게임이 아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실력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경기의 가치개념이다. 그리고 결과에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고 순복하면서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것이다. 셋째는 농부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농부의 정신은 오래 기다리는 정신이며, 농부의 정신은 성실이며, 인내다. 그래서 시기를 잘 알고 그 시기를 놓치지 않는다. 농부가 때를 놓치면 그해의 농사는 폐농이 된다.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은 금방 이해가 되는 말이다. 밀레(J. F. Millet)의 만종(晩鐘)은 밀레가 가난했을 때 65달러를 들여서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그 후 12만 5천 달러에 미국인이 사갔다. 이 그림에는 세 가지 신성이 있는데, 노동의 신성, 가정의 신성, 종교의 신성이다. 이 세 가지를 다 성취한다고 정말 축복된 삶이 이루어지는가? 이것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삶의 방법이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이루게 해 주셔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은혜 안에서 강해야 한다. ‘은혜 안에서 강해야 한다.’는 말의 본뜻은 은혜 앞에 전치사 ‘엔’을 붙이는데 그것은 강해지는 것이 개인적인 능력이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을 때에만 가능한 것임을 시사한다. 즉 군인과 농부와 경기자의 軍?農?競의 정신으로 강해질지라도 그것이 은혜 안에서가 아니면 안 된다. 즉 진정한 축복은 힘으로 강하고, 돈으로 강하고, 권력으로 강한 것이 아니라, 은혜 안에 강하다는 것이다. 믿음 없는 사람일수록 세상적인 것으로 강함을 드러내는데 그것이야 말로 못난이들의 삶이다. 좋은 생각이 좋은 정신을 만든다. 좋은 정신이 좋은 역사를 만든다. 생각하는 것이 비뚤고 바르지 못하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비뚤고 바르지 못하다. 말이 아름답지 못한 사람의 행동은 더럽다. 그 결과는 항상 실패일 뿐이다. 신앙생활도 올바른 정신을 가져야 한다. 절제의 은사는 그래서 귀한 것이다. 말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행동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인격과 신앙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절제가 안 된다. 그래서 짐승 같다고 하는 것이다. 왜? 짐승은 절제가 없기 때문이다. 본능대로 행동하는 것이 짐승이다. 우리는 너나없이 2016년을 맞이하면서 올 한 해가 평행감축(平幸感祝)의 한해가 되기를 바램 한다. 바램 한다고 되는가? 아니다. 하나님이 만복을 내려주셔야 한다. 하나님이 아무에게나 복을 주시는가? 아니다. 복 받을 마음의 그릇을 준비해야 하고 그 그릇에 축복을 담기 위하여 촌음(寸陰)을 아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군·농·경(軍·農·競)의 정신이다. 2016년 한해를 그렇게 살아 축복받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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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4
  • [성서연구] 낡은 것 속의 새 것(빌립보서 3장 1절)
    해가 바뀌는 요즘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글자는 “새”자일 것입니다. 또 “새”를 한자로 하면 “신(新)”이니 신 자도 많이 사용합니다. 즉 새해, 신년, 새 수첩, 새 시간 등의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새 자와 신 자를 많이 사용한다는 것은 새해를 맞는 우리가 그 만큼 새로워지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해가 바뀐다고 해서 새로워지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 이름, 신분, 가족관계, 직장 등 거의 모든 것이 지난해와 똑같습니다. 말은 “새”라고 하지만, 실제는 낡은 것들과 함께 시작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의 설교도 늘 같습니다. 언제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것 때문에 답답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찬송가 205장을 보면 <평생에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늘 들려주시오>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어찌 보면 목회자들이 같은 메시지를 반복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웃을 일만은 아닙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3장 1절을 보면 바울 사도는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전에 하지 않던 새로운 말을 한 게 아닙니다. 그는 늘 전에 하던 그 말씀을 반복했습니다. 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 그 안에서 성도가 맛보는 기쁨 등을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같은 말을 반복해서 쓰는 것이 자신에게는 조금도 수고로움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얼마든지 반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안전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전에 듣지 못하던 메시지를 전한다면 그건 이단일 것입니다. 우리가 전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늘 듣던 그 설교, 늘 듣던 예수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는 것이 영적으로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새해가 되어도 달라지는 것도 없이 모든 것이 동일하다면 그 답답함은 어떻게 극복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도 바뀐 것이 없어도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뀐 것처럼 느끼면서 기쁘게 살아가는 비결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만 바뀌면 세상 모든 것이 새로워진 것과 동일한 효과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초록색 선글라스를 쓰는 순간 온 세상이 초록색으로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도 내가 선글라스를 썼기 때문에 온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016년을 맞이하면서 <왜 세상이 변하지 않는가? 왜 환경이 새로워지지 않느냐?>고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만 새롭게 바뀌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우리를 새롭게 하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뿐이십니다. 요한계시록 21장 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하셨고,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또 에스겔서 36장 26-27절을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고 했습니다. 2016년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다음과 같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그 동안 환경을 바꾸어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으나, 이제 다시 기도하오니, 저희 자신을 새롭게 하소서. 저희가 새로워짐으로써 만물을 새롭게 바라보고 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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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4
  • [함께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인은 나이가 많아져도 (2)
    “내가 이 나이에” 이렇게 생각지 말고 “내 나이가 어때서” 이렇게 생각해야 이런 통계가 있다. 역사상 놀라운 업적의 35%는 60대 노인들이 이룩했고, 23%는 70대 노인들이 이룩했고, 6%는 80대 노인들이 이룩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상 놀라운 업적의 64%를 60대 이상의 노인들이 이룩했다. 이러한데도 어떤 이들은 나이 70만 되어도 노인 티를 내기 시작한다. 새로운 도전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세월만 보내고 있다. 생각이 왜 그런지 보기에 딱하다. 요즘의 70은 청년이다. 노인이 아니다. 70세를 고희(古稀)라고 한 것은 60세까지도 살기 어려운 때에 생긴 말이다. 해방되던 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50세 였다. 그 때문에 60세까지 살면 장수했다고 잔치를 했다. 그것이 환갑잔치이다. 지금은 60세가 되어도 환갑잔치를 하는 이가 없다. 지금은 100세 시대이다. UN이 정한 연령 구분을 보면 17세까지는 미성년, 18세부터 65세까지는 청년, 66세부터 79세까지는 중년, 80세부터 99세까지는 노인, 100세 이상은 장수노인이라고 했다. 나이 70을 가지고, 80을 가지고 “난 이제 나이가 많아서” 이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더욱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생각하면 그는 그리스도인 답지 못한 사람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시편 110편을 보라. 거기 그리스도인의 별칭이 있다. 그리스도인을 ‘청년’이라고 했다. 거기 청년은 10대를 지칭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 전체를 청년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여간 나이가 맣아도 “내가 이 나이에”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도리어 “내 나이가 어때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70, 80 아니라 90대 노인이라도 그리스도인의 별칭답게 청년다운 면이 있어야 한다. 정신도, 생각도, 패기도, 의욕도 젊어야 한다. 노년을 마치 청년처럼 살아가는 몇몇 분을 보라. 자교감리교회 강순용 장로는 81세에 그림공부를 시작하여 91세에 전시회를 가졌다. 그는 지금도 나이를 잊고 그림에 몰두하고 있다. 서면교회 원로인 원종록 목사는 82세에 그림공부를 시작하여 지금 85세인데 전시회를 가졌다. 권춘식씨는 87세에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했다. 지금 그의 꿈은 대학원을 졸업하는 것이라고 한다.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올해 97세인데 현역처럼 이곳 저곳 강의하러 다닌다. 일본 나가오가 미에코라는 할머니는 80세에 수영을 배우기 시작하여 지금 100세가 넘었는데 그간 세계대회에 나가서 금메달을 60개를 따고 세계신기록을 11개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나이가 여간 많아도 위축되지 말고 도전해야 한다. 뭐든 못하는 것은 나이 때문이 아니고 못하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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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4
  • [시사칼럼] ‘ㅎ’이 득세하는 ‘ㅎ’ㅐ
    지난 을미년(乙未年)은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이라는 영화(1991년) 제목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충격적인 사건 사고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난 테러(terror)는 문자 그대로 공포(恐怖)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독 불어권이 몸살을 앓았습니다. 프랑스 본토에서는 정월 샤를르 엡도 잡지사 테러 사건과 11월 파리 연쇄 테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시리아는 일 년 내내 이어진 난민 사태로 인해 지구촌의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동시에 자극했습니다. 국내에서는 메르스가 온 국민을 공포로 몰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국에서는 간통제가 폐지되었고 미국에서는 동성애가 합법화되었습니다. 모랄 해저드(moral hazard)에다 섹슈얼 해저드(sexual hazard)까지 가미될 예측불가능한 미래에 단정 지을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이 문제들 때문에 앞으로 무척 시끄럽겠다는 전망 정도일 듯합니다. 지금부터 꼭 한 갑자(甲子) 전인 1955년 을미년(乙未年),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1912~1984) 목사는 스위스의 알프스 산록에 라브리(L’Abri)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라브리(L’Abri)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은신처, 피난처’를 의미합니다. 유럽에 여행 차 들렀던 쉐퍼 박사는 유럽의 영적 실상을 보고 충격을 받고 아예 거처를 스위스로 옮겨 일종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과 문명과 사회에 대한 공공의 신뢰가 무너지고 영적으로 지독한 방황에 빠졌던 신앙인들뿐 아니라 학자, 예술가, 엔지니어 등 수많은 지성인들이 쉐퍼 목사와 함께 모여 쉼과 회복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통해 치유와 자유의 은총을 나누었고, 그 결과 유럽 사회가 영적으로 회개하고 회복하고 화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나갔습니다. 이보다 앞선 1940년에는 프랑스의 부르고뉴 지방 남부 손 에 로와르(Saone-et-Loire)에 위치한 떼제(Taize)에 스위스 출신의 개신교 수도자인 로제 수사(Brother Roger, 1915-2005)가 테제 공동체(The Taize Community)를 세웠습니다. 이곳은 어느 교단에도 소속되지 않은 초교파 단체로, 1950년대부터 매주 이곳 떼제(Taize)에는 특히 전세계에서 젊은이들이 몰려와 자발적인 예배와 기도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세계대전(world war)과 냉전(cold war)으로 인해 피멍이 들고 정신적인 여유와 신앙적인 공간을 잃어가던 청춘들이 이곳에서 진정한 휴식과 회개와 화해와 회복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다소 철학적이면서 학구풍이 강한 라브리 공동체와 달리 자유분방한 떼제(Taize)는 어느덧 한국의 젊은이들도 알음알음으로 많이 찾는 명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10년 전 창설자인 로제 수사가 한 여인에 의해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테제는 더욱 회복과 화해를 외치며 오늘도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 있어서 새로운 아노미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어수선하고 혼란스럽습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교회마저 그 부패와 타락상이 세상의 가십거리로 전락한 참담한 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많은 신앙의 공동체들 또한 기나긴 힘들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 2:12~14). 새해는 회개와 화해와 회복이 득세하는 ‘ㅎㅎㅎ’의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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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1
  • [소강석 칼럼] 네트워크 교회론으로 다시 시작하자
    한국교회는 21세기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교회가 부흥하였던 것처럼 앞으로도 부흥 할 것이라는 막연한 장밋빛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급속한 성장주의와 속도주의에 편승하여 물량화, 자본주의화, 세속화되고 말았다. 그래서 교회의 거룩성과 교회다움을 잃어버리고 교회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상실해 버렸다. 또한 교회의 내부 기득권 싸움과 몇몇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부도덕한 모습이 언론을 통해 비춰지면서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불만과 불신이 최고조로 달하면서 비난과 공격을 받고 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정체 내지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다. 이 모든 이유는 한국교회가 21세기를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세기와 21세기는 똑같은 세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너무도 달랐다. 시대와 사람, 목회 환경의 변화를 읽지 못했다. 무엇보다 교회 스타일의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다. 세계교회, 특히 미국교회의 변화적 흐름을 보면 1970년대까지는 교단 중심의 전통적 교회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80년대부터는 커뮤니티 교회가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구도자 중심과 문화적인 예배와 공동체 중심의 교회를 이루며 부흥 코드로 성장을 해 왔다. 그렇게 하다 보니 교단이나 다른 교회와는 별 상관없는 개교회 중심의 교회가 되었고 대형교회 목회자들 간의 영향력 전쟁이나 스타플레이를 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새천년을 맞은 어느 때부턴가 커뮤니티 교회에서 네트워크 교회로 바뀌기 시작했다. 구도자 중심보다는 처치 플랜터(church planter) 중심의 교회가 되고 문화 중심보다는 복음적 중심, 혹은 래디컬(radical)한 신앙 구조로 바뀌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커뮤니티 구조보다는 네트워크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또한 부흥 코드보다는 플랜팅(Planting) 코드로 바뀌었다. 미국교회를 보면 하나의 대형교회가 아니라 코드가 맞는 교회끼리 서로 네트워크를 하며 세움형 교회로 확장해 가는 것을 본다. 그런데 미국교회가 아무리 네트워크형으로 간다 하더라도 내 눈으로 볼 땐 여전히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자기 코드나 성향에 맞는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할 뿐이지, 미국 전역에 교회 생태계를 살리고 미국교회를 전방위적으로 지키기 위한 네트워크는 아직도 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국이 대형교회도 많고 큰 교단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동성결혼법이 통과되어 버렸지 않는가. 지금 한국교회는 내부적으로는 부흥이 침체되고 외부적으로는 사회적 공격을 받으며 큰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기존의 조직과 매뉴얼만 유지하며 안주하고 있다. 새롭게 변화하지 못하면 화석화되고 생명력을 잃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교회를 다시 세우는 마음으로 개교회 내부에서부터 먼저 처치 플랜팅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끼리 주 안에서 유기적으로 거룩한 네트워킹이 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 그 힘으로 이웃교회를 넘어 한국교회 전체가 네트워킹을 하며 서로를 세워주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네트워크이고 세움이며 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신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네트워크 교회로 새판짜기를 해야 한다. 그 견고한 네트워크 교회 위에 부흥의 불씨를 살리고 사회적 리더십을 회복해야 한다. 특별히 반기독교적 정서와 세력을 막고 다시 목회 생태계를 복원하여 비상의 나래를 펼쳐야 한다. 한국교회여, 다시 한 마음으로 뜻을 모아 네트워크 교회론의 토대 위에 제2의 부흥 시대를 일으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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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칼럼
    2015-12-31
  • [성경인물탐구] 예수님의 제자 안드레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로서 베드로와 같이 갈릴리 해변 벳새다의 어부였습니다. 그는 세례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믿고 자기 형 베드로를 전도한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와 함께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다가 예수께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명하시면서 그들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와 같이 예수의 부름을 받자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았습니다. 안드레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모습은 단순하게 기록되었지만 그 내면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어부가 그물을 버렸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께 자신의 삶을 의탁함을 뜻합니다. 실제로 안드레의 삶은 예수께 부름 받은 후부터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 안드레는 육신의 양식을 위하여 물속에 있는 고기를 잡는 자가 아니라 죄악의 물결 속에 떠내려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건져내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안드레는 세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의 오심을 보고 안드레와 또 한사람의 제자에게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증거 하였고 안드레는 예수를 쫓았습니다. 안드레는 예수가 계신 곳에 방문하여 예수와 함께 거하면서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를 만난 후 제일 먼저 그 형인 베드로를 찾아가서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증거 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에 대한 구약 예언의 말씀을 믿고 고대하였기에, 메시아를 만났다는 것이 최대의 관심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안드레는 복음을 베드로에게 전함으로써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자질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복음을 증거 하실 때 무리가 기진하여 곤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 곳은 광야인지라 음식을 살 수도 없었으므로 예수의 제자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했습니다. 예수께서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고 물으셨을 때 빌립은 계산을 통해 그것이 불가능함을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예수께 한 아이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다고 말하였습니다. 안드레는 사람들이 굶주려 고통 받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나머지 할 수 있는 방도를 다 찾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안드레의 모습에서 그의 인정이 풍부함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났을 때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그 자리를 피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그 사람을 구한 사마리아인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만일 안드레가 사람들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았더라면 별로 효용성도 없어 보이는 일을 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드레의 인정 많음은 주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이시는 데 있어서 한 도구로 사용 받았습니다. 성도는 이웃의 고통을 안타까이 여기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가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성도의 사랑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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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1
  • [교회회계] 교회와 세금
    지난 12월 2일, 종교인 과세를 명문화한 소득세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목회자 사례비를 기타 근로소득으로 간주하여, 2018년부터 6∼38%의 세금을 부과하는 세법이 확정된 것이다. 교회는 지금까지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음으로, 교단의 유지재단에 소속되어 사업자등록을 신청하면 고유번호증(606-82-XXXXX)를 부여 받고 일정한 부분의 조세 혜택을 받아왔다. 그러나 종교인 과세를 포함, 최근 언론을 보면 학사관과 교육사업, 쉼터 공간 등 선한 취지로 시작한 교회사역이 수익목적으로 분류되어 과세대상이 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해 복음전도에 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본 교회회계 칼럼 제11호에서는 교회와 세금문제에 대해 다룬다. 조세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경비충당에 필요한 재정수입을 조달할 목적으로 과세요건을 충족한 모든 자에게 직접적 반대급부 없이 부과하는 것으로, 교회의 경우 주로 다음 사항이 관련되어 있다. 첫째 소득세(법인세)는 개인의 소득과 법인의 이익에 부과하는 세금으로, 교회 고유의 예배와 목적을 위해 발생하는 헌금수입은 과세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를 들어 교회건물에 카페를 운영하며 금액을 받거나, 학사관을 운영하며 시설유지를 위해 최소 임대료를 받는 경우 수익사업으로 간주되어 과세대상이 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특히 이 경우 과거년도 분까지 소급되어 과세될 수 경우 교회재정이 심각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둘째 취득세와 등록세는 교회 부동산 및 비품 등의 취득시에 부과하는 것으로, 교회의 종교용 재산, 예배당, 교육관, 담임목사 선교용 사택(1주택) 및 교회와 인접한 주차장(연건평 약1/4의 면적이하)은 비과세된다. 그러나 부목사 및 사찰집사 가족의 주택, 차량, 공원묘지의 취득 등록은 과세대상이다. 기도원은 종교목적으로 온전히 사용될 때 비과세된다. 또한 교회재정을 통한 부동산 취득은 모두 교회명의로 소유권 등기가 되어져야 하며, 위반시 부동산 실명제법에 의해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다. 셋째 재산세와 양도세는 교회재산의 보유 또는 처분시에 발생하는 세금으로, 취득 및 등록세와 동일하게 고유 목적에 관련된 예배당, 담임목사 사택, 주차장 등의 보유는 비과세되나, 그 이외는 과세 대상이 된다. 또한 담임목사 명의로 등기가 된 경우 재산세와 종합토지세가 과세될 수 있다. 또한 교회 고유목적을 위해 재산을 취득하였더라도 3년 이상 동 목적에 사용되지 않을 경우 재산세와 양도세가 부가될 수 있다. 넷째 부가가치세는 재화와 용역의 소비행위에 대해 부과되는 소비세로 보통 매출세액의 10%가 부과된다. 그러나 교회는 면세사업자로 고유 목적을 위해 일시적으로 실비 또는 무상으로 공급시 부가가치세가 면제되며, 부동산 임대 등 수익사업을 위해 계속적으로 공급하는 경우 과세대상이 된다. 또한 교회가 건축, 건물수리, 비품구입 등을 할 때 납품업자에게 지급하는 부가가치세액 환급은 매출세액이 없는 면세사업자이므로 없다. 다섯째 종교인 과세는 기존 교회직원의 근로소득 원천징수에 추가해, 목회자 사례비를 기타소득 중 종교인 소득으로 규정해 세금을 부과한다. 일반적으로 원천징수 대상은 ①이자소득과 배당소득, ②봉급, 상여금 등의 근로소득, ③퇴직소득, ④상금 및 강연료 등 ⑤인적용역소득, ⑥공급가액의 20%를 초과하는 봉사료 등이다. 또한 징수세액은 연말정산 시 소득자에 따라 보험료, 의료비, 연금, 신용카드 등을 추가로 공제하여 환급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원천징수를 하지 않을 경우는 다음연도 5월까지 종합소득세를 납부한다. 그리고 과세당국에 의한 종교단체 장부 확인은 종교인 소득 관련 부분에 한정하도록 되어 있다. 즉 교회는 영리는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성도의 예배 공동체로서, 고유목적 사업에 대해서는 소득세, 취득세, 등록세, 재산세 등 대부분이 과세가 면제되고 있다. 그러나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를 포함해 교회사역의 지경이 넓혀지고, 또 수익사업에 대한 경계선과 판단해석이 모호해짐에 따라 과세범위를 확대하려는 일부 시민단체의 요구나 과세당국의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일련의 종교인 과세문제가 이 시대 한국교회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교회가 지혜로워질 필요가 있다. 국가는 교회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스스로 세상을 향해 더 거룩해 지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 가는 희망찬 한국교회가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문의 sblee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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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1
  • [교회법률상식] 은퇴장로는 원로장로 될 수 없다
    [질의] 대구중노회 산하 S교회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당회가 은퇴한지 5년이 지난 P장로님을 원로장로로 세우기 위하여 공동의회를 소집하여 원로장로로 피택을 하였습니다. 노회에서 이 사실을 알고 “법적으로 안 된다.”고 하다가 결국 총회에 질의를 하였는데 총회에서는 노회가 알아서 하라는 답변이 왔다고 합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 법에 적합한지 답변을 바랍니다. (합동 대구 평신도) [답] 상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어 질의 내용의 문장에 따라 합동측 헌법으로 답한다. 1. 원로장로의 추대 절차에 대하여 정치 제5장 제5조(원로장로)에 “동일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하던 장로가 연로하여 시무를 사임할 때 그 교회가 그의 명예를 보존하기 위하여 공동의회의 결의로 원로장로로 추대할 수 있다. 단, 당회의 언권회원이 된다.”라고 규정하였다. 여기 원로장로에 대한 규정 안에 질의자가 요구하는 해답이 다 들어 있다고 본다. (1) 원로장로의 추대 구비 조건 ① 시무장로로서 시무 사임이 전제되어야 하고 ② 원로장로로 추대 시기는 시무 사임을 제출할 때이어야 하고 ③ 시무 기간은 동일한 교회에서 20년 이상 시무한 자이어야 하고 ④ 교회가 그의 명예를 보존하고자 하는 의지가 분명해야 한다. (2) 원로장로 추대 절차 ① 장로로 시무 기간이 20년 이상이 된 자로서 사임서를 제출할 때 교회가 그의 명예를 유지하고자 하면 ② 당회의 결의로 공동의회를 소집하여 ③ 투표수 과반수의 찬성으로 원로장로로 추대한다. 2. S교회 당회와 P장로에 대하여 S교회 당회가 은퇴한지 5년이 지난 P장로를 원로장로로 추대하기 위하여 공동의회를 소집하여 원로장로로 피택하였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과연 S교회 당회는 은퇴한지 5년이나 지난 은퇴장로를 원로장로로 추대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몰랐단 말인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산하의 목사와 장로들이라면 이와 같은 법리 정도는 모를 리가 없다. 따라서 이는 P장로의 과욕에 의하여 S교회의 당회가 고의적인 불법을 행함으로 교회와 노회를 어지럽게 함에 다름 아니다. 3. 대구중노회와 총회에 대하여 대구중노회가 S교회의 불법행위로 은퇴장로를 원로장로로 추대하기 위한 공동의회까지 한 것을 인지하고 “법적으로 안 된다.”라고 S교회 당회에 지도했으면 일관성 있게 하회를 지도해야지 총회에 질의를 했다고 하니 법리를 몰라서인 것은 아닐 터인데 총회에 떠넘기려는 것 같아 보이고, 총회 역시도(혹 임원회?) 불법인 사실을 알면서도 법리적인 답변을 하지 아니하고 “노회가 알아서 하라”고 하면서 노회에 떠넘기는 무책임한 행위 등은 노회 행정이나, 총회 행정의 흠결이라 아니할 수 없다. 4. 결론 원로장로의 추대는 노회의 허락이나 총회의 지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요 당회의 직무에 속한 것이므로 당회 자체에서 처리해야 할 사안이다. 다만 원로장로의 추대 사항이 당회의 직무에 규정되지 아니한 것은 1993년도 헌법 개정에 의하여 원로장로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하면서 당회 직무에 원로장로 추대 업무를 추가하여 규정하지 아니한 연유이다. 본건 S교회 당회는 은퇴장로가 된지 5년이나 경과한 P장로를 원로장로로 추대하기 위하여 당회의 결의로 공동의회를 회집하여 원로장로로 피택한 것을 무효로 하고, 대구중노회는 하회인 S교회 당회에 법리적으로 한결같은 지도를 해야 한다. 만일 이를 방치하여 S교회 당회가 은퇴장로를 원로장로로 추대하는 전예를 남긴다면 전국 교회에 확산되는 것은 물론이요 전국 교회에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혹 S교회 당회가 교회 헌법을 어기고 무리하게 P장로를 원로장로로 추대한다면 상회인 대구중노회는 S교회 당회와 당회장에 대하여 그 책임을 추궁하여 교회의 법적인 질서를 철저히 바로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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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1
  • [성공칼럼] 좁은 문, 넓은 문
    성경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며, 넓은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찾는 사람이 많지만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한번 이렇게 상상해보자. 육체가 때가 되어 죽게 되었다. 죽은 후에 천계에는 심판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서 두 개의 문을 보여주신다. 좁은 문과 넓은 문이다. 하나님의 심판 방법은 두 길을 보여주시면서 네가 좋아하는 곳으로 가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좁은 문을 택할 것인가? 넓은 문을 택할 것인가의 자유로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사람에게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다. 한 부류는 옳은 것과 진리를 알고 진리대로 사랑과 선을 행하는 좁은 길을 가는 사람과 또 다른 부류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기는 하지만 그 옳은 길을 따라 행동하지 않는 넓은 길을 가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와 학식에 관계없이 어떤 것이 옳은지, 무엇이 진실인지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결혼한 남자가 다른 여자와 음란한 행동을 하거나 또 거짓말이나 폭력을 행하면 그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옳은 대로 행동하며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 거짓과 옳지 않는 것을 하고나서 후회하고 반복하는 사람도 있다. 또 몸이 비만이어서 혈압이나 심장에 문제가 생겨서 음식을 절제하고 운동을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하자. 그러면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서 무엇이 옳은지를 알면서도 인이 배긴 습관 때문에 옳은 대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의사의 말대로 행동으로 옮겨서 건강을 회복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 육체로 있을 때 보여주는 삶의 태도는 죽음 후에 심판의 요소가 되는 것이다. 즉 내 마음속에 진리를 알고 진리대로 행동으로 옮기는 습성이 있으면 좁은 길, 생명의 길로 갈 것이다. 그러나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거짓을 선택하고 악한 길로 가는 습성이 있으면 넓은 길,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좁은 길은 무엇이며, 넓은 길은 무엇인가? 아이들이 핸드폰을 밝은 곳에서 보면 괜찮은데 불 끄고 보다가 동영상이 켜진 채로 잠을 자는 경우를 본다. 이렇게 되면 그 눈이 어떻게 될 지 걱정이다. 아이들은 이런 일이 반복되면 눈이 망가질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밤 똑 같은 일을 반복한다면 이 아이는 눈을 망가뜨리는 길로 가는 것이다. 또 새해에 자신이 어떤 결심을 한다. 이루어지지 않는 길, 안 되는 길로 가는 사람은 목표를 세우고는 놀기만 하고 즐기기만 한다. 반면에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은 밤잠을 자지 않고 연구하며 집중하여 아이디어를 찾고 기획하고 움직여서 목표를 이루어낸다. 무엇이 옳은 길이며, 진리의 길인가? 난 어릴 때는 부모님께 칭찬 듣기 위해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학교에 다닐 때는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 옳은 줄 알고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밤잠을 자지 않고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진리를 깨달은 다음부터는 진리를 아는 것이 옳다고 여겨 수많은 책을 읽고 연구하면서 살았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옳은 줄 알고 모든 심혈을 다 기울였다. 50대 중반에 들어선 지금은 그 어떤 것보다 옳은 대로 행동하는 것, 말씀대로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 선을 행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대로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믿음이란 진리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사랑과 선은 진리대도 행동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노라하고 사랑과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내년 한해는 좁은 길 즉 옳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삶 또 내 생각과 기대대로 되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서운해 하지 않고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보여주는 삶 그리고 혹시 누군가 나에게 손해를 입혔을지라도 여유 있게 받아들이면서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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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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